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마을 이장님
558매
207쪽
2017.11.15.일 완성
1. 사람을 찾는 노인
길은 넓고 좋은데 차가 별로 다니지 않는 시골길입니다. 동화마을 젊은 이장이 면사무소에서 일을 보고 돌아가는 길이었습니다.
농촌 인구가 해마다 줄어들고 늘어나지 않습니다. 그 때문에 넓은 도로가 한산합니다. 이장은 어떻게 하면 도시로 떠난 고향 사람들이 돌아오게 할 수 있을까에 대한 대책회의를 하고 오는 길입니다.
산모퉁이를 돌아 환히 뚫린 길을 바라보니 바로 앞에 한 사람이 가고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아주 느릿느릿 걸었습니다.
앞으로도 갈 길이 먼데 적적하던 터라 이장은 부지런히 걸어서 그 사람 가까이 이르러 얼굴을 보았습니다. 나이가 여든 살은 되게 보이는 노인이었습니다. 이장이 노인한테 인사를 건넸습니다.
“어르신, 어디를 이렇게 가십니까?”
눈썹은 하얀데 대춧빛 얼굴에 새벽별같이 맑은 눈이 여느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노인이 힐끔 돌아보고 대답했습니다.
“정처 없이 간다오.”
이장이 잘못 들었나 싶어 다시 물었습니다.
“어르신, 어디까지 가십니까?”
“정처 없이 다니니 어디까지 갈는지 모른다오.”
이장은 고개를 갸웃하고 다시 물었습니다.
“누구를 찾아 가시는 길이신가요?”
노인이 점잖게 대답했습니다.
“정처 없이 가는 사람이 누구를 찾겠소.”
이장은 노인의 대답에 이해가 안 되어 다시 물었습니다.
“가시는 곳도 없고 찾는 사람도 없으시면…….”
“왜? 이상하오?”
“네.”
노인은 태연히 대답했습니다.
“사람을 찾는다오.”
“네?”
“사람을 찾는다고 했소.”
이장이 또 물었습니다.
“찾는 사람 이름은 누구신지요?”
“이름도 모르오.”
이장은 더 이상해서 중얼거렸습니다.
“이름도 모르신다면서 어떻게…….”
노인이 말했습니다.
“세상에 사람은 많은데 사람이 없소.”
이장은 더 이상했습니다.
“무슨 말씀이신지 알아듣기가 어렵습니다.”
노인은 이장을 가만히 보더니 물었습니다.
“댁은 어디까지 가는 뉘시오?”
“저는 이름 없는 동네에 사는 이신욱이라고 합니다.”
“허허, 이름 없는 동네라니, 이 늙은이를 놀리시오?”
“아닙니다.”
노인이 물었습니다.
“세상에 이름 없는 동네가 어디 있소?”
“요새 나라에서 도로명으로 정한 마을 새 이름이 있기는 한데 그 이름이 마음에 안 듭니다.”
“그래서 어떻게 할 생각이시오?”
“저는 우리 동네 이름을 동화마을이라고 지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동화마을이라? 허허, 그것도 재미있겠군. 어째서 그런 생각을 하시었소?”
“동화속 그림 같은 마을을 만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여 그렇게 상상했습니다.”
노인은 자기가 결정이라도 내리듯 말했습니다.
“그럼 그렇게 하시오!”
“네?”
“나도 동감이라 하는 소리요. 동화마을로 하시오.”
이장이 겸손히 말했습니다.
“어른님, 제 생각일 뿐입니다. 제가 그렇게 부른다고 마을 사람들이 들어 주겠습니까.”
“들어주게 만들면 되지 않겠소?”
“힘듭니다.”
“내가 도와주어도 안 되겠소?”
“어른님, 농담도 잘하시네요.”
“농담이라니, 늙은이가 할 소리가 없어 젊은 사람한테 실없는 소리 하겠소?”
“그러시긴 하지만…….”
노인이 결심한 듯 말했습니다.
“이왕에 이렇게 만났으니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는 이 늙은이를 젊은이가 잠시 보호해 주지 않겠소?”
이장은 주저하다가 대답했습니다.
“어른님께서 정말 정처가 없으시다면 모시겠습니다.”
“고맙소.”
이렇게 하여 이장은 노인을 자기 집으로 모셨습니다.
“어른님, 누추하지만 편히 모시겠습니다.”
“고맙소.”
노인은 자기가 찾는 사람이 이런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느긋이 신세를 지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이상스런 것은 젊은 사람이 아무도 없이 혼자 사는 것입니다.
2. 뉘신데 남의 잔치에 끼어드시오?”
“가족은 다 어디 갔소?”
“동네에서 학교가 너무 멀어 학교 근처에 사는 집안 형님 댁에 가고 저만 남았습니다. 매주 토요일엔 옵니다.”
“다른 집들도 그렇소?”
“예, 이 마을이 전체는 70호였는데 반은 고향을 떠났고 35호만 남았습니다. 그런데 그마저도 학교 관계로 집을 떠나 살고 동네에는 노인들만 몇몇이 남았습니다.”
노인이 동네 앞에 보이는 건물을 가리키며 물었습니다.
“저 건물은 무엇이오?”
“학교 건물입니다만 지금은 폐교를 하여 비어 있습니다.”
“허허, 학교가 비었다니 그럼 지금은 무엇에 쓰고 있소?”
“교육청에서 팔려고 내놓았지만 사려는 사람이 없어서 비어 있고 제가 수시로 가서 청소를 하고 돌보고 있습니다.”
“좋은 일을 하시오. 젊은이는 동네서 무슨 일을 하시오?”
“이장 일을 봅니다.”
“이장이시라고?”
“예, 그래서 오늘 면사무소에서 회의를 하고 오는 길입니다.”
“무슨 중요한 회의라도 있었소?”
“날이 갈수록 농촌인구가 줄어들고 있는데 어떻게 하면 농촌 인구가 줄어들지 않게 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를 전문 강사를 모시고 들었습니다.”
“그 강의를 듣고 무슨 생각을 하시었소?”
“전문 강사라고 하지만 농촌 깊은 속까지는 알지 못하고 이론으로만 하는 분 같았습니다.”
노인이 관심을 가지고 물었습니다.
“젊은 이장님, 그럼 무슨 생각을 따로 가지고 있기는 한 것이오?”
“생각은 좀 있습니다만 그 생각대로 하자면 어려움이 이만저만이 아니라 입도 열지 못합니다.”
“들어 봅시다. 내가 힘이 될 수 있다면 거들어 드리리다.”
“어른님으로는 안 됩니다. 농촌 일이란 소처럼 힘을 써서 하는 일이라 아무나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럼 그 구상이나 들어봅시다.”
이장은 강사가 말한 것과 자기가 생각하고 있는 것을 조합하여 말했습니다.
“저는 우리 마을을 크게 변화시키고 싶습니다.”
“방법이 있소?”
“벼농사만 하지 말고 특용작물을 재배하여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마침 강사한테서 좋은 의견을 들었습니다.”
“무슨 의견이오?”
“우리 마을 젊은이들이 모여 영농조합을 만드는 것입니다.”
“영농조합?”
“예, 영농조합은 뜻이 맞는 사람 5명 이상이 모여 어떤 목표를 세우고 힘을 모아 일하면 시너지 효과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생각을 하시었소?”
“오늘 밤에 동네 사람들을 모아 놓고 영농조합에 대한 설명을 하고 조합 결성을 추진해 볼까 합니다.”
“좋은 생각 같소. 동네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나도 구경하고 싶소.”
“그렇게 하십시오.”
이장은 부엌에 들어가 간단한 음식을 준비하여 상을 차렸습니다.
“어른님, 변변치 않지만 제가 먹는 대로 차렸습니다. 부실하다 마시고 맛있게 들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노인이 상을 들여다보고 만족해하며 말했습니다.
“아주 진수성찬이오. 떠돌이 늙은이한테 이렇게 융숭한 대접을 해주시니 고맙소.”
이렇게 저녁을 먹은 다음 이장은 사랑방에 설치된 마이크로 방송을 했습니다.
“아아, 주민 여러분, 저는 오늘 면사무소에서 농촌문제 강의를 듣고 왔습니다. 일곱 시부터 마을 회관에서 회의를 하고자 하오니 많이 참석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방송을 듣고 동네 사람들이 금방 모여들었습니다. 젊은이가 별로 눈에 띄지 않고 모두가 나이가 많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장이 그간 면에서 있었던 일을 설명하고 영농조합 설립에 대하여 설명했습니다.
“우리 마을은 전통적으로 쌀농사만 지어 왔습니다. 국가적으로 쌀이 남아도는 터라 쌀값이 오르기는커녕 해마다 떨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특용작물을 재배하기 위하여 영농조합을 만들어 새로운 길을 모색해 보면 어떨까 합니다.”
이때 배불뚝이 영감이 배를 쑥 내밀고 말했습니다.
“어림도 없는 소리. 촌놈들이 벼농사 안 짓고 무얼 한다는 겨?”
이장이 말을 받았습니다.
“벼농사를 하실 분은 하시고 새로운 길을 찾아 영농조합을 만들자는 분만 참석하시면 됩니다. 벼농사를 하지 말자는 뜻이 아닙니다.”
이때 구석에서 한 젊은이가 팔을 들고 발언권을 얻었습니다.
“제가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이장님이 말씀하시는 영농조합은 서둘러 해야 합니다. 우리 동네는 다른 동네에 비해 늦었습니다.”
이에 배불뚝이 영감이 화를 발끈 냈습니다.
“네가 뭘 안다고 늦었네 이르네 하는겨? 농사꾼한테는 벼농사 이상 안 하고 딴 짓거리하면 굶어 죽는겨.”
이장이 조심스럽게 말했습니다.
“벼농사도 짓고 특용작물도 재배하자는 것입니다. 일단 영농조합에 가담하고 싶은 분은 손을 들어 보십시오.”
모인 사람은 30명쯤 되는데 손을 든 사람은 젊은 측의 네 명뿐이었습니다. 이장이 다시 말했습니다.
