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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린왕자

웃는곰 2013. 4. 23. 09:23

나는 어린왕자

2013.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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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오줌싸개 왕자

나는 잠자리에서 일어나 할머니한테 말했습니다.

“할머니, 나 오줌 쌌어!”

할머니가 웃으시면서 바라보셨습니다.

“오! 우리 어린왕자님께서 큰일을 하셨군.”

“할머니, 나 오줌 쌌다니까!”

“알았다, 왕자 녀석아!”

“할머니, 왜 웃기만 해?”

“네가 오줌을 쌌다고 큰소리를 치니까 신통해서 웃는다.”

“왜 야단치지 않아?”

“네 나이 때는 오줌도 싸고 코도 흘리는 거야. 그래서 너는 아직 어린이라는 거다. 이제 너를 오줌싸개 왕자라고 불러줄까?”

“싫어! 어린왕자가 좋아.”

“요가 푹 젖었지? 비켜라. 걷어서 빨아야지.”

“엄마가 알면 어떡해?”

“괜찮다, 엄마도 너 만할 때 오줌 싸가지고 부끄러워서 장롱 속에 숨겼다가 할머니한테 들켜서…….”

“엄마가 오줌을 쌌다고?”

“어려서는 누구나 오줌도 싸고 똥도 싸고 아무것도 아닌 것을 부끄러워하고 숨긴단다. 그래서 어린애인 거야.”

“할머니, 난 안 부끄러운데?”

“그래서 너는 왕자님이지. 잘못을 숨기지 않고 당당히 자랑하듯 말하는 너는 멋진 어린왕자님이야.”

“옆집 아이들도 오줌을 쌀까?”

“그럼, 다 싸놓고 어른들한테 들킬까봐 숨긴단다. 너처럼 당당히 말하는 아이들은 많지 않아. 그래서 넌 신통해.”

나는 입에 손가락을 세워 대고 말했습니다.

“할머니, 엄마한테는 비밀!”

할머니도 웃으시면서 손가락을 입에 대셨습니다.

“알았다, 비밀!”

이렇게 하여 나는 할머니가 어린왕자라고 부르셨고 우리 집에서는 어린왕자가 되었습니다.

2. 이상한 청소부

내가 유치원 안 가는 날은 어디 사는지 모르는 아저씨가 나타나 빗자루와 쓰레받기를 들고 동네 골목 청소를 하십니다.

그 아저씨는 검은 운동모자에 검은 안경을 쓰고 검은 마스크에 검은 작업복, 검은 운동화, 검은 쓰레받기, 검은 빗자루를 들고 청소를 하여 마치 커다란 개미처럼 보입니다.

얼굴이 어떻게 생겼을까 궁금한 나는 그 아저씨를 따라가 인사를 했습니다.

“아저씨, 안녕하세요?”

“오냐, 넌 누구냐?”

“저요? 이름이 둘인데요 나중에 가르쳐 드릴게요.”

“허허, 꼬마 녀석이 재미있구나.”

“아저씨,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요.”

“뭐냐?”

“아저씨는 청소부인가요?”

“허허, 네가 보기에 청소부 같으냐?”

“청소부같이 생긴 사람이 따로 있나요?”

“그럼 왜 청소부냐고 묻느냐?”

“아저씨는 토요일마다 골목 청소를 하시잖아요?”

“그것을 네가 어떻게 아느냐?”

“보았으니까 알지요, 골목 청소를 하면 아저씨한테는 누가 돈을 주나요?”

“돈?”

내가 큰 소리로 힘주어 말했습니다.

“누가 월급을 주느냐고요?”

“월급이라고 했느냐? 네가 그런 말도 알아?”

“네.”

“아무도 주지 않는다.”

“그런데도 골목 청소를 해요?”

“그래, 내가 청소를 하면 다른 사람들이 웃으며 지나간다. 넌 그걸 아느냐?”

“몰라요.”

“내가 쓸어서 깨끗해진 길을 사람들이 웃으며 걸어가면 그게 내 월급이다.”

“그게 무슨 월급이에요?”

“내가 늘 다니는 골목길을 청소하고 다니고 싶어서 하는 일이니까 월급은 바라지 않는다.”

“이 골목을 아저씨 혼자 다니는 건 아니잖아요?”

“그렇지, 너도 다니고 너희 집 식구도 다니고, 또 다른 사람도 다니지.”

“아저씨, 저도 청소할까요?”

“네가?”

“네, 저도 할 수 있어요.”

“그러면 고맙지.”

“지금부터 시작할게요.”

나는 골목길 여기저기 날아다니는 낙엽과 종이와 버려진 담배 갑과 비닐 쪼가리를 주웠습니다. 아저씨는 좋아하셨습니다.

“고맙다. 그런 것들이 쓸어 모으면 바람에 날아 흩어져서 불편했는데 네가 도와주니 아주 좋구나.”

“나도 잘 하지요?”

“그래, 너도 잘한다. 이제 다 했으니 이리 오너라.”

아저씨는 나를 데리고 골목 끝에 있는 슈퍼로 갔습니다. 그리고 우유와 빵을 사주셨습니다.

“네가 도와주어서 빨리 끝났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이제 가르쳐주겠니?”

“네, 제 이름은 박윤재인데요, 우리 집에서는 어린왕자라고 불러요.”

“어린왕자? 그 이름 참 좋구나. 나도 너를 어린왕자라고 불러도 되겠느냐?”

“네, 좋아요. 그런데 아저씨는 왜 얼굴을 그렇게 가리셨어요?”

“먼지가 나서 그런다.”

“아저씨 얼굴이 보고 싶어요.”

“내 얼굴이?”

“네.”

“그럼 보여 줄까?”

아저씨는 모자, 안경, 마스크를 벗으며 물었습니다.

“어떠냐?”

“네!!?”

나는 아저씨 얼굴을 보고 깜짝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습니다.

3. 나 애인이 생겼어요

내가 생각한 건 아저씨였는데 모자를 벗은 아저씨는 왕대머리, 얼굴은 주름살이 많은 할아버지였습니다. 그래서 물었지요.

“아저씨가 아니잖아요?”

“네가 아저씨라고 불러서 나는 기분이 좋았는걸.”

“그럼 할아버지, 하지 말고 아저씨라고 불러도 좋아요?”

“그래라. 나는 할아버지 소리가 싫다.”

“그렇지만 왕대머리잖아요?”

“왕대머리가 뭐냐?”

“할. 아니, 아저씨 대머리가 만져보고 싶어요.”

“왜?”

“반들반들해서 얼마나 미끄러운지…….”

“그럼 만져 보거라.”

할아버지는 내 앞에 머리를 내밀었습니다. 나는 겁이 났지만 한번 만져보고 싶어서 대머리를 쓰다듬어 보았습니다. 할아버지가 웃으며 물었습니다.

“어떠냐?”

“할, 아니 아저씨, 미안한 생각이 들어요.”

“괜찮다. 내가 만져보라고 했으니 미안할 것 없다.”

이렇게 하여 나는 골목청소를 하는 아저씨와 친하게 되었습니다.

아저씨와 다음 토요일에 또 만나기로 하고 집으로 와서 아빠한테 물어보았습니다.

“아빠, 우리 골목이 왜 깨끗한지 알아?”

“그야 청소부가 청소를 해서 깨끗한 거지.”

“아빠, 그 청소부가 누군지 알아?”

“바쁜 내가 청소부까지 알아서 뭘 해?”

“아빠는 출근하지 않는 날은 낮잠만 자면서.”

“토요일이 아니면 언제 낮잠 한번 자겠느냐.”

“아빠하고 다른 사람도 있어.”

“네가 별 소리를 다 하는구나. 누가 아빠하고 다르다는 거야?”

“우리 골목을 월급도 안 주는데 청소하는 아저씨.”

“월급도 안 받고 청소를 한다고? 세상에는 바보 같은 사람도 많으니까.”

“그 아저씨는 바보가 아니야.”

“바보가 아니면 밥 먹고 할 일이 없어서 골목 청소를 해?”

“아빠는 몰라.”


나는 그 아저씨가 보고 싶어서 토요일이 빨리 돌아오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느림보 토요일은 몇 밤을 건너서 왔습니다. 나는 골목으로 가갔습니다. 어느새 오셨는지 그 할아버지가 청소를 하고 계셨습니다.

나는 할아버지라고 했다가 아저씨라고 했다가 헷갈리지만 어쩔 수 없어요. 모자 쓰고 검은 안경 쓰면 아저씨, 벗으면 할아버지니까요. 생각할 때는 할아버지, 부를 때는 아저씨입니다.

“아저씨, 안녕하세요?”

“그래, 어린왕자 왔구나.”

나는 여기저기 굴러다니는 깡통, 담배 갑, 나뭇잎을 주워 모으며 월요일에 있었던 이야기를 했습니다.

“아저씨, 나 사랑하는 애가 생겼어요!”

“그러냐? 어떤 애인데?”

“유치원에서 우리 반 여자 애가요, 저한테 편지를 보냈어요.”

“무슨 편지냐?”

“그 애가 비뚤배뚤한 글씨로 나를 아주 많이 사랑한다고 썼어요. 내가 잘 생겼고 멋져서 사랑한대요.”

“그래서 넌 뭐라고 했지?”

“나는 그 애보다 옆자리 다른 애를 더 좋아해요. 그래서 그 애가 준 편지를 내가 좋아하는 여자 애한테 주었지요.”

“그랬더냐?”

“그런데요, 그 애가 저한테 받은 편지를 다른 옆 자리 애를 주는 거예요.”

“그래서?”

“다른 그 애는 또 제가 좋아하는 다른 애한테 준 거예요.”

“편지가 돌아가는구나?”

“그런데요, 어떤 애가 썼는지 모르는데요. 편지 받은 애가 ‘나는 너를 안 좋아해. 다시는 이런 편지 보내지 마’ 하는 편지를 써서 주었고요, 그 편지를 받은 아이는 또 먼저 편지 보낸 아이한테 주었어요.”

“그거 참 재미있구나. 사랑한다는 편지가 오른쪽으로 돌아가는데 사랑하지 않는다는 편지가 왼쪽으로 돌아오는 거 아니냐?”

“그런데요. 사랑한다는 편지가 돌아서 처음에 나한테 보낸 여자애 손에 돌아온 거예요.”

“허허, 재미있구나.”

“그런데요, 사랑하지 않는다는 편지를 내가 좋아하는 여자아이가 받아서 나를 준 거예요.”

“그래서?”

“그 편지를 받고 나는 슬펐어요.”

“그럼 네가 쓴 편지를 받은 네 옆 아이는 어떨까?”

“그 애가 또 나한테 주었어요.”

“허허. 넌 두 번 받았구나.”

“그래서 내가 받아 가지고 있던 편지를 그 애한테 주었어요.”

“그랬더니?”

“그 애가 눈을 흘기면서 머리를 책상에 박고 우는 척하는 거예요.”

4. 거북이와 토끼 이야기

“넌 올해 일곱 살이지?”

“네.”

“남녀 칠세 부동석이라더니 틀린 말이 아니로구나.”

“그게 무슨 말이에요?”

“이담에 알게 된다.”

“그 애도 슬펐을 거예요. 아저씨, 저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어렸을 때는 다 그렇게 하면서 자라는 거다. 걱정할 것 없어. 너희들이 유치원을 마치고 초등학교에 들어가면 또 새로운 친구를 만나고 새 친구와 어울리다 보면 유치원 친구는 잊게 된단다.”

“그래도 난 지금 좋아하는 아이를 안 잊을 거예요.”

“그렇게 생각하지? 그렇지만 네가 더 자라면 네 생각도 바뀐단다.”


할아버지와 나는 이야기하면서 골목 청소를 다했습니다. 할아버지는 나를 데리고 그 슈퍼로 가서 우유와 빵을 사주시었습니다.

나는 집에서 올 때 아빠가 안 쓰시는 모자를 하나 가지고 나왔습니다. 아빠는 그 모자를 쓰면 늙은이 같다고 안 쓰시는데 나는 그 모자를 할아버지한테 드리면 좋겠다고 생각했지요.

“아저씨, 선물 드릴까요?”

“선물?”

“모자예요.”

“모자?”

“청소할 때 쓰는 모자를 벗었을 때는 이 모자를 쓰시면 좋겠어요.”

“그게 무슨 말이냐?”

“이거 써 보셔요.”

나는 모자를 내밀었습니다. 할아버지는 웃으시면서 모자를 받으셨습니다. 하얗게 보이지만 노르스름한 챙에는 무궁화가 찍혀 있고 앞에는 날개를 편 금색 독수리 그림이 있습니다. 할아버지가 그 모자를 쓰고 웃으시며 물었습니다.

“어떠냐?”

그 모자를 쓰신 할아버지는 진짜 아저씨처럼 보였습니다.

“아저씨, 멋져요.”

“그러냐? 나도 맘에 든다.”

“멋진 모자를 쓰시니까 할아버지 같지 않아요.”

“고맙다.”

할아버지와 나는 헤어지기가 싫어서 어린이 놀이터로 갔습니다.

할아버지는 놀이터 벤치에 앉으시고 나는 그 아래 풀밭에 앉아 올려다보면서 말했습니다.

“아저씨, 재미있는 얘기해 주세요.”

