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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코스트 37 / 따뜻하게 살아 있는 손

웃는곰 2026. 7. 16. 09:32

홀로코스트 37 / 따뜻하게 살아 있는 손

 

내가 얼마 동안이나 활짝 열어놓은 창문 곁에 서 있었는지 모른다.

나는 땀을 뻘뻘 흘리면서 그렇게 서 있었다.

나는 따뜻하나 떨리는, 그러나 나를 안심시켜 주는 손길이

어깨에 와 닿는 것을 느꼈다. 일라나였다.

무엇을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그녀가 물었다.

밤을 생각하고 있었어요. 항상 나는 똑같은…….”

존 도슨에 대해선가요?”

그래요. 존 도슨을 생각하고 있었어요.”

 

도시의 어딘가에 창문을 통해 불빛이 비쳐왔다가 이내 사라졌다.

틀림없이 누군가가 자기의 시계를 들여다보았거나, 어떤 어머니가 자기 아이가 좋은 꿈을 꾸고 있는지 살펴보기 위해서 불을 켰다가 껐을 것이다.

여전히 당신은 그 사람을 만나고 싶지 않은 거군요.”

일라나가 말했다.

만나고 싶지 않아요.”

어느 날, 하고 나는 생각하고 있었다. 어느 날 나의 아들이 이렇게 물으리라.

아버지, 오늘은 왠지 아버지가 슬퍼 보이는군요. 나쁜 일이라도 있으셨어요?”

그러면 나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존 도슨이라는 영국군 대위의 얼굴이 눈앞에 떠오르기 때문이란다. 그 사람은 죽는 순간에 내 앞에 나타났었지…….”

아마 나는 그에게 가면을, 아무렇지도 않게 죽일 수 있고, 잊어버릴 수 있도록 하나의 가면을 씌워야 하리라.

두렵나요?”

 

일라나가 물었다.

그래요.”

그러나 두려움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나는 그녀에게 말했어야 했다. 두려움이란 하나의 색깔, 하나의 배경, 하나의 풍경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두려움이란 문제될 것도 없었다. 희생자가 느껴야 하는 두려움이나 사형집행자가 느껴야 하는 두려움 따위는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양쪽이 똑같이 각자에게 부여된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 두 가지 역할은 인간이 취할 수 있는 극단 책이었던 것이다. 비극적인 것은 그들에게 부과된 임무였다.

당신, 엘리샤당신은 정말 두려운 거예요?”

나는 그녀가 똑같은 질문을 반복하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아우슈비츠와 부켄발트 같은 아비규환의 참혹상을 겪고 지낸 나 같은 사람이 두려움을 느끼다니 이해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일라나, 나는 정말 두려워요.”

 

그녀 역시 두려움이란 사실상 현실적인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두려움이란 죽음처럼 하나의 배경, 하나의 향토색일 뿐인 것이다.

무엇이 당신을 두렵게 하지요?”

그녀의 따뜻하게 살아 있는 손은 아직도 나의 어깨에 얹혀 있었다. 그녀의 앞가슴이 나를 스쳤고, 나는 그녀의 숨결을 목에 느낄 수 있었다. 그녀의 블라우스는 땀으로 젖어 있었고 얼굴은 심란했다. 그녀는 나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나는 혼자서 생각했다.

나는 그가 나를 웃길까 봐 두려운 거예요.”

하고 나는 말했다.

 

일라나, 당신도 알다시피 그는 나를 웃기기 위해서라면 자기 머리를 한껏 부풀리게 만들어 그것을 수천 조각으로 폭발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일 거예요. 나는 그 점이 두려운 거예요.”

그러나 일라나는 아직도 나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는 손수건을 꺼내어 나의 목과 관자놀이를 닦아주었다. 그러고는 가볍게 나의 이마에 키스를 하고 말했다.

 

당신은 자신을 너무 괴롭히고 있어요. 엘리샤. 인질들은 어릿광대가 아니에요. 그들에게 우스운 점이라곤 아무것도 없어요.”

