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사슴과 할머니
1. 꽃사슴 가족
추운 겨울입니다.
깊은 산속 큰 바위 밑에 엄마, 아빠 꽃사슴과 아기 꽃사슴이 살았습니다. 눈이 펑펑 내리는 하늘을 보면서 아빠 사슴이 중얼거리듯 말했습니다.
“눈이 너무 많이 내린다. 이렇게 많이 내리면 우리가 눈 속에 갇히고 말 텐데…….”
이때 엄마 사슴도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말했습니다.
“언젠가 눈이 너무 많이 내리던 해에 짐승들이 모두 굶어 죽었는데…… 눈만 내리면 그때 생각이 왜 자꾸 나는지 몰라.”
아빠 사슴이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랬지. 나도 이런 날은 그때 일을 잊으려고 하지만 왜 생각이 나는지 몰라.”
아기 사슴이 엄마를 올려다보며 종알거렸습니다.
“눈이 많이 내리면 신나잖아요? 하얀 눈밭을 굴러다니면 얼마나 재미있어요?”
엄마사슴이 아기사슴을 꼭 안아주며 말했습니다.
“눈이 그렇게 좋아 보이니, 아기야?”
“네, 엄마.”
“넌 눈이 많이 내린 것을 보지 못해서 그렇지. 너무 많이 내리면 우리 같은 산짐승들한테는 큰 어려움이 온단다.”
“저렇게 하얗고 고운 눈이 내리는 데도요?”
아빠사슴이 눈 내리는 하늘을 보면서 말했습니다.
“오늘은 우리 아기 이름이나 지어 줍시다.”
“이름이라니요?”
“당신도 나도 이름이 없어서 답답하던 때가 있지 않았소?”
“그랬어요. 우리는 오형제가 살았는데 이름이 없어서 아버지가 낄끽끽 쿡쿡하고 소리를 내면 우르르 몰려갔지요. 그러면 아버지가 큰오빠만 남겨놓고 다 쫓아버렸어요. 이름이 있었으면 아버지가 큰오빠만 불렀을 텐데 말예요.”
“나도 어렸을 때 그랬소. 우리 아기는 다래를 좋아하니까 이름을 다래라고 합시다.”
“다래, 참 예쁘네요. 그렇게 불러요.”
엄마사슴은 아기사슴을 향해 말했습니다.
“다래야, 넌 다래다. 알았니?”
아기사슴은 여름에 맛있게 먹던 다래 생각이 났습니다. 다래가 좋아서 방긋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다래? 다래, 좋아!”
엄마사슴이 아빠한테 말했습니다.
“우리도 이름을 지어서 서로 부르기로 해요.”
“우리도?”
“네, 나는 다래 엄마니까 다래마. 당신은 아빠니까 다래바라고 해요. 어때요?”
“괜찮은 것 같소. 다래마. 하하하.”
“벌써 부르셨어요. 다래바. 호호호.”
이렇게 하여 세 식구가 이름을 지었습니다. 엄마 아빠 사슴 웃는 소리가 눈바람을 타고 저 아래 비탈로 향기처럼 흘러갔습니다.
밤새 눈이 참 많이 내렸습니다. 아기사슴이 엄마 아빠 사이에서 단꿈을 꾸고 깨었을 때 눈은 바위굴 앞까지 수북이 쌓였습니다.
눈이 얼마나 많이 내렸는지 작은 나무들은 모두 눈 속에 파묻혔습니다. 온 산이 하얗게 이불을 뒤집어 쓴 것 같습니다. 눈 위에 삐죽이 띄엄띄엄 줄기만 내민 나뭇가지들이 지나가는 바람에 씨잉씨잉 우는 소리를 내면서 몸부림을 쳤습니다.
아빠사슴이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습니다.
“눈이 너무 많이 내렸어. 이 눈 속에서 먹이를 어떻게 구해 오나……”
굴 앞에 쌓인 눈을 바라보는 엄마 사슴도 걱정이 가득한 눈을 깜박거리며 말했습니다.
“저 아래 외딴집까지 가야 먹을 것을 구할 수 있을 텐데, 이 눈 속을 어떻게……”
아빠 사슴이 눈 속으로 떠나면서 말했습니다.
“내가 가서 먹이를 구해와야겠어. 지금 떠나면 내일이나 올라오게 될 거요. 내 걱정은 말고 잘 지내고.”
아기 사슴 다래가 예쁜 소리로 인사를 했습니다.
“아빠, 먹을 거 많이 가지고 빨리 와야 해. 알았지?”
“알았다.”
아빠 사슴은 어리까지 푹푹 빠지는 눈 속을 뚫고 외딴집을 향해 길을 떠났습니다.
2. 엿듣기
아빠 사슴이 외딴집에 도착했을 때는 밤이 되었습니다. 외딴 집 지붕에도 눈이 수북이 쌓여 있고 부엌과 마루는 캄캄했습니다.
불이 켜 있는 방에서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나누는 이야기 소리가 새어나왔습니다.
아빠 사슴은 가만가만 발끝으로 걸어 마루 밑으로 들어가 할머니 할아버지가 주무시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두 노인은 하하 호호 정답게 밤이 깊도록 이야기꽃을 피웠습니다.
할아버지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눈이 너무 많이 내려서 한동안 꼼짝도 못하겠는걸.”
할머니가 걱정스럽게 말했습니다.
“눈이 이렇게 많이 내리면 들 짐들이 걱정이에요. 눈 속에서 무얼 먹고 겨울을 날까.”
“그렇구려. 어느 해인가 눈이 많이 내리던 해에 새들과 꿩이 우리 집으로 몰려들던 생각이 나는구려.”
“그랬지요. 그 해에 나는 당신과 싸움을 얼마나 했고요, 호호호.”
“그랬지, 나는 꿩을 잡아 술안주를 하겠다고 하고 당신은 죽지 않으려고 찾아든 것들을 어찌 잡아먹을 생각이냐고 호통을 치고……. 지금 생각하니 당신이야말로 천사였소.”
“당신도 고마웠지요. 그 새들이나 꿩을 한 마리도 안 잡아먹고 며칠씩 보호했다가 돌려보냈으니 당신도 군자였어요.”
“그래, 참 고마운 녀석들이었지. 그 해 우리는 꿩이 낳아주는 알을 공짜로 얻어먹지 않았던가. 하하하.”
“동물이라고 함부로 보면 안 된다는 것을 그 해에 배웠어요. 꿩과 새들이 우리 집을 돌아가며 집을 짓고 알을 낳아주어 얼마나 많이 먹었나요. 그 때 꿩 한 마리라도 잡아먹었더라면 그것들은 다 달아났을 것이고 봄에 우리 집 앞에 알도 낳아주지 않았을 거예요.”
“그렇지, 동물들도 사람만큼이나 생각이 깊은 줄을 그때 깨달았어. 이번 폭설엔 또 어떤 짐승이 구해 달라고 찾아올까?”
“배고픈 녀석들이 견디다 못해 찾아오겠지요.”
“이렇게 산속에 오래 살면서 당신은 뻐꾸기 우는 소리를 들어 본 적 있소?”
“없어요.”
“없다니?”
“뻐꾸기가 왜 울어요. 울 일이 뭣이 있어서…….”
“맞아, 사람들은 새가 운다고 하는데 실은 새가 운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우는 거 아니겠소.”
