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코스트 32 / 죽은 체하고 살아나다
그 후 한 시간 동안, 누구도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그들은 모두 다비드 벤 모세를 생각하고 있었다. 따라서 다비드는
죽음과 독방에 갇혀 있었지만 결코 혼자가 아니었다.
그의 친구들이 모두 그와 함께 있는 터였다.
엘리위젤을 제외한 모든 친구들이. 엘리위젤은 그들이 다비드의
이름을 입 밖에 낼 때 외에는 그를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이 침묵하고 있을 때면,
그의 생각은 어떤 사람에게도, 아직 그가 모르는,
그가 다비드를 아는 것보다도 더 모르는 어떤 사람에게로 달려가곤 했다.
그러나 엘리위젤은 그 사람을 알게 되도록 운명 지어져 있었다.
그의 다비드 벤 모세는 ‘대위 존 도슨’이라는 이름과 영국인의 얼굴을 갖고 있었다.
모두는 탁자 주위에 앉아 있었고 일라나가 모두를 위해 김이 피어오르는 차를 따라 주었다. 모두는 마치 그들의 침묵이 끝난 다음 단계를 탐색하는 듯이, 그리고 그 다음 단계가 가져올 사건의 의미를 탐색하는 듯이 각자의 찻잔에 담긴 황금빛 액체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이윽고 모두는 시간을 보내기 위하여 그들의 추억에 대하여, 대개 죽음이 주제를 이루는 그런 추억들에 대하여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죽음이 내 생명을 구해 주었어요.”
하고 요압이 먼저 말했다. 그는 젊고 순진하나 고통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으며 검고 겁먹은 듯한 눈에 노인처럼 하얀 머리칼이 나 있었다. 또 그는 줄곧 잠에 취한 듯한 표정이었으며 하루고 이틀이고 계속 하품만 해댔다.
“자신의 평화주의적인 신념 때문에 우리를 적대시하던 한 윗사람이 나를 경찰에 고발했어요.”하고 말을 계속했다. “그래서 나는 옛날 학교 친구가 관리인으로 있는 어떤 정신병원에 몸을 피했지요. 경찰이 나의 행적을 찾을 때까지 2주일 동안 그곳에 숨어 있었어요. 경찰이 찾아와 관리인에게 물었어요. ‘그 친구 여기 숨어 있지요?’
그러자 관리인은 ‘그렇소’ 하고 대답했어요. ‘그는 여기 있소. 하지만 그는 심한 병을 앓고 있어요.’, ‘
상태가 어떻소?’ 하고 경찰이 다시 물었어요. 이에 관리인은
‘그는 아마 자신이 죽은 걸로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했어요.
그러나 경찰은 나를 직접 확인하겠다고 주장했어요.
그래서 나는 관리인의 사무실로 옮겨졌지요. 거기에는 테러분자 색출을 위해 파견된 경찰과 두 사람이 나를 기다리고 있더군요. 그들은 나에게 질문을 던졌지만 나는 대꾸하지 않았어요. 그들은 계속 의심하는 점을 물었어요. 그래도 나는 못 들은 척했어요. 한데 아무리 내가 그렇게 나와도 그들은 내가 미쳤다는 것을 믿지 않더군요. 그들은 관리인의 주장도 무시한 채 나를 끌고 가서는 48시간 동안 심문을 했어요. 나는 죽은 체했지요, 뭐. 성공적으로 연기를 했어요. 나는 먹는 것도, 마시는 것도 거절했고, 그들이 손과 얼굴을 찰싹찰싹 때려도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았어요. 죽은 사람이란 고통도 느끼지 않고 울지도 않는 법이니까요. 그렇게 해서 나는 48시간 후에야 다시 정신병원으로 돌아올 수 있었어요.”
엘리위젤은 요압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갖가지 생각이 마음의 표면에 떠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는 그때 몇몇 친구가 요압을 미치광이라고 부르던 것을 기억해 냈다.
“우습지요, 그렇지요?” 하고 요압이 말했다. “정말 죽음이 내 목숨을 구해 주었으니까요.”
모두는 한참 동안 침묵을 지켰다. 마치 그의 목숨을 구해 주었으며, 순진하고 고통스러운 얼굴을 가진 모두의 친구에게 미치광이라는 이름을 붙여준 그 ‘죽음’에게 경의라도 표하는 듯이.
“며칠 후에 병원을 떠나와서 보니 내 머리칼이 하얗게 세었더군요.” 요압이 그렇게 얘기를 끝맺었다.
“그건 죽음의 가벼운 희롱일 뿐이오.”하고 엘리위젤이 말을 받았다.
“죽음은 사람의 머리카락 색깔이 바뀌는 걸 좋아하지요. 죽음은 머리카락이 없거든요. 그에게는 눈동자만 있을 뿐이죠. 반면에 하나님은 전혀 눈이 없어요.”
“나는 하나님이 죽음에서 구해 주셨어요.” 하고 기데온이 말했다. 모두는 기데온을 성자라고 불렀다. 첫째 이유는 실제로 그는 성자였기 때문이다. 둘째 이유는 그가 성자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의 나이는 스무 살쯤으로 쉰 목소리에 발음이 또렷하지 못했으며, 남의 눈에 띄지 않으려고 애를 쓰며 항상 기도문을 중얼거렸다. 그는 턱수염을 길렀고 머리는 고수머리로 어디를 가든 늘 성경을 호주머니에 넣고 다녔다. 그의 아버지는 랍비였으며 자기 아들이 테러리스트가 된 것을 알고는 아들의 축복을 빌었다. 말과 기도만으로는 부족한 때가 있는 법이다, 하고 그의 아버지는 말했다. 은혜의 신은 또한 전쟁의 신이기도 하지. 전쟁이란 단순한 말장난이 아니란다.
