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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코스트 43 / 속이고 속 보기

웃는곰 2026. 7. 23. 10:40

홀로코스트 43 / 속이고 속 보기

 

칠월 어느 저녁 무렵, 뉴욕의 한복판에서 사고가 일어났다.

그 날 캐들린과 나는 영화 <카라마조프네 형제들>을 보러 가기 위해 차도를 막 건너려는 참이었다.

한여름의 열기로 숨이 헉헉 막혀오고 있었다.

뼛속까지, 혈관까지, 허파까지 스며들고 있었다. 말 한 마디, 숨 한 번 내뱉기가 어려울 지경이었다. 모든 것이 축축이 젖은 거대한 공기의 막으로 감싸여 있었다. 열기는 급기야 하나의 저주처럼 살갗을 꿰뚫고 있었다.

 

행인들은 수척한 모습으로 인생의 황혼녘을 바라보는, 그리고 인생에 열중하기보다는 마음 편히 이 세상을 하직하고 싶어 하는 노인처럼 입술이 메마른 채 뒤뚱거리며 걷고 있었다. 모두가 한결같이 자신들의 육체에 넌더리를 내고 있었다.

나는 피곤했다. 5백 단어짜리 전송 뉴스를 막 끝낸 참이었다. 아무런 반응도 울려오지 않는, 또 하나의 공허한 하루를 메우기 위한 5백 단어. 그 날은 시간 위에 아무 표지도 남기지 않는 조용하고 단조로운 일요일이었다. 워싱턴에서도 아무 반응이 없었다. UN에서도 아무 말이 없었다. 할리우드까지도 묵묵부답이었다. 영화배우들은 뉴스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도대체 아무런 반응도 없는 말을 하기 위해 5백 단어를 쓴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두 시간 동안의 작업을 마친 나는 거의 녹초가 되어 있었다.

이제 우리 무얼 하죠?”

캐들린이 물었다.

당신 좋을 대로.”

 

우리는 쉐라톤- 아스토어 호텔의 정면인 45번 가의 모퉁이에 와 있었다. 나는 망연자실한 상태였다. 머릿속에는 무겁고 칙칙한 안개가 끼어 있는 것만 같았다. 발걸음 하나 옮겨놓기가 싫었다. 팔과 다리가 납덩이처럼 무겁기만 했다.

오른쪽으로 타임즈 광장에는 인파가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사람들은 바다로 나가듯 광장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그들은 말라빠진 꿈으로 가득한 실경(室景)과 흡사한 광장에 조금도 지루해하거나 고통스러워하지도 않고, 오직 혼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 아니 오직 혼자가 되기 위해서 광장으로 광장으로 몰려가고 있었다.

세계는 무거운 한여름의 열기 밑에서 느린 속도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 모습이 사뭇 비현실적으로 보였다. 다채로운 네온 빛 사육제 속에 묻혀 사람들은 서로 웃고 노래하며, 서로 고함치고 모욕하며 이리저리 거닐고 있었다. 그 모든 동작이 화가 치밀 정도로 완만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선원 세 사람이 호텔에서 나왔다. 그들은 캐들린을 발견하고는 우뚝 멈춰 서서 길게 휘파람을 불었다.

그만 가요.”

캐들린이 나의 팔을 끌었다. 그녀는 불쾌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는 눈치였다.

, 불쾌해서? 하지만 저들은 당신이 아름답기 때문에 저러는 거요.”

저렇게 휘파람을 부는 건 싫어요.”

 

휘파람을 부는 건 저들의 습관이오. 저들은 여자를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입으로 보거든. 선원들의 눈은 항상 바다에 가 있기 때문이지. 저들은 뭍에 올라올 때에도 눈을 사랑의 징표로서 바다에 남겨두고 오는 거요.”

선원들은 벌써 어디론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 없었다.

당신은요? 당신은 저를 어떻게 바라보시죠?”