“무슨 이야기를 해 줄까? 토끼와 거북이 이야기를 들어 보았느냐?”

“그게 뭔데요?”

“아직 학교에 안 들어가서 모르겠구나.”

“학교에 가면 배우나요?”

“그래, 학교에 가면 국어책에 있는 이야기란다.”

“아저씨가 해 주세요.”

“그러마. 저기 비탈을 보아라.”

할아버지는 공원 앞에 비탈진 잔디밭을 가리켰습니다. 잔디가 곱게 자란 언덕 꼭대기에는 커다란 나무 한 그루가 보였습니다.

“언덕 위에 나무가 구름을 머리에 이고 있어요.” 

“그렇구나. 구름이 나무에 얹힌 것처럼 보이는구나. 내 이야기 잘 들어 보아라. 어느 날 토끼하고 거북이가 경주를 했단다. 언덕 아래서 똑같이 땅! 하고 달리기 시작하여 언덕 위에 있는 나무까지 누가 먼저 가나 경주를 했지. 네 생각에 거북이하고 토끼하고 달리기를 하면 누가 이길 것 같으냐?”

“당근, 토끼가 이기지요. 거북이는 느리잖아요.”

“당근이 뭐냐?”

“당근이 당근이에요. 나도 잘 몰라요.”

나는 형들이 하는 말을 들어서 이럴 때는 당근 하고 말하면 어울린다고 생각해서 해 본 거예요.

“허허 녀석, 모르면서도 당근 하는 것을 보니 넌 어린애가 맞구나. 토끼하고 거북이가 땅! 하고 달리기 시작을 했는데 토끼가 한참 가다 보니 거북이가 저 아래서 엉금엉금 기어오고 있는 거야. 그래서 토끼가 거북이 보고 ‘빨리 와라’ 하고 소리를 지르고 뽐내면서 ‘난 여기서 한숨 자고 가야겠다.’ 하고 풀밭에 누워 쿨쿨 잤단다. 한참을 자고 일어나서 거북이가 어디쯤 오나 하고 비탈을 내려다보니 거북이가 안 보이는 거야.”

“거북이가 숨었나요?”

“숨은 게 아니라 토끼가 자는 동안 거북이가 열심히 기어서 나무가 있는 언덕 위까지 먼저 올라간 거지. 경주에서 이긴 거북이가 ‘토끼야! 나 여기 있다!’ 하고 소리를 지르지 않겠니?”

“토끼가 졌나요?”

“누가 먼저 올라갔느냐?”

“거북이요.”

“그러니까 거북이가 이긴 것 아니냐? 토끼는 왜 졌는지 아느냐?”

“잠을 잤으니까요.”

“이 이야기는 무슨 일을 하든지 꾸준히 해야지 중간에서 딴 짓을 하면 안 된다는 것을 가르치는 동화란다. 너도 무엇을 하든지 꾸준히 하는 버릇을 가져야 한다.”

할아버지는 아주 재미있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런데 나는 이상한 생각이 든 거예요.

“이상한 생각이 들어요. 아저씨.”

“무슨 생각이냐?”

“거북이가 비겁해요.”

“왜?”

“올라가다가 토끼가 누워 있으면 토끼가 왜 누워 있는지 알아보았어야 해요.”

“왜?”

“토끼가 달려가다가 힘이 들어서 병이 나서 누웠는지, 죽었는지 알아보았어야 해요.”

“허허, 그런 생각을 했느냐?”

“경주를 하는 것이지만 서로가 아껴주는 마음은 있어야 해요. 그리고 토끼가 잠이 들었으면 다시 깨워서 당당히 경주를 해야 하는데 토끼가 쓰러져 있는데도 그 곁을 모르는 척하고 지나가서 이기려고만 한 것은 잘못이어요.”

“허허, 네 말이 맞구나. 내가 너한테 하나 더 배웠다.”

5. 소가 된 할아버지

토요일 오후 나는 할아버지가 골목 청소를 하러 나오시기 전에 먼저 나와서 종이 쪼가리와 버려진 비닐과 담배꽁초를 주웠습니다. 할아버지가 오시면서 반가워했습니다.

“어린왕자, 나왔구나.”

“아저씨, 안녕하셨어요?”

“그래, 이제는 네가 골목 청소대장이 되었구나.”

“아저씨가 대장이고 저는 부하예요.”

“하하, 내게 부하가 생겼으니 기쁘구나. 오늘은 무슨 재미있는 이야기가 없느냐?”

“있어요.”

“그러냐? 무슨 이야기일까?”

할아버지는 칼로 길바닥에 붙은 껌을 뜯으시며 물었습니다.

“아저씨, 먼저 번에 저한테 편지 보낸 애가 있잖아요?”

“응.”

“그 애가 또 편지를 보냈어요.”

“뭐라고 썼더냐?”

“어떤 애가 썼는지 모르지만 먼저 그 편지 보내지 말라고 쓴 편지를 주었는데도 또 편지를 보냈어요. 그 편지에는 ‘너는 너무 예쁘고 잘 생겼어. 나는 네가 좋아. 난 뿅갔다.’라고 썼어요. 그런데 아저씨, 난 그 애가 싫어요.”

“싫어도 그냥 지내고 너무 미워하지 않는 게 좋겠다.”

“왜요?”

“너를 싫다고 하는 것보다 좋지 않으냐? 그냥 가만히 있으면 유치원을 마치게 되고 그 다음에는 헤어지고 더 자라면 잊게 된단다. 너도 다른 애가 마음에 든다고 했지?”

“네.”

“그 애도 유치원 마치고 학교에 들어가면 너도 잊게 되는 거다. 네가 좋아하는 아이를 생각하는 마음으로 네게 편지 보내는 아이의 마음이 그렇겠지 생각하면 된단다.”

“네, 그렇게 할게요. 그 대신 오늘 청소 끝나고 공원으로 갈 때 업어주시면 안 되나요?”

“업어 달라요?”

“네. 아저씨, 업히고 싶어요.”

“그러마. 다 끝났으니 내가 업고 가지.”

할아버지는 등을 내 앞에 돌려 대셨습니다.

“무거운 데도요?”

“그래, 네가 무거워 봐야 얼마나 무겁겠느냐? 아저씨는 그만한 힘은 있다.”

“좋아요.”

나는 할아버지 등에 업혔습니다. 할아버지 등은 넓고 포근했습니다. 나는 신이 나서 물었지요.

“아저씨, 귀가 참 커요. 당나귀 귀 같아요.”

“나를 놀리면 안 업어준다.”

“미안해요. 그렇지만 한 번만 만져보고 싶은데 만져 보면 안 될까요?”

“녀석이 장난꾸러기로구나. 그렇게 만지고 싶으면 만져 보거라.”

나는 두 손을 올려 할아버지 양쪽 귀를 잡았습니다. 그런데 또 이렇게 말하고 싶어졌어요.

“아저씨, 내가 이랴, 이랴 해도 괜찮을까요?”

“너 그 소리 어디서 배웠느냐?”

“동화책에 있어요.”

“이랴, 이랴 하는 건 사람이 소한테 하는 말인데 그것도 아느냐?”

“알아요.”

“그럼, 나를 소로 생각해서 하는 말이 아니냐?”

“아니에요. 등에 업혀 있으니까 말을 탄 것 같아서 그런 생각을 했어요.”

“그럼 이랴, 이랴해 보거라.”

“정말이에요?”

“그래 정말이다.”

나는 귀를 잡아당기며 한번 소리쳐 보았습니다.

“이랴, 이랴!”

할아버지는 나보다 더 어린애 같은 소리로,

“음매에, 음매에.”

하시지 않겠어요. 나는 신이 나서 또 이랴 이랴 하고 귀를 잡아당겼더니 또 음매 음매 하시는 거였어요. 정말 신이 나고 즐거웠습니다. 그런데 할아버지도 소가 하는 소리를 내시면서 나보다 더 즐거워하시었습니다.

공원에서 나를 내려놓으시며 할아버지는 아주 활짝 웃으시며 말했습니다.

“하하하하, 내가 이제야 사람대접을 받는 것 같구나. 아무도 나를 상대하여 주지 않아서 난 외로웠는데 너를 만나고부터는 즐겁고 이렇게 소 노릇도 하는구나. 어린왕자 고맙다.”

나하고 할아버지는 토요일마다 만나고 만날 때마다 많이 웃고 장난도 쳤습니다. 할아버지는 진짜 내 친구보다 더 좋아졌습니다.

6. 멋진 강사님

할아버지와 헤어져 집으로 돌아온 나는 할머니한테 자랑을 했습니다.

“할머니, 나 어떤 할아버지, 아니 어떤 아저씨하고 친해졌어.”

“그게 누구냐? 아무나 따라다니면 위험하다.”

할머니는 내 생각을 해서 하시는 말씀이지만 내 생각과는 아주 달랐습니다.

“아무나가 아니야. 그 아저씨는 내 친구야.”

“이런 버릇없는 소리!”

“그 할아버지, 아저씨 정말 좋아.”

“아저씨를 친했다더니 할아버지가 또 있는 거냐?”

“아니야. 나이는 할아버지인데 아저씨라고 부르시면 좋아해, 내가 이랴, 이랴 하면 음매 음매 하면서 소 노릇도 해 주시는 걸.”

이때 아빠가 들어오시다 듣고 말했습니다.

“누가 음매 음매 한다는 거냐?”

할머니가 대답했습니다.

“우리 왕자가 할아버지 친구를 사귀었다는구나.”

“할아버지가 친구가 되어 주었다고요?”

“그렇다는구나. 누구신지 아주 재미있는 분인 것 같다.”

“너 버릇없이 어른한테 함부로 하면 안 된다. 알았지?”

“네, 아빠.”

할머니가 아빠한테 말했습니다.

“오늘 저녁에 우리 교회에서 유명한 선생님이 오셔서 특별 강의를 하신단다. 너 같이 가지 않을래?”

“저는 바빠서 못 가겠습니다.”

할머니가 나를 보고 물었습니다.

“너나 같이 갈래?”

“내가 가도 되나?”

“가서 졸지만 않으면 된다.”

“알았어, 할머니. 졸지 않을게.”

이렇게 하여 나는 할머니를 따라 갔습니다. 교회에는 벌써 많은 사람들이 와서 자리를 꽉 메우고 있었습니다.

목사님이 강단에 올라 강사님 소개를 했습니다.

“여러분 기뻐해 주십시오. 이병희 선생님께서는 너무 바쁜 어른이시라 모시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몇 달 전부터 모시고자 한 결과 오늘 마침내 모셨습니다. 여러분을 모시고 한국 최고의 강사님의 명강의를 듣게 되어 영광입니다. 큰 강단이나 티브이에서만 뵐 수 있던 선생님을 직접 여러분과 함께하니 한없이 즐겁습니다. 강사님이 나오실 때 큰 박수로 환영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목사님 말씀이 끝나자마자 교회가 떠나갈 듯한 박수소리가 창문마다 흔들어댔습니다. 이어 소개받은 강사님이 점잖게 나왔습니다.

헌칠한 키에 머리가 시원하게 벗겨지고 뽀얀 얼굴의 강사님이 청중을 향해 공손히 머리를 숙이셨습니다.

“여러분,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강사님이 아주 멋지게 보였습니다.

‘아! 멋진 강사님!’

이렇게 생각하며 그 얼굴을 살펴본 나는 그만 깜짝 놀랐습니다.

“앗! 저저…….”

7. 무서워진 할아버지

나는 눈을 비비고 강사님을 다시 보았습니다.

‘맞다, 맞아! 그 아저씨, 아니 그 할아버지다!’

사람들은 모두 강사를 존경하는 눈으로 바라보며 재미있게 말할 때는 깔깔대고 웃고 어떤 때는 박수를 치며 허리를 잡았습니다.

강단에 선 할아버지는 말을 얼마나 잘하는지 어떤 대목에서는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고 코를 훌쩍거리게 만들었습니다.

할머니를 곁눈질로 보았습니다. 할머니도 눈물이 글썽한 채 나한테서 얼굴을 돌리시었습니다.

강사 할아버지는 목소리도 청년처럼 쨍쨍하고 손을 올렸다 내렸다 하며 젓기도 하고 강단을 왔다 갔다 하시면서 내가 잘 알아들을 수도 없는 이야기를 강물이 흘러가듯 술술 쏟아내셨습니다.

나는 또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저 강사 할아버지는 내 친구 할아버지가 아니야. 나하고 놀던 할아버지는 촌스럽고 보통 청소부였어. 저렇게 멋지지도 않았어. 그런데 저 강사 할아버지는 사람들을 모두 오랏줄로 묶어서 끌고 다니기라도 하는 것처럼 많은 사람들을 마음대로 웃기고 울리지 않아?’

나는 이런 생각을 하면서 눈을 감고 목소리를 가만히 들어보았습니다. 웃으실 때 목소리는 틀림없는 그 할아버지 목소리였습니다. 그러나 눈을 뜨고 바라보면 아무래도 고개가 가로저어졌습니다.

‘그 할아버지, 아니, 그 아저씨가 말을 저렇게 잘하지는 못할 거야. 그런데 웃음소리는…….’

