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6-211 / 경로당 심부름꾼
노인 물음
“여보게 하서방 오늘은 오츠케 온 겨?”
하필이 겸손히 인사를 했다.
“어른님들 평안허시쥬.”
옆에서 90된 노인이 대답 대신 부탁 먼저 했다.
“이봐 젊은이, 잘 왔어, 나 목이 좀 탕게 주방서 물 한 사발만 퍼다 주게.”
“야.”
70대 하필은 젊은이라는 소리를 들으며 속으로 웃었다.
‘젊은이라고? 나도 70 넘은 늙은이여.’
이러면서 물을 떠다 바쳤다. 물을 마신 노인이 동네 소식을 전했다.
“요 옆에 새로 지은 아파트가 40평인디 3억이라는구랴.”
95세 노인이 듣고 말했다.
“3억이 어린애 이름인 줄 아능겨? 여기 늙은이 중에 3억 가진 사람이 어디 있어?”
90노인이 구시렁거렸다.
“돈이야 없지만 갖고 싶은 욕심마저 없앨 수는 없쥬.”
그러다가 하필한테 물었다.
“이봐, 젊은이. 요새 누가 본다고 팔리지도 않는 책을
그렇게 산더미같이 쌓아놓고 어쩌자는 겨?”
하필이 대답했다.
“두고 보면 언젠가는 사러 오는 사람이 있겠쥬.”
“허허. 한강이 마르면 그런 사람이 올랑가.”
95세 노인이 셈 빠른 말을 했다.
“우리 경로당에 오는 늙은 것들 집을 다 팔아도
3억이 안 될겨. 안 그런가 주영감.”
80대 노인이 대답했다.
“그렇쥬. 우리 동네 집 다 팔어 봐야 메푼이나 되것시유.”
하필은 이런 말을 들으며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히히히, 그깟 3억을 가지고 그려? 우리 허당이 가진 것만 혀도 3억이 넘는디.
내 돈꺼지 허면 여러 채를 사고도 남겠구먼.”
이때 거시기 노인이 말했다.
“이보랑게, 거시기 말인디, 이 동네에 자네가 이사온 지 멫 년이나 된겨?”
“한 오년 되지유.”
“오년 동안 책 곳간에 살면서 뭘 한겨?”
“그건 왜 물으시쥬?”
“요새 책 보는 사람이 없어서 서점들이 문 닫고 출판사가
다 망할 지경이라잖여.
팔리지도 않는 책을 산더미같이 모아놓고 사는 것이 거시기해서 묻는겨.”
“염려해 주셔서 고마워유.”
“이웃 좋다는 게 뭐여. 동사무소에서 지원하는
독거노인 지원금이라도 받고 있나 혀서 말인디,
안 했으면 내가 거시기해 줄까 해서 그려.”
“고마워유. 그렇지만 그런 정도는 아니니께 염려 마세유.”
다른 낯선 노인이 말했다.
“젊은 영감, 오신 김에 경로당 주방을 좀 치우고 정리해 주시오.
우리 늙은 것들은 힘이 부쳐서 그 쓰레기를 치우지 못하고 있었소.
오늘 수고 좀 해 주시오. ”
“야.”
하필은 자기보다 훨씬 연로한 어른들이 하는 말을 거부할 수 없어서
해달라는 대로 다 해주고 집으로 돌아가려는데
복덕방을 했다는 꼬부랑 노인이 잡고 말했다.
“들리는 말에 새로 진 아파트를 사두면 롯또랴.”
90노인이 물었다.
“무슨 소랴?”
“화성 동탄에서 떠난 전철이
안성을 통과한 다음 바로 아파트 옆으로 지나간다지 뭐여.
지금 그 집을 사놓으면 금방 오억이 될 것이라는디 돈이 있어야 사지.”
하필은 아무 말 않고 조용히 경로당을 떠나면서 생각했다.
‘내가 솔찬히 늙었다고 생각했는디 그게 아녀.
경로당 어른들을 보니 아직 나는 한창이여.
95세가 되자면 이십 년이나 남았는디 늙은 척하긴 아직 일러.’
그러면서 하필은 다리에 힘을 주고 쿵쿵 걸어 집으로 와 생각을 했다.
‘아파트를 하나 사 둬야 쓰것어. 한두 해만 지나면 오억이 될 것이라니…….
그것도 그렇고 하우하고 허당이를 결혼시키자면
집 마련도 해야 할 것잉게 한 채 사야것어.’
그렇게 생각하는데 돌연 국자 딸 생각이 와락 가로막아
밤이 새도록 잠이 오지 않았다.
