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코스트 18 / 살아 있다는 기쁨
가끔 티비와 요시가 다정한 말을 던져주곤 했다.
간수 역시 엘리위젤에게 용기를 복돋아 주려고 애를 썼다.
오늘 따라 그에게는 한결 쉬운 일을 맡기는 것이었다.
엘리위젤은 가슴이 미어질 듯했다. 모두들 얼마나 끔찍이 생각해 주는가!
마치 고아라도 된 것처럼! 지금 이 순간까지도 아버지는 여전히 그를 도와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엘리위젤은 그 날 하루가 빨리 지나가기만을 바라야 할지, 아니면 그러지 않기를 바라야 할지 도저히 종잡을 수가 없었다. 그는 그 날 밤 아버지 없이 이 세상에 혼자 남게 될까봐 얼마나 두려워했는지 모른다.
차라리 작업장에서 당장 죽어버린다면 얼마나 좋을까!
마침내 모두는 귀로에 올랐다. 뛰어가라고 명령해 주었으면 하고 얼마나 갈망했는지 모른다!
군대행진곡. 수용서 정문. 수용소.
엘리위젤은 수용소 구내에 당도하자마자 36번 막사로 달려갔다. 이 세상에서 아직도 기적이라는 것이 있었단 말인가? 아버지는 살아 있었다. 아버지는 두 번째 추려내기에 죽음을 면했던 것이다. 아직도 쓸모 있는 존재임을 그들에게 입증해 보였던 것이다. 엘리위젤은 아버지에게 칼과 숟가락을 되돌려드렸다.
아키바 드루머는 희생자로 선택되어 모두의 곁을 떠났다. 요즈음 그는 흐려진 눈빛으로 우리들 사이를 돌아다니면서 “난 이제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모든 게 끝났어.”라고 자신의 신체적인 허약함을 이야기하곤 했었다.
그의 사기를 북돋아주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는 누가 그에게 하는 말을 귀담아 듣지도 않았다. 그는 다만, 자기에게는 모든 것이 끝나버렸다는 것, 이제는 더 이상 투쟁할 힘도 없다는 것, 그리고 어떠한 신앙도 남아 있지 않다는 것만을 되풀이할 따름이었다.
마침내 갑작스럽게 휑한 그의 두 눈동자는 한갓 밖으로 드러난 두 개의 상처, 소름끼치는 두 개의 움푹한 구멍일 뿐이었다.
신체가 허약한 사람들을 골라내는 일이 계속되는 동안에 신앙을 잃어버린 사람은 아키바 드루머 한 사람뿐만이 아니었다. 폴란드의 조그만 읍에서 온 랍비 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허리가 구부정한 노인으로 노상 입술을 떨고 있었다. 그에게는 언제 어디서나 노상 기도하는 습관이 있었다.
막사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작업장에서나 어디서나 늘 기도를 했다. 그는 <탈무드>의 전문을 암송하며 혼자서 논의하고 자문자답하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엘리위젤에게 말했다.
“끝이야, 하나님은 이미 우리와 함께 계시지 않아.”
그러고 바로 그런 말을 한 걸 후회하는 듯 차갑고 냉랭하게 잘라 말하는 것이었다.
“나도 알고 있었다. 인간에겐 그런 말을 할 권리가 없다는 걸 나도 알고 있어. 인간이란 너무나 옹졸하며 너무나 보잘 것 없고 하찮은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신비스러운 방법을 이해할 수 없는 거야. 그러니 난들 무얼 할 수 있겠니? 나는 선택받은 현인도 아니고 성인도 아니야. 나 역시 살과 피로 된 평범한 피조물에 불과하지. 나에게도 눈이 있으므로 여기에서 저들이 저지르고 있는 일들을 볼 수가 있지. 하나님의 자비가 어디 있단 말이니? 하나님이 어디 있단 말이니? 내가 어떻게 자비로운 하나님을 믿을 수 있으며, 어느 누구인들 하나님을 믿을 수 있겠니?”
불쌍한 아키바 드루머, 만일 그가 하나님을 계속 믿을 수 있었던들, 만일 그가 이 골고다 땅에서 하나님의 증거를 직접 볼 수 있었던들, 그는 저들의 선택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신앙에 틈이 생기고 있다고 처음으로 느끼는 순간, 그는 이내 투쟁할 명분을 잃어버리고 죽어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저들이 선택하는 때가 다가왔을 때, 그는 저들의 사형집행자에게 스스로 목을 바침으로써 미리 유죄선고를 자청한 것이다. 그가 우리에게 부탁한 것은 다음의 말이 전부였다.
“3일 후에 나는 벌써 이 세상에 있지 않을 것이오……. 나를 위해 카디쉬를 바쳐주오.”
모두는 그에게 약속했다. 3일이 지난 후에 굴뚝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면 모두는 그를 생각할 것이며, 십여 명이 모여 특별예배도 드릴 것이고 모든 친구들이 그를 위해 카디쉬를 바칠 것이라고.
그러자 그는 한결 침착한 발걸음으로 뒤를 돌아봄도 없이 병원 막사를 향해 걸어갔다. 거기에는 그를 비르케나우로 싣고 갈 구급차 한 대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로부터 며칠 동안 악몽 같은 날들이 계속 되었다. 모두는 음식을 얻어먹는 것보다 더 많은 매를 얻어맞으며 고된 작업에 부대꼈다. 그리하여 3일이 지난 후에 그에게 바치기로 약속했던 카디쉬도 까맣게 잊어버리고 말았다.
