옆 사람 6 / 빈자리와 동행자
서울역 17시 31분발 부산행 무궁화 1호칸 31번 석은 내 자리다.
출발하여 10분간 달리면 영등포역인데 오늘은 옆자리가 비어 있었다.
영등포역에서 누군가가 타기를 기다렸다.
날마다 옆자리에 멧돼지만 오지 않기를 바라면서 어떤 사람이 와서 앉을까 기다렸다.
영등포역에서 승객들이 줄을 서서 들어섰다.
통로 맨 앞에 두더지 같은 젊은이가 들어서고 이어 토끼같이 예쁜 아가씨가 들어섰다.
나는 속으로 두더지는 안 돼, 토끼가 좋아 하고 토끼가 오기를 바랐지만
두더지도 토끼도 내 곁을 그냥 지나갔다.
그 뒤를 안경을 쓴 멋쟁이 기린 같은 여자가 깝쪽깝쪽 또 그냥 지나갔다.
그 뒤를 너구리 영감이 허리를 굽적거리며 들어섰다.
난 ‘영감은 싫어, 오지 마’ 했다.
그런데 그도 꺽꺽거리며 고맙게도 나를 무시하고 지나갔다.
또 백조같이 날씬한 여자가 나타났다.
나는 기대를 가지고 여기 앉아요 했지만 그녀는 오다 말고 앞자리에
날름 앉고 등을 돌려댔고, 그 뒤를 거위같이 긴 다리를 한 중년이 들어섰다.
난 당신 싫어 오지 마 했지만 그도 나를 무시하는 듯 건너편
자리에 풀썩 앉았고 결국 차는 떠났다. 내 옆자리는 승객 없는 빈자리!
오! 이럴 수가. 누군가가 옆자리에 앉아야
그 사람을 볼 건데 아무도 안 오고 나는 외로운 외톨이가 되고 말았다.
지난 날 곁에 앉았던 사람들 생각이 났다.
새까만 모자를 쓰고 굴뚝새처럼 앉았다 쌩하고 떠난 여자,
핸드폰을 서울서 어디까지 가는지 수다를 떨던 여자,
멋대가리 없이 늑대처럼 앉아 한숨만 쉬던 사내.
그런 사람이라도 와서 앉았으면 외롭진 않았을 거야.
동행자가 귀한 것이라는 걸 실감하며 생각에 잠겼다.
지구 70억 인구 중에 한자리에 와서 나란히 앉았다가 헤어지는 사람,
수많은 사람을 다 물리치고 30분도 아닌 60년을 같이 살며 사랑하고
자식 낳고 늙도록 떨어지지 않고 산다는 부부, 얼마나 귀한 만남인가.
악처도 하나님이 짝지어주신 것이고 현처도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이 아니면
그 많은 사람 가운데 부부로 만난다는 엄연한 사실이 얼마나 신기하고 귀한가.
악처 크산티페가를 만나 살던 소크라테스.
마누라가 버럭버럭 욕을 해대며 머리에 물동이를 퍼부었을 때
“천둥이 친 다음에는 비가 내리는 법이지”
했다던 철학자,
친구가 ‘그런 여자와 어떻게 사느냐 내쫓아 버리지’ 하고 말하자
“여보게, 내가 내 아내가 하는 짓을 참으면 세상에 못 참을 일이 뭐가 있겠나?”
하고 아내를 통하여 인내 철학을 배웠다면서
“결혼하여 현숙한 아내를 만나면 행복해서 좋고,
사납고 험악한 아내를 얻으면 철학자가 될 테니 아니 좋은가”
하였다는 소크라테스를 떠올렸다.
옆자리에 ‘예쁜 여자가 와서 앉으면 30분 동안 행복하고 험상궂은 사람이 와서
이상한 짓을 하면 인생을 배우게 될 테니 좋지 않은가’
이렇게 생각하면서 아무튼 혼자 가는 것보다는 미녀 꾀꼬리가 오든,
수다쟁이 참새가 오든, 뒤뚱거리는 오리가 오든,
능글맞은 너구리가 오든, 사나운 늑대, 꼬리치는 여우가 오든 기다려졌다.
누군가가 와서 내 곁에 앉는 사람은 나한테 인생을
가르칠 교사라는 것을 새삼 느끼게 하는 빈자리였다.
달리는 창가에서 밖을 내다보며 세상과 인생은 거기서 거기,
다 그런 것이지 뭐하고 생각하는 사이
“여기는 수원입니다. 내리실 문은 왼쪽입니다.”
방송 소리가 나를 차 밖으로 밀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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