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방/동화

천사

웃는곰 2006. 8. 15. 16:23

천  사


엄마는 아침마다 똑같은 말씀을 하고 일을 나가십니다.
"엄마 올 때까지 멀리 가지말고 꼭 대문 앞에서 놀아야 해, 알았지?"
"응, 엄마."
"누가 가자고 해도 따라가면 안 된다. 알았지?"
"응, 엄마."

 


미나는 엄마가 골목길 끝으로 안 보일 때까지 손을 흔들고 서서 빠이빠이를 합니다.
"엄마 빨리 와야 해, 빨리."
엄마가 안 보이는 골목은 아주 조용해졌습니다. 어느새 높이 올라온 따뜻한 봄 햇살이 가득히 내려 잠자는 나무들을 흔들어 깨웁니다.
"얘들아 일어나, 겨울이 지났어. 봄맞이를 해야지."
나무들은 잠에서 깨어 기지개를 켜고 팔을 높이 뻗어 봅니다.

 

"어, 정말 봄이 왔네."
햇살은 다시 화단을 쓰다듬으면서 속삭입니다.
"얘들아 일어나 봄이야 봄."
땅 속에 잠자던 작은 씨앗들도 고개를 내밀고 양팔을 쫙 벌리고 말합니다.
"어, 벌써 봄이 왔네. 얘들아 일어나 봄이다."

 

 

미나는 작은 씨앗들과 나뭇가지와 햇살이 하는 이야기를 듣다가 대문 앞 계단으로 가 쪼그리고 앉습니다. 그리고 골목을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봅니다.
멋쟁이 아저씨가 머릿기름 냄새를 풍기면서 뚜벅뚜벅 지나가기도 하고 뾰족구두 아줌마가 딸각딸각 소리를 내며
참새처럼 달려가기도 합니다.

 

 

미나는 지나가는 사람을 보고 아주 작은 소리로 인사를 합니다.
"아찌 안녕?"
그러나 아무도 대답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너무 바삐 가느라고 미나의 인사를 듣지 못하는 것입니다. 초등학생도 지나가고 중학생도 지나가고 할아버지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아무도 미나를 못 본 체하고 지나갑니다. 개미처럼 허리가 굽고 얼굴이 새까맣게 끄른 할머니가 말을 걸었습니다.
"아가야, 오늘도 나왔어?"

 

"네, 안녕?"
"그래, 어린것이 인사도 잘하지."
"넌 몇 살?"
미나는 오른손을 짝 펴 보였습니다.
"다섯 살?"

 

미나는 고개를 까딱했습니다.
"귀엽기도 하지. 엄마는?"
"돈벌러 갔어요."
"그래? 너 혼자 집을 보는 거냐?"

 

미나는 고개를 또 까딱했습니다.
"어린것이 신통도 하지. 집도 보고……. 집 잘 보고 있어. 내가 다시 올게."
할머니는 작은 손수레를 끌고 저쪽 골목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한참 있다가 손수레에다 빈 사과 상자와 라면 상자를 차곡차곡 싣고 끌고 오셨습니다.
"아직도 있었구나. 기다려, 내가 맛있는 거 사 가지고 올게."

 

할머니는 개미처럼 수레를 끌고 어디로 가셨습니다. 미나는 할머니를 말가니 바라보았습니다. 할머니가 안 보일 때쯤 눈에는 졸음이 사르르 얹혔습니다.
따뜻한 햇살이 등을 어루만지며 자장가를 불러 줍니다.
작은 새들도 미나를 위해 자장가를 불러주었습니다.
파릇파릇 눈이 돋은 나뭇가지도 가만가만 박자를 맞추어 흔들며 자장가를 불러 줍니다.

 

 미나는 마치 귀여운 강아지처럼 계단에 스르르 머리를 떨어뜨리고 모로 누웠습니다.
엄마가 오시는 꿈을 꿉니다.
아빠가 웃는 꿈을 꿉니다.
아이들과 예쁜 꽃밭 구경을 하는 꿈도 굽니다.

 

미나는 잠든 채 방긋이 웃음을 지었습니다.
뽀얀 볼을 부드러운 햇살이 살살 만져 줍니다. 바람도 춤을 추며 다가와 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어 줍니다.

 

 

 

 

작은 개미도 등을 타고 올라와 더듬이로 아기 냄새를 맡으며 싱긋 웃습니다. 그리고 혼자 지껄입니다.
"사람은 어렸을 때가 예뻐!"
바람도 한마디합니다.
"바로 이 얼굴이 천사야."
햇살도 중얼거립니다.
"귀여운 녀석, 강아지처럼 잘도 잔다."

 

미나는 깜박 잠에서 깨어 눈을 떴습니다. 할머니가 계단 곁에 앉아 날아오는 파리를 쫓고 있었습니다.
"할머니!"
"그래, 잘 잤니?"
"할머니 또 오셨어요?"
"너 보고 싶어서 왔지. 이거 먹을래?"
할머니는 빵과 우유를 들고 계셨습니다. 미나는 손을 내밀었습니다.

