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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센트 할아버지와 빈 의자

웃는곰 2017. 9. 20. 09:52

빈센트 할아버지와 빈 의자

 

머리글

인품이 뛰어나고 고귀한 사람은 어디서나 외로움을 경험합니다.

큰 종합병원 원장이며 권위 있는 의사지만 친구들이 천당으로 먼저 가고 혼자 남아 있자니 벗이 없어서 외롭습니다. 그래서 공원 벤치에 나가 시간을 보내던 어느 날 다리를 저는 착한 아이를 만납니다. 그 아이의 아름다운 마음씨에 끌려 원장은 아이의 벗이 됩니다.

6.25에 남한으로 혼자 내려와 유족이 없는 원장은 유산을 물려줄 사람이 없었습니다. 우연히 공원에서 어린 소녀를 만나 정을 주고 그 아이의 다리를 고쳐주고 유산 상속인으로 유언장을 변호사에게 맡기고 세상을 떠납니다.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줄도 모르는 어린 다인이는 날마다 학교가 끝나면 공원 벤치에 나가 오시지 않는 할아버지를 해가 지도록 기다리는 아름답고 슬픈 이야기입니다.

차례

머리글 2

1. 말라깽이 노인 4

2. 부끄러운 것 7

3. 아이스크림보다 맛있는 우정 10

4. 비어 있는 벤치 13

5. 할아버지의 정체 14

6. 빗속에 기다리는 아이 18

7. 속 깊은 비밀 21

8. 모두가 내 가족 23

9. 기다리는 아이 25

 

1. 말라깽이 노인

다운이 다니는 학교 길에는 공원이 있습니다.

 

며칠 전부터 큰 나무 아래 벤치에 아주 불쌍하게 생긴 노인이 앉아 지나가는 아이들을 사랑스럽다는 듯이 바라보았습니다.

할아버지는 긴 눈썹에 모자를 눌러 썼습니다. 그리고 홀쭉한 볼과 뾰족한 코 때문에 더 마르고 불쌍하게 보입니다.

아이들이 지나가면서 저희끼리 속살거렸습니다.

거지야, 거지. 말라 깽깽이 거지.”

아니야, 노숙자야.”

저 눈썹 좀 봐, 눈을 덮었어. 꼭 시츄 같다. 호호호.”

아니야, 뾰족한 코가 다른 나라 사람 같다.”

걸음을 잘 걷는 아이들이 새떼처럼 지나가고 그 뒤를 다리를 저는 다운이가 힘들게 따라 오다가 할아버지가 앉아 있는 벤치로 다가갔습니다.

할아버지는 아주 사랑스런 눈으로 다운이를 바라보았습니다. 다운이가 할아버지 곁으로 다가앉으며 인사했습니다.

할아버지, 안녕하세요?”

오냐. 아주 예쁘게 생겼구나. 인사성도 바르고.”

할아버지는 어디서 오셨어요?”

할아버지는 건너편 골목을 가리키며 대답했습니다.

저기서 왔다. 넌 어디 사느냐?”

저 언덕 위에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잖아요. 거기 살아요.”

그래, 이름은?”

정다운이에요. 정다운.”

정다운? 이름처럼 넌 정말 정다운 아이로구나.”

할아버지는 몇 살이에요?”

허허, 네가 갑자기 내 나이를 알아서 무엇 하겠느냐?”

그래두요.”

넌 몇 살이냐? 네가 먼저 나이를 가르쳐 주면 나도 알려주마.”

여덟 살이에요.”

그러냐? 난 너보다 열 배나 많다.”

다운이는 제 나이보다 열 배나 많은 게 어느 정도인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열 배가 몇 살인데요?”

여든 살이라는 말이다.”

그렇게 많아요?”

많지.”

할아버지 이름은 뭐예요?”

무엇이 그리 알고 싶은 게 많으냐?”

내 이름도 가르쳐드렸잖아요.”

허허, 내 이름은……

왜 그러세요?”