“맞아요. 같은 새 소리도 울적할 때 들으면 우는 소리 같고 기쁠 때 들으면 노래 소리같이 느껴질 때도 있으니…….”
“그래서 나는 이런 노래를 지어 보았소.”
“어떤 노래인데요?”
“들어 보시겠소?”
3. 새가 울긴 왜 울어
할아버지가 흥얼흥얼 노랫말에 곡을 붙여 불렀습니다.
<산새는 숲속에서 삐까삐까 쪼르릉
꽃들은 방긋방긋 으쓱으쓱 화르르
골목마다 아이들 우르르 콩콩
집집마다 예쁜 아기 웃음소리 깔깔깔>
할아버지는 노래를 하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외로이 살다 보니 동네 아이들 콩콩거리고 뛰놀고, 어린 아기 우는 소리와 깔깔대는 소리를 들어본 것이 아득하구려. 아니 그렇소? 당신도 한번 노래를 지어 보구려. 젊어서는 시인이 되겠다고 몸살을 앓지 않았소?”
“다 흘러간 옛 꿈이지요. 내가 무슨 시를 지어요.”
“한번 해 보구려. 아무렇게나 해도 마음에서 울어나는 소리가 바로 시이고 노래가 아니겠소?”
“영감님 노래대로 새나 벌레나 모두가 우는 법은 없지요. 사람이 제 기분에 우는 것이지……”
할머니는 한참 동안 생각을 하다가 입을 열었습니다.
“이렇게 한 번 불러 볼까요?”
<숲속에서 뻐꾹새 뻐꾹뻐꾹 노래하면
들논에서 뜸북새 뜸북뜸북 김을 매고
달밤에 귀뚜라미 귀뚤귀뚤 기타 치면
깊은 밤 부엉이도 장단 맞춰 부엉부엉>
호호호, 억지로 지으려니 말이 안 되네요.”
할머니가 부끄럽다는 듯 말하자 할아버지가 칭찬을 했습니다.
“아니오, 당신은 훌륭한 시인이오. 귀뚜라미가 기타를 치고 부엉이가 장단을 맞춘다고 하니 아주 멋진 노래가 되었소.”
할머니가 노랫말의 설명을 했습니다.
“사람들은 귀뚜라미가 운다고 노래하지만 나는 달밤에 귀뚜라미가 두 다리를 맞비비는 것을 보면서 바이올린을 켠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지요. 하지만 여기서는 운이 맞지 않아 기타라고 바꾸어 보았지요.”
“나는 거기까지 생각을 못했는데 듣고 보니 귀뚜라미 몸짓이 마치 바이올린을 켜는 것 같구려. 밤이 깊었으니 그만 잡시다.”
방에 불이 꺼지고 온 집안이 조용했습니다. 아빠 사슴은 집안을 돌아다니며 먹을 것을 찾았습니다. 아무것도 먹을 만한 것이 없었습니다. 할 수 없이 굴뚝 밑이 따듯하여 거기서 한잠을 자고 있을 때 날이 밝고 할머니가 나와서 부엌으로 가다가 하는 말소리가 들렸습니다.
“여보, 나와 보세요. 눈 속에 사슴 발자국이 났어요.”
할아버지가 나오셨습니다.
“눈이 와서 사슴이 우리 집을 찾아온 모양이오.”
“그런가 봐요. 사슴이 어디로 숨었을까?”
“어딘가 있겠지.”
“배가 고파서 왔을 텐데 뭘 좀 주어야겠지요?”
“그 녀석들이 좋아하는 것이 무엇일까?”
“콩하고 먹다 남은 누룽지가 있으니 그거라도 줄까요?”
“그렇게 하시구려. 눈밭에 난 발자국 앞에 헝겊을 펴고 놓아주면 될 것 같소.”
할머니가 사슴이 들어온 발자국 자리에다 먹을거리를 놓아주고 방으로 들어가 할아버지와 함께 문틈으로 내다보았습니다.
집 뒤에 숨었던 아빠사슴이 나와서 앞발로 헝겊을 접더니 입으로 꼭 싸 물고 눈 속으로 달아났습니다. 할머니가 말했습니다.
“저것 좀 봐. 배가 고플 텐데 저는 안 먹고 물고 가네요. 산속에 새끼가 있나 봐요.”
“그런 것 같소.”
4. 추억은 늙지 않는 아름다움
“오늘 밤에 또 올까요?”
“올 것이오. 오늘은 먹을거리를 더 준비하여 녀석이 오거든 줍시다.”
마음씨 고운 할머니 할아버지는 사슴이 먹을거리를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아빠사슴도 먹고 배를 채운 다음 싸놓은 것을 물고 가기 좋게 헝겊으로 묶어 놓았습니다. 해가 지고 땅거미가 내리고 어두워졌습니다. 할아버지 할머니는 방에서 문틈으로 내다보며 사슴이 오기를 기다렸습니다.
생각한 대로 어제의 사슴이 눈길을 뚫고 나타나 두리번거렸습니다. 아무도 안 보이자 집 앞에 차려놓은 음식 앞으로 갔습니다. 펼쳐 놓은 음식을 싹싹 핥아 먹고 싸놓은 것은 물고 눈 속으로 달아났습니다.
할머니가 좋아하시며 말했습니다.
“귀여운 녀석, 얼마나 배가 고팠으면 저렇게 싹싹 핥아 먹고 갔을까.”
“우리가 잘한 것 같소. 저 먹을거리를 따로 준비해 주지 않았더라면 새끼들 주려고 저는 굶은 채 갈 뻔했잖소.”
“사람이나 동물이나 자식 사랑하는 마음은 똑같은 것 같아요,”
“그렇소. 저 녀석들도 겨울을 무사히 넘겨야 할 텐데 걱정이구려,”
“우리가 이렇게 먹을거리를 조금이라도 주어 그것을 가지고 갔으니 얼마나 다행이우?”
“그렇소. 우리가 이 산속으로 들어올 당시는 마치 저 사슴처럼 막연한 생각도 했지 않소? 당신과 내가 무사히 살아남을 수 있을까 걱정도 은근히 했는데 지금은 도시에 살 때보다 얼마나 좋소?”
“그래요. 사람들 틈에서 아옹다옹 갈등하고 사는 것보다 순진한 동물과 새들을 벗 삼아 살고 여름내 꽃도 가꾸고 배추와 무도 가꾸어 먹으니 여기가 천국이지요.”
“맞소. 당신같이 예쁜 천사와 사는 나는 바로 천국에 사는 사람이 부럽지 않소. 당신 처녀 때는 참 예뻤지.”
“부끄럽게 왜 그러시우? 이렇게 쭈그렁 할멈이 되었는데.”
“아무리 당신이 쭈그렁 할멈이라도 나는 좋다오. 내 맘 속에 있는 당신은 예쁜 얼굴, 고운 맘씨의 사람이 그대로라오. 늙었어도 당신은 웃는 입이 예쁘고 음식 솜씨도 더 깊은 맛을 내고 있으니 이보다 행복한 남편이 세상에 어디 있겠소.”
“이제 말씀이지만 당신도 젊어서는 정말 멋지고 잘났었지요. 그렇지 않으면 내가 이 산속까지 따라 왔겠어요. 호호호.”
할머니 할아버지는 동물을 사랑하는 마음보다 몇 배나 진하게 서로 위하고 사랑하며 살아오는 부부입니다.
