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방/소설

허당에 빠진 국자 / 51회-66회

웃는곰 2025. 4. 16. 13:48

미행자

다음날도 허당은 고서 한 권과 다른 책 아홉 권을 묶어 들고 정거장으로 나갔다.

맨 먼저 눈에 띄는 사람이 그 신사였다. 허당이 먼저 인사했다.

선상님 안녕하세유?”

반가워요. 이렇게 날마다 만나서 좋고 내가 좋아하는 책을 가지고 오시니 고맙고 더 좋소.”

신사는 허당이 내미는 고서를 받아들고 흡족한 얼굴로 봉투를 건네주었다.

이게 뭐여유?”

오십만 원이오.”

책을 거저 드려도 되는데 날마다 돈 받기가 그러네유.”

그렇지 않아요. 내가 찾는 책을 구해다 주시는 것만도 고마운데 거저 받을 수가 있나요. 난 갈 데가 있어서 먼저 저쪽으로 가겠소.”

안녕히 가세유.”

 

 

오늘도 사람들한테 받은 돈 9만원을 봉투에 같이 넣고 차에서 내린 할머니를 부축해 드리면서 말했다.

차타고 다니시기 대간하시쥬?”

그려, 젊어서는 안 그렸는디 나도 다 살았나벼. 총각은 누군간디 이렇게 늙은이를 도와주시나?”

시장도 하시지유?”

그려, 배도 고프고 맥도 빠져서 속이 든든할 걸 먹고 싶은데 어디 좋은 식당이 있댜?”

. 제가 안내해 드릴게유. 바로 조 뒷골목에 돼지국밥집이 있는디 아주 잘해유.”

그려, 아무데고 좋은 데가 있으면 앞장 서.”

 

 

허당이 할머니를 부축하고 국자네 식당으로 가는 뒤를 신사가 뒤를 밟고 있었다. 신사는 식당 밖에 숨어서 허당이 나가기를 기다렸다. 그러다가 신사는 허당이 나가자마자 바로 식당 안으로 들어가 국밥을 시켜 먹으면서 국자한테 물었다.

저기 노인하고 나간 총각은 누군가요?”

내 아들이쥬.”

그렇습니까? 훌륭한 아들을 두셨습니다. 아들은 무엇을 하시나요?”

아침나절은 책 곳간에서 일하고 낮에는 정거장서 손님을 모시고 오쥬.”

그렇게 훌륭한 아드님을 두셔서 행복하시겠습니다. 그 책 곳간은 먼 데 있습니까?”

아녀유. 바로 이 뒷골목 안에 허름한 창고가 있는데 거기 책이 겁나게 많어유.”

그렇습니까? 책 구경 한번 해도 될까요?”

그러슈. 내가 앞장 설 테니 따라오슈.”

국자가 곳간으로 들어서며 소리쳤다.

하필 씨, 내가 손님 모시고 왔어어.”

하필이 내다보고 깜짝 놀라 멈췄다가 물었다.

누구신데 여기꺼정 오셨대유?”

 

 

신사가 정중히 인사를 했다.

, 근처에 유명한 서점이 있다기에 한번 들렀습니다.”

여긴 서점이 아녀유. 우리는 책 안 팔어유.”

신사가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사방에 책이 엄청 많습니다. 한번 둘러 봐도 될까요?”

이때 국자가 나섰다.

손님이 보자고 하시는데 어서 보여드려어. 그래야 책을 사실 거 아녀.”

하필이 마뜩찮은 얼굴로 받았다.

여긴 서점이 아닌게 다시는 아무나 델구 오지 마.”

이때 이층에서 주문받은 책을 찾던 허당이 내려다보고 깜짝 놀라 신사한테 물었다.

여기는 어떻게 알고 오셨대유?”

신사가 대답했다.

 

 

반갑습니다. 여기서 일하시는 분이셨군요. 식당에서 식사를 하다가 이 아주머니가 자기 아들이 여기서 일한다며 안내해 주시어서 구경 왔습니다. 책이 정말 엄청 많습니다.”

하필이 국자한테 눈을 흘기며 말했다.

아무나 지 아들이여? 국밥집은 가서 장사나 혀.”

그 말에 국자가 일그러진 얼굴로 인사도 없이 팽 돌아갔다. 하필이 신사한테 말했다.

오셨응게 사무실에서 차나 한잔 하고 가슈.”