겨울이 왔다. 낮은 짧고 밤은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춥고 길었다. 새벽녘의 몇 시간 동안은 살얼음같이 매서운 바람이 날카로운 채찍처럼 몸을 휘어 감았다. 모두는 겨울옷을 지급 받았다. 그러나 줄무늬셔츠보다 약간 두껍다는 것뿐이었다. 이 겨울옷이 고참 재소자들에게 새로운 조롱거리를 제공해 주었다.
“이제야 당신들은 수용소의 진짜 맛을 보게 된 거야!”
모두는 얼어붙은 몸으로 평소처럼 작업장에 나갔다. 돌덩이들은 너무나 차가워서 손을 댔다 하면 금방 찍찍 달라붙었다. 그러나 인간이란 어떤 곤경에 처할지라도 시간이 지나면 곧잘 익숙해지게 마련이다.
성탄절과 설날에는 작업이 없었다.
모두는 평소에 비해 약간 걸쭉한 수프를 얻어먹었다.
1월 중순쯤 되었을 때, 엘리위젤은 오른쪽 발이 추위 때문에 부어오르기 시작했다. 오른발로는 땅을 디딜 수가 없었다. 진찰을 받으러 갔다. 재소자인 훌륭한 의사 한 사람이 아주 정확한 진단을 내려주었다. 수술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대로 두면 발가락을, 어쩌면 한쪽 다리를 절단해야 될 것이라고 의사는 결론을 내렸다.
이것은 견딜 수 없는 마지막 부담이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선택의 권리가 없었다. 수술 결정을 내린 것은 의사였으며, 거기에 대하여는 이렇다 저렇다 따질 여지도 없었다. 그런데 엘리위젤은 그런 결정을 내린 사람이 그 의사라는 점에 기쁘기까지 했다.
그들은 하얀 시트가 덮인 침대 속으로 엘리위젤을 들어가게 했다. 그때서야 하얀 시트 속에는 많은 사람들이 누워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병원은 조금도 나쁘지 않았다. 좋은 빵과 걸쭉한 수프가 배식되었으며 종소리도 점호도 없었다. 더욱이 작업도 없었다. 가끔 아버지한테 약간의 빵을 보낼 수도 있었다.
엘리위젤 곁에는 헝가리계 유대인이 누워 있었다. 그는 오랫동안 이질을 앓은 나머지 가죽과 뼈만 남은 채 흐릿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의 목소리만은 들을 수 있었는데 그것이 그가 살아있다는 유일한 표시였다. 그의 어디에서 저렇게 말할 수 있는 힘이 솟는 것일까 의심이 나기도 했다.
“얘야, 여기에 편히 있게 되었다고 너무 성급하게 좋아해서는 안 된다. 여기서도 추려내니까. 밖에서보다 더 자주 추려내고 있어. 독일은 병든 유대인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야. 독일은 또 나를 필요로 하지도 않지. 다음번에 환자의 이송이 있고 나면 네 곁에는 새로운 사람이 올 거다. 그러니 내 말을 귀담아 잘 들어라. 다음 추려내기가 있기 전에 병원에서 빠져나가도록 하여라.”
마치 땅속에서 울려나오는 듯한, 얼굴도 없는 형체에서 울려나오는 말은 엘리위젤을 공포에 떨게 하고도 남았다. 병원이 아주 비좁아서 며칠 사이에 새로운 환자들이 들어오게 된다면 그들을 위해서 방을 따로 마련해야 할 형편이라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얼굴 없는 이웃은 아마 자기가 첫 번째 희생자로 뽑혀 갈까 봐 두려운 나머지, 엘리위젤을 쫓아내어 그 침대를 비워둠으로써 자신이 살아남을 기회를 마련해 놓으려는 속셈이었는지도 모른다. 그것도 아니었다면 짓궂게 남을 놀래 주려고 그랬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의 말이 진실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엘리위젤은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일단 기다려 보기로 작정했다.
의사가 와서 내일 수술을 하게 될 것이라고 일러주었다.
“겁낼 것 없다.”하고 의사는 덧붙였다. “모든 게 잘 될 테니까.”
아침 10시에 엘리위젤은 수술실로 옮겨졌다. ‘아는’ 의사가 거기에 있었다. 엘리위젤은 적이 안심되었다. 그 의사가 곁에 있는 한 어려울 것은 없으리라고 느꼈다. 그가 말하는 한 마디 한 마디가 진통제였고 그가 던지는 눈길 하나하나가 엘리위젤에게는 희망의 메시지였다.
“조금 아플 게다. 하지만 잠깐 뿐이야. 이를 꼭 물어.”
수술은 한 시간이 걸렸다. 의사들은 엘리위젤이 잠들지 못하게 했다. 그래서 그는 의사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러다가 의식이 몽롱해지는 것을 느꼈다…….
의식이 되돌아와 엘리위젤은 눈을 떴다. 그러나 처음에는 덮고 있는 순백의 시트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한참 후에야 굽어보고 있는 그 의사의 얼굴을 알아볼 수 있었다.
“모든 게 잘 됐다. 넌 참 훌륭하게 참아냈다. 앞으로 2주일 정도 여기에 입원해 있게 될 테니 편히 쉬도록 하여라. 그러면 완쾌될 게다. 음식을 잘 먹고 몸과 마음의 긴장을 풀도록 해.”
엘리위젤은 의사의 입술이 움직이는 것만 겨우 알아볼 수 있었다.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거의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그의 속사임만으로도 마음이 흡족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리는 것을 느꼈다. 한쪽 다리를 의식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럼, 다리를 절단했단 말인가?
“선생님, 의사 선생님…….”
“얘야, 무슨 일이지?”
그러나 사실을 물어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선생님, 목이 말라요.”
의사는 물을 가져다주었다. 그는 미소를 띠고 있었다. 이제 그는 다른 환자를 보러 가려는 참이었다.
“선생님!”
“왜 그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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