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필 허당에 빠진 국자
하필 허당에 빠진 국자 / 1. 바보가 만든 바보
바보가 따로 있나 우물쭈물하다 보면 바보가 되지.
나이가 삼십이나 된 허당은 밥만 먹으면 버스 정류장으로 나간다.
그 또래에 친구들은 장가도 가고 자식도 낳고 직장도 다니는데 허당은 날마다 헛발 짓만 하고 다닌다.
양천 허씨에 외자 이름을 짓다 보니 넒은 마당처럼 잘되라고 마당 당(堂)이라고 할아버지가 지어 주셨다. 허당은 매일 아침나절은 시외버스 정류장에 나가 어슬렁거린다.
그러다가 맨 먼저 차 타러 나온 사람을 만나면 인사를 한다.
“안녕하슈?”
낯선 사람의 인사를 받은 사람이 어리둥절하다가 마지못해 인사를 받는다.
“네, 네.”
“어딜 가신대유?”
“서울 갑니다.”
“서울은 왜 가슈우?”
“아들네 집에 갑니다.”
“아들이 몇이나 되슈?”
“삼형제가 있는데 큰아들이 서울 살아서…….”
“아들은 지금 몇 살이나 되슈?”
“서른 살입니다.”
“나하고 동갑이쥬?”
“그렇지요.”
“아들이 잘해 주나유?”
“잘해줍니다. 효자지요.”
“지금 세상에 효자가 어디 있슈. 다 허당이쥬.”
“네?”
“효자라면서 아버지가 앉아서 ‘아들아 내려오너라’ 하시면 될 것을 거꾸로 아들을 보러 먼 길을 가신다규?”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요.”
“다 허당이쥬.”
“허당이 뭐요?”
“내 이름이쥬.”
“이 분이 왜 이러시나?”
“다 허당이쥬. 허당.”
“허당?”
“야. 허당이쥬.”
“허당 허당 하지마시오.”
“왜 그러슈? 허당이 뭐 잘못 됐슈?”
“허허, 허당이라더니 허당이로군.”
그 사람은 기가 막혀서 차에 오르며 비웃는 소리 한 마디를 던졌다.
“허당!”
허당이 손까지 저으며 인사를 했다.
“허당 어른! 잘 가슈!”
차에 오른 사람이 혼잣말을 했다.
“허허, 내가 원!”
옆에 동석한 사람이 인사를 했다.
“허당어른, 이렇게 한자리에 앉게 되어 반갑습니다.”
“네? 내가 허당이라고요?”
“죄송합니다. 허당어른.”
“허허 내가 허당이 아니고요.”
“압니다. 다 들어서 압니다. 아드님이 인사하는 소릴 다 들었습니다. 허당어른.”
“허허 내가 허당이 아니라니까요.”
“괜찮습니다. 허당이면 어떻고 천당이면 어떻습니까. 부끄러워할 것 없으십니다. 이름이 좀 이상하기는 하지만 허씨들은 원래 외자 이름을 짓다 보면 별 이름을 다 짓지요.”
“나를 정말 허가로 아시오?”
“그렇지요. 허가 없이 세상에 되는 일 있나요?”
“난 허가가 아니라 장가요.”
“장가도 허가 없이는 장가 못 갑니다. 허가야 말로 세상에서 가장 좋은 성이지요.”
“허허. 세상에 이런 허당이 있나.”
“부끄러워할 것 없으십니다. 허당어른.”
(다음에 계속)
하필 허당에 빠진 국자 / 2. 하필이면 국자가
허당은 좀 모자라는 데가 있지만 사람이 착해서 잘 웃고 아무나 붙잡고 인사도 잘한다.
오늘도 정거장에서 어슬렁거리다가 보따리를 들고, 이고 오는 아주머니를 발견했다.
“아주머니 무거우시쥬?”
“그건 왜 묻는댜? 도와주려우?”
“야, 도와드려야쥬.”
“아이고 고맙기도 혀라.”
아주머니가 이고 있던 보따리를 내맡겼다. 생각보다 무거웠다. 허당은 허리가 휘청한 채 물었다.
“아주머니 이 무거운 걸 우떠케 이고 오셨대유?”
“그려서 목 빠지는 줄 알았구먼.”
“무거운 걸 이셨는데 목이 들어가지 않고 빠진다규?”
“그 말이 그 말여.”
“어디꺼정 가시는대유?”
“오산까지 가는디 버스가 몇 시에 있는지 알 수가 없당게.”
“내 금방 차 시간 알아 올튜. 기달리슈.”
허당이 부지런히 안내판 앞으로 가 버스 시간표를 보고 돌아와 보니 어떤 분하고 아주머니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아주머니가 큰소리로,
“하필이면 하필이를 여기서 만날 줄 누가 알았댜.”
그분도 반가운 듯 인사를 했다.
“참말 반갑구머언. 국자를 예서 만날 줄 몰랐구머언.”
아주머니가 물었다.
“하필이, 여긴 우떠케 왔댜?”
“저기 네거리 모퉁이에서 책방을 햐, 아나아?”
“그려, 요새 책이 안 팔린다는디 책방 혀서 뭘 먹고 산댜? 흙 파먹고 사는겨?”
그 사람이 눈을 번쩍 뜨고 물었다.
“그걸 우찌 안겨?”
“소문이 자자헌디 그걸 보르면 사람이 아녀.”
“하하, 큰일 났구머언.”
“그게 무슨 소리랴. 하필이가 왜 큰일이랴?”
“내가 그 소릴 들응게 기가 차구머언.”
“하필이면 왜 책장살 한댜?”
“하필 하필 하지 마아. 남새스럽게에.”
“그렇구먼, 하필이면 하필이 앞에서 그 소리가 이름인 줄 깜박혔구먼.”
“국자는 또 어떠코오, 하필이면 누가 국자라고 이름을 지어주었는지 모르지마안……, 좌우당간 요새 우리 가게 뒷골목의 국자 이름과 똑같은 국자돼지국밥집이 생겼는디 장사가 엄청 잘된댜.”
“국자, 국자 혀지 마. 그 국밥집이 내집잉게.”
“뭣이? 그 주인이 국자라는겨어?”
“왜 그리 놀란댜? 우리 집에 한 번도 못 왔구먼.”
“나는 그런 고급 음식 먹을 처지가 못뎌어……,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은 들었지만 코 앞에 국자가 있는 줄은 몰랐구머언.”
“내가 언제 코앞에 있댜? 하필이 뒤통수에 있는디.”
이때 허당이 시간표를 알아가지고 오다가 그 소리를 듣고 물었다.
“뭔 국자가 코앞과 뒤통수에 있대유?”
하필이 묻자 그 어른이 대답했다.
“이봐 젊은이, 어른 이름 함부로 부르면 안 된다는 것도 몰러어?”
“내가 언제 어른 이름 불렀깐듀? 국자가 앞뒤에 있다는 소리가 궁금혀서 물었쥬.”
아주머니가 허당한테 물었다.
“차 시간은 알아봤슈?”
“야. 바로 있대유. 가시쥬, 제가 차까지 짐 들어다 태워 드릴게유.”
“고마워서 어쩌나 젊은이.”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하필이 국자한테 물었다.
“이 사람은 누구여어?”
“나두 몰러. 오산 다녀와서 책방 한번 가 볼겨.”
(다음에)
하필 허당에 빠진 국자 / 3. 왜 남의 이름은 불러?
차가 떠났다. 그 어른이 허당을 잡고 물었다.
“어디 사는 누구랴아?”
“저기 파란 대문집 사는 허당이유.”
“허당? 어른 놀리나아?”
“아녀유. 성은 허가이고 이름은 당이라 다들 허당이라고 불으쥬.”
“허당이라아. 내 이름보단 낫구머언.”
그러자 허당이 물었다.
“하필이면 왜…….”
하필이 노여운 얼굴로 말했다.
“뭐라구우? 허허, 이 사람, 언제 내 이름까지 알았던겨어?”
허당이 이상하다는 듯 갸웃거렸다.
“어르신 이름이 뭔디유?”
“알면서 물어어?”
“모르는듀.”
“금방 하필이라고 안 혔어어?”
“하필이 허당보다 좋은 이름 같아서 하는 소리였는디 왜 그러슈?”
“앞으로 하필이라는 말은 하지 마아.”
“아저씨가 뭔디 남이 말도 못하게 한대유?”
“그런 게 있어어. 지금 어디 나가는 데라도 있는가아?”
“없슈.”
“없으면 나 좀 도와 줄려나아?”
“그러쥬. 뭘 도와드릴까유?”
“날 따라 와 봐아.”
하필 허당에 빠진 국자 / 4. 이게 다 뭐랴?
“알았슈. 아저씬 뭘 하시는듀?”
“와 보면 알아아.”
하필이 부지런히 앞질러 걷는데 허당이 껑충껑충 따랐다. 하필이 커다란 건물 안으로 들어가며 말했다.
“여기가 말여어, 내 사업장이여어.”
둘러보니 문 앞에서부터 마당과 큰 창고 같은 지붕 아래 추녀 끝까지 책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허당이 입을 딱 벌리고 감탄했다.
“와아아! 이게 다 뭐랴유우우?”
하필이 대답했다.
“책이지 뭐여어.”
허당이 놀라 지껼였다.
“뭔 책이 이렇게 만텨?”
“이렇게 많은 책 첨 보지이?”
“야. 이게 다 어디서 난 거유?”
“줏어왔어어.”
“어디서유?”
“출판사에서 그냥 가져가라는겨.”
“출판사는 흙 파먹고 사나유.”
“그건 나도 몰러어. 예서제서 책 가져가라는 출판사가 한둘이 아녀어.”
“그럼 이게 서점인가유 책방인가유?”
“그게 그거여어. 책방들이 장사가 안 뒤야서 다 문을 닫으면서 나한테 가져가라고 혀서 그냥 실어온겨어.”
“남들이 안 된다는 책을 잔뜩 뫄두면 누가 사간대유?”
“사가는 사람이 있으면 좋을 텐디 욕심이 나서 여기저기서 주는 대로 다 받아다 쌓아놨더니 골치여어.”
“골치 아픈 짓은 왜 했슈?”
“나두 몰러, 버린다기에 모두 공짜라 좋아서 다 가져다 모았는디이.”
허당이 전체를 둘러보고 생각했다.
‘안 팔린다고 문 닫는 서점이 있고 사람들도 책을 안 보고 스마트폰에만 대가리를 처박고, 그러다가 오는 사람 가는 사람 부딪치는 세상인디…….’
허당이 물었다.
“주인어른 이렇게 하면 어떨까유?”
“뭐어얼?”
“여기 쌓아두고 썩히는 거라면 좋은 일이나 하쥬.”
“무신 생각이 있어어?”
“나한테 책 열 권만 주실래유?”
“열권 아니라 백 권도 가져가아. 그 대신 저쪽에 있는 책을 다락방에 들여놓고 맘에 드는 놈으로 아무 것이나 맘껏 골라 가져가아.”
“알았슈.”
허당은 주인이 하라는 대로 다 해놓고 책을 골랐다. 모두 새 책이고 표지 그림도 다 예뻤다. 그 중에 동화책과 처세술과 시집, 소설책 수필집 이것저것 골라 열 권을 들고 나섰다. 하필이 물었다.
“어딜 가아?”
“기달류. 잽싸게 다녀올탱규.”
하필 허당에 빠진 국자 / 5. 거저여유. 거저
허당은 책을 안고 정거장으로 달려갔다. 대합실에서 차를 기다리는 사람을 둘러보다가 점잖고 착하게 보이는 신사 앞으로 갔다.
“어르신님, 차 기다리시는데 지루하시쥬?”
“예. 차가 너무 오래 안 오네요.”
“그러시면 이 책 가운데 하나만 골르슈.”
“사라고요?”
“아뉴, 책 팔러 온 게 아니규. 차 기둘리다가 심심하거나 지루혀 하는 분들한테 차가 올 때까지 잠깐 보시라고 빌려드리는 거유. 보시가다 차가 오거든 돌려주고 가슈우.”
“고맙소. 그렇지 않아도 핸드폰을 두고 나왔더니 지루했는데.”
신사분이 책을 받아 들고 들여다보았다. 두 사람이 나누는 소리를 들은 옆에 아줌마가 한 마디 했다.
“정말 차 기다릴 동안만 보다가 가라고 빌려주시는 건가요?”
“야. 아주머니도 드릴까유?”
“그래요. 그 동화책 <행복을 파는 할아버지>를 빌려주세요.”
그 소리에 또 옆에 아가씨가 수줍게 다가오더니 시집을 손짓하며 물었다.