다음 날도 부부는 사슴이 먹을거리를 준비하여 어제 그 자리에다 정성껏 차려 놓았습니다. 그리고 어둠이 내린 뒤에 방 문틈으로 사슴이 나타나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밤이 깊도록 그 사슴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할머니가 걱정스러워서 말했습니다.
“무슨 사고가 나서 못 오는 건 아닐까요?”
“어제 밤에 바람이 많이 불어서 눈이 골짜기로 쓸어 내려가고 산에는 사슴이 다니던 길이 없어져서 좀 늦는 것 같소.”
“어젯밤에는 웬 바람이 그렇게 심하게 불었는지, 저 골짜기가 눈으로 덮여서 펑퍼짐하니 평지처럼 보여요.”
“그래서 오늘 녀석이 좀 늦게 오는 것 같소.”
이때입니다. 할머니가 반가워서 말했습니다.
“왔어요. 저기.”
“어디? 오, 이젠 새끼까지 데리고 왔네?”
하얀 눈길을 뚫고 암사슴이 새끼사슴을 데리고 나타났습니다.
“어제 그 사슴이 아닌데 어떻게 된 일인가?”
할아버지가 눈을 비비며 말했습니다.
“글쎄요, 저 암사슴은 어미 같아요.”
“맞네. 어미사슴이 새끼를 데리고 왔어.”
5. 올무에 걸린 엄마사슴
어미사슴이 음식을 발견하고 두리번거리며 사방을 둘러보았습니다. 그리고 새끼사슴이 깔아놓은 음식을 먹도록 지키고 있다가 싸놓은 먹을거리를 물고 눈길을 돌아갔습니다.
할머니가 감격한 눈으로 할아버지를 보았습니다.
“저 어미사슴 좀 봐요. 저도 배가 고플 텐데 새끼만 먹이고 저렇게 돌아가네요.”
“말은 못하는 짐승이지만 새끼 사랑하는 어미의 마음은 사람이나 짐승이나 다를 게 없구려.”
이렇게 하여 할머니는 날마다 사슴이 오면 먹을 것을 준비해 주었습니다. 눈이 가득한 골짜기를 올려다보며 할아버지가 중얼거리듯 말했습니다.
“벌써 며칠째 수사슴이 안 나타는데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닐까.”
할머니가 듣고 같은 걱정을 했습니다.
“글쎄 말이우. 무슨 일이 있어서 못 오는지 걱정이 되네요.”
“어딘가 잘 있겠지.”
“수사슴이 오지 않아서 저 어미사슴이 새끼를 데리고 온 것이 아닐까요?”
“그런 것도 같고……”
할머니 할아버지는 날마다 수사슴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며 새끼 사슴과 암사슴 먹이를 준비해 주었습니다. 산속에서 날마다 한 번씩 오르내리는 사슴이 눈속에 길을 냈습니다.
그런데 그 길목에다 사냥꾼이 올무를 놓았습니다. 그것도 모르고 어미 사슴이 앞서서 내려오다가 올무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어미사슴은 올무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을 쳤지만 목에 걸린 올무는 점점 살 속으로 파고들며 옥죄었습니다. 아기사슴은 놀라 어미사슴 곁을 뱅뱅 돌다가 할머니가 사는 외딴집으로 내달렸습니다.
“할머니, 할아버지. 우리 엄마 살려주세요.”
이렇게 외치며 외딴 집으로 겁도 없이 달려들었습니다. 그것을 본 할머니가 놀라며 어린 사슴을 안고 물었습니다.
“네가 웬 일이냐? 어미는 어디 두고 혼자 이렇게 왔어?”
아기사슴은 버르적거리며 주둥이를 산 속으로 내밀고 낑낑댔습니다. 할아버지가 짐작되는 것이 있어 말했습니다.
“이 녀석이 말은 못해도 무슨 일이 있다는 것 같소. 보통 같으면 우리가 무서워서 가까이 오지도 못할 텐데 위험을 무릅쓰고 온 것은 어미한테 무슨 일이 있는 게 틀림없소.”
“그런 것 같아요. 당신이 저 애들 다니는 길로 가보세요.”
할아버지는 급히 사슴이 낸 눈길을 따라 산속으로 들어갔습니다. 한참을 가다 보니 어미사슴이 버둥거리다 지쳐서 죽은 듯이 널브러져 있었습니다.
“이런, 어떤 사람이 이 짓을 한 거야? 이 착한 짐승한테.”
할아버지는 올가미 줄을 풀고 어미사슴을 등에 업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방에다 뉘어놓고 얼어 있는 몸을 주물러주었습니다. 할머니도 새끼사슴을 안고 들어왔습니다.
어미사슴은 다 죽어가고 실낱같은 숨이 겨우 붙어 있을 뿐이었습니다. 새끼사슴이 어미 사슴 품에 안겨 맑은 눈으로 어미 눈을 바라보았습니다.
어미도 새끼가 곁에 있는 것을 알고 까불어진 눈을 간신히 떠서 바라보며 눈물을 주르르 흘렸습니다. 할머니 할아버지도 두 사슴을 보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불쌍한 것들…….”
6. 얼어 죽은 수사슴
어미사슴은 목이 거의 잘려나갈 지경으로 다쳐서 먹이를 주어도 삼키지 못했습니다.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애를 태우며 어미사슴을 살리기 위해 약도 발라보고 찢어진 곳을 꿰매어 주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할아버지는 상처에 바르는 약초를 구하기 위해 골짜기로 들어갔다가 한곳에서 수사슴이 먹이를 입에 문 채 얼어 죽은 것을 발견했습니다.
“아니! 네가 어떻게 된 거냐?”
할아버지는 집으로 달려와 할머니한테 알렸습니다.
“여보! 수사슴을 찾았어요.”
“수사슴을요?”
할머니는 반가워서 문을 활짝 열고 내다보았습니다. 할아버지가 빈손으로 온 것을 보고 물었습니다.
“사슴은 어디 있어요?”
“저어기, 산골짜기에 있소!”
“산골짜기라니요?”
“겨울에 바람이 심하게 불더니 그날 그런 것 같소. 우리가 해 준 먹이를 입에 문 채 눈 더미에 묻혀 얼어 죽었구려.”
“골짜기가 눈으로 덮이던 날, 그 날 그랬군요.”
“그런 것 같소.”
할아버지는 삽과 곡괭이를 가지고 할머니와 함께 수사슴이 있는 골짜기로 갔습니다.
“여기다 묻어주면 좋을 것 같소.”
할머니는 죽은 사슴을 보고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불쌍하기도 하지, 내가 싸준 먹이를 먹지도 못하고 꼭 문 채 눈 더미에 묻혀 죽었어…… 불쌍한 것…….”
할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땅을 파고 수사슴을 묻어주었습니다. 그리고 자리를 뜨며 말했습니다.
“잘 자거라. 네 새끼는 내가 돌보아 주마.”
할머니도 몇 번씩 할아버지와 똑같은 생각을 하면서 돌아왔습니다. 집에 도착해 보니 아기 사슴이 어미 사슴 품에서 콜콜 자고 있었습니다.
한나절이 지나도록 어미사슴이 꼼짝도 않았습니다. 시간이 흘러간 다음 새끼 사슴이 일어나 먹이를 찾아 이리저리 돌아다녔습니다. 그러나 어미사슴은 꼼짝 않았습니다. 할머니가 사슴을 흔들어 깨우다가 깜짝 놀라셨습니다.