“한 분만 더 있으면 다섯 명이 찹니다. 5인 이상이 찬동해야 법인이 성립됩니다.”
이때 곁에서 구경하던 노인이 손을 번쩍 들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낯선 영감이 참석하고 있어서 이상하게 생각하던 동네 노인이 한 마디 했습니다.
“노인장은 뉘신데 남의 잔치에 끼어드시오?”
그 소리에 동네 사람들이 모두 노인한테 눈길을 모았습니다.
3. 돈병철인가? 정병철이도 병철이는 병철이지
이장이 노인 대신 대답했습니다.
“이 어른님은 제가 모시고 왔습니다. 앞으로 저의 집에서 함께 사시면서 제가 하는 일을 도와주시기로 했습니다.”
이장이 얼결에 이렇게 대답하고 노인을 바라보자 노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섰습니다.
“지금 이장님이 말씀하신 대로 저는 이 마을에서 이장님 하시는 일을 도울 생각입니다. 저는 정병철이라고 합니다.”
싱겁게 생긴 키다리 영감이 불쑥 한 마디 했습니다.
“허허, 돈병철인가? 정병철이도 병철이는 병철이지 하하하.”
그 소리에 동네 사람들이 모두 웃어댔습니다. 그렇지만 노인은 조금도 언짢은 내색을 하지 않고 마을 사람들 앞에 공손히 허리를 숙이고 말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앞으로 많은 지도 바랍니다.”
그 외에 마을 문제를 의논하고 회의를 끝내면서 이장이 말했습니다.
“모두 돌아가시고 영농조합 결성에 동의하시는 분만 남아 주십시오.”
어른들은 다 돌아가고 이장 또래의 젊은 층 사람 넷만 남았습니다. 이장이 영농조합의 이점을 여러 가지로 설명하고 나서 결심을 물었습니다.
“우리한테는 현금이 없습니다. 있는 것이라고는 모두 얼마 안 되는 논과 밭이 있을 뿐입니다. 그 논과 밭을 영농조합 기금으로 투자하기로 하고 힘을 모아 봅시다. 먼저 우리 논 열 마지기와 천 평 밭을 내놓겠습니다.”
그러자 한 사람이 나서서 자기도 논과 밭을 내놓겠다고 말했습니다. 또 한 사람이 입을 열었습니다.
“저도 가진 땅을 다 내놓겠습니다만 이장님네 땅이 가장 많고 저 같은 사람은 이 중에 세 번째로 재산이라고 하면 재산이 많은 편인데 적게 내놓은 사람이나 많이 내놓은 사람이나 권리가 똑같은가요?”
이장이 말했습니다.
“물론 똑같을 수야 없지만 일단 공동 재산으로 내놓은 것이니까 똑같은 권리를 주어야 될 것 같습니다. 공동투자한 회원이 투자액이 많으냐 적으냐를 따지면 평등한 자격이 주어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때 노인이 발언권을 얻고 말했습니다.
“그렇게 따지면 나중에는 많이 낸 사람이 주인행세를 하게 되어 단합이 안 됩니다.”
이장이 물었습니다.
“어른님께서는 고견을 가지고 계신가요?”
“예, 제 나름대로 생각하는 바가 있으니 이 회의가 끝나고 집으로 가면 이장님한테 조용히 의논을 하여 대안을 제시하겠습니다.”
이장이 말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다섯 명이 되어 영농조합신청을 할 수 있게 되었으니 내일 저녁에 구체적인 대안을 의논하기로 하고 오늘은 이만 회의를 마치겠습니다.”
그렇게 회의를 마치고 이장과 노인은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노인이 먼저 물었습니다.
“이장님, 어떤 계획이 있는지 말씀해 보시지요.”
이장 이신욱이 겸손히 대답했습니다.
“어른님, 집에서는 이장 하고 부르시고 말씀을 낮추어 주십시오.”
노인 정병철이 흡족한 얼굴로 대답했습니다.
“하하하, 그러시게. 이제부터 한 식구가 되었고 내 나이가 높으니 말을 놓겠네. 우리 편하게 말하고 사세.”
“예, 감사합니다.”
노인 정병철이 물었습니다.
“대략 어떤 사업을 하고 싶은지 말해 보게.”
“네, 조합원이 내놓은 땅을 이용하여 각종 약초와 특수 과일을 재배하여 볼까 합니다.”
노인이 물었습니다.
“특수 약초나 특수 과일은 종자가 있어야 하는데 어떻게 구할 생각이신가?”
“거기까지는 구체적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조합이 결성되면 땅을 조금 팔아서라도 그런 종자를 사들이고 우리가 힘을 모아 꿈의 밭을 이루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그렇게 하자면 시간이 많이 걸리고 각자의 생업에 지장이 있을 텐데 대안은 있는가?”
“…….”
이장이 대답을 못하자 노인 정병철이 이렇게 제안했습니다.
4. 꿈꾸는 이상향
“내게 생각이 있는데 들어주겠는가?”
이장이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네, 무슨 고견이시든 달게 받겠습니다.”
“고견이랄 건 없고……. 내 고향에 백만 평이 조금 넘는 산이 하나 있는데 내 이름으로 되어 있네.”
“…….”
“내가 그 산을 담보로 돈을 좀 구해 올 테니 이장이 꿈꾸는 이상적인 농촌을 만들어 보시게. 어떤가?”
이장은 갑자기 부담스런 마음이 들었습니다.
“어른님, 그건 안 될 말씀입니다. 제가 허망한 꿈을 꾸다가 실수라도 하면…….”
“매사에 성공을 하자면 실패도 하는 법, 그래서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고 하지 않던가. 만에 하나 실수를 해도 내가 좋아서 한 일이니 이장한테는 원망도 않고 부담도 주지 않겠네. 어떤가? 그 구상이라는 것을 들어 봄세.”
이장 이신욱은 잠시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습니다.
“동네 사람이 자꾸 떠나고 농촌은 날이 갈수록 피폐해지고 있습니다. 떠났던 동네 사람이 돌아오게 하는 것이 농촌을 살리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하여 떠난 사람들이 돌아오게 하겠는가?”
“영농조합을 성공시키면 모두가 돌아올 수 있습니다.”
“어떻게?”
“이번 주 토요일이면 아이들의 교육 관계로 타지에 나갔던 사람들이 돌아옵니다.”
“그런가?”
“저는 영농조합을 구상하면서 외지로 나갔다 온 어린 학생들을 비어 있는 폐교 교실로 모아 볼 생각을 했습니다. 그것은 아이들과 친해져야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아이들과 친해질 수 있는가?”
“기다려 보십시오. 제 생각대로만 되면 동네 아이들이 고향을 사랑하는 마음을 갖게 할 것입니다.”
“고향을 사랑하는 마음을 갖게 한다고?”
“예, 아이들이 고향을 사랑하면 어른들도 따라 오게 되어 있습니다.”
“음…….”
이장은 더 큰 포부를 말했습니다.
“장차 영농조합이 성공하면 저 학교를 살 생각입니다. 지금 아무도 사지 않는 것은 쓸모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고 또 더 큰 포부는 없는가?”
“조합원이 내놓은 땅을 한군데로 모아 정지작업을 하여 아주 크고 견고한 유리 온실 농장을 만들어 각종 농산물이 사철 나오도록 하고 제 명의로 된 깊은 산에는 삼씨를 뿌려 삼밭을 이루고 언덕바지 비탈 밭은 과일나무를 심을 생각입니다.”
“그리고 또 없는가?”
“학교 건물을 사면 앞 건물은 사설학교를 만들고 뒷 건물은 농산물 가공공장을 만들고 싶습니다.”
“음…….”
이장이 신념에 차서 말했습니다.
“영농조합이 잘 되고 조합원이 잘 살 수 있다는 소문만 나면 떠났던 고향 사람들이 돌아올 것입니다.”
“그럴 듯한 생각이로군. 그럼 자네를 믿고 내가 투자를 약속하겠네.”
“정말이십니까?”
노인 정병철이 단호히 말했습니다.
“늙은이가 거짓말 하겠는가. 내가 고향으로 가서 산을 잡히고 필요한 자금을 마련해 보겠네. 다만 돌아오는 토요일에 동네 아이들을 학교로 모이게 한다니 어떻게 하는지 그것만 보고 다녀오겠네.”
“알겠습니다. 토요일에는 나갔던 사람들이 돌아오고 아이들도 돌아옵니다.”
노인 정병철이 한 가지 더 다짐을 했습니다.
“내가 다소간의 자금을 마련해 오더라도 아무도 모르게 해야 하네. 절대로 내가 투자했다고는 하지 말고 모든 영농자금은 정부에서 모범 영농조합 조성을 위한 특별지원금을 받아서 하는 것이라고만 하게. 그리고 나에 대하여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게 해주기만 하면 되네. 알겠는가?”
“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마침내 토요일이 되었습니다. 학교가 있는 읍내로 나갔던 아이들과 부모가 돌아와 동네가 시끌벅적 활기를 띠었습니다.
5. 빨간 돼지저금통
읍내로 나갔던 이장의 아내와 아이들 삼남매도 돌아왔습니다. 초등학교 1학년 여자 아이 지나, 3학년 남자 아이 국영, 중학 1학년 남학생 선영입니다. 동네에서 아이들이 가장 많은 가정이었습니다.
아이들이 돌아와 낯선 할아버지가 보이자 막내 딸 지나가 물었습니다.
“아빠, 할아버지는 누구야?”
이장이 친절하게 대답해 주었습니다.
“우리 할아버지시다. 멀리 사시다가 우리하고 같이 사시려고 오셨다. 인사드려라.”
예쁜 지나가 사뿐히 인사를 드렸습니다.
“할아버지 안녕하세요? 저는 지나예요.”
노인 정병철이 기쁜 얼굴로 인사를 받았습니다.
“그래 고맙다. 이름이 지나라고?”
“예, 이지나예요.”
“지나, 이름도 예쁘고 얼굴도 예쁘구나.”
그러자 이장이 한 마디 더 보탰습니다.
“우리 지나는 얼굴만 예쁜 게 아니라 맘씨도 예쁘답니다.”
