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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코스트 38 / 죽은 사람은 하나님을 심판할 수 있다

웃는곰 2026. 7. 17. 18:59

홀로코스트 38 / 죽은 사람은 하나님을 심판할 수 있다

 

나는 살인자가 되고 싶지는 않아요.”

나는 살인자라는 말을 입에 담기도 싫었지만 불쑥 이렇게 말했다.

그럼 누가 하죠?”

일라나가 말했다. 그녀는 아직도 나의 목덜미를 어루만지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녀의 손가락이 애무하고 있는 나의 목덜미, 나의 머리가 나의 것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이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여자라면 살인자의 살갗에, 평생 동안 살인자의 표지를 달고 다녀야

할 사람의 살갗에 손을 대기를 망설일 것이다.

 

나는 다른 사람들이 아직도 방안에 있는지 재빠른 눈길로 등 뒤를 한 번 돌아다보았다.

기데온과 요압이 탁자 위에 팔을 베개 삼아 머리를 수그린 채 졸고 있었다.

기데온은 잠 속에서도 기도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가드는 아직도 지하실에 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그가 왜 그렇게 오랫동안 거기에 머물러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유령들의 경우에는, 놀랍게도 모두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고 있기는 했지만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일라나도 침묵하고 있었다.

당신은 무엇을 생각하고 있지요?”

 

내가 중얼거리듯 물었다.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잠깐 사이를 두었다가 같은 질문을 되풀이했다. 그래도 여전히 그녀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모두는 둘 다 입을 다물었다. 모두 뒤쪽의 유령들도 돌처럼 굳은 채 불빛을 받아 으스스하고 적대적인 그림자를 던지며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나는 그들의 침묵이 무서웠다. 그들의 침묵은 나와는 달라서, 딱딱하고 차가웠으며 미동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생명력도 없었으며 한 치의 변화의 조짐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나는 죽은 사람들이, 그들의 음산한 왕국인 공동묘지가 무서웠었다. 그들을 둘러싸고 있던 정적이 공포심을 불러일으켰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그들이 등 뒤에 몰려와 있는 것이었다. 그들은 추위를 막기 위해서인 것처럼 빽빽하게 줄을 지어 서 있었다.

나는 한참 후에야 그들이 나를 심판하기 위해서 그렇게 모여 있다는 것을 알았다. 얼음처럼 차가운 세계에서 사는 그들로서는 심판하는 일 이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으리라. 그들은 또한 과거나 미래에 대한 감각이 없기 때문에 그들의 심판에는 동정의 여지가 없을 터였다. 그들은 말이나 몸짓으로 판결을 내리지 않고 그들이 직접 나타남으로써 판결을 내리는 것이었다.

 

유령들은 지금 나를 심판하기 위하여 나의 등 뒤에 모여 있었다. 나는 그들의 침묵이 곧 나를 심판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나는 몸을 돌려 그들을 바라보고 싶었으나 그 생각만으로도 나는 공포에 휩싸였다. 가드가 곧 돌아오겠지, 하고 나는 혼잣말을 했다. 그리고 얼마 후에는 지하실로 내려갈 나의 차례가 오겠지. 그리고 새벽이 오면 저 유령들도 낮의 햇볕 속으로 사라지고 말 거야. 그래서 나는 그들에게 등을 돌린 채 창문가에 일라나와 나란히 서서 기다리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러나 몇 분 후에 나는 생각을 바꾸었다. 아버지와 어머니, 스승과 거지가 아직도 나의 등 뒤에 있다는 생각을 하니, 무한정 그들을 모욕하는 것만 같아서 견딜 수가 없었다. 인간의 도리상 나는 그들과 얼굴을 마주 대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나는 조심스럽게 몸을 돌렸다. 돌아서서 보니 방안에는 두 종료의 빛이 있었다. 하나는 하얀빛으로, 잠자고 있는 기데온과 요압을 감싸고 있었으며, 다른 하나는 검은 빛으로, 유령들을 감싸고 있었다.

 

나는 일라나가 곁에 있다는 사실도 잊어버리고 후회하는 마음에서 창문가를 떠나 방안을 거닐기 시작했다. 이따금 낯익은 얼굴, 낯익은 슬픔 앞에서는 발걸음을 멈추었다. 나는 낯익은 얼굴, 낯익은 슬픔들이 나를 심판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은 죽은 사람들이었으며 그들은 배고파하고 있었다. 죽은 사람들은 배가 고플 때 산 사람들을 가차 없이 심판하는 것이다. 그들은 어떤 행위가 이루어질 때까지, 죄악이 저질러질 때까지 기다리지 않는다. 그들은 미리 심판해 버리는 것이다.