많은 사람들이 박수를 치며 웃고 존경한다는 눈빛을 하고 있었지만 나는 마음이 점점 복잡했습니다. 그 할아버지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강의를 시작하여 잠깐 한 것 같은데 두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갔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강의가 끝나자 큰 박수를 치고 강의를 더 듣고 싶은 듯 아쉬워했습니다.

마치 밥을 먹다가 그릇을 빼앗긴 아이들처럼 강사님을 바라보며 안 보일 때까지 자리를 뜨지 못했습니다.

나는 할머니 몰래 일어나 강사님이 가는 쪽으로 다가갔습니다. 강사님 얼굴을 더 자세히 보고 싶어서였습니다. 그런데 어른들이 앞을 막고 강사님과 악수를 하려고 아우성을 쳐서 마음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내가 어른들 틈으로 파고 들어가자 한 아줌마가 쌀쌀맞게 말했습니다.

“얘가 왜 이래? 어쩌자고 어른들 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거야?”

나는 찔끔해서 물러났습니다. 그렇지만 강사님 얼굴은 똑똑히 보았습니다. 강사님은 악수를 청하는 사람들에 가려 나를 보지 못했습니다.

강사님은 그 할아버지가 확실했습니다. 나는 갑자기 부끄러운 생각이 들고 할아버지 곁에서 멀리 달아나고 싶어졌습니다. 그뿐이 아니라 할아버지가 무서워지기도 했고요.

나는 가슴이 두근거렸습니다.

‘할아버지한테 나도 왔다고 인사를 할까? 아니야, 나는 어른들 앞에 나설 수가 없는 거야. 어쩌면 할아버지는 내가 부끄러워서 모르는 척할지도 몰라.’

이런 생각을 하는 사이 강사님은 목사님이 모시고 나가고 할머니가 내 등을 툭 치셨습니다.

“우리 왕자님, 무엇이 그리 궁금한가? 이제 그만 가자.”

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할머니 뒤를 따라 집으로 오면서 그 할아버지 생각을 했습니다.

‘그 할아버지가 그렇게 유명한 어른이었나? 난 이제 어떡하지?’

할머니가 나를 보시면서 물었습니다.

“너도 강사님 말씀을 듣고 많이 감격했나 보구나. 마치 다른 아이처럼 보인다.”

“할머니도 감격하셨나요?”

“암, 대단한 분이시더라. 역시 유명한 어른의 말씀은 달라.”

“무슨 말씀이 그렇게 달라요?”

“할머니는 이 나이가 되도록 그렇게 유명한 분을 본 적도 없지만 그런 강의도 들어보지 못했다.”

“할머니, 무슨 말이 그렇게 좋았어?”

8. 할머니도 명강사

할머니는 그 강사 할아버지가 들려주신 말씀을 모두 기억하시는 것 같습니다. 할머니는 강의를 듣고 돌아와 아빠 엄마가 모인 자리에서 이런 말씀을 되풀이하십니다.

“행복과 불행은 1% 차이라고 하셨다. 그 말이 맞지. 사람은 행복 50%와 불행50%를 안고 사는데 그 중에 1%를 불행에서 떼어 행복한테 넘겨주면 행복한 사람이 되는 거고, 1%를 행복에서 떼어 불행 쪽에 놓으면 불행해지는 거란다. 다 알고 있던 말 같지만 유명한 어른의 입을 통하여 들으니 가슴에 새겨지는구나. 우리 어린왕자님도 들었지?”

나는 고개를 저었습니다.

“나는 못 들었는데?”

“귀 가지고 어디다 쓰려고 달고 나니는 거야? 어린왕자님.”

나는 강사님 이야기보다 강사가 그 할아버지가 맞나 안 맞나만 생각했기 때문에 졸지도 않았지만 무슨 강의를 하는지 귀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모르는 것이 당연하지요. 할머니는 내 속을 모르고 계시니까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할머니는 또 가족을 둘러보며 이런 말씀을 들려주셨습니다.

“어떤 할머니가 늘 생글생글 웃으시며 즐겁게 사는 것을 보고 사람들이 물었다고 했다. ‘건강하시지요? 무엇이 그리도 즐거우신가요?’ 그랬더니 할머니는 ‘아무것도 없이 빈손으로 태어나 이제는 집도 있고, 남편도 있고, 자식도 5명이나 있다오. 이제 암이 몸에 들어와서 예정된 시간에 태어날 곳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해주겠다니 얼마나 좋습니까. 나는 즐겁고 행복합니다. 앞으로 6개월이나 더 살다가 가도 된답니다. 언제 세상을 떠나게 될지 모르고 사는 것보다 얼마나 행복합니까?’라는 말을 하더라는 거다.”

할머니는 강의 두 시간을 들으시고 갑자기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습니다. 얼굴에 꽃이 핀 듯 밝고 힘이 나 보이십니다. 할머니는 신이 나서 또 강사한테 들은 소리를 되풀이했습니다.

“우리 어린왕자가 못 들은 모양인데 이런 말씀도 있었다. 들어볼래? ‘모두 나 같은 사람을 원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이 어디 있을까? 나와 다른 행동, 다른 가치를 가진 사람도 인정해 주어야 한다. 그러니까 이제부터 우리는 남의 흉을 봐서는 안 된다. 악담을 해서도 안 된다는 말이다. 어차피 우리 인간들은 다 부족한 존재들이다. 어찌하여 다른 사람의 부족한 점만 보는 눈을 가졌단 말인가. 그 눈의 질환은 안과에서도 치료가 불가능한 눈이다. 이 얼마나 바른 말이냐?”

할머니는 또 계속했습니다.

“부정적인 눈을 가진 사람은 대개 불평이 많다. 자기 책임을 다 하지 못하면서 남의 탓만 한다. 직장에서는 상사와 동료에 대한 불만을 털어 놓곤 한다. 매사에 부정적인 사람은 아마 지구를 떠나야 할 사람이 아닌가 싶다.”

할머니는 정말 대단한 수강생이었습니다. 또 하시는 말씀 들어보시겠습니까?

“한국 사람들은 성질이 아주 급하여 빨리빨리 사람들로 세계에 알려졌지만 한국 사람은 기이하게도 텔레비전에서 방영되는 일일 연속극이나 주말 연속극 에서 이야기가 한창 재미있게 진행되고 있을 때 뚝 끊어버리고 ‘내일 이 시간에 또……’ 해도 아무 불평 없이 다음 날까지 용케 참고, 다음 날 그 시간이 되길 기다린다. 연속극을 불평 없이 즐길 수 있는 민족, 그 얼마나 여유가 있고 끈기가 있는 태도인가! 이것이 한국 사람의 정서인데 조급한 국민이라고 꼬집기만 할 것인가.”

두 시간 명강의를 들은 할머니는 명강사가 되셨습니다. 할머니는 틈만 나면 명강사한데 들은 이야기를 빼놓지 않고 되풀이하십니다.

그러나 나는 할머니 이야기보다 내 이야기가 더 중요합니다.

전에는 토요일이 오기를 기다리고 할아버지와 만나기를 기다려 왔는데 이제는 토요일이 무서워졌습니다. 그 할아버지가 그렇게 유명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부터는 할아버지를 안 만나고 싶어졌습니다.

토요일이 돌아왔습니다. 아무것도 모를 때 같으면 달려가서 큰소리로 아저씨! 하고 부를 수도 있는데 오늘은 집에서 나와 골목 끝에 숨어서 청소하러 나온 할아버지를 지켜보았습니다.

할아버지는 역시 검은 모자, 검은 마스크에 선그라스, 검은 작업복, 검은 운동화를 신고 왕개미처럼 나타났습니다.

9. 왜? 왜? 왜?

할아버지는 골목청소를 하시면서 내가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듯 우리 집 쪽을 몇 번씩 바라보시었습니다.

내가 안 도와주어도 할아버지는 혼자 종이를 줍고 쓸고 왔다 갔다 하시면서 청소를 마치고 골목 끝에  있는 벤치에 앉아 모자를 벗고 이마의 땀을 닦으셨습니다.

그리고 두리번거리는 모양이 나를 기다리시는 것 같았습니다. 나는 달려가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알 수 없는 마음이 발을 잡고 있어서 가지 못했습니다.

‘할아버지, 미안해요. 할아버지가 무서워져서 그래요.’

나는 할아버지한테 달려가는 것이 왜 부끄러워졌는지 몰라요.

할아버지는 쓸쓸해 보였습니다. 한참 동안 앉았다가 일어서 저쪽 골목으로 걸어가셨습니다. 나는 살금살금 할아버지가 어디로 가시나 따라가 보았습니다.

골목을 하나 돌면 산처럼 높은 숲길이 있고 계단을 올라가면 파란 지붕의 궁궐 같은 집이 있습니다.

할아버지는 그 집으로 들어가시며 아래를 한번 내려다보셨습니다. 하마터면 나는 들킬 뻔했습니다. 나는 아주 빠르게 숨어서 할아버지가 보지 못했습니다.

‘야! 집이 참 크고 좋다! 할아버지가 저렇게 좋은 집에 살고 있었네?’

나는 돌아오는데 다리에 힘이 쏙 빠졌습니다. 할아버지네 집을 보고 나니 할아버지하고 더 친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힘이 빠져서 내 방으로 들어가 엎드렸습니다.

할머니가 나를 보시더니 물었습니다.

“우리 어린왕자님이 왜 갑자기 이러실까?”

“……”

“오줌을 싸고도 당당한 왕자님이 무슨 일이 잘못 되었나? 이 녀석아, 네가 갑자기 이상해진 것 같다.”

이상해진 것 같은 게 아니라 이상해진 나를 나도 모르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한 주일이 지나고 또 토요일이 되었습니다. 나는 골목에 나가서 할아버지가 나오기를 기다렸습니다. 할아버지는 청소부 차림으로 나타나 골목을 쓸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숨어서 다 보았지요. 달려가서 ‘아저씨이!’ 하고 불러보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용기가 나지 않아서 터덜터덜 걸어 마을 공원으로 갔습니다.

거기 벤치에 앉아 비둘기들이 콩콩콩콩 돌아다니며 무엇인가 열심히 찍는 것을 바라보며 할아버지 생각을 했습니다.


한편 할아버지는 골목을 청소하면서 어린왕자가 나타나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갑자기 나타나지 않아 걱정이 되었습니다.

‘귀여운 왕자 녀석이 병이라도 난 걸까?’

그러면서 빗질을 하다가 혹시나 해서 골목 끝을 바라보았습니다. 아무리 기다려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어린왕자라고밖에 모르는 꼬마가 말동무가 되어 주어 좋았는데…… 왜 안 오는 것일까?’

전에 혼자 할 때는 쓸쓸한 것을 몰랐던 할아버지입니다. 그런데 어린왕자가 나타났다가 오지 않으니 전에 못 느끼던 외로움이 들어 허전했습니다.

‘다음 토요일에는 오겠지. 이럴 줄 알았으면 어디 사는지 집이라도 알아두었어야 하는데…….’

할아버지는 어린왕자를 기다리며 청소를 마쳤습니다.


나는 속으로 말했습니다.

‘지금쯤 할아버지는 청소를 다 하셨을 거야. 이상하다. 할아버지는 유명하고 집도 큰데 왜 토요일마다 골목 청소를 하실까? 왜왜왜?’

나는 할아버지가 궁금해졌습니다. 무엇을 하는 할아버진데 그렇게 어른들이 존경하고 좋아하실까? 할아버지도 내 생각을 하실까?

나는 할아버지 생각으로 가슴이 가득했습니다.

‘난, 할아버지가 좋은데 왜 무서워질까? 할아버지보다 아저씨가 좋다고 하시었는데…….’

바람이 살짝 지나갔다고 생각하는데 누가 등 뒤에 서 손으로 내 눈을 살짝 감쌌습니다.

“누구야?”

“……”

“누구냐고?”

나는 눈 가린 손을 잡아떼었습니다.

10. 아저씨는 내 친구

내가 다시 물었습니다.

“누구……?”

“나다, 어린왕자야.”

목소리로 할아버지라는 것을 알고 고개를 돌려 보았습니다. 할아버지가 선글라스를 벗고 웃는 눈으로 말했습니다.

“놀랐지?”

“아니에요. 아저씨, 보고 싶었어요. 많이, 많이!”

나는 너무 반가워서 할아버지한테 팔짝 안겼습니다. 할아버지도 나를 와락 끌어안았습니다.

“어린왕자, 나도 많이 보고 싶었다.”

“아저씨…….”

할아버지 품에 안겼다가 갑자기 무서운 할아버지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슬그머니 팔에 힘을 빼고 주저앉았습니다.

“왜 그래? 어디 아프냐?”

나는 일어서면서 말했어요.

“안 아파요, 아저씨. 아저씨가 무서워져서 그래요.”

“그게 무슨 소리냐?”

“아저씨는 뭐하는 사람인가요?”

“너하고 골목 청소하는 청소부 아니냐?”

“그런 거 말고요.”

“무엇이 궁금한데?”

“난 아저씨가 좋았는데 갑자기 무서워졌어요.”

“무엇이 무서우냐?”

“몰라요. 그냥요.”

“그냥 무섭다고?”

“네, 그냥요. 아저씨는 유명한 사람이잖아요.”

“네가 더 유명한 어린왕자 아니냐?”