그렇게 인사를 한 다음 이장 부인과 남자 아이들이 인사를 나누고 한 가족이 되었습니다.
일요일 아침입니다. 이장 이신욱이 마이크를 잡고 안내 방송을 했습니다.
“아아, 이장이 마을 어린이들에게 알립니다. 오늘 아침 아홉 시에 동네 학교로 나오십시오. 참석하는 모든 학생들에게 예쁜 선물을 드리겠습니다. 어른들도 오시면 환영합니다. 많이 나와 주시기 바랍니다. 이장 이신욱이 알려드렸습니다.”
이장이 동네 학교로 가면서 말했습니다.
“어른님도 같이 가시지요.”
노인 정병철이 나서면서 대답했습니다.
“당연하지요. 이장님 가시는 길에 내가 빠지면 되겠소? 학교 구경도 하고 싶으니 갑시다.”
그렇게 하여 이장과 노인이 학교로 갔습니다. 학교 건물은 두 채가 있는데 앞 건물에는 교실이 6개이고 뒷 건물에는 넓은 식당이 있고 두 칸짜리 방이 하나로 트여 있는 강당이 있었습니다.
방송을 듣고 아이들이 몰려왔습니다. 이장이 아이들을 강당으로 모았습니다. 생각보다 아이들이 많았습니다. 한 집에 한두 명씩 있어서 40명이나 모였습니다. 이장이 강단에 올라 아이들한테 인사를 했습니다.
“이렇게 참석해 준 어린이 여러분 고마워요. 앞으로 우리 마을에 좋은 일이 있을 것을 알려드리려고 오늘 여러분을 모이라고 했어요.”
언제 준비했는지 강단에는 빨간 돼지저금통이 수북이 쌓여 있었습니다. 아이들 가운데 한 아이가 돼지저금통에 눈길을 보내고 물었습니다.
“이장님, 저 돼지저금통은 뭐예요?”
이장이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내가 하는 말보다 이 빨간 저금통에 더 관심이 가는 모양이구나. 말해 줄까?”
아이들이 한 목소리로 네네 하고 대답했습니다.
이장이 아이들을 둘러보며 한 사람씩 이름을 불렀습니다. 아이들은 선생님이 출석 부를 때 대답하듯이 네네하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이장님이 자기 이름을 알고 있다는 것이 좋았던지 모두가 네 하고 대답하고 싱글벙글했습니다.
이장이 돼지저금통을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이 저금통을 여러분한테 나누어 주려고 오늘 모이라고 했어요. 좋지요?”
아이들이 모두 네네하고 소리쳐 대답했습니다. 이장이 다시 아이들한테 눈길을 돌리고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6. 공부하기 싫은 아이들
“내가 이 저금통을 나누어 주기 전에 한 가지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주고 싶은데 좋아요?”
아이들이 또 웃으며 네네 했습니다. 이장이 먼저 아이들 뒤에 앉아 지켜보고 있는 노인을 향해 말했습니다.
“어른님, 우리 마을 아이들한테 소개하겠습니다.”
아이들이 모두 고개를 돌려 보았습니다. 노인은 쑥스러워하는 몸짓으로 자리에서 일어섰습니다. 이장이 노인을 소개했습니다.
“여러분 뒤에 계신 저 어른께서는 우리 마을에 새로 오셨어요. 다 같이 박수로 환영해요. 박수!”
아이들이 모두 박수를 쳤습니다. 노인은 허리를 굽히며 인사를 받았습니다. 이장이 다시 말을 이었습니다.
“우리 마을에는 이제 뜻을 함께할 분들이 영농조합을 만들기로 했어요. 영농조합이 잘 되면 우리 마을도 살기 좋은 마을이 될 거예요.”
이때 한 아이가 손을 번쩍 들었습니다.
“이장님, 재미있는 이야기해 주신다고 했잖아요?”
이장이 사랑스런 눈으로 그 아이를 바라보고 대답했습니다.
“재미있는 이야기가 듣고 싶은가?”
그 아이가 엉뚱한 대답을 했습니다.
“빨리 이야기를 들어야 돼지저금통 주실 거 아닌가요?”
“그래,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지. 여러분 잠깐 눈을 감고 내 말에 귀를 기울여 보아요.”
아이들이 모두 눈을 감았습니다. 이장님이 물었습니다.
“공부하기 싫은 사람 손들어 봐요.”
상상외로 아이들이 모두 손을 들었습니다. 노인도 놀랍다는 듯 아이들을 바라보고 이장도 실망한 얼굴이 되었습니다.
“모두들 공부하기가 싫은가 보지요?”
아이들이 네네 하고 대답했습니다.
“알았어요. 공부하기 싫은 사람한테 좋은 이야기를 들려주겠어요. 눈을 감은 채 내가 하는 이야기를 끝까지 얌전하게 듣고 내가 묻는 말에 대답해 봐요. 알았지요?”
이장은 이런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하늘이 바다처럼 맑고 상쾌한 가을입니다.
상준이 길가의 꽃들에게 안녕안녕 하고 인사를 하며 팔짝팔짝 걸었습니다.
이때 바로 뒤에서 굵고 우렁우렁한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어디를 가느냐?”
상준이 고개를 돌려 바라보았습니다.
머리가 하얗고 긴 수염이 구름처럼 입술을 덮은 얼굴에 눈썹도 새하얀 할아버지였습니다. 할아버지는 사랑 가득한 눈으로 내려다보셨습니다.
“할아버지는 누구세요?”
“네가 할아버지라고 하지 않았느냐?”
“할아버지는 도사님이신가요?”
“도사라. 넌 그걸 어디서 들었느냐?”
“우리들 머릿속에 있는 도사는 바로 할아버지처럼 생겼거든요.”
“그럼 도사라고 부르거라. 도사라고 부르니 좀 쑥스럽구나, 허허허허.”
“도사 할아버지는 어디서 오셨어요?”
“네 뒤에서 왔다.”
“네?”
“난 네가 좋아.”
“할아버지가 저를 아세요?”
“알다마다. 네가 가장 싫어하는 것이 무엇이고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아는걸.”
“제가 가장 싫어하는 게 뭔데요?”
“공부.”
“그럼 가장 좋아하는 게 무엇인지도 아시겠네요?”
“좋아하는 건 나하고 똑같다, 허허허허.”
“뭔데요?”
“놀러 다니는 것.”
“맞았어요. 저는 공부하라는 엄마 소리만 들어도 소름이 돋아요.”
“그 대신에 놀다 오너라 할 때는 겨드랑이에 날개가 돋는 것 같지?”
“네, 할아버지도 그러셨어요?”
“그랬으니 딱 맞추는 거 아니냐?”
상준이는 잠깐 사이에 할아버지가 좋아졌어요. 할아버지가 빙긋이 웃으면서 물으셨어요.
“넌 무엇이 되고 싶으냐?”
7. 엄마, 나야 나
“비둘기가 되고 싶어요.”
“비둘기라고 했느냐?”
“네.”
“왜?”
“하늘을 마음대로 날아서 가고 싶은 데는 어디든지 갈 수 있잖아요. 골치 아픈 공부 같은 건 안 해도 되고요.”
“그렇지. 그럼 비둘기가 되거라.”
“정말이에요?”
“네 겨드랑이가 간질간질하지?”
정말 그랬습니다. 갑자기 겨드랑이 간질거리더니 날개가 돋았습니다. 할아버지가 물었습니다.
“어떠냐? 한 번 날아 보겠니?”
“네.”
상준이는 날개를 활짝 펴 보았습니다. 그리고 하늘을 향해 힘껏 저었습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비둘기가 되어 하늘을 날았습니다.
“야 신난다. 아주 높은 산들이 저 아래 내려다보이고 큰 집들이 성냥갑처럼 옹기종기 몰려 있다. 야아호 야호!”
아래서 할아버지가 올려다보시며 물었습니다.
“어떠냐? 기분이 좋지?”
“네 기분 짱이에요! 야아아 호오!”
상준이는 더 높이 더 멀리 날아올랐습니다. 올라갈수록 더 넓은 세상이 내려다보이고 가슴이 터질 듯이 기뻤습니다. 할아버지가 멀리서 소리쳤습니다.
“넌 이제 공부는 안 해도 되겠지?”
“네, 공부 같은 건 필요 없어요. 저는 비둘기가 된 것이 기뻐요.”
“알았다. 네 마음껏 돌아다니며 실컷 놀고 오너라.”
“감사합니다. 도사 할아버지.”
상준이는 바다가 보이는 들판을 지나 멀리 완도 섬으로 날아갔습니다. 섬 둘레에는 고깃배가 떠 있고 구름 위로는 비행기가 상준이보다 낮게 날아가고 있었습니다.
상준이는 구름보다 더 높이 날아올라 세상 구경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배가 고파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집에 와 내려다보니 집은 자기 집인데 엄마 아빠는 안 보이고 알 수 없는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뜰에서 콩을 까고 있었습니다. 콩을 보니 배가 더 고파졌습니다. 상준이 마당에 내려 콩 한 알을 집어 먹었습니다.
갑자기 할아버지가 긴 막대기로 상준이 날개를 때리며 소리쳤습니다.
“이런 새 새끼가 어디서 콩을 먹어?”
그 순간 날개가 부러져 날 수가 없었습니다. 땅바닥에서 파닥거리는 상준이를 할아버지가 붙잡고 목을 졸랐습니다.
“이런 못된 놈 여기가 어디라고 콩을 먹어?”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상준이 크게 소리쳤습니다.
“아빠 저예요.”
“뭐야? 네가 누굴 아빠라는 거야? 난 아들이 없어 이놈아.”
그 목소리는 아버지 목소리가 틀림없었습니다. 그러나 얼굴은 주름투성이라 아버지 얼굴이 아니었습니다. 곁에 있던 할머니도 달려들며 외쳤습니다.
“꽉 잡아요. 세상에서 말하는 새는 처음 봐요. 잡아서 장에 내다 팔면 좋겠어요.”
상준이는 더 놀라 외쳤습니다.
“엄마아! 나야 나!”