“여봐요. 이 애가 죽은 것 같아요.”
할아버지도 다가가 만져보고 말했습니다.
“이 놈도 갔구먼.”
그 날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어미 사슴을 손수레에 싣고 집을 떠났습니다. 아기 사슴은 해맑은 눈으로 어미 사슴이 실려 가는 것을 바라볼 뿐 눈물도 흘릴 줄 몰랐습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수사슴이 묻힌 옆에 암사슴도 묻어주었습니다. 그리고 할아버지가 한숨 섞인 말로 중얼거렸습니다.
“죽어서도 같이 묻혔으니 너희들 인연도 천생연분 같구나.”
어느덧 날이 풀리고 봄볕이 따뜻하게 온 세상을 비치고 있었습니다. 산을 덮은 눈이 녹고 골짜기로는 졸졸졸 물소리로 가득했습니다.
아기 사슴은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자고 먹고 살았습니다. 사슴은 말을 할 줄 몰라도 할머니가 하는 말을 다 알아들었습니다.
“얘야, 저 빗자루 가져와.”
이렇게 말하면 쪼르르 달려가서 빗자루를 물고 왔습니다. 할머니가 귀엽다고 목을 안고 쓰다듬어 주면 마치 어린 아이처럼 할머니 볼에 주둥이를 내밀고 뽀뽀를 해주었습니다.
할아버지도 그 모양이 귀여워서 막 돋아나는 뿔을 당기며 한 마디 했습니다.
“이게 제법 뿔이 나고 있소. 이 뿔을 뭐라고 하는지 아오?”
할머니가 대답했습니다.
“사슴뿔이지요.”
“그것 말고 다른 말로…….”
“개뿔? 호호호.”
“사슴뿔 보고 개뿔이라니, 개가 뿔 난 거 보기는 했소?”
“호호호 내가 뿔도 없는 개한테 뿔이라고 하다니!”
“이 녀석 뿔은 용이라고 하는 거요.”
“용은 또 무슨 용? 용을 보신 적이나 있으시우?”
“사람들이 꿈에 보았다는 그런 용 말고 이게 바로 사람들이 좋아하는 용이오.”
할머니도 뿔을 쓰다듬으며 말했습니다.
“전에는 보들보들하더니 이제는 제법 딱딱해졌어요.”
“작은 것이 뿔도 나고, 제법인데.”
사슴은 제가 사람인 줄 알고 귀염을 떨고 할머니 할아버지는 마치 사슴이 된 듯 사슴의 하는 짓을 따라 하기도 했습니다.
할머니가 사슴을 가슴에 안고 손자 달래듯 즐겁게 놀고 있을 때 문 밖에서 큰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아주 험상궂고 우악스럽게 생긴 사람이었습니다.
“방에 누구 없소? 있으면 누구든 나와 보시오!”
할머니가 놀라서 사슴을 포대기로 덮고 할아버지가 문을 열고 나섰습니다.
“누구시오?”
“물어 봅시다.”
7. 할아버지의 분노
할아버지가 문을 열고 나섰습니다. 험상궂게 생긴 젊은이가 물었습니다.
“노인이 여기 사십니까?”
“그렇소만.”
“저 산 중턱에 내가 잡아 놓은 꽃사슴 어째셨습니까?”
“어째다니오?”
“오리발 내밀지 말고 솔직히 말해요.”
“이 사람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내가 사슴 다니는 길목에 올무를 놓아 사슴을 잡았는데 없어졌단 말이오.”
“그것과 내가 무슨 상관이오?”
“이런 산 속에 올 사람도 없지만 꽃사슴이 다니는 길을 아는 사람도 없단 말이오.”
“난 모르오.”
“이 늙은이가! 좋게 말할 때 순순히 말해!”
“뭐라고? 어디다 대고 반말이야? 젊은 사람이 위아래도 안 보이나?”
“도둑놈 같은 늙은이가 위아래를 따져? 내가 누군 줄 알고 감히?”
“도둑놈이라고? 그 사슴을 네가 기른 것이냐?”
“허허, 늙은것이 점점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덤벼?”
“이놈아, 내 막내아들도 너보다는 나이가 많다.”
“그래서? 내가 늙은이 손자라도 된단 말이야?”
“꽃사슴은 나라에서도 보호하는 동물이다. 네가 그것을 잡았다면 당장에 경찰서로 가자.”
“경찰서 좋아하네. 내가 그런 거 무서웠으면 여기까지 와서 올무를 놓지 않아!”
“이 놈이 그래도?”
“이놈 저놈 하지 마. 이 늙은아! 나도 나이 먹을 만큼 먹었어!”
방 안에서 두 사람이 주고받는 말을 듣는 할머니는 가슴에 불이 났습니다.
‘젊은 사람이 어찌 어른 앞에서 저럴 수 있단 말인가.’
할머니는 벌렁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포대기로 싼 품속의 아기 사슴을 꼭 안았습니다. 당장 달려 나가 젊은 사람을 꾸짖고 싶었지만 안고 있는 사슴이 그 사람 눈에 띄기라도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래서 할머니는 아무 말도 못 하고 사슴 보호하기에만 마음을 썼습니다.
할아버지가 그 사람을 잡고 소리쳤습니다.
“당장 경찰서로 가자. 너 같은 것은!”
“경찰서 좋아하네. 경찰서로 가기 전에 이 늙은이를!”
젊은 사람이 할아버지를 획 밀어뜨렸습니다. 할아버지는 한쪽으로 넘어졌습니다. 젊은이가 쓰러진 할아버지를 내려다보며 제 할 말을 해댔습니다.
“내가 쳐놓은 올무에 사슴이 잡혔다는 증거가 있어. 근처에 핏자국이 나 있고 사슴이 버르적거려서 흙이 파였단 말야. 이 늙은아, 어디다 숨겼어?”
할아버지가 몸을 추스르고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습니다.
“이놈아! 가자. 경찰서로 가자! 내가 비록 늙었다지만 너 같은 놈 하나는 끌고 갈 수 있다.”
할아버지는 온 힘을 다해 젊은 사람 멱살을 잡고 잡아당겼습니다. 젊은이는 뿌리치려고 몸을 이리저리 흔들었지만 할아버지는 생각보다 손힘이 강했습니다. 젊은이와 할아버지는 잡고 뒤틀며 비탈길을 굴러가듯 내려갔습니다.
8. 할머니만 남은 집
할아버지가 젊은이 멱살을 잡고 비탈길을 내려간 다음 할머니는 아기사슴을 방에 두고 나왔습니다.
두 사람은 서로 엉겨 붙어 티격태격 씨름을 하면서 멀리 산굽이를 돌아 사라져 보이지 않았습니다.
할머니는 떨리는 가슴을 진정치 못하고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하늘에다 빌었습니다.
“하늘 하느님, 이 막 돼먹은 세상을 어찌 가만 두고 보시기만 합니까? 세상이 험해도 너무 험합니다. 산짐승을 제가 기르기라도 한 듯 올가미로 잡는가 하면 젊은이가 위아래도 없이 돈에만 눈이 멀어 날뜁니다. 하느님이 계시고, 지금 저 꼴을 보셨다면 인륜을 버리고 날뛰는 자에게 벌을 내려 주시는 것이 옳지 않습니까?”