이름이 좀 이상해서 말이다.”

?”

빈센트다.”

빈센트라구요? 무슨 이름이 그래요?”

사람들이 날 보고 빈센트라고 하여 그렇게 되었다.”

빈센트 할아버지라고 불러도 되나요?”

그러려무나.”

빈센트 할아버지! 호호호호, 재미있다.”

그러냐? 넌 정다운, 나는 빈센트, 합치면 정다운 빈센트가 되는구나. 하하하.”

빈센트 할아버지, 이제는 가야 해요. 늦으면 어른들이 걱정하셔요.”

그래, 어서 가거라.”

내일도 오실 거예요?”

, 내일도 와서 네가 올 때까지 기다리마.”

정말이에요?”

, 빨리 가거라. 내일 보자.”

빈센트 할아버지 안녕!”

다운이는 할아버지한테 인사를 하고 집으로 갔습니다.

2. 부끄러운 것

다음 날입니다. 다운이는 학교가 끝나자마자 공원으로 갔습니다. 벤치에는 할아버지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할아버지 안녕하세요?”

오냐, 다운이가 왔구나.”

할아버지, 저를 기다리셨어요?”

약속하지 않았느냐? 난 네가 오기를 하루 종일 기다렸다.”

할아버지는 왜 혼자만 나오셔요?”

친구가 없어서 혼자다.”

친구가 다 어디 갔어요?”

다 먼저들 가고 나만 남았다.”

어디로 갔는데요?”

하늘나라로 가고 나만 날개가 없어서 못 떠나고 있단다.”

할아버지…… 음음…….”

왜 또 궁금한 것이 남았느냐?”

할아버지는 할아버지 아닐 때 뭐 하셨어요?”

넌 설명해 주어도 모른다. 그저 빈센트라고만 알아 두거라.”

빈센트 할아버지 말인가요?”

그렇지, 더는 아무것도 묻지 말거라. 자꾸 물으면 부끄럽다.”

할아버지도 부끄러운 게 있어요?”

, 많지. 넌 없느냐?”

저도 많아요.”

그러냐? 부끄러운 것 중에 하나만 말해 보거라.”

다운이는 얼굴을 붉히면서 오른쪽 다리를 들어 보였습니다.

저는 이 다리가…….”

할아버지는 그만 얼굴이 더 빨개졌습니다.

알았다. 내가 공연한 것을 물었나 보구나.”

다운이는 금방 밝은 얼굴로 말했습니다.

할아버지는 뭐가 부끄러운지 하나만 말해 주세요.”

할아버지는 이가 하나도 없는 입을 벌리고 웃으시었습니다.

하하하, 이게 부끄럽다.”

이게 뭔데요?”

인석아, 할아버지 입을 보면서 그것도 몰라?”

이빨이 없는 거 말인가요?”

그래, 이빨이 없어서 부끄럽다.”

걱정 마세요. 할아버지만 그런 게 아니에요. 할머니들도 이빨이 없어요.”

그러냐? 네가 보기에 할아버지 이빨이 하나도 없는데 보기 싫지 않으냐?”

할아버지가 되면 이빨이 없어도 괜찮아요. 이빨 없는 할아버지는 귀엽거든요.”

뭐야?”

얼굴은 쪼글쪼글한데 이빨만 다닥다닥 나 있으면 안 어울려요.”

허허, 네 말을 듣고 보니 내가 부끄러운 생각이 달아났다.”

할아버지는 멀리서 보면 그냥 그런데 가까이서 보면 귀엽게 생겼어요.”

뭐라고? 내가 귀여워? 허허허허.”

할아버지는 매우 기분이 좋으신 것 같았습니다.

3. 아이스크림보다 맛있는 우정

할아버지와 다운이는 날마다 만나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할아버지는 다운이 만나는 즐거움으로 하루 종일 벤치에 앉아 기다렸습니다.

다운이도 학교가 끝나면 바로 할아버지 만나러 가는 것이 즐거웠습니다.

