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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금판에 새긴 유서

웃는곰 2008. 5. 5. 22:23
 

황금판에 남긴 유서

나사렛 근처에 재무부 장관으로 크라크라는 큰 부자가 살았습니다.

크라크는 한 달에 한 번씩 집을 뜯어고쳤습니다. 집을 수리할 때는 반드시 이웃에 사는 목수 요셉을 불렀습니다.

"요셉, 우리 집을 고쳐 주게. 나는 이 집이 2천 년 동안 내 이름과 함께 내 후손에게 전하여지는 것이 소원이라네. 그러니 이천 년 동안 썩지 않는 건축자재를 구하여 완전하게 수리하여 주게."

"잘 알겠습니다. 어쩌면 다음 달에는 사해 근방에서 나는 소금나무가 나올 것 같습니다. 그것으로 고치면 이천 년 이상 갈 것입니다."

"그런가? 알아보았다가 다음 달에는 그것으로 고쳐 수리하도록 하게."

"그러지요."

"그러나 더 좋은 것이 또 나오면 그것을 구해다 바꾸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자네는 아들도 목수를 만들 생각인가?"

"다른 방법이 나오지 않으면 그럴 수밖에 없지요."

"인생을 그렇게 살아서야 되겠나. 평생 남의 집이나 지어주고 자기가 살집은 우리집 헛간만도 못하니 그래 가지고 후손에게 무엇을 남겨주겠는가. 다른 것을 시키게."

"생각해 보겠습니다."

"자네 아들 이름이 뭐라고 했더라?"

"예수라고 합니다."

"음, 예수라. 좋은 이름이로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이름이면 뭘 하나, 목수 짓 해 가지고 그 이름이 몇 년이나 가겠는가?"

"이름이 뭐 그리 중합니까?"

"이 사람아 사람은 이름이 남아야 존재 가치가 있는 법이야. 후손이 이름을 기억해 주지 않으면 지금 내가 있다는 의미가 어디 있는가? 그래서 나는 이천 년이 넘어도 남을 집과 내 후손이 기억할 수 있도록 커다란 황금덩어리에다 내 이름을 새겨 나를 기념하라고 유언을 남길 것일세."


이렇게 말한 권력자며 부자는 좋은 건축재료만 나오면 집을 어느 때고 고쳤습니다. 그리고 많은 돈을 들어 황금덩어리를 구하였습니다.

마침내 그는 가로가 한 자에 세로가 한자, 높이가 한 자나 되는 커다란 황금덩어리를 구하여 그 한 면에다 자기 이름을 깊게 새겼습니다.

"이만하면 이천 년이 아니라 이억 년이 가도 끄떡없을 거야."

부자는 만족하여 안방 깊숙이 황금덩어리를 숨겨 놓고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세월이 가고 부자는 늙어 병석에 누웠습니다. 그는 아들 손자를 모아 놓고 유언했습니다.

"너희들에게 나는 좋은 가문과 재산을 남기고 간다. 너희는 영원히 이 가문을 세운 내 이름 석자를 후손에게 전하도록 하라."


그 아들은 효자였습니다. 그러므로 열심히 일하여 아버지의 집을 잘 지키고 살다가 죽을 때 자식들을 모아 놓고 아버지의 유언대로 다짐을 하였습니다.

"이 집은 너희들의 할아버지께서 이룩하신 가문이고 여기 황금에 이름을 새겨 남기셨다. 자자손손 할아버지 이름을 기억하게 하라."

손자들도 아버지의 명을 따라 집을 잘 지키다가 죽을 때 유언했습니다.

"우리 집은 할아버지께서 세운 가문이다. 할아버지 이름 크라크를 잊지 말도록 영원히 전하라."

그렇게 대를 이어 유언하여 육대 손자가 죽게 되었습니다.

"이 집은 나의 현조께서 세우신 가문이다. 이제부터는 조상님을 부를 호칭이 없으니 크라크 칠 대 손이라 하고 그 다음은 팔 대 손이라 부르고 조상 할아버지 이름을 영원히 기억하게 하라."

그렇게 하여 백 오십 년이 지나고 이 백년이 되었을 때 집은 시대에 뒤떨어진 구식 건물이 되었습니다. 구식 건물이 싫은 후손이 집을 헐고 새롭게 신식으로 지었습니다.