사무실이래야 아무것도 갖추어지지 않은 베니아 판으로 얽은 칸막이 안으로 들어갔다. 차는 보리차였다. 그것을 한잔 내놓으면서 부탁했다.

선상님, 여기는 아무도 모르는 곳여유. 우리가 책을 좋아혀서 여기저기서 버리는 책을 받아다 둔 것이쥬. 다시는 오시지도 말고 여기 책 곳간이 있다는 말도 허지 말어유.”

알겠습니다. 말씀대로 하지요. 이왕 왔으니 한번만 둘러나 보고 가게 해 주십시오.”

곁에서 경계의 눈으로 지켜보던 허당이 대답했다.

 

 

둘러보실 것 없어유. 내가 날마다 한 권씩 내갈 테니 그리 아셔유.”

감사합니다. 그럼 그 말씀만 믿고 돌아가겠습니다.”

신사는 곱게 돌아갔다. 곳간에 허당하고 둘이만 남자 하필이 한걱정을 했다.

하우가 아무도 모르게 허랬는디 저 사람이 알았으니 우티겨.”

알았어유. 내게 한 가지 생각이 있어유.”

뭔 생각이랴?”

내일 지나고 말씀드릴 게유.”

다음 날 아침 허당은 책 열 권을 들고 정거장으로 나갔다. 역시 신사는 일찍이 나와 있다가 인사까지 먼저 했다.

젊은이, 어제 실례가 많았습니다.”

아니여유, 이제부터는 선상님이 여기서 기다리실 것 없어유. 우리 곳간을 아셨으니 비밀로 허실 줄 믿고 그 대신 선상님 계신 곳을 알려주세유. 제가 책을 직접 갖고 가서 드릴 게유.”

그러시면 내가 편하긴 하지만 국밥집 아드님이 불편하시지 않겠어요.”

허당은 국밥집 아드님이라는 말에 기분이 뒤집혔지만 참고 말했다.

 

 

제가 드리는 말씀대로 하시지 않으면 이제 그런 책을 가지고 나오지 않을 거구먼유.”

정 그러시다면 그렇게 하시지요. 날마다 서울 이 버스 종점에서 기다릴 테니 미안하지만 이 차를 타고 오시지요. 차비는 제가 부담하겠습니다.”

그럴 것 없어유. 날마다 오십만 원씩 주시는데 차비는 제가 부담해야쥬. 낼부턴 이 차를 타고 갈 테니께 서울서 만나시쥬.”

좋습니다. 그럼 내일부터는 서울 버스 터미널서 만나기로 하시지요.”

그렇게 약속하고 다음 날 허당은 고서를 들고 버스를 탔다. 차가 터미널에 도착, 허당이 내리자 신사가 기다리고 있다가 돈 봉투를 급히 건네고 책을 받아들자마자 어디론가 부지런히 달려갔다.

 

 

허당은 그가 어디로 가는지 궁금하여 뒤를 밟았다.

그 사람은 커피숍이 아닌 다방이라는 간판이 붙은 뒷골목 다방으로 들어갔다.

허당은 살금살금 내부를 살폈다.

다방은 아주 옛날 구식 다방이었다. 네 사람 앉는 자리에 높은 등받이 칸막이가 막고 있어서 뒤쪽에 앉으면 앞쪽 사람이 안 보이는 음산한 분위기였다.

신사가 한쪽 자리에 앉자마자 머리가 하얗고 점잖게 생긴 노신사가 들어와 마주앉았다. 그 틈에 허당은 가까운 자리를 차지하고 신사와 등을 대고 앉았다.

노신사는 앉자마자 물었다.

오늘도 하나 구해 왔는가?”

신사가 굽실거리며 대답했다.

, 아주 귀한 보물을 구해 왔습니다.”

그런가. 수고했네. 어디 보자, 참 귀한 보물이야, 하하하.”

 

 

노신사가 흡족한 웃음을 흘리며 책값을 건네자 신사가 새로운 제안을 했다.

회장님, 지금까지는 건당 백만 원씩 주셨지만 제가 이 책을 구하기 위해 온 천지를 헤매다 보면 비용도 많이 들고 힘도 듭니다. 이제부터는 오십만 원만 올려주시지요.”

백 오십 만원씩 달라는 말씀이신가?”

