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부
아버지가 많이 편찮아 겨우내 우리 집에 와서 겨울을 보내시었다.
지난 크리스마스 때 사위가 딸기 한 상자를 사왔다. 그 날 아버지는 싱싱한 딸기를 보고 반가워하셨다. 딸기를 보니 농촌의 향수가 아버지에게 생기를 주었던 모양이다.
나는 너무 비싼 것을 사왔다고 생각하면서 한 상자에 네 곽이 든 것 중 하나를 꺼내어 딸기 알을 세어 보았다. 이만 사천 원짜리 한 상자에 작은 곽 네 개가 들었으니 한 곽에 육천 원꼴, 한 곽에 열 두 개밖에 안 들었다.
"한 알에 오백 원이나 하네요."
내가 비싸다는 투로 말하는데 아버지는 엉뚱한 말씀을 하신다.
"참 싸다. 이만 사천 원에 그렇게 많이 주어?"
나는 아버지가 싸다고 하시는 말씀에 이해가 가지 않았다. 무엇이든지 비싸구나 하시더니 겨울딸기를 보고 싸다고 하시니 말이다.
"이건 비싼 거예요." 하는 나에게
"겨울에 딸기 하나를 이렇게 실하게 키우자면 얼마나 공이 들고 힘이 들었겠느냐." 하신다.
농부의 심정을 농부가 아는구나 생각하고 비싸다는 생각보다는 농사지은 사람의 땀방울을 생각하니 역시 비싼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였다.
아버지는 겨우내 조심하신 덕으로 칠 년간 앓으시던 폐렴을 고치고 그 동안 하루 세 끼 한 주먹씩 드시던 약봉지를 털어 버리고 약을 끊은 지 두 달이 넘었다. 가을에는 숨이 차서 두 계단도 못 오르셨는데 지금은 오십 계단을 오르내리시고 기침도 뚝이고 잠도 곱게 쿨쿨이시다.
봄 햇살이 내리고 따듯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자 아버지는 해마다 품고 사시던 습관을 버리지 못하고 서울에서조차 농사 걱정을 하신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가을에 사다먹은 호박씨를 작은 베지밀 곽에다 조르르 파종하여 아버지 방 한편에 호박떡잎이 대단한 야망을 가지고 팔을 벌리고 돋아나 있었다.
"아버지 이게 뭡니까?"
"모종할 호박 싹을 내렸다."
"어쩌시려고요?"
"심으려고."
"어디다 심습니까?"
"옥상이 넓더라. 거기다 심으면 좋을 것 같아서……"
이렇게 하여 옥상에는 시장에서 구해온 넓적한 생선 스티로폴 박스가 깔리고 큰 화분과 플라스틱 통에는 흙이 차이기 시작했다. 흙을 구하기가 쉬운 것이 아닌데 아버지는 어디서 구해 오셨는지 조금씩 흙이 쌓이고 아내가 교회에 갔다 오면서 차에다 실어온 흙으로 옥상에는 밭이 이루어졌다.
오늘은 시장을 지나다가 햇감자가 나왔기에 신기해서 몇 알 사왔더니 감자 한 알을 열심히 들여다보면서 중얼거리신다.
"햇감자를 벌써 캤으니 그 사람들 겨우내 쉬지도 못했겠구먼. 이게 이천 원이면 싼 거다. 겨울에 이렇게 키우자면 그 공이 얼만데……싸지. 싼 거야. 햇감자가 눈도 많고 좋구나."
아버지는 감자 한 알을 집어 눈을 세면서 또 희망에 찬 눈으로 말씀하신다.
"눈이 넷이니. 옥상에다 심으면 꼭 좋겠다. 이거 한 알을 심으면 눈마다 감자가 몇 개씩 달리니 농사가 소득은 많은 거야."
아버지가 옥상으로 가시기에 따라가 보았다. 생선 박스마다 비닐로 덮어 주고 어린 아기 돌보는 엄마처럼 흙을 매만지신다. 그리고 노안에 힘을 모아 판판한 흙을 들여다보시며 새싹을 찾으신다.
"여기 하나 나왔다. 저기도 하나 더 있네."
언뜻 보니 아무것도 안 보인다.
"무엇이 보여요?"
"이것 봐라. 흙을 밀어 올리는 노란 떡잎이 보이잖니?"
자세히 보아야 티눈만큼 작은 흙을 비집고 나오는 개미 더듬이 만한 새순이 보인다. 팔십 평생 농사를 천직으로 살아오신 아버지 눈은 새싹을 보는 데는 소망에 찬 현미경이다. 새 순의 탄생에 애정을 가지고 보는 눈이 바로 아버지 눈이라는 것을 느끼며 나도 책을 만들기 위한 출판 욕심이 많은 편이지 하고 생각했다.
아버지는 풀도 그냥 보아 넘기지 않으시고 하루도 그냥 넘기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농사를 지을 것도 아니면서 언제는 입춘 언제는 경칩 오늘은 청명 내일은 한식, 하며 절기를 농사 파종과 연관지어 생각하는 것을 보며 아버지는 위대한 농부라는 것에 감탄했다.
내가 책을 내면서 그만큼 천지의 조화와 변화에 마음 쓴 일이 있었던가? 아무렇게나 논에 벼 심고 밭에 콩 보리 심어 적당히 거두며 사신 줄 알았는데 아버지는 절기에 자기를 맞추고 계시다.
생선 통마다 가리키며 설명하신다.
"이건 상추 씨앗을 뿌렸고 여기는 아욱, 여기는 열무씨, 여기는 배추씨, 그리고 저 통에는 고추 모종을 사다가 심고 저기는 가지를 시어야겠다. 여기 좀 봐라. 벌써 호박순이 많이 자랐다. 이것들은 추위에 아주 약하기 때문에 비닐을 잘 덮어 주어야 제대로 자란다."
아버지 노안에는 어느새 싱그러운 야채가 밥상 가득히 차려진 희망이 어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