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코스트 45 /죽은 사람이 산 사람보다 할 말이 많다
나는 눈을 감았다. 그러자 별안간 온몸을 고문하는 듯한 통증이 몰려왔다.
지금껏 한 번도 느끼지 못한 통증이었다.
그러나 그 통증은 계속 있어 왔던 것이다. 내가 마시고 있던 공기처럼,
나의 두뇌에서 형성되고 있던 말처럼, 타는 듯이 뜨거운 살갗인 양
나의 몸을 감싸고 있던 깁스붕대처럼 엄연히 있어 왔던 것이다.
그런데도 어째서 나는 그 통증을 전혀 느끼지 못했단 말인가?
어쩌면 의사와의 대화에 너무 열중한 탓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럼, 의사는 나의 고통을, 무서울 정도의 고통을 알고 있었을까?
내가 한기를 느끼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을까? 살이 탈 듯한가 하면 견딜 수 없는 추위에 덜덜 떨어야 하는 나의 고통을 알고 있었을까? 처음에는 몸뚱어리가 활활 타오르는 아궁이 속에 던져졌는가 싶다가도 다음 순간에는 차가운 얼음 통속에 던져진 것 같은 나의 고통을 알고 있었을까?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는 알고 있었다. 닥터 러셀은 예민한 의사였으므로 내가 고통을 못 이겨 입술을 깨무는 것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고통이 심할 겁니다.”
그가 말했다. 그는 꼼짝하지 않고 나의 발치에 서 있었다. 나는 그가 뻔히 내려다보는 앞에서 이가 덜덜 떨려오는 것이 여간 수치스럽게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게 정상입니다.”
그는 나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말을 이었다.
“당신은 상처가 너무 심했어요. 그래서 당신의 몸이 거기에 대항해서 싸우고 있는 겁니다. 고통은 그 때문에 일어나는 거지요. 하지만 명심할 것은, 당신의 적은 그 고통이 아니라 발열이라는 사실입니다. 열이 계속 오르면 당신은 죽게 됩니다.”
죽는다고? 나는 생각에 잠겼다. 그는 나의 적이 죽음이라고 생각하고 있군. 그러나 그는 잘못 알고 있는 거야. 죽음은 나의 적이 아니야. 그가 이 사실을 모르고 있다면 그는 나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거야. 적어도 모든 것을 알진 못하고 있어. 그는 내가 다시 살아난 것만 보았을 뿐, 내가 삶과 죽음에 대해서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모르고 있는 거야. 아니면 혹시 알고 있으면서도 내색을 하지 않는 것일까? 이런저런 의구심이 벌의 붕붕거림처럼 끊임없이 신경 깊숙이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열은 점점 심해졌다. 그에 따라 머리카락까지 확확 달아올랐다. 몸 전체가 뜨거운 횃불에 휩싸이는 듯했다. 발열은 나의 몸뚱어리를 마음대로 가지고 놀고 있었다.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위로 던지는가 하면 아래로 던졌다가는 다시 아주 높은 곳으로 던지기도 하고 아주 낮은 곳으로 던지기도 했다. 마치 나에게 가장 높은 곳의 한기와 가장 낮은 곳의 열기가 어떤 것인가를 똑똑히 가르쳐 주기로 작정한 것만 같았다.
“진정제를 놓아 드릴까요?”
의사가 물었다. 나는 머리를 저었다. 나는 아무것도 싫었다. 아무것도 필요 없었다. 그리고 무섭지도 않았다.
나는 의사가 문께로 걸어가는 발자국 소리를 들었다. 문은 나의 뒤쪽에 있는 모양이었다. 가도록 내버려 두자, 하고 나는 생각했다. 나는 혼자 있어도 무섭지 않아. 삶과 죽음 사이를 거닐고 있어도 나는 조금도 두렵지 않다고. 갈 테면 가라지!
의사가 문을 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문을 닫기 전에 발걸음을 멈추었다. 다시 돌아오는 것일까?
“깜빡 잊을 뻔했군요.”
그가 가만히 말했다. 음성이 너무 적어서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깜빡 잊을 뻔했어요. 캐들린……. 그 여잔 정말 매력적인 여자입니다. 정말 매력적인…….”
그렇게 말하고 의사는 조용히 방을 나갔다. 이제 나는 혼자였다. 오직 하나의 무력하고 고통 받는 남자로서 홀로 남아 있었다. 얼마 있으면 간호원이 적과 싸우라고 페니실린 주사를 놓으러 오리라. 도대체 적과 싸우기 위해 간호원의 도움을 받아 주사를 맞는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었다. 우스운 짓이었다. 그러나 나는 웃지 않았다. 얼굴 근육이 얼어붙은 채 움직이지 않는 탓이었다.
이제 곧 간호원이 올 것이다. 의사가 그렇게 말했으니까. 의사의 목소리는, 인간의 선의는 언젠가 그 보답을 받게 마련이라는 인생철학을 터득하고 있는 노인들의 목소리처럼 차분했다. 의사가 또 무슨 말을 했더라? 캐들린에 대해서 말했었지. 그래, 분명히 그녀의 이름을 말했었지, 매력적인 여자라고. 아니야, 그렇게 말하지 않았어. 정말 매력적인 여자라고 했었지. 맞아, 그렇게 말했어. 그 여잔 정말 매력적인 여자입니다. 나는 의사의 말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구. 매력적인 여자.
