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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코스트 9 / 아버지가 맞는 것을 보는 아들

웃는곰 2026. 6. 17. 16:27

홀로코스트 9 / 아버지가 맞는 것을 보는 아들

 

이제는 여기에서 묵는다!”

거기에는 마루가 없었다. 지붕과 네 벽이 있을 뿐. 발은 진흙탕 속에 묻혔다.

또 한 차례의 기다림이 시작되었다.

엘리위젤은 선 채로 잠이 들어 침대를 꿈꾸었고 어머니가 쓰다듬어 주시는 꿈을 꾸었다.

눈을 떴다.

발은 진흙탕에 묻혀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그 자리에 주저앉아 진흙탕 위에 드러누웠다.

그것을 본 사람들이 외쳤다.

당신들 미쳤소? 모두는 서 있으라는 명령을 받았소.

당신들 때문에 우리 모두가 고생을 해도 좋단 말이오?”

그들은 세상의 모든 고난이 이미 그 앞에 닥쳤는데도, 마치 그렇지 않다는 듯이 말하고 있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모든 사람이 진흙탕 위에 주저앉고 말았다.

 

그러나 수용소 간수가 새 신발을 가진 사람이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올 때마다

어김없이 벌떡 일어서야만 했다.

새 신발을 가진 사람은 간수에게 그것을 바쳐야 했다. 버텨 보아야 아무 소용이 없었다.

곤봉 세례만 당하고 마지막 계산서에서는 신발이 분실된 것으로 기록되기 마련이다.

엘리위젤은 새 신발을 신고 있었다. 그러나 이미 진흙으로 덮여 있어서 어느 누구도 알아볼 수 없었다. 하나님이 이 무한하고 경이로운 우주 속에 진흙을 창조해 주신 데 대하여 즉흥적으로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갑자기 쥐죽은 듯한 침묵이 막사 안을 짓눌렀다. 친위대 장교 하나가 들어왔던 것이다. 그에게서 죽음의 냄새가 물씬 풍겨 왔다. 그의 살찐 입술을 쏘아보았다. 그는 막사의 중앙에 서서 연설을 했다.

여러분은 현재 아우슈비츠의 집단수용에 와 있는 것이다.”

 

그는 잠시 말을 끊고 그의 연설이 끼친 효과를 관찰했다.

그의 얼굴은 오늘까지 모든 사람의 기억 속에 생생하게 남아 있다.

30세쯤의 키가 큰 사나이로 이마와 두 눈동자에는 범죄상(犯罪相)이 뚜렷이 새겨져 있었다.

그는 마치 아직 생명이 붙어 있는, 문둥병 걸린 개떼를 보듯 모두를 훑어보았다.

이 점을 명심하라. 가슴에 새겨 두고 영원히 기억하라. 여러분은 아우슈비츠에 와 있다는 사실을. 아우슈비츠는 요양소가 아니다. 아우슈비츠는 집단수용소이다. 여기에서, 여러분은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일을 하지 않으면 여러분은 곧바로 용광로로 가게 될 것이다. 화장장으로 말이다. 일을 할 것인가, 화장장으로 갈 것인가­그것은 여러분의 뜻에 달려 있다.”

 

모두는 이미 그 날 밤 너무나 많은 일을 겪었기 때문에, 더 이상 두려움을 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가위로 싹둑 자르는 듯한 그의 말에 모두가 몸서리를 쳤다. 그가 쓴 용광로란 말은 아무 뜻도 없는 말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 말의 뜻은 짙은 연기에 섞여 지금도 공중을 맴돌고 있다. 그 말은 아마 그곳에서 사용되고 있는 말 가운데서 참뜻을 지닌 유일한 말이었을 것이다. 그는 막사를 떠났다. 이에 간수들이 나타나 고함을 질러댔다.

모든 기술자들은 들어라. 자물쇠 제조공, 전공(電工), 시계 제조업자들은 일보 앞으로!”

기술자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또 다른 막사로 옮겨졌다.

이번에는 돌로 지은 막사였으며 앉는 것이 허용되었다. 감시는 추방당한 집시 한 명이 맡았다.

아버지가 갑자기 복통을 일으켰다. 아버지는 일어나 집시에게로 가서 독일말로 공손하게 물었다.

실례지만, 화장실이 어디에 있는지 알려주실 수 있습니까?”

 

집시는 아버지를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훑어보았다.

마치, 자기에게 말을 걸고 있는 그 사람이 살과 뼈로 된 정말 인간이며

몸통과 배를 가진 생물인가를 확인해 보고 싶다는 그런 태도였다.

그러더니, 나른한 선잠에서 깨어났다는 듯이 아버지에게 일타(一打)를 가했다.

아버지는 바닥에 넘어져 네 발로 기어 자기 자리로 돌아왔다. 엘리위젤은 꼼짝하지 않았다.

 

대체 어떻게 되었단 말인가? 나의 아버지가 내 눈앞에서 방금 구타를 당하셨다.

그런데도 나는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빤히 바라보면서 말 한 마디 못하지 않는가.

어제 그랬다면 나는 손톱을 놈의 살 속에 깊숙이 박았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변했단 말인가? 그렇게 빨리?’

엘리위젤은 양심의 가책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러나 기껏 속으로만 나는 결코 그들의 행동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했을 뿐이다. 아버지도 아들의 그런 생각을 알아차렸음에 틀림없었다. 아버지가 아들의 귀에 속삭였다.

조금도 아프지 않아.”

 

그러나 아버지의 뺨에는 놈의 손찌검으로 아직도 빨간 자국이 남아 있었다.

모두 밖으로 나와!”

열 명의 집시가 더 와서 감시자와 합세했다. 주위에서 채찍과 곤봉이 휙휙 소리를 냈다.

엘리위젤은 발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도록 마구 달렸다.

른 사람들의 뒤에 몸을 숨기고 매질을 피하려고 몸부림쳤다. 봄볕이 따사로웠다.

“5열로 집합!”

 

아침에 보았던 재소자들이 한쪽에서 작업을 하고 있었다.

그들의 가까이에는 굴뚝의 그림자만 드리워져 있을 뿐 감시자는 없었다.

엘리위젤이 공상에 젖어 눈부신 햇살 속에서 멍하니 서 있을 때 누군가 소매를 끌어당기는 사람이 있었다. 아버지였다.

얘야, 그만 가자.”

행군을 계속되었다. 앞에서 몇 개의 문이 열리고 다시 닫혔다.

 

이제 전기철조망의 사이를 걷고 있었다. 한 걸음 옮길 때마다 해골이

그려진 하얀 팻말과 마주쳤다. 팻말에는 <경고! 죽을 위험이 있음.>이라고 씌어 있었다.

웃겼다! 죽음의 위험이 있는 곳이 저기 전기철조망뿐이란 말인가?

집시들은 다른 막사 근처에서 멈추게 했다.

그들은 모두를 둘러싼 친위대원들과 교체되었다. 친위대원들은 권총과 기관총 외에 경찰견을 데리고 있었다.

 

행군은 30분 동안 계속되었다. 주위를 돌아보니 철조망은 뒤쪽에 있었다.

모두는 수용소 밖으로 나왔던 것이다.

아름다운 4월의 화창한 날이었다. 봄의 향기가 대기 속에 충만했다.

해는 서산으로 지고 있었다. 조금 더 행군해 나갔을 때,

또 다른 수용소의 철조망을 보았다. 수용소 철문 위에는 이런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노동은 자유다!>

아우슈비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