그녀는 모든 것을 나와 연관시키기를 좋아했다. 그녀에게는 우리 두 사람이 항상 우주의 중심이었다. 우리 두 사람을 제외한 다른 인간들은 다만 하나의 비교 대상으로 존재할 뿐이었다.

나 말이오? 난 당신을 바라보지 않소.”

 

나는 약간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잠깐 침묵이 흘렀다. 나는 꾹 참고 한마디 덧붙였다.

하지만 난 당신을 사랑하오. 그건 당신도 알고 있잖아.”

저를 사랑한다고요. 그러면서도 절 바라보지는 않고요?”

그녀의 음성이 침울해졌다.

 

당신께 경의를 표해야겠군요.”

당신,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군. 인간이란 필연적으로 혼자서만 살아갈 수는 없는 거요. 당신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어. 하지만 그 분을 볼 수는 없지 않소?”

이 비교에 그녀는 만족해하는 것 같았다. 아마 나는 거짓말을 하고 있었으리라. 그녀가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물었다.

그럼 당신은 하나님을 사랑할 때 누구를 바라보죠?”

당신이지. 하나님을 똑바로 쳐다볼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그만둬야 할 거요. 하나님에게는 사랑이 필요하지 이해가 필요하지는 않으니까 말이오.”

당신한테는요?”

 

캐들린의 경우, 하나님까지도 우리 두 사람에게 귀착되는 내용이 아닌 이상에는 토론의 주제로서 만족스럽지 못했다.

나 역시 당신의 사랑이 필요하오.”

나는 거짓말을 했다. 우리는 여전히 같은 장소에 서 있었다. 왜 우리는 발걸음을 옮기지 않았을까? 나로서도 알 수가 없다. 아마 우리는 그 사고를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그때 나는 마음속으로, 거짓말을 하는 것을- 얼굴을 붉히지도 않고 거짓말을 잘 하는 방법을 배우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사실 나는 거짓말에 서투르기 짝이 없었다. 무엇인가 거짓말을 할 때면 어색하기만 했고 마음과는 달리 얼굴이 이내 붉어졌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뭘 기다리고 있는 거죠?”

캐들린이 조바심을 냈다.

아무것도.”

 

나는 정작 우리가 사고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사실도 모른 채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아직도 배고프지 않으세요?”

아니.”

하지만 온종일 아무것도 들지 않았잖아요?”

캐들린이 안타까운 듯이 말했다.

전혀.”

캐들린은 한숨을 내쉬었다.

 

얼마 동안이나 참을 수 있을 것 같아요? 당신은 지금 천천히 자살해 가고 있어요.”

근처에 조그마한 식당이 하나 눈에 띄었다. 우리는 그리고 들어갔다. 좋아, 먹는 방법도 배워둬야 되겠군, 하고 나는 생각했다. 그리고 사랑하는 방법도. 난 아무것이나 다 배울 수 있다고.

카운터 앞의 빨간 의자에는 열두어 명의 손님이 앉아 말없이 음식을 먹고 있었다. 우리가 안으로 들어서자 그들은 일제히 뜨거운 눈길을 캐들린에게 쏟았다. 그녀는 아름다웠다. 그러나 그녀의 얼굴, 특히 그녀의 입술 언저리에는 머지않아 생생한 고뇌로 일그러질 어떤 기회를 기다리고 있는 공포의 첫 징후가 나타나 있었다. 나는 다시 한 번 그녀를 사랑한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우리는 햄버거 두 개와 포도 주스 두 잔을 주문했다.

드세요.”