“저도 그 시집 좀 빌려주실래요?”
“고마워유. 얼른 읽어보세유.”
이 사람 저사람 공짜로 빌려준다니까 열 권이 금방 나가고 없는데 다른 사람들이 또 빌려달라는 거였다. 그러나 책이 더 없어서 미안하다고 굽실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 사이에 차가 왔다. 신사가 보던 책을 중단할 수 없게 되자 돌려주지 않고 말했다.
“미안합니다. 내가 보던 것을 마저 봐야겠어요. 이 책 얼마나 드리면 될까요?”
“그러시면 그냥 가져가세유.”
“아니지요. 귀한 것을 그냥 가져갈 수는 없지요. 차가 와서 급하니 이거라도 받고…….”
신사가 만 원짜리를 쥐어주고 차에 올랐다. 그 뒤를 이어 동화책을 보던 아주머니가 급히 말했다.
“이렇게 좋은 동화책은 우리 손자가 봐야 해요. 저도 사갈게요. 책값이 얼만가요?”
“거저유. 가져가세유,”
“책은 거저 가져가는 거 아니에요. 만원만 드릴게요. 이해해 주세요.”
뒤이어 아가씨가 시집을 들고 말했다.
“아저씨 이 시집 얼마예요?”
“거저여유. 거저.”
“거저가 어딨어요. 만원만 드릴게요. 괜찮지요?”
“너무 많츄 아가씨!”
또 다른 사람이 차에 오르면서 아무 말 없이 책을 들고 가면서 만원을 내밀었다. 책 열권이 잠깐 사이에 다 나가고 주먹에는 만 원짜리 돈만 열 장이 잡혀 있었다. 허당은 돈을 추려 들고 말했다.
“세상에 거저는 없는겨. 사람들이 책을 이렇게 좋아하는디 왜 책방이 안 된다는겨?”
허당은 책 곳간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하필이 앞에 돈을 내밀었다.
“이거 받으슈.”
“이게 뭐랴?”
“돈이쥬.”
“책은 어쩌고오?”
“다 나눠 줬쥬.”
“그게 무신 소리여어? 자네가 나한테 책값을 준다는 말여어?”
**
* 하필 허당에 빠진 국자 / 6. 아따, 국자가 출세했구먼
“지가 무슨 돈이 있어서 사나유.”
“그럼 이건 뭐여어?”
“돈이쥬.”
“책은 우째고오?”
“다 나눠 줬쥬.”
“자네 이름 허당이 맞지이?”
“야.”
“좌우당간 돈이 생겼승게 점심이나 실하게 먹지이.”
두 사람은 뒷골목의 유명한 국자돼지국밥집으로 갔다.
국자돼지국밥집은 생각보다 넓고 좋았다.
하필이 들어서서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씨부렁거렸다.
“아따, 국자 출세했구머언. 이렇게 큰 식당 주인이 아닌가베에.”
허당도 입을 다물지 못했다.
“국자라더니 국자가 쉴 새가 없것구먼…….”
이때 국자가 다가오면서 반가워했다.
“어서와 반갑구먼. 하필이, 이 사람을 어떻게 여기까지 델려 왔댜?”
“난 손님으로 온 건게 하필 하필 하지 말어어.”
국자가 허당한테 인사를 곁들여 이름을 물었다.
“총각, 아침에 고마웠슈. 그런디 이름이 우찌 되나유?”
“허당이어유.”
“허당? 뭔 이름이 그려? 진짜 이름은 뭐유?”
“허당이쥬.”
“호호호, 허당이 뭐여, 하필이면 좋은 이름 두고 허당이랴, 호호호.”
하필이가 불만스럽게 말했다.
“왜 자꾸 하필 하필 하는겨어. 터놓고 말혀 하필이도 그렇고 허당도 그런디 웃기는 건 국자여어. 국자가 뭐여어.”
국자가 대답했다.
“국자가 워뗘서 그려. 국자가 국밥집하고 국자로 장사만 잘하는디. 하필이 이름이 문제여.”
“허허, 모르는 소리 마아. 하필이는 우리 할아버지께서 지어주신 이름인디 물하(河)자에 붓필(筆)자로 이담에 먹물에 붓 말리지 말고 공부 많이 혀라고 지어주신 이름여. 함부로 부르는 이름이 아녀어.”
“그려? 그러고 봉게 하필이가 대단한 이름가텨?”
하필이가 좋아서 받았다.
“암, 국자보다야 훨씬 존 이름이지.”
국자가 가만히 있지 않았다.
“모르는 소리 말어, 나도 우리 할아버지가 지어주신 이름인디 나라국(國)자에 도자기자(瓷)여. 나라에서 알아주는 귀헌 그릇이 되라고 지어주신 이름이여, 함부로 국자, 국자 하지 마.”
하필이 허당한테 눈길을 돌렸다.
“자네 허당이라 혔지이? 그 이름도 뭔 뜻이 있는겨어?”
“있쥬, 나도 할아버지가 지어주신 이름이쥬. 세상에 허가 없이는 되는 일이 있깐디요. 허가가 세상에서 가장 높은 성이라고 했슈. 그러시며 내 이름은 마당만큼 넓게 부자되라고 마당당을 정하여 허당이라고 지어주셨쥬. 이름이 허당이라고 헛소리만 하진 않츄.”
하필이는 국자를 가리키고 국자는 하필이한테 손짓하며 큰소리로 웃어댔다.
“호호호, 하필이와 국자가 허당에 빠진 거 아녀, 하하하하.”
*11/15
하필 허당에 빠진 국자 / 7. 하필이면 거기를 만져서
그렇게 하여 점심을 잘 먹고 나오는데 멋쟁이 아가씨가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오다가 허당이 발에 걸려 털썩 주저앉았다. 허당이 당황하여 아가씨를 잡아 일으켜 준다는 것이 그만…….
책 곳간으로 오면서 허당이 말했다.
“하필이면 왜 내가 처녀 거기를 만졌는지…….”
하필이 꽥 소리쳤다.
“하필, 하필 하지 말랬지이. 하필이면 여자가 가장 부그러워하는 거기를……. 쯧쯧.”
“아저씨도 하필 하필하면서 왜 나만 못하게 한대유?”
“앞으로는 조심혀어.”
책 곳간에 도착하자 허당이 말했다.
“아저씨, 하필이면 왜 책방을 한 대유?”
“허허 또 하필.”
“죄송혀유. 아직도 정거장에는 사람들이 많을긴게 책 열 권만 주세유. 어차피 못 파는 책 날마다 정거장에 가서 인심이나 써야겠슈. 됀찮지유?”
“맘대로 혀. 그 대신 내일 문 닫는 서점에서 책 가지러 오라고 혔어. 나하고 같이 가서 실어오기로 하면 우뗘어?”
“좋지유. 그럼 오늘 열 권만 가지고 갈게유.”
허당은 정거장으로 나갔다. 역시 정거장에는 오는 차 가는 차를 기다리는 사람들로 붐볐다. 허당은 긴 의자에 앉아 있는 젊은이한테 가서 말을 건넸다.
“차 기다리기 지루하시쥬?”
“예. 차가 연착한다고 하니 한참을 기다려야 할 것 같아요.”
“그러시면 이 책 중에 맘에 드는 거 하나 집으세유.”
“사라고요?”
“아녀유. 보시다가 차가 오거든 돌려주고 가세유.”
그 소리를 옆에 들은 부인이 물었다.
“정말 거저 빌려주시는 거예요?”
“야. 거저 보시라는 거유. 그 대신 차가 오면 저한테 꼭 돌려주고 가셔야 혀유.”
“알았어요. 저 ‘행복이 주렁주렁’이라는 동화책을 빌려주세요.”
“그러쥬. 보세유. 그 대신 차가 오면 꼭 돌려주셔야 혀유.”
이때 아가씨가 다가와 시집을 가리켰다.
“저 ‘추억의 울타리엔 경계가 없다’라는 시집 좀 빌려주세요.”
“고마워유. 보시고 있다가 차가 오면 꼭 돌려주고 가세유.”
“알았어요. 꼭 돌려드리고 갈게요.”
공짜라면 양잿물도 먹는다더니 이 사람 저 사람 달려들어 다 빌려갔다. 정거장에 책 보는 사람들이 주르르 늘어서니 보기도 좋았다.
허당은 날마다 이렇게 책을 빌려주고 좋아하는 사람한테는 거저 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한 시간쯤 지나서 서울 가는 차가 들어왔다. 젊은 사람이 책을 보다 말고 다가와 말했다.
“아무래도 이 책 사가야겠습니다. 한참 재미있는 장면이 나오는데, 책값이 얼마지요?”
“그렇게 좋으시면 그냥 가져가세유. 거저.”
“세상에 거저가 어디 있습니까. 이런 책이 있는 줄 몰랐네요. 차가 와서 급해요 작지만 이것만 드리고 갈게요.”
그 사람이 차에 오르는 뒤에다 대고 말했다.
“아니여유. 거저, 가져가세유.”
이때 뒤따라 차에 오르는 아주머니가 말했다.
“행복이 주렁주렁 매달렸다는 이야기가 너무 재미있어요. 미안하지만 이것만 받으세요.”
그리고 아주머니가 만 원을 쥐어주고 차에 올랐다. 뒤따라 급하게 서두는 아가씨가 시집을 들고 말했다.
“이 시집 너무 좋아요. 저도 앞사람처럼 만원만 드려도 되지요?”
“아니여유. 그냥 가져가세유. 거저유 거저.”
“책은 거저 가져가면 안 돼요. 고마워요.”
아가씨가 가고 나자 뒷사람들이 급히 만원씩을 주고 다 차에 올랐다. 허당은 주먹에 쥐어져 있는 돈을 추리면서 중얼거렸다.
“참 이상한 사람들이여. 보다가 돌려달라는데 거저 준대도 싫다고 돈을 내는 사람들이 우찌 이리 많은가 모르것네. 세상 사람들이 모두 책을 억수로 좋아하는 줄은 몰랐구먼.”
허당이 책 곳간으로 달려가 하필이 앞에 돈을 내밀었다.
“이거 받으슈.”
“뭐여어?”
“돈이쥬.”
“또 돈이여어?”
하필 허당에 빠진 국자 / 8. 나도 장사 한번 해보자
하필이 생각해 보니 정거장에만 가면 책이 잘 파리는 모양이라. 그래서 나도 한번 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다음 날 리어카에 책 천 권을 싣고 중얼거렸다.
‘이렇게 징그럽게 많은 책 나도 장사한번 해 볼 거여어. 허당이 열 권 가지고 만원씩에 다 팔았으니 나는 염가로 한탕 뛰어 볼겨어. 좋은 책을 한 권에 1000씩 싸게 판다면 공짜지, 그럼 책 안 사갈 사람이 어디 있간디. 천 권이면 눈 껌쩍헐 사이에 백만 원이 들어올 거구먼. 허당 땜시 책 장사 제대로 하게 생겼어어.’
하필이 깨끗하고 두꺼운 책 1000원을 골라 싣고 정거장으로 나갔다. 사람들은 바쁘게 오가는데 누구 하나 들여다보는 사람이 없었다. 아침부터 점심을 굶어가며 오정이 한참 지났지만 한 권도 팔지 못했다. 그래서 사람들한테 한 권에 천원, 천원 하고 소리쳤지만 그것도 허사였다.
도로 끌고 돌아가자니 좀 부끄러운 생각도 들고 기분도 상해서 ‘에따 거저라도 나누어 주고 가자. 허당도 나누어 주었다는디 돈을 받지 않았남.’하고 지나가는 신사한테 책을 내밀었다.
“이 책 거저유. 받으시유.”
그 사람은 들은 체도 않고 지나갔다. 이번에는 나이가 지긋한 사람이 다가오기에 책을 내밀었다.
“선상님, 이 책 좋아요 받아가슈.”
그 사람이 눈을 부릅뜨고 말했다.
“이 사람 왜 이래? 내가 언제 책 달랬소?”
기분 나쁘게 한마디 던지고 눈을 흘기고 지나갔다. 이번에는 젊은 아기엄마가 오기에 다가가 책을 내밀었다.
하필 허당에 빠진 국자 / 9. 엉엉 울고 싶은걸
“이거 받으슈. 거저유 거저.”
“지금 누가 책을 본다고 그래요. 거저도 싫어요. 스마트폰 보기도 바쁜데 별꼴이야.”
보기보다 예쁘고 단아한 젊은 댁이 정나미 떨어지는 소리를 하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 버렸다. 하필은 기가 차서 누구한테 거저 주겠다는 말도 할 기분도 나지 않았다.