엄마는 화난 소리로 말했습니다.
“별꼴이야. 내가 왜 네 엄마냐? 내가 새냐?”
8. 생각이 바뀐 아이들
상준이는 우는 소리로 말했습니다.
“엄마! 나 몰라? 엄마 아들 상준이 몰라?”
“이 놈아, 내 아들 상준이는 공부하기 싫다고 집을 나가서 없어진 지가 이십 년이 넘었다. 별 미친 새도 다 보았지. 내가 상준이를 잊기 위해 몇 년을 가슴앓이를 했는데 네 놈이 나타나 내 아픈 가슴에 못질을 해? 못된 놈의 새 같으니!”
노인이 된 아버지가 막대기로 한 쪽 남은 날개마저 때려서 떨어뜨렸습니다.
상준이는 날개를 잃고 엉엉 울었습니다.
“엄마 아빠 잘못했어요. 용서해 주세요. 이제 공부도 하고 말도 잘 듣겠어요.”
그러나 노인이 된 엄마 아빠는 무서운 얼굴로 달려들어 몽둥이로 때리고 팔과 다리를 묶었습니다.
“엄마! 엄마 나야 나! 나라고! 상준이야!”
온 힘을 다해 발버둥을 치며 소리를 치고 있을 때 엄마의 사랑스런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상준아, 왜 그래? 응? 왜 그래?”
상준이 눈을 번쩍 떴습니다. 엄마가 걱정스럽게 들여다보며 물었습니다.
“상준아, 무서운 꿈을 꾸었니?”
늙어서 무섭게 보였던 엄마가 사랑이 가득한 눈으로 상준이 이마에 흐른 땀을 씻어주었습니다.
젊은 엄마를 본 상준이는 너무 기뻐서 그 품에 안기며 소리쳐 불렀습니다.
“엄마아!”
여기까지 이야기를 한 이장님이 아이들한테 물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눈을 감고 꿈을 꾸신 거예요. 그래도 공부하기 싫은 사람 손들어 봐요.”
아이들은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습니다. 이장님이 다시 물었습니다.
“지금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고 놀기만 하다가 20년 뒤에 엄마 아빠가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었을 때 여러분은 어떻게 효도를 하겠어요?”
그러면서 이장님은 이렇게 말을 마쳤습니다.
“이제부터 비둘기가 되지 않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눈을 떠 봐요”
아이들이 모두 눈을 반짝 떴습니다. 이장님이 아이들을 돌아보며 말했습니다.
“모두가 눈을 뜬 것은 비둘기 같은 아이가 안 되겠다는 약속이지요?”
아이들이 모두 네네 하고 대답했습니다. 이장님이 돼지저금통을 들고 말했습니다.
“오늘 우리 마을에 영농조합이 생기는 기념으로 여러분에게 돼지저금통을 하나씩 선물하려고 해요. 어른들은 단합하여 살기 좋은 우리 마을을 만들 거예요. 여러분도 이제부터 저축하는 사람이 되어 부모님을 도와드리도록 해요. 앞에서부터 이 저금통을 받아 가지고 돌아가기 바라요. 내가 기념으로 모두에게 똑같이 500원짜리 동전을 하나씩 넣어 주겠어요. 이렇게 시작했으니 여러분은 착하고 좋은 일을 하여 돈을 모아 이 저금통에다 가득히 채워 가지고 나한테 보여주기 바라요. 저금통이 가득히 찬 사람한테는 큰 상금을 더 넣어 줄 거예요. 알았지요?”
아이들은 또 네네 하고 앞자리에서부터 돼지저금통을 받았고 이장은 500원짜리 동전을 하나씩 넣어 주었습니다.
그렇게 하여 아이들이 다 돌아가고 정병철 노인과 이장만 남았습니다. 노인이 흡족한 얼굴로 말했습니다.
“이장님, 참 훌륭하시오. 어찌 그런 생각을 하시었소?”
9. 아이 낯간지러워
이장이 웃는 얼굴로 말했습니다.
“아이들과 친해지기 위해서지요.”
“아이들한테 들려준 동화는 어디서 배우셨소?”
“동화랄 것이 있나요? 제가 생각해서 한 소리였지요. 아이들한테 교육이 되는 이야기를 하자고 한 것인데 뜻대로 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만하면 아이들도 머리에 새겨둘 만한 이야기였소. 공부하기 싫어하던 아이들이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갔을 것이오.”
“그랬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앞으로도 아이들한테 그런 동화를 지어서 많이 들려주시면 좋겠소.”
“할 수만 있으면 해야겠지요. 장차 영농조합이 잘 되고 아이들하고 친해지면 이 강당을 이용하여 서울에서 유명한 동화작가나 동화구연가를 초청하여 좋은 동화를 들려주고 싶습니다.”
“좋은 생각이시오. 나도 생각한 바가 있으니 앞으로 아이들뿐 아니라 어른들도 모여 건설적인 이야기를 나누는 토론장을 만들어 봅시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노인 정병철은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습니다.
“나는 이 길로 고향으로 가야겠소.”
“이대로 가신다고요?”
“그렇소. 떠도는 몸이 무슨 절차가 있겠소. 바람처럼 가면 구름같이 뜻이 이루어지지 않겠소? 내가 빨리 다녀올 테니 영농조합 회원들과 장차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계획이나 잘 세워 놓으시오.”
“감사합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노인 정병철이 떠나고 난 다음 이장은 영농조합 회원을 모아놓고 말했습니다.
“이제 우리 네 사람은 뜻을 함께 하기로 했으니 어떤 일이 있어도 멋진 조합을 만들어 마을 사람들한테 손가락질 받지 않도록 합시다.”
한 회원이 발언을 했습니다.
“영농조합 이름은 무엇이 좋습니까?”
이장이 준비했던 대로 말했습니다.
“동화마을 영농조합이라고 하겠습니다. 어떻습니까?”
다른 회원이 말했습니다.
“이름이 너무 길지 않습니까?”
이장이 대답했습니다.
“좀 길다는 생각이 듭니다만 장차 우리 마을을 동화책에서 보는 것처럼 아름다운 마을을 만들고 싶어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또 다른 회원이 말했습니다.
“이장님 뜻이 그러하시다면 그렇게 하지요. 동화속의 마을처럼 만든다는 꿈을 갖는 것, 참 멋진 구상입니다.”
이장이 받아 말했습니다.
“이제부터 우리 조합원은 서로 부를 때 이름만 부르지 말고 성과 이름에다 이사라는 명칭을 붙였으면 합니다.”
한 사람이 웃으며 말했습니다.
“농사꾼이 갑자기 이사라는 명칭을 받는 것은 좋은 것 같으면서도 좀 낯간지러운 생각이 듭니다.”
이장이 말했습니다.
“명칭은 매우 중요합니다. 아무개야 하는 것과 조직을 해놓고 그 안에서 이사님 하는 것은 차이가 크고 의미가 있습니다. 이왕에 이사 명칭을 붙이기로 했으니 그 동안 강씨라고 하던 회원을 강이사라고 하고 박이사 서이사 이렇게 부르겠습니다.”
강씨, 박씨, 서씨는 자기들을 부르는 명칭인 것을 알고 씨익 웃었고 박씨가 웃으며 말했습니다.
“그럼 이장님도 이 이사가 아니십니까?”
10. 애타는 이장님
“그렇지요, 동네에서는 이장이지만 우리 조합에서는 이사지요. 앞으로 나는 조합결성에 대한 절차를 면사무소에 가서 확인하고 오겠습니다. 이사님들은 각자 어떻게 하면 멋진 조합이 될 수 있을까 구상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말하고 헤어진 이장은 면사무소와 농협 등을 돌아다니며 영농조합 설립 절차에 대하여 알아보았습니다. 조합원이 결성되고 목적을 세우면 된다는 대답을 듣고 왔습니다.
금방 다녀오겠다던 정병철 노인이 일주일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금방이라고 하였기 때문에 삼사일 안에 올 줄 알았는데 오시지 않는 것입니다. 이장은 불안한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노인이 정말 바람처럼 구름처럼 다니다가 나한테 바람만 잔뜩 넣어주고 가신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는데 또 일주일이 지나가도록 오시지도 않고 소식도 없었습니다. 조합원 가운데 박이사가 물었습니다.
“이장님, 아니 이 이사님, 그 노인은 어디를 가셨소?”
이장은 대답하기가 난처했습니다.
“글쎄요, 노인이 고향에 다녀오시겠다고 가셨는데 무슨 일이 있으신가 걱정이 됩니다.”
박이사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습니다.
“싱거운 노인 같소. 낯선 나그네가 우리 조합에 가입하겠다고 선뜻 달려든 것도 좀 수상하고…….”
이장이 차분히 말했습니다.
“노인한테 무슨 일만 없으면 돌아오실 것이오. 허튼 소리 할 분 같지는 않았소.”
박이사가 약간 불만스런 얼굴로 말했습니다.
“내일이면 우리 영농조합을 만들자고 한 것이 보름이 되는데 정식 발기총회도 못하고 있지 않나요.”
이장은 은근히 불안하고 속이 탔습니다. 그러나 태연하게 대답했습니다.
“그분은 꼭 오실 것이오. 며칠 더 기다려 봅시다.”
이장은 무엇인가 잡았다 놓친 것 같기도 하고 노인한테 속은 것 같기도 했지만 속을 열어 보일 수도 없어서 날마다 노인이 올 것이라고 믿고 찻길만 바라보았습니다.
저녁때가 되어도 노인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잠깐 만났어도 할아버지로 생각한 막내딸 지나가 물었습니다.
“아빠, 그 할아버지 언제 와?”
“글쎄다. 너도 할아버지 보고 싶으냐?”
“그 할아버지 진짜 우리 할아버지 했으면 좋겠어. 그런데 왜 안 와?”
이장도 그 노인이 아버지처럼 좋았습니다. 영농조합원이 안 되어도 좋으니 돌아만 오시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해가 지고 마지막 버스가 지나가도록 노인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다음날 아침입니다. 조합원 이사 강정규 씨가 와서 말했습니다.
