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9-225 /
그 가껄 외상으로 한댜?
다음 날 하필이 허당한테 심부름을 시켰다.
“미안허만 국자식당에 가서 막걸리허고 안주 좀 받아오지 않겠나아.”
“이런 대낮에 약주를 허시게유?”
“약주가 뭐여, 술이지. 자네허고 할 말이 있어서 그려어.”
허당이 심부름으로 국자네 식당으로 곧장 갔다.
전 같으면 하필이 문 앞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아양을 떨며 살살거리고
다가와 등을 쓰다듬어주며 반가워서 똥마려운 강아지처럼 굴던
국자가 오늘은 쌩하니 찬바람이 불었다.
“허당이 뭔 일여? 일허다 말고?”
“우리 아저씨가 막걸리허고 안주를 좀 사오라고 해서유.”
“그 늙은이는 맥주 맛은 모른댜? 막걸리나 찾구.”
“…….”
국자가 정나미 떨어질 소릴 했다.
“왜 말을 못혀? 벙어리가 된겨?”
말씨며 억양이 평소 같지 않은 것을 느낀 허당이 막걸리 병들만 바라보았다.
“뭘 보는겨? 우리집 구경 첨했댜?”
“아녀유.”
국자가 막걸리 한 병에 곱창 한 접시를 내주며
허당하고 눈도 마주치지 않고 물었다.
“돈은 가져온겨?”
“그냥 왔는디유.”
“겨우 그가껄 외상으로 한댜?”
“몰르쥬.”
“나 바쁘니께 후딱 가 버려.”
허당은 고개를 갸웃하고 돌아오며 중얼거렸다.
“국자 아줌마가 워째 이상혀.”
국자 맘이 돈 많은 태풍이한테 돌아서서 정을 떼고 있는 줄을 모르는
허당은 술병을 들고 곳간으로 왔다.
기다리던 하필이 대접 둘에다 술을 따르고 허당이를 바라보았다.
허당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아저씨가 국자 씨하고 싸운 것 같진 않은데 우째서 두 분이 다 이상할까?’
“아저씨, 저한티 허실 말씀이 있으신 거쥬?”
“그려어.”
“말씀허세유. 제가 뭐 잘못한 게 있나유?”
“아녀, 없어.”
“…….”
하필은 허당한테 하우하고 결혼할 생각이 있느냐?
내가 허당 앞으로 만들어 놓은 통장이 있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그런 것을 말하고 싶어서 술자리까지 마련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 동안 하우하고 가까이 하지 못하게 막아 왔고
통장도 비밀로 만들었으니 술을 마시고 술기운으로 말하려 했지만
안 되어 술만 훌쩍 마시고 우물거리는데 마침 하우가 구세주처럼 나타났다.
“허당 씨도 있었네. 어머, 술상을 차렸잖아?”
아직도 잔만 받아놓고 마시지 못한 허당을 보고 물었다.
“오빠, 왜 술 안 마셔?”
“마실겨.”
하우가 놀랍게도 허당이 앞에 있는 술대접을 들더니
입으로 가져가 한 모금을 쪽 마시고 허당이한테 내밀었다.
“술맛 좋은데. 오빠. 자, 마셔.”
허당이 하필의 눈치가 보여서 차마 마시지 못하고 주춤거리자
하필이 슬그머니 자리를 떠 밖으로 나갔다.
전 같으면 이런 꼴을 보고 가만있을 하필이 아니다.
그런데! 밖으로 슬그머니 나온 하필은 속으로 빌었다.
“하우야 잘 혀. 그래야 허당을 잡을 수 있능겨.
그렇게 둘이 한 대접을 돌아가며 마시면……흐흐흐.”
이렇게 가슴에 손을 모으고 빌며 생각하자니
술이 한잔 더하고 싶었다.
그래서 국자네 집으로 갔다. 국자가 심드렁하게 주절거렸다.
“왜 또 온댜?”
“또가 뭔 소려. 오늘 첨 오는 거 아닌가베?”
“아까 외상술 가져가고 오니께 그려. 외상 갚으러 온겨?”
“이 할망이 갑자기 왜 이려?”
“뭐가 우떠타는 겨?”
“전 같지 않아서 허는 말여. 뭔가 일이 있기는 있구먼.”
“우리 윤달이가 신랑감을 보고 반혀서 얼굴이 빨개졌다니께.”
“윤달이 신랑감이라니?”
국자가 단호히 대답했다.
“허당이는 아녀.”
하필은 갑자기 기쁜 소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허당이가 아니면 누구랴?”
“있어.”
“허허 사람을 놀리는 겨?”
“두고 보면 알껴. 허당이허구는 하늘 땅 사이여.”
“허당이 사윗감이라고 나팔 불 땐 언제여?”
“윤달이가 싫다는데 우쩔겨?”
“윤달이도 싫다 허고 할망도 싫다는 말여?”
“그려. 다시는 허당이 술심부름 같은 거 시키지 마. 꼴도 보기 싫은게.”
“허허 시상에 이렇게 사람이 달라질 수가 있는 겨?”
“구름에 달 가듯 변하는 게 인생이여.”
“알았구먼. 허당이 다시는 이 집에 발걸음을 못허게 할 거여.”
“그러면 고맙지.”
하필은 기가 막혔다.
허당을 완전히 외면한 국자가 한편으로는 고맙고
한편으로는 인생이 어찌 그리 변덕스런 구름 같으냐 하는 실망 때문이었다.
아무튼 국자가 큰 장애물이었는데 떨어져 나간 것만도 여간 기쁜 일이 아니었다.
하필은 대포 한 잔을 하고 곧장 곳간으로 돌아왔다.
하우하고 허당은 무슨 이야기인지 깔깔거리며 재미있게 하고 있었다.
하필은 그 소리만 들어도 기분이 좋았다.
그런데 갑자기 아찔할 만큼 심각한 문제가 떠올랐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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