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인생 40년 (10) / 복자야 복자야
지금은 교정 부호에서 없어진 것이 몇 있다.
글자 상태가 나쁘든가 깨진 글자가 나오면 바꾸어 달라는 일본어 の자처럼 일그러진 동그라미 표시이고,
또 엎어지고 넘어진 글자 바로 세우라는 돼지꼬리 하나짜리 부호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있는 것은 복자(覆字)라는 것인데 활자가 없어서 미처 제대로 못 넣은 글자 자리를 표시하기 위하여 아무 활자나 하나 엎어 조판하면 그것은 인쇄로 나올 때 시커멓고 못난이 일그러진 네모 점이 찍힌다.
조판한 다음 지형을 뜨고 연판을 부어 활판인쇄기에 올라가기 전에 없는 글자는 어떻게 해서든 만들어 넣어야 한다.
활자 자모(字母:구리에 글씨를 새져 거기에 납을 부어 찍어내는 글자 틀)에 없는 자 특히 漢字는 도장을 파는 사람이 글자를 새겨서 활자 높이로 만들어 복자 자리를 채운다.
인쇄를 위한 준비 과정은 지금보다 많이 복잡하다. 그런데 편집자들은 복자나 벽자(僻字)를 유념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삼국지를 맡아 편집하였는데 그 내용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 지금은 컴퓨터로 순서에 맞추어 조판이 이루어지지만 활판은 채자나 조판공이 작업을 마친 순으로 교정지가 나오기 때문에 원고를 앞에서 읽다가 뒤로 가고 뒤에 것이 먼저 나오면 그것을 먼저 읽고 하여 앞뒤가 헷갈려 책 한 권을 만들고도 내용에 어떤 사건이 있는 것은 알지만 왜 그랬는지는 모르게 된다.
이런 것은 옛날 출판을 회상하자니 격세지감이 커서 적어 본 것이고 삼국지를 만들다가 복자 때문에 굉장히 고민한 일이 있었다.
삼국지는 분량이 많고 어려운 글자가 많이 나온다. 연판을 붓고 인쇄에 올라간다는 통고를 받고 갑자기 고쳐 넣지 않은 복자 하나가 생각났다. 갑자기 가슴이 쿵하고 내려앉았다.
나는 급히 인쇄소에 연락했다.
“지금 몇 페이지 쪽을 찍고 있습니까?”
“36대째를 인쇄중입니다.”
“거기면 잠깐만 인쇄 중단을 해 주십시오. 확인할 곳이 있습니다.”
나는 택시를 타고 나는 듯이 달려가 보았다. 공장에서는 내 전화를 받고 막 기계를 세웠단다. 36대쯤이면 그 복자가 있는 부분이다. 인쇄소에 들어서자마자 복자가 있는 페이지를 찾았다.
지금 막 인쇄를 끝내고 내려놓은 그 종이 뒷장을 여는 순간 복자가 그 못난 얼굴을 내놓고 새까만 그대로 전지 한 가운데 잘 보라는 듯 눈을 깜박이고 있었다. 그것이 얼마나 크게 보였던지.
“아!”
나는 눈앞이 캄캄했다. 46전지로 3천장!
3천부가 점박이 책이 되는 것이다. 다시 찍을 것인가 말 것인가.
다시 찍자면 그 복자를(그 글자는 옥편에도 없지만 지금 컴퓨터에도 없다) 도장포에 가서 새겨야 하고 그 글자를 바꾸어 넣자면 쏘강(象眼:코끼리가 몸집은 커도 눈이 작은 것에서 연유한 말. 연판에서 아주 작은 구멍을 뚫고 거기다 맞는 활자를 끼우기 때문에 그렇게 부르는 것 같았다)도 해야 한다.
그러나 도장포들도 문을 닫았다. 책은 밤을 새워 인쇄하여 내일은 제본소로 넘어가야 한다. 나는 암담해진 채 대안을 찾지 못했다.
공장장이 말했다.
“삼국지나 한문 많은 책은 이런 일이 흔히 있습니다. 어차피 그 글자 읽지도 못하는 것 있으나 없으나 아닙니까. 그냥 넘어가시지요. 글자도 없고 종이도 다시 더 찍을 용지가 없습니다.”
나는 묵묵히 섰다가 인쇄를 시작하라고 해 놓고 복자야 복자야 하고 공장을 나와 눈을 감기로 했다.
그러나 그 복자는 40년이 지난 지금도 내 마음에서 지워지지 않고 고치지 못한 복자로 남아 양심을 아프게 꼬집는다. 그 복자는 어딘가에서 나의 부끄러운 얼굴이 되어 독자를 만날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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