“이장님은 그 노인을 기다리시는 것 같은데 오시지 않을 것 같소. 그래서 내가 장인환 씨를 설득하여 우리 조합원이 되어 달라고 하여 허락을 받았소. 그러면 조합 이사 정원이 차게 되니 오늘이라도 발기 총회를 하십시다.”
이장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마음은 노인이 오기를 기다리고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헛소리를 할 어른이 아니신데 갑자기 병이라도 나셨나? 오는 길을 잊으셨나. 아무튼 다시 한 번 얼굴이라도 보고 싶은데…….’
이때 장인환 씨가 나타났습니다. 그는 밝은 얼굴로 말했습니다.
“이장님, 저도 조합원이 되고 싶습니다. 받아 주시겠습니까?”
이장이 쾌히 대답했습니다.
“고마워요. 환영합니다.”
이렇게 되어 이사 5명이 구성되어 정식으로 영농조합 발기 잔치를 벌였습니다. 사무실은 이장님 댁 사랑방으로 하고 각기 자기가 무엇을 맡아서 할 것인가를 생각하여 다음 회의에서 내놓고 결정하기로 했습니다.
조합원 성원이 되고 첫 회의를 가진 다음 날 저녁 무렵입니다. 좀처럼 보기 힘든 택시 한 대가 이장 집 마당으로 들어왔습니다. 찻소리에 이장이 부리나케 달려 나갔습니다. 기다리던 노인이 차에서 내렸습니다. 이장은 너무 반가워서 눈물까지 났습니다.
“어른님, 어서 오십시오.”
노인이 건강한 모습으로 커다란 가방을 차에서 내리면서 말했습니다.
“이장님, 이것 좀 도와주시오.”
“그게 뭡니까?”
“차차 아시게 될 게요.”
택시가 돌아가고 사랑방에 노인과 이장이 큰 가방을 들고 들었습니다. 노인이 말했습니다.
“미안하지만 가방엔 먹을거리가 하나도 없소. 미안하오. 아이들도 많은데 맨손으로 와서…….”
이장은 노인을 다시 보게 된 것만도 좋아서 싱글벙글했습니다. 노인이 물었습니다.
“왜 그리 싱글벙글하시오?”
“어른님을 다시 뵈오니 기뻐서 그럽니다.”
“나를 그렇게 기다리셨소?”
“많이 기다렸습니다.”
“고맙소. 늙은이를 그렇게 생각해 주시니 고맙소.”
“식사는 어떻게?”
“읍내에서 하고 왔으니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되오.”
노인이 가방을 열면서 말했습니다.
“이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아시겠소?”
이장은 궁금했지만 겸손히 말했습니다.
“어른님께서 소중히 생각하시는 것이 들어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소. 내가 아주 귀하게 여기는 것들을 가득히 담아 왔소.”
“저는 하루 이틀 계시다 오실 줄 믿었는데 왜 이리 늦으셨습니까?”
“이 가방에 채울 것들을 구하느라고 여러 날이 걸렸다오. 늦게 와서 미안하오.”
“아닙니다. 오신 것만도 반갑고 기쁩니다.”
노인이 가방을 열면서 물었습니다.
“이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궁금하지 않소?”
11. 노인의 요구 조건
노인이 가방을 열다 말고 엉뚱한 조건을 내놓았습니다.
“내가 한 가지 이장한테 약속을 받고 싶소. 들어주시겠소?”
“무슨 말씀이신지요?”
“그 약속을 지켜주신다고 하면 이 가방을 열어 보일 것이고 안 들어준다면 도로 가지고 돌아가겠소.”
이장이 손을 저으며 말했습니다.
“아닙니다. 무슨 말씀이든지 다 들어드리겠습니다.”
“고맙소. 나하고 몇 가지 약속을 합시다.”
“네, 말씀하십시오.”
“이장님도 동네 사람도 내가 누군지 알려고 하지 마시오. 구름처럼 떠도는 늙은이라는 것 이상은 묻지 않겠다고 약속하시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내가 이장님이 생각하는 동화마을이 완전히 이루어질 때까지 필요한 자금은 넉넉히 준비해 왔으니 내가 내놓은 돈이라고 하지 말고 관청에서 지원받아 일을 한다고만 하시오. 내가 산을 잡히고 자금 마련을 넉넉히 해 왔소.”
“감사합니다. 그런데…….”
“그런데라니, 그렇게 못하겠다는 말이오?”
“아닙니다. 어른님의 신세를 너무 지는 것 같아서요.”
“신세랄 것 없어요. 이장님이 훌륭한 뜻을 가진 것을 내가 알았으니 내 산을 다 팔아서라도 자금을 댈 결심이오. 하니 돈 걱정은 말고 하고 싶은 대로 하시오. 아무한테도 내가 후원자라는 것을 알리면 안 되오. 그러면 나는 내 돈 다 가지고 떠나겠소.”
“알겠습니다.”
“가정에서도 누구 하나도 알아서는 안 되오. 다만 나는 오갈 데 없는 늙은이라 불쌍하여 이장이 거두어주는 것이라고 알게 하면 되오.”
이장은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어른님, 제가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니겠지요?”
“꿈이라니요. 아니오. 나는 날마다 산으로 들로 다니며 산천구경이나 하고 때 되면 밥이나 축내러 오겠소. 다만 이장님과 내가 밤마다 계획을 세우고 실행하겠다고 약속해 주시오. 그러면 이 가방을 열어 보이리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나는 영농조합에 가입하겠다고 했으니 그냥 연구이사라고 이름만 붙여 주시오.”
“알겠습니다.”
노인은 가방을 열었습니다.
12. 가방속의 비밀
가방 안에는 이상한 봉투가 가득했습니다.
“이 봉투가 다 씨앗이오. 한 120개쯤 되오.”
이장이 눈을 둥그레 뜨고 물었습니다.
“그게 다 무슨 씨앗입니까?”
“차차 설명해 드리리다. 이 새까만 봉지에 든 씨앗이 가장 비싼 것이오.”
“무슨 씨앗이기에 그리 비쌉니까?”
“산삼 씨앗이오. 이장께서 깊은 산을 가지고 있다고 하지 않았소?”
“예.”
“그 깊은 산속에 아무도 모르게 나하고 둘이만 들어가서 이 산삼씨앗을 심으면 되오.”
“산삼이 아무데서나 자랍니까?”
“그런 건 묻지 말고 내가 하자는 대로만 하시오. 삼은 뿌려놓고 5년 이상을 길러야 하오. 그 동안 아무도 산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여야 되오.”
“그럴 염려는 없습니다. 그 산은 깊고 옛날부터 호랑이가 나온다는 전설이 있어서 아무도 들어가지 않습니다. 더구나 지금은 땔나무도 하지 않아서 사람을 들여보내려면 돈을 주어도 갈 사람이 없습니다.”
“그럼 되었소. 언제든 나하고 둘이 가십시다. 그리고 이 봉투는 각종 채소와 약초 씨앗이오.”
“약초는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이제 날도 풀리고 일하기 좋은 때가 되었소. 이장이 내놓은 천 평짜리 밭에다 유리 온실을 지읍시다.”
이장이 놀라서 물었습니다.
“천 평이나 되는 유리 온실을 짓는다고요?”
“왜 그리 놀라시오. 그게 이장의 꿈이 아니었소?”
“그렇게 짓자면 자금이 이만저만 들지 않을 텐데요.”
“그런 염려는 하지 마시오. 무슨 계획을 하든지 자금은 내가 댄다고 했는데 벌써 잊으셨소?”
“아닙니다. 그렇지만…….”
“그 동안 관청에 다니며 조합 설립 조건은 알아보았을 거 아니오?”
“네. 알아보았습니다.”
“내일 다시 한 번 관청 담당 부서에 가서 조합결성의 의지를 굳게 밝히고 돌아오시오. 그리고 모레는 조합원을 모아 놓고 말하시오.”
“무슨 말을……?”
“알아보았더니 사업계획서만 잘 제출하면 자금은 얼마든지 지원을 받을 수 있다고 말이오. 그러면 조합원들이 좋아할 것이오. 다만 나하고 약속한 것만 잘 지키면 되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노인은 가방에 든 봉지를 늘어놓고 설명했습니다.
“이 약초는 봄에 심어 가을이면 수확을 할 수 있는 것이고 이것은 내년에 거둘 수 있고, 이것은 3년 뒤에 그 씨앗을 따서 수입을 올릴 수 있는 것이오. 급한 것은 이장님이 구상하신 유리 온실을 짓는 것이오.”
“그 일을 하자면 조합원으로는 부족할 것 같습니다.”
“염려 마시오. 내가 트랙터하고 포클레인을 준비했으니 이장은 마을 사람들한테 관청에서 지원해 주는 것으로 한다고만 해 두시오. 그 후에 유리 온실 건립은 내가 업자를 선정하여 한 달 안에 완성하기로 했소.”
이장은 정신이 없었습니다. 도깨비도 아닌 영감이 무슨 꿍꿍이속이 있어서 이러시는가 싶기도 하고 생각이 매우 복잡했습니다.
“어르신 저는 정신이 없습니다.”
“그러실 것이오. 그러나 나도 늙어서 부지런히 하지 않으면 시간이 없어요. 이장님의 꿈이자 나의 꿈을 이루기 위하여 나는 서둘 것이오. 내가 하는 대로 따르고 조합원들이 합심하여 돕게만 하시오. 유리 온실은 물론 뭐든지 이장님 계획하여 하는 것이라고만 하시오. 내가 이장님이 구상하시는 동화마을을 만들어 드리겠소.”
13. 나도 어려서는 공부하기 싫어했다
토요일이 돌아왔습니다. 이장이 안내방송을 했습니다.
“마을 어린이 여러분 오후 다섯 시에 학교 강당으로 모여주시기 바랍니다. 나올 때는 돼지저금통을 가지고 나오시기 바랍니다.”
시간이 되자 동네 아이들이 돼지저금통을 들고 모였습니다. 정병철 노인도 이장을 따라 강당으로 갔습니다. 이장님이 강단에 올라 아이들을 돌아보며 인사를 했습니다.
