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100 / 독서놀이
허당은 곳간으로 돌아와 하필이한테 봉투를 내밀었다.
“이거 받으시유.”
“봉투가 뭔디?”
하필이 봉투를 받아들고 열어보다가 황소 눈이 되었다.
“이게 뭐여? 3자 뒤에 동그라미가 몇 개나 붙은 겨?”
“여섯 개가 붙었지유.”
“뭘 갖다 줬길래 이런 큰돈을 받아온 겨?”
“암것도 아니쥬.”
하필은 공짜로 부리면서 일은 빡시게 시켰다.
“이층에 주문서 갖다 놓은 거 있응게 책이나 찾아 봐.”
하필은 양심은 있어서 속으로 되뇌었다.
‘내가 공짜로 부려먹는 건 아녀.
아무도 모르게 만들어 놓은 허당 통장이 있응게…….’
하필은 우체국문 닫기 전에 달려갔다.
자기 통장에 이백만 원을 넣고 허당 통장에도 백만 원을 입금하고 중얼거렸다.
“다른 날은 7대 3이지만 오늘은 특별히 3대 1이여.
내 통장은 머잖어 1자 뒤에 동그라미가 100,000,000이 붙을 겨어.
흐흐흐 이렇게 좋은 것.”
하필이는 통장에 돈 불어나는 것만 생각하면 자다가도 웃음이 나왔다.
‘그 꺼벙이 허당이 책을 돈하고 바꾸어오는 재주는 이만저만이 아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자기 딸 하우하고 어울리는 것은 질색이었다.
‘안 뒤어. 허당인 하우 짝이 아녀. 하우는 잘난 신랑을 만나야 혀.
내매양 못생긴 허당은 허당일 뿐이여.”
퇴근하여 돌아온 하우가 이층에서 책을 찾고 있는
허당을 발견하고 귀엽고 달콤한 목소리로 불렀다.
“오빠!”
허당은 오빠 소리에 그만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을 뻔했다.
무언가 높은 울타리가 헐리고 옆집 안방이 들여다보이는 듯한
아찔한 감정이 넘쳤다. 하우가 다가와 말했다.
“오빠, 이제부터 재미있는 독서놀이 할까?”
“독서놀이가 뭐여?”
“나는 내가 좋아하는 책에서 내 맘을 퍼다 오빠한테 보내고
오빠도 좋아하는 책에서 오빠 맘을 골라 내 가슴에 담아주기.”
“그게 무슨 소려?”
“예를 들면 내가 좋아하는 책에서 내 말을 담아다 오빠 가슴에다 붓는 거야.
들어볼래? 이런 거…….
‘가장 큰 악에 속하는 고뇌는 자기를 해석할 수 없는 무지에서 오는 것인가 합니다.
밤이 새도록 심명의 혼란을 완성해 보았습니다.
죄를 죄와 같이 감지할 줄 모르는 저 자신을 붙들고
밤이 다 가도록 아픈 채찍을 가하였습니다. 고해(苦海)의 언덕에서
허덕이는 것이 인생의 운명이라 하오나,
허영과 패덕이 없이 선의 위무만을 동경함에도 무한의
괴로움이 연장되어 있음은 알 길 없는 법칙이옵니다.’
이런 문구가 내 맘이고 오빠 맘에 담고 싶은 맘이야.”
허당은 짜릿한 감동을 받았다.
무언가 허우가 허당의 맘을 알아채고 하는 소리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무 말도 못했다. 하우가 더 알기 쉽게 하려는 듯 이런 말도 했다.
허당은 하우가 또 무슨 말을 하려는가 기다렸다.
하우는 무슨 책을 가지고 그러는지 알 수 없지만 달콤한 문장을 끌어다 읊었다.
“우리는 서로 멀리 있으나, 한 오리 길 위에 있지 않아요?
거기서 저는 허물 많은 여성의 몸을 벗어나 광채 나는 행복을 봅니다.
고독한 즐거움 속에 당신의 음성이 저의 생명을 이끄옵고, 당신의 빛이 처녀의 생로를 밝혀 줍니다.”