아주 더운 날 할아버지가 아이스크림을 사다 놓고 기다리셨습니다.

덥지 않으냐?”

, 더워요.”

너 주려고 이것 사왔다. 녹기 전에 먹어라. 시원할 게야.”

아이스크림이잖아요? 맛있겠다. 할아버지 감사합니다.”

다운이는 아이스크림을 맛있게 빨아먹었습니다. 할아버지는 사랑이 가득한 눈으로 다운이를 바라보셨습니다.

맛있어?”

, 할아버지도 한번 잡수어 보실래요?”

다운이가 내미는 아이스크림을 보시던 할아버지는 얼굴을 붉히시며 외면하셨습니다.

아니야. 내가 사준 걸 내가 먹으면 등허리에 뾰루지 난다.”

맛있어요. 그럼 저 혼자 먹을게요.”

그래, 내일 또 사 주마, 네가 먹는 것만 보아도 나는 먹은 것보다 더 좋다.”

아니에요. 낼은 사오지 마세요.”

이렇게 시작한 아이스크림 선물은 여름이 지나가도록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나 다운이는 할아버지한테 아무것도 해드릴 것이 없었습니다.

할아버지, 난 어떻게 할아버지를 기쁘게 해드릴 수 있어요?”

난 지금도 너 때문에 기쁜데 뭘 더 바라겠느냐. 네가 저기서 걸어오면 난 기뻐서 가슴이 출렁거린단다.”

정말이에요?”

그래, 세상에서 나를 사람으로 생각해 주고 말동무가 되어 주는 사람은 너밖에 없다. 그러니 안 그렇겠느냐?”

나도 할아버지 만나는 게 기뻐요.”

세상에서 나한테 사람대접하는 사람은 너밖에 없는 것 같다. 네 동무들이 지나가면서 날 보고 무어라고 하는지 아느냐?”

제 동무들이 뭐라고 했어요?”

넌 모르지?”

뭐라고 했는데요?”

노숙자. 말라깽이, 거지 뭐 그런 소리를 하면서 지나가지.”

그런 소리를 들으시고 가만히 계셨어요?”

4. 비어 있는 벤치

말라깽이는. 맞고 노숙자는 틀렸지.”

거지는 맞고요?”

? 거지라고 하면, 너도 나 싫어지게?”

아니에요. 거지라도 좋아요.”

고맙다. 거지라고 한다고 내가 거지가 되겠느냐? 거지가 아니면 그만이지. 안 그러냐? 허허허.”

할아버지 짱! 할아버지는 정말 멋져요.”

날 보고 멋지다고 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는데 너한테 들으니 나도 기분 짱이다. 허허허.”

다운이와 할아버지는 만날 때마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어디서 이야깃거리가 생기는지 알 수 없게 둘이 만나면 할 이야기가 많았습니다.

할아버지는 저녁때가 되어도 벤치에 앉아 다운이가 잘름잘름 걸어가는 모습을 바라보시면서 다운이가 골목으로 사라질 때까지 자리를 뜨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여름이 가고 가을이 깊어졌습니다. 고운 은행잎이 떨어져 공원 마당을 노랗게 수놓고 있는 어느 날입니다.

학교를 마치고 공원 벤치로 달려간 다운이 놀라운 눈으로 주위를 살폈습니다. 날마다 거기 앉아 웃으며 기다리시던 할아버지가 안 계시기 때문입니다.

할아버지가 왜 안 오셨을까?’

다운이는 해가 질 무렵까지 빈센트 할아버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5. 할아버지의 정체

다운이가 기다리는 빈센트 할아버지는 갑자기 병이 나서 병상에 누웠습니다.

빈센트 할아버지는 병상에 누워서 다운이 생각을 하고 계셨습니다.

다운이가 학교에서 돌아올 시간인데 내가 안 보이면 어떻게 할까?’

이렇게 생각하던 빈센트 할아버지는 간호사를 불렀습니다.