“하나님이 나를 죽음에서 구해주신 거예요.” 하고 그는 되풀이했다. “그의 눈길이 나를 구해주었어요. 나 역시 체포되어 고문을 받았지요. 그들은 내 턱수염을 잡아당기고, 손톱에 성냥불을 그어대고, 얼굴을 주먹으로 때렸어요. 고등판무관의 암살 음모에 가담한 사실을 자백하라면서 말예요. 하지만 난 고통을 참고 입을 열지 않았어요. 몇 번이나 비명을 지르고 싶었지만 나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지요. 그건 하나님의 눈길이 나를 보고 있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었지요. 하나님이 나를 보고 계시다, 하고 나는 혼잣말을 했어요. 저 분을 실망시켜서는 안 된다고. 나의 고문자들은 계속 고함을 질러댔지만 나는 입을 다문 채 하나님과 그의 눈길만을 생각했어요. 결국 그들은 증거 불충분으로 나를 석방하게 된 거지요. 만일 내가 죄를 인정했다면 나는 죽었을 겁니다.”
“그렇데 되었다면,”
하고 엘리위젤이 말했다.
“하나님도 눈을 감았을 겁니다.”
일라나가 다시 모두의 찻잔을 채워 주었다.
“일라나, 당신의 경우는 어때요?”
엘리위젤이 물었다.
“당신 목숨은 누가 구해 주었지요?”
“코감기가 구해 주었어요.”
하고 그녀가 대답했다. 엘리위젤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다른 사람은 아무도 웃지 않았다. 그의 웃음소리는 귀에 거슬렸고 인위적으로 들렸기 때문이다.
“코감기라구요?”
엘리위젤이 반문했다.
“그래요. 국인들은 내가 어떻게 생겼는지 몰라요. 그들은 단지 내 목소리밖엔 모르거든요. 어느 날 그들은 모두 여자들을 몽땅 끌고 갔어요. 물론 그 속에는 나도 포함되어 있었구요. 경찰서에 당도하자 한 음향 기사가 한 사람씩 ‘자유의 소리’ 방송 아나운서의 신비한 목소리와 대조하는 것이었어요. 그때 다행히도 나는 심한 감기에 걸려 무사했지만 다른 네 사람이 오랫동안 시달려야 했어요.”
일라나는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엘리위젤은 다시 웃음을 터뜨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무뚝뚝하게 가만히 있었다. 그런 경우, 감기가 어떤 신념이나 용기보다도 실용성이 있구나 하고 생각했다. 모두는 일제히 가드에게 눈길을 돌렸다. 그는 눌러 부숴 버릴 듯이 찻잔을 손가락 사이에 끼고 있었다.
“내 목숨은 세 사람이 영국인에게 빚을 지고 있는 셈이지.”
하고 가드가 입을 열었다. 그의 머리는 오른쪽 어깨로 기울어 있었고 두 눈은 찻잔을 쏘아보고 있었다. 그래서 마치 차갑게 식어가고 있는 차에 대고 말하는 것처럼 보였다.
“모두들의 계획이 막 시작되던 때였어.”하고 그는 말을 이었다. “무슨 일이 있든 인질 세 사람을 처치하라는 ‘노인’의 명령이 떨어진 거야. 상대는 모두 영국군 상사였어. 나는 그들 중의 아무나 한 사람을 죽이는 임무를 맡았었지. 누구를 죽이든 그 선택권은 나에게 있었어. 당시 나는 엘리샤의 나이 또래로 어렸었지. 때문에 마음이 내키지 않는 역할을 맡게 되니 심적으로 여간 고통스럽지가 않더군. 허지만 명령은 명령이야. 그래 기꺼이 사형집행인의 임무를 수행하기로 마음을 먹었지, 그렇지만 죽을 사람을 내가 선택해야 하는 재판관의 입장이 되기는 싫었어. 공교롭게도 그 날 밤에는 ‘노인’과 연락할 수도 없게 되었지 뭐야. 그래 내 어려운 입장을 설명할 수도 없었지. 처형은 이튿날 새벽에 있어야 했으니까. 희생자를 어떻게 내가 선택할 수 있었겠나? 헌데 묘안이 하나 떠오르더군. 그래 나는 지하실로 내려가 세 사람에게 말했어. 죽을 사람을 당신들이 스스로 선택하라고. 그리고 만일 한 사람을 선택하지 못하겠다면 세 사람을 모두 다 사살하겠다고. 그러자 그들은 제비를 뽑아 한 사람을 결정하더군. 나는 새벽이 되어 그 불행한 친구의 목에 총을 쏘았어.”
엘리위젤은 자신도 모르게 가드의 손과 얼굴과 친구의 친숙한 손과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는 한 인간의 목에 총알을 박았다는 사실을 냉정하게 거의 무관심한 태도로 말하고 있었다. 죽은 상사의 얼굴이 가드의 손에 쥐고 있는 찻잔 속에서 그를 쏘아보고 있지 않았을까?
“만일 그들이 한 사람을 선택하기를 거절했다면,”
하고 엘리위젤은 또 물었다.
“어떻게 하려고 했죠?”
“나 자신을 쏘려고 했어.”
하고 가드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대답했다. 한동안의 무거운 침묵이 흐른 다음에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그때 나는 젊기는 했지만 마음은 약했어.”
모든 사람의 눈길이 엘리위젤의 이야기를 기다리는 듯이 이번에는 그에게 쏠렸다. 엘리위젤은 쓰디쓴 차를 한 모금 꿀꺽 마시고 이마에 밴 땀을 손으로 훔치며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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