그렇다고 갑자기 허당한테 통장 비밀을 덜어놓기도 그렇고,
하우하고 결혼하라고 말하자니 그 동안 허당한테 박절하게 해놓은
언행이 부끄럽고 낯간지러워서 그럴 수도 없었다.
밤잠을 설치고 아침 일찍 곳간으로 나와 책들을 한 바퀴 돌아보고
이층에서 내려오는데 국자가 나타나서 물었다.
“허당 총각 아직 출근 안 한겨?”
“그려. 총각은 왜 찾는 겨?”
“오늘이 내 생일이여. 그래서 허당한티 점심을 우리 집에서 같이 하자고 하려고 그려.”
하필이 썩 듣기 싫은 소리였다.
그렇지만 내색도 못하고 대답했다.
“알았으니께 가 봐. 내가 그리 전해줄겨.”
“그려, 꼭 그렇게 전해 주고 영감도 같이 와도 좋아.”
국자가 돌아가고 얼마 안 있어 허당이 출근을 했다.
국자가 왔다 간 뒤에 보는 허당이 딴 사람처럼 잘나 보였다.
그래서 인사도 먼저 했다.
“어서 와, 잠은 잘 잔겨?”
“야. 안녕히 주무셨어유?”
“난 안녕하지 못…….
아니 내가 왜 이런 말을 하는겨.
오늘 국자 생일이라는디 점심에 와서 식사나 같이 허자는디 우뗘?”
“생각해 봐야쥬. 남의 생일에 가는 것도 좀…….”
하필은 그 남의 생일이 하는 말이 반가웠다.
“그건 그런 겨. 내 식구도 아닌디, 그런 건 좀 그렇지?”
“야.”
“오늘도 서울 갈겨?”
“야.”
“갔다가 천천히 와. 국자가 왜 안 오느냐 물으면
서울서 아직 안 왔다고 헐테니께.”
그렇게 하여 허당은 동화책을 들고 서울로 가서
오후가 되도록 오지 않았다.
점심을 차려놓고 허당을 기다리던 국자가 쪼르르 달려와 물었다.
“허당 총각한티 내 말 전했지이?”
“전했지.”
“그런디 왜 안 온댜?”
“서울서 일이 생겼는지 아직이여.”
“돼지 족발에 진한 국밥을 차려 놓고 윤달이하고 같이 먹으려고 했는디…….”
“허당이 오는 대로 가라고 헐 테니께 가서 기둘려 봐.”
국자가 서운하여 돌아가며 말했다.
“늦어도 좋응게 꼭 오라고 혀어.”
“알았어.”
아닌게 아니라 허당이 일부러 늦게 온 것이 아니었다.
회장을 만났더니 회사 강당에다 삼백 명이 넘는 직원을 모아 놓고 이렇게 부탁했다.
“허선생, 오늘 시간 좀 내주시오.
그 동안 가져온 동화책을 우리 회사 직원한테 날마다
열 명씩 나누어 주고 읽고 소감을 발표하라고 했소.
강단에 올라가 직원들이 독서 소감을 발표하거든
누가 가장 잘 했는지 심사를 해 주고 심사평도 좀 해 주시오.”
“회장님, 지는 그런 사람이 못 된다니께유. 다른 분한테 시키세유.”
“안 돼요. 이미 사원들한테 오늘 심사위원은 토속 심리학자 한 분을 모셨다고 해 두어서
다른 사람을 모실 수가 없어요.”
결국 허당은 많은 사원들 앞에서 심사위원이 되어 독후감을 듣고
심사를 해주고 오느라고 늦은 것이다.
그러나 서울서 그런 사정이 있었다는 말은 하필한테 하지 않았다.
“아저씨 너무 늦게 와서 죄송해유.”
“아녀, 염려 말구 국밥집에나 가 봐.”
“야아?”
“국자 할매가 기둘려.”
“왜 그런디유?”
“식사나 같이 하잖여. 후딱 가봐.”
“야.”
허당이 국자네 집으로 가는 걸 보니 마음이 초조해졌다.
알려주지 말 걸 그랬나 싶기도 했다.
국자가 무슨 소리로 허당을 자기 사위로 삼으려는지 걱정이 되어 안절부절못했다.
한편 허당을 맞이한 국자가 상을 그들먹이 차려 놓고
옆에서 온갖 친절을 다했다.
“허총각, 이거 먹어 봐. 우리 집에서 젤 맛있고 기력에 좋은 것이여.”
그리고 손으로 고기를 뜯어 숟갈에 올려주며
마치 자기 자식한테 하듯 하며 물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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