허당은 하우가 자기 마음을 알고 하는 소리 같다는 생각도 들고,
무어라고 대답할 말이 없어 우물쭈물했다. 하우가 웃으며 물었다.
“오빠, 이런 말 멋지지 않아?”
“…….”
“또 말 안 할 거야?”
“아녀, 그 말은 무슨 책에서인지 읽은 적이 있는디 책 이름 기억이 안 나.”
“알았어, 아무 생각 말고 내일은 이 곳간 안에서 좋은 책을 골라서
나한테 들려주고 싶은 센텐스를 읽어 줘. 그런 게 책읽기 놀이야.”
“그 말은 어디서 들은겨?”
“내가 지어서 한 말.”
“그런 머리도 있어?”
“오빠, 나 무시하는 거야?”
“그게 뭔 소려. 하우가 날 무시할까 겁이 나는디.”
이때 아래층에서 하필이 불만에 차 짜증난 소리를 질렀다.
“책은 안 찾고 뭔 잔소리들이 그리 많은 겨?
하우 그만 내려와. 그리고 허당도 책 다 찾았음 가 봐.”
“야.”
그렇게 하여 하루가 가고 이튿날이다.
허당은 고서 두 권에 동화책 두 권을 들고 서울 회장을 찾아갔다.
회장이 있는 빌딩 앞에 이르자 경비원이 쫓아와 친절하게 맞았다.
“어서 오시오. 회장님이 기다리십니다.”
“절 기다리신다규?”
“빨리 안으로 드시지요.”
허당이 동화책을 내밀면서 말했다.
“고마워유. 이 동화책은 시간 날 때 틈틈이 읽어보시유.”
“그냥 주시는 겁니까?”
“야. 거저유. 거저.”
회장님 농담이시지유?
“감사합니다. 저를 따라 오시지요.”
허당은 경비원의 안내를 받고 회장실로 갔다. 비서도 반가워하면서 맞았다.
“어서 오세요. 회장님이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고마워유.”
허당이 회장실로 들어서자 회장이 자리에서 일어서서 맞았다.
허당은 황송해서 허리를 푹 숙여 인사를 했다.
“회장님 안녕허셨시유?”
엄숙하게 보이는 회장님은 깜짝 놀랄 소리로 인사를 받았다.
“어서 오시유. 반가워유.”
“회장님!”
“왜 그리 놀라시유?”
“회장님은 사투리가 안 어울리셔유.”
“사투리든 아니든 서로 의사만 통하면 되지 않어유?”
“회장님, 농담도 하실 줄 아시나뷰?”
“사업허는 사람은 농담 몇 개는 맘 개비에 준비혀야 하는 거유.”
허당은 회장님의 사투리 솜씨에 놀랐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책을 내밀었다.
“회장님, 이 책 받으시유.”
“고마워유. 여기 앉아서 차나 한잔 하시유.”
“회장님, 이러시면 지가 황송혀서 어쩔 줄을 모르것시유.”
이때 비서가 차를 들여왔다. 회장이 맞은편 소파에 앉아 차를 권했다.
“이 차 별난 건디 맛있어유, 드셔 보시유.”
허당은 차 한 모금을 마시고 놀랐다.
세상에 나서 이렇게 향기롭고 달콤한 차는 처음 마셔보는 것이었다.
그 사이에 비서가 회장한테 봉투를 올렸다.
회장이 받아 허당한테 넘기면서 말했다.
“오늘도 더는 못 주고 이것만 받으시유.”
“자꾸 이러시면 제가 솔찬히 불편혀유.”
“괜찮여유, 앞으로 우리 친구가 될 텐디 워때유.”
허당은 봉투를 받고 들여다보고 백만 원짜리
3장이 들어 있는 것을 확인하고 한 장을 꺼냈다.
“회장님, 이거 도로 받으셔유. 앞으로는 두 장만 받을래유.
더 주시면 안 올래유.”
“아니, 한 장 더 달라고 하시는 건가유?”(계속 있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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