, 그것도 공짜가 아닙니까. 지금 세상을 다 뒤져도 그런 책은 더 이상 못 구합니다.”

그건 그렇지만……. 내가 그 고서점을 몽땅 사려고 10억을 따로 준비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서점 주인이 문을 닫고 책을 다 내다 버렸다는데 어디다 버렸는지 알아야 찾지. 참 아까운 보물을 잃었어. 그래도 임자가 날마다 구해 오니 다행이긴 한데 이제부터는 150은 너무하고 권당 130만 원으로 하세.”

회장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니…….”

고마우이. 130만 원 받게. 내일 이 자리에서 또 봄세.”

 

 

노신사가 자리를 뜨면서 돈을 건네자 신사는 허리를 90도도 넘게 굽실거리며 인사를 했다.

안녕히 가십시오. 회장님, 내일 뵙겠습니다.”

신사는 기분이 좋아서 휘파람까지 불며 다방에서 나갔다. 허당도 터미널에서 버스를 타고 책 곳간으로 돌아왔다. 갑자기 어디로 가서 안 보이던 허당이 돌아오자 하필이 물었다.

어딜 말도 읎시 갔다 오는 겨?”

최송해유. 책값 받으셔유.”

하필은 돈만 주면 헤헤거리고 좋아했다.

허허허, 그려 자네가 젤여. 오늘도 59만 원이지?”

.”

 

 

하필은 돈이 생기는 대로 날마다 우체국에 가서 예금을 했다. 통장에 동그라미가 줄줄이 달라붙는 것을 보는 재미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백만 원이 들어올 때 그렇게 좋았는데 이제 오백만 원에 동그라미가 하나 더 붙었다.

오천 만원이다! 흐흐흐, 속으로는 춤을 추고 싶게 좋지만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실실거렸다.

허당은 흐트러진 책들을 정리하면서도 눈은 문쪽을 떠나지 못했다. 퇴근하여 돌아오는 하우가 머리를 뒤로 말아 올려 묶고 사뿐사뿐 걸어오는 모습이 보고 싶어서였다. 그러다가 하필이 눈에 띄면 벼락을 맞아야 한다. 하필이 아무리 그래도 허당 마음속까지는 모를 것이니 그리워하고 기다리는 비밀을 들킬 염려는 없다. 해가 질 녘에서야 하우가 들어서며 꾀꼬리 소리로 하필한테 물었다.

아빠, 허당 씨는 어디 갔어?”

허당이 이층에서 내려다보다가 잽싸게 자릴 옮겼다. 딸이 허당을 먼저 찾는 것이 불만스러운 하필이 벌레 씹은 소릴 했다.

넌 허당만 보여? 날마다 허당 허당하다가 허당에 빠지면 나오지도 못혀.”

호호호. 아빠는. 난 벌써 허당에 빠졌어.”

뭔 소릴 그렇게 하는겨? 애비한테 농담을 혀?”

농담도 재미있잖아 아빠.”

 

 

오늘도 주문서 많이 들어온 겨?”

일 잘하는 허당 씨한테 먼저 알려줄 거야.”

허우가 상냥하게 웃으며 아양을 떨자 하필은 손가락으로 이층을 가리켰다.

올라가 봐. 시시덕거리지 말고. 허당은 허당이여.”

허우가 이층으로 올라와 허당 앞에 주문서를 내보였다.

허당 씨. 우리 부자 될 거 같아요.”

허당이 주문서를 받아 들고 빙긋이 웃었다. 그 책들이 모두 곳간 안에 있기 때문이었다.

주문 폭주네유. 하우두유두!”

아임 투 하우두유두!”

허우도 따라 한 마디 따라 하고 깔깔 웃었다. 아래층에서 그 소리를 듣고 하필이 꽥 소리를 질렀다.

하우 허우 허지 마!”

 

 

다음 날 허당은 정거장에서 책 나누어주기를 마치고 서울행 버스를 탔다. 버스가 고속도로를 달리는 동안 생각했다.

그 신사가 어제는 백삼십만 원에 책을 팔고 나한테는 오십만 원을 준 거다. 더 받았으면 나한테도 더 주어야 하지 않아. 오늘도 오십만 원만 주면…….’

버스가 터미널에 도착하고 차에서 내리자 신사가 반갑게 맞이했다.

고맙소. 약속을 잘 지켜주어 고맙소.”

허당이 책을 건네기 전에 입을 열었다.