그 신식 건물도 이백 년이 못되어 허물어지고 삼십 대 손이 태어났을 때는 선대들이 가산을 탕진하여 초라한 가문이 되었고 그 아들은 목수가 되었습니다.

집도 없이 사글세 집에 살며 목수 일로 살기가 어려운 크라크 삼십일대 손은 조상이 남긴 황금덩어리를 안고 탄식했습니다.

"먹고살기도 힘든데 유언이 뭐 그리 중하단 말인가. 이 금덩어리 한쪽 귀퉁이만 잘라 팔면 아파트를 사는데……"

그는 조상님 크라크 이름만 남겨두고 돌아가면서 떼어내어 팔아 집을 사고 사업자금을 마련했습니다.

그러나 크라크 백 대 손은 또 가난한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 아내가 황금덩어리를 내놓고 말했습니다.

"여보, 당장에 돈이 될 수 있는 황금덩어리를 두고 굶어 죽을 수는 없잖아요? 이 쪽을 떼어 팔아서 생활비에 보태 쓰지요."

"그건 안 되오. 조상님들이 유언으로 남기신 물건에 손을 대서는 안 되오."

"그럼 당장 어떻게 살아요? 집도 없고 할 일도 없이 조상님 유언만 지키다가 죽는다면 조상님인들 잘 한다고 하시겠어요? 이렇게 어려울 때 팔아서 쓰게 하기 위하여 옛 조상님이 지혜를 짜 놓으신 거예요. 그래서 조상 덕에 산다는 말도 있잖아요."

백대 손은 아내의 말에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여 이름을 파 놓은 쪽만 남기고 잘라 팔았습니다.

큰 황금덩어리는 문패처럼 얇게 남아 작은 보자기에 싸여 서랍 속에 감추어졌습니다.

그 백대 손은 죽을 때 양심의 가책이 되어 조상 대대로 전해 오는 할아버지 이름을 기억하라고 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아들은 아버지가 떠난 뒤 집안 정리를 하다가 이름이 새겨진 황금 문패를 발견했습니다. 신기하다고 생각한 그는 아내를 불렀습니다.

"여보 이리 와 봐요, 우리 조상님이 과거에 얼마나 부자였으면 문패를 황금으로 만들어 걸었겠소? 안 그렇소?"

"그때는 황금이 흔해서 누구든지 웬만하면 황금 문패를 만들어 달았던 거예요. 지금은 문패를 달 필요도 없으니 우리 그것을 반만 잘라 팝시다."

그리하여 부부는 크라크에서 '크라'자만 남겨놓고 뒤의 크자를 잘라 팔아 최신형 텔레비전을 샀습니다.

"조상님 덕에 소원 풀었어요. 이렇게 좋은 텔레비전을 우리 힘으로 살 수 있겠어요?"

속 모르는 손자며느리는 그렇게 좋아하다가 늙어 죽고 손자는 후손에게 아무 유언도 못했습니다.

그리고 또 백년이 흘렀습니다. 크라크 1세에서 5백년이 되었을 때 그 후손들은 크라라고 새겨진 황금 쪼가리를 두고 가문 호칭에 잘못이 있었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우리 가문은 크라이다. 크라크라 부르지 말고 크라라 부르는 것이 이 증거를 통하여 밝혀졌다."

유식한 자손의 주장에 따라 크라크 가문은 크라가 되었고 또 백년이 흐르는 사이에 어려운 자손이 '크라'라고 새겨진 금덩이를 팔아 없앴습니다.

크라크 가문은 칠백 년을 채우지 못하고 무너지고 자손들은 자기 좋은 대로 성과 이름을 짓고 살면서 세상에 흩어졌습니다. 

그러나 크라크 1세 때 목수의 아들 예수는 권세도 재산도 없는 가문에 태어나 33세 젊은 나이에 십자가형을 받고 세상의 조소를 받으며 떠났지만 2천년이 지난 지금은 전 세계 60억 인구의 30퍼센트가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이름을 찬양합니다.

크라크 당시의 임금이나 권세자의 이름은 날로 쇠퇴하여 역사에서 지워지고 있으나 예수 이름은 구원의 메시지로 온 세상 구석구석을 날마다 불길처럼 퍼져 나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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