이때 젊은 사람이 씩씩하게 걸어오고 있었다. 하필은 용기를 내어 비싸고 두꺼운 책을 내밀었다.
“젊은 양반, 이 책 그냥 드릴 테니 받으슈우.”
젊은이가 엉뚱한 소리로 대꾸했다.
“요새 그 무거운 책을 누가 들고 다녀요. 내가 공짜라면 혹할 사람으로 보이시오? 괜히 짐만 되는 걸.”
하필은 절망했다. 이럴 수가 있나! 거저 준다는데도 모두 싫다고 하니 출판사며 서점이 문 닫는 건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는 게 아닌가.
하필이는 울고 싶었다. 책을 리어카 째 어디든 끌고 가서 콱 처박고 엉엉 울고 싶었다. 그래도 울지는 못하고 억지로 참고 멍하니 서서 예쁘고 화려한 책들만 들여다보았다.
볼수록 예쁜 책들을 마치 빵점 받고 쫓겨나서 우는 아들을 들여다보는 심사로 서 있는데 한 사람이 다가와 말을 건넸다.
“영감님, 하필이면 왜 책장사를 하시오? 책 살 돈이 있으면 참외나 수박이나 그런 먹거리 장사를 하지 하필, 하필…….”
하필이 하필 하필 하는 소리에 화가 났다.
“이봐유우. 하필 하필 하지 마슈우.”
“제가 뭐 잘못했나요. 세상에 장사할 것도 많은데 하필 책장사를 하시니 하는 말이지요.”
하필은 부아가 나는 걸 참고 마음을 가다듬었다. 젊은 사람이나 늙은 사람이나 다 싫다는 책을 억지로 주는 게 아니다. 책 볼 사람은 따로 어딘가 있을 것이라고 자위하면서 마음을 고쳐먹고 이어카를 끌고 돌아가자니 다리도 무겁고 배도 고파 털썩 주저앉아 엉엉 울고 싶었다.
그 때 한 할머니가 지나가다가 보고 중얼거리듯 말했다.
“요새도 딸따리 이동서점이 있는가 보네.”
그 소리에 하필이 책 한 권을 들고 다가갔다.
“여사님, 이 책 그냥 드릴게유. 받으실래유우?”
“나 돈이 없는데.”
“거저유. 받기만 하세유우.”
노인이 책을 받으며 말했다.
“이렇게 귀한 책을 그냥 주신다고요?”
하필 허당에 빠진 국자 / 10. 눈물겨운 오천 원
“네. 거저유우.”
할머니가 가방을 뒤적거리더니 꼭꼭 접은 오천 원짜리 하나를 꺼내어 내밀었다.
“내가 가진 게 이것뿐이라 더는 드릴 수가 없어요. 지금 주신 책은 삼만 원도 넘는 귀한 책인데 오천 원에 살 수는 없고, 저기 있는 동화책 「왕따 대통령」으로 주시면 안 되겠수? 하필이면 대통령이 왜 왕따를 당했을까?”
하필은 또 하필이란 소리가 듣기 안 좋았지만 그래도 이렇게 말하는 할머니가 고맙고 존경스러워서 「왕따 태통령」마저 꺼내주며 말했다.
“고마워요 여사님, 두 권 다 드릴게유우.”
“이러시면 밑져요.”
“밑질 것도 없어유우. 다 거저니께유우.”
할머니가 밝게 웃으며 말했다.
“내가 여사님이라는 말을 들어본 지가 한참 되었는데 할망구, 할매, 늙은이 하는 소리보다는 듣기 좋구려.”
“고마워유우. 주시는 돈 잘 받겠어유우.”
할머니가 책을 소중하게 가슴에 안고 인사를 한 뒤 돌아갔다. 하필은 오천 원을 두 주먹 속에 곱게 넣고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모처럼 사람대접 받고 받은 돈 아닌가. 오천 원이 눈물겨운 소중한 소득이었다. 그렇게 하여 용기를 겨우 낼 수 있는 하필은 무시당한 수모를 참고 참고 견디고 책 곳간 사업장으로 돌아왔다.
언제 왔는지 직장에서 돌아온 딸이 웃으며 맞았다.
“아빠, 또 어디서 책을 그렇게 많이 받아왔어요?”
하필 허당에 빠진 국자 / 11. 내 맴이 내 맴이 아녀
“응 저기서……. 언제 왔어어?”
“우리 도서관에서 홀로코스트라는 책 스무 권이 필요해서 구하는데 이 안에 있을까?”
“그런 거라면 출판사에 알아 봐야지이.”
“출판사에는 없대요. 재고가 많았었는데 다 안 팔리는 것이 자리만 차지한다고 몽땅 버렸대요.”
“그 책이 있으면 좋을 텐디 이 많은 책 속에 어디 있기나 할라나 모르것다아.”
“아빠. 무슨 책이든 가져다 놓으면 버리지 말아요. 요새 출판사들이 너도나도 장사가 안 된다고 책을 버리고 나서 막상 독자가 책을 찾으면 없는 출판사가 많아요.”
“허어, 그려어? 이 책들이 언젠가는 다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갈 날이 있겠구머언.”
“맞아요, 아빠.”
이때 허당이 껑충껑충 들어왔다. 딸이 하필한테 물었다.
“저 사람은 누구예요?”
“응, 요새 나하고 동업하는 청년이여. 서로 인사햐아.”
하필이 허당한테 딸 소개를 했다.
“이 여아가 내 딸 하우(河㥥)여어. 인사햐아.”
허당이 수줍게 인사했다.
“저는 허당이라고 혀유. 잘 보아주시유.”
“허당 씨라고요? 진짜예요?”
“진짜지유. 허당이라 이상혀서 묻는 거쥬?”
“미안해요. 허당 씨.”
허당은 허당에 씨자를 붙여 부르는 소리에 갑자기 마음이 꽃밭을 만난 듯 우쭐하고 기뻤다. 그래서 인사말을 했다.
“미안할 것 읍시유. 하우도 하우두유둔데유 뭐.”
“호호호, 내 이름이 하우두유두?”
하필이 허당한테 서둘러 말했다.
“하우가 다니는 도서관에서 홀로코 뭐라는 책을 찾는다는디 이 많은 책 속에 어디 숨었는지 알가안.”
“홀로코스트인 모양인디 을마나 필요한대유?”
하우가 대답했다.
“이십 권이에요.”
“책갑도 솔찬겠구먼유. 우쨌든지 찾아 봐야쥬. 있으면 심봤다 아녀유?”
하우가 웃으며 말했다.
“심봤다지지요. 찾으면 심봤다 하고 소리치세요. 호호호.”
하필이 딸한테 말했다.
“넌 집에 가서 마실 거라도 좀 해갖고 와아. 그 동안 우리는 책을 찾아볼텐게.”
“알았어요. 아빠 꼭 찾으세요.”
허당이 돌아가는 하우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 꼴을 보던 하필이 꾸짖듯 말했다.
“뭘 그리 봐아. 사람 첨 봤나아?”
“말하는 것도 귀엽고 걸어가는 모습이 예뻐서 봤시유.”
“알았어어. 그만 보고 책이나 찾아 봐아.”
“알았슈.”
허당은 주인 하필과 이리저리 뱅뱅 돌며 책을 찾았지만 그 책은 안 보이고 하우 웃는 모습만 어른거렸다. 곳간에 책이 어림잡아 백만 권도 넘을 것 같은데 어디서 그 책을 찾는단 말인가. 아무리 뺑뺑이를 쳐도 책은 보이지 않고 허당이 눈에는 예쁜 하우 웃는 얼굴만 삼삼했다.
‘내가 왜 이려? 괜히 맴이 왜 이리 뒤숭숭한겨? 이상혀. 입때껏 여자 같은 건 나하고 상관없다고 생각했는디 하우를 보고 난 뒤 왜 맴이 이렇게 뒤숭숭한지 모르것어. 왜 그런겨?’
하필 허당에 빠진 국자 / 12. 바보 같은 게 좋아
하필은 이층으로 올라가 책을 찾고 허당은 아래층 구석에서 책을 찾는데 하우가 마실 것을 들고 왔다.
“아빠, 시원한 거 드시고 하세요.”
허당이 구석에서 나와 하우가 들고 온 쟁반을 받아들었다. 하우가 상냥하게 말했다.
“허당 씨 고마워요.”
“고맙기는유. 이렇게 마실 것을 가져오시는 하우유두가 고맙쥬.”
“호호호 하우유두요?”
“제가 잘못 했나유?”
“아니에요. 재미있어요. 허당 씨”
이때 이층에서 내려오던 하필이가 두 사람이 웃어가며 이야기하는 것을 보고 소리쳤다.
“뭣들 하는 겨어? 넌 마실 거 가져왔으면 거기 두고 가아.”
하우가 웃으며 대답했다.
“아빠, 허당 씨가 아주 재미있어요.”
“뭔 소릴 하는 겨어? 허당은 허당이여어. 빨리 돌아가아.”
딸 하우는 다른 말을 했다.
“아빠, 책은 찾았어요?”
“그놈이 어디 처백혔는지 안 보여서어. 넌 상관 말고 가기나 혀어.”
“안 갈 거예요. 나도 책을 찾아볼래요.”
하필이 허당을 돌아보며 말했다.
“자네는 물 한잔 마셨으면 이층으로 올라가 봐아.”
“알았시유. 어른이 안 오셔서 물을 먼저 마실 수가 없잔유.”
그러면서 허당이 물 한 컵을 꿀꺽꿀꺽 마시고 하우를 힐끔 보고 이층으로 올라갔다. 하필이 딸한테 일렀다.
“다 큰 것이 아무나하고 시시덕거리면 못 쓰는 겨어.”
“누가 시시덕거렸어요?”
“내가 다 보았응게 허당하고 웃고 어쩌고 하면 안돼아.”
“왜?”
“저 키다리 허당은 가까이 할 물건이 아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인물잉게 그리 알더라고오.”
“난 좋은데에?”
“헛소리 마아. 바보 같은 꺼벙이 워디가 좋다는 겨어?”
“난 바보 같은 게 좋은걸.”
“아따, 별소릴 다 혀네에. 그런 말 두 번 다시 하지 마아.”
하필 허당에 빠진 국자 / 12. 갑자기 허전한 마음
허당이 이층으로 올라가다 하우를 힐끗 돌아보았다. 하우도 바라보다가 눈길이 마주쳤다. 허당은 가슴이 뛰고 괜이 기뻤다.
“참 내 맴 나도 모르겠구먼. 왜 가슴이 뛴댜?”
하우가 따라 올라오면서 말했다.
“허당씨 나하고 같이 찾아 봐요.”
허당은 하우가 씨자를 붙여 부르는 소리가 가슴에 꽃못처럼 꼽혔다. 그러나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이층 구석으로 들어가 책을 찾았다. 그 뒤를 따라오며 하우가 콧노래까지 불렀다. 허당은 하우의 예쁜 목소리를 들으니 얼마나 기쁜지 책들이 모두 꽃처럼 보였다.
하우가 한쪽 책 더미를 들추며 말했다.
“허당씨 여기 좀 보세요. 그런 책 종류가 이쪽에 몰려 있어요.”
허당이 그리로 가서 책을 뒤지는데 언제 왔는지 주인 하필이 다가오며 소리쳤다.
“우야아, 너 집에 가랬더니 거기서 뭘 하는 겨어?”
“책 찾고 있잖아요.”
“다 필요 없응게 빨리 집으로 가아. 그 책 안 팔아아.”
하필이 화난 얼굴로 정색을 했다. 그 서슬에 하우가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허당은 옆에서 웃어주고 같이 책 찾자던 하우가 사라지자 갑자기 책 곳간이 전기가 나간 집처럼 앞이 컴컴하고 허전하고 마음에 그늘이 드리워졌다.
하필 허당에 빠진 국자 / 13. 우리 딸 맘에 두지 마
다음 날 어제 하우가 들여다보던 자리로 가서 책을 찾았다. 책 몇 덩어리를 이리저리 옮기다 홀로코스트를 찾았다. 거기 그 책이 300권도 넘게 있었다. 너무 기뻐서 하우두유두 하고 소리쳤다.
아래층에서 책을 찾던 주인 하필이 올려다보며 물었다.
“무신 소랴? 왜 하우는 부르는 겨어?”
“안 불렀는대유.”
“내가 똑똑히 들었는디 딴청이여어?”
“아녀유, 책을 찾아 기뻐서 소리쳤어유.”
“괜히 우리 하우 맴에 두지 마아.”
“알았어유.”
“책 찾았으면 오늘도 이것저것 골라 열 권 가지고 정거장에나 다녀와아.”