김간호사, 내 심부름을 좀 하여 주시겠소?”

, 원장님. 말씀하세요.”

저기 내가 날마다 나가 쉬다가 오는 공원 아시지요?”

.”

거기 동쪽 7번 벤치에 좀 다녀오시지요.”

말씀하세요. 원장님.”

거기 가거든 오후 네 시에 다리를 약간 저는 아이가 와서 기다리나 보고만 오시오.”

전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신가요?”

아는 척할 것은 없고 그냥 가서 그 아이가 어떻게 하고 있는지 보고만 와요.”

빈센트 할아버지는 아주 큰 종합병원 원장님이고 정형외과의사로는 전국에서 가장 권위 있는 분입니다. 점잖고 위엄이 있어서 아무나 가까이하지 못하는 의학박사입니다.

학문이 높고 인품이 남달라서 병원 사람들이나 일반인은 빈센트 할아버지 곁에도 안 가고 감히 가까이하지도 못합니다. 그래서 말상대를 다 잃은 빈센트 할아버지는 늘 외로웠습니다.

병원에서는 공적인 업무 외는 직원들이나 의사들이 아무도 말을 걸지 않고 친구들도 다 세상을 떠나서 말상대가 없었습니다.

병원장인 빈센트 할아버지는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날마다 오후에는 공원 벤치에 나가 앉아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며 외로움을 달래고 있었던 것입니다.

원장님은 매우 검소한 분입니다. 아이들마저 거지나 노숙자로 볼 만큼 차림이나 외모를 꾸미지 않습니다. 병원 의사나 직원들은 그 점 때문에 원장님을 더 어려워하고 존경했습니다.

그런 훌륭한 할아버지를 다운이는 물론 다른 사람이나 아이들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빈센트 할아버지는 자리에서 일어날 수 없을 정도로 병이 깊었습니다. 공원에 갔던 간호사가 돌아왔습니다.

다녀왔습니다. 원장님.”

수고하셨소. 그 아이를 보았소?”

.”

어떻게 하고 있던가요?”

빈 의자에 앉아 누구를 기다리는 거 같았습니다.”

……. 그랬군. 얼마나 앉았다가 돌아갔나요?”

두 시간이나 기다리가다 해가 질 때야 일어나서 돌아갔습니다.”

그렇게 오래도록? 어린것이 힘들었겠군…….”

원장님, 그 아이는 다리를 저는 정도로 보아 치료만 잘하면 건강한 아이로 만들 수 있을 것 같았……

김간호사, 이제 의사가 다 되시었군요.”

아이, 원장님도……

그 아이가 돈이 없어서 다리를 고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지요?”

그렇겠지요.”

앞으로 2년 안에 고치면 완치가 가능하겠지요?”

그렇게 생각합니다.”

……

원장님은 조용히 눈을 감고 생각에 잠기셨습니다.

6. 빗속에 기다리는 아이

다음날도 원장님은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한 채 다운이 생각에 잠겼다가 간호사를 불렀습니다.

미안하지만 오늘도 공원엘 좀 갔다 와 주시겠어요? 날이 흐리고 비가 올 것 같으니 우산을 가지고 나가시오.”

. 다녀오겠습니다.”

멀리서 보다가 아이가 우산 없이 나왔거든 아이네 집까지 데려다 주고 주소를 알아오시오. 아이는 모르게 하시고요.”

흐렸던 하늘에서 오후가 되자 가랑비가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간호사는 우산을 쓰고 공원으로 갔습니다.

아이는 어제처럼 나와 있었습니다. 벤치 주위를 잘똑잘똑 맴돌다가 비가 내리자 공중화장실 추녀 밑으로 가서 벤치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한 시간이 넘도록 아이는 자리를 뜨지 않았습니다. 간호사가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누구를 기다리니?”

.”

비가 오고 있어서 안 오실 것 같은데 그래도 기다릴 거야?”

.”

이 동네에 사니?”

.”

너하고 잘 아는 사람을 기다리고 있니?”

