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142 / 우리는 술친구
회장이 반가운 얼굴로 물었다.
“그래 뭐라시던가요?”
“한 번 오셔도 좋은디 반드시 혼자만 오시라네유.”
“그렇습니까? 당장 가십시다. 어딘지 내 차로 갑시다.”
“차로 가시면 안 되쥬. 혼자만 오시라고 했는디 운전수가 따라올 거 아닌가베유?”
“정 그러시다면 버스로 갑시다.”
점잖은 회장이 놀랍게도 철부지 아이처럼 서둘렀다.
허당은 회장을 모시고 버스를 타고 돌아와 책 곳간으로 안내했다.
“여기가 우리 곳간인디유. 건물은 허술해 보여도 튼튼한 이층집이지유.”
“맞습니다. 보기보다 튼튼하게 지은 집 같습니다.
주인어른은 어디 계신가요?”
“사무실에 계실 거구유. 절 따라 오세유.”
허름하게 꾸민 사무실문을 들어서며 허당이 말했다.
“아저씨, 서울서 귀한 어른을 모시고 왔어유.”
하필이 그 말에 회장인갑다 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회장이 들어서면서 인사를 했다.
“이렇게 무리하게 찾아 와서 죄송합니다.”
하필이 인사하는 회장을 보더니 눈이 번개처럼 빛났다.
“아아니! 이게 누구시래유?”
회장도 상대를 보는 순간 황소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아니! 영감님이 아니시오?”
하필이 겸손히 허리를 숙이고 인사했다.
“야, 그간 평안하셨쥬우?”
회장이 하필의 손을 덥썩 잡고 대답했다.
“저야 잘 지냈지요. 영감님 소식이 많이 궁금했습니다.”
“지도 선생님이 보고 싶었지만 어디 사시는지 알 길이 있어야지유.”
“저도 그랬습니다. 갑자기 서점을 처분하고 어디론가 가셔서
한동안 수소문을 했지만 알 길이 없었습니다.”
하필이 허당한테 일렀다.
“귀한 손님이 오셨는디 국자네 집에 싸게 가서 소주하고
국밥이든 뭐든 좀 시켜와.”
“아닙니다. 폐를 시켜서야 되겠습니까.”
허당이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아저씨, 회장님한티 겨우 그렇게밖에 대접하시면 안 되지유.”
“모르는 소리 마아. 이 선상님하고 나는 달러.
옛날부터 소주 두 병에 오징어 두 마리면 되었다니께.”
“그렇지요. 옛날 생각하면서 소주 한 병씩 들어봅시다.”
하필이 독촉을 했다.
“왜 그렇게 주춤거려?”
“회장님한티 그러시면 안 되쥬.”
하필이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우째서 이 선상님을 회장이라는 겨?
무슨 친목회 회장이라도 되는 겨?”
회장이 웃으며 대꾸했다.
“우리 동네 축구회 회장이니까요.”
“그런겨유? 아직도 축구를 하시남유?
전에도 축구 좋아하신다는 말은 들었지유.
그런디 허당은 우티기 그런 것도 알고 있었댜?”
허당이 국자네 가게로 달려가 소주 두 병에 안주를 시켰다.
수다스런 국자가 한 마디 했다.
“오늘은 뭔 일여. 소님을 데불고 오지 않고.”
“그럴 사정이 있어유. 서둘러 주세유.”
이렇게 하여 좁은 사무실에 두 할배가 마주앉아 소주잔을 기울였다.
허당은 하필 영감이 상대가 누군지를 모르고 있는 것 같아 불안했다.
그런데 회장은 아무렇지도 않게 친구를 만난 것처럼
웃고 떠들며 옛날이야기를 주고받았다.
하필이 궁금한 것을 물었다.
“선상님, 우리 허당은 우티기 알고 고서를 사셨대유?
그것도 백만 원씩이나 주고 말유.”
“백만 원이 비싼 건가요?”
“비싼 건 아니쥬. 거저쥬.”
“거저라? 하하하. 역시 영감님은 눈이 밝습니다.”
“서당개 삼년 풍월이쥬. 어깨너머로 배운 지식이 좀 있는디유.”