“야.”
허당은 전처럼 책 열 권을 들고 나가 차 기다리는 사람들한테 즐겁게 나누어주고 손에 만 원짜리 열 장을 추려 들고 차에서 내리는 사람을 눈여겨보았다.
차에서 내린 한 영감이 배가 몹시 고파 보였다. 그래서 다가가 물었다.
“많이 시장하시쥬?”
“그려. 차에 시달리다 보니 허기졌어.”
“그러시면 저기 아주 돼지국밥 잘하는 집이 있는디유. 거기로 모셔 드릴까유?”
“그려, 돼지국밥이라면 내가 좋아하는 음슥여, 어디고 가 봐.”
허당은 그 영감님을 모시고 국자국밥집으로 갔다.
“아줌마. 손님 오셨어유. 잘혀 드려유.”
국자가 반가워하며 대답했다.
“아이고 고마워라. 우티기 손님까지 모시고 왔댜? 손님 잠깐만 기듈리슈. 금방 국말아 올릴게유.”
손님이 배를 채우고 만족해서 말했다.
“이렇게 음슥 잘하는 집이 여기 있는 줄 몰랐구먼. 날마다 친구들도 데리고 와서 먹어야겠구먼. 총각 고마워. 잘 먹고 가아.”
이렇게 하여 허당은 하루에 두 번 책을 나누어주러 다니며 이십만 원씩 물어들이고 차가 도착하면 시장해 보이는 사람을 따라가 국자돼지국밥집으로 안내하여 날마다 국자네 손님이 늘어났다.
국자는 허당이 맘에 들어서 사위로 삼고 싶었다. 그래서 손님이 오면 국밥을 말아 겸상도 시켜주고 손님 밥값만 받았다. 그러나 허당은 공밥을 안 먹는다고 자기 밥값을 따로 치렀다. 그게 또 맘에 든 국자는 딸을 주고 싶어서 하루는 두 사람을 같은 시간에 만나게 만들었다.
하필 허당에 빠진 국자 / 14. 남잔 거북이 같어여 혀
국자 딸 이름은 윤달이었다. 그 아비가 윤군불이고 윤달에 낳았다고 유달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딸이 퇴근할 땔 맞추어 허당한테 한 가지 부탁을 했다.
“허총각, 우리 집에 화단을 좀 고쳐야겠는디 그것 좀 둘러보고 저녁은 우리 집에서 먹으면 안 될까아?
“그러쥬. 집이 어딘디유?”
“바로 이 뒷집이여. 나허구 잠깐 다녀오자고.”
국자는 허당을 데리고 자기 집으로 가 담장을 끼고 돌아가며 다섯 평쯤 되는 화단을 가리켰다.
“여기가 볕도 잘 들고 좋은데 손을 보지 않아서 엉망인디 총각이 머리 좀 써봐아.”
“알았슈. 생각해 볼게유.”
“고맙구먼 총각. 빨리 가게로 돌아가십시다.”
두 사람이 국밥집에 들어서니 윤달이 먼저 와 있었다. 국자가 딸을 소개하려고 하는데 윤달이 팩 돌아섰다. 국자가 물었다.
“윤달아, 왜 그려어?”
“엄마, 이 사람 아는 사람이야?”
“그런디 왜 사람 민망허게 그려어?”
유달이 달아나며 소리쳤다.
“묻지 마!”
국자가 민망해서 억지웃음으로 말했다.
“총각 미안혀. 저것이 아직 철이 안 나서 그려. 이해혀 응?”
“알았시유.”
허당은 속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윤달인지 수달인지 마음에 들지 않았고 그 순간 하우 생각이 났기 때문이다. 허우는 바로 집으로 돌아갔다.
한편 국자는 저녁에 딸을 앉혀놓고 닦달했다.
“아까 그게 뭐여?”
윤달이 눈을 흘기며 한 마디.
“뭘?”
“그 총각 앞에서 그게 뭐여? 민망허고 남새럽게시리.”
“난 그런 사람 밥맛이야. 키만 기다랗고 내 취향이 아냐. 그런 사람 엮는 거 싫어. 엄마는 뭘 몰라.”
“네가 뭘 안다는겨? 사내들이란 얼굴로 속사람은 모르는겨. 나 봐아. 느 애비 인물이 출중하여 내가 눈이 멀어서 서방 삼았지만 후회가 이만저만이 아녀. 나허고 혼인하고 너 하나 낳아놓고 이 여자 저 여자 꿰차고 돌아다니다가 어디 가서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알 길이 없고 나 혼자 고생한 걸 생각하면 이가 갈려. 너만큼은 나같이 되면 안돼 야. 사내는 거북이처럼 생겨야 하는겨.”
윤달이 바락 화를 냈다.
하필 허당에 빠진 국자 / 15. 이년아 정신 차려
“거북이고 두더지고 다 싫어. 하루를 살아도 내 눈에 찬 남자 아니면 시집 안 가!”
“이년아, 정신 차려. 여자는 남자 인물 뜯어먹고 사는 게 아녀.”
“왜 욕까지 해?”
“너무 답답혀서 그려. 저 허총각 외모보다는 보통 사람이 아녀. 보기보다 무언가 숨겨둔 허당이 있는 것 같은 인물이여.”
“허당? 허당에 뭘 숨겨, 허당은 빈구덩이야.”
“너 애미 말 안 듣고 그럴겨어?”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살 거야. 엄마가 뭘 알아. 간섭하지 마!”
한 마디도 지지 않고 윤달은 스마트폰을 챙겨들고 제 방으로 들어가 문을 잠갔다.
*
다음 날 국자는 허당한테 딸이 서운케 한 짓을 이해해 달라고 하려고 책 곳간으로 갔다. 그런데 허당은 안 보이고 하필이 혼자 책을 정리하고 있었다.
“곳간 주인 뭘 혀?”
“보면서 물어어?”
“허 총각은 어디 갔어?”
“오늘은 안 나왔구머언.”
“뭔 일일까아?”
“나도 몰러어. 때 되면 오것지이.”
국자는 돌아가면서 생각했다.
‘이 숙맥이 윤달이한테 채였다고 생각하고 실망하여 집에서 나오지도 않은 거여. 윤달이 신랑감으로는 딱인디. 우짜면 좋텨.’
하필은 눈이 빠지게 허당이 오기를 기다렸다. 날마다 책 들고 나가면 10만원씩 두 번이나 물어들이던 일꾼이 안 나오니 사람보다 돈이 더 기다려졌다. 묵묵히 종일 기다렸는데 허당은 오지 않고 하우가 퇴근해 들어와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아빠, 허당 씨는 왜 안 보여요?”
“넌 멀대같은 허당만 찾고 애빈 안 보이는 겨어?”
“허당 씨는 어디 갔어요?”
“안 나왔어어. 그런디 넌 우째서 허당이라고 하면 될 걸 씨자까지 붙이는겨어?”
“허당 씨는 아빠도 좋아하지 않아요?”
“내가 좋아하는 것허구 네가 좋아하는 것이…….”
하필이 마지막 말을 하지 않은 것은 둘이 사랑하는 것 아니냐는 말을 하게 되어서였다.
“아빠, 그 사람 어디 있느냐고?”
“그 사람 어쩌고 하지 마아. 허당허고 너허고는 하늘 땅 차이니께.”
“허당 씨가 들으면 좋아할 소식이 있는데.”
“뭔디? 내가 알면 안 되는 일여어?”
하필 허당에 빠진 국자 / 16. 숙맥 같은 것이
“아빠는 더 좋아하는 소식이야.”
“뭔디이?”
“허당 씨한테 먼저 말할 거야.”
“자꾸 허당 허당 하지 마아. 난 싫은게.”
“그럼 내보내. 싫은 사람 데리고 살 필요 없잖아?”
사실 하필이 눈에 허당은 자기 딸하고는 안 어울리는 바보라고 생각하는 터라 둘이 어울리는 것을 막으려고 했지만 날마다 책 들고 나가면 돈하고 바꾸어 오는 인물이라 내쫓을 수가 없었다.
자기는 리어카에 책을 잔뜩 싣고 나가 공짜로 준대도 받아가는 사람이 없었는데 허당은 돈하고 바꾸어 오는 것이 신기하기 때문이다. 하필은 정거장에 책 싣고 나갔다가 실망하고 돌아온 뒤로는 정거장 쪽도 바라보기 싫었다.
다음날 국자가 또 와서 허당을 찾았다. 그러나 이 숙맥이 나오지 않았다. 국자는 실망하여 돌아가며 생각했다.
‘그 숙맥 같은 것이 윤달이년 한 마디에 실망하여 책 곳간에도 안 나오는겨. 날마다 정거장에서 손님도 잘 모시고 왔는디 그런 것도 끊기고……. 마음이 그렇게 여리고 착한 사람이여.’
하필이는 그 나름대로 이런 생각을 했다.
‘우리 딸 하우를 가까이 하지 못하게 하여 실망하여 안 나오는 모양인디 어쩔 수 없지. 아무리 그려도 내 딸 짝으로 삼을 수는 없는겨.’
그렇게 하필과 국자가 기다리기를 일주일이 넘던 어느 날 허당이 나타났다.
하필 허당에 빠진 국자 / 17. 맛없으면 거저유
하필이 반가워서 물었다.
“워째서 메칠씩이나 빠졌댜?”
“야, 제가 뭘 연구하는 단체가 있는디 거기서 지가 주제발표를 하느라고 서울 좀 다녀왔쥬.”
“뭐간디 허당이 그런 것도 한다는겨어?”
“인간의 공짜심리와 욕심연구 분석이라는 주제로 발표했쥬.”
“허당이 그런 것도 하는 사람이여어?”
“야.”
“난 뭔 소린지 모르것지만 허당이 머리에 든 건 쬐금 있는 가봐아.”
“없시유. 저는 이름마냥 허당인디유.”
“그렇지이? 허당은 허당일뿐이지이?”
“야.”
“책 열 권 묶어 놨어어. 들고 나가 나누어주고 와아.”
허당은 책을 들고 정거장에 나가 차 기다리는 사람을 만나 나누어주고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내미는 돈을 받아들고 막 도착한 차에서 내리는 영감 앞으로 갔다.
“많이 시장하고 대간하시쥬?”
“그려. 배도 고프고 대간혀.”
(주: 나는 군생활을 하면서 경상도 전우한테는 경상도 사투리를 익혔고 전라도 충청도 전우들한테는 거기 사투리도 익혔음. 지금 쓰는 충정도 사투리는 대전 문화동 토백이라는 김정웅 상병이 자기 고향말만 하여 그와 10개월 정도 지내며 충천도말을 많이 알게 되어 쓰다가 ‘대간하다’는 말을 써야겠는데 생각이 안 나서 며칠 동안 기억을 되새김질하다가 오늘 겨우 찾아서 씀)
허당이 친절하게 말했다.
“저기 먹어보고 맛없으면 돈 안내도 되는 돼지국밥 잘하는 집이 있는디 가보실래유?”
“뭔 소리여? 그게 정말여?”
“그렇대니께유.”
“그럼 가 봐야지.”
허당이 손님을 모실 때는 그렇게 하여 사람 마음을 끌었다. 손님마다 공짜로 먹을 수 있다는 말에 혹하여 순순히 따른다. 오늘도 공짜 유혹으로 손님을 국자네 가게로 모셔갔다.
국자가 간절히 기다리던 허당이 손님까지 모시고 오자 반가워서 어쩔 줄을 몰랐다.
“어서와! 기둘렸어. 오늘도 손님 모시고 온겨?”
“야. 손님이 맛나게 잡숫도록 국밥 특별히 말아 드리셔유.”
“알았어. 아주 맛나게 차려 드릴겨.”
국자가 특별히 맛난 상을 차렸다. 손님이 먹으면서 생각했다.
‘이렇게 맛있는 국밥은 생전 첨이여. 이런 것을 공짜로 먹으면 도둑이지. 총각이 우직하고 보기보다는 남다른 인품이 보인단 말여. 그런디 우찌다 이런 일을 헌댜?’
그러면서 혹시 이 집 아들이 아닌가 하여 물었다.
“주인장, 이 총각이 이집 아들이슈?”
국자가 기다렸다는 듯이 신이 나서 대답했다.
“야, 우리 아들이유. 잘생겼쥬?”
“아들 하나 참 잘 두셨소. 나한티 과년한 딸이 하나 있는디 사위 삼았으면 좋것는디 우리 사둔 맺읍시다. 하하하.”
“늦었시유. 벌써 정한 짝이 있는디 우짜쥬?”