.”

아이는 대답을 하면서도 눈은 벤치에 가 있었습니다. 추워서 입술이 파랗고 가볍게 떨고 있었습니다.

추운데 그만 가거라.”

아니에요. 조금만 더 기다릴 거예요.”

누군지는 몰라도 비가 와서 안 오실 것 같다.”

꼭 오실 거예요.”

아이는 꼼짝 않고 더 기다리다가 어둠이 내리자 자리를 떴습니다. 간호사가 우산을 받쳐주었습니다.

비가 오는데 그냥 가면 어떡하니? 내가 너의 집까지 데려다 줄게.”

그제야 다운이 고개를 들고 간호사를 똑바로 바라보았습니다.

고마워요. 우리 집은 여기서 멀어요. 그냥 가세요.”

비가 오는데 어떻게 그냥 가니? 내 걱정 말고 같이 가자.”

언니도 누구를 기다리고 계신 거 아니었나요?”

기다렸지만 안 오는구나. 비가 와서 못 오는 걸 거야.”

네에…….”

간호사는 아이의 집까지 가서 주소도 알아 가지고 병원장 병실로 갔습니다.

다녀왔습니다.”

수고하셨소. 늦은 걸 보니 아이가 많이 기다렸던 같습니다.”

, 비가 오는데도 안 가고 화장실 추녀 밑에서 벤치만 바라고보 있었습니다. 아주 대단한 아이에요.”

어린것이 추웠겠구먼.”

달달 떨고 입술이 새파랬습니다.”

어린 게 그렇게 기다리는데…….”

원장님은 고개를 돌리고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간호사가 궁금하여 물었습니다.

그 아이가 누군가요?”

나도 이름밖에 놀라요.”

그런데 어째서?”

인연이라는 건 마음이 마음으로 이어지는 것 같아요. 마음과 마음의 끈이 맺어지면 무엇으로도 끊기 어려운 것…….”

간호사는 원장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 듯하면서도 이해가 안 가서 입을 다물었습니다.

원장이 간호사에게 미안하다는 눈으로 말을 이었습니다.

난 이제 일어날 것 같지 않아요. 나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 말인데…….”

7. 속 깊은 비밀

간호사는 놀라운 얼굴로 말했습니다.

원장님,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세요?”

아니야, 난 의사로 살아서 내가 얼마나 살는지 짐작하고 있어요. 그래서 말인데……. ”

……

내가 변호사한테 일러둘 말이 있어요. 저기 있는 가방에서 서류 봉투를 좀 꺼내 주시겠소?”

간호사가 가방에서 봉투를 꺼냈습니다. 봉투를 가슴에 얹고 원장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난 그 아이와 아무 관계도 없어요. 다만 그 아이는 이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나를 사람으로 대접하여 준 인연이 전부고 그것이 고마워서 내가 무엇인가 해주고 싶은 것이 있었어요.”

원장은 봉투를 간호사에게 건넸습니다.

이 봉투를 그 아이네 집에다 전해 주어요. 그리고 아이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말아요. 혹시 나를 찾거든 멀리 다른 나라에 사는 아들네 집에 갔는데 어쩌면 안 올지도 모른다고만 해주어요.”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어요. 하지만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이와 같은 서류를 하나 더 만들어서 우리 병원 전담변호사에게 맡겼으니 그리 아시고 모든 것은 이 봉투 안에 내가 적어 놓은 대로만 하시면 됩니다. 아시겠지요?”

그리고 원장은 병실 밖에 바람을 타고 풀풀 떨어지는 은행잎을 바라보며 중얼거렸습니다.

세월이 가면 저 낙엽처럼 육신은 땅으로 조용히 숨는 거지……. 세상을 아름답게 살다 간 사람은 낙원에 살았다고 할 거고, 한 세상 고되고 슬프게만 살다 가는 사람은 지옥에 살다가 간다고 하겠지……. 어찌 살든 갈 때는 다 땅속으로 가는 인생이 아닌가. 가지를 떠나 땅에 묻히는 은행잎처럼 육신도 영혼을 떠나 그렇게 가고…… 하나님을 찾는 영혼은 하늘로 돌아가는 것…… 하나님, 저를 받아 주소서.”