“아저씨는 임금님 같아요.”

“허허허, 아주 듣기 좋은 소리로구나. 나도 너 같은 어린왕자를 둔 임금님이나 해 보았으면 좋겠다.”

“아저씨도 회사에 다녔어요?”

“회사는 아니지만 학교에 다녔다.”

“학교에서 뭘 하셨는데요?”

“청소부를 했지.”

“거짓말.”

“여기저기 지저분하면 치우는 것이 청소부가 아니냐?”

“그런데도 유명한 선생님이라고 불러요?”

“누가 그러더냐?”

“우리 할머니가요.”

“할머니가 어린왕자한테 거짓말을 하신 것 같다.”

“거짓말이 아니에요.”

“할머니가 나를 아시기나 하느냐?”

“할머니가 며칠 전에 저기 교회에서 유명한 선생님이 강의를 하신다고 아빠한테 가자고 했어요. 그런데 아빠가 바빠서 못 간다고 하시어서 나를 데리고 가셨어요.”

“그래서 따라 갔었느냐?”

“네.”

“그럼 강사도 보았겠구나.”

“네.”

“강사가 누구더냐?”

“아저씨요.”

“나?”

“네.”

“그럼 왜 가만히 있었어. 나한테 너도 왔다고 알리지 않고.”

“갑자기 창피한 생각이 들었어요.”

“왜?”

“아저씨가 나 같은 애는 모른다고 하시면 어떡해요?”

“허허, 그런 생각까지 하였구나. 난 네가 나타나서 아저씨! 하고 불렀더라면 아주 기뻤을 거야.”

“정말요?”

“그럼, 나는 어린왕자님을 친구로 삼아서 얼마나 기쁜지 모른다. 골목 청소를 할 때 말동무가 되어 주어 청소하기가 즐거웠는데 갑자기 안 와서 얼마나 서운하고 궁금했는지 모른다.”

“정말 기다리셨어요?”

“그럼.”

나는 할아버지가 청소하시는 것을 숨어서 보았다고 말하려다 입을 꼭 다물었습니다. 왜 그런지 그 말을 하기가 부끄러웠기 때문입니다.

할아버지가 전에 외롭다고 하신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나 같은 사람 때문에 할아버지가 외로운 것입니다. 너무 유명한 할아버지라 사람들이 쉽게 가까이하지 않기 때문이지요. 나는 하고 싶은 말을 해 보았습니다.

“아저씨, 내가 개구쟁이처럼 말해도 괜찮을까요?”

“암, 네 생각대로 하거라.”

“아저씨가 나를 친구라고 하셨지요?”

“그래, 아주 친한 친구다.”

나는 용기가 났습니다. 그래서 할아버지 가슴에 안기며 소리쳤습니다.

“야호! 아저씨는 내 친구!”




11. 틀린 말, 바른 말

할머니는 그 유명한 선생님이 강의를 하시면 들어야 한다고 아침부터 텔레비전 앞에서 떠나지 않으셨습니다.

나도 할머니와 함께 보기로 했습니다.

아홉 시가 되자 <새아침 밝은 창>이라는 프로에 아나운서의 안내를 따라 강사가 나왔습니다. 할머니는 손뼉을 치며 기뻐하셨습니다.

“저 선생님이 나오셨구나! 텔레비전에서 보니 더 훌륭한 분 같다.”

텔레비전에 나온 강사를 보고 나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 할아버지셨습니다. 나는 아무 말도 않고 조용히 귀를 기울였습니다.

할아버지 강의는 다 알 수 없었지만 대강 이렇습니다.

<“운동장에서 돈을 잊어버린 학생은 교무실로 와서 찾아가기 바랍니다.”하는 학교 방송은 잘못된 방송입니다. ‘잊어버린’이 아니고 ‘잃어버린’이 맞는 말입니다. ‘잊다’는 ‘망각한다’는 뜻이고 ‘잃다’는 ‘분실하다’는 의미입니다.>

할머니는 나를 보시면 그것도 모르고 아무렇게나 말을 했다고 부끄러워하셨습니다.

“난 그것도 모르고 아무렇게나 썼으니 부끄럽구나.”

할머니는 얼굴을 붉히시며 웃으시었습니다.

텔레비전 속의 할아버지는 많은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그 중에 기억나는 것만 적으면 이런 것입니다.

<“너는 키가 참 적구나!”도 틀린 말입니다. ‘크다’의 반대말은 ‘작다’이고, ‘많다’의 반대말은 ‘적다’인데 ‘많다’와 ‘크다’를 잘못 쓰는 사람이 많습니다. 키는 적은 것이 아니라 ‘작다’라고 써야 맞습니다. 또 ‘삯’과 ‘값’의 차이는 뭘까요? “서울에서 제주도까지 비행기 값이 얼마예요?”도 ‘값’이 아니라 ‘삯’이 맞는 말입니다.

어느 선생님이 “너희들은 만날 가리켜도 모르니?” 하면 이 선생님은 ‘가르치다’와 ‘가리키다’를 구별하지 못하고 쓰는 것입니다. ‘가르치다’는 ‘교육하다’라는 뜻이고 ‘가리키다’는 ‘지적하다’는 의미입니다.

아나운서가 스포츠 중계를 하면서 “현지 시간으로 오후 4시 30분입니다.” 하는 것도 틀린 말입니다. ‘시간’이 아니라 ‘시각’이라고 해야 맞습니다. 시각과 시각 사이가 시간입니다. 10시에 수업이 시작되어 11시에 끝났다면 수업한 시간은 1시간입니다. 그리고 수업 시각은 10시이고, 끝나는 시각은 11시라고 해야 맞습니다.

“심술장이야!” 하는 말도 ‘심술쟁이’가 바른 말입니다. ‘장이’는 기술을 가지고 있을 때 쓰는 말입니다.

‘우리의 바램이었지.’라는 노래 가사도 틀린 말입니다. 바램이 아니라 ‘바람’이라고 해야 바른 말입니다.>


할머니는 학생처럼 종이에다 적어가면서 다 듣고 나서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동네에서 내가 말을 가장 잘한다고 뽐내고 살았는데 저 선생님 말씀 듣고 보니 내 말이 다 엉터리였구나. 우리나라에서 말을 가장 잘못하는 사람이 나라는 걸 알았다.”

할머니는 나를 보고 씨익 웃으시었습니다.

“이 할미가 우습지? 제 나라 말도 제대로 못하고 살면서 똑똑한 체했으니 말이다.”

“난 할머니보다 더 모르는 말인데요 뭐.”

할머니는 텔레비전을 끄고 혼잣말을 하셨습니다.

“저런 어른은 얼마나 배웠기에 저렇게 우리말을 잘 아시는지 부럽구나.”

할머니가 하시는 말씀을 들으니 나도 우리말을 잘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음 토요일에 할아버지를 만나면 많이 배울 거야.’

12. 말놀이

토요일입니다. 나는 할아버지보다 먼저 나가서 골목에 굴러다니는 종이와 비닐 쪼가리를 줍고 있었습니다. 할아버지는 여전히 왕개미처럼 새까만 모자에 새까만 운동화를 신고 나타나셨습니다.

“오늘은 어린왕자가 먼저 왔구나.”

“네, 아저씨.”

골목을 지나다니는 많은 사람들이 할아버지가 누구인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사람들은 할아버지가 쓸어서 모아 놓은 쓰레기를 밟기도 하고 차고 지나가기도 했습니다.

나는 할아버지가 훌륭한 선생님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사람들이 할아버지를 청소부로 알고 지나가는 게 싫어졌습니다.

“아저씨는 왜 날마다 얼굴을 가리고 나오시나요?”

“먼지가 바람에 날려서 코로 들어갈까 보아 그런다.”

“네에.”

“어린왕자, 왜 그런 것을 묻느냐?”

“아니에요. 사람들이 모아놓은 쓰레기를 저렇게 툭툭 차고 지나가도 가만 두셔서요.”

“내가 또 쓸면 되지. 흩어 놓으니까 또 쓸거리가 생기잖니?”

“화 안 나요?”

“그런 걸 가지고 화를 내면 안 되지.”

“난 화가 나는데…….”

“화는 아무 때나 내는 게 아니야. 청소를 다 했으니 공원으로 가서 재미있는 놀이나 할까?”

“네, 아저씨.”

할아버지는 내 손을 잡고 공원으로 가서 벤치에 앉았습니다.

“오늘은 재미있는 말놀이를 해 볼까?”

“말놀이요? 좋아요.”

“내가 먼저 말하면 너는 ‘그건 사람이 아닙니다’라고 하거라.”

“그게 무슨 말놀이에요? 난 아저씨 등에 타고 이랴, 이랴 하는 말놀이로 알았는데…….”

“그건 나중에 하기로 하자. 이 말놀이는 초등학교 이병희 교장선생님이 쓰신 책에 나온 것인데 너무 재미있어서 한번 너하고 해 보고 싶었다.”

“내가 ‘뭐뭐한 사람은?’ 하고 말하면 어린왕자는 ‘그건 사람이 아닙니다’ 하는 거다. 알겠지?”

“네. 그건 사람이 아닙니다. 이렇게요?”

“옳지, 그럼 시작한다. 약한 사람을 괴롭힌다면?”

“그건 사람이 아닙니다.”

“공부 못하는 친구를 무시한다면?”

“그건 사람이 아닙니다.”

“친구에게 폭력을 휘두른다면?”

“그건 사람이 아닙니다.”

“친구들에게 상스런 말이나 욕을 한다면?

“그건 사람이 아닙니다.”

“친구를 왕따 만드는데 같이 했다면?”

“그건 사람이 아닙니다.”

“부모님의 말씀에 반항을 한다면?”

“그건 사람이 아닙니다.”

“남을 속이는 일을 했다면?”

“그건 사람이 아닙니다.”

“길거리에 쓰레기를 함부로 버린다면?”

“그건 사람이 아닙니다.”

“나를 지도해 주신 선생님을 존경할 줄 모르면?”

“그건 사람이 아닙니다.”

“나를 키워주신 부모님께 불효한다면?”

“그건 사람이 아닙니다.”

할아버지가 웃으시며 물었습니다.

“어떠냐? 재미있지?”

“네, 재미있어요.”

“이번에는 네가 나한테 뭐뭐한다면 하고 물어볼래?”

“생각이 안 나요.”

“아무 생각이든 어른이 그러면 안 되는 것이 생각나면 물어 보거라. 그러면 나는 절대 안 되지 하마.”

나는 이렇게 말해 보았습니다.

“아버지가 아이들한테 술주정을 하면?”

“그건 절대 안 되지.”

“생각났어요. 어른이 아이들한테 욕을 하면?”

“그건 절대 안 되지.”

“어른이 책도 안 보면?”

“그건 절대 안 되지.”

“어른이 길에 침을 뱉으면?”

“그건 절대 안 되지.”

“어른이 담배꽁초를 아무데나 버리면?”

“그건 절대 안 되지.”

“아버지가 어머니를 때리면?”

“그건 절대 안 되지.”

“학교 안 가는 아들을 학교 가라고 하면?”

“그건 절대 안……, 하하하 네가 나를 놀렸구나!”

“절대 안 될 일들이 너무 많아서 안 되겠어요.”

“그건 절대 안 되지.”

“이제, 말놀이 그만 하자는 말이에요.”

“그건 절대 안 되지.”

“아저씨, 그만 하자고요.”

“그건 절대 안 되지. 하하하.”

“아이, 아저씨는 장난꾸러기!”

13. 초대 손님

나는 할아버지를 우리 집에 오시게 하여 할머니를  놀래드릴 생각을 했습니다. 할머니가 얼마나 놀라고 좋아하실까? 생각할수록 재미있었습니다.

그래서 할아버지한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저씨, 우리 집에 놀러 오실래요?”

“뭐야? 어린왕자가 나를 궁궐로 초대하는 거냐?”

“네.”

“왜 갑자기 그런 생각을 했느냐?”

“우리 할머니가 아저씨 강의를 들으시고 뿅 가셨거든요”

“나한테 뿅 가는 어른도 있더냐?”

“네, 아저씨가 만약 우리 집에 오신다면 우리 식구들은 모두 놀라서 아마 …… 헤헤헤헤.”

“그러냐? 그렇다면 한번 가 뵙고 싶구나.”

“정말이지요?”

“그래, 내가 가도 괜찮겠느냐?”

“괜찮아요.”

“알았다. 다음 주 토요일에 골목 청소하고 보자.”

“아저씨는 무슨 음식을 좋아하시나요?”

“아무 거나 잘 먹는다. 내가 뭘 사가지고 갈까?”

“그냥 오시면 되고요. 아저씨 좋아하시는 것 말씀해 주세요.”

“난 네가 좋아하는 건 다 좋다.”

“알았어요.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으로…….”


나는 이렇게 약속하고 할머니한테 말씀드렸습니다.

“할머니, 토요일에 내 친구가 오기로 했어.”

“네 친구 누구냐?”

“할머니는 몰라. 엄마는 알 거야.”

“느이 엄마는 아는데 내가 모르다니 궁금하구나. 어디 사는 누구냐?”

“우리 동네 사는 친구야.”

“몇 살인데?”

“몰라. 나보다 훨씬 많아.”

“그런 애를 네가 어떻게 사귀었니?”

