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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 사람 7 / 가지 마! 할아버지

웃는곰 2024. 1. 10. 20:12

옆 사람 7 / 가지 마! 할아버지

 

내가 열차에 오르는 순간 뒤를 바짝 따라오던 사람이

31번 석 바로 내 옆자리까지 와 털썩 앉았다.

 

나도 할배면서 내 또래 할배하고 나란히 앉는 것이 싫었다.

그 사람은 머리숱이 우거진 수풀같이 새까맣고 머리가 눈썹까지 붙은 할배였다.

 

그 울창한 머리숱이 대머리인 나한테는 부러운 대상이다.

그래서 속으로 그 머리숱 반만 나를 주면 피차 좋겠소 하고 생각하는데

바로 내 앞좌석 등받이 위러 하얀 이마에 반달눈썹, 예쁜 눈이 반짝하고 내밀었다.

순간 나하고 눈길이 마주쳤다. 아기가 꺄악 소리를 치며 숨었다.

 

나는 아기가 참 예쁘다고 생각하는데 잠시 후 또 얼굴을 쏙 내밀었다.

아기 눈과 내 눈길이 마주쳤다.

아기가 방긋 웃는 순간 옆에 할배가 손을 들어

밉다는 듯 때리는 시늉을 했다.

 

아기가 귀여운 소리로 옆 할배를 향해

아저씨 미워!” 하고 나를 향해 할아버지 좋아!”했다.

나를 좋다고 하는 소리는 반가웠지만 옆 사람한테는

아저씨라고 부르고 나한테는 할아버지라고 하는 소리가 은근히 섭섭했다.

 

그때 아기 엄마가 아기를 자리에 앉히며 꾸짖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면 못써하는 소리였고 아기는

할아버지 좋아. 난 할아버지 볼 거야!”하더니 아이가

또 자리에서 일어나 얼굴을 쏙 내밀고 손까지 내밀었다.

나하고 손을 잡자는 신호였다.

나는 아기 손을 가만히 만져주었다. 아기가 예쁘게 웃었다.

 

그러나 엄마가 다시 끌어 앉히며 꾸짖었다.

자꾸 이럴 거야!”하는 소리에 아기는

나 할아버지한테 갈 거야!”

그러더니 엄마를 밀치고 뒷자리로 와 나한테 왔다.

 

아기도 나도 마스크를 하여 눈만 맞추었다.

아기가 내 무릎에 안겼다. 하얀 양털 스웨터가 보드라웠다.

아기는 나를 보고

할아버지 이거 벗어

그러면서 내 마스트를 잡아당겨 벗기고 제 마크도 벗었다.

 

뽀얀 볼에 예쁜 잎이 분꽃 같았다. 아기는 웃으며

할아버지 모자도 벗어.”했다.

요런 깜찍한 놈 봤나. 아기가 명랑하고 밝았지만 모자까지

벗어 보라는 말에 약간 놀라면서 벗었다. 아기가 깔깔 웃으며

할아버지 대머리야?”했다.

그래, 대머리다. 미우냐?”

아니, 할아버지 좋아.”

넌 이름이 뭐냐?” 묻자

양수빈이야.”

몇 살?”

네 살!”

그러더니 내 나이를 물었다.

할아버지는 몇 살이야?”

여덟 살.”

그렇게 많아?”

그래.”

 

옆에 할배를 가리키며 저 아저씨는 수염이 많은데 왜 할아버지는 수염이 없어?”

면도를 해서 없다.”

면도가 뭐야?” 별걸 다 묻네 하고 생각하는데

할아버지 얼굴은 왜 이렇게 생겼어?”

늙어서 그렇다. 미우냐?”

아니, 할아버지 좋아.”

 

아이가 꼬박꼬박 옆 할배는 아저씨라고 부르고

나는 할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이 불만스럽기는 해도

그 할배보다 나를 좋아한다는 것만으로 나는 위안이 되었다.

 

할아버지 어디 가?”

수원.”

수원이 부산보다 멀어?”

아니. 넌 어디까지 가?”

부산 할머니한테 가.”

 

순식간에 20분이 지나고 방송이 나왔다.

여기는 수원입니다. 내리실 문은 왼쪽입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이도 따라 일어서며 물었다.

할아버지 어디 가?”

할아버지는 다 왔다. 수빈이 잘 가,”

“안 돼. 가지 마!”

아이가 나를 따라오려 하자 아기 엄마가 잡아 안으며 말했다.

할아버지는 지금 내리셔야 해.”

안 돼, 할아버지 가지 마.”

 

나도 실은 아기와 더 멀리 가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나는 거짓말을 했다.

엄마하고 기다려. 갔다가 돌아올게.”

빨리 와야 해.”

알았어. 잘 가 수빈아.”

아기가 가지 마하는 목소리를 귀에 묻힌 채 나오면서 돌아보지 않았다.

그리고 돌아서서 인생은 그렇게 만났다 헤어지는 것,

세월의 목적지에 이르면 그렇게 헤어지는 것,

아름다운 추억도 내려놓고 사랑도 미움도

다 내려놓고 떠나는 것이 인생 아닌가.

 

열차가 멀리 꼬리를 감출 때까지

나는 아기를 따라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