할머니는 따로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급박하고 가슴이 터질 듯한 감정이 북받치면 자기도 모르게 가슴으로 하나님을 찾고 소원을 빌어 왔습니다. 그러면 이상하게도 가슴에 차오른 감정이 가라앉고 평안이 오고, 바라는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할머니는 자리에서 일어나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아기 사슴이 문틈으로 할머니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할머니는 밥맛도 잃었습니다. 저녁도 사슴에게만 먹이를 주고 잠자리에 들었지만 할아버지 걱정으로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9. 종이호랑이
한편--
산비탈을 구르듯 달려가며 할아버지는 젊은 사람 멱살을 잡은 채 놓아주지 않았습니다. 젊은이는 생김새와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약한 종이호랑이였습니다.
할아버지는 산에서 단련되었기 때문에 건강하고 힘이 좋았습니다. 멱살을 잡힌 젊은이가 끌려가면서 캑캑거렸습니다.
“숨, 숨 좀 쉬게…… 해해해해.”
“너, 이놈. 이 정도를 가지고 죽는 소리를 쳐? 올무에 잡힌 사슴이 얼마나 아팠겠느냐? 사슴은 이 정도로 아픈 것이 아니었어. 그래도 죽는 소릴 쳐?”
“잘, 잘못했. 했해해해해.”
“놓아주랴?”
“네네, 네.”
할아버지가 손을 놓아주자 젊은이가 달아나기 시작했습니다.
“너 이놈, 거기 서지 못해?”
덩치가 크고 우악스럽게 생긴 젊은이가 부지런히 달아났지만 할아버지가 보시기에는 살찐 멧돼지가 뒤뚱거리며 달아나는 것 같아 허허하고 웃으셨습니다.
“덩치만 크고 달리는 건 어린애만도 못한 녀석이!”
할아버지는 처음에 그 젊은이의 몸집과 얼굴을 보고 주눅이 들어 상대도 해보기 전에 넘어졌던 생각을 하면서 또 허허허 하고 바람 빠진 소리로 웃었습니다.
‘어쨌든 녀석을 가만 두면 안 돼. 버릇을 고쳐주어야지.’
할아버지는 마치 육상선수처럼 그 뒤를 따라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산에서 노루도 따라잡은 달리기 실력으로 내달린 할아버지가 넓은 벌판 가운데서 젊은이를 걷어잡았습니다,
“멧돼지만도 못한 녀석! 어디까지 달아날 거냐?”
다시 잡힌 젊은이가 숨을 몰아쉬며 주저앉았습니다.
“헉, 헉, 헉!”
“이놈아, 그 실력을 가지고 아래위도 몰라보고 입을 놀렸어?”
젊은이는 주저앉은 채 빌었습니다.
“할아버지 잘, 잘못했습니다.”
“너의 집이 어디냐?”
“헉헉헉……”
“파출소로 갈래? 집으로 갈래?”
“파출소는…….”
“너의 집이 어디냐? 너의 집으로 가자.”
“저기, 저저…….”
할아버지는 젊은이를 끌고 한 마을 입구에 도착했습니다. 젊은이는 동네 입구 언덕 위에 빨간 양철지붕이 있는 집 외아들이었습니다.
덩치가 산돼지만한 아들이 낯선 노인 손에 잡혀 오는 것을 본 집주인이 놀라서 물었습니다.
“댁은 뉘신데 남의 아들 멱살을 잡고 오시오?”
할아버지는 틀어잡은 손을 놓으며 대답했습니다.
“미안합니다. 이 청년이 댁의 아드님이신가요?”
“네, 그렇소이다만.”
주인은 아들을 바라보고 물었습니다.
“네가 어찌 된 일이냐? 또 무슨 사고를 친 거야?”
“아무것도 아냐, 아버지……”
“이 놈아 아무것도 아닌데 저 어른이 네 멱살을 잡고 들어와?”
“아무것도 아니라니까!”
주인이 할아버지한테 물었습니다.
“제 아들 녀석이 무슨 실수라도 하였습니까?”
“실수를 한 것은 아닙니다.”
주인이 약간 노기 띤 얼굴로 말했습니다.
10. 어른의 마음
“실수도 하지 않았는데 이러십니까?”
“젊은 사람이 말을 함부로 하기에 주의를 좀 주려고 그랬습니다.”
주인이 아들한테 소리쳤습니다.
“너 또 어른한테 못할 짓을 했구나?”
“아무것도 아니라니까.”
“아무것도 아닌데 저 어른이 이러시는 거냐? 어른한테 말조심하라고 가르치지 않았더냐?”
주인은 할아버지한테 사과를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들을 제가 잘못 가르쳐서 또 실수를 한 것 같습니다. 외아들이라 어려서부터 응야응야 키웠더니…….”
“그러셨던 것 같습니다. 덩치가 크고 위세는 잘 부리는데 힘은 덩치만큼 못 쓰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요. 덩치만 크고 힘도 못 쓰지만 말하는 것도 아직 어린애 티를 못 벗어나고…….”
“요새 젊은이들이 다 예의범절을 모르고 어른 어려운 줄을 모릅니다. 허우대만 크고 외모 값을 제대로 못하는 편이지요. 이 늙은이만도 못하니 말입니다.”
“그러면서도 저 애는 제가 꽃사슴을 잡아오겠다고 날마다 산으로 돌아다닌답니다.”
“그랬군요. 사슴은 잡아 무엇에 쓰려고 그러는지요?”
이때 젊은이가 끼어들었습니다.
“아버지, 내가 사슴을 잡았는데 저 할아버지가 풀어주어서 놓쳤어.”
주인이 아들을 나무라듯 말했습니다.
“저 할아버지가 풀어 주었는지 사슴이 달아났는지 어떻게 알고 그런 소리를 하는 거냐?”
이때 할아버지가 말했습니다.
“댁의 아드님 말이 맞습니다. 누가 올무로 사슴을 옭아 놓아 고생을 시키기에 제가 풀어 주었습니다. 그 착한 동물이 목이 묶여 고생하는 것을 보니 안쓰럽고 딱해서 그랬습니다. 사람이나 짐승이나 고통 받는 것을 그냥 볼 수가 없지 않습니까. 주인어른 이해하여 주십시오.”
주인은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렇지요. 살아 있는 짐승이 죽을 지경에서 몸부림치는 것을 그냥 보고 구경만 한다면 사람이 아니지요. 잘 하셨습니다. 오늘은 날도 저물었으니 우리 집에서 하룻밤 보내시며 나하고 벗 삼아 술이라도 한잔 하고 내일 가시지요.”
그리고 주인은 아들에게 타일렀습니다.
“앞으로 어른들한테 함부로 말하지 말거라. 그리고 이 어른 앞에 정중히 사과드려라.”
아들은 할아버지가 얼마나 강한지를 알고 있어서 함부로 하지 못하고 눈치를 봐가며 한 마디 했습니다.
“안 그럴게요. 할아버지.”
“알았네. 훌륭한 아버님을 모시고 있으니 부모님 말씀 잘 듣고 효도하게.”
할아버지는 그 젊은이 집에서 하룻밤을 편하고 즐겁게 보내고 다음 날 길을 떠났습니다.
11. 돌아온 할아버지
이튿날 아침--
걱정하던 할아버지가 하얀 눈밭에 환히 내리는 햇살을 밟고 보따리 하나를 메고 돌아오셨습니다.
할아버지를 보는 순간 할머니 걱정은 밝은 아침 햇살과 함께 안개 걷히듯 사라졌습니다.
“영감, 별일 없으셨수?”