선상님, 이제부터는 책을 가지고 올 수가 없는데 우짜지유?”

왜 무슨 일이 있습니까?”

, 우리 책 곳간 주인이 그렇게 귀헌 책을 오십만 원밖에 못 받아오려면 그만 가져가라네유.”

신사가 놀란 소리를 했다.

네에? 그러면 얼마를 받아오라시나요?”

적어도 한 권당 150만 원은 받아야 헌다네유.”

 

 

신사가 파랗게 굳었다.

, 그 말이 정말입니까?”

야아.”

그건 말도 안 됩니다. 그런 고물을 오십만 원씩 주는 것도 내 주머니를 털어서 드리는 건데…….”

허당은 신사가 거짓말하는 것을 알면서도 시치미를 뚝 떼고 대답했다.그러시겠쥬. 나라도 그런 책 만 원에도 안 사겠구먼유. 그런데 우리 곳간 주인은 책에 대하여 빠꿈이라고 소문이 날 정도로 책을 잘 알고 있어서 고서를 나한테 주면서 백만 원이 넘는 보물을 그냥 거저 주는 거다 하셨거든유.”

일단 오늘은 전처럼 드릴 테니 오십만 원만 받으시고 주인어른한테 잘 말씀드리세요.”

 

좋은일인

.”

신사는 책을 받아들고 역시 어제 그 다방으로 갔다. 허당도 능숙하게 뒤를 밟아 어제처럼 신사와 등을 대고 뒤에 앉아 두 사람이 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신사가 노신사한테 말했다.

회장님, 아무래도 찾으시는 고서는 더 이상 구하기가 힘들어졌습니다. 고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돈맛을 알고 권당 삼백만 원을 달라고 합니다. 제가 무슨 재주로…….”

그건 너무하는 것 같은데 생각해 보십시다. 혹시 선생께서 욕심을 부려 보자는 것은 아니겠지요? , 오늘 것은 특별히 150만원을 쳐주겠소.”

그렇게 하고 두 사람은 다방에서 나갔고 신사는 신사대로 어디론가 갔다. 허당은 노신사가 어디로 가는 누구인지를 알아볼 심사로 그 뒤를 밟았다.

노신사는 바로 가까이 있는 높고 큰 빌딩 안으로 들어갔다. 빌딩 경비원들이 두 줄로 서서 노신사를 향해 일제히 허리를 굽히고 경의를 표했다. 대단한 지위를 가진 사람 같았다. 허당이 문 앞에서 어정거리자 경비원이 다가와 물었다.

어디를 찾으십니까?”

 

길을 찾는 게 아니구유. 지금 막 들어가신 노신사분이 누구신지 궁금혀서…….”

그 어른은 우리 회사 회장님이십니다.”

그렇게 높은 분이신 줄 몰랐구먼유. 내일 다시 찾아올게유.”

뭐 꼭 전해드릴 말씀이 있으신가요?”

아녀유. 내일 와서 뵐 게유.”

허당은 돌아서서 빙긋이 웃으며 버스 터미널로 향했다.

돌아와 책 곳간으로 들어서자 허우가 기다리고 있었다.

어디를 갔다 와요, 허당 씨.”

서울 좀 다녀 왔쥬.”

서울은 왜요?”

좋은 일이 생겨서 날마다 한 번씩 다녀올 거구먼유.”

무슨 일인데요?”

좋은 일이니께 묻지 말어유.”

하필이 이층에서 내려다보고 물었다.

책값은 받아온 겨?”

.”

 

 

빨리 올라와 주문서에 있는 책 좀 찾아봐. 꼬부랑글씨로 된 주문서는 뭐가 뭔지 모르것어.”

어른께서 모르는 걸 제가 아남유?”

허긴 그려, 허당이 뭘 알것어. 묻는 내가 바보지.”

허당이 이층으로 올라가 주문서를 들고 찾았다. 영어로 된 것이라 하필이뿐 아니라 하우도 제대로 찾지 못하고 있던 터였다. 허당이 이리저리 누비고 다니며 책을 뽑았다. 신기한 생각을 한 허우가 물었다.

허당 씨, 정말 다 알고 찾는 거예요?”

,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네유. 다행히 주문서에 있는 책들이 다 있어유.”