“그런 게 있어. 할머니, 내 친구가 오면 뭐 만들어 줄 거야?”

“엄마하고 의논해 보아야지. 넌 무엇이 좋으냐?”

“난 떡볶이.”

“겨우 그런 거?”

“새우깡하고 떡볶이하고 주스. 그리고 아이스크림, 귤.”

“알았다.”

할머니는 엄마하고 의논하여 토요일에 간단하게 아이들이 잘 먹는 음식을 차리기로 했습니다.


할아버지와 약속한 토요일이 왔습니다. 골목 청소를 하고 나서 할아버지를 모시고 나는 우리 집으로 왔습니다.

“아저씨, 여기가 우리 집이에요.”

“그렇구나. 어른들은 누가 계시냐?”

“할머니하고 엄마 아빠가 계시고요, 아이는 나 혼자예요.”

“그러냐?” 

“아빠는 늦게 오시고요, 할머니하고 엄마가 기다리세요.”

“미안해서 어떨까.”

“괜찮아요. 들어오세요.”

내 친구가 온다고 할머니는 차 쟁반에 새우깡하고 귤을 차리고 엄마는 부엌에서 떡볶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할머니! 내 친구 오셨어요.”

“친구가 오시다니, 무슨 말이 그러냐?”

할머니가 돌아보시다 깜짝 놀라시었습니다.

“아아니! 이게 어찌 된 일이냐? 네 친구하고 온다면서 이게 무슨 변이야!”

할머니는 할아버지 앞에 공손히 허리를 숙이고 인사했습니다.

“유명하신 선생님께서 어찌 이런 누추한 곳까지 오셨습니까?”

할아버지도 겸손히 인사를 했습니다.

“갑자기 찾아뵙게 되어 죄송합니다.”

할머니는 부엌에서 일하는 엄마를 불렀습니다.

“얘야! 나오너라. 귀한 손님이 오셨다.”

엄마가 내다보지도 않고 대답했습니다.

“윤재 친구라면서 무슨 귀한 손님이에요?”

“빨리 나와 인사 드려라. 훌륭한 선생님이 오셨어.”

엄마가 부엌에서 나오시다 할아버지를 보고 놀라 눈을 크게 떴습니다.

“윤재야, 너 어른님을 모시고 왔으면서 이게 무슨 짓이야?”

그리고 할아버지한테 허리를 깊이 숙이고 인사했습니다.

“어서 오세요. 제가 윤재 엄맙니다.”

할아버지는 착하게 웃으시며 인사를 받았습니다.

“죄송합니다. 저는 이 댁 어린왕자님 친구입니다.”

할머니가 손사래를 쳤습니다.

“선생님 같은 어른님을 몰라 뵙고 어린 것이 실수를 한 것 같습니다. 용서하여 주십시오.”

“아닙니다. 제가 먼저 어린왕자님을 친구로 삼았습니다. 좀 주책 같지만 진심입니다.”

엄마와 할머니는 어쩔 줄을 몰라 앉지도 서지도 못했습니다. 내가 할아버지한테 말했습니다.

“아저씨, 여기 앉으세요.”

할머니가 또 놀라운 소리를 하셨습니다.

“선생님한테 아저씨라니, 너 말버릇이 그게 뭐냐?”

“괜찮아요, 할머니. 아저씨하고 나는 약속했어요.”

“약속이 무슨 약속이야? 선생님을 모시고 이런 실례가 어디 있어?”

할아버지가 자리에 앉으면서 말했습니다.

“어린왕자가 앉으라고 하니 여기 앉겠습니다. 너무 꾸짖지 마십시오. 그러시면 제가 민망합니다.”

내가 할머니를 보고 설명했습니다.

“할머니, 염려 마. 아저씨하고 나는 친구 맞아.”

할머니는 부끄러워서 어쩔 줄 모르시며 말했습니다.

“우리 어린왕자가 엉뚱한 짓을 하고 있어서 내 정신이 아닙니다. 선생님께서 오시는 줄 알았으면 이런 상을 차리는 게 아닌데……”

“염려 마십시오. 제가 오기로 약속하면서 어린왕자하고 이렇게 차려 먹자고 했습니다.”

“그래도 그렇지요. 송구스러워서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할아버지는 마냥 웃으시며 말했습니다.

“이리 함께 앉으시지요. 내 친구 어린왕자가 좋아하는 것이니까 저도 좋습니다. 이만하면 좋습니다.”

인사를 하고 엄마는 떡볶이를 내오고 상을 가운데 놓고 둘러앉았습니다. 할머니가 안절부절못하시면서 말했습니다.

“이건 어린애들 소꿉장난도 아니고…….”

할아버지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습니다.

“부담스럽게 차린 상보다 이 상이 얼마나 어린이답고 좋습니까. 어린왕자님이 바로 어린이라는 해맑은 심성이 보여서 좋지 않습니까?”

엄마가 머리를 숙이고 말했습니다.

“그렇게 이해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선생님.”

할아버지가 떡볶이 하나를 들고 잡수셨습니다. 나도 먹으면서 할아버지 눈을 들여다보며 말했습니다.

“아저씨, 아주 재미있지요?”

“그래, 아주 재미있다.”

할머니가 엄마한테 말했습니다.

“선생님께 따로 드리게 사라 하나 가져오너라.”

이때 할아버지가 이런 강의를 시작했습니다.

14. 선생님은 못 말려

“할머니께서 제 강의를 들으셨다고 했지요?”

“네, 아주 유익한 말씀 재미있게 들었습니다.”

“우리 생활 속에서 습관처럼 쓰고 있는 잘못 된 말이 많습니다. 지금 사라 가져오라고 하셨지요? 그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쓰시면 이 어린왕자도 아무 생각 없이 배우고 사용하게 됩니다.”

“제가 무슨 실수라도……?”

“언어학자들의 말에 의하면 다른 민족에게 지배를 당한 기간의 3배의 시일이 지나야 그 나라 언어가 없어진다고 합니다. 우리나라는 일본한테 36년 동안 치욕적인 지배를 당했습니다. 그러니 36년✕3=108년, 해방된 지 현재 68년이 지났으니 아직 40년이나 더 지나야 일본말이 우리 생활 속에서 뽑혀나간다는 말이 됩니다.”

할아버지는 강사라도 된 듯 잘못 사용하는 여러 말을 하셨습니다.

“‘얘, 너 소데나시 참 예쁘다.’ 이처럼 아무 스스럼없이 젊은이들이 일본어를 사용하는데 우리말로 ‘민소매’라고 해야 합니다. 그것뿐이 아닙니다. 가라(가짜), 곤색(감색), 기스(흠), 낑깡(금귤), 다대기(다진 양념), 닭도리탕(닭볶음탕), 데빵(우두머리). 무대뽀(막무가내), 와사비(고추냉이), 유도리(융통성), 잇빠이(가득), 찌라시(전단지), 구사리(꾸중), 시다(보조), 히야시(찬), 지금 쓰신 사라는 (접시), 오뎅(어묵), 마구로(참치), 다마네기(양파), 셈배(전병), 오꼬시(쌀과자), 오이꼬시(추월), 시카리(빨리), 구찌베니(입술연지), 와리바시(나무젓가락), 우와기(윗옷), 자부동(방석), 다꽝(단무지), 요지(이쑤시개), 고바이(경사), 오봉(쟁반), 쓰메끼리(손톱깎이), 노가다(인부) 등 셀 수 없이 우리 생활 속에 깊이 뿌리내려 있는 일본말이 참 많다는 것은 가슴 아픈 일입니다. 하루 속히 바른 우리말을 사용해야 합니다.”

할머니는 기가 막힌 듯 할아버지 입만 바라보셨습니다.

할아버지는 귤을 하나 드시면서 또 강의를 시작했습니다.

“일본도 한자 문화권이라 ‘食事(식사)’를 그들은 ‘쇼쿠지“라고 읽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그 한자음을 그대로 따서 ‘식사’라고 합니다. 우리말로는 밥, 존대어로는 진지라고 해야 옳은 것이지요. 일본식 한자어를 그대로 쓰고 있는 경우도 참 많습니다. 경기 扶養(부양)이라는 말을 많이 쓰는데 이것은 일본 한자어입니다. 우리말로는 부양이 아니라 回復(회복), 古參(고참)이 아니라 先輩(선배), 滿開(만개)가 아니라 滿發(만발), 口座(구좌)가 아니라 計座(계좌), 綺羅星(기라성)이 아니라 金星(금성), 선택 斜陽(사양)이 아니라 種類(종류), 手順(수순)이 아니라 手續(수속), 수표 뒷면의 裏書(이서)아니라 背書(배서), 통장 殘高(잔고)가 아니라 殘額(잔액), 品切(품절)이 아니라 賣切(매절), 行先地(행선지)가 아니고 目的地(목적지), 翌日(익일)이 아니고 다음 날, 路肩(노견)이 아니고 갓길로 써야 합니다.”

엄마와 할머니는 정신이 번쩍 나는 듯 할아버지 입만 바라보셨습니다. 그리고 종이와 연필을 가지고 나와서 말씀드렸습니다.

“지금 말씀하신 것을 좀 적었으면 좋겠습니다. 선생님.”

“아닙니다. 그러실 것 없습니다. 저하고 같이 공부하신 전직 교장이신 이병희 선생님 수필집을 하나 구하여 드릴 테니 더 자세히 보시기 바랍니다. 제가 존경하는 이교장님이 쓰신 수필은 우리 교육 현장에서 꼭 필요한 책입니다.”

이때 문이 열리면서 아빠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다녀왔습니다.”

그리고 아빠가 마루로 들어섰습니다. 아빠는 할아버지를 보자 갑자기 벌서는 사람처럼 꼿꼿이 섰습니다.

“아니!”

15. 돈을 내놓아라

아빠가 할아버지를 보고 깜짝 놀라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섰다가 그 자리에서 큰절을 넙죽 올렸습니다.

“선생님, 어찌 저희 집까지 오셨습니까?”

할아버지도 아빠를 알아보고 매우 반가워했습니다.

“이러시지 말게. 여기가 자네 집이었나?”

할머니와 엄마는 놀라서 눈을 크게 뜨고 할아버지와 아빠를 번갈아 보았습니다.

아빠가 할아버지 곁으로 다가가 무릎을 꿇고 말했습니다.

“선생님, 너무 오랫동안 뵙지 못했습니다.”

“나도 자네 본 지가 오래 되었지. 어떻게 된 건가?”

할머니가 아빠한테 물었습니다.

“애비야, 이 선생님 네가 아시는 분이냐?”

“네, 저의 대학 은사십니다.”

“대학 은사님이라고?”

할머니는 일어서시며 할아버지께 인사를 드렸습니다.

“그런 줄도 모르고…… 죄송합니다.”

할아버지는 온 가족을 돌아보시며 착하게 웃어 보이셨습니다.

“어린왕자를 따라왔다가 큰 잉어를 낚았습니다.”

할아버지는 곁에 무릎 꿇고 앉은 아빠한테 물었습니다.

“이게 어찌된 일인가? 자네가 왜 이 동네까지 와서 사는가?”

“부끄럽습니다. 찾아뵙지도 못하고 이렇게 되었습니다.”

아빠는 사업을 잘하시다가 IMF때 거래처에서 받은 어음 부도와 발행한 어음부도로 회사 운영을 하지 못하고 문을 닫은 것과 이 동네에 오기까지의 일들을 할아버지 앞에서 다 말씀드렸습니다.

할아버지가 다 듣고 말씀하셨습니다.

“고생이 많았군. 동기 중에서 가장 잘 풀리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기뻐했었는데 이제 듣고 보니 딱하군. 그래 이 집은 자네 집인가?”

“전세로 내놓은 집인데 돈이 모자라서 사글세로 들어 있습니다.”

“사글세라니, 얼마나?”

“보증금 5천에 월 50만 원씩입니다. 제가 셋방살이를 할 줄은 생각지 못했습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 자네 사정 듣고 보니 내 사정보다 나은 것 같으이.”

“선생님, 무슨 말씀이신지요?”

“난 외국에를 갈 일이 있는데 돈이 없어서 못 가고 있다네.”

“……”

“자네가 좀 도와주면 안 되겠나?”

“얼마나……?”

“삼천이면 되는데…… 미안하지만 이 집 보증금을 빼서 나한테 삼천을 주면 내가 이 집보다 나은 집을 2천에 2십만 원씩 내고 살 집을 소개해 주겠네. 어떤가?”

아빠는 갑자기 얼굴이 굳어졌습니다. 아빠뿐이 아닙니다. 할머니도 엄마도 실망한 눈빛이었습니다.

할아버지는 아빠를 똑바로 바라보시며 다시 말씀했습니다.

“어떤가? 나를 좀 도와주지 않겠는가?”

아빠는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대답했습니다.

“생각해 보겠습니다.”

“참 다행스런 일이야. 어린왕자를 잘 만났어.”

할아버지는 나를 바라보면서 눈을 찡긋해 보이시고 엉뚱한 말을 했습니다.

“어린왕자, 고맙다. 고마워.”

나는 무엇이 고맙다고 하는지 알 수가 없었지만 아빠 얼굴이 처음 같지 않고 딱딱하게 굳어서 불안했습니다.