“그렇담 할 수 없쥬. 내 맴에 딱 들어서 해본 소리니께. 이 총각이 음슥 맛이 읎으면 거저라고 했지만 맛이 좋아서 값을 치러야겠소.”
손님은 음식 값을 내고 흡족하여 금이빨을 드러내고 웃으면서 떠났다. 손님이 나가자 국자가 허당을 품에 안듯 다가앉으며 말했다.
하필 허당에 빠진 국자 / 18. 누구 맘대로?
“허당 총각, 내 아들이라고 한 말 틀렸어?”
“틀렸쥬. 왜 거짓마을 하셨대유?”
“거짓말이 아녀. 허당 총각은 내 아들 삼고 사위 삼을겨.”
“그런 농담 마셔유.”
“왜? 싫여어?”
“남은 남이쥬.”
“남두 합치면 가족이지 별거 있댜?”
“그런 말씀은…….”
“알았어. 오늘은 우리 화단에 꽃씨나 좀 놔줘. 꽃씨는 여럿 사다 놨응게.”
“알았슈.”
허당은 국자네 집 화단을 갈고 꽃씨를 놓아주고 책 곳간으로 갔다. 하필이는 허당이 돈을 가지고 오기를 기다리고 하우는 좋은 소식을 알려주려고 기다리고 있었다.
하필이면 하필이가 먼저 보고 ‘어서와 수고했어어’ 하고 돈을 받았다. 하우는 반가워서 웃음꽃이 되어 말했다.
“허당 씨. 좋은 소식 있어요.”
“무슨 소식이…….”
하우가 A4용지를 내밀면서 설명했다.
“지난번에 홀로코스트를 납품했더니 부산 영광도서에서 연락이 왔어요. 이것 좀 보세요.”
허당이 들여다보고 빙그레 웃었다.
“아주 좋은 소식이네유, 하우두유두!”
“하우두유두? 호호호.”
한쪽에서 책을 뒤지다 말고 하필이 다가오며 물었다.
“뭐간디 지들끼리 웃는댜?”
허당이 주문서를 내밀며 설명했다.
“아주 좋은 소식이유. 우리 곳간에 다 있는 책들이구먼유.”
하필이 물었다.
“다 있는지 없는지 우티기 안댜?”
“창고 안에 있는 책은 거진 다 알 수 있어유.”
하우가 반기는 소리로 물었다.
“정말 그 책들이 다 있어요?”
“주문서에 있는 열세 종 가운데 몇 개만 모르겠고 다른 건 다 알아유.”
“당장 이층으로 올라가서 책을 찾아봐요.”
하우가 계단을 앞서 올라가려고 하자 하필이 솔찮이 큰 소리를 쳤다.
“넌 가만 있어어! 여기 있던지 집에 가아!”
하우가 말대답을 했다.
“아빠, 내가 받아온 주문선데 왜 그래?”
“넌 씰데없이 실실거리고 웃고, 허당 씨 허당 씨 하는 소리 듣기 싫여!”
하필은 딸이 허당이한테 하는 짓이 못마땅해서 어떻게든지 떼어놓을 심산이었다. 그러나 하우는 정반대였다.
“난 허당 씨하고 책 다 찾을 거야.”
허당은 못 들은 체하고 이층으로 올라갔고 하우도 따라 올랐다. 하필은 닭 쫓던 개마냥 멍하니 서서 중얼거렸다.
“이걸 유쨘댜. 저것들을 그냥 두면 안 되는디.”
하필 허당에 빠진 국자 / 19. 심봤다아!
허당은 하우가 뒤따라 올라오는 것이 여간 기쁘지 않았다. 하우만 보면 가슴이 뜨거워지고 자다가도 웃는 얼굴이 눈에 삼삼허고 꾀꼬리 같은 목소리는 귀에 박혀 가슴을 적셨다. 뽀얀 볼, 동그란 이마, 맑고 생글한 눈, 고르고 하얀 치아, 꽃잎보다 예쁘게 웃는 입술, 쪽 뻗은 다리 허리, 어디 하나 흠잡을 데 없는 몸매가 보기만 해도 황홀했다.
허당은 혼자 있을 때는 하우한테 무슨 말인가 끝없이 하고 싶은데 막상 만나면 아무 생각도 안 나고 입도 들러붙어 가슴 가득 야릇한 감정만 출렁거렸다. 하우가 이층에 오르자 책 곳간은 온통 전깃불이 밝혀진 듯 허당 가슴은 환하게 열리고 기쁨으로 가득 찼다.
하우는 허당의 그런 속도 모르는 듯 철없는 아이처럼 웃기도 잘하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조잘거리며 한쪽 귀퉁이로 가 소리쳐 불렀다.
“허당 씨 빨리 와 봐요.”
허당은 씨 소리만 들어도 가슴이 설레었다.
“뭐쥬?”
“여기 우리가 찾는 톨스토이 인생독본이 있어요,”
“얼마나 되는대유?”
“와 보세요. 아주 많아요.”
허당은 다가가 둘러보고 놀라 입이 딸 벌어졌다.
“이 책이 다 뭐여? 천 권도 넘겠는대유.”
“그렇지요? 이 책 서점협회서 있는 대로 다 구하라고 했어요. 전국 도서관과 도서실에 비치한다고요.”
허당이 헛소리를 했다.
“원더풀, 하우두유두!”
“왜 여기서 하우두유두예요?”
“기분이 좋아서 나도 모르게 나오네유.”
“고마워요. 허당 씨가 하우두유두 하시는 말이 재미있게 들려요.”
이때 아무래도 이층에서 너무 오래 걸리는 것 같다고 생각한 하필이 이것들을 그냥 둘 수 없지 하고 따라 올라서 꾸짖었다.
“뭣들 하는겨? 책은 안 찾고 시시덕거리면 돈이 생겨?”
하우가 대답했다.
“누가 시시덕거려요 아빠. 우리들이 그 책을 찾았다고요. 책이요.”
허당도 한 마디 했다.
“심봤어유, 하우두유두! 하하하.”
“뭘 봤다고? 이것들이 무슨 소릴 허는겨어. 무슨 심을 봤다는겨어?”
하우가 대답했다.
“심봤어 아빠.”
“느이들이 무신 소릴 하는겨? 심을 봤다니.”
허당이 대답했다.
“산삼 캐는 사람들이 산삼을 만나면 좋아서 외치는 소리여유.”
하필이 생각을 굴리다가 하나 더 물었다.
“자네가 우리 딸을 하우 뭐 어쩌고 하는디 건 무신소리여어?”
“하우두유두여유,”
“그게 문소리냐고오?”
하우가 대답했다.
“나를 허당 씨가 너무 좋아한다고 하는 소리야.”
“뭣이? 넌 그런 소리 듣고도 아무렇지도 않어어?”
“난 좋아.”
“안 되겠다. 너 다시는 곳간에 오지 마. 뭐든지 할 말은 나한테 집에서 혀!”
하필 허당에 빠진 국자 / 20. 허당은 헛바지여어
허당은 하필이 하는 소리를 듣고 실망했다. 아무리 하우를 혼자 좋아해도 부모가 반대하면 별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갑자기 전등 꺼진 뒷방처럼 맘이 허전하고 어두웠다. 주문서에 있는 책을 다 찾아야 하는데 김이 빠져서 더 이상 찾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슬그머니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하우가 그 뒷모습을 보고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다. 딸의 표정을 눈치 챈 하필이 무슨 말이라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우야아, 넌 내 말이 얼매나 간절한 맴에서 나온 말인지 알지이?”
“뭐가?”
“내가 네 맴 짐작은 허지만 그건 아니여어.”
“뭐가 아니야?”
“저 허당허고 너는 절대 안 어울리는 처지여. 사람을 제대로 봐야지이. 넌 여고 나와서 좋은 직장을 나가는디 허당은 헛바지여어.”
“아빠가 허당을 얼마나 아는데?”
“척 보면 몰러어. 하는 일 없이 떠돌아다니는 인물 아닌가베.”
“왜 할 일이 없어. 이 곳간에서 일하고 있는데.”
“여긴 허당 일터가 아녀어. 그냥 왔다갔다 떠돌다가 마땅한 데가 없으니게 빌붙어서 심부름이나 하는…….”
하우가 야무지게 말했다.
“날마다 20만 원씩 벌어오는 사람인데 아빠는 공짜로 사람 부려먹을 거야?”
“언제 내가 돈 벌어오라고 했나. 지가 가서 이 사람 저 사람한티 책 나눠주다가 주는 돈 받아오는 것인디.”
“한 달 동안 날마다 20만 원씩 팔아오면 6백만 원을 벌어오는데 그걸 아빠 혼자 다 챙길 거야?”
“글씨, 생각은 안 해 봤지만 네 말 듣고 본게 간단히 넘길 일은 아닌 거 같구머언.”
“그 사람하고 반씩 나누어야 해요.”
“뭐 뭐라구우? 반이면 3백만 원을 내주라고?”
“그래야지요. 욕심을 너무 부리면 복이 달아난대요.”
“그 말은 맞지만 내 듣기엔 거시기하구머언.”
“그럼 낼부터 나오지 말라고 해요. 싫은 사람을 공짜로 부려먹으려고 잡고 있으면 욕심이에요.”
하필 허당에 빠진 국자 / 21. 지발로 들어온 복덩이
하필은 딸이 하는 소리에 말이 막혀 어물거렸다.
“공짜로 부려먹은 건 아녀어. 지가 기어들어와서 하는 짓이지이.”
“복이 굴러들어온 걸 알아야 해 아빠.”
“그건 그려어. 지 발로 기어들어왔으니께에. 내가 깊이 생각혀 허당이 섭섭지 않게 할탱개 더 그야긴 하지 마아.”
이때 국자가 찾아왔다.
“부녀간에 뭔 이야길 그리 잼나게 한댜?”
하필이 대답했다.
“잼난 게 아녀어. 저것이 허당이 편만 들어서어.”
국자가 귀를 반짝 세우고 물었다.
“하우가 허당이 편만 들다니 뭔 소려?”
하우가 대답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빠가 사람을 거저 부려먹는 것 같아서…….”
“거저 부려먹다니 그 뭔 소려?”
하필이 입을 막았다.
“다 그런데 있어어. 아무 것도 묻지 마아.”
국자가 찾아온 뜻을 말했다.
“허당이 가꿔 논 우리집 화단에 꽃이 한창 피어 벌 나비가 꼬여들고 굉장혀. 허당이 총각 보러 가자고 하러 왔는디.”
하필이 물었다.
“아아니, 언제 허당이 그 집 화단꺼정 가꾸어 주었다는겨어?”
“한참 됐지. 그런데 이 총각이 어딜 간겨?”
“몰라 집으로 간 모양여어. 국자가 허당을 솔찮이 좋아하는 거 아닌가베?”
국자가 웃어가며 대답했다.
“좋아할 수밖에 읍지. 인물 그만허면 씀만허고 맴씨 너그럽고 꽃밭 가꾸는 솜씨는 또 을마나 좋은디 안 좋아허것슈?”
하필이 기가 막히다는 눈으로 대답했다.
“국자도 눈에 콩깍지가 끼었구머언. 그 미루나무마냥 기다린 물건이 어디가 그리 좋다는겨어?”
“그려, 난 눈에 콩깍지가 끼었어. 사람 좋것다 날마다 손님 모시고 와서 밥도 거저먹는 법이 없이 경우 밝고…….”
국자가 하우를 향해 물었다.
“하우야, 네 생각은 어떠냐? 허당이 이름이 허당이라 그렇지 속은 허당이 아녀. 너도 그렇게 보이쟈?”
하필이 펄쩍 뛰고 가로막았다.
“뭔 소릴 하는겨? 하우가 우티기 그런 애를 좋아한다는겨?”
“하기는 그려, 하우가 그런 사람 눈에나 차것어? 좋은 직장에서 잘나고 잘사는 사람들만 보고 사는디.”
하필이 흡족해서 대답했다.
“그려, 말은 바르게 잘 혔어. 우리 하우가 그런 허당 같은 사람이 눈에나 차것어어.”
국자가 한 술 더 떴다.
“허당은 우리집 꽃밭지기나 시켰으면 좋겠는디 이 책 곳간에 와서 어정거리니 내가 달라고 할 수도 없구. 날마다 정거장서 손님 모시고 오는 건 또 을마나 귀여운지 몰러.”
하필이 그 소리는 맘에 안 드는 듯했다.
“그런 소린 마아. 걘 날마다 정거장에서 책을 열 권씩 나누어 주고 오는 우리 복덩어리여어. 하우하고 시시덕거리지만 않으면 좋것지마안.”
국자가 좀 섭한 듯 돌아서며 말했다.