“그런 걸 알면서 왜 싸게 내놓으셨습니까?”
“저 많은 책을 다 사람들한티 나누어주고 싶은디 가져가는 사람이 있어야쥬.
다행히 어떤 장님이 고서를 돈을 주고 사가는 것 같아서 거저 준 거쥬.”
“하하하, 그 장님을 이렇게 만나셨구려.”
“그러고 봉게 그렇네유우. 하하하.”
“영감님 사투리는 여전하십니다.
서울에 살면서도 촌놈소리를 들으면서도 못 버린 사투리가 그대롭니다.”
“내 고향 말보다 더 편한 말이 어디 있간듀.”
“책이 얼마나 많은가 한번 구경해도 되겠소?”
“다른 사람이면 절대 안 되지만 선상님한티는 보여드리쥬.”
두 사람이 이층으로 올라갔다.
회장이 한 구석에 시커멓게 쌓여 있는 고서와
병풍, 서찰, 서화, 도자기, 벼루, 족보들을 보고 속으로 감탄했다.
‘오! 황금 같은 보물들이 그대로 있구나.
내가 저것들을 사려고 얼마나 준비를 했던가.
오늘서야 내가 다 사들일 때가 왔구나.’
회장이 웃는 얼굴로 물었다.
“이것들이 다 주인을 만나면 억만 장자가 되는 건데
그냥 아무나한테 주려고 했단 말이오?”
“아무나한티는 아니쥬.”
“그럼 이걸 다 팔 생각이었소?”
“주인이 나타나면 팔아야쥬.”
“얼마나 받을 생각이시오?”
“장님 만나면 거저 주고 눈 뜬 사람 만나면…….”
회장은 어림잡아 돈으로 산출해 보았다.
‘고서만도 한 권에 삼백만 원은 받을 수 있는데 수 백 권이 있으니…….
내가 백만 원을 주어도 내주었었고…….
저 열두 폭 병풍만도 오천만 원이 넘을 것이고,
이 서찰은 천만 원, 저 백자는 일억 원, 저 서화는
하나에 일천만 원은 될 것이 삼십 장도 넘고,
저 벼루도 오백만 원은 갈 거고…….
제대로 다 받자면 7십억은 될 것 같은데
이 영감이 그것을 알고 있는가 모르고 있는가?’
하필이 자기 이야기를 했다.
“내가 책방을 할 때 온 동네가 아파트를 짓고 젊은이들이
조상 대대로 전해오는 귀한 유물을 엿장수한티 가져가라고 버리면 엿장수는
나헌티 수백 수천만 원 가는 보물을 막걸리 값으로
오만 원만 주면 그냥 설설 기었쥬.
그것을 선상님이 가끔 와서 백만 원을 주고 사가시면 나는
그 백만 원 가지고 수천만 원어치를 막걸리 값만 주고 사 모았던 것이쥬.
선상님 덕에 재미 좀 보았지유.”
“그러셨군요. 이 많은 책들을 언제 그렇게 모으셨고 또 언제 다 처분하실 생각이시오?”
“책 욕심이 많은 나는 어디서든 누가 책을 버린다고 하면
밤에라도 가서 주워왔지유.
그러다 보니 큰 건물이 필요해서 급히 여기로 이사를 하고
전국에서 버리는 책을 다 모았지유.
요새 책이 안 팔린다고 서점과 출판사가 책 아까운 줄 모르고 다 버리고 날리쥬.
스마트 폰 때문에 이 지경이 되었지유.”
“맞습니다. 이제 출판문화는 다 끝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영감님만은 쨍하고 해 뜰 날이 올 것입니다.”
“그럴까유우?”
“출판사가 문을 닫고 서점이 없어지고 나면 책이 필요한 도서관이나
기관에서는 책을 구하게 될 날이 옵니다.
언젠가 세미나에 나온 유명한 향토심리학자가
‘공짜심리와 욕심’이라는 강의를 하는데 그럴 날이 올 것이라고 했고
지금 말대로 되어가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그런 생각도 했을까유.
그 사람 머리 좋은 사람이지유.
바로 앞을 내다보고 하는 소리 아닌가유.”(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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