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코스트 19 / 또 끌려가는 고생길
“다리를 전처럼 쓸 수 있을까요?”
의사는 더 이상 미소를 짓지 않았다. 엘리위젤은 덜컥 겁이 났다. 의사가 말했다.
“얘, 넌 날 믿지?”
“저는 무조건 믿어요. 선생님.”
“그럼, 내 말을 들어라. 너는 앞으로 2주일이면 완쾌되는 거야.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걸을 수가 있어. 너의 발바닥은 고름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 부어오른 곳을 짼 것뿐이야. 알게 되겠지만 다리를 절단하진 않았다.
2주일만 지나면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마음대로 걸어다닐 수 있어.”
엘리위젤에게는 2주일 동안 기다리는 일만 남아 있었다.
수술이 있고 난 이틀 후에, 수용소 주변에는 전선이 갑자기 더욱 가까워졌다는 소문이 퍼지고 있었다.
러시아 군이 부나로 진격해 오고 있는 중이며 이제 함락은 시간문제일 뿐이라는 것이었다. 모두는 이런 종류의 소문에는 벌써부터 익숙해져 있었다. 어떤 거짓 예언자가 세계 평화를 예언했다든지, 세계 적십자가 재소자를 석방시키기 위해서 협상을 벌이고 있다는 등의 갖가지 소문이 나돈 것이 처음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두는 그런 소문이 나돌 때마다 그것을 믿었다. 그런 소문은 모르핀 주사와도 흡사해서 모두의 몸과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이번 경우만은 그런 예언들이 신빙성 있게 보였다. 지난 며칠 동안 모두는 밤중에 멀리서 울려오는 총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다. 곁의 얼굴 없는 환자가 말했다.
“환상에 속지 말라. 히틀러는 시계가 열두 시를 치기 전에, 마지막 한 번을 치는 소리를 듣기 전에 모든 유대인을 멸종시키겠다고 분명히 선언한 바 있으니까.”
엘리위젤은 급기야 감정이 폭발했다.
“그게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단 말입니까? 모두가 히틀러를 예언자로 떠받들어야 한단 말인가요?”
그는 흐리고 빛을 잃은 눈길로 엘리위젤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피곤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나는 어느 누구보다도 히틀러를 더 믿어 왔어. 그는 유대인들에게 했던 모든 약속을 깨뜨리지 않고 지켜온 유일한 사람이기 때문이야.”
같은 날 오후 4시. 평소와 다름없이 내무반장들을 소집하는 종이 울렸다. 내무반장들이 보고하는 시간이었다.
잠시 후에 그들이 흩어져 각 막사로 돌아왔다. 그들은 모두에게 ‘철수’한다는 사실만을 간단히 알려주었을 뿐이다. 수용소를 비워야 할 형편이었으므로 재소자들은 먼 후방으로 보내야 했던 것이다. 그럼 어디로? 독일 땅 깊숙한 어느 곳에 있는 또 다른 수용소일 것이다. 유대인 수용소는 독일의 곳곳에 산재해 있으니까.
“언제?”
“내일 저녁.”
“러시아 군이 먼저 도착할지도 모르지.”
“그럴 수도 있지.”
그러나 모두는 러시아 군이 모두가 철수하기 전에는 도착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수용소 전체가 벌집처럼 소란스러워졌다. 사람들이 서로 고함을 질러대며 이리 뛰고 저리 뛰었다. 모든 막사에서 여행을 위한 준비가 진행되고 있었다. 엘리위젤은 발이 아프다는 사실도 잊어버렸다. 의사가 들어와 모두에게 알렸다.
“내일, 해가 지자마자 수용소는 비게 될 것입니다. 막사별로 모든 재소자들은 떠나게 됩니다. 그러나 환자 여러분은 철수하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게 될 것입니다.”
이 소식에 접한 모두는 여러 가지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과연 친위대가 수백 명의 재소자들이 병원 막사 안에서 우쭐거리며 해방자들을 기다리게 내버려둘까? 과연 그들이, 시계가 열두 시를 치는 소리를 유대인들이 듣도록 내버려둘까? 절대로 그러지는 않을 것이다.
“모든 환자들을 즉석에서 죽이고 말 거야.”
얼굴 없는 환자가 말했다.
“아니면 화장장으로 보내 마지막 화장로에 처넣고 말 거야.”
“이 수용소 안에 폭탄장치를 해놓았음에 틀림없어.”하고 다른 환자가 말했다.
“철수가 끝나자마자 폭발하게 되어 있을 거라구.”
그러나 엘리위젤은 죽음에 대해서 아무 생각이 없었다. 다만 아버지와 헤어지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아버지와 엘리위젤은 이미 너무 많은 고통을 함께 겪어 왔고 또 너무 많이도 함께 참아 왔다. 지금은, 아니 아직은 헤어질 때가 아니었다.
엘리위젤은 아버지를 찾으러 밖으로 뛰어나갔다. 하얀 눈이 두껍게 쌓여 있었다. 막사의 창문들은 모두 서리가 끼어 있었다. 엘리위젤은 오른쪽 발에 신을 신을 수가 없었으므로 한 손에 신을 든 채 곧장 눈 위를 뛰어갔다. 통증도 추위도 느낄 수 없었다.
“어떻게 해야 될까요?”
아버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버지, 어떻게 해야 될까요?”
아버지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선택은 모두 손에 달려 있었다. 이번만은 모두 스스로 모두의 운명을 결정할 수가 있었다. 모두는 둘이 함께 병원에 남을 수도 있었다. 의사에게 부탁하여 아버지를 환자나 간호원으로 병원에 남게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다른 재소자들과 함께 떠날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 어떻게 할까요. 네?”