“그 허당 총각 낼 오거든 우리 화단에 꽃이 한창이라구 보러 오란다고 혀. 부탁여.”
하필 허당에 빠진 국자 / 22. 오만과 겸손
다음 날 아침 허당이 책 곳간으로 들어서자 하필이 물었다.
“이봐 허당, 자네 국밥집 화단 아는겨어?”
“그게 무슨 말씀이래유?”
“그 집 꽃밭인가 뭔가를 봐준 겨어?”
“야.”
하필이 무언가 마뜩찮은 얼구로 한 마디 던졌다.
“가 봐아. 국자가 꽃구경 오라고 허고 갔어어.”
“알았슈. 정거장에 먼저 갔다가 책 나누어주고 가 볼래유.”
“그려, 가서 그 집 윤달이도 있응게 같이 잘혀 봐아.”
하필이는 어떻게든지 하우하고 허당이 가까이하지 않게 하려고 수를 쓰는 중이었다. 허당도 그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할 수만 있으면 하우하고 멀리 하겠다고 다짐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할수록 하우를 그리는 맘이 더 간절해지고 가슴이 저렸다.
사랑의 상처는 사랑으로 치료한다는 말을 들어서 아는 허당은 차라리 하우를 잊기 위해 억지로라도 윤달이를 마음에 담으려고도 생각도 해보았다. 그렇지만 그게 쉽지 않았다.
허당은 정거장에 다녀와 하필한테 돈을 건네고 국자네 집 대문을 들어서 화단이 있는 담곁으로 가다가 걸음을 딱 멈췄다. 언제 왔는지 윤달이가 꽃구경을 하고 있었다.
억지로라도 윤달이한테 마음을 주고 하우를 잊으려는 생각으로 마음을 다졌다. 하우 아버지는 노골적으로 딸과 떼어놓으려고 하는데 윤달이 엄마 국자는 정반대였다. 어떻게든지 허당이를 윤달이 짝으로 만들고 싶어 안달이 난 터였다.
그러나 솔직히 허당의 가슴에는 윤달이가 들어올 자리는 없었다. 허당의 가슴에는 하우가 똬리를 틀고 있었고 언제든 하우의 자리는 비워 두었다.
윤달이 장미처럼 화사하고 예쁘긴 해도 허당이 가슴 속에 피어 있는 백일홍 같은 하우는 밀어낼 수 없었다. 그래도 허당은 유달이를 억지로 가슴에 담아보려고 윤달이를 향해 말을 건넸다.
“꽃구경 하는겨? 꽃들이 다 이쁘지?”
꽃에 홀려 있던 윤달이 깜짝 놀라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소리도 없이 남의 집엔 왜 들어왔어?”
이때 국자가 들어오다가 그 소리를 들었다.
“윤달이 뭔 소릴 그리 혀?”
윤달이 기분 나쁘다는 얼굴로 대답했다.
하필 허당에 빠진 국자 / 23. 바람난 여자 같은 장미
“저 사람 왜 남의 집을 소리도 없이 들어와?”
“너 이 화단 누가 가꾼 줄 알기나 혀?”
“내가 알께 뭐야.”
“이 화단 허당 총각이 갈고 씨 뿌리고 가꾼 거여.”
“그래서 어쩌라고?”
“그게 말이라고 혀? 고마운 사람한티 할 소려?”
“몰라!”
윤달이 그 한 마디를 남기고 말벌보다 따르게 달아났다.
국자가 안타까운 얼굴로 말했다.
“허당 총각, 섭히 생각 마아. 저것이 겉으로는 저래도 속은 엉큼혀.”
“괜찮어유.”
“그렇지이? 내 말이 맞다는 거 아녀?”
“알았슈. 가게에나 다 보셔유. 난 꽃에 해충이 있는지 살펴볼게유.”
“그려, 갈 때 가게에서 국 한 그릇 허구 가 잉?”
국자가 떠나자 화단 앞에 놓인 멍텅구리 의자에 앉아 꽃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허당은 백일홍을 보고 하우 생각을 했다. 꽃들이 너무 많아 이름을 다 알 수 없었지만 담을 타고 웃는 장미와 뜨거울 것만 같은 새빨간 얼굴로 웃는 백일홍이 눈을 끌었다.
장미는 요란하게 향기를 날리며 거만을 떠는 윤달이 같고 백일홍은 다소곳이 수줍게 웃는 하우 같았다. 하우는 마음을 끌어당기는 강렬한 흡인력을 가진 자석 같다고 생각했다.
벌과 나비는 쉴 새 없이 꽃 사이를 날고 지나가는 실바람이 꽃들과 춤을 추다 향기를 묻힌 채 달아난다. 화단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평화가 고여 있고 하우가 백일홍이 되어 허당 가슴으로 안겨들었다.
꽃이 하우 얼굴로 보였다가 지워지고 보이지 않게 가슴에 그리움의 보금자리를 틀었다. 그러다가 머리를 저었다.
‘아니야, 이러면 안 되는 거여. 부모가 반대하는데 내가 왜 엉뚱한 생각을 품는겨?’
‘윤달 같은 장미는 잠깐 바람난 여자처럼 향기를 날리다가 바로 시들어 버리면 떨어진 꽃잎이 지저분하지……. 하우 같은 백일홍은 립스틱을 칠한 듯 곱고 오래 가다가 마지막엔 제 모습 하나도 흩트리지 않고 한창 때 모습 그대로 첫 서리가 내리면 하얗게 은빛 꽃으로 태어나지. 하우는 백일홍 윤달은 장미…….’
하필 허당에 빠진 국자 / 24 벙어리가 되리라
허당은 꽃을 보아도 하우로 보이고 가슴에서 지우려고 하면 할수록 그리움이 가슴에 뭉쳤다.
화단을 나선 허당은 책 곳간으로 발길을 돌렸다. 발길을 그리로 돌리면서 모질게 다짐했다.
‘내가 하우를 가까이 하면 부녀 사이만 나쁘게 만들어 놓는 거여. 하우는 내 상대가 아닌 별이여. 나 혼자만 좋아하면 되는겨. 하우하고는 웃지도 말고 말도 석지 말아야 혀.’
이렇게 다짐하며 책 곳간에 들어서자 하우가 기다렸다는 듯이 다가와 기쁜 소식을 전했다.
“허당 씨, 어디 갔다 이제 와요? 내가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르지요?”
“…….”
“왜 말이 없어? 골났어요?”
“…….”
“하우드유드!”
“…….”
하우가 A4지를 내밀었다.
“허당 씨. 이것 보실래요?”
허당은 주문서를 훑어보았다. 각종 주문 도서명이 가득했다. 소리를 치고 싶게 기뻤지만 입을 채웠다. 하우가 책 곳간 안으로 들어가며 말했다.
“내가 주문서에 있는 책들을 다 찾았는데 여기 이 책이 어디 있는지 모르겠어요.”
허당은 그 책이 이층 꼭대기 윗간에 있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아무 말 없이 이층으로 올라갔다. 뒤를 하우가 따라 올라오며 꾀꼬리 소리로 말했다.
“허당 씨이, 하우하고 말하지 않기로 했어요?”
“…….”
“좋아요. 그렇게 말하기 싫으면 하지 말아요. 기다릴게요. 그 대신 내가 하는 이야기는 다 들어야 해요. 알았지요?”
명랑하고 귀엽고 예쁜 하우를 보면 한번 꽉 끌어안고 싶은데 그 마음은 속에서만 활활 타고 꺼지지 않는 불길이었다.
‘하필 영감이 그렇게 싫어하는데…….’
허당이 왜 갑자기 무뚝뚝해졌는질 모르는 하우는 어떻게든지 허당이 말하게 하려고 스마트 폰에 떠있는 재미있는 유머를 이렇게 읽었다.
하필 허당에 빠진 국자 / 25. 웃음의 비밀
https://m.cafe.daum.net/ekh/3Qwr/6738
누구나 행복한 삶으로 역전할 수 있다.
길을 가는 사람에게 묻는다.
“혹시 사는 이유 아세요? 행복하기 위해서?”
바보처럼 다시 한 번 물어본다.
“가장 원하는 게 뭐예요?”
돌아온 대답.
“아따, 행복이라니까 그러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의 키워드는 아마도 행복일 것이다. 그러나 행복은 볼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다.
하는 일마다 꼬이기만 하는 어떤 사람이 터프하게 행복을 불러본다.
“야, 행복! 이 빤질이 녀석, 왜 나만 살금살금 비켜가는 거냐?”
최첨단 마이크로 목청 높여 불러 봐도 행복은 무소식.
고성능 현미경으로 하루 종일 째려보아도 행복은 나타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분명히 느낀다. 충분히 촉감한다.
붉은 와인처럼 섹시하게
우리를 도취시키는 행복의 입술
하얀 구름처럼 포근하게 우리를 껴안아주는 행복의 심장…….
“여기 행복 한 접시만 주세요!”
“이 주소로 행복 1킬로그램만 배달해 주세요!”
“여보세요, 나에게 당신의 행복 5분만 꿔줄래요?”
제아무리 가까운 친구, 부모, 부부 사이라도 이런 말은 할 수 없다. 그래서 행복은 매혹적인 것.
살 수도 없고 팔 수도 없는 비매품,
뛰어난 과학자가 아니어도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생산해낼 수 있는 자가 발명품이다.
당신의 삶이 고통스러울수록 힘든 일이 많을수록 행복 발명가가 될 확률은 높다. 인생 역전에 도전할 기회가 많다.
불평불만하고 살기엔 시간이 너무 아깝다.
과감하게 뜯어 고쳐 인생을 신장개업하자.
절망을 희망으로 그래서 행복한 삶으로 인생 역전하자!
--- 당신의 인생을 역전시켜라 중에서 ---
하우는 이렇게 읽고 허당의 대답을 기다렸다.
하필 허당에 빠진 국자 / 26. 행복 5분만 꿔줄래요?
그러나 이렇게까지 해도 허당은 허당이었다.
“허당 씨, 내가 읽은 문자 재미있지 않아요?”
“…….”
“허당 씨, 여기 행복 한 접시만 주세요.”
허당은 그 말이 재미있어 네에 하고 싶었지만 굳은 결심에 못질을 했다.
‘참자. 참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의 것이라고 했다. 이렇게 인생을 배우는 거다.’
하우가 카카오 톡 구절을 또 끌어들였다.
“여보세요, 나에게 당신의 행복 5분만 꿔줄래요?”
허당은 5분만 꾸어주는 게 아니라 자기 인생 전부를 남김없이 주고 싶었다. 그러나 입에 잭을 재웠다. 마음씨 고운 하우는 여전히 다른 문자를 되뇌며 예쁜 소리만 했다.
“야, 행복! 이 빤질이 녀석, 왜 나만 살금살금 비켜가는 거냐?……허당 씨, 정말 빤질이가 되신 거예요?”
“…….”
“허당 씨, 나 화내고 싶어. 받아주실래요?”
허당은 속으로 대답했다.
‘하우두유두, 아무리 화내도 내 가슴엔 다 받아 줄 자리가 있어요.’
그러나 마음에 숨은 비밀은 병뚜껑에 갇힌 90도도 넘는 독주가 되었다. 하우한테는 참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며 하우가 들고 있는 주문서를 받아들고 책을 찾으러 자리를 떴다. 하우는 순진한 아기처럼 재미있다는 듯 재잘거리며 뒤를 따랐다.
“허당 씨, 그 책이 있는 데를 다 아신다고요?”
허당은 대답이 없고 아래층에서 하필이가 외치는 소리만 올라왔다.
“저것들이 뭣들 하는 겨어? 아직도 안 내려오고 뭘 혀어?”
하우가 대답했다.
“주문서에 있는 책 찾고 있어.”
“그만 찾고 빨리 내려와아.”
하우가 돌아서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등 뒤에서 바라보는 허당의 가슴은 불길이 꺼지는 기분이었다. 혼자 주문서에 있는 책을 다 찾아 정리하여 내려다놓고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입을 꼭 다문 결심은 성공이지만 가슴 밑바닥에 뻥 뚫린 구멍 허당은 무엇으로도 채울 길 없는 쓰라린 구덩이였다.
‘꼭 그래야 하는가?’
하필 허당에 빠진 국자 / 27. 공짜라니깐유
다음 날 아침 책 곳간을 향해 가면서 허당은 마음을 바꾸었다.
‘입 다물고 사는 건 죽은 거나 마찬가지여. 내가 이렇게 답답한데 하우는 어떻겠어. 하우를 위해 건성으로라도 좋아하는 척해야 하우가 기분 상하디 않을 거구먼.’