나는 예의 그 소년의 침묵을, 그의 눈에 나타난 감동적인 침묵을 알아차리고는 나의 입장을 말하기로 결심했다. 소년은 걱정스러운 눈길을 하고 있었는데, 그런 눈길은 그를 더 나이 들고 성숙해 보이게 했다. 그래, 변명을 해야겠어, 하고 나는 혼잣말을 했다. 그들에게는 나와 같은 어린 소년을 심판할 권리는 없으니까.

 

나는 아버지에게 가까이 갔을 때 아버지의 얼굴에서 슬픔을 보았다. 아버지는 죽음의 천사가 찾아오기 몇 분 전에 그가 살아 있는 동안에 견디어 왔던 인간의 슬픔을 천사 몰래 슬쩍 훔쳐 가지고 갔던 것이다.

아버지. 저를 심판하지 마시고 하나님을 심판해 주세요. 이 우주를 창조하고 불의로부터 정의의 줄기를 만들어낸 것은 하나님이니까요. 인간으로 하여금 눈물을 통해 행복을 얻게 한 것도 하나님이며, 국가의 자유로 하여금 개인의 자유와 마찬가지로 죽은 사람들의 시체를 토대로 그 위에 기념비를 세우게 한 것도 하나님이니까요…….”

 

나는 나의 머리와 눈과 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 채 아버지 앞에 서 있었다. 나는 내 몸에 흐르고 있는 생명의 피가 나의 목소리에도 옮겨지기를 바랐다. 전에도 나는 말할 때 가끔 그렇게 되기를 상상했다. 나는 오랫동안 말을 계속했다. 일찍이 아버지가 나에게 가르쳐주었던, 아버지도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나는 모두 말했다. 내가 그런 말을 되풀이한 것은 지금까지 배운 것을 잊어먹지 않았음을 아버지에게 증명해 보이기 위해서였다.

아버지, 저를 심판하지 말아 주세요.”

나는 절망감에 떨면서 아버지에게 애원했다.

 

심판하시려거든 하나님을 심판하셔야합니다. 하나님이 첫째 원인이고 근원적인 동기니까요. 이 세상에 인류를 만들어 놓고 만물을 만들어 놓은 것은 하나님이 아닌가요. 아버지, 아버지는 죽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죽은 사람만이 하나님을 심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아버지의 텁수룩하고 쇠약한 얼굴에 씌어 있는 슬픔이 그 전보다 더 인간적인 것으로 되는 것이었다. 나는 아버지를 떠나 아버지의 오른편에 서 있는 어머니에게로 갔다. 그러나 고통이 커서 차마 입을 열 수가 없었다. 그때 어머니가

불쌍한 것, 불쌍한 내 아들.”

 

하고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나의 눈에 눈물이 핑 돌았다. 나는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살인자가 아니라고 말했다. 어머니는 살인자를 낳은 것이 아니라, 자유를 쟁취하기 위하여 싸우는 병사들, 투사를 낳은 것이며, 민족을 위해서, 광명의 날을 찾아야 하는 민족의 권리를 위해서, 그리고 앞으로 태어날 후손들의 즐거운 웃음을 위해서, 삶보다 더 값진 마음의 평화를 희생하고 있는 훌륭한 이상주의자를 낳은 것이라고, 열병에 걸린 듯이 더듬거리며 흐느끼는 음성으로 말했다. 그것이 내가 말할 수 있는 전부였다.

그러나 어머니 역시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이번에는 노스승의 앞으로 걸어갔다. 스승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도 가장 적게 변해 있었다. 그 분은 살아 있을 때에도 지금의 모습과 거의 다르지 않았다. 그래서 모두는 그분이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고 늘 말하곤 했었다. 이제 보니 그것은 말 그대로 사실이었다.

저는 선생님을 배신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마치 사형집행인의 임무를 이미 끝마쳤다는 듯이 말했다.

 

만일 제가 명령에 복종하기를 거절했다면, 저는 살아 있는 저의 친구들을 배신하는 것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저희를 지배할 권리는 죽은 사람보다는 산 사람이 더 가지고 있습니다. 그 점은 선생님이 이미 가르쳐주셨습니다. 더욱이 유대교의 경전에는 그러므로 삶을 택하라고 씌어 있지 않습니까. 저는 산 사람들의 주장을 지지합니다. 그러니 저는 배신하지 않았습니다.”

스승의 곁에는 나의 친구이며 동지이자 형제인 예라크밀이 서 있었다. 그는 마부의 아들로 노동자의 손을 하고 있었으나 성자의 영혼을 지니고 있었다. 그와 나는 스승의 귀여움을 받던 둘도 없는 제자였다. 스승은 매일 밤 모두에게 밀교의 신비를 가르쳐 주었었다. 나는 그 예라크밀이 죽은 줄은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나는 스승의 앞을 조심스럽게 물러서다가 그 옆 군중 속에서 나의 친구의 모습을 단번에 찾을 수 있었던 것이다.

자네, 예라크밀이 아닌가?”