“여러분 그 동안 건강하고 재미있게 지냈나요?”
아이들은 지난번보다 활기차게 네네 하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리고 모두가 이장님이 무슨 말을 할까 기다렸습니다. 한 아이가 손을 번쩍 들고 말했습니다.
“이장님, 오늘도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 주실 건가요?”
이장이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내 이야기가 듣고 싶은가요? 여러분!”
아이들이 모두 네네 하고 대답했습니다. 이장님이 물었습니다.
“지난번 내 이야기를 듣고 집에서 전보다 더 열심히 공부했다고 생각하는 사람 손들어 봐요.”
아이들이 모두 손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한 아이가 손을 들지 않고 있었습니다. 이장이 그 아이한테 물었습니다.
“너는 왜 손을 안 들지? 공부 안 했나?”
그 아이가 엉뚱한 대답을 했습니다.
“저 애들이 모두 놀기만 하고 공부는 안 했으면서 손을 들어요. 저는 거짓말 하는 거 싫어요.”
“그래서 손을 안 들었구나.”
이장이 다른 아이들을 둘러보며 물었습니다.
“여러분 거짓말을 하면 안 돼요. 그 동안 집에서 부모님 말씀 잘 듣고 공부도 열심히 해야겠다고 생각은 했지만 마음대로 안 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 손들어 봐요.”
아이들이 또 모두 손을 들었습니다. 이장님이 아이들을 돌아보며 말했습니다.
“잘했어요. 마음으로는 그렇게 하고 싶은데 잘 안 된다는 것은 나도 경험해 보아서 알아요. 그래서 선생님한테 거짓말도 했지요. 내 말이 맞지요?”
아이들이 모두 눈과 입으로 웃으며 네네 하고 대답했습니다.
“여러분이 그런 것처럼 나도 여러분 나이 때는 공부하기 싫고 놀러 다니고만 싶었어요. 그런데 어른이 되고 보니 열심히 공부했던 친구들과 나는 하늘과 땅 차이로 달라졌어요. 놀기만 좋아하고 친구들을 위해 오늘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나 해 줄 테니 잘 들어 봐요.”
이장님은 또 이런 이야기를 지어서 아이들한테 들려주었습니다.
화원에서 장미가 빨갛고 예쁜 입술로 뽐냈어요.
“이 세상에 나보다 빨간 입술을 가진 꽃은 없을 거야.”
그 소리에 분꽃이 고개를 쳐들고 말했어요.
“흥! 해가 질 때쯤이면 너도 별수 없을 걸, 난 해가 지고 어두워질 때 화장을 한다!”
다른 꽃들도 지지 않고 화사하게 웃으며 자기 얼굴이 가장 예쁘다고 자랑했어요. 꽃들 이야기를 듣던 상희가 중얼거렸어요.
“너희들은 좋겠다. 공부도 안 하고 날마다 꽃밭에 둘러 앉아 시시덕거리며 놀기만 하니 얼마나 좋겠니.”
이때였어요. 언제 왔는지 모르게 보라색 긴 치마에 노랑 저고리 요정이 나타나 물었어요.
“상희 안녕?”
상희는 깜짝 놀랐습니다.
“누구신데 내 이름을 아세요?”
“내가 누구 같으냐?”
“솔직히 말해도 되나요?”
“그럼.”
“요정 같아요.”
“맞아. 난 꽃 요정이야.”
“꽃 요정이라고요?”
“그래, 난 꽃들의 소원을 들어주는 요정이란다.”
“사람들의 소원은 안 들어 주시나요?”
“가끔 들어주기도 하는데 왜?”
“저도 소원이 있어요.”
“뭔데?”
“저는 꽃이 되고 싶어요.”
“왜 꽃이 되고 싶지?”
“공부하기 싫어서요.”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네 나이 때는 부지런히 공부를 해야 하는 건데 하기 싫다고?”
“공부도 적당히 하라고 하면 좋은데 우리 엄마 아빠는 너무 하세요.”
“어떻게?”
“학교 갔다 오자마자 피아노 학원 가라, 수학학원 가라, 태권도 학원 가라 하시다가 집에 오면 가정교사가 기다리고 있어요. 저는 숨이 막혀 못 살겠어요. 꽃이 되면 얼마나 좋겠어요. 저는 사람이 싫어요.”
“그래서?”
“꽃이 되면 예쁘게 화장하고 친구들과 하루 종일 저렇게 이야기를 하면서 즐겁게 보낼 수 있잖아요?”
“정말 소원이냐?”
“네, 소원이에요.”
“좋아, 그럼 무슨 꽃이 되고 싶은지 말해 보아라.”
“여기서 가장 크고 빨갛고 노란 술이 달린 아름다운 꽃이 되고 싶어요.”
“알았다. 이 안으로 들어와 꽃 사이에 서 보아라.”
상희는 꽃 사이로 들어갔습니다.
“이렇게요?”
“그래 됐어. 넌 아주 예쁜 꽃이 된 거야.”
“이름은 무슨 꽃인가요?”
“상희꽃이란다.”
“제 이름이잖아요?”
14. 꽃요정을 만난 아이
“네 이름이 싫으냐?”
“좋아요.”
꽃 요정이 다른 꽃들을 향해 말했어요.
“여러분, 새 친구가 생겼어요. 인사하세요.”
놀란 듯 바라보고 있던 장미가 불만스럽게 말했어요.
“흥 키만 크면 단 줄 아나? 난 장미다.”
“난 상희꽃이야. 친하게 지내자.”
해가 질 무렵 화장을 곱게 하던 분꽃이 입을 삐죽 내밀었어요.
“피, 키만 크면 예쁜 줄 아나 보지?”
고개를 높이 빼고 잎사귀로 하늘에 부채질을 하던 해바라기가 화난 얼굴로 말했어요.
“너 지금 뭐라고 했어?”
“아니야 너 보고 한 말이 아니야. 새로 온 얘 보고 한 말이었어.”
“그래? 새로 온 너는 제법 키가 크구나. 입술이 장미보다 더 빨간데?”
“고마워요. 해바라기 아저씨.”
“내가 왜 아저씨냐? 난 이래봬도 여자란 말이야.”
“미안해요. 아줌마.”
“아줌마라고? 아직 시집도 안 간 나한테 아줌마?”
“미안해요.”
땅바닥에 납작 엎드려 빨간 꽃을 이고 있는 채송화가 깔깔거렸습니다.
“야 키다리 너 말 조심해야겠다. 호호호호.”
상희꽃은 무릎 아래를 내려다보았습니다.
“너나 조심해. 땅딸보야.”
“뭐라고?”
“너나 조심하라고. 쬐그만 게 까불어.”
이때 개미가 상희꽃 리를 타고 기어올랐습니다.
“아이 간지러워! 이게 뭐야, 개미 아냐?”
개미가 뾰족한 머리를 흔들면서 대답했습니다.
“개미다, 너 새로 온 모양인데 어디 꿀맛 좀 볼까?”
개미는 빨간 꽃을 비집고 들어가 노란 술을 더듬다가 고개를 저었습니다.
“뭐 이따위 꽃이 있어. 너도 꽃이냐?”
상희꽃은 얼굴이 빨개진 채 대답했어요.
“꽃이 아니면 뭐냐? 바람만 불어도 날아갈 것 같은 쪼그만 것이!”
“빨아먹을 것도 없는데 제가 꽃이라고 히히히 웃겼어.”
개미는 줄기를 타고 내려가다가 상희꽃을 꼭 물었습니다.
“아야! 왜 무는 거야?”
“다리 맛은 어떤가 궁금해서 물었다. 내일 보자.”
개미는 다른 꽃으로 갔습니다. 이때 어디서 왔는지 아주 노랑나비가 날아와 꽃밭을 둘러보면서 예쁘게 말했어요.
“오늘 예쁜 꽃이 하나 더 피었네.”
상희는 예쁘다는 말에 가슴이 벅차고 눈물까지 찔끔 나왔어요. 노랑나비가 반갑고 좋았어요.
“나비님 반가워요. 이리 오세요.”
“알았다. 새 꽃. 참 색깔도 예쁘다. 어디 한번 뽀뽀해 볼까?”
“아이 부끄럽게 뽀뽀는……”
상희는 고개를 돌렸습니다. 그러나 어느새 나비가 노란 꽃술에 얼굴을 묻고 긴 빨대 침을 꽉 꼽았습니다.
“아야!”
상희가 소리치자 나비는 날개를 활짝 펴고 날아오르며 놀렸습니다.
“보기에는 꽃인데 이게 무슨 꽃이 이래. 꿀 한 방울 없는 꽃도 꽃이냐. 에이 입맛만 버렸잖아.”
아름다운 나비는 다른 꽃으로 가서 꿀을 빨고 꽃과 재미있게 놀았습니다. 상희는 화도 나고 다른 꽃이 부러웠습니다. 이때 커다란 벌이 날아오며 인사를 했습니다.
“안녕! 빨간 꽃. 난 빨간 색을 좋아하거든!”
상희는 벌이 날아와 웃어주었지만 무서워서 고개를 돌렸습니다. 그러나 벌은 바람보다 빠르게 달려들어 노란 꽃술에 빨대 침을 깊이 박았습니다.
“아아야!”
상희가 소리치자 벌은 깜짝 놀라 꽃잎을 비집고 부웅 날며 소리쳤습니다.
“아이구 깜짝야! 뭐 이따위 꽃이 있어. 향기도 없고 꿀도 없고 맛이라곤 없잖아.”
이 모습을 둘러보던 다른 꽃들이 까르르 까르르 웃어댔습니다.
“호호호 어디서 온 떠돌이가 꽃이라고 까불어?”
“꽃이 되고 싶다고 했지? 넌 꽃이 아니야. 꿀도 없고 향기도 없는 게 꽃잎만 달면 꽃인 줄 아냐?”
곁에서 보던 해바라기가 불쌍하다는 듯 위로했습니다.
“괜찮다 좀 참거라. 네가 아직 임신을 하지 않아서 그런 거야.”
상희는 깜짝 놀랐습니다.
“임신이라고요?”