할아버지는 명령이라도 하는 것처럼 말씀했습니다.

“참 다행스럽게 자내를 만났어. 내가 한 부탁 잘 생각하고 대답해 주기 바라네. 빠른 시일 안에 내 말을 들어주면 고맙겠네.”

“외국에는 언제 가실 계획이십니까?”

“자네가 그렇게 해 준다고 약속하면 그 날부터 십오일 되는 날 나는 외국으로 가고 자네는 내가 소개한 집으로 이사를 하면 되겠네.”

“그렇게 빨리나요?”

“빠를수록 좋아. 그럼 오늘은 이만 가겠네.”

할아버지는 일어서서 내 손을 잡고 약속했습니다.

“어린왕자, 고맙다. 다음 토요일에 골목에서 보자.”

할아버지는 우리 식구들에게 인사를 하고 가셨습니다.

집안이 갑자기 썰렁하고 이상한 바람이 부는 것 같았습니다. 아빠가 나를 보고 물었습니다.

“너, 저 할아버지 어떻게 안 거냐?”

“골목에서……”

할머니가 나를 꾸짖듯 말했습니다.

“어른한테 더구나 그렇게 유명한 선생님한테 네가 철없이 굴어서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모른다.”

나는 할머니 생각하고는 달랐습니다.

“할머니, 그러지 마. 그 아저씨는 내 친구 맞아.”

아빠가 놀라 물었습니다.

“뭐야? 친구라고?”

“맞아, 내 친구야, 아빠.”

“너 언제부터 알았는데?”

“지난봄부터. 난 아저씨하고 공원에서 놀면서 등을 타고 귀를 잡고 이랴 이야 하면 아저씨는 음매 음매하고 웃으며 놀았어.”

“선생님 귀를 잡고?”

“응, 우리는 친구라니까.”

아빠는 기가 막힌 듯 이러시는 거였습니다.

“허허, 이거 큰일 났군.”

그러나 할머니는 더 급한 일을 말씀했습니다.

“친구가 문제가 아니다. 생각해 보아라. 어쩌다 유명한 선생님을 모시고 와서…….”

엄마도 한 마디 했습니다.

“아무리 애라고 하지만 너무 철없는 짓을 했어요. 선생님을 모셔다가 겨우 새우깡만 드렸으니 이게 뭐예요.”

내가 말했습니다.

“괜찮아, 아저씨는 내가 좋아하는 것이면 다 좋다고 했어. 아저씨도 새우깡 좋아하시었는데.”

할머니가 웃지도 않고 말했습니다.

“그게 문제가 아니다. 애비야, 선생님이 삼천만 원을 내놓으라고 하셨는데 어떻게 할 생각이냐?”

16. 농담도 잘 하셔

아빠가 대답했습니다.

“깊이 생각해 봐야지요. 이건 간단한 문제가 아니잖아요?”

“깊이 생각할 게 뭣 있니?”

“어머니는 어떻게 생각하시는데요?”

“선생님 말씀대로 하자.”

이때 엄마가 나를 보고 말했습니다.

“넌 어디서 그런 선생님을 모시고 와서 어른들 걱정을 하게 만들어?”

할머니가 내 역성을 드셨습니다.

“너는 왜 왕자님을 나무라느냐? 우리 왕자님쯤 되니까 유명한 선생님을 모시고 왔지, 너 같으면 그런 어른을 모시고 오겠니?”

“어머님은…….”

할머니는 또 말씀했습니다.

“지난번 교회에서 강의하실 때 강사님 소개를 들어서 나는 안다. 아범이 다닌 한얼대학교 총장님이라고 했고 게다가 아범의 스승님이라고 안 하더냐? 그렇게 유명한 분이 우리 어린왕자님을 친구로 삼았다니 경사 아니냐? 호호호.”

엄마도 아빠도 기가 막혀 입을 벌리고 말을 못했습니다.

아빠는 삼천만 원 때문에 걱정을 하고 엄마는 그런 선생님을 모시고 와서 걱정을 만들었다고 나를 꾸짖는데 할머니는 신이 나셨습니다.

“그렇게 유명하신 선생님이 오죽 어려우시면 제자를 마나자마자 그런 도움을 청하시겠느냐? 이런 기회에 꼭 도와드려야 한다. 집을 팔아서라도 도와드려야 한다. 선생님은 부모와 같다고 하지 않더냐?”

아빠가 말했습니다.

“팔 집이나 있습니까? 아무리 그래도 2천에 20만 원짜리 집이면 오죽이나 초라하겠습니까. 그것도 가 보지도 않고 이사를 갔다가 너무 좁아서 못 살게 되면 어떻게 합니까.”

“선생님이 그 정도도 모르고 소개하시겠니?”

엄마가 또 나를 보고 눈을 흘겼습니다.

“어린왕자가 무슨 어린왕자냐? 오줌싸개가. 다 너 때문이야.”

나는 오줌싸개라고 해도 엄마 말은 안 들리고 할머니 말씀이 좋았습니다. 그런데 엄마는 나를 원망만 하고 아빠는 우물쭈물…….

내가 말했습니다.

“할머니 말이 맞아. 아저씨가 알아서 해주신다고 했으니까…….”

엄마가 내 말을 막았습니다.

“네가 뭘 안다고…….”

할머니가 엄마 말을 막았습니다.

“넌 왜 왕자님을 나무라지 못해 안달이냐? 난 왕자님 편이다.”

엄마는 샐쭉해서 부엌으로 들어가시고 아빠는 안방으로 들어가셨습니다. 할머니가 내 손을 잡고 말씀했습니다.

“나가자.”

할머니는 집에서 나서자마자 바로 앞에 있는 슈퍼로 가셨습니다. 그리고 수다를 떠셨습니다.

“권사님, 지난 번 우리 교회에 와서 강의하신 대학 총장님 아시지요?”

“네, 그 유명하신 강사님 말씀인가요?”

“그래요, 그 강사님이 우리 동네에 사신답니다.”

“그렇게 유명한 분이 우리 동네에 사신다고요?”

“매주 토요일마다 우리 동네 골목청소를 하는 분이 있잖아요?”

“네, 그 검은 모자, 검은 안경 그 청소부요?”

“그분이 청소부가 아니에요.”

“청소부가 아니면서 골목 청소를 해요?”

“그렇다니까요. 그분이 바로 지난번에 우리 교회에서 강의를 하신 한얼대학교 총장님이랍니다.”

“농담도 잘하시네요.”

“농담이 아니에요. 그분이 바로 우리 어린왕자 친구랍니다.”

“호호호, 더 웃기려고 이러시지요? 저 애가 어떻게 그런 어른의 친구가 됩니까?”

“그렇게 못 믿으시겠어요?”

“생각해 보세요. 동네 청소부가 대학총장이라고 하고 그 총장이 윤재 친구라니 호호호, 지나가던 개도 들으면 웃겠어요.”

내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아줌마, 그 청소부 학교 총장님이고 내 친구 맞아요.”

“호호호, 그 할머니에 그 손자 아니랄까 봐. 꼬막만한 게 한수 떠 뜨네. 호호호 아이구, 허리야!”

나는 그 아줌마가 내 말을 믿지 않아서 마음에 안 들었습니다. 이제 새우깡도 사러 오지 않고 싶어졌습니다.

할머니는 내 손을 잡고 옆에 있는 미장원으로 가셨습니다. 그리고 또 나하고 아저씨 이야기를 열심히 했습니다. 미장원에 모여 있던 아줌마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습니다.

“할머니 말씀을 믿어도 되나요? 할머니, 농담도 잘하셔.”

17. 청소부가 된 동네 사람들

슈퍼 아줌마는 할머니가 말씀할 때는 안 믿는 것 같았는데 가게에 오는 사람마다 붙잡고 청소부가 대학총장이라고 소문을 냈습니다.

그뿐 아니라 미장원에서 할머니 말씀을 이상하게 듣고 웃던 아줌마들도 돌아가서 동네 청소부가 대학총장이라고 가족들한테 말하여 온 동네가 할아버지 소문으로 파다했습니다.

토요일이 되었습니다. 나는 할아버지보다 먼저 나가려고 골목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집집마다 아저씨 아줌마들이 빗자루와 쓰레받기를 들고 나와서 자기 집 앞을 쓸고 있었습니다.

내가 한 아줌마한테 물었습니다.

“아줌마 뭐 하세요?”

“청소한다, 보아도 모르겠니?”

“전에는 청소 안 하셨잖아요.”

“내 집 앞은 내가 쓸기로 했다.”

집집마다 아줌마 아저씨가 나와서 자기 집 앞을 쓸고 있는데 저쪽에서 할아버지가 검은 모자에 검은 안경을 쓰고 왕개미처럼 빗자루를 들고 오셨습니다. 내가 달려가 인사를 했습니다.

“아저씨, 안녕하세요?”

“그래, 일찍 나왔구나.”

할아버지는 인사를 받으면서 골목에 나와 있는 사람들을 보고 물었습니다.

“동네에 무슨 일이 있는 거냐? 왜 갑자기 동네 사람들이 나와서 청소를 하느냐?”

“모르겠어요. 우리 동네에 높은 분이 오시나 봐요.”

“그런가 보구나. 누가 오시기에 온 동네가 떠들썩한 거냐?”

내가 불만스럽게 말했습니다.

“골목 사람들이 모두 나와서 자기 집 앞 청소를 하면 우리가 할 일이 없어졌잖아요?”

“그렇구나. 아마 높은 분이 오시나 보다. 그러나 갑자기 심심하게 되었으니 구경거리나 찾아볼까?”

“좋아요, 아저씨.”

이때 가까이서 청소하던 아줌마가 다가와 말을 걸었습니다.

“아저씨는 누구시우?”

할아버지가 멈칫했습니다.

“저 말씀입니까?”

“여기 댁 말고 누가 또 있수?”

“저는 골목청소를 나온…….”

할아버지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저쪽에서 청소하던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왔습니다.

“아저씨, 그 모자하고 안경 좀 벗어 보실래요?”

“왜들 이러십니까?”

“미안하지만 모자하고 안경 좀 벗어 보세요.”

“미안합니다.”

할아버지는 무엇이 미안하다는 것인지 굽실거리면서 자리를 뜨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극성스러운 아줌마가 길을 막고 말했습니다.

“그냥은 몬 가십니더. 소문 듣고 나왔어예. 진짜인지 가짜인지 알기 전에는 몬 가십니더.”

이때 뒤쪽에서 키다리 아저씨가 점잖은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아주머니, 과한 말씀은 하지 마세요.”

그리고 앞으로 나와 할아버지께 정중히 허리를 숙여 인사하면서 말했습니다.

“이병구 총장님이 맞으시지요?”

할아버지는 놀라시며 인사를 받았습니다.

“그렇소만 뉘신지요?”

“저는 한얼대학교 정문 앞에서 서점을 하고 있는 정두영입니다.”

“그렇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총장님을 이렇게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총장님께서 우리 동네에 사시는 줄은 몰랐습니다.”

“예, 저도 이리로 이사 온 지 몇 년 안 됩니다.”

두 어른이 말을 주고받는 소리를 듣고 모두들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습니다.

“총장님, 안녕하세요?”

할아버지는 인사를 받기 위해 모자를 벗고 검은 안경과 검은 마스크를 벗었습니다. 완전히 모습이 드러나자 슈퍼가게 권사님이 큰소리로 말했습니다.

“맞습니다. 엊그제 우리 교회에서 강의하신 선생님이 맞습니다. 할렐루야!”

이때 다른 아줌마도 반가워하며 할렐루야를 따라 했습니다. 그 바람에 주위 사람들이 모두 박장대소를 하면서 할렐루야 하고 인사를 했습니다.

극성스런 아줌마가 달려들어 할아버지 손을 잡고 수다스럽게 말했습니다.

“선상님예 정말 죄송합니더. 몰라보고 실수를 했심니더. 총장 선상님께서 골목 청소를 하신다카여 믿을 수가 없었십니더. 우찌 그리 훌륭한 일을 하십니꺼?”

“아닙니다. 제가 미안합니다.”

키다리 아저씨가 끼어들었습니다.

“총장님께서는 어떻게 골목 청소를 하시게 되었습니까? 저는 날마다 지나다니면서도 알아 뵙지 못하고 청소하는 어른으로만 알았습니다.”

“저는 정년퇴직을 하고 한 주일에 몇 번 강의만 나가고 있습니다. 심심하던 차에 골목이 너무 지저분하여 내가 청소라도 해야 밥값을 할 것 같아서 하였습니다.”

“부끄럽습니다. 이 동네 살면서도 골목 청소를 하지 않았던 제가 반성해야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사람들이 담배꽁초를 아무데나 막 버려서 골목길을 지나다 보면 한 주일이 다 가기도 전에 엉망이 됩니다. 그래서 치워야겠다고 생각했지요. 그러면서도 혹시 나를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모자며 안경과 마스크로 얼굴을 가렸지요. 그렇게 하니 먼지도 안 마시고 좋았습니다.”

다 듣고 있던 동네 반장이 말했습니다.

“총장님, 죄송합니다. 저는 이 동네 반장입니다만 골목 청소를 소홀히 하고 살았습니다. 부끄럽습니다. 앞으로는 동네 사람이 안 하면 저라도 나서서 하겠습니다. 총장님께서는 이제 청소하지 마시고 그 시간에 학문연구를 하십시오.”