이렇게 생각하고 나니 막힌 가슴이 뻥 뚫린 기분이었다. 한편 하필이는 딸이 허당이한테 마음을 두면 안 된다는 것과 허당이 하우를 좋아하면 안 된다는 것을 단단히 일러두고 싶어서 이렇게 못 박았다.
“오늘은 일찍 왔구머언. 날마다 책 나누어주고 돈하고 바꾸어 오는 건 좋은데 우리 하우한테 정은 절대 주면 안돼아.”
허당도 단호히 대답했다.
“알았슈. 걱정은 땅에 묻고 지내슈.”
“고마워 허당이. 내가 책 열 권 골고루 묶어 놓았응게 잽싸게 갔다 와서 국자네 화단 가꾸러 가아.”
허당은 하필이 묶어 놓은 책을 들고 정거장으로 나갔다. 사람들한테 책을 나누어주다 보니 고서가 들어 있었다. 그래서 고서를 누구한테 주어야 좋을까 생각하는데 마침 점잖게 생긴 신사분이 벤치에 앉아 차 시간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손님, 지루하시지유?”
“예, 지우하네요.”
“이 책을 손님한테 드리고 싶은데 받아주실래유?”
“거저 주겠다는 말씀인가요?”
“야. 거저 드릴게유.”
신사분은 책을 들여다보다가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물었다.
“이 책을 저한테 거저 주신다고요?”
“야, 거저유.”
신사분은 진지하게 물었다.
“젊은이, 이 책 어디서 나셨소?”
“그런 건 왜 물으신대유.”
“이 책 내가 돈 주고 사고 싶은데 괜찮겠소?”
“그냥 드리는 거유. 거저 가지셔유.”
“이렇게 귀한 책을 거저 받을 수는 없지요. 얼마나 드리면 되겠소?”
“거저유. 공짜라니깐유.”
“농담하지 마시오. 내가 공짜라고 이 귀한 책을 거저 받을 것 같소? 책값을 내가 쳐서드리겠소.”
“공짠대유 뭘…….”
신사분이 지갑에서 5만 원짜리 10장을 꺼내주면서 말했다.
“약소하지만 거저라고 하시니 이렇게 쳐드리겠소. 괜찮겠소?”
“괜찮은 정도가 아니지유.”
“하나 더 물어봅시다. 이 책 어디서 나셨소?”
“제가 일하는 책 곳간에서 가져왔지유.”
“이런 책 또 구해 올 수 있소?”
“야. 얼마든지 있지유.”
“농담 아니오. 내일 아침에 뭐든지 이런 책을 가지고 나오시오.”
“야. 고맙구먼유.”
신사분은 차에 올랐고 책을 들여다보던 사람들이 모두 만원씩을 내놓고 떠났다. 오늘은 59만원이 손에 들어왔다. 그걸 하필이한테 가져다주었더니 하필이 놀라서 물었다.
“허당이, 이 큰 돈 누구한티 슬쩍 한겨어 아니여어?”
“저를 뭘로 보고 하시는 말씀이래유?”
“뭘로 본게 아니고. 놀라서 한 소리였으니 노여워 마아.”
이때 국자가 소리도 없이 와서 들어서다 그 소릴 듣고 물었다.
“아니, 뭔 소릴 혔길래 허당 총각한티 빌어?”
하필이 대답했다.
“빌기는 뭘 빌었다는겨. 우리끼리 해 본 소려. 허당이 델러왔지이?”
“눈치 한번 빠르구먼, 나 허당 총각 델고 갈라우.”
하필 허당에 빠진 국자 / 28. 난 저런 인물 노굿이야
하필은 얼씨구나 하고 대답했다.
“잘 생각혔어. 당장 델려가아.”
국자가 허당을 보고 말했다.
“우리 집 꽃밭에 일났어. 가서 봐 줘 총각.”
“예? 무슨 일인가유? 그럼 도와드려야지유.”
하필이 잘 되었다 싶어 큰소리로 말했다.
“허당, 빨리 가 봐아. 뭔일 났는가벼.”
허당이 국자를 따라 화단으로 갔다. 국자가 꽃밭 옆 멍텅구리 의자에 깡통 사이다를 차려 놓고 말했다.
“허당 총각, 이거 하나 따서 목축이고 야기 좀 햐.”
그리고 자기도 하나를 따서 마시며 물었다.
“이 꽃밭을 보고 있으면 허당이 생각이 나고 언젠가는 이 화단 주인을 허당이 것으로 만들어 주고 싶은디 우뗘? 우리 윤달이도 저 꽃마냥 이쁘지?”
“야.”
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진심을 말한 것은 아니었다. 그 순간에도 백일홍 빨간 꽃 속에서 하우 웃는 얼굴이 보였다.
“허당 총각, 우리 윤달이가 까칠하게 굴지만 속은 여린 천사여. 내가 잘 아는디 그런 애는 총각 같은 사람허고 딱 어울리는 아이여.”
이때 어디를 갔다 오는지 윤달이가 들어오다 그 소리를 듣고 팩 돌아서서 쏘아붙였다.
“엄마! 내 맘을 그렇게 몰라?”
“네 맴이 우떤디?”
“몰라, 몰라 난 저런 인물 노굿이야!”
윤달이 제 방으로 들어갔다. 국자가 안달이 나서 허당을 위로했다.
“허당 총각, 섭히 생각 마. 저 애가 말하는 속 다르고 겉 다르다니께. 이해하지?”
“야.”
“고마워, 사람은 허당마냥 너그러워야 하는 건디.”
허당은 사이다도 안 들고 일어서서 책 곳간으로 갔다. 언제 왔는지 하우가 기다렸다는 듯이 들고 있던 주문장을 내보였다.
“허당 씨, 경사예요. 경사. 주문이 줄줄이 몰려들어요.”
가까이서 그 소리를 들은 하필이 다가오며 한마디.
“하우야, 넌 나한테 먼저 알려야지 허당이 뭐라고 걔한테 먼저 이러쿵저러쿵 하는 겨어?”
하필 허당에 빠진 국자 / 29. 느들이 무슨 짓을 한겨
“이런 책을 찾는 데는 아빠보다 허당 씨가 더 빠르니까. 그렇지요 허당 씨?”
허당이 웃는 눈으로 대답했다.
“아무래도 아버님한티 먼저 말씀드렸어야쥬.”
이 한 마디에 하우는 가슴이 벅차고 기뻤다. 오늘도 허당이 아무 말을 하지 않으면 어쩌나 걱정을 했는데 이렇게 예의 바르게 말하는 소리가 그렇게 고맙고 귀여울 수가 없었다.
“허당 씨, 고마워요.”
그 소릴 들은 하필이 얼굴을 돌려대고 물었다.
“허당이 뭐가 고맙다는 겨어?”
“그런 게 있어요, 아빠.”
“그게 뭔 소랴?”
“아빠는 알 필요 없어요. 그렇지요 허당 씨?”
하필이 그냥 물러설 인물이 아니다.
“느들이 무슨 짓을 한겨어? 솔직히 말혀어.”
허당이 대답했다.
“제가요, 어저께 기분이 나빠서 하우 씨가 묻는 말에 대답을 안 했는디…….”
하필은 성질이 난 듯 닦달했다.
“뭔 소릴 허는 겨어? 하우가 뭘 물었깐디?”
하우가 대답했다.
“내가 국자 아줌마네 가서 뭘 먹었느냐고 물었는데 대답을 안 해서 그런 거야.”
하필이 반가워서 속마음을 털어 놓았다.
“그려어? 국자가 쟈를 을마나 좋아하는지 모르니께 뭐든 아주 맛난 거 먹였것지이. 그러니 대답하기 거시기해서 그랬을 겨어. 쟈도 국자 딸이 예쁭게 눈독들일만 혀어.”
하필이는 기회만 있으면 하우가 허당한테 마음을 주지 않게 하려고 아무 말이나 해댔다. 그 속을 빤히 들여다보고 있는 하우는 다른 말을 했다.
“허당 씨, 이 주문서 오늘 다 찾아 놓아야 해요. 아셨죠?”
“찾는 데까지 찾아 봐야쥬. 요새같이 책이 안 팔리는 마당에 이런 주문서는 롯또지유.”
“호호호, 롯또, 맞아요. 로또예요.”
허당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주문서를 가지고 이층으로 올랐다. 그 뒤를 하우가 따라 가려 하자 하필이 잡았다.
하필 허당에 빠진 국자 / 30. 남자 소심혀어.
“야야, 너 철읍시 굴지 마아. 남자라고 다 남자가 아녀어. 남자 소심혀어. 허당이 같은 사람은 국자 딸과 어울리는 겨어.”
“알았어 아빠. 아무 염려 마셔. 내가 누군데!”
그 말에 하필이 만족했다.
“그려어. 그래서 너는 내 딸여. 너만 믿으면 되쟈아?”
“알았어. 일은 부려먹으면서 왜 그렇게 이상한 소리를 많이 해 아빠.”
“부려먹은 건 아녀. 지가 좋아서 하는 일잉게. 허지만 나도 생각이 따로 있어서 부려먹을 만큼 부려먹을 겨어.”
하필은 그러면서 허당 앞으로 아무도 모르게 따로 떼어놓은 돈을 세어 보았다. 한 달 동안 그 앞으로 모아 놓은 것이 2백만 원이 넘었다. 그래서 저금통장을 하나 만들 생각으로 허당이한테 이런 말을 했다.
“허당이, 나허고 일한 날짜도 솔찮이 지났는데 내가 허당이 못 믿어서 하는 말이 아니니께 들어 줘어. 주민등록번호를 좀 알려주어야겄어. 허당이 본명은 맞지이?”
“알았시유. 내 주민증이 여기 있응게 자세히 보고 돌려주세유.”
“알았어. 내일까지만 내가 보관했다 줄겨어. 괜찮지이?”
“야. 언제든지 가지고 계셔도 되어유. 날 못 믿겠으며 그냥 가지고 계셔유.”
“아녀. 못 믿어서 그런 건 아니니께 섭히 생각은 마아.”
“알았시유.”
허당은 주문서에 있는 책을 찾아 한쪽에다 모아 놓고 생각했다.
‘이상한 일여. 이 고서는 누가 찾는겨? 그 신사분이 이런 책을 또 구해 달라고 했는디 내일도 하나 끼워들고 나가 봐야것지.’
도서관에서는 책을 이렇게 많이 주문하는데 서점들은 왜 장사가 안 된다고 책을 다 버리는지 알 수가 없었다. 서점뿐만이 아니다. 출판사에서는 똑같은 책을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다 실어가라는 거다. 그래서 책 곳간에는 똑같은 책들이 수두룩하다.
한쪽 구석에 처박아 놓은 고서더미는 엿장수도 안 가져갈 물건들이다. 그 중에 하나를 주었더니 신사분이 큰돈을 서슴지 않고 내주었다. 내일도 그분이 그렇게 돈을 줄까 생각하고 열권을 묶는 속에 고서 하나를 끼워 넣고 퇴근했다.
하필 허당에 빠진 국자 / 31. 거긴 책방이 아뉴
다음날 아침 허당이 나타나자 하필이 진지하게 말했다.
“허당이, 정거장에 가서 책을 거저 주고 오다가 말인디. 낯 모르는 사람이 책을 어디서 그렇게 가져오느냐고 묻거든 대답하지 마아.”
“왜유?”
“그건 하우가 나헌테 한 말여. 둿 땜인지 갸한테 물어봐아.”
“알았시유. 정거장 가서 책 나누어 주고 올게유. 그리고 배고픈 손님 만나면 국자돼지국밥집으로 모셔드리고 올게유.”
“그려, 잘 생각혔어어. 국자가 아주 좋아할겨어. 국자는 자네를 아주 좋아하니께에.”
하필은 허당이 국자네 집에 가서 얼씬거리는 걸 좋아했다. 그래야 하우하고 떼어놓을 수 있다고 생각해서였다.
버스 정거장에는 어제 그 신사분이 먼저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 오시게. 반갑네.”
“어제 고마웠어유.”
“내가 부탁한 책 가져왔나?”
“예, 여기 이거유.”
“음. 고맙소. 오늘은 돈이 모자라서 30만 원만 주어야겠는데 괜찮겠소?”
“고맙지유. 그냥 가져가셔도 괜찮어유.”
신사는 돈을 건네주고 물었다.
“어디서 이런 책을 가지고 오시나?”
“그냥유.”
“이런 책이 많이 있소?”
“야.”
“그 책방을 한번 가 봐도 되겠소?”
“그건 안 되쥬. 거긴 책방이 아뉴.”