15. 임신을 해야지
“임신을 해야 꿀샘이 생기지.”
“그렇지만 임신이라는 말은 싫어요.”
이때 곁에 있던 나팔꽃이 긴 목을 내밀고 다가오더니 가느다란 덩굴손을 내밀어 상희 허리를 감았습니다. 그리고 뱅글뱅글 돌면서 위로 올라오며 방실거렸습니다.
“아유 이제야 하늘이 보이네. 어디서 굴러온 꽃이 멋대가리 없이 키만 커 가지고 그늘을 지어 하마터면 내가 햇빛을 받지 못해 죽을 뻔했잖아. 아! 이제 살았다.”
상희는 나팔꽃을 참 좋아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보니 아주 못된 꽃입니다. 허리를 감고 타오르더니 목을 조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꽃대를 더 높이 올려 입을 짝 벌리고 하하하고 웃어댑니다.
“나팔, 너무 시끄럽다. 조용히 좀 해.”
상희가 이렇게 말하자 곁에 있던 코스모스가 눈을 흘기며 비웃었습니다.
“제깐게 나팔꽃이 부르는 노래를 들을 줄이나 알까. 뭘 알아야지 무식한 것이.”
“뭐라고? 무식하다고?”
“그러니까 공부를 더 했어야 해. 너 학교 가기 싫고 공부하기 싫다고 꽃이 된 아이 아니니?”
“네가 그런 말을 왜 하니?”
“이래봬도 우리 꽃들은 떡잎이 날 때부터 꽃이 필 때까지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을 배웠단 말이야. 넌 그런 것도 안 배웠고 사람들이 하는 공부도 안 했잖아.”
이때 커다란 벌레가 줄기를 타고 엉금엉금 기어오르며 중얼거렸습니다.
“이 꽃나무는 처음 보지만 꽃도 화려하고 잎도 무성하여 먹을 만하겠는걸. 히히히 어디 한 입 먹어 보자.”
징그럽게 생긴 벌레는 상희의 줄기에 붙은 파란 잎을 갉아먹기 시작했습니다. 상희는 징그러워 눈을 감았습니다. 간지럽고 아프고 따가워서 소리쳤습니다.
“아야 아얏!”
벌레는 아주 맛있다고 싱글거리며 잎사귀 하나를 다 먹고 다른 잎사귀로 입을 돌렸습니다. 잠깐 사이에 잎사귀 두 개를 먹은 벌레는 기분이 좋아서 꽃잎 속으로 들어가 노란 술 위에서 쿨쿨 잠이 들었습니다.
해가 밝게 내리쬐는 오후가 되었습니다. 어디선가 사람들이 웅성거리더니 가까이 왔습니다. 한 사람이 상희를 발견하고 말했습니다.
“여기 좀 보십시오. 이상한 꽃이 피었습니다.”
사람들이 몰려와 들여다보며 신기하다고 고개를 갸웃거렸습니다.
“내 평생에 이런 꽃은 처음 봅니다. 꽃대가 실하고 꽃이 참 아름답습니다. 장미보다 예쁘고 백합보다 예쁘지 않습니까.”
“기후 변화가 심하다고 하더니 이런 꽃까지 나타나는군요. 이건 우리가 좋아할 일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잘 보세요. 이렇게 아름다운 꽃이 우리나라에는 일찍이 없었잖습니까.”
이 말에 상희는 얼마나 행복한지 춤을 추고 싶어서 꽃잎을 오므렸다가 쫙 펴 보였습니다. 그랬더니 사람들이 아우성입니다.
“이 꽃은 참 신기하고 볼만합니다. 꽃이 활짝 웃어 보이고 있잖습니까.”
“그래요, 정말 아름다운 꽃입니다. 방송국에 연락하여 오늘 저녁 텔레비전에 보여 줍시다.”
이 소리를 들은 꽃들은 상희를 부럽게 바라보았습니다. 꽃 중의 왕이라고 뽐내던 장미도 화가 나서 얼굴이 노래졌습니다. 꽃 속에서 쿨쿨 자고 있던 벌레가 일어나 밖으로 나오며 지껄였습니다.
“뭣들이 와서 남의 단잠을 깨우는 거야. 시끄러워서 잘 수가 없잖아.”
그것을 본 한 사람이 벌레를 가리키며 “아름다운 꽃에 벌레가 먼저 끼었습니다.”하자 다른 사람도 한 마디 했습니다.
“벌써 꽃잎을 갉아 먹었어요. 그냥 두었다가는 신기한 새 꽃이 피해를 입겠습니다.”
한 사람이 상희꽃 노란 술에 코를 대고 향기를 맡다가 얼굴을 찡그리며 소리쳤습니다.
16. 무슨 꽃이 이래
“아이구 구려!”
“뭐야? 구리다고?”
다른 사람이 코를 대 보다가 더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보기는 좋은데 냄새는 말이 아니야. 퉤퉤.”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꽃들이 와아하고 웃어댔습니다.
“뽐내더니 꼴좋다. 저 사람들 얼굴 좀 봐. 호호호호.”
상희는 부끄러워서 얼굴을 들 수가 없었습니다. 다른 꽃들이 볼까 봐 고개를 숙이고 있는데 한 사람이 살충제 약통을 메고 왔습니다.
“꽃에 벌레가 생기면 안 되지. 자, 꽃들아 잠깐만 고개를 숙이고 참거라. 벌레 잡는 약을 뿌려주마.”
갑자기 그 사람이 뿌린 약이 안개처럼 뿜어져 꽃밭에 내렸습니다. 꽃들은 숨을 멈추고 머리를 흔들었습니다. 소독약 냄새가 얼마나 매운지 어디로든 달아나고 싶었습니다.
그 뒤를 이어 한 사람이 낫을 들고 나타났습니다.
“이 꽃은 그냥 두면 안 됩니다. 이런 꽃이 있으면 토종 꽃들이 피해를 입습니다.”
이때 어른들 사이로 작은 아이가 나타나 말했습니다.
“아저씨, 예쁜 꽃을 꺾어가게 해 주세요.”
이 말에 호호대며 잎으로 탬버린을 치고 노래하던 꽃들이 바들바들 떨면서 어깨를 움츠렸습니다. 작은 아이는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마음에 드는 꽃을 찾았습니다. 목이 잘려나갈 위험에 빠진 꽃들은 목을 움츠리고 속삭였습니다.
“나를 꺾어 가면 어떡하지?”
“조용히 해, 아이가 이쪽으로 오고 있어.”
“사람들은 참 무서워. 보고만 가지 않고 꺾어가려고 하는 것이 무서워.”
그 아이가 상희꽃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습니다.
“여기 아주 예쁜 꽃이 있어요. 나 이 꽃 꺾어 갈래요.”
아이가 꺾으려고 손을 내밀었습니다. 상희는 무섭고 급하여 자기도 모르게 꽃요정을 불렀습니다.
“요정님 살려주세요. 저는 꽃이 싫어요. 사람이 될래요.”
꽃 요정이 나타났습니다.
“사람이 되면 공부를 해야 하는데 그래도 좋으냐?”
“네, 공부하겠어요. 엄마 아빠 말씀 무엇이든 다 잘 듣겠어요.”
이장님이 이야기를 마치고 물었습니다.
“예뿐 꽃이 되고 시은 사람 손 들어 봐요.”
아이들은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습니다. 이장님이 물었습니다.
“비둘기도 되기 싫고 꽃도 되기 싫지요?”
“네네, 네네.”
“이제부터 열심히 공부하며 절약하는 어린이가 되기 바라요. 오늘 돼지 저금통을 검사하겠어요.”
이장님은 아이들이 들고 나온 저금통을 하나하나 흔들어 보며 말했습니다.
17. 날개 달린 꿈
어느 날 정병철 노인이 혼자 마을과 부근 산을 돌아보고 돌아와 이장한테 말했습니다.
“내가 찾는 사람도 잘 만났지만 꿈에 그리던 동네와 산도 잘 만난 것 같소.”
이장이 물었습니다.
“무슨 말씀이신지요?”
“내가 저 언덕 위에 올라가 꿈을 꾸고 왔소.”
이장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습니다.
“언덕에서 주무셨다는 말씀입니까?”
“그렇소. 눈을 뜨고 꿈을 꾸다가 왔소.”
“저는 어른님이 하시는 말씀을 모르겠습니다.”
“들어보면 간단한 것이오. 들어 보시겠소?”
이장은 무슨 말이 나올까 매우 궁금했습니다.
“어른님 말씀하시지요. 듣고 싶습니다.”
“그럼 내가 꿈꾸던 언덕으로 올라갑시다.”
그리고 앞장서서 동네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으로 올라가 마을과 떨어져 앉은 뒷산을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저 뒷산이 이장님네 산이라고 했지요?”
“예.”
“저 큰 골짜기에다 방죽을 쌓읍시다.”
“네?”
“거기다 저수지를 만들자는 말이오.”
“…….”
“왜 대답이 없소?”
이장은 엉뚱한 제안에 선뜻 대답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노인의 말을 더 들어보기로 했습니다.
“아닙니다. 말씀하시지요.”
“저 큰 골짜기에 저수지를 만들고 거기서 이 동네까지 콘크리트 수로를 놓고 수로 맨 위 저쪽에는 수영장을 만들고 수영장 아래로는 유리온실을 짓고 그 온실을 지난 아래는 양어장을 만들고 양어장 아래고 강까지 가는 도랑 위에는 태양광 발전기를 설치하여 전기를 생산하여 마을에서 전기를 마음대로 쓸 수 있게 하고…….”
노인은 이장이 생각지도 못했던 꿈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장 이신욱은 영농조합이 성공을 한다면 자기 고향 동네를 그림 같은 동화마을로 만들고 싶다는 꿈을 꾼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말을 했습니다.
