옆 사람 9 / 아이구 답답해
17시 31분 부산행 무궁화호 1호칸 31번석.
12월 2일 승차하여 창밖을 내다보는 사이 내 옆에 한 아가씨가 나비처럼 아무 기척도 없이 들어앉아 있었다. 힐끗 옆모습을 보니 대단한 미인이었다. 흑갈색 머리에 까만 마스크를 했는데 코도 높아 보이고 눈썹도 새까만 얼굴에 피부가 백장미.
“어라? 어디서 이렇게 예쁜 아가씨가 나타났지? 30분 동안은 기분 짱이겠는데? 하이에나나 담배통 돼지하고 앉아가는 기분보다 얼마나 다행인가.”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해도 미인임은 틀림없었다. 그래서 곁눈질을 하며 지켜보니 스마트 폰을 들고 있는데 무슨 국회의사당 같은 큰 건물 사진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영국 국회의사당 같기도 하고 독일? 프랑스? 왜 그런 것들만 들여다보고 있을까?
“이 사람은 책을 안 보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한테 <울타리>를 안겨주어 책을 보게 해야겠다.”
이렇게 생각한 나는 가방에서 울타리를 꺼내들고 말을 건넸다.
“아까씨, 실례합니다. 책 읽기를 좋아하지 않으시는 것 같은데…….”
파란 눈의 아가씨가 얼굴을 내게 돌렸다.
“이크, 이게 뭐야? 우리나라 사람이 아니잖아!”
아가씨가 웃는 얼굴로 나를 보며 뭐라고 했다. 잘 알아들을 수가 없어서 어느 나라 사람이냐고 물었다. 그녀는 웃으면서 “독일!” 하고 한 마디. 내가 울타리를 잘못 내밀었구나 생각하며 물었다.
“한글을 아시나요?”
“한글, 조금 몰라.”
“그럼, 이 책 여기 한번 읽어 볼래요?”
내가 들고 다니며 읽는 책 중 <아빠하고 엄마하고 쌈이 났어요>라는 동화 제목을 보여주었다.
아가씨는 웃는 얼굴로 그 제목을 또박또박 읽으면서
“나 한글 조금 몰라.”했다. 나도 반말로 물었다.
“이 책 받아!”
울타리를 내밀자 고맙다는 눈으로 “나 가져?”한다.
“그래 가져, 그리고 읽어 봐. 이 책은 책읽기 안 좋아하는 사람들한테 주는 책이야.”
그녀는 내 말이 길어지자 못 알아듣는 듯 독일말로 뭐라고 대답하는 것 같은데 알 수가 없었다.
독어는 고등학교 때 제2외국어 선택으로 쥐꼬리만큼 배운 게 전부인데다 다 까먹고 겨우 데르데스뎀뎀 뭐 그런 알파벳 몇 개만 머리에 남았으니 내가 그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어서 입을 다물었다.
그녀가 물었다.
“독일 알아?”
“알아, 나 독일 두 번 가보았어.”
“어디 갔어?”
“쾰른, 함브르크.”
그랬더니 웃으며 좋아했다.
“퀠른 @#$%^!@#$^& 어쩌고 저쩌고……”
하는데 또 멍청.
내가 바보처럼 바라보고 있으니 웃는 눈으로 바라보기에 “어디까지 가?” 했더니 무슨 소린지 대답을 하는데 알 수가 없어서 멍청해 있자 스마트 폰을 내밀었다.
전자 예매 서울에서 구미 1호차 32번 석이라고 되어 있었다. 나도 31번 석을 보여주었더니 소리 내어 웃었다. 우리는 동행자라는 생각으로 웃는 거 같았다.
이렇게 몇 마디 하고 그녀는 한손에는 울타리를 들고 다른 손에는 스마트 폰을 들고 또 그 의사당 같은 건물만 들여다보았다. 나는 그 장면을 살짝 촬영했는데 실패. 그리고 20분 동안 이따금 서로 웃음을 주고받았고 나는 무슨 말인가 하고 싶었는데 못하고 그녀가 뭐라고 말하면 알아들을 수가 없어서 그냥 아이구 답답해, 답답해하는데 여기는 수원역입니다.
내가 일어서자 아가씨 발딱 일어서는데 앉았을 때는 나보다 작은 키 같았는데 수숫대처럼 쭉 뻗은 다리에 장신이었다.
그리고 얼굴이 좀 전에 웃던 얼굴이 아니었다.
단정하고 정중하게 길을 열어주며 바라보는데 갑자기 정이 뚝 떨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데 못 알아듣고 굿바이 하려다, 그저 반말로 “잘가!” 한마디를 하고 내렸다.
그리고 갑자기 그녀는 왜 그렇게 엄숙해졌을까? 그게 돌일 인사법인가?
우리나라 사람은 헤어질 때 웃으며 ‘안녕’하는데 어째서 그녀 얼굴은 그렇게 굳어 있었는지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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