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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 사람 4 / 아름다운 동승자

웃는곰 2024. 1. 9. 19:21

옆 사람 4 / 아름다운 동승자

 

나는 퇴근길에 서울역서 무궁화호 1호차 31번 석에 앉아

내가 지은 판타지 탈장르 <>이라는 제목의 책 가운데 한 곳을 읽고 있었다. 내용의 한 토막에-------

오만 원짜리 한 장에도 벌벌 떨던 내가 일억도 아니고 십억도 아니고

백억이 통장에 들어왔다. 그 기쁨을 무슨 자로 잴 것이며

그 기쁨을 무슨 그릇으로 담아낼 것인가.

그런 돈을 가져본 자만이 기쁨의 크기를 알리라

아내도 모르게 산을 사고 아무도 모르게 산을 팔아 백억을 가진 부자가 된 거다.

밥을 굶어도 배부르고 세상이 온통 내 것 같고 부러울 것이 하나도 없다.

이런 걸 행복이라고 하는 걸까?’

하늘을 보아도 웃음이 나오고 화장실에 가서도 웃음이 나온다.

친한 친구한테 자랑도 하고 싶다. 그러나 이 행복한 비밀을 어찌 알리겠는가. 절대 혼자의 비밀이다 흐흐흐’-------

 

이 대목을 읽고 있는데 열차가 영등포역에 도착했고 입구 문이 열리고 단아한

여자 승객이 들어섰다. 차림새가 깔끔하고 머리 모양부터가 교양 있게 느껴졌다.

정말 돈만큼이나 아름다운 여자였다.

 

적당한 키에 동그란 얼굴이 나를 사랑해주시는 어느 분 같은 인상이었는데,

그 여인이 바로 내 옆 좌석 32번 석 앞에 멈춰 서서

허리를 가볍게 숙이며 앉겠다는 듯한 눈빛을 보냈다.

우락부락한 사람을 만났던 기억 때문에 요조숙녀 같은 분이 와서 앉으니 기분이 좋았다.

 

40대 후반쯤 보이는 숙녀는 자리에 앉자마자 백에서 두툼한 책을 꺼내어 읽기 시작했다.

무슨 책을 읽을까 궁금하여 곁눈질로 보니 세계적 인물평론 같았다.

 

너무 얌전하고 자세가 정숙하여 감히 말 붙일 용기가 나지 않았다.

무슨 책일까 궁금하여 고개를 약간 숙이고 표지를 보고 싶었지만 볼 수가 없었다.

시간이 좀 흐른 뒤 염치 불구하고 말을 건넸다.

독서중이신데 죄송합니다. 독서를 좋아하시는가 보지요?”

여승객은 아주 겸손히 받았다.

, 저는 책을 아주 좋아합니다.”

그러시군요. 그 책은 무슨 책인가요?”

 

그분이 책 표지를 보여주었다. 내용은 한글이었는데 표지는 영어로 되어 있었다.

무슨 책인지 모르는 단어로 되어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나는 가지고 있던 스마트 북 <울타리>를 내밀면서 말했다.

혹시 이런 책 보셨나요?”

못 보던 책인데 표지 색깔이 제가 좋아하는 색이네요.”

드려도 될까요?”

그냥 주시겠다고요?”

 

, 제가 만든 책으로 스마트 폰에 빠진 사람들이 책도 좀 사랑하시라고

독서운동 차원에서 만든 것입니다. 스마트 북이지요.”

책을 받아들고 나를 의미 있게 보면서 말했다.

맞는 말씀이에요. 요새 사람들이 모두 스마트 폰에 빠져서

독서하는 사람을 볼 수가 없어요. 우리나라만 이런 현상인 것 같아요.

좋은 생각을 하셨네요. 주시는 책이니 처음서 끝까지 꼭 읽어보겠습니다.”

 

이때 안내방송이 나왔다. 수원역입니다. 내리실 문은 왼쪽입니다.

나는 무슨 이야기든 더 하고 싶었지만 일어설 수밖에 없었다.

그분은 어디까지 가는지 무엇을 하시는 분인지

알고 싶은 것이 많았는데 아쉽게 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아쉬운 인사를 나누고 차에서 내렸다.

책을 사랑하고 내 생각에 동의하시는 분을 만났다는 것만으로도

매우 흐뭇한 퇴근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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