“감사합니다. 저도 나와서 동네 어른들과 함께 청소를 하겠습니다.”

할아버지는 온 골목 사람들이 우러러 보는 가운데 웃으시면서 여러 이야기를 하시고 내 손을 잡고 자리를 떴습니다. 공원으로 가는 길이 전보다 깨끗해 좋았습니다.

“아저씨, 골목이 환해졌어요.”

“그렇구나.”

“어떤 높은 사람이 오나 했더니 할아버지가 높은 사람이었어요. 그렇지요?”

“내가 무슨 높은 사람이냐?”

“아니에요. 골목 사람들이 모두 아저씨를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았어요.”

“네가 그런 것도 알아?”

“그럼요, 나도 똑똑한…….”

“알았다, 그래서 네가 어린왕자 아니냐? 하하하!”

나는 조금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지만 할아버지가 어린왕자라고 불러주어서 기분이 짱이었습니다.

헤어질 때 할아버지가 다짐하듯 말씀했습니다.

“집에 가거든 아빠한테 내가 부탁한 것 빨리 대답하란다고 말씀드려라.”

“네, 아저씨.”

18. 혹 때러 갔다가 혹을 붙이고

나는 아빠가 퇴근하여 오시자마자 할아버지 말씀을 드렸습니다.

“아빠, 할아버지가 부탁하신 거 어떻게 말씀드려야 하나요?”

내 말을 듣자 할머니가 아빠를 바라보셨습니다.

“그래 깊이 생각해 본 거냐?”

“네, 선생님 말씀대로 해야 할 것 같아요. 어머님 생각도 그러하시니…….”

“잘 생각했다. 다음 토요일에 또 청소하러 나오시거든 정식으로 모시고 말씀드리자.”

“그러세요, 어머니.”

나는 그렇게 말씀하시는 아빠와 할머니가 좋았습니다.

“할머니, 아빠 고맙습니다.”

아빠가 물었습니다.

“네가 왜 고마우냐?”

“내 친구 청을 들어주시니까.”

할머니가 나를 바라보시며 꾸짖듯 말씀했습니다.

“아직도 총장님이 네 친구냐? 이제는 친구라고 하면 못 써.”

“난 친구가 좋은데…….”

“아빠 스승님인데 네가 친구라고 하면 되겠니?”

“그렇지만 우리는 처음부터 친구로 했는데?”

“그래도 친구라고 하지 마.”

“난 친구라고 해야 친구 같아.”

“허허, 그래도?”

“알았어. 생각해 보고.”

이렇게 하여 우리는 할아버지가 도와달라고 하시는 청을 들어드리기로 했습니다.

나는 토요일을 손꼽아 기다렸습니다. 할아버지 집을 나는 알고 있지만 찾아갈 수도 없잖아요.


기다리던 토요일이 왔습니다. 동네 사람들이 모두 나와서 골목청소를 하고 있어서 나와 할아버지는 구경꾼이 되고 말았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할아버지한테 총장님, 총장님 하면서 인사를 하고 하하 호호하면서 청소를 했습니다. 나는 괜히 신이 나고 웃음이 나왔습니다. 그래서 벙긋거리자 할아버지가 물었습니다.

“넌 무엇이 그리 좋아서 싱글벙글하느냐?”

“동네 사람들이 다 나와서 아저씨한테 인사도 하고 청소도 하니 얼마나 좋아요?”

“그렇구나. 나도 아주 기쁘다.”

“아저씨, 기쁜 소식이 또 있어요.”

“뭐냐?”

“오늘 우리 집에 가세요. 할머니가 모시고 오라고 하셨어요.”

“그러냐? 아빠는 어디 가고?”

“회사에서 급한 일이 있다고 하시면서 아저씨가 우리 집에 오시기 전에 오신댔어요.”

“알았다. 할머니가 오시라는데 가야지.”

청소를 하여 말끔한 골목길은 시원하고 집집마다 울타리를 넘어 목을 내민 라일락이 할아버지한테 향기를 불어주어 구석구석 향기로 넘쳤습니다.

할아버지는 내 손을 잡고 즐거운 듯 벙긋거리며 우리 집으로 향하셨습니다. 집안에서는 고소한 기름 냄새가 풍기고 엄마와 할머니는 부엌에서 맛있는 음식을 만들고 있었습니다.

할아버지가 들어서자 뒤따라 아빠가 들어오며 인사를 했습니다.

“어서 오십시오. 선생님.”

할아버지가 돌아보시며 인사를 받았습니다.

“어서 오게나. 자네가 뒤에 오니 내가 환영을 해야지?”

“감사합니다. 이렇게 오시어서 기쁩니다.”

“나도 내 친구 어린왕자네 집이 좋다네. 그래서 친구가 좋은 것 아닌가. 하하하.”

“선생님, 이제 쟤 보고 친구라고 하지 마십시오.”

“무슨 소리를 하는가. 우리는 처음부터 친구로 삼았어. 난 어린왕자를 친구라고 생각해야 친구 같다네.”

“선생님, 그 말씀 어디서 배우셨습니까?”

“배우다니, 누가 나를 가르칠 사람이 있는가?”

“저 애도 선생님과 똑같은 말을 해서……”

“그런가? 그런 말은 내가 배우지도 가르치지도 않은 말인데.”

“이심전심인가 봅니다. 그것도 인연인가? 허허허.”

이렇게 인사를 하고 할아버지를 모신 우리 가족은 상을 가운데 두고 둥그렇게 둘러앉았습니다. 아빠가 할아버지를 향해 밝은 얼굴로 말했습니다.

“선생님께서 부탁하신 말씀대로 하기로 했습니다.”

“그런가? 고맙네. 삼천만 원을 아무 조건 없이 나한테 주겠다는 것인가?”

할머니가 나서서 말씀했습니다.

“선생님한테 드리는데 무슨 조건이 필요합니까? 선생님께서 얼마나 급하시면 그런 청을 하셨는지…….”

“감사합니다. 제가 좀 급한 일이 있습니다.”

할아버지는 아빠를 바라보고 활짝 웃으시며 입을 열었습니다.

“자네, 기억나나? 그 박연수 말일세.”

“네 기억합니다. 그 사람 재벌 아닙니까?”

“나도 그렇게 알았지. 내가 만나서 삼천만 원만 달라고 했지 않겠나.”

“그러셨습니까?”

“그 사람 내가 돈 이야기를 하자 싹 달라지더군.”

“……”

“또 한 사람 알지? 오중호라고.”

“그 사람도 사업에 성공하여 목에 힘주고 산다는 말 들었습니다.”

“그 사람한테 또 삼천만 원만 달라고 했더니 밥 한 그릇 사고 외면하더군. 또 한 사람 대성종합병원 아들 나형수 알지?”

“네, 그 사람은 아버지를 대신해서 원장이 되었다면서요?”

“그렇다네. 돈으로 벽에 도배를 한다는 말이 나돌 정도이기에 내가 삼천만 원만 달라고 했더니 그 역시 돈에는 절벽이더군. 또 한 사람 이인철이 알지?”

“네. 그 친구는 출판사를 그럭저럭 한다고 하던데요.”

“그렇더군. 그렇지만 내가 삼천만 원만 달라고 했더니 나 보고 삼천만 원만 고리채로 꾸어 달라는 거야. 혹 떼러 갔다가 혹만 붙이고 왔다네.”

“돈을 꿔달라고 해도 안 주는 세상에 그냥 달라고 하시니까 안 주는 겁니다.”

“자네한테 내가 꿔달라고 했던가?”

“아닌 것으로 압니다.”

“그렇지? 거저 달라고 했지?”

“네.”

“그런데도 거저 주겠다고? 더구나 사글세 보증금을 빼달라는데도?”

“아무데고 선생님이 싼 집을 구해 주신다고 했으니 그렇게 살다가 벌어서 더 큰 집 사면 되잖습니까?”

“그렇게 하게. 더 큰 집을 사시게. 그래, 언제까지 줄 텐가?”

“내일 이 집을 내놓겠습니다. 이 집은 싸게 있는 집이라 곧 나갈 것입니다.”

“알았네. 그럼 자네가 이사 갈 날만 잡게. 그 날에 맞추어 나도 셋집을 구해 놓겠네.”

“앞으로 15일 되는 날인 5월 31일로 계약을 하겠습니다.”

“알았네. 나도 그 날 계약을 해 두겠네.”

이렇게 되어 우리 사글세 집은 다음 날 나가고 우리는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게 할아버지가 계약한 집으로 이사하기로 했습니다.

19. 의심은 귀신

내일 5월 31일은 이사 가는 날입니다.

할아버지는 오늘 사글세 보증금 중에 삼천만 원을 받아 가지고 내일 오겠다고 하시고 어디론가 바삐 가셨습니다.  

엄마가 아빠한테 말했습니다.

“여보, 이상해요. 선생님을 믿어도 될까요?”

“글쎄…….”

“어디 있는 어떤 집인지도 모르는데 선생님 말씀만 믿고 일을 저질렀으니 어떡해요?”

할머니가 말씀했습니다.

“한번 믿기로 했으니 믿어 보자.”

아빠도 걱정스러운지 할아버지가 가신 쪽을 바라보시면서 중얼거렸습니다.

“이상해, 선생님이 왜 저렇게 급히 가시지?”

엄마도 말했습니다.

“이상해요, 선생님이 혹시……”

할머니는 달랐습니다.

“의심은 귀신이라고 했다. 한번 선생님은 영원한 선생님이시다. 설사 선생님이 돈을 가지고 달아나서 안 오시더라도 원망은 말거라. 한번 드린다고 했으니 주었으면 그만이지 무슨 생각들이 그리 많으냐?”

나는 할머니가 고맙고 귀엽게 느껴졌습니다. 할머니 말씀이 옳기 때문입니다. 한번 믿고 주었으면 그만이지 왜 자꾸 돈 생각을 하나요. 그러려면 안 주었어야 합니다.

“귀여운 할머니, 따봉!”

내가 크게 소리치자 할머니가 나를 잡아당겨 안으시며 뽀뽀를 해주셨습니다.

“우리 왕자밖에 없지. 귀여운 우리 어린왕자님, 넌 할미를 닮아서 마음이 넓어 왕자답다. 호호호.”

할머니는 기분이 좋아서 환히 웃으며 말씀했습니다.

“이사 갈 짐이나 싸자. 내일은 이사를 해야 하지 않겠니?”

엄마는 불안한 얼굴로 말했습니다.

“짐 쌀 기분도 아니에요. 어디로 가는지, 어떤 집인지 알지도 못하고 무슨 짐을 싸요.”

“선생님이 약속하셨으니 믿어 보자.”

아빠도 얼굴이 밝지 않았습니다.

“내가 아는 선생님은 그럴 분이 아닌데…….”

할머니는 짐을 싸기 시작했습니다. 엄마도 마지못해 짐을 싸면서 투정하듯 말했습니다.

“도깨비에 홀린 것 같아요. 이게 뭐예요. 그 선생님 참 이상한 분 같아요.”

내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엄마, 내 친구가 왜 이상하다고 해?”

“네가 뭘 안다고 그래? 다 너 때문이야. 어디서 이상한 분을 모시고 와서……”

“아저씨는 이상한 분이 아니야. 좋은 분이야.”

“너하고 말하느니 강아지하고 하겠다.”

듣고 있던 할머니가 끼어들었습니다.

“넌 우리 왕자한테 무슨 말을 그렇게 하는 거냐?”

“왕자고 뭐고, 생각해 보세요. 어디로 이사를 가며 얼마나 넓은 방이 있기는 한 건지, 방이 하나짜리면 또 어떡해요? 뭘 좀 알아야 할 거 아니에요? 선생님이라는 분은 돈을 받자마자 달아나고…….”

“믿어 보자. 선생님이 내일 오신다고 했잖으냐?”

“어머니처럼 어수룩한 분도 세상에 없지. 언제부터 선생님이라고 그러시는지, 저 오줌싸개가 말썽이야.”

엄마는 속상한 것이 나 때문이라고 나한테 눈을 흘기십니다. 아무리 그래도 나는 할머니 생각과 같습니다.

“엄마, 염려 마. 내 친구 아저씨는 꼭 오실 거야.”


이렇게 말씨름을 하면서도 우리는 이사 갈 준비를 마치고 밤을 맞았습니다. 엄마는 잠을 못 이루고 할머니한테 말했습니다.

“내일 이사를 해야 하는데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내일 일은 내일 생각하기로 하자. 성경에도 하나님이 오늘 일은 오늘 하고 내일 일은 내일에 맡기고 걱정하지 말라고 했잖느냐?”

“하나님이 왜 여기서 나와요? 그 말씀을 그렇게 믿으세요?”

“못 믿으면 넌 방법이 따로 있는 거냐? 잠이나 자자.”

“답답해서 그러지요. 잠이 와요?”

“그럼 자지 말고 선생님이 오신다고 했으니 기다려 보거라.”

“어머니는……”

이렇게 밤은 지나고 아침이 왔습니다.

20. 음매, 음매에에에

날이 밝자 일찍부터 집 밖에 이삿짐 차가 와서 붕붕거렸습니다.