하고 나는 말했다.

기억하겠나?”

 

둘이는 불가능한 꿈을 실현시킬 수 있는 것인 양 밤을 새워가며 긴 이야기를 나누곤 했었다. ‘밀교의 경전에 따르면, 만일 인간의 영혼이 완전하리만큼 순수하고, 그의 사랑이 충분하리만큼 깊다면 그 사람은 이 땅에 메시아를 불러올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모두는 그것을 실현하기로 결심했었다. 물론 모두는 앞으로 닥칠 위험에 대해서도 각오를 단단히 하고 있었다. 하나님의 손에 들어 있는 패를 말썽 없이 내어놓게 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모두보다 더 나이 먹고 더 현명하며 더 성숙한 사람들도 미래의 굴레로부터 메시아를 데려오려고 무던히 애를 썼지만 성공한 경우는 한 번도 없었다. 그들은 목적에 실패한 나머지 신앙심을 잃거나 이성을 잃은 사람, 심지어는 목숨을 잃은 사람도 많았다. 예라크밀과 나는 그 점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모두는 장차 닥쳐올 장애물 따위에는 개의치 말고 모두의 계획을 계속 수행하기로 결심했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모두는 서로 떨어지지 말기로 약속했었다. 만일 모두들 가운데 한 사람이 죽게 된다면 다른 사람이 혼자서라도 계속 수행하기로 했었다. 그리하여 모두는 긴 고행을 위한 준비를 했다. 낮에는 단식을 하고 밤에는 기도를 하면서 우리는 몸과 영혼을 닦았다. 또 입을 정결히 하고 말씨를 순화시키기 위해 되도록 말을 적게 했으며 안식일에는 절대로 말을 하지 않았다.

 

어쩌면 모두의 시도는 성공을 거두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전쟁이 발발함으로써 모두는 고향을 떠나야만 했다. 내가 예라크밀을 마지막으로 본 것은, 그가 독일로 강제 수용되고 있는 긴 행렬에 끼어 있을 때였다. 나 역시 일주일 후에 독일로 강제 수송되었다. 그러나 그와 나는 각각 다른 수용소에 수용되었다. 나는 수용소에 있으면서 그가 혼자서도 모두들의 계획을 계속 실천하고 있는지, 그만두었는지 궁금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이제야 알게 된 것이었다. 그는 그 계획을 계속 수행했던 것이다. 그러다가 그는 죽은 것이다.

예라크밀, 나의 형제여. 기억하고 있나……?”

 

그에게는 뭔가 변한 것이 있었다. 그의 손이었다. 그의 손은 이제 성자의 손이 되어 있었다.

우린 역시. 민족운동에 참여하고 있는 동지들과 나는 하나님이 손에 쥐고 있는 패를 내어놓게 하려고 계속 노력하고 있는 중이야. 그러니 죽은 자네들이 우리를 도와줘야 하네. 방해할 것이 아니라…….”

그러나 예라크밀도 그의 손도 침묵만 고수했다. 그리고 메시아 역시 시간의 우주 어딘가에서 침묵을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친구를 떠나, 낯익은 소년에게로 갔다.

너 역시 나를 심판하고 있니?”

하고 나는 물었다.

너희들 죽은 사람에게는 모두 산 사람을 심판할 권리가 약간만 있을 뿐이야. 너는 어려서 죽었으니 행운아야. 만일 내가 아직 살아 있다면 넌 나의 입장이 되어 있을 테니까 말이야.”

 

그러나 소년이 입을 열었다. 그의 음성은 불안과 동경의 반향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난 너를 심판하고 있었던 게 아니야. 모두는 너를 심판하기 위해서 여기에 몰려온 게 아니라구. 우리는 네가 가는 곳이면 어디든지 함께 있는 거야. 네가 무엇을 하든 우리도 너와 함께 그 일을 한다구. 네가 눈을 들어 천국을 바라보면 우리도 그렇게 하는 거야. 네가 배고픈 아이의 머리를 만져준다면, 수천 개의 손이 그 아이의 머리를 어루만져 줄 거야. 또 네가 어떤 거지에게 빵을 준다면 우리도 그 거지에게 가난한 사람만이 그 맛을 알 수 있는 천국의 음식을 줄 거구. 왜 모두가 침묵만 하고 있느냐고? 그건 침묵만이 우리가 사는 현주소일 뿐만 아니라, 그것 말고는 달리 살 수가 없기 때문이야. 우리는 침묵이야. 너의 침묵도 모두의 것이지. 네가 우리를 데려온 거야. 너는 어쩌다가 모두를 보게 될 뿐, 거의 모두를 볼 수 없는 거야. 넌 우리를 보는 순간, 우리가 너를 심판하고 있다고 생각했겠지만, 그건 잘못 생각이야. 너의 침묵이 너를 심판하고 있는 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