캐들린……. 그녀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어떤 세상에 있을까? 천상에 있을까? 지하에 있을까? 나는 그녀가 오지 않기를 바란다. 나는 그녀가 이 방에 나타나지 않기를 바란다. 그녀가 이런 나의 모습을 보기 원치 않는다. 나는 그녀가 간호원과 함께 오는 것을, 그녀가 간호원이 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내가 나의 적과 싸우는데 그녀의 도움을 받고 싶지 않다. 그녀는 매력적인, 정말 매력적인 여자다. 그러나 그녀는 이해하지 못한다. 그녀는 죽음이 나의 적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녀는 권능에 대하여, 사랑의 전능한 힘에 대하여 과다한 신념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 나를 사랑하라, 그러면 너희들은 보호받을 것이다. 서로 사랑하라, 그러면 모두가 복될 것이며 모든 고통이 지상에서 영원히 사라지리라. 누가 이런 말을 했더라? 아마 그리스도였을 것이다. 그리스도 역시 사랑에 대하여 과다한 신념을 지니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나의 경우, 사랑이건 죽음이건 관심 밖이었다. 나는 죽음을 생각하건 사랑을 생각하건, 웃을 수가 있었다. 지금 역시 유쾌한 웃음을 터뜨릴 수 있다. 그러나 얼굴 근육이 나의 마음을 따라 주지 않는다. 너무나 춥기 때문이다.
내가 캐들린을 만난 것은 어느 추운 날- 낮이 아니라 어느 추운 저녁 무렵이었다.
어느 겨울 저녁, 바깥에는 사나운 바람이 벽을 무너뜨리고 나무들을 베어 넘길 듯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이리 오게. 할리나에게 자네를 소개해 주고 싶네.”
쉬몬 야나이가 나에게 말했다.
“나는 저 바람소리를 듣고 싶어.”
내가 대답했다(그때 나는 누구와 말을 주고받을 기분이 아니었다).
“바람은 당신의 할리나보다 더 많은 것을 말해 줍니다. 바람소리는 죽은 사람들의 회환과 기도를 전해 주니까요. 죽은 사람들에게는 산 사람들보다 할 말이 더 많거든요.”
그러나 쉬몬 야나이- 중도지방 전역은 못되나 팔레스타인에서는 가장 멋진 콧수염을 지녔을 쉬몬 야나이는 나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그는 호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다시 재촉했다.
“어서 가자구. 할리나가 우릴 기다리고 있어.”
나는 양보했다. 그러면서 나는 할리나라는 여자 역시 죽은 사람들 중의 하나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그날 파리의 한 극장에서 발레 공연을 관람하던 중 막간의 휴식시간을 이용하여 로비에 나와 있던 참이었다. 그날 발레단의 이름이 <몰랑 쁘띠>였는지 <마르끼 드 꾸바>였는지는 기억에 없다.
“할리나라는 여자, 꽤 미녀인 모양이군요.”
나는 로비를 가로질러 바로 가면서 쉬몬에게 말했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지?”
쉬몬이 듣던 중 반가운 소리라는 듯이 즐거운 표정을 지으며 반문했다.
“오늘 저녁 당신의 옷차림을 보고 짐작했죠. 꼭 부랑자 같아요.”
나는 그를 놀려대기 좋아했다. 쉬몬은 사십대로 키가 크고 텁수룩한 머리에 눈망울은 푸르고 꿈꾸는 듯했다. 그는 어느 누구에게나 한 번도 점잖다거나 진지한 사람으로 보이기를 바란 적이 없었다.
“당신 또 머릴 헝클어뜨리고 넥타이를 비뚜름히 매고 바지주름을 구기느라 거울 앞에서 시간깨나 보냈겠군요.”
나는 곧잘 이렇게, 그에게 애정 섞인 빈정거림을 던지곤 했었다. 그의 보헤미안적 취향에는 무엇인가 감상적인 데가 있었다.
그가 파리에 자주 왔으므로 우리는 잘 알고 지내는 사이였다. 그는 뉴스거리를 곧잘 귀띔해 주었다. 그는 신문기자들을 좋아했는데, 그것은 기자들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는 이스라엘이 국가로 탄생하기 이전, 이스라엘 저항운동의 파리 대표였는데 신문이 자기에게 도움이 된다는 점을 스스럼없이 인정하는 사람이었다.
할리나는 바아에서 손에 잔을 든 채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삼십대로 좁은 얼굴에 안색이 창백했다. 험난한 과거를 살아온 여자처럼 왠지 모르게 섬뜩한 인상을 주는 여자였다.
우리는 악수를 했다.
“나이가 꽤 드신 분으로 생각했어요.”
그녀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꽤 먹었지요. 이따금 바람만큼이나 나이를 먹을 때가 있으니까요.”
할리나가 웃었다. 그러나 그녀는 웃는 법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녀의 웃음은 보는 사람에게 어떤 슬픔 같은 것을 안겨주었다. 마치 죽은 사람의 웃음처럼 잊히지 않는 무엇인가를 심어주는 듯했다.
“정말이에요. 전 당신의 기사를 읽었어요.
모두가 인생의 황혼 길에 접어든 사람, 희망이 다한 사람이 쓴 기사처럼 느껴졌다구요.”
“그게 바로 젊음의 징표지요. 오늘날의 젊은이들은 언젠가 그들도 늙으리라는 사실을 믿지 않거든요.
그들은 자기들이 젊은 채로 죽으리라 확신하고 있으니까요.
오늘의 우리 시대에는 노인들이야말로 사실은 가장 젊은 사람들이지요.
그들은 적어도 우리가 가져본 적이 없는 젊음이라고 불리는 인생의 한 단면을 자랑이라도 할 수 있거든요.”
이 말에 할리나의 얼굴이 한결 창백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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