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해
정일병과 나는 입대 초부터 취미가 비슷하여 친했다.
그러나 여우같은 김병장 때문에 우리는 한동안 나쁜 관계로 살아야 했다.
어느 날 김병장이 나를 불렀다.
"임마야, 니 우찌 살기에 그리 나쁜 소릴 듣나? 정병장이 널 뭐락하는지 아나?"
"정일병이 뭐라고 했습니까?"
"니는 안성 깍재이라 안카나. 안성 깍재이란 니가 아주 몬된 놈이락하는기 아잉가?"
"그렇습니까? 내가 저한테 잘못한 것이 없는데 어째서 그런 말을 했을까요?"
"뭔가 있겠제, 니 그아 보고 내가 일러바쳤다카지 말거래, 알았나? 그런 말 해가 내가 알면 니 가만두지 않을기다."
"알았습니다."
나는 그 뒤로부터 정일병을 조심하고 상대하지 않았다. 그런데 내 눈치를 챘는지 그 역시 나를 경계하고 전 같은 눈빛도 안 주고 식사 때도 저 혼자 가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여 우리는 몇 달을 외면하고 살았고 그것이 심해지니 사람도 보기 싫어졌다.
그러다가 그와 나는 탄약고 경비를 하게 되었다. 탄약고 앞에는 초소가 있고 그 안에는 실탄이 가득했다. 우리는 세 사람이 근무교대를 했는데 그와 마주치기 싫어서 이일병을 사이에 두고 시간을 짰지만 결국은 한 번은 만나야 했다. 임무교대를 할 때 우리는 눈도 마주치지 않고 인수인계 사항도 글씨를 써서 주고받았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어느 날부터인지 초소 구석 여기저기에 하얀 쪽지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래서 한번은 몇 개나 되나 세어보았다. 열 다섯 개나 여기저기 구석에 보물찾기할 때 숨겨 놓은 것처럼 접힌 채 박혀 있었다.
나는 하나를 빼어 보았다. 거기엔 작은 글씨로 꼭꼭 박아 쓴 시가 있었다. 다 기억은 못해도 이런 시구들이 내 가슴에 충격을 주었다.
순금 달빛 후박나무 잎사귀에 쏟아지는 은빛 종소리
달빛을 밝고 오는 청보리빛 발자국 소리
하얗게 삭아 내리는 기다림의 단단한 뼈대 하나
햇살 물레 곱게 자아 잎맥 따라 금빛 언어 촘촘히 수놓았네
내 모든 것 다 주어도 사랑은 늘상 배고프고 목마른 것
저만큼 붉은 옷자락 휘날리며 떠나는 가을, 뒷모습이 아름답다
풀들이 하는 말, '꽃이 아닌 게 다행이다.' 풀로 태어나 춤을 추며 가장 낮은 곳에서 언제나 자유롭다.
젖은 꿈 널기 위해 새들은 새벽잠을 깨치며 비상을 시작한다.
가슴 한쪽 반다지에 곱게 말린 추억들을 개켜 넣고
오백 년 시공의 툇마루에 걸터앉아 은실 같은 수염 곱게 쓸어 내리는 곳, 윗대 어른들이 도포자락 펄럭이며 마주 걸어오시는
그가 남긴 시는 내 가슴에 쌓아 놓은 미움의 성을 무너뜨렸다. 나는 그 몇 수의 시에 감동되어 그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가득했다. 그렇게 아름다운 시가 가슴에 고여 있는 사람을 미워할 자격이 없는 나를 발견한 것이다.
나는 그를 위해 무슨 말로 나 혼자 미워하던 감정을 지우고 가장 아름다운 우정의 말을 할 것인가를 생각하다가 교대 시간을 맞았다.
마침 정일병과 만나는 교대였다. 나는 그가 오자 손을 쑥 내밀었다. 그는 얼결에 내 손을 잡았다. 나는 그에게 한마디했다.
"미안했다."
"뭐가?"
"그냥."
"그럼 너한테 한마디 물어 보아도 돼?"
"뭐든지."
"나 너한테 실망했어. 너를 내가 얼마나 좋아했는데 네가 그럴 수 있어?"
"뭘?"
"날 보고 전라도 개똥쇠라고 했다면서?"
"누가 그래?"
"알 것 없고, 그랬어 안 했어?"
"아니. 나도 한마디 물어 볼까?"
"좋아."
"넌 나를 보고 안성깍쟁이라고 했다면서? 내가 너한테 섭섭하게 해 준 것 있었나?"
그는 입을 딱 벌렸다.
"그런 말을 할 일이 없었는데 왜해?"
"그래? 그럼 김병장이?"
"나 병장한테 들었어. 너도?"
"그랬구나! 김병장이 왜 우리를 갈라놓으려고 했지?"
"그 사람은 자기 비위에 거슬리면 이간질을 하는 간교한 사람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우리들을 갈라놓을 줄은 몰랐어. 우리 오해 풀고 잘 지내자."
그렇게 되어 우리는 김병장을 왕따시키고 우리끼리 숨긴 정을 나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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