“별일은, 걱정 많이 했구려?”
“그렇게 가시고 안 오시는데 걱정이 안 되겠어요? 어떻게 된 거예요?”
“잘 되었지. 그 녀석 덩치만 황소만하지 종이호랑이였어. 그래 가지고 제가 무슨 사슴을 잡는다고 하는지.”
“잡기야 잡았잖수? 당신이 그래서 그랬지.”
“그래서 그랬지, 하하하하.”
“그 보따리 속에는 무엇이 들었수?”
“그 녀석 집까지 데려다주고 얻어왔지.”
“얻어 오다니요?”
“그 녀석, 아버지는 아주 좋은 분이셨소. 덕분에 하룻밤 잘 자고 돌아오는데 이런 것까지 주지 않겠소.”
그 안에는 산에서는 구하기 어려운 김과 미역과 건어물이 차곡차곡 들어 있었습니다.
“이게 다 뭐예요?”
“그 젊은 사람의 삼촌이 완도에서 큰 어물상을 하는데 가을마다 이렇게 귀한 것을 넉넉히 보내준다는구려. 여름내 먹어도 못 다 먹고 남는 것은 남들한테 나누어 주었다면서 싸 주어서 가지고 왔소.”
“고맙기도 하네요. 난 그런 줄도 모르고 그 젊은이한테 당신이 크게 망신이나 당하지 않았나 하여 밤새도록 걱정을 했다우.”
“나도 처음에는 그 녀석 몸집이 좋아서 겁을 좀 먹었는데 막상 멱살을 잡아 보니 종이호랑이입디다. 그래서 혼 줄을 내주고 그 사람 집으로 데리고 가서 하룻밤 잘 쉬고 왔소.”
그 후 하루 이틀이 가고 여름이 깊어지고 산속에는 머루와 다래가 한창이었습니다.
아기 사슴도 여름이 되자 할머니가 안고 다닐 수 없을 만큼 자랐습니다. 이제 아기가 아니라 어미보다 더 큰 사슴이 되었고 잘 때도 전에는 할머니가 안고 잤는데 이제는 사슴이 할머니를 안고 잡니다.
할아버지는 밭에서 일을 하고 할머니는 산에서 나물을 뜯어다 겨울 준비를 했습니다.
산에 산나물을 뜯으러 가면 할머니보다 사슴이 더 빠르게 뛰어 다니며 나무 열매를 따다가 망태기에 담았습니다.
사슴은 다래를 아주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할머니가 사슴을 다래라고 불러 보았습니다.
“넌 다래 킬러라고 해야겠다.”
다래라고 하는 말에 사슴이 앞발을 높이 치켜들고 좋아서 껑충껑충 뛰었습니다.
“그렇게 좋으냐? 이름을 지어주어서 그래?”
사슴은 또 그렇다는 표정으로 앞발을 높이 들고 끽끽끽 소리를 질렀습니다.
할머니는 사슴을 데리고 다니며 먹을거리를 이것저것 따 모았습니다.
가을이 가까워질 무렵 어디서 나타났는지 커다란 수사슴이 집 둘레를 어슬렁거리고 돌았습니다. 그러고 보니 아기 사슴 다래도 다 커서 암내를 풍기는 처녀 사슴이 되었던 것입니다.
암내를 맡은 수사슴이 장가를 들겠다고 와 있다는 것을 안 할머니는 나직한 소리로 중얼거렸습니다.
“너도 떠날 때가 되었구나. 수사슴이 오는 걸 보니 시집을 가게 되나 보다.”
할머니 생각대로 암사슴 달래는 아무도 모르게 수사슴을 따라 집을 나갔습니다.
사슴을 자식처럼 아끼고 돌보고 거둔 할머니는 그만 넋을 잃을 정도로 허망했습니다. 집안이 텅 빈 것 같고 허전하기가 할아버지가 떠나던 날보다 더했습니다. 할머니 가슴은 속이 빠져나간 허수아비 가슴처럼 텅 비었습니다.
“다래야, 어디로 간 거냐? 다래야. 돌아와라. 돌아와.”
12. 꽃사슴이 아기 났어요
겨울이 깊어졌습니다. 산에는 눈이 하얗게 내리고 밤마다 모진 바람이 사나운 소리를 내며 창문을 할퀴고 지나갔습니다.
할머니가 사슴 걱정을 했습니다.
“그것이 이 추위에 어디서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할아버지도 걱정이 되어 말했습니다.
“짝 따라 갔으니 어디서든 잘 지내겠지. 정이 뭔지, 하찮은 산짐승이지만 나도 보고 싶소. 어디서 잘 지내고 있는지 걱정도 되오.”
“겨울에는 추운데 우리 집으로 와서 겨울이나 나고 나갔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런 걸 알면 짐승이 아니지.”
“산짐승이었지만 꼭 자식을 데리고 살았던 것 같아요.”
“정들면 짐승이나 사람이나 같은 거 아니겠소. 잘못 만나면 산짐승만도 못한 사람도 있는 세상이니…….”
할머니 할아버지는 날이 춥고 바람이 몹시 부는 날은 사슴 걱정을 더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입니다. 눈이 얼마나 많이 내렸는지 추녀 밑까지 눈이 쌓였습니다.
할머니가 아침을 하려고 일어났을 때 부엌에서 끽끽거리는 사슴 소리가 들렸습니다.
‘혹시 사슴이 돌아온 게 아닐까?’
할머니가 문을 빠끔히 열고 내다보았습니다. 부엌에는 커다란 수사슴과 암사슴 다래가 웅크리고 있었습니다. 가만히 지켜보았습니다. 암사슴 다래가 새끼를 낳고 있었습니다.
할머니가 속삭이듯 할아버지한테 말했습니다.
“염감, 사슴이 돌아왔어요.”
“사슴이?”
“쉿! 조용히 해요. 우리 사슴이 새끼를 낳고 있어요.”
“새끼를?”
“그래요. 저것들이 새끼를 낳으러 왔어요.”
“눈이 이렇게 많이 왔으니 저것들도 갈 곳이 마땅치 않았던 것 같소.”
“어떡하면 좋을까요?”
“어떡하긴, 기다렸다가 새끼를 다 낳으면 우리 윗방에 들여서 살게 해야지.”
“그래야겠지요?”
그렇게 한나절이 지났을 때 어미가 새끼를 나아 핥아주고 있었습니다. 할머니가 문을 조심스럽게 열고 나갔습니다.
“다래야, 다래야, 돌아왔구나. 반갑다.”
사슴은 눈물이 글썽한 눈으로 할머니를 바라보았습니다. 그 눈빛에는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었습니다.
“할머니, 미안해요. 눈이 너무 많이 와서…….”
할머니는 그 눈빛을 보고 대답했습니다.
“알았다. 잘 왔어. 네 짝까지 같이 왔고 또 새끼까지 낳아 네가 엄마가 된 거야. 잘했다. 고맙다.”
뒤따라 나온 할아버지가 담요를 들고 새끼 사슴을 감싸고 어미 사슴이 된 다래에게 윗방으로 들어가라고 밀었습니다.
어미 사슴은 알아듣고 윗방으로 들어갔습니다. 할머니가 수사슴한테 말했습니다.
“너도 들어가거라.”
그러나 수사슴은 안 들어가고 문 앞에서 앞다리를 접고 앉아 경계를 하겠다는 시늉을 했습니다. 그것을 알고 할아버지가 말했습니다.
