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인생 40년 (12) / 지형 팔아 개를 사는 사람
하루는 박사장이 나를 부르더니 물었다.
“그 동안 자네 말 듣고 명작 소설을 만들었지만 이대로 가다가는 안 되겠어.”
“왜요?”
“무협소설은 만들어 놓기만 하면 그 날로 돈이 되는데 명작 소설은 한강에 물 붓기야.”
“아닙니다. 조금만 더 참으시면 달라집니다.”
“지금까지 삼국지, 수호지, 세계2차대전,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카뮈전집, 톨스토이전집, 여자의 일생, 대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등 안 해 본 것이 무엇인가. 셀 수 없이 많지만 다 회전이 안 돼서 더 이상 하다가는 문 닫겠어.”
“그렇다고 어떻게 하시려고요?”
“그 지형(紙型:안피지를 글자 위에 접착제로 적셔 차곡차곡 쌓아 올리고 뜨거운 압축열로 말려 글자를 꼭꼭 박아 놓은 딱딱한 종이판)을 좋은 값으로 팔라는 사람이 나타났는데……”
“파시려고요?”
“돈이 급한데.”
“파시면 안 됩니다. 조금만 참으시면 문제가 풀립니다.”
“모르는 소리야. 자네는 시장을 몰라. 편집이나 하는 사람이 무얼 알겠나.”
“아닙니다. 회전이 늦어도 명작들은 제값을 합니다. 그걸 못 참으면 뜻있는 출판은 못합니다.”
이런 대화를 나누고 얼마 안 있어 박사장은 지형을 헐값에 넘기고 그 돈으로 도사견 등 족보 있는 개라며 개를 사들이기 시작했다.
나는 그가 본시부터 출판인이 되고 싶어 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안 터라 무슨 말이든 하지 않았다.
돈을 꾸어주었다가 돈 대신 받은 지형을 누가 책으로 박아 보라고 하여 우연히 박은 책이 무협소설계에서 히트를 치는 운을 얻어 그 길로 들어선 그였으니 그에게 정상 출판은 맞지 않는 것이었다.
그는 다시 무협소설을 만들자는 것이었다. 나는 더 이상 그런 책은 만들지 않겠다고 했다. 무협소설이 무슨 책인지도 모르고 김주간이라는 사람이 모욕을 하는 말에 끝장은 보았지만 그런 책을 더 낸다는 것은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다.
지금도 내가 그런 책을 만든다면 누구보다 더 재미있게 짓기도 하고 만들 수도 있지만 나는 안 한다. 내 출판인생에 가장 부끄러운 책을 만든 것이 그 책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 날로 박사장과 헤어져 보따리를 싸고 나와 실업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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