허우는 허당이 자기보다 실력이 월등한 인물이라는 걸 느꼈다. 그 순간 갑자기 허당 씨라고 부르면 안 될 것이라는 생각도 들어서 호칭을 오빠로 하기로 했다.

오빠!”

허당이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누가 왔나유?”

호호호, 그 사람이 왔어요.”

허당이 또 두리번거렸다.

어디 있는대유? 아무것도 안 보이는구먼유.”

허우가 손가락으로 허당을 가리키며 깔깔거렸다.

 

 

호호호, 여기 있잖아요. 내 손가락 끝에.”

허당은 다시 뒤를 돌아보았지만 아무도 안 보여서 물었다.

누가 있어유. 아무도 안 보이는대유.”

하우가 허당 눈을 찍듯이 가리키며 선언했다.

이제부터 허당 씨라고 부르지 않기로 했어요. 허당 오빠, 아니 그냥 오빠라고 부를 거예요.”

허당이 놀라서 물었다.

나를 오빠라고 부른다규?”

예스, 호호호…….”

허당은 갑자기 굉장한 대접을 받는 거 같고 기분이 업되어 소리쳤다.

하우두유두!”

호호호호.”

아래층에서 일하던 하필이 두 사람 웃는 소리를 듣고 귀를 바짝 세웠다. 이것들이 또 붙어서 헤헤거리는 게 아닌가 싶어서 호통을 쳤다.

뭣들 혀? 책은 안 찾고 왜 또 시시덕거린뎌?”

허우가 대답했다.

 

 

책 다 찾았어, 아빠.”

그럼 넌 거기서 시시덕거리지 말고 어서 내려와!”

싫어. 난 오빠하고 놀다 내려갈 거야!”

오빠? 하필이 뒤통수를 얻어맞는 충격을 받았다. 허당이를 오빠라고? 누가 지 오빠여? 하필은 부아가 나서 더 큰소릴 질렀다.

둘 다 내려와! 내가 참지 않을 겨!”

하우하고 허당이 이층에서 내려왔다. 하필이 대단한 뭐라도 할 것처럼 소리치더니 꼬리를 내렸다.

그래 꼬부랑글씨도 다 찾은 겨?”

하우가 웃으며 대답했다.

오빠가 다 찾았어. 오빠 짱이야.”

하필이 기가 차서 아무 말도 못했다. 허당이 정말 꼬부랑글씨 책을 찾았다는 것인지 의심이 갔다. 허당이 그런 글씨도 읽을 줄 안다면? 우습게 여기던 허당이 자기보다 뭔가 더 아는가 싶었지만 그래도 하우 짝은 아니라고 머릴 저었다.

허당이 책 찾느라고 수고한 것 같여. 그만 돌아가 봐.”

 

 

다음 날 허당은 고서 두 권을 들고 서울 그 큰 빌딩을 찾아갔다. 빌딩 앞에는 경비원이 경찰보다 더 멋지게 차리고 엄숙하게 출입구를 지키고 있었다.

허당이 가까이 가서 어정거리자 어제 보았던 경비원이 다가와서 물었다.

왜 또 오셨소?”

안녕하세유?”

누굴 찾으시나요?”

.”

허당은 들고 온 고서를 내밀며 말했다.

미안허지만 이 책을 회장님께 보여드리고 무슨 말씀을 허시는지 듣고 싶구먼유.”

경비원이 시커먼 고서를 들여다보며 물었다.

이것도 책이라고 가지고 오셨소?”

.”

우리 회장님이 이런 책을 보실 분 같소? 그냥 돌아가시오.”

그러시지 말고 지가 부탁드린 대로 회장님한티 갖고 가서 안 받겠다고 하시면 도로 가지고 오세유.”

허허, 참 별 사람 다 보겠네. 어디서 이런 고물딱지를 가지고 와서 하늘같은 회장님한테 드리라는 것이오?”

이때 다른 경비원이 다가와 물었다.

김씨, 무얼 가지고 그러나?”

 

 

이 사람이 구질구질한 고서를 둘씩이나 들고 와서 회장님한테 전하라고 하시네요.”

그 사람도 못마땅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비서실로 전화를 했다.

어떤 촌사람이 고서를 들고 와서 회장님을 찾는데 회장님께 말씀드려 보세요.”

비서가 뭐라고 했는지 알 수 없지만 잠시 후에 회장실에서 그 사람을 회장실로 안내하라는 허락을 받고 말했다.