간호사는 작은 음성으로 중얼거리는 빈센트 원장의 목소리를 들으며 병실을 나왔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병실을 찾았을 때. 원장님은 자는 듯 평화로운 얼굴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8. 모두가 내 가족

그로부터 삼일, 장례를 마친 간호사는 공원으로 나갔습니다.

가을 햇살이 노랗게 내린 은행잎을 깔고 앉아 바람놀이를 하고 외로운 벤치에는 다운이가 앉아 할아버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간호사가 다가가 곁에 앉아 물었습니다.

오늘도 기다리고 있는 거야?”

다운이 힘없는 소리로 대답했습니다.

…….”

누구를 그렇게 기다려?”

할아버지예요.”

친할아버지야?”

……

아이는 울먹거릴 뿐 대답을 못했습니다. 간호사도 가슴이 메었습니다.

홀쭉한 볼에 휘청휘청 쓰러질 듯 걸었지만 인자한 눈빛만은 초롱초롱하던 노인의 모습이 두 사람 머릿속에 똑같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다시 세상에 돌아올 수 없는 허윤 원장님은 육이오 전쟁에 혼자 월남하여 의사가 되었습니다. 통일되는 날 북에 있는 가족을 만날 꿈을 꾸며 독신으로 살아온 외로운 분이었습니다.

가족도 없고 친척도 없던 원장은 늘 이 세상 사람이 다 내 가족이라고 하며 껄껄 웃으시던 욕심 없이 순진한 분이었습니다.

어려운 환자가 와서 돈을 못 내면 자기 가족이라면서 병원비를 안 받고 치료해 주던 분입니다. 그래서 혜택을 입은 분들이 다 아버지처럼 할아버지처럼 생각하고 따랐기 때문에 그분에게는 더 많은 가족이 세상에 있었습니다.

장례식에도 가족 없이 가신 분이지만 어느 가족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슬프게 울며 안타까워했습니다.

그렇게 인자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고 가신 원장님이지만 고결한 인품을 존경하는 사람들이 감히 가까이 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더 외롭게 살았습니다.

9. 기다리는 아이

그 할아버지가 누구인지 지금 어떻게 되어 있는지 아무것도 모르는 다운이는 벤치에 앉아 해 그림자가 길게 늘어질 때까지 자리를 뜨지 않고 할아버지를 기다렸습니다.

영원히 오지 않을 분을 기다리는 작은 등에 해가 지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간호사는 측은하여 울음이 터질 것만 같아 울컥하는 감정을 누르고 입을 열었습니다.

이제, 그만 가자.”

어디로요?”

너희 집에.”

왜요?”

너희 집 구경이 하고 싶어서.”

안 돼요.”

?”

그냥요.”

다운이는 아직도 할아버지를 기다리는 눈으로 두리번거렸습니다.

오늘은 안 오시나 보다. 늦기 전에 가자.”

할아버지는 오실 거예요. 내가 없으면 안 돼요.”

내일 또 기다리면 안 되겠니?”

……

간호사는 다운이 손을 잡아끌었습니다. 그리고 앞장서서 걸었습니다.

정말 우리 집에 가실 거예요?”

그래, 너희 집에 가고 싶어.”

간호사는 다운이 집으로 가서 부모님을 만났습니다. 부모님과 인사를 나눈 다음 다운이를 밖으로 내보고 원장님이 맡긴 봉투를 내놓고 말했습니다.

이 봉투 안에는 아주 중요한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예쁜 다운이가 몸이 불편한 것을 아신 어느 어른님께서 다운이의 불편한 다리를 치료하여 주라고 제가 근무하는 새나라 병원에다 병원비를 맡기셨습니다.”

얼굴이 갸름한 다운 아버지가 놀라 물었습니다.

