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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코스트 26 / 황혼의 고뇌

웃는곰 2026. 7. 5. 09:43

홀로코스트 26 / 황혼의 고뇌

어디선가 어린 아이 하나가 울기 시작했다.

길 건너 집에서 한 노파가 덧문을 닫았다.

팔레스타인의 가을 저녁은 열기와 함께 무덥다.

엘리위젤은 창가에 서서 황혼을 내다보고 있었다.

황혼이 짙은 도시는 정적에 싸인 채 정지해 있는 듯했다.

현실이 아닌, 멀리 떨어진 어떤 비현실을 바라보는 듯했다.

내일 나는 한 사나이를 죽이게 된다.’

 

엘리위젤은 그 생각을 백 번도 더 했다.

와 저 우는 어린 아이와 길 건너 노파가 그 사실을 알고 있을까?

엘리위젤은 그 사나이가 누군지 모른다. 그의 얼굴을 본 적도 없다.

그에 대하여 아무것도 모르는 한, 그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같은 것이었다.

그가 음식을 먹을 때 콧등을 긁는지, 여자와 사랑을 나눌 때 소리를 내지 않는지, 그가 자기의 증오심을 자랑으로 여기는지, 그가 자기 아내와 하나님을 배신했는지 안 했는지에 대해서도 아는 것이 없다. 그 사나이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그가 영국인이라는 것과 적이라는 것이 전부였다.

 

영국인이라는 두 낱말은 동의어였다.

고민할 거 없어. 이건 전쟁이니까.”

가드가 나직이 말했다. 그의 음성은 거의 들리지 않았다.

그래서 좀 더 큰소리로 말하라고 쏘아주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아무도 그의 음성을 알아듣지 못했다. 어린 아이의 울음소리가 다른 소리를 모두 막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엘리위젤은 죽을 운명에 놓인 그 사나이를 생각하느라 얼른 입을 열 수가 없었다.

내일……. 그와 나는 희생자와 사형집행인으로 영원히 묶여질 것이다.’

어두워지는군. 불을 켤까?”

 

가드가 다시 입을 열었다. 엘리위젤은 고개를 저었다. 아직 완전히 어두워진 것은 아니었다. 낮이 밤으로 변할 때의 정확한 순간을 보여주는 어떤 얼굴도 아직 창문에 비치고 있지 않았다.

오랜 옛날 그는 어떤 거지로부터 낮과 밤을 구별하는 방법을 배워서 알고 있었다. 어린 시절의 어느 저녁 무렵, 고향 마을의 찌는 듯한 무더위 회당 안에서 혼자 기도를 드리고 있다가 그 거지를 만났다. 거지는 닳아빠진 검은 옷에 비쩍 마른 몰골로 유령처럼 그 곁에 불쑥 나타났다.

그의 눈길은 이 세상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그때는 전쟁이 막 시작될 무렵으로 엘리위젤은 열두 살이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도 다 살아 계셨고 하나님도 아직 그 마을에 살고 있었다.

이곳엔 처음이신가요?”

 

그 거지에게 물었다.

나는 이 고장 사람이 아니다.”

그는 이렇게 대답했는데 그 음성은 스스로 말한다기보다는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귀를 기울이게 하는 어떤 힘을 지니고 있었다.

그때 거지들은 그에게 사랑과 두려움이 섞인 묘한 감정을 불러일으켰었다. 그는 또 거지들에게 친절하게 대해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거지들이란 겉으로 보이는 것과는 아주 다른 신분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유대교의 하시딤 파의 문학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예언자 엘리야가 거지로 변장을 하고 이 세상에 나타나 사람들의 마음속을 떠본다는 것이다. 그리고 거지를 따뜻하게 맞아주는 사람에게는 영생을 준다고 한다. 또 이렇게 거지로 변장하는 것은 예언자 엘리야뿐만 아니라, ‘죽음의 사자도 똑같은 모습으로 자기를 무서워하는 사람들 앞에 곧잘 나타난다고 한다.

따라서 그를 함부로 대하는 것은 여간 위험한 일이 아니라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죽음의 사자는 대접을 잘못 받은 대가로 그 사람의 생명과 영혼을 앗아가기 때문이다.

 

이런 이야기를 잘 알고 있었으므로 엘리위젤은 혼자서 회당 안에서, 그것도 어둑어둑해지는 황혼녘에 만나게 된 그 낯선 거지는 그에게 엄청난 두려움을 안겨준 것이 사실이었다.

엘리위젤은 그 두려움을 조금이라도 덜어내기 위하여 그에게 이런저런 말을 걸기 시작했다. 배가 고프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러나 그는 그렇지 않다고 했다. 계속해서 무엇이건 그가 원하는 것을 알아내려고 했지만 끝내 알아낼 수가 없었다.

엘리위젤은 사뭇 다급함을 느끼며 그를 위해 무엇인가 해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그러나 대체 무엇을 해주어야 좋을지 알 길이 없었다.