일단 회장님께서 보시자고 하니 날 따라 오시오.”

허당은 경비원을 따라 엘리베이터를 타고 9층으로 올라갔다.

경비원이 비서한테 허당을 안내해 주고 돌아갔다. 깔끔하고 깜찍하게 생긴 여비서가 고서를 들고 회장실로 들어갔다. 허당은 비서실 소파에 앉아 안에서 무슨 대답이 나오나 기다렸다.

잠시 후 비서가 나와 안으로 안내했다.

회장님이 뵙고 싶다십니다. 들어오시지요.”

허당은 회장의 얼굴을 아는 터라 부담 없이 인사를 했다.

회장님 안녕하세유. 처음 뵙겠어유. 저는 허당이어유.”

회장이 의아한 눈으로 웃으면서 물었다.

농담하시는 거 아니시지요?”

. 이름이 이상혀서 그러시지유?”

하하하, 그렇소. 이름도 이상하지만…….”

회장은 속으로 웃었다. 촌뜨기 이름 같다고.

 

 

회장님, 죄송혀유. 부모님이 지어주신 이름인게 저도 우짤 수 없구먼유.”

좋아요. 허당이란 이름이 듣기는 그렇지만 정감 가는 이름입니다. 허씨는 허가 없이는 못 사는 세상의 성이라고 자랑한다는데 그 말이 정말인가요?”

그렇지유. 허가 없이 되는 일 있나유.”

하하하, 재미있는 분이시오. 그런데 이 책은 어디서 구하셨소?”

구한 게 아니라 제가 일하는 책 곳간에 수두룩하지유.”

책 곳간이라니 서점 창고 말씀인가요?”

서점이 아니구유 그냥 곳간이지유.”

거기 이런 고서가 많다는 말씀인가요?”

.”

이 책값은 얼마나 받을 생각이시오?”

거저유. 회장님한티 거저 공짜로 드리려고 가지고 왔쥬.”

고맙소. 어떻게 나를 알고 찾아왔는지는 묻지 않겠소. 고서를 가진 사람 치고 날 모르는 사람은 없으니까.”

고마워유. 저 이만 돌아갈게유.”

정말 책을 거저 주고 가시겠다고요?”

.”

 

 

책의 가치를 아는 사람은 공짜로 책을 받으면 도둑질입니다. 나를 도둑으로 만들고 가시겠소?”

그러시담 죄송하구먼유.”

잠시 기다리시오. 여기까지 왔으니 차비는 드려야지요.”

회장은 비서한테 뭐라고 일렀다. 그리고 비서가 봉투를 하나 가져다 회장한테 바쳤다.

책을 거저 준다니 약소하지만 받으시오. 그리고 내일 다른 책을 또 가지고 오시오.”

, 고맙구먼유.”

허당은 회장실을 나오고 경비실을 지나 정거장으로 가서 차를 기다리다 봉투를 열어 보았다.

어매! 이게 뭐여어?”

허당은 입을 딱 벌렸다.

독서놀이

허당은 곳간으로 돌아와 하필이한테 봉투를 내밀었다.

이거 받으시유.”

봉투가 뭔디?”

 

 

하필이 봉투를 받아들고 열어보다가 황소 눈이 되었다.

이게 뭐여? 3자 뒤에 동그라미가 몇 개나 붙은 겨?”

여섯 개가 붙었지유.”

뭘 갖다 줬길래 이런 큰돈을 받아온 겨?”

암것도 아니쥬.”

하필은 공짜로 부리면서 일은 빡시게 시켰다.

이층에 주문서 갖다 놓은 거 있응게 책이나 찾아 봐.”

하필은 양심은 있어서 속으로 되뇌었다.

내가 공짜로 부려먹는 건 아녀. 아무도 모르게 만들어 놓은 허당 통장이 있응게…….’

하필은 우체국문 닫기 전에 달려갔다. 자기 통장에 이백만 원을 넣고 허당 통장에도 백만 원을 입금하고 중얼거렸다.

다른 날은 73이지만 오늘은 특별히 31이여. 내 통장은 머잖어 1자 뒤에 동그라미가 100,000,000이 붙을 겨어. 흐흐흐 이렇게 좋은 것.”

하필이는 통장에 돈 불어나는 것만 생각하면 자다가도 웃음이 나왔다.