그녀는 이렇게 말하며 항변하듯이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햄버거를 한 조각 잘라 입으로 가져갔다. 그러나 피 냄새를 맡는 순간 이내 위장이 뒤틀려 왔다. 금방 토할 것만 같았다. 언젠가, 한 남자가 빵도 없이 고기조각을 아주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본 적이 있었다. 그때 나는 허기진 채로 그 사람을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마치 최면술에 걸린 것처럼 그 사람의 손놀림과 턱 놀림에 정신을 잃고 눈길을 쏟고 있었다. 그러면서 속으로는 그 사람이 자기 앞에 있는 나를 발견하고는 고기 한 조각쯤 던져줄지도 모른다고 은근히 기대했었다. 그러나 그 사람은 끝내 나를 바라보지 않았다. 다음날, 그 사람은 같은 막사의 동료들에 의해 교수형에 처해졌다. 그 사람은 인육(人肉)을 먹었던 것이다. 그는 교수형에 처해지기 직전 이렇게 변명하며 발버둥을 쳤었다.

 

왜들 이래! 난 아무도 해치지 않았어. 그 사람은 이미 죽어 있었다구…….”

나는 그가 변소에 목매달려 있는 모습을 보았을 때 자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만일 그때 그가 나를 보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어서 드세요.”

캐들린이 다시 말했다. 나는 얼른 슈즈를 몇 모금 마셨다. 그리고 간신히 대답했다.

난 배고프지 않소.”

그로부터 몇 시간 후, 의사들은 캐들린에게 말했던 것이다.

그는 운이 좋았어요. 위장이 비어 있었기 때문에 고통이 덜했을 테니까요. 그의 위장에는 토할 것도 없었어요.”

갑시다.”

 

나는 식당에서 나갈 채비를 하며 캐들린에게 말했다. 조금만 더 있다가는 기절할 것만 같았다. 내가 음식 값을 치르고 식당을 나왔다. 타임즈 광장은 여전했다. 가짜 불빛들, 가짜 그림자들, 서로 똑같은 익명의 군중이 비비꼬였다가는 풀리고 풀렸다가는 꼬이고.

곳곳의 술집과 가게에서는 똑같은 록큰롤 음악이 보이지 않는 작은 망치처럼 간단없이 행인들의 관자놀이를 두들기고 있었다. 네온사인들은 여전히- 여러분의 건강을 위해서, 행복을 위해서, 세계의 평화를 위해서, 영혼의 평화를 위해서, 그리고 그밖에도 내가 알 수 없는 것들의 평화를 위해서 이걸 드십시오, 저걸 드십시오 하고 큰소리로 선전하고 있었다.

어디로 가고 싶으세요.”

 

캐를린이 물었다. 그녀는 내 얼굴이 창백한 것을 못 본 체했다. 누가 알랴, 하고 나는 생각했다. 그녀 역시 거짓말을 하는 방법을 배우게 될지도.

멀리. 아주 멀리.”

저도 당신과 함께 가겠어요.”

그녀가 선언하듯 말했다. 슬픔과 비통에 찬 그녀의 음성은 나에게 더 없는 동정심을 불러일으켰다. 캐들린도 많이 변했구나 하고 생각했다. 도전과 투쟁과 증오를 신념처럼 믿어오던 그녀가 아니던가? 그런 그녀가 지금은 복종을 감수하고 있었다. 자기 자신의 내부에서 스스로 우러나오지 않는 어떤 부름에도 따르기를 거부해 오던 그녀가 지금은 패배를 인정하고 있었다. 인간은 고뇌를 통해서 스스로 변모해 간다는 것을 나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한 사람의 고뇌가 다른 사람까지 변모시킨다고는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그야 물론이오. 나도 당신 없이는 가고 싶지 않으니까.”

 

나는 아주 멀리 가고 싶었다. 소박함이 어떤 선택된 그룹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알려져 있는 곳, 사랑과 웃음, 노래와 기도가 있을 뿐 분노나 수치가 없는 곳, 캐들린이라는 깨끗한 포도주가 있을 뿐 시체의 불순물 따위가 섞여 있지 않은 곳, 죽은 사람들이 묘지에 묻혀 있을 뿐 살아 있는 사람의 기억이나 마음속에는 있지 않은 곳, 그런 곳으로 멀리멀리 가고 싶었다.