가엾은 일라나! 그녀의 음성은 진실처럼 깨끗하고 순정처럼 슬펐다. 그러나 그녀는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는 외관만 보고 마음이 괴로웠을 뿐 그 뒤에 있는 것은 보지 못했다.

아마 당신이 옳을지도 모르지요.”

하고 나는 체념하며 말했다.

 

모두가 그들을 웃기는 것이겠지요. 그들은 죽을 때 웃으니까요.”

일라나는 나의 얼굴과 목과 머리를 어루만졌다. 나는 여전히 밀착되어 오는 그녀의 젖가슴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마치 병든 아이에게 타이르듯, 슬프기는 하나 뚜렷한 음성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당신은 지금 자신을 너무 괴롭히고 있어요.”

 

그녀는 같은 말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가엾다는 말은 더 이상 하지 않았으므로 기뻤다.

당신은 그래서는 안 돼요. 당신은 아직 젊고 아는 것도 많으니까요. 그리고 당신은 지금까지 고통을 받을 만큼 충분히 받아 왔어요. 아마 얼마 안 있으면 그 고통도 다 지나가고 말 거예요. 영국인들도 이 땅에서 물러나게 될 것이고 모두도 떳떳하게 세상에 돌아가 정상적인 생활을 누릴 수 있을 거예요. 당신은 결혼을 하여 아이들도 갖게 되겠지요. 그리고 당신은 아이들에게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해주면서 그들을 즐겁게 해줄 거예요. 아이들이 행복하면 당신도 행복할 거구요. 아이들은 틀림없이 행복할 거예요. 나는 그 점을 약속해요. 당신과 같은 아버지가 아니고서야 어떻게 그들이 행복할 수 있겠어요? 아마 당신은 오늘밤을, 이 밤을, 그리고 나와 그 밖의 모든 것을 거의 다 잊어버리게 되겠지만…….”

 

그녀는 모든 것이란 말을 할 때 손을 반원을 그려 보였다. 나는 그것을 보고 어머니를 생각했다. 어머니도 일라나와 똑같은 음성으로 이야기했으며, 똑같은 장소에서 거의 똑같은 말을 하곤 했었다. 나는 어머니를 아주 좋아했다. 내가 아홉 살, 혹은 열 살이 될 때까지 어머니는 매일 밤 자장가와 이야기로써 나를 잠재우곤 했다. 네 침대 곁에는 염소가 한 마리 있단다, 황금으로 만들어진 염소가 말이야, 하고 어머니는 나에게 말했었다. 앞으로 네가 어디를 가든 그 염소가 너를 안내하고 보호해 줄 거다. 네가 어른이 되어 부자가 되었을 때에도, 또 네가 사람이 알 수 있는 모든 지식을 얻거나, 사람이 가질 수 있는 모든 것을 갖게 되었을 때에도 그 염소는 항상 너의 곁에 있을 것이다.

 

일라나, 당신은 마치 나의 어머니처럼 말하는군요.”

하고 나는 말했다. 나의 어머니 역시 일라나의 음성보다 더 조화된 음성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님의 음성처럼, 어머니의 음성은 혼란을 가라앉히고, 나의 것일지도 모르는 미래의 상상력을 주는 힘을 지니고 있었다. 어머니의 음성은 항상 나를 안내하는 염소와 함께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 염소를 부켄발트로 가는 길에서 잃어버리고 말았다.

당신은 지금 괴로울 거예요.”

일라나가 말했다.

사람은 괴로움을 느낄 때 어머니에 대해서 말하게 되는 법이니까요.”

그렇지 않아요. 이 순간에 괴로움을 느끼는 사람은 어머니예요.”

나를 위로하던 일라나의 손길이 점점 가벼워지고 멀어져 갔다. 그녀는 그제야 나를 이해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녀의 얼굴에 그림자가 하나 드리워졌다. 그녀는 잠시 침묵을 지키며 나와 함께 창문을 통해 모두에게 내밀고 있는 밤의 손길을 바라보았다.

전쟁이란 밤과 같은 거예요.”