엄마가 아빠를 불렀습니다.

“이삿짐 차는 뭐야? 여보, 이삿짐 차 불렀어요?”

“아니, 그런데 웬 차가?”

이때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습니다. 내가 잽싸게 달려가 문을 열었습니다.

“누구……”

내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할아버지가 대답을 했습니다.

“나다. 어린왕자!”

“아저씨!”

할아버지는 아빠한테 말했습니다.

“이사 갈 준비는 다 했는가?”

“네, 선생님.”

“그럼 이사 가야지.”

이어서 뒤따라온 이삿짐 나르는 아저씨들이 들어와 짐을 날랐습니다. 짐이 모두 차에 실리자 할아버지가 아빠한테 말했습니다.

“자네는 가족을 모시고 저 이삿짐 차를 따라 가게. 나는 어린왕자와 할 일이 있으니 뒤따라가겠네.”

아빠가 물었습니다.

“이사 가는 곳이 어딥니까?”

“멀지 않아. 저 차를 따라 가면 알게 될 테니 그리 알고 자네 차에 할머니와 부부가 함께 타고 가게.”

엄마도 할머니도 많이 궁금하실 테지만 아무 말도 못하고 할아버지가 하라는 대로 따랐습니다.

이삿짐 차가 떠나자 아빠도 차를 몰고 뒤를 따라 떠났습니다. 할아버지가 내 손을 꼭 잡으면서 말했습니다.

“내 친구, 어린왕자. 우리도 가자!”

할아버지는 청소하던 골목길로 걸어가시다가 내 앞에 등을 대고 앉으시며 말했습니다.

“귀여운 어린왕자, 내 등에 업혀라.”

“싫어요.”

“왜?”

“그냥요.”

“타라면 타. 업어주고 싶어서 그런다.”

“정말요? 타도 괜찮아요?”

“괜찮다고 했다.”

나는 등에 업혔습니다. 골목으로 향기 가득한 바람이 불어 왔습니다.

“골목 향기가 좋지?”

“네.”

“내 귀를 잡아 봐. 전에처럼.”

“안 돼요.”

“왜?”

“아저씨하고 친구 안 하고 싶어요.”

“그럼 뭐하고 싶으냐?”

“…….”

“내 귀를 잡고 이랴 이랴 해 봐.”

“무서워요.”

“뭐가 무서우냐?”

“아저씨가 이상해요.”

“이상할 거 없다. 이랴 이랴 해.”

나는 조심스럽게 할아버지 귀를 잡았습니다. 그런데 이랴 이랴가 안 나왔습니다.

“왜 가만히 있는 거냐? 네가 이랴 이랴 해야 내가 음매 음매 할 것 아니냐? 음매 음매애!”

나는 갑자기 웃음이 나왔습니다. 그래서 귀를 잡아당기며 소리쳤습니다.

“이랴 이랴!”

“음매, 음매, 음매에에에에.”

할아버지는 즐겁게 음매 음매 하시더니 차츰 우는 소리를 내셨습니다. 나는 할아버지가 운다고 생각해서 이랴 이랴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습니다.

할아버지는 나를 업은 채 뚜벅뚜벅 걸었습니다. 나는 할아버지 등에 뺨을 댔습니다. 할아버지 등은 따듯했습니다. 할아버지는 할아버지네 집이 있는 언덕길을 걸으시며 물었습니다.

“내가 업어주어서 즐겁지?”

“네.”

“나도 너를 업고 날마다 이렇게 다니고 싶다.”

“아저씨, 내려주세요. 힘들지 않아요?”

“힘 안 든다. 나는 즐겁기만 해.”

할아버지네 집 앞에 도착했을 때 이삿짐 차와 아빠 차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빠가 다가오며 말했습니다.

“선생님이 어떻게 쟤를 업고 오십니까? 윤재야 내려와.”

할아버지가 나를 내려놓으시며 말했습니다.

“난 어린왕자를 업고 오는 동안 아주 즐거웠네. 이제 이삿짐을 부려야지.”

할아버지가 대문을 활짝 열어 놓았습니다. 짐꾼들이 우르르 나와 짐을 옮겼습니다. 할머니, 엄마, 아빠는 어리둥절하여 물었습니다.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할아버지가 아빠를 보고 대답했습니다.

“내가 약속한 집이네. 보증금은 가지고 왔겠지?”

“선생님, 제가 알 수 있도록 설명 좀 해 주십시오. 이렇게 큰 집을 이천만 원으로 보증금이 되겠습니까?”

“집 주인이 된다고 하면 되는 거 아닌가. 이 집은 내 집이야. 곧 주인이 바뀌기는 하겠지만.”

“여기가 선생님 댁입니까? 언제 이리로 이사를 하셨습니까?”

“차츰 알게 될 테니 보증금이나 내놓고 이삿짐이나 다 들이게.”

21. 아름다운 집

나는 대문으로 들어가 입을 딱 벌리고 말았습니다. 할머니도 입이 벌어졌고, 엄마도 어리둥절해 있었습니다.

나는 지금까지 이렇게 아름답고 좋은 집이 세상에 있는 줄을 몰랐습니다. 대문 안에는 넓은 잔디밭이 놀이방 성처럼 펼쳐 있고, 둘러친 담에는 넝쿨장미가 우거지고 밖으로는 멀리 동네가 내려다보였습니다.

잔디밭으로 난 자갈길 양옆에는 백합이 피어 한입 가득 향기를 뿜어내고 집 뒤로는 감나무, 대추나무, 앵두나무가 우거져 시원한 그늘을 내리고 파란 잎으로는 하늘을 덮었습니다. 또 그 곁에는 쌍그네가 그림처럼 흔들거리고 있었습니다.

이삿짐 나르는 사람들이 다 돌아갔습니다. 우리 식구들은 쭈뼛쭈뼛 눈길을 어디다 두어야 할지 몰라 어리둥절 할아버지가 하는 대로만 따랐습니다.

현관으로 들어가면 넓은 응접실과 왼쪽에 주방과 식당이 있고 오른쪽에 방이 둘, 오른쪽 끝에는 이층으로는 올라가는 계단이 보였습니다.

할아버지가 식탁에 앉으시며 말했습니다.

“이리 오셔서 편히 앉으세요.”

할머니가 촌스럽게 수줍어하면서 의자에 앉았습니다. 아빠도 할아버지 맞은편에 앉았습니다. 나는 엄마 곁에 붙어 앉았습니다. 참 이상합니다. 갑자기 나도 남 같고 엄마도 촌뜨기처럼 보입니다.

할아버지는 아주 멋지고 기분이 좋은 얼굴이시지만 우리 식구들은 불안한 얼굴이었습니다.

“내 친구, 어린왕자!”

할아버지가 이렇게 힘차게 부르실 때 나는 찔끔했습니다. 갑자기 할아버지가 굉장한 사람으로 보이고 내가 죄라도 지은 것처럼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입이 열리지 않았습니다.

이런 속도 모르시는 할아버지는 사랑이 가득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셨습니다.

“어린왕자. 우리 집 좋지?”

“네, 네에, 네…….”

나는 더듬거렸습니다. 할아버지가 갑자기 나하고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큰 산처럼 느껴졌습니다.

부엌에서 일하시는 아줌마들이 음식을 날라다 차렸습니다. 식사를 하기 전에 할아버지가 둘러보며 말했습니다.

“모두가 너무 불안해 보이십니다. 편히 생각하십시오. 이 집은 우리 집이지만 오늘부터는 세를 주었으니 어린왕자의 집입니다. 나는 2년 동안 혼자 지냈고 저 아주머니들이 내 시중을 들어 주어 편히 지냈답니다. 우리 가족은 모두 외국에 나가서 삽니다. 나 혼자 남았는데 이제 나도 가족이 있는 곳으로 갈 생각입니다.”

나는 갑자기 할아버지가 안 계시면 어떻게 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무슨 말이든 하고 싶었는데 말이 안 나왔습니다.

할아버지는 수저를 들면서 아빠한테 말했습니다.

“약속을 했으니 자네는 앞으로 나한테 한 달에 2십만 원씩 사글세를 내야 하네, 알겠는가?”

“선생님, 그 돈으로 어떻게 이런 집에 살 수 있습니까? 도로 이사를 가야 하겠습니다.”

“자네보고 집을 싸게 준 게 아니야. 알겠나? 내 친구 어린왕자를 보아서 내가 싸게 주는 걸세.”

할아버지는 나한테 눈길을 보냈습니다.

“내 친구, 어린왕자. 이제 여기 살면서 공부도 하고 할머니 심부름도 잘하고 엄마 아빠한테 효도도 잘해해 한다. 알았지?”

“네에, 네.”

난 왜 자꾸 떨리는지 몰라요. 그런데 할아버지는 자꾸 나를 친구라고 하시니까 더 불안하고 미안하고, 몰라요, 내 맘을 내가 말할 수 없어요.

할아버지가 할머니와 엄마를 보며 말했습니다.

“앞으로 어린왕자 잘 키우세요. 저는 오늘 다섯 시 비행기로 우리 가족이 사는 나라로 떠날 계획입니다.”

“네? 네!”

나도 놀랐지만 엄마, 아빠, 할머니가 똑같이 수저를 놓고 눈을 동그랗게 떴습니다.

“왜들 그렇게 놀라십니까? 저는 오래 전부터 오늘이 오기를 기다리고 살았습니다. 어린왕자를 친구 삼아 한동안 나는 즐겁게 지냈답니다.”

식사가 끝나고 할아버지는 이층으로 올라가 짐을 챙기고 내려오시며 말했습니다.

“내 친구, 어린왕자! 이것 받아라.”

22. 아름다운 유산

할아버지가 나한테 열쇠꾸러미를 주시었습니다. 나는 겁이 나서 받지 못하고 우물쭈물했습니다. 할아버지가 내 손을 잡고 열쇠를 넘겨주며 아빠한테 말했습니다.

“자네, 나 좀 공항까지 태워주지 않겠는가?”

“네, 선생님.”

“자네가 공항에서 나를 보내고 돌아오면 주방 아주머니들은 집안 정리를 해주고 돌아갈 것일세.”

이렇게 말한 할아버지는 주방에서 일하는 아주머니들한테 인사를 했습니다.

“그 동안 도와주시어서 고마웠습니다.”

아주머니들은 눈물을 질금거리며 할아버지의 인사를 받았습니다.

나는 아빠 차에 올라 할아버지 곁에 앉았습니다. 할아버지는 나를 꼭 안고 눈을 감은 채 아무 말씀도 하지 않다가 공항에서 아빠한테 이르셨습니다.

“나는 어린왕자를 떠나는 것이 매우 서운하네. 그러나 어쩌겠나, 떠나야지. 내가 떠나고 나거든 집에 가서 이층 서재로 가 보게. 책상에 봉투 둘이 있네. 하얀 봉투는 어린왕자 것이고 누렁봉투는 자네에게 일러둔 말이 있네.”

할아버지는 예정시간에 떠나셨습니다. 아빠하고 나는 비행기가 아득히 구름 위를 날아 하늘 끝으로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면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집으로 돌아왔을 때 큰 집이 갑자기 텅텅 빈 것 같고 나는 꿈을 꾸는 것 같았습니다. 할머니와 엄마는 정신이 나간 사람들처럼 현관 벤치에 앉아 우리가 오기를 기다렸습니다.

아빠하고 나는 이층 서재로 올라가 문을 열었습니다. 사면 벽 책장에는 책이 빈틈없이 빽빽했습니다. 아빠가 먼저 누렁 봉투를 열었습니다.

<박군 보게

나는 자네 아들 어린왕자를 통하여 참으로 즐거운 날을 보낼 수 있었네. 그렇게 귀여운 아이가 자네 아들이란 것을 알고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 나는 이제 귀국하기 어려울 거야. 전에도 말했듯이 사람들이 돈 말만 하면 전혀 다른 사람이 되는 데서 실망을 많이 했지. 그런데 오직 자네 한 사람만은 달랐어. 사글세 보증금을 내놓은 자네의 의리에 감동했네. 이제 나는 이 땅에서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나의 친구 어린왕자에게 주기로 했네. 하얀 봉투를 열어 보면 그 안에는 내가 받았던 3천만 원과 우리 집 사글세 보증금 2천만 원을 합한 5천만 원짜리 통장이 있고, 통장 주인은 박윤재로 되어 있네. 매월 사글세 20만원씩 그 통장에 넣어 주기 바라네. 그리고 이 집 등기 문서도 거기 있고, 내가 우리 학교 출신 변호사를 통하여 내 유산 상속인을 어린왕자로 해서 서류 일체를 맡겼네. 내일은 그 친구가 와서 상속 절차를 알려줄 것일세. 그리고 저재의 책을 자료로 하여 자네는 내가 대학 연구실에서 하던 일을 맡아 하면서 내 강의도 맡아 서 못 이룬 연구 성과를 자네가 이루어주기 바라네. 내가 바라는 건 돈보다 연구 실적일세. 내 모든 것을 가질 자격이 자네에게 있음을 믿네. 건강하고 행복하고 내 친구 어린왕자가 멋지게 성장하도록 최선을 다하기 바라네. 끝으로 내 친구 어린왕자한테 들려주고 싶네. 어린왕자 만세! 건강하라.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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