좋아요. 그럼 어디로 가죠? 밤새 여기에 서 있을 수만은 없잖아요?”

캐들린이 물으며 궁리에 잠겼다.

 

영화관으로 갑시다.”

역시 영화관이 제일 좋은 장소라고 생각했다. 거기에서라면 우리는 외롭지 않을 수도 있었고, 거기에서라면 다른 묘안이나 장소가 떠오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캐들린도 동의했다. 그녀는 오히려 나의 집이나 그녀의 집으로 가기를 바랐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녀는 내가 반대하리라는 것을 벌써부터 알고 있었다. 내가 반대할 것도 무리가 아닌 것이, 영화관에는 냉방시설이 되어 있을 테지만, 무더운 한여름에 방안에 들어박힌다는 것은 더없이 따분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난 캐들린의 동의를 얻어냄으로써 거짓말을 한다는 것이 그렇게 썩 어려운 일인 것만은 아니라는 결론을 얻었다.

 

무얼 보죠?”

캐들린이 주위를 둘러보다가 타임즈 광장을 에워싸고 있는 극장들 쪽으로 눈길을 던졌다. 그러더니 흥분을 감추지 못하며 외치는 것이었다.

카라마조프네 형제들! 우리 카라마조프네 형제들 보러가요!”

그 영화는 광장의 건너편에서 상영되고 있었다. 거기까지 가려면 큰 거리를 둘이나 건너야만 했다. 자동차와 소음의 대해(大海)가 우리와 영화관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다.

 

나도 도스토예프스키를 무척 좋아하오. 하지만 다른 걸 보았으면 좋겠소.”

그러나 캐들린은 자기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그 영화는 아주 근사하고 훌륭할 뿐만 아니라 특별한 영화라고 했다. 드리트미 역을 율 브리너가 맡고 있으며 누구나 관람해야 하는 영화라고 했다. 그러나 나로서는 무엇보다도 큰 거리를 둘이나 건너야 한다는 사실이 귀찮기만 했다.

 

흔하긴 해도 미스터리 영화나 한편 보는 게 어떻겠소? 철학이니 형이상학 따위가 들어있지 않은 것 말이오. 지적인 훈련을 하기에는 날씨가 너무 덥지 않소? 보라구, 이 쪽에서 󰡔리오의 살인󰡕을 상영하고 있구만. 어때, 저걸 보러 갑시다. 브라질에서는 살인이 어떻게 저질러지는지 한번 보았으면 좋겠소.”

 

그러나 캐들린의 고집은 완강했다. 그녀는 다시 한 번 우리들의 사랑을 시험해 보고 싶어 했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이기면 내가 그녀를 사랑하는 것이 되고,

그렇지 않으면 내가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 되는 것이었다.

 

나는 그녀의 표정을 훔쳐보았다. 그녀의 입술 언저리에 예의 그 공포가 아직도 서려 있었다.

그 공포가 지금 막 고뇌로 일그러지려는 찰나였다. 캐들린이 고뇌에 싸였을 때,

그녀는 아름다웠다. 그럴 때면 눈동자는 더욱 깊어지고 음성은 더욱 아늑하고 충만해졌다.

그녀의 비밀스러운 아름다움은 더욱 순수해지고 더욱 인간다워졌다.

그녀의 고뇌는 일종의 성스러움을 지니고 있었다.

그것이 곧 그녀의 헌신의 표상이었다. 그녀가 고뇌에 싸여 있는 모습을 볼라치면,

마치 사랑이 악의 부정(否定)이라도 되는 듯이, 그녀를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않고는 못 배길 것만 같았다.

나는 그녀의 고뇌를 멈추게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렇게 보고 싶은 거요? 카라마조프네 형제들의 학대받는 모습이 그렇게 보고 싶단 말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