그 꺼벙이 허당이 책을 돈하고 바꾸어오는 재주는 이만저만이 아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자기 딸 하우하고 어울리는 것은 질색이었다.

안 뒤어. 허당인 하우 짝이 아녀. 하우는 잘난 신랑을 만나야 혀. 내매양 못생긴 허당은 허당일 뿐이여.”

퇴근하여 돌아온 하우가 이층에서 책을 찾고 있는 허당을 발견하고 귀엽고 달콤한 목소리로 불렀다.

오빠!”

 

 

허당은 오빠 소리에 그만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을 뻔했다. 무언가 높은 울타리가 헐리고 옆집 안방이 들여다보이는 듯한 아찔한 감정이 넘쳤다. 하우가 다가와 말했다.

오빠, 이제부터 재미있는 독서놀이 할까?”

독서놀이가 뭐여?”

나는 내가 좋아하는 책에서 내 맘을 퍼다 오빠한테 보내고 오빠도 좋아하는 책에서 오빠 맘을 골라 내 가슴에 담아주기.”

그게 무슨 소려?”

예를 들면 내가 좋아하는 책에서 내 말을 담아다 오빠 가슴에다 붓는 거야. 들어볼래? 이런 거……. ‘가장 큰 악에 속하는 고뇌는 자기를 해석할 수 없는 무지에서 오는 것인가 합니다. 밤이 새도록 심명의 혼란을 완성해 보았습니다. 죄를 죄와 같이 감지할 줄 모르는 저 자신을 붙들고 밤이 다 가도록 아픈 채찍을 가하였습니다. 고해(苦海)의 언덕에서 허덕이는 것이 인생의 운명이라 하오나, 허영과 패덕이 없이 선의 위무만을 동경함에도 무한의 괴로움이 연장되어 있음은 알 길 없는 법칙이옵니다.’ 이런 문구가 내 맘이고 오빠 맘에 담고 싶은 맘이야.”

 

 

허당은 짜릿한 감동을 받았다. 무언가 허우가 허당의 맘을 알아채고 하는 소리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무 말도 못했다. 하우가 더 알기 쉽게 하려는 듯 이런 말도 했다.

허당은 하우가 또 무슨 말을 하려는가 기다렸다. 하우는 무슨 책을 가지고 그러는지 알 수 없지만 달콤한 문장을 끌어다 읊었다.

우리는 서로 멀리 있으나, 한 오리 길 위에 있지 않아요? 거기서 저는 허물 많은 여성의 몸을 벗어나 광채 나는 행복을 봅니다. 고독한 즐거움 속에 당신의 음성이 저의 생명을 이끄옵고, 당신의 빛이 처녀의 생로를 밝혀 줍니다.”

허당은 하우가 자기 마음을 알고 하는 소리 같다는 생각도 들고, 무어라고 대답할 말이 없어 우물쭈물했다. 하우가 웃으며 물었다.

오빠, 이런 말 멋지지 않아?”

…….”

또 말 안 할 거야?”

 

 

아녀, 그 말은 무슨 책에서인지 읽은 적이 있는디 책 이름 기억이 안 나.”

알았어, 아무 생각 말고 내일은 이 곳간 안에서 좋은 책을 골라서 나한테 들려주고 싶은 센텐스를 읽어 줘. 그런 게 책읽기 놀이야.”

그 말은 어디서 들은겨?”

내가 지어서 한 말.”

그런 머리도 있어?”

오빠, 나 무시하는 거야?”

그게 뭔 소려. 하우가 날 무시할까 겁이 나는디.”

이때 아래층에서 하필이 불만에 차 짜증난 소리를 질렀다.

책은 안 찾고 뭔 잔소리들이 그리 많은 겨? 하우 그만 내려와. 그리고 허당도 책 다 찾았음 가 봐.”

.”

 

 

그렇게 하여 하루가 가고 이튿날이다. 허당은 고서 두 권에 동화책 두 권을 들고 서울 회장을 찾아갔다. 회장이 있는 빌딩 앞에 이르자 경비원이 쫓아와 친절하게 맞았다.

어서 오시오. 회장님이 기다리십니다.”

절 기다리신다규?”

빨리 안으로 드시지요.”

허당이 동화책을 내밀면서 말했다.

고마워유. 이 동화책은 시간 날 때 틈틈이 읽어보시유.”

그냥 주시는 겁니까?”

. 거저유. 거저.”

 

* 계속 66회 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