옆 사람 7 / 가지 마! 할아버지
내가 열차에 오르는 순간 뒤를 바짝 따라오던 사람이
31번 석 바로 내 옆자리까지 와 털썩 앉았다.
나도 할배면서 내 또래 할배하고 나란히 앉는 것이 싫었다.
그 사람은 머리숱이 우거진 수풀같이 새까맣고 머리가 눈썹까지 붙은 할배였다.
그 울창한 머리숱이 대머리인 나한테는 부러운 대상이다.
그래서 속으로 그 머리숱 반만 나를 주면 피차 좋겠소 하고 생각하는데
바로 내 앞좌석 등받이 위러 하얀 이마에 반달눈썹, 예쁜 눈이 반짝하고 내밀었다.
순간 나하고 눈길이 마주쳤다. 아기가 꺄악 소리를 치며 숨었다.
나는 아기가 참 예쁘다고 생각하는데 잠시 후 또 얼굴을 쏙 내밀었다.
아기 눈과 내 눈길이 마주쳤다.
아기가 방긋 웃는 순간 옆에 할배가 손을 들어
밉다는 듯 때리는 시늉을 했다.
아기가 귀여운 소리로 옆 할배를 향해
“아저씨 미워!” 하고 나를 향해 “할아버지 좋아!”했다.
나를 좋다고 하는 소리는 반가웠지만 옆 사람한테는
아저씨라고 부르고 나한테는 할아버지라고 하는 소리가 은근히 섭섭했다.
그때 아기 엄마가 아기를 자리에 앉히며 꾸짖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면 못써” 하는 소리였고 아기는
“할아버지 좋아. 난 할아버지 볼 거야!”하더니 아이가
또 자리에서 일어나 얼굴을 쏙 내밀고 손까지 내밀었다.
나하고 손을 잡자는 신호였다.
나는 아기 손을 가만히 만져주었다. 아기가 예쁘게 웃었다.
그러나 엄마가 다시 끌어 앉히며 꾸짖었다.
“자꾸 이럴 거야!”하는 소리에 아기는
“나 할아버지한테 갈 거야!”
그러더니 엄마를 밀치고 뒷자리로 와 나한테 왔다.
아기도 나도 마스크를 하여 눈만 맞추었다.
아기가 내 무릎에 안겼다. 하얀 양털 스웨터가 보드라웠다.
아기는 나를 보고
“할아버지 이거 벗어”
그러면서 내 마스트를 잡아당겨 벗기고 제 마크도 벗었다.
뽀얀 볼에 예쁜 잎이 분꽃 같았다. 아기는 웃으며
“할아버지 모자도 벗어.”했다.
요런 깜찍한 놈 봤나. 아기가 명랑하고 밝았지만 모자까지
벗어 보라는 말에 약간 놀라면서 벗었다. 아기가 깔깔 웃으며
“할아버지 대머리야?”했다.
“그래, 대머리다. 미우냐?”
“아니, 할아버지 좋아.”
“넌 이름이 뭐냐?” 묻자
“양수빈이야.”
“몇 살?”
“네 살!”
그러더니 내 나이를 물었다.
“할아버지는 몇 살이야?”
“여덟 살.”
“그렇게 많아?”
“그래.”
옆에 할배를 가리키며 “저 아저씨는 수염이 많은데 왜 할아버지는 수염이 없어?”
“면도를 해서 없다.”
“면도가 뭐야?” 별걸 다 묻네 하고 생각하는데
“할아버지 얼굴은 왜 이렇게 생겼어?”
“늙어서 그렇다. 미우냐?”
“아니, 할아버지 좋아.”
아이가 꼬박꼬박 옆 할배는 아저씨라고 부르고
나는 할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이 불만스럽기는 해도
그 할배보다 나를 좋아한다는 것만으로 나는 위안이 되었다.
“할아버지 어디 가?”
“수원.”
“수원이 부산보다 멀어?”
“아니. 넌 어디까지 가?”
“부산 할머니한테 가.”
순식간에 20분이 지나고 방송이 나왔다.
여기는 수원입니다. 내리실 문은 왼쪽입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이도 따라 일어서며 물었다.
“할아버지 어디 가?”
“할아버지는 다 왔다. 수빈이 잘 가,”
“안 돼. 가지 마!”
아이가 나를 따라오려 하자 아기 엄마가 잡아 안으며 말했다.
“할아버지는 지금 내리셔야 해.”
“안 돼, 할아버지 가지 마.”
나도 실은 아기와 더 멀리 가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나는 거짓말을 했다.
“엄마하고 기다려. 갔다가 돌아올게.”
“빨리 와야 해.”
“알았어. 잘 가 수빈아.”
아기가 ‘가지 마’ 하는 목소리를 귀에 묻힌 채 나오면서 돌아보지 않았다.
그리고 돌아서서 인생은 그렇게 만났다 헤어지는 것,
세월의 목적지에 이르면 그렇게 헤어지는 것,
아름다운 추억도 내려놓고 사랑도 미움도
다 내려놓고 떠나는 것이 인생 아닌가.
열차가 멀리 꼬리를 감출 때까지
나는 아기를 따라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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