 

"우유 먼저 마시고 먹어라."
할머니는 우유를 입에 대주셨습니다. 목이 말랐던 미나는 우유가 묻은 입술로 빵을 한 입 물었습니다. 그리고 할머니를 바라봅니다. 말은 못해도 눈빛 속에는 고마워하는 맘이 가득히 고여 퐁퐁 쏟아져 나오고 있었습니다.
"귀엽기도 하지, 어쩌면 입이 요렇게도 예쁘냐? 꼭 인형 같구나."

 

미나는 맛있는 빵과 우유를 다 먹었습니다. 할머니는 미나를 품에 안으셨습니다. 그리고 등을 쓰다듬어 주셨습니다.
해가 지붕 끝에 얹혀 벙글벙글 웃으면 엄마가 옵니다. 이제 엄마가 올 시간입니다. 미나는 골목 끝에 눈을 돌린 채 엄마를 기다렸습니다.
"엄마가 오실 거예요."
할머니는 미나 볼을 쓰다듬으시며 물었습니다.

 

"엄마가 그렇게 보고 싶어?"
"네."
바로 이때 저쪽 끝에 엄마가 나타났습니다.
"엄마아!"
미나는 할머니 품을 떠나 골목길로 달려갔습니다. 엄마는 미나를 번쩍 안고 볼에다 뽀뽀를 했습니다.
"잘 놀았어? 우리 강아지."

 

"엄마, 있잖아."
"뭐가?"
"나 맛있는 빵도 먹고 우유도 먹었다."
"우유를?"
"할머니가 사줬어."
"할머니?"

 

"응, 저기 문 앞에……"
미나는 손으로 골목 안쪽을 가리켰습니다. 엄마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습니다.
"어디?"
"어? 할머니 어디 갔을까?"

 

 

 

 

미나는 엄마보다 눈을 더 크게 떴습니다.
"할머니이!"
대문 앞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미나는 이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할머니가 여기 계셨는데……"
엄마는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습니다.
"얘가 꿈을 꾸었나?"

다음날입니다.

 

엄마는 일 나가고 미나 혼자 남아 어제처럼 골목 계단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았습니다. 날마다 같은 시간에 같은 사람들은 바쁘게 걸어갑니다.
"아찌 안녕!"
인사를 해도 아무도 모른 채 지나갑니다. 그래도 미나는 작은 소리로 열심히 인사를 했습니다.
"아찌 안녕! 아찌 안녕!"
사람들이 지나가면 얼굴 모양도 보고 구두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아줌마들 화장 냄새도 맡을 수 있고 아찌 안녕 하고 인사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다 지나가고 나면 골목길은 조용해집니다. 그러면 미나는 지루한 시간에 끌려갑니다. 흙장난도 해보고 새소리도 듣고 졸음이 오면 계단에 쓰러져 콜콜 잠도 잡니다.
미나는 할머니가 오실까 하고 골목길을 열심히 바라보았습니다. 할머니가 어제처럼 작은 손수레를 끌고 오십니다. 미나는 반가워서 달려갔습니다.
"할머니이!"
"오냐. 내가 보고 싶었어?"
"네."

 

"나도 네가 보고 싶었어."
할머니는 수레를 놓고 미나를 안아주었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기다리고 있어. 알았지?"
할머니는 어제처럼 어디로 가셨습니다. 그리고 한참 뒤에 찢어진 과일 상자를 가득히 싣고 오셨습니다. 주름진 할머니 이마에는 땀이 주름 사이로 흘렀습니다.
"조금만 더 기다려라. 알았지? 맛있는 거 사올게."

 

 

미나는 할머니가 안 보일 때까지 바라보다 스르르 잠이 들어 강아지처럼 꼬부리고 누웠습니다.
맑은 햇살이 뽀얀 얼굴을 간질입니다. 배시시 웃는 미나는 날개를 달고 새가 되어 새들을 따라 하늘을 날아다니는 꿈을 꾸었습니다.
"아가야, 높이 올라와 봐."

 

새들은 아주 친절하게 미나를 데리고 높은 나뭇가지에 앉았습니다.
"저기 동네가 보이지?"
"응."
"저기로 가 볼까?"
"무서워."
"나를 따라 와 알았지?"
"싫어, 싫어."
미나는 고개를 가로 저었습니다. 이때 할머니가 등을 쓰다듬으시었습니다.

 

"뭐가 싫어? 꿈꾸었니?"
눈을 뜬 미나는 할머니가 머리를 무릎 위에 얹고 내려다보시는 것을 알았습니다.
"할머니!"
"이거 먹어라. 우유하고 빵이야."

 

 

 


미나는 얼른 받아 우유를 마시고 빵을 먹었습니다. 할머니는 미나가 먹는 입을 귀엽게 바라보십니다.
"할머니도 잡수셔요."
미나는 빵을 떼어 할머니 앞으로 내밀었습니다.
"할머니는 괜찮아 너나 꼭꼭 씹어 잘 먹어."
할머니는 오늘도 미나를 안아주시면서 물었습니다.
"아빠는 언제 오시니?"
"아빠는 안 오셔요."
"왜?"