하고 그녀가 다시 말했다.

 

밤처럼 모든 것을 감싸고 말아요.”

그렇다. 그녀가 나를 이해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나의 목덜미를 어루만지던 그녀의 손길도 이제는 느껴지지 않았다.

사람들은 모두의 투쟁이 성전(聖戰)이라고 말하고 있어요.”

그녀가 말을 계속했다.

 

모두는 어떤 것을 위해서 어떤 것에 대항하여 싸우고 있다고,

팔레스타인의 독립을 위해서 영국에 대항해 싸우고 있다고 그들은 말하고 있어요.

그것은 사실이에요.

하지만 그들이 그렇게 말하는 것은 모두의 행동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서일 뿐이에요.

그들의 소박하고 정직한 눈에는 모두의 행동이 피 냄새가 나고 핏빛으로 물든 것으로 비치는 거예요.

그들은 말하지요. 전쟁이란 그런 것이라고.

그리고 전쟁이란 사람을 죽이는 것이라고.

그렇기 때문에 당신처럼 자기 손으로 상대방을 죽여야 하는 경우도 있는 것이며,

나처럼 자기의 목소리로 상대방을 죽여야 하는 경우도 있는 거예요.

각자가 각자의 임무에 따라 전쟁을 수행해야 하는 거예요.

그밖에 달리 모두가 무엇을 할 수 있겠어요?

전쟁에는 하나의 암호가 있는 거예요. 만일 당신이 그것을 거부한다면

그건 전쟁의 모든 목적을 거부하는 것이 되는 것이며,

적에게 은쟁반에 승리를 담아 받쳐주는 결과가 되는 거예요.

모두는 그렇게 할 수는 없어요. 모두는 전쟁에서 승리를 해야만 해요.

모두가 이 세상에 살아남기 위해서는, 시간의 표면에 남아 있기 위해서는 승리를 해야만 하는 거예요.”

그녀는 음성을 높이지도 않았다. 그녀는 마치 자장가를 노래하듯, 잠잘 때의 동화를 얘기하듯 말했다. 그녀의 어조에는 열정이나 절망 따위는 조금도 들어 있지 않았다.

 

모든 점을 고려해 볼 때, 그녀가 전적으로 옳았다. 모두는 전쟁에 임하고 있었던 것이다.

모두는 하나의 이상, 하나의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모두는 모두와 모두의 목적 달성 사이에 하나의 적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그 적은 제거되어야만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어떻게 제거할 것인가? 어떻게 하든지,

그리고 어떤 수단을 쓰든지 그것은 모두의 마음에 달려 있었다.

론 여러 가지 방법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들은 중요하지도 않을뿐더러 머잖아 잊어질 것들이었다. 모두의 목표, 모두의 목적만이 끝까지 계속될 모든 것이었다.

일라나가 어느 날인가는 나도 오늘밤을 잊게 될 것이라고 한 말은 아마 옳을 것이다.

그러나 죽은 사람들은 결코 잊지 않고 기억할 것이다.

그들의 눈에는 내가 영원히 살인자로서 낙인찍히게 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살인자이든 아니든, 이 세상에는 살인자가 되는 길은 그렇게 많지 않은 법이다.

살인자인 나는 꼭 열 사람만 죽이겠다. 아니면 스물여섯 명만 죽이겠다든지,

혹은 나는 다만 오 분 동안만 죽이겠다, 하루 동안만 죽이겠다는 식으로 말할 수는 없다.

자기 혼자서 한 사람을 죽인 살인자는 평생 동안 살인자인 것이다.

그는 다른 기회를 선택할 수도 있으며 자기의 신분을 숨길 수도 있다.

그러나 사형집행자나, 최소한 사형집행자의 가면을 쓴 자는 언제나

그 자신과 함께 있는 것이다. 거기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연극의 배경에 따라 배우의 연기가 달라지는 것처럼. 전쟁이 나를 사형집행자로 만든 것이다.

나는 배경이 바뀐 후에도 사형집행자로 남는 것이며, 다른 무대에서 다른 연극을 하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