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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랍속의 아이들. 12 / 카톡 세상 ③

웃는곰 2025. 5. 14. 13:07

서랍속의 아이들. 12 / 카톡 세상 ③

 

 

다음날 다른 신문에 한국독립에 관한 기사가 또 실려서 보내드렸더니 답례로 차 대접을 하겠다고 했다. 처음에는 사양하다가 나는 그분과 함께 아름다운 호수를 바라보면서 담소를 나눌 기회를 갖게 되었다.

 

그분은 어려운 여건 속에서 정식 국적과 여권도 없이 동분서주하며 잃어버린 조국의 독립을 회복하기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하면서도 지칠 줄 몰랐다.

 

58세의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넘치는 정열과 젊음을 지닌 한국의 독립투사와 얘기를 나누면서 나는 조금씩 마음이 끌려갔다. 나는 어머니의 따가운 눈총을 느끼면서도 외로운 한국 독립운동가의 바쁜 일손을 돕기로 했다.

 

나는 이 당시 33세로 영어통역관 국제자격증을 가지고 있었고 속기와 타자가 특기였다.

나는 어려서 의사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사업을 물려받을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우리 부모님은 세 딸 중 막내인 나를 남자처럼 강인하게 훈련하여 사업을 계승시키려고 나를 상업전문학교에 보내고 언어수업을 위해 스코틀랜드에 유학까지 가게 했었다.

그러나 나는 그동안 연마해온 나의 특기를 가지고 자금과 일손이 한없이 필요했던 이 항일 독립투사를 위해 무료봉사를 자청한 것이었다.

 

한편, 나의 어머님은 무엇보다도 가난한 한국의 애국자에게 마음을 쓰며 성심껏 봉사하는 딸이 못마땅하였다.

더욱이 시간과 경비를 줄이기 위해 식사대용으로 날달걀에다 식초를 타서 마셔가며 독립운동을 하고 있는 저명인사가 별로 달갑지 않은 것이었다.

 

나의 어머님은 예정을 앞당겨 곧바로 나를 데리고 의 집으로 돌아왔다. 일부러 그분과 작별할 시간도 주지 않았다. 그래도 나는 어머니 몰래 그분이 제일 좋아하는 김치맛이 나는 사워크라푸트 한 병을 그분에게 전해주도록 호텔 고용인에게 맡기고 떠났다.

 

그 후 나는 어머니의 감시를 피해 아메리칸 익스프레스회사를 수신처로 하여 제네바의 그분과 서신 연락을 했다. 바로 그 해 7월초 모스크바로 가는 길에 비자를 받으러 에 왔던 리박사와 나는 다시 만날 수 있었다.

 

그분은 한국의 독립문제로 만날 사람이 많아 늘 바빴고 나도 어머니의 감시 때문에 우리가 서로 만나기는 쉽지 않았다.

그렇지만 우리는 의 명소와 아름답고 시적인 숲속을 거닐기도 했다. 어린 소년처럼 순수하고 거짓 없는 그분의 성실한 인품은 나에게 힘든 선택을 하도록 용기를 돋우어 주었다.

 

나는 사랑이라는 아름답고 로맨틱한 한국말을 알게 되었고 조용한 아침의 나라를 동경하게 되었다.

나이가 지긋한 동양신사라 아무 탈이 없을 줄 알고 합석을 했더니 내 귀한 막내딸을 그토록 멀리 시집을 보내게 되다니

하며 회한 섞인 한숨을 지으시는 어머니와 가족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국 나는 그분과의 결혼을 결심했다.

 

나는 수많은 고통의 나날과 어려움을 극복하고 다음 해인 1934108일 하오 630분 뉴욕의 몬트클레어 호텔 특별실에서 윤병구 목사님과 존. 헤인즈. 홈즈 목사의 합동 주례로 결혼식을 올렸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분의 동지들과 동포들이 외국 여성과 결혼했다고 해서 그에 대한 실망과 반발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 그때 우리들의 인간적 고뇌가 얼마나 깊고 컸는지 모른다.

 

사랑하는 가족과 동포들의 축복을 받지 못한 채 결혼했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남다른 고충과 애로가 한두 가지가 아니었고 고생을 안 해본 나는 남몰래 눈물도 많이 흘렸다.

모든 것을 참고 이해와 믿음으로 극복하며 노력함으로써 온갖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었다.

 

남편은 그간 해외에서 30여 년을 독신으로 독립운동을 하면서 사과 한 개로 하루를 견디며 끼니를 거를 때가 많았다. 심지어는 생일날 굶은 적도 있었다, 그러나 결혼 후에는 생일날만은 꼭 미역국과 쌀밥과 잡채와 물김치를 차려서 기쁘게 해 주었다.

 

무엇보다도 집에서 아내가 만들어주는 규칙적인 식사를 할 수 있게 된 것을 그분은 무척이나 기쁘게 생각하며 감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