어떤 어른님이 그렇게……?”

다운이 어머니는 감격하여 눈물부터 흘렸습니다.

고맙기도 하시지요. 그렇지 않아도 저 애를 볼 때마다 가슴이 찢어졌습니다. 돈이 없어서 고쳐주지 못하고 마음만 태웠는데 이렇게 고마울 데가…….”

다운이 아버지가 말을 이었습니다.

그렇게 고마우신 분이 뉘신지 이름이라도 알았으면 찾아가 절이라도 드리고 싶습니다.”

그럴 것까지 없으십니다. 그분의 뜻만 받아들이시면 됩니다. 그분은 자기가 한 일이 남에게 알려지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간호사는 봉투를 다시 챙겨들고 일어섰습니다.

이 봉투는 다운이 치료받고 난 다음 드리겠습니다. 곧 방학이 될 테니 그 동안 치료하면 새 학기에는 다운이가 아주 건강한 아이로 씩씩하게 하교에 가게 될 것입니다.”

간호사는 다운이 부모님과 약속을 하고 돌아갔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다운이는 그 뒤에도 여전히 학교가 끝나면 공원 벤치로 갔습니다. 그리고 땅거미가 질 때까지 기다리다 지쳐서 쓸쓸히 절름거리며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간호사는 아이의 마음씨에 감동하여 혼잣말을 했습니다.

천사처럼 착한 넌 원장님을 닮았어. 너는 원장님의 사랑으로 대학을 마지고 우리 병원 원장으로 취임하는 날 할아버지 사랑을 알게 될 거야.’

 

아무것도 모르는 다운은 가을이 가고 겨울이 돌아와 눈발이 날리는 날도 공원 벤치에 앉아 할아버지를 기다렸습니다.

추위에 달달 떨고 있는 다운이 곁으로 잘 생긴 중년 신사가 다가갔습니다. 그리고 다운이가 걷는 자세를 뜯어보다가 물었습니다.

네 이름이 정다운이지?”

다운이 눈을 똥그랗게 뜨고 물었습니다.

그걸 어떻게 아세요?”

나는 네가 기다리는 할아버지 심부름을 왔다.”

?”

이제 그만 기다려, 할아버지는 안 오셔.”

다운이 놀라며 실망한 눈으로 물었습니다.

왜요? 어디 아프신가요?

젊은 사람은 그 병원에서 가장 권위 있는 정형외과 의사이며 박사입니다.

다운이의 고운 마음씨를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할아버지를 기다리는 그 간절한 눈빛에서 마음이 베어지는 아픔을 느꼈습니다.

그러니까 기다리지 마.”

할아버지는 어디를 가셨어요?”

멀리 가셨어.”

언제 오시나요?”

오시기 힘들 것 같다. 외국에 사는 아들한테 가셨어.”

정말이에요?”

묻는 아이 얼굴에 갑자기 눈물이 그렁했습니다. 그리고 울음 섞인 목소리로 또 물었습니다.

정말 못 오시나요?”

못 오실 거야.”

왜요?”

거기 사실 거야. 언제 오실지 아무도 모른다.”

……

겨울방학이 되자 다운은 부모님을 따라 새나라 병원으로 갔습니다. 그 날로 전문의사의 수술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간호사의 친절한 보살핌으로 완치되었습니다.

방학 동안 다리를 고치고 정상인이 되어 학교에 갔을 때 선생님과 한 반 아이들이 모두 놀라워하며 축하해 주었습니다.

 

다운이는 건강한 모습을 할아버지한테 보여드리고 싶어서 공원으로 가며 입속말로 중얼거렸습니다.

할아버지, 고맙습니다. 제가 걷는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어요. 할아버지, 보아 주세요. 저 다 나았어요. 기다릴게요, 할아버지. 꼭 한번만 와주세요.’

다운이는 학교가 끝나면 공원 벤치에서 해가 지도록 오시지 않는 할아버지를 기다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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