“알았다. 너는 거기서 망을 보겠다는 모양인데 그렇게 하거라.”
새로 태어난 사슴은 암컷이었습니다. 그렇게 들인 사슴 모녀는 할머니 윗방에 살게 되었고 수사슴은 밤에는 부엌에서 자고 낮에는 집 주위를 경계하는 경비원 노릇을 잘해냈습니다.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사슴들에게 맛있는 먹이를 주고 낮에는 새끼를 안고 들어와 쓰다듬으며 즐거운 나날을 보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암사슴이 눈을 뚫고 나갔다가 저녁나절에 돌아왔습니다. 할머니가 걱정을 하다가 돌아오는 암사슴을 보고 달려 나갔습니다.
“추운데 어디를 그렇게 다니다 오는 거냐?”
암사슴은 입에 빨갛고 고운 버섯을 물고 있었습니다.
“그게 뭐냐?”
암사슴이 그것을 할머니 입에다 밀어 넣어주었습니다.
“이게 무슨 짓이야?”
할머니가 꾸짖었지만 사슴은 먹으라는 시늉을 계속했습니다.
“이걸 먹으라고?”
사슴이 할머니 입에다 넣어 주었고 할머니는 그것을 받아 코에다 대고 냄새를 맡았습니다.
“이렇게 눈이 많이 내린 산속 어디에서 이런 걸 구해 온 거냐? 향긋한 냄새가 좋구나. 네가 먹으라니 먹어 보마.”
할머니는 그것을 먹었습니다. 향기만큼이나 달콤하고 맛이 좋았습니다. 그 날 밤 할머니는 깊은 잠에 빠져 아주 단잠을 잤습니다. 잠에서 깼을 때 갑자기 몸이 하늘에 붕 뜬 기분에 가볍고 상쾌했습니다.
그런데 아침부터 설사가 나기 시작하여 그치지 않았습니다. 할아버지가 걱정이 되어 물었습니다.
“무얼 잘못 먹은 것 아니오?”
“아니에요.”
할머니는 사슴이 준 것을 먹고 병이 난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할아버지가 사슴을 미워할까 보아 어제 이상한 빨간 버섯을 먹었다는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할머니는 온 종일 설사를 하고 밥도 못 먹었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다음 날도 또 다음 날도 온 몸의 물이 따 빠져나가고 이제는 전신에 부어오르기 시작했습니다.
13. 영약을 찾아서
그러나 정신은 점점 맑아지고 배도 고프지 않았습니다. 할아버지가 걱정이 되어 말했습니다.
“아무래도 위험한 병 같소. 내가 내려가 아는 유명한 한의원으로 가 약을 구해 오리다. 한나절이면 다녀올 것이오.”
할아버지는 급한 마음에 할머니 말도 안 들어보고 산을 내려갔습니다. 한나절이면 오겠다던 할아버지는 해가 지고 밤이 새어도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할머니가 자리에 누워 잠깐 잠이 드는 듯했는데 꿈결인 듯 몽롱한 정신으로 배가 고프다고 생각할 때 입에 부드러운 무엇이 물렸습니다. 아주 향긋하고 달콤한 것이었습니다.
할머니는 자기도 모르게 그것을 잡고 빨았습니다. 배가 차오르고 기운이 나서 눈을 떴을 때 깜짝 놀랐습니다. 사슴 다래가 제 물린 채 젖을 빨리고 있었습니다.
사슴 젖꼭지에서 젖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내가 네 젖을 먹은 거냐?”
할머니가 놀라 일어나 앉으며 묻자 사슴이 눈으로 말했습니다.
“할머니, 염려 마. 내 젖 맛있어?”
“그래, 아주 달콤하고 향기롭고 좋았다.”
“할머니, 고마워.”
“고맙기는…… 내가 고맙지.”
“할머니, 날마다 내 젖 먹어.”
“알았다. 밥보다 네 젖이 더 좋아 걱정이다.”
할아버지는 사흘이 넘도록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할머니는 걱정으로 잠을 못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곁에서 따듯하게 품어주고 젖을 빨려 주는 사슴이 있어서 외롭지도 않고 배도 도프지 않았고 설사도 이미 그치고 기분이 상쾌했습니다.
한편 약을 구하러 간 할아버지는 첫 날 안면이 있는 유명한 한의원 원장을 만나 사정 이야기를 했습니다.
“아내가 갑자기 설사를 하는데 그치지 않습니다. 며칠째 밥도 못 먹고 있습니다.”
“전에 무엇을 잘못 먹은 건 아닐까요?”
“아무것도 안 먹었답니다. 그런데 웬 설사를 그렇게 많이 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리고?”
“예, 보통 같으면 설사할 때 나쁜 냄새가 나는 법인데 이상하게 온 집안에 라일락 향기 같은 진하고 좋은 냄새가 진동을 합니다.”
한의사가 한의서를 들여다보다가 물었습니다.
“혹시 환자가 부어오르는 기색은 없던가요?”
“네, 부어오르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경우는 사향을 먹어야 낫는데……”
“사향이 있습니까?”
한의사는 고개를 저었습니다.
“그건 아주 귀한 것이라 여기서는 구할 수가 없고 동쪽으로 백리를 가시면 거기 저를 가르치신 유명한 선생님이 계십니다. 그 선생님이라면 혹시 가지고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할아버지는 그 유명하다는 한의원을 찾아 백리 길을 떠났습니다. 급한 마음에 밤새도록 얼마나 달렸는지 다음날 새벽에 그 한의원을 찾았습니다.
한의원 원장은 머리가 하얀 노인이었습니다. 할아버지가 할머니 병세를 말하고 간절히 부탁했습니다.
“원장님, 한 시가 급합니다. 원장님께서는 사향을 가지고 계실 거라고 해서 왔습니다. 저한테 약을 지어 주십시오.”
원장은 고개를 저었습니다.
“늦었소이다. 사향은 어제 다른 사람이 사가고 없습니다. 그런 증상에는 사향보다 더 좋은 약이 있지만 저는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게 무슨 약입니까?”
“홍녹지라는 것인데, 말하자면 사슴이 오줌을 싸놓은 자리에서 나는 빨간 버섯이오. 그것은 천 년에 한 번 돋는데 한겨울 눈 속에 잠깐 피었다 지는 버섯이라 하오. 나도 보지는 못하고 듣기만 했소.”
“그걸 어떻게 구합니까?”
“그걸 구할 수 있으면 당신 차례까지 오겠소? 큰 부자나 높은 벼슬자리에 있는 사람이나 살 수 있을까……”
“그렇게 좋은 약입니까?”
“그것을 먹으면 자기 나이보다 배가 젊어진다는 영약이오. 그래서 그것을 젊어지는 버섯이라고도 한다오.”
할아버지는 크게 실망했습니다. 그 낙심한 모양을 본 한의원 원장이 딱하다는 듯 일러주었습니다.
“어쩌면 그 홍녹지(紅鹿芝)는 여기서 북쪽으로 백리쯤 되는 곳에 가면 나를 가르치신 선생님께서 가지고 계실지 모르겠소.”
“거기가 어딥니까?”
“어쩌면 가 보셔도 소용이 없을 것 같소.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비싸고, 구하자면 천년에 한 번이나 구할까말까 한 영약이니 말이오.”
“제 아내를 살리는 길이라면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길만 가르쳐 주십시오.”
