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랍속의 아이들. 13 / 프란테스카와 이승만 신혼시절 ④
지금 와서 회상해 보면 우리들의 신혼생활은 행복했지만 온 민족의 사랑과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던 독립투사의 국제결혼에는 남다른 어려움과 말 못할 사연이 많았다.
특히 결혼 직후 나를 가장 서글프게 했던 일은 하와이 동포들이 나의 남편에게 ‘혼자만 오시라’고 초청전보를 보내왔을 때였다. 그분을 보필했던 동지들이
‘서양부인을 데리고 오시면 모든 동포들이 돌아설 테니 꼭 혼자만 오시라’
는 전보를 두 번씩이나 보내왔을 때 나는 수심 가득한 친정어머니의 얼굴을 생각하면서 남몰래 눈물도 많이 흘렸다.
그러나 자기 소신대로 행동하는 남편은 하와이 여행에 서양부인인 나를 동반해 주었다. 남편은 하와이로 가는 배 안에서 몹시 마음을 죄고 있는 나에게 ‘이번에는 우리를 환영해 줄 동지가 아무도 없겠지만 다음 여행 때는 달라질 것’이라고 위로해 주었다.
그런데 ‘이박사가 서양부인을 데리고 온다’는 소식을 듣고 수많은 동포 구경꾼들이 부두에서 우리를 맞아주었다. 그리고 이박사가 데리고 온 서양부인에 대한 동포들의 호기심과 궁금증이 얼마나 대단했던지 그 당시 하와이에 있던 한국 동포 1천명 이상이 모여 큰 잔치를 벌이게 되었다.
이 뜻밖의 모임에서 우리 부부에 대한 동포들의 노여움이 다소 풀린 것 같았다. 우리가 하와이에 머무는 동안 동포들은 자기 집으로 우리를 초대하거나 맛있는 한국음식과 김치를 보내주기도 하였다.
나는 이때 처음으로 김치와 고추장을 먹어 보고 그 매운맛에 정말 혼났다. 김치도 매웠지만 고추장은 입안에서 폭탄이 터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렇지만 김치와 고추장은 남편이 가장 좋아하는 한국음식이기 때문에 만드는 법을 자세히 배워두었다가 집에 돌아오자 나는 곧 김치부터 담가 보았다.
내가 담근 첫 번째 김치 맛은 남편의 칭찬을 받을 정도로 성공작이었으나 고추장은 실패작이었다. 이후로도 내가 담근 김치는 남편은 물론 당시 장기영 씨와 임병직 씨를 위시한 한국 손님들의 인기를 독차지 했었다.
지금의 유학생들과는 달리 김치를 담가 먹기 힘들었던 한표욱 씨 같은 동포 유학생들에게도 나는 김치를 담그면 가끔 나누어 주었다.
우리가 신혼생활을 시작할 무렵 남편은 나에게 ‘한국의 남자들은 부엌에 들어가서 아내를 도와주는 일은 하지 않는다’고 말해 주었다. 나도 친정에서 ‘정숙한 부인은 남편으로부터 부엌일을 도움 받아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을 받고 자랐다고 말했더니 그분은 무척 대견해하였다.
그 당시 나의 친정이 있는 오스트리아 빈에서도 남편들은 미국 남자처럼 부엌에 들어가서 아내 일을 도와주는 일은 없었다. 그리고 한국에서는 남편이 아내를 칭찬하거나 아내가 남편을 칭찬해서는 안 된다고 그분은 여러 번 나에게 일러주었다.
아무튼 남에게 남편에 관한 이야기는 일체 하지 않는 것이 좋고 그것이 현명한 아내의 도리라고 그분은 나에게 말해주었다.
신혼 초에 우리는 미국의 각 지방을 돌아다니며 동포들을 방문했다. 그때 윤치영 씨 내외를 방문했었는데 윤치영 씨 부인이 내게 예쁜 한복을 선사해서 입어 보니 참으로 잘 어울렸다.
한복을 입은 내 모습을 보고 남편은 무척 흐뭇해하였고 나도 한복의 아름다움을 절실하게 느꼈다. 그 이후 내가 한복을 즐겨 입게 된 것은 물론이다.
그리고 그보다 앞서 우리의 결혼식 때 나에게 한복웨딩드레스를 지어 입도록 부탁한 남편의 뜻을 따라 남궁 엽 씨 부인과 내가 친정에서 가져온 하얀 천으로 한복을 만들다가 그만 실패해서 마음 아팠던 일도 잊히지 않는 추억이다.
다행히도 아들 인수가 결혼식을 올릴 때 신부가 아름다운 한복웨딩드레스를 입은 사진을 보면서 나는 얼마나 돌아가신 남편 생각이 났는지 모른다.
나는 모든 한국의 아름다운 신부들이 서양식 웨딩드레스보다는 한복웨딩드레스를 입는다면 얼마나 더 사랑스러울까하고 생각해 본다.
신혼시절 남편과 내가 방문했던 미주의 우리 동포들은 대부분 생활이 어려웠다. 어떤 집에서는 먹을 것이 없어서 젖을 빨리고 있는 엄마와 아기가 다 영양실조에 걸린 것을 보게 되었다. 나는 그때 너무나 가슴 아파하던 남편의 모습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그리고 그토록 어려운 생활 속에서도 오직 나라의 독립을 찾겠다는 일념으로 독립운동자금을 모아서 보내는 한국동포의 뜨거운 애국심에 나는 절로 머리가 숙여졌다.
그리고 한국의 독립운동가로 유명한 남편이 왜 3등 열차나 3등 선실만을 골라서 타고 다니며 그토록 오랫동안 필사적인 독립투쟁을 계속하였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의 신혼살림도 어렵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우리는 그런대로 행복했었다. 남편은 가끔 나에게 ‘적게 먹고 재치 있는 여자로 생각되어 아내로 맞았다’고 농담을 했다.
잠시도 쉬지 않는 부지런한 성격에다 건강하고 패기에 넘치는 59세의 신랑에 비해 34세밖에 안된 나는 신경성 위병에다 변비로 신혼초에 고생을 하였다.
그러나 결혼 후 매일 새벽 남편이 권하는 냉수를 마시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신앙으로 마음의 안정을 얻고 보니 내 병은 완쾌되고 건강도 좋아졌다.
결혼 초부터 남편과 나는 매일 새벽 함께 성경을 읽고 하나님께 기도드리는 생활을 했다.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생활은 남편이 독립운동을 할 때나 대통령 직에 있을 때나 하와이 병실에서 돌아가실 때까지 한결같이 계속되었다. 지금은 남편과 함께 보던 성경을 우리 아들, 며느리와 손자들에게 가끔 읽어주곤 한다.
우리가 결혼하자 남편의 비공식 여권을 내줄 때마다 신경을 써야 했던 미국무성의 미시즈 시플리는 지겨운 나머지 나에게 남편을 설득하여 미국시민권을 받도록 하라고 말했으나 남편의 대답은 한결 같았다.
‘한국이 독립할 것이니 기다려 주시오’
그리하여 나는 남편의 조국독립에 대한 집념과 그 누구도 범할 수 없는 한국인 특유의 위엄과 민족적 자부심에 언제나 압도당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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