아버지는 계속 침묵을 지켰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철수해요.”
아버지는 대답을 하지 않고 엘리위젤의 발을 내려다보았다.
“걸을 수 있겠니?”
“네, 걸을 수 있어요.”
“엘리젤아, 모두 후회하지 않기를 바라자.”
전쟁이 끝난 후, 엘리위젤은 병원에 남아 있던 사람들의 운명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은 모두가 철수한 지 이틀 후에 러시아 군에 의해 간단히 해방되었다는 것이다.
엘리위젤은 병원으로 돌아가지 않고 막사로 돌아왔다. 수술 받은 발의 상처가 벌어져 피가 흘러나왔다. 걸어온 길에 흰 눈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내무반장은 재소자들에게 여행에 대비하여 평소 정량의 두 배가 되는 빵과 마가린을 나누어주었다. 또 각자가 갖고 싶은 만큼의 많은 셔츠와 다른 옷가지들을 창고에서 꺼내어 가질 수도 있었다.
날씨는 추웠다. 모두는 잠자리에 들었다.
부나에서의 마지막 밤. 그것은 또 하나의 마지막 밤이었다. 고향에서의 마지막 밤……. 게토에서의 마지막 밤……. 열차에서의 마지막 밤……. 그리고 이제 또 부나에서의 마지막 밤이었다. 모두의 삶은 얼마나 오랫동안 하나의 ‘마지막 밤’으로부터 또 다른 마지막 밤으로 어렵게 이어지고 했던가?
엘리위젤은 조금도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하얗게 서리가 낀 창문을 통해 작열하는 빨간 불빛들을 볼 수 있었다. 대포소리가 한밤의 정적을 깨뜨렸다. 러시아 군은 얼마나 가까이 왔을까! 그들과 모두 사이에는 하룻밤, 모두의 마지막 하룻밤이 있을 뿐이리라. 침대에서 침대로, 운이 좋다면 모두가 철수하기 전에 러시아 군이 이곳으로 들이닥칠지도 모른다는 속삭임이 번지고 있었다. 희망이 되살아나고 있었던 것이다.
누군가 고함을 질렀다.
“자도록 합시다. 여행을 위해 힘을 모아둬요.”
이 말을 듣는 순간, 게토에서 어머니가 마지막으로 충고해 주시던 말씀이 뇌리에 떠올랐다.
그러나 엘리위젤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오른쪽 발이 불에 타는 듯이 아팠다.
아침이 되자 수용소의 모습이 완전히 변해 있었다. 재소자들의 괴상한 옷차림 때문에 마치 가면무도회와 흡사했다. 모두들 추위를 막기 위해 크고 작은 옷을 겹겹이 껴입고 있었다. 살아 있기보다는 죽은 사람처럼 키보다 더 큰 옷을 걸치고 있는 가련한 약장수들! 죄수복 더미 밖으로 유령 같은 얼굴을 내밀고 있는 초라한 어릿광대들! 광대들!
엘리위젤은 더 큰 구두를 찾으려고 애를 썼지만 끝내 찾지 못했다. 담요를 한 장 찢어 상처 난 발에 칭칭 감았다. 그렇게 하고서 수용소 안을 돌아다니며 빵과 감자를 몇 조각이라도 더 찾아보았다. 어떤 사람들은 모두가 체코슬로바키아로 이송될 것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사람들은 그로스 로젠이라고 말했다. 아니, 글라이비츠라구, 아니야, 아니야…….
오후 2시. 여전히 진눈깨비가 내리고 있었다.
시간은 점점 빨리 지나갔다. 땅거미가 지고 한낮이 단조로운 잿빛 속으로 사라져 갔다.
내무반장이 불현듯 막사의 청소를 잊어버린 사실을 기억하고는, 네 사람에게 마룻바닥을 쓸어낼 것을 명령했다. 수용소를 떠나기 한 시간 전의 청소……. 무엇 때문에? 누구를 위해서?
“해방군을 위해서!”라고 내무반장은 큰 소리로 말했다. “이곳이 돼지가 아니라 사람이 살던 곳이라는 것을 그들이 알도록 하기 위해서야.”
그럼, 재소자 모두가 사람이었단 말인가? 막사는 꼭대기부터 맨바닥까지 구석구석 말끔히 청소되었다.
여섯 시에 종이 울렸다. 종소리를 장송곡처럼, 조종처럼 울렸다. 이제 행렬을 출발 직전에 있었다.
“정렬해! 빨리!”
잠깐 사이에 재소자들은 모두 막사별로 줄을 섰다. 밤이 되었다. 모든 일이 계획에 따라 질서 있게 진행되었다. 탐조등이 비쳐졌다. 무장한 수백 명의 친위대원들이 개들을 데리고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눈발은 조금도 멈추지 않고 있었다.
수용소의 정문이 열렸다. 수용소의 바깥 저쪽에서는 지금보다 더욱 어두운 밤이 모두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1번 막사의 재소자로부터 행군은 시작되었다. 모두는 기다렸다. 모두는 바로 앞의 56번 막사가 출발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날씨는 아주 추웠다. 호주머니에는 빵이 두 쪽 들어 있었다. 그것을 먹을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으랴? 그러나 먹을 수 없었다. 아직은 참아야 한다.
차례가 다가오고 있었다.
53번 막사……. 55번 막사……. 57번 막사, 앞으로 갓!
눈발은 무진장으로 쏟아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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