“그럼…….”
할아버지는 그 원장이 가르쳐 준 대로 또 길을 떠났습니다.
14. 큰 실망
할아버지는 또 하루를 달려 그 유명하다는 한의원을 찾아갔습니다. 제자를 줄줄이 길러냈다는 그 원장님은 정말 세상에서 보기 드문 백 호랑이 같은 인물이었습니다.
머리털은 눈처럼 하얗고 가슴까지 흘러내린 수염은 백장미보다 희고 부드럽게 흘러내려 산들 바람에도 위엄 있게 흔들렸습니다. 대추 빛 얼굴에 형형한 눈빛에서는 사람을 찍어 누르는 힘이 쏟아지고 있었습니다.
“원장선생님, 저 좀 도와주십시오.”
할아버지는 그 동안 두 한의사에게 했던 말을 똑같이 했습니다.
“제가 만난 두 분 의원은 선생님의 제라면서 제가 구하려는 홍녹지라는 영약을 선생님은 가지고 계실 거라 하여 이렇게 찾아 왔습니다.”
백 살은 되어 보이는 한의원 원장이 우렁우렁한 목소리로 위엄 있게 대답했습니다.
“그 귀한 약을 어디서 구한단 말이오. 나도 그런 영약이 있다는 것을 한의서를 통하여 알기는 했지만 세상에서는 구할 수 없는 영약으로 아오.”
“그게 그렇게 귀한 약입니까?”
“귀하다마다요. 그것은 일종의 버섯인데 꽃사슴이 사는 깊은 산속에서 사슴들이 싸놓은 오줌 자리에서 아주 추운 겨울에 눈이 많이 내리면 천년 만에 한 번 돋았다가 바로 지는 버섯이라 하오. 그걸 본 사람도 없지만 더구나 먹었다는 기록은 전설 같은 이야기일 뿐이오.”
“그럼, 어찌해야 저의 아내를 살릴 수 있습니까?”
“당신 아내는 이미 죽었을 것이오. 집을 떠나온 지 며칠이오? 건강한 사람도 이 추위에 속이 다 빠져나가도록 설사를 했다면…….”
원장은 중얼중얼하다가 눈을 번쩍 뜨고 물었습니다.
“가만! 설사를 할 때 진한 꽃향기가 났다고 했소?”
“네, 그렇습니다.”
“음, 그러면 혹시 그것을…….”
원장은 말을 얼버무리고 고개를 가로저었습니다.
“그럴 리가 없지. 그렇다면…….”
“무슨 말씀이신지요?”
원장은 혼자 또 중얼거렸습니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지금 어디서 그것을 구한단 말인가?”
“네? 무슨 말씀이신지요?”
“한 가지 처방이 있기는 한데 불가능한 방법이 있을 뿐이오.”
“무슨 방법입니까?”
“한겨울에 어디서 꽃사슴을 만나노…….”
“꽃사슴이라고 하셨습니까?”
“그렇소. 그런 환자한테는 암꽃사슴의 젖이 좋다고 했소. 그것을 먹으면 낫는다고 했는데 이 겨울에 기적이 아니면 그것을 구하기는 어려운 일이오.”
“꽃사슴 젖을 먹으면 고칠 수가 있습니까?”
원장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렇소만, 댁의 아내가 영약이라고 알려진 홍녹지를 먹었을 리도 없고, 먹었다 하더라도 어디 가서 이 겨울에 꽃사슴 젖을 구할 수 있겠소.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당신 아내는 이미 열흘 가까이 설사를 하고 굶었으니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것이오. 괜한 고생 말고 돌아가서 장사나 잘 지내주고 당신이나 잘 사시구려.”
할아버지는 완전히 실망하여 온 몸의 기운이 한꺼번에 쏙 빠져나가서 집으로 돌아갈 기운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집에서 어떻게 되었을지 모르는 아내를 생각하고 힘을 내어 길을 걸었습니다.
“제발 내가 갈 때까지 죽지만 말고 살아 있으시오. 꼭 살아 있으시오.”
달려가는 할아버지 눈에서는 눈물이 펑펑 쏟아졌습니다.
15. 아! 행복해!
할아버지가 집에 도착했을 때는 해가 서산에 걸려 졸고 있었습니다.
아내가 굶어 죽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무거운 발걸음으로 쪽마루에 걸터앉았습니다. 그런데 방에서 맑고 아름다운 여자 웃음소리가 새어나왔습니다.
‘아니, 저 목소리는 젊은 여자가 아닌가. 웬 사람이 우리 집에?’
할아버지는 놀라서 귀를 기울였습니다. 누군지 알 수 없는 젊은 여자 목소리였습니다.
“호호호, 나를 그렇게 누르면 숨이 막힌다. 좀 떨어져 봐.”
할아버지는 문틈으로 방안을 들여다보았습니다. 목소리처럼 젊은 여자가 사슴 젖을 빨면서 하는 소리였습니다.
‘저게 누구야? 마누라는 어디 가고 낯선 여자가 와서 저러다니…….’
노여운 할아버지는 허리를 쭉 펴고 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소리쳐 물었습니다.
“당신 누구야?”
그 소리에 놀란 사슴이 물러나고 여자가 벌떡 일어서며 소리쳤습니다.
“영감! 영감!”
할아버지는 여자를 꾸짖었습니다.
“당신이 누군데 남의 집에 와서 이러고 있어? 누구 줄 알고 영감이라는 거야? 엉?”
“영감, 무사히 돌아오셔서 고마워요.”
“당신이 누군데 나를 영감, 영감하오?”
“왜 이러시우? 당신답지 않게 농담도 잘하셔!”
“이 집 주인은 어디 갔소?”
“주인이라니요? 내가 주인이잖아요?”
“당신 말고 할망구 어디 갔느냐 말이오.”
“내가 당신 할망구지 누구요?”
“허허, 젊은 사람이 늙은이를 놀려?”
“젊다니요? 영감 왜 갑자기 마음이 변하셨나? 나도 몰라보고 그러시우?”
“당신 이름이 뭐요?”
“남봉순이 아닌가요. 당신은 서병우고요.”
“그걸 어떻게 알았소?”
“어떻게 알다니요. 내 이름 내가 알고, 당신 이름 내가 아는 게 뭐 이상해요?”
할아버지는 갑자기 한의원이 하던 말이 생각났습니다.
‘그 홍록지를 먹으면 나이가 반으로 줄어들 만큼 젊어지는 영약이오.’
할아버지는 젊어진 아내를 생각하며 물었습니다.
“당신이 내 마누라 맞소?”
“여기 내 팔에 칠성점이 있잖아요? 영감이 복점이라고 하던 점, 그것도 잊으셨수?”
할아버지는 그제야 젊어진 자기 아내라는 것을 알고 큰소리로 아내를 부르며 끌어안았습니다.
“여보! 마누라 고맙소, 살아 있었구려.”
“당신이 더 고마워요. 이렇게 돌아오셨으니!”
부부는 감격하여 부둥켜안았습니다. 곁에서 지켜보던 사슴 다래도 좋아서 앞다리를 높이 치켜들고 쫙 벌려 두 부부를 안았습니다.
이때 새로 태어난 아기 사슴이 할아버지 할머니와 엄마 사슴이 얼싸안은 다리 사이로 들어가 앞발을 접고 앉아 예쁜 소리로 종알거렸습니다.
“아! 따듯하다. 아아! 행복해!”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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