옆 사람 16. 기분 나쁜 여자
내가 수원으로 이사하여 무궁화호로 퇴근한 지가 6개월이 넘었다. 한 달에 20일씩 6개월 120일, 옆자리 동승자가 120명이다.
120명 중 남자가 반 여자가 반이었던 것 같은데 그 사람들이 와서 곁에 앉을 때마다 받은 인상이 다르다.
마스크를 쓰고 눈만 보이는 옆 사람, 남자들의 경우 눈썹과 눈을 보면 그 사람의 맘씨가 보였다. 예를 들면 눈썹이 M형인 남자는 너그럽고, W형은 거칠고, ―형은 친절한 편이었다.
눈매도 이렇다. M형은 사악하고 V형은 사납고
―형은 친절하면서도 간사한 편이었다.
여자들은 또 이렇다. 대개의 여자들은 눈썹이 초승달 형이 많고 가끔 M―형이 있다. 그리고 눈매는 거의가 ⁃형이고 어쩌다 V형이 있는데 V형이 신경 쓰였다.
여자 승객 60명과 동석하면서 말을 건넨 사람은 많지 않다. 할망 2분, 아줌마 6명, 그리고 나머지는 아가씨들이었다.
나는 남자는 청년이 좋고 여자는 아가씨가 좋았다. 다 늙은 사람은 싫다.
그러니 내가 어떤 존재인가 생각하면 나야말로 제 주제도 모르는 철부지 할배가 아닌가.
그러니 내 옆자리에 앉는 아가씨들은 나를 보고 얼마나 실망스러울까. 하필이면 왜 대머리 영감이야! 할 테지만 나는 반대로 젊은 사람이 좋으니 어쩌나 허허.
한번은 미끈하고 멋지게 생긴 여자가 통로를 걸어오더니 바람을 일으키며 내 옆에 털퍽 앉았다. 나는 마스크 쓴 얼굴을 보았다. V자 눈이었다.
⁃형 여자는 거의가 고운 눈매에 눈썹에 웃음이 살짝 얹혀 있어서 예쁘다. 그런데 어떤 눈은 슬픔에 젖은 듯 보이고 어떤 눈은 조는 눈이다.
나는 눈썹이 곱고 웃는 착한 얼굴을 보면 <울타리>를 건네며 인사를 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사람한테는 말을 건네지 않는다.
차에서 <울타리>를 건네준 사람은 12명쯤(120명 중에 10%) 되는데 내가 말을 걸면서 책을 내밀면 책 안 좋아한다면서도 받아들고 재미있게 읽는 사람이 많았다.
실은 책을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좋아하는 것인데 스마트 폰의 유혹에 빠져 책을 잊고 산 때문일 것이다.
내가 옆에 앉은 아가씨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 엉뚱한 소리를 했다. 그 아가씨는 털퍽 앉자마자 스마트 폰에 빠졌다.
내가 조심스럽게 <울타리>를 내밀면서 스마트 폰을 보시다가 가끔 이런 책도 보세요 하였더니 힐끗 보는데 눈빛이 늑대눈이었다. 순간 책을 주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번쩍!
그러나 말을 건넸으니 줄 수밖에. 그 아가씨인지 아줌만지 책을 받아 무릎에 놀려놓은 채 스마트 폰에 빠졌다가 수원역이라는 안내 방송이 나오자 발딱 일어나 <울타리>를 앉았던 자리에 내려놓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갔다.
나는 책을 도로 집어 들자니 부끄럽기도 하고 엄청 실망스럽기도 했다. 저런 눈빛인 여자한테는 책을 주는 게 아니었는데…….
내가 바보지, 비싼 돈 들여 만든 책을 거저 주면서 좋아하는 내가 바보가 아니면 누가 바보인가.
그 순간 실망을 하고 이제부터는 이 미련한 짓 그만 해야지 하면서도 퇴근시간에는 가방 속에 <울타리> 2권을 넣고 옆 사람 관상을 본다.
줄까 말까? 또 던지고 가면?
내가 사랑하는 책! 독자를 위해 만든 <울타리>를 던지고 간 옆 사람! 처음 만난 기분 되게 나쁜 여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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