 

회당 안은 여전히 텅 비어 있었으며, 촛불들은 벌써 닳아 기운 없이 가물거리고 있었다. 그곳에는 모두 두 사람뿐이었으므로 시간이 자꾸 흐름에 따라 그의 두려움은 점점 커질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한밤중까지 그와 함께 있어야 할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여간 고통스럽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거지가 죽음의 사자인지도 모르고, 또 한밤중이라면 사자들이 무덤에서 일어나 기도를 드리기 위하여 회당으로 찾아온다는 시간이 아닌가! 더욱이 사자들은 회당 안에서 만나는 사람이면 누구건 자기들의 비밀이 탄로날까봐 잡아간다고 했다.

모두 집으로 가시지요.”

 

엘리위젤은 간청하듯이 거지에게 말했다.

집에 가면 먹을 음식도 있고 당신이 편히 주무실 수 있는 침대도 있잖아요.”

나는 잠을 자지 않아.”

그가 그렇게 대답했다. 그 대답을 듣는 순간, 그가 거지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엘리위젤은 그에게 자기가 집에 돌아가야 하는 사정을 말했다. 그러나 뜻밖에도 그는 기꺼이 엘리위젤을 친구처럼 대해주는 것이었다. 모두가 회당 밖으로 나와 눈 덮인 거리를 걷기 시작했을 때, 어둠을 무서워하느냐고 그가 물었다.

 

, 무서워요.”

사실대로 대답한 다음, 당신 역시 무섭다고 덧붙여 말하려고 했으나 그가 먼저 그런 마음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어둠을 무서워해서는 안 되는 게야.”

그가 부드럽게 입을 열면서 팔을 붙잡았다. 순간 엘리위젤은 소름이 끼쳐 온몸을 떨었다.

 

밤은 낮보다 더 순수한 거야. 밤은 생각하고, 사랑하고, 꿈을 꾸기에 아주 좋은 때지. 밤이면 모든 것이 더욱 확실해지고 더욱 성실해지기 때문이야. 낮 동안에 말해졌던 말들의 울림이 한결 새롭게 깊은 뜻을 지니게 되는 거야. 인간의 비극은 그 낮과 밤을 구별할 줄 모르는 데 있는 것이지. 사람들은 낮에만 말해야 할 걸 밤에도 말하고 있지.”

그는 모두 집 앞에 이르렀을 때 발걸음을 멈추었다. 엘리위젤은 그에게 집안으로 들어가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그는 갈 길이 바쁘므로 그럴 수 없다고 했다. 엘리위젤은 속으로 생각했다.

그럴 거야, 무덤에서 나오는 사자들을 맞기 위해 회당으로 돌아가야 할 테니까.’

내 말 들으렴,”

 

그가 손가락으로 팔을 쿡 찌르며 말했다.

낮과 밤을 구별하는 방법을 너에게 가르쳐 줄 테니까. 항상 창문을 바라보도록 하여라. 만일 거기에서 어떤 사람의 얼굴이 보이거든, 그땐 낮이 지나고 밤이 왔다고 믿어도 되는 거야. 밤은 얼굴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야. 내 말을 명심하거라.”

그는 말을 마친 후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잘 있으라는 말만 남기고 눈 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그런 일이 있은 후, 엘리위젤은 매일 저녁 밤의 도래를 직접 확인하기 위하여 창문 곁에 서 있곤 하는 습관이 생겼다. 엘리위젤은 그때마다 창문 바깥쪽에 나타난 한 얼굴을 보곤 했다. 그 얼굴은, 마치 어젯밤과 오늘밤이 다르듯이 언제나 같은 얼굴이 아니었다. 처음 얼마 동안에는 그 거지의 얼굴을 보았다. 그러다가 아버지의 죽음 이후에는, 죽음과 추억으로 한결 눈망울이 커다래진 아버지의 얼굴을 보았다. , 온통 낯선 사람들이 눈물을 글썽이는 얼굴로, 혹은 망각의 미소를 띤 얼굴로 창문에 나타나 밤을 보여주는 때도 있었다.

 

자신을 괴롭히지 마. 이건 전쟁이니까.”

가드가 또 말했다. 엘리위젤은 새벽에 죽게 될 그 사나이를 생각했다. 그리고 그 거지도 생각했다. 순간 불현듯이 엉뚱한 생각이 떠올랐다.

내가 새벽에 죽이게 되어 있는 그 사나이가 다름 아닌, 그 거지라면 어떻게 한다?’

중동 지방은 창밖에서 갑자기 황혼 빛이 사라진다. 그 어린 아이는 여전히 울고 있었다. 그 울음소리는 처음보다 한결 슬프게 들렸다. 도시는 밤의 어둠 속에서 소리 없이 흔들리고 있는 한 척의 유령선과 흡사했다.

 

엘리위젤은 창문 쪽을 바라보았다. 거기에는 밤의 심연을 형상 지어가고 있는 어두운 얼굴이 하나 나타나 있었다. 그 얼굴을 보는 순간 목구멍이 찔린 듯한 아픔을 맛보았다. 엘리위젤은 그 얼굴에서 차마 눈길을 돌릴 수가 없었다. 그것은 바로 그 자신의 얼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