“책방도 아니면서 어떻게 날마다 이렇게 많은 책을 가지고 나오시오?”
이때 차에서 지팡이를 짚은 영감이 내렸다. 허당은 부지런히 따라가 인사를 했다.
“할아버지 대간하시쥬?”
“그려, 난 차멀미를 혀서 고생이 심혔어. 그런디 자넨 누군데 인사꺼지 하는겨?”
“저는 정거장에서 차 기둘리는 사람들한티 책을 나누어주고 시장하신 분들은 싸고 맛있는 식당으로 안내해 주는 사람이지유.”
“어디 그런 식당이 있는겨?”
“예, 절 따라 오시쥬.”
허당이 이렇게 말하고 신사분 앞을 지나가며 인사를 깍듯이 했다.
“고마워유. 편히 가셔유.”
신사는 저잖게 말했다.
“고맙소, 내일 또 봅시다.”
허당은 인사를 하고 돌아서며 속으로 생각했다.
‘저 신사분은 누구실까? 알 수 없는 분이 무엇에 쓰려고 그 고물 책을 돈을 주고 사가는 것일까?’
허당은 노인을 모시고 국자네 식당으로 갔다. 국자는 손님 보다 허당이 예뻐서 싱글벙글 웃으며 상을 정성껏 차렸다.
손님은 허기진 배를 국밥으로 채우고 나갈 땐 4500원 짜리 국밥이지만 거스름돈을 안 받고 5000원을 주고 나가며 만족해했다.
허당은 손님이 가는 길까지 안내해주고 책 곳간으로 부지런히 갔다. 그리고 39만원을 하필한테 내놓고 말했다.
“그 시커멓고 누런 고물 책을 사는 사람이 돈을 많이 주네유. 왜 그럴까유?”
“나도 모르지이. 사람마다 취미라는 게 있으니께에.”
이때 하우가 다른 날보다 일찍 퇴근하여 왔다. 허당을 보고 반가운 눈으로 인사를 했다. 허당은 궁금한 것을 다짜고짜 물었다.
하필 허당에 빠진 국자 / 32. 내 흉은 보덜 마아
“주인 어른이 나한티 말씀하시는데…….”
아우가 알아듣고 금방 대답했다.
“그 말씀요? 앞으로 우리 곳간을 아무나한테도 알려주면 안 된다는 말씀이었지요?”
“야, 그런디 왜 그러시쥬?”
“여러 해 동안 서점과 출판사들이 장사가 안 된다고 폐업을 하기도 하고 다른 사업을 한다고 책을 다 내버려서 도서관에서는 비치할 책을 구하기가 힘들어졌어요.”
“그래서유?”
“앞으로는 책을 버린 출판사나 서점이 우리 곳간을 알면 자기네 책이라고 빼앗으러 올 수도 있어요.”
“그럼 어쩌쥬?”
“그래서 비밀로 하려는 거예요. 아셨지요? 날마다 우리 도서관으로 여기저기서 주문이 들어오고 있어요.”
“그럼 하우두유두쥬!”
하우 얼굴이 백일홍이 되어 활짝 웃으며 받았다.
“허당 씨, 하우두유두! 호호호.”
허당도 좋아서 하하대고 크게 웃었다. 위층에서 일하던 하필이가 그 소리를 듣고 호랑이처럼 내려다보며 꾸짖었다.
“뭔 소릴 그리들 허구 시시덕거리는겨어?”
하우가 대답했다.
“우리 아빠가 겉보다는 속이 깊고 너그럽다고 했어.”
하필이 그 소리는 솔깃했다.
“하하하. 그려어? 내 흉은 보덜 마아.”
그렇게 하루가 지났고 다음 날도 하우는 책 주문서를 몇 장씩 들고 들어왔다. 허당이 궁금해서 물었다.
“요새는 웬 책 주문이 도서관으로 몰린대유?”
“이유가 있어요. 2010년경부터 지금까지 사람들이 스마트폰에 빠졌다가 차츰 시력이 나빠지고 내용이 유익한 것도 많지만 사회적으로 해로운 영상이 쏟아져 나와서 천한 사람들이나 보는 물건처럼 되어 하이칼라 젠틀맨들은 스마트폰을 버리고 책을 읽는 경향이 늘어난다는 거예요. 그래서 책을 구하는 사람은 많은데 서점이 없고 출판사도 몇 안 남았는데 책도 없다는 거예요. 그런데 내가 주문서의 책을 구해다 납품하니까 소문이 나서 우리 도서관으로 추문이 몰려드는 거예요.”
허당은 그 말이 무척 반가워서 소리쳤다.
“하우두유두우우!”
하필 허당에 빠진 국자 / 33. 나도 하우두유두다
하우도 같은 소리를 질렀다. 그 소리에 하필이 다가오며 호통을 쳤다.
“그 뭔 소릴 해대는 겨어. 하우두유두가 뭔 소린데 내 귀에도 익도록 해대는 겨어?”
하우가 대답했다.
“아빠, 우리 부자될 것 같다는 소리야.”
“그 소리가 부자되는 소리여어?”
“그렇다니까 아빠.”
“그렇다면 나도 날마다 하우두유두할랑게 그래도 괜찮지이?”
“그럼요, 아빠. 하우두유두!”
부자 된다는 소리라니 하필이 좋아서 아주 크게 ‘나도 하우두유두다’ 하고 소리치고 이층으로 올라갔다. 허당이 하우한테 물었다.
“이상해유. 사람들이 스마트폰에 붙어서 못 떨어질 줄 알았는디 문바람이 불어서 사람들이 책으로 돌아올까유?”
“얼마 전에 테리비전에 나온 어떤 토속학자가 이런 방송을 했대요. ‘사람의 공짜심리와 욕심’이라는 제목으로 세미나에서 연구발표를 했는데 그 사람이 말하기를 ‘이제 스마트폰의 시대도 다 지나가고 있다. 이유는 첫째 사람들의 시력이 나빠지고 있고, 그 다음 나쁜 것은 각종 게임이라는 콘텐츠로 사행심리를 자극하여 사람들이 모두 일 안 하고 거저먹으려는 공짜심리로 건전한 사회성을 잃고, 더 나쁜 것은 차마 남한테 보여줄 수 없는 누드 픽처와 포르노가 범람하여 젠틀맨들이 거기서 떠나 독서로 소양을 갖추려는 패러다임이 작용하기 때문’이라고 했대요. 그 말에 동감을 하는 사람들이 스마트폰은 꼭 필요할 때만 사용하고 모두가 책으로 돌아오고 있기 때문이라는 거예요.”
허당은 속으로 놀랐다. 누군가 자기하고 똑같은 주장을 한 사람이 어딘가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세상은 넓고 사람도 많으니께 그럴 수도 있는겨. 나 혼자만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 좀 거시기했는데 그렇다면 참 다행이여. 나만 주장한다면 그건 내 편견이겠지만 그런 사람이 더 있다는 건 내가 보는 사회나 그 사람이 보는 사회나 같은 것이 아닌가.’
잠깐 이런 생각을 하는데 하우가 물었다.
“허당 씨,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아, 아무것도 아녀유.”
이때 국자가 갑자기 나타났다.
하필 허당에 빠진 국자 / 33. 국자의 욕심
“허당 총각 나 좀 봐아.”
“왜유?”
“우리 집 화단에 일났어. 가서 좀 도와줘.”
“야.”
이렇게 대답하고 허당은 하우를 힐끗 보고 국자 뒤를 따랐다. 국자는 하우가 들으라는 듯 한마디 했다.
“날 이상하게 보지 마. 허당은 우리 사람이라 내가 아쉬울 때는 부르는 거니께.”
허당은 그 말이 마음에 안 들었지만 참고 국자에 화단으로 가 보았다. 흐드러진 꽃들 사이를 벌 나비가 날고 향기가 풀풀 풍겼다. 국자가 허당을 데리고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언제 마련했는지 돼지 삼겹살을 삶아 놓고 말했다.
“허당 총각이 하우하고 너무 가까이 지내는 것이 거시기해서 떼어놓으려고 일부러 불렀어. 이것이 몸에 아주 좋다기에 준비했응게 맛나게 먹어.”
허당이 젓가락을 들고 고기를 집으려는 순간 윤달이 나타나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엄마아! 이게 뭐야?”
그리고 쌩하고 나가 자기 집으로 들어갔다. 국자가 민망하여 어쩔 줄을 모르고 주절거렸다.
“허당 총각 섭히 생각 마. 쟤가 속없이 그러는 거니께.”
허당은 머쓱해져서 그만 자리에서 일어섰다. 허당이 나가는 것을 본 국자가 자기 집으로 쪼르르 달려가 윤달이를 딖닦달했다.
“이년아, 네가 사람이냐 짐성이냐. 사람을 앞에 두고 그게 무슨 짓이여어 응?”
윤달이 바락 대들었다.
“왜 날마다 저런 꺼벙이를 데려다 놓아 내 눈에 띄게 만드느냐고?”
“뭣이 우뗘? 네가 사람 보는 눈이 그것밖에 안돼야?”
“나는 한번 싫으면 다 싫어. 그 꺼벙이 다시는 우리 집에 들이지 마!”
국자는 윤달이를 한 대 쥐어박고 싶은 걸 억지로 참고 돌아서서 가게로 나오고 말았다. 그리고 중얼거렸다.
“허당 총각이 내 눈에는 선비로 보이는데 윤달이 눈에는 무엇이 씌워서 꺼벙이로만 보일까.”
허당은 돌아가면서 생각했다.
“왜 우울할 때마다 하우 생각이 날까? 윤달이는 꼭 잠깐 피어 요란하게 향기를 날리다 지는 장미 같은데, 하우는 조용히 곱게 피어 벌 나비를 모으고 한 여름 노래하는 백일홍 같아 내 맘이 백일홍 꽃속에 파묻히고 싶은데……. 아무래도 나는 하필 어른을 보아서라도 허우를 가까이 하면 안 되는 겨.”
하필 허당에 빠진 국자 / 34. 미행자
다음날도 허당은 고서 한 권과 다른 책 아홉 권을 묶어 들고 정거장으로 나갔다. 맨 먼저 눈에 띄는 사람이 그 신사였다. 허당이 먼저 인사했다.
“선상님 안녕하시유?”
“반가워요. 이렇게 날마다 만나서 좋고 내가 좋아하는 책을 가지고 오시니 고맙고 더 좋소.”
신사는 허당이 내미는 고서를 받아들고 흡족한 얼굴로 봉투 하나를 건네주었다.
“이게 뭐여유?”
“오십 만원이오.”
“책을 거저 드려도 되는데 날마다 돈 받기가 그러네유.”
“그렇지 않아요. 내가 찾는 책을 구해다 주시는 것만도 고마운데 거저 받을 수가 있나요. 난 갈 데가 있어서 먼저 저쪽으로 가겠소.”
“안녕히 가세유.”
오늘도 사람들한테 받은 돈 9만원을 봉투에 같이 넣고 차에서 내린 할머니를 부축해 드리면서 말했다.
“차타고 다니시기 대간하시쥬?”
“그려, 젊어서는 안 그렸는디 나도 다 살았나벼. 총각은 누군데 이렇게 늙은이를 도와주시나?”
“시장도 하시지유?”
“그려, 배도 고프고 맥도 빠져서 속이 든든할 걸 먹고 싶은데 어디 좋은 식당이 있댜?”
“네. 제가 안내해 드릴게유. 바로 조 뒷골목에 돼지국밥집이 있는데 아주 잘해유.”
“그려, 아무데고 좋은 데가 있으면 앞장 서.”
허당이 할머니를 부축하고 국자네 식당으로 가는 뒤를 신사가 뒤를 밟고 있었다. 신사는 식당 밖에 숨어서 허당이 나가기를 기다렸다. 그러다가 신사는 허당이 나가자마자 바로 식당 안으로 들어가 국밥을 시켜 먹으면서 국자한테 물었다.
“저기 노인하고 나간 총각은 누군가요?”
“내 아들이쥬.”
“그렇습니까? 훌륭한 아들을 두셨습니다. 아들은 무엇을 하시나요?”
“아침나절은 책 곳간에서 일하고 낮에는 정거장서 손님을 모시고 오쥬.”
“그렇게 훌륭한 아드님을 두셔서 행복하시겠습니다. 그 책 곳간은 먼데 있습니까?”
“아녀유. 바로 이 뒷골목 안에 허름한 창고가 있는데 거기 책이 겁나게 많쥬.”
“그렇습니까? 책 구경 한번 해도 될까요?”
“그러슈. 내가 앞장 설 테니 따라오슈.”
하필 허당에 빠진 국자 / 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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