 

"아빠는 별이 되셨대요."
"별?"
"네, 아빠가 보고 싶을 때는 하늘을 보아요."
"하늘을?"
"네, 엄마가 아빠별을 가르쳐 주셨어요."
"저런……"
"저녁 먹고 마당에서 저 지붕 꼭대기를 보면요, 아주 크고 밝은 별이 보여요. 그 별이 아빠별이에요."
"……"
"아빠가 보고 싶을 때는 별을 보고 이야기해요."
"……"

 

할머니는 슬픈 얼굴로 미나를 꼬옥 안고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할머니!"
"왜?"
"엄마가 그랬어요. 아빠별을 보고 울면 안 된다고 했어요. 울면 이 다음에 아빠가 나를 안 데려간다고 했어요."
"그래? 할머니는 별이 너무 예뻐서 눈물이 났어."
"그렇지요? 우리 아빠별이 가장 예쁘고 크지요?"
"음……"
할머니는 해가 지붕 위에 얹히자 일어섰습니다.
"엄마 올 시간이다. 나는 간다. 내일 또 보자, 응?"

 

"안녕!"
할머니는 손수레를 끌고 골목을 떠나셨습니다. 미나는 손을 흔들며 빠이빠이를 하다가 엄마가 오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엄마아!"
소리치며 엄마를 향해 달려갔습니다. 엄마는 미나를 번쩍 안았습니다.
"잘 놀았어?"
"네, 그 할머니하고……"
"할머니가 또 오셨어?"

 

 

"응. 그리고 우유도 빵도 사 주셨어."
"그랬어? 고맙기도 해라."
엄마는 할머니가 누구일까 궁금해졌습니다. 그래서 다음 날 출근을 하는 척하고 골목을 빠져나가 숨어서 할머니가 오시기를 기다렸습니다.

 

한낮이 되자 개미처럼 작고 허리가 꼬부라진 할머니가 손수레를 끌고 나타났습니다. 할머니를 보자 미나는 달려가 할머니 품에 안기어 깔깔거리며 재미있게 지껄여댔습니다.
잠시 후 할머니는 손수레를 끌고 시장 쪽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버려진 과일 상자를 주워 수레에 차곡차곡 쌓았습니다.

 

무거운 수레를 끙끙거리며 끌고 미나가 있는 골목으로 들어가 미나와 이야기를 하고 쉬시다가 고물상을 찾아가 그 안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엄마는 가까이 다가가 지켜보았습니다. 고물상 주인이 할머니의 수레를 번쩍 들어 차에 올려놓고 말했습니다.
"할머니, 이제 그만 가져오세요. 천 원어치도 안 되는 걸 노인이라 딱해서 드리는 거예요. 받으세요."
주인은 이천 원을 할머니 손에 쥐어 주셨습니다. 할머니는 고마워서 몇 번씩 꼬부라진 허리를 숙이고 또 숙이며 말했습니다.
"고맙습니다. 아주 고맙습니다."
고물상 주인이 물었습니다.

 

 

"할머니, 좋은 일이 있으신가 보지요?"   
"왜요?"
"요새 할머니 얼굴이 아주 즐거워 보이셔서요. 그리고 날마다 우유하고 빵을 사 가지고 어디로 가세요? 전에는 그런 일이 없으신 것 같았는데."
"천사한테 가지요."
"천사요? 할머니 농담도 하실 줄 아네. 하하하하."
"정말이에요. 전에는 2천 원을 주시면 교회에 가서 헌금을 했는데 요새는 천사를 주고 먹는 것을 바라보면 얼마나 즐거운지 몰라요."

 

 

"천사가 있다는 말은 처음 듣습니다."
"주인 양반도 천사를 만나보시면 제 마음을 아실 거예요."

 


 

 

"할머니, 그런 돈 생기면 할머니나 맛있는 거 많이 사 잡수세요."
"내가 먹으면 얼마나 먹겠수?"
할머니는 빈 손수레를 달가닥달가닥 끌고 한참을 가더니 슈퍼로  들어가 빵 두 개와 우유 한 통을 사들고 나왔습니다. 그리고 미나가 있는 골목으로 들어갔습니다.
할머니 얼굴에는 즐거운 웃음이 가득했습니다.
엄마는 다 지켜보면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리고 숨어 선 채 뜨거운 가슴으로 혼자 말했습니다.

 

"할머니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천사는 미나가 아니라 할머니이십니다. 할머니는 천사이십니다."

'문학방 > 동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기쁨을 담는 바구니  (0) 2006.08.20
반쪽 미인  (0) 2006.08.19
단행본 동화집 / 등 붙이고 코 뽀뽀  (0) 2006.08.12
귀여운 장난꾸러기  (0) 2006.08.04
동생  (0) 2006.08.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