“저는 전에도 한번 말씀드렸지만 우리 동화마을을 이렇게 만들었으면 하는 꿈을 꾸어 보았습니다. 마을 한가운데에 커다란 코끼리 모양의 마을회관을 지어 그 안에서 회의도 하고 공연도 하고 아이들이 신나게 뛰놀 수 있는 놀이터도 만들고 싶습니다. 그리고 마을 전체를 돌아가면서는 외등을 하트 모양으로 설치하고 밤에 불이 환하게 들어오면 이 언덕에서 보면 온 동네가 커다란 하트 안에 안긴 것처럼 보이고 동네 집들은 개조하여 조합원들의 집은 각종 동물 형상의 집을 지어주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일반 마을 사람들 집은 빨갛고 파랗고 노란 지붕의 집들을 꽃밭같이 배열하여 지으면 낮에 보는 마을은 꽃밭 같기도 하고 동물원도 같은 동화속의 그림 같은 아름다운 동네를 만드는 것이지요.”
노인이 얼굴에 꽃그림을 그리고 좋아했습니다.
“이장, 아주 좋은 생각을 하시었소. 나는 대찬성이오. 거기다 하트 모양의 외등 설치를 하고 꼭지 지점에 빨간 십자가가 있는 교회를 하나 짓는다면 아주 멋진 그림이 될 것 같소.”
이장은 겸손히 말했습니다.
“그렇게 하면 금상첨화겠지요. 어른님, 꿈을 품으면 이루어진다고 했는데 과연 그런 꿈이 있는 한 언젠가는 이루어지지 않겠습니까?”
정병철 노인이 쾌히 대답했습니다.
“이루어지고말고. 이장께서 생각한 것이 내 생각과 같소. 이장이 말한 적이 있지 않소. 저기 초등학교를 사고 싶다고 말이오. 학교를 사서 토요일마다 동네 아이들이 자기 취미에 맞는 특별활동을 하게 하여 주고 이장님은 아이들한테 매주 교육적이면서 재미있는 동화를 들려주어 마을 아이들이 모두 동네를 사랑하고 공부도 제대로 하게 하면 좋을 것이라고 생각하오. 또 동화마을 학생 버스를 만들어 아이들의 등교를 시켜주면 더 좋을 것이오. 그러면 이 동네에서 나갔던 사람들이 돌아오지 않겠소? 그들이 돌아오면 영농조합에서 일하게 하고 아이들 교육도 편하게 하도록 도와주면 고향이 그리운 사람들이 모두 돌아올 것이오.”
이장은 꿈의 날개가 펼쳐지는 노인의 생각 쏙에 빠져들었습니다.
“그렇게만 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마을에 활기가 넘치겠지요.”
노인은 더 힘 있게 말했습니다.
“그렇게 되도록 합시다. 이장님의 꿈도 이루고 내 꿈도 이루면 그것이 행복이 아니겠소. 떠났던 마을 사람들이 돌아오고 아이들을 많이 낳으면 이 학교도 옛날처럼 정식 학교로 되돌릴 수 있을 것이오. 영농조합에서는 아이들 학비며 생필품도 무상으로 제공해 주고 학생복도 서울 아이들보다 더 예쁘게 해 입히면 아이들도 좋아하고 부모님들도 좋아할 것이오.”
이장은 너무 허황된 꿈을 꾸는 것 같아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렇게 하자면 큰돈이 들 텐데 어떻게 해결할 수 있겠습니까. 정부에서도 그렇게 큰 도움은 줄 수는 없을 것입니다. 어른님이나 제 꿈이나 다 일장춘몽이 아니겠습니까.”
“허허, 이장께서는 내가 한 말이 믿어지지 않아서 하는 소리지요?”
“죄송합니다만…….”
정병철 노인이 정색을 하고 물었습니다.
“이 늙은이가 턱도 없는 허황된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하시는 모양인데?”
“송구합니다. 그렇게 큰 자금을 무슨 수로…….”
“내가 말하지 않았소? 내 산을 다 팔아서라도 그런 문제는 해결한다고 한 말 말이오.”
이장은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큰 꿈은 안 꾸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노인이 빙긋이 웃으면서 물었습니다.
“내가 그 일을 해내면 이장은 어떻게 하겠소?”
18. 꿈을 꾸는 것 같아서
이장도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그렇게만 되면 어른님 앞에 큰절을 올리겠습니다.”
“큰절로 되겠소?”
“무엇이든지 말씀만 하시면 따르겠습니다.”
“하하하, 그럼 그때 가서 봅시다. 내가 이장과 나눈 이야기대로 공사를 벌여 보겠소.”
“감사합니다.”
정병철 노인은 마치 청년이 된 듯 활기차게 말했습니다.
“일단 저수지 공사를 위해 포클레인 몇 대가 오도록 하겠소. 그 공사를 맡은 건설사 팀은 내가 말한 대로 방죽을 쌓고 거기서부터 마을 앞 양어장 작업까지 하도록 할 것이오. 그 다음 작업은 이장이 구상한 대로 동화속의 그림 같은 마을을 만들어 보시오. 모든 자재와 공사 인원은 내가 해결할 테니 아무 걱정 마시고 멋진 동화마을을 꾸며 보시오”
“…….”
“왜 말이 없소? 내 말이 이상하시오?”
“아닙니다. 꿈을 꾸는 것 같아서 그렇습니다.”
하루아침에 잠깐 돌아보고 온 노인은 많은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장네 산 속에는 큰 바위가 몇 있고 바위틈에 큰 샘이 있었소. 거기서 맑은 물이 펑펑 솟아나고 있었는데 그 물이 다시 땅속으로 스며들어 마을 앞개울까지는 샘물이 별로 내려오지 않고 있었소. 그것도 아시오?”
“네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골짜기가 늘 질퍽하고 습해서 잡초가 성합니다.”
노인이 방죽 만드는 생각을 말했습니다.
“그 솟아오르는 지하수를 보고 나는 방죽을 생각했고 또 마을 수영장이며 양어장을 생각했소. 산 아래 바닥을 파서 둑을 쌓고 물을 가두면 아주 좋은 저수지가 될 것이오. 그 물이 흘러내리면 수영장이며 유리온실용 물이 넉넉할 것이고 그 물을 받아 양어장을 만들면 아주 그림같이 아름다운 마을이 될 것이오. 안 그렇소?”
“어른님 말씀대로 하면 가능할 것 같습니다.”
“됐소. 방죽 공사를 하고 물을 가두는 동안 콘크리트로 물길을 내고 그 물을 받아 수영장을 만듭시다. 그리고 수영장에 탈의실 겸 공동 목욕탕도 만들면 마을 사람들이 좋아할 것이오. 그리고 아이들은 여름 내내 물놀이를 즐겁게 하게 될 것이오.”
이 얼마나 아름다운 꿈입니까. 이장은 생각만 해도 가슴이 벅찼습니다.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고 일주일이 지난 어느 날 마을에 포클레인 몇 대가 들어오고 굉장한 소리를 내면서 이장네 산속으로 들어갔습니다.
이장은 마을 사람들과 조합원을 마을회관에 모이게 해 놓고 앞으로 벌어질 일에 대하여 설명했습니다.
“제가 우리 마을 영농조합을 만들기로 했다면서 각 기관에서 도와달라고 하였더니 어떤 분이 익명으로 지원하겠다고 하였답니다. 그래서 우리 마을 영농조합을 돕기로 결정이 났습니다. 우리 마을에 경사가 났습니다.”
참석한 사람들이 모두 박수를 쳤습니다. 그런데 배불뚝이 영감만은 벌레 씹은 얼굴이 되어 말했습니다.
“어떤 정신 나간 사람이 이런 산골짜기 동네에다 지원을 한다는 거야. 확실히 알아보고 하는 소린가 이장.”
이장이 대답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마을이 동화 속의 그림 같은 동네가 될 것입니다.”
조합에 가입하지 않은 사람으로 동네에서 유일하게 대학까지 나온 사람이 거만하게 말했습니다.
“이장, 뭘 제대로 알고 하는 소린가. 동네를 동화속의 그림같이 만들자면 한두 푼 가지고 되는 줄 아나? 괜히 농사 잘 짓고 사는 사람들 몇이 모여 조합이랍시고 한다지만 얼마나 가겠나. 공연히 바람만 넣지 말고 신중히 하게.”
이장이 겸손히 말했습니다.
“염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꿈을 가진 사람은 꿈을 이룰 수 있다는 말을 저는 믿습니다.”
배불뚝이 영감이 비웃었습니다.
“꿈만 꾸고 아무것도 못하는 사람이 한둘인 줄 아는가? 영농조합인가 뭔가 만들어 어쩌자는 것인가? 뭘 하겠다는 거야?”
이장은 두 사람이 부정적으로 말하는 바람에 잠깐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못 했습니다. 그때 조합에 가입하지 않은 사람이 일어서서 말했습니다.
“저는 조합에 가입하지는 않았지만 이장님이 하시는 일에 찬성입니다. 꿈을 가지고 뛰는 사람은 꿈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배불뚝이 영감이 말했습니다.
“자네는 조합에 가입도 하지 않았으면서 무슨 할 말이 있는가?”
19. 배불뚝이 영감의 심통
그 사람이 말했습니다.
“달리는 선수가 있으면 박수 치고 응원하는 사람도 있어야 하듯이 제가 직접 뛰지는 않아도 박수 치고 응원하는 사람처럼 이장이 하는 일을 도울 것입니다. 젊은 사람이 이렇게 일을 하고자 하는데 팔짱만 끼고 볼 수는 없지 않습니까.”
다른 사람들도 박수를 치면서 호응했습니다. 이장이 고마워서 허리를 숙이고 다음 말을 계속했습니다.
“오늘 저의 산 속으로 포클레인이 들어가는 것을 보셨을 것입니다. 한 달 안에 저의 산에다 저수지를 만들 계획입니다.”
배불뚝이 영감이 또 한 마디 했습니다.
“저수지를 만들어 놓고 뭘 하겠다는 건가? 논에 물을 대주겠다는 말인가?”
이장이 대답했습니다.
“저수지를 만들고 저수지 물이 우리 동네 앞으로 오도록 물길을 낼 것입니다.”
배불뚝이 영감이 봄마다 논에 물이 부족하여 농사에 지장이 많은 것을 생각하고 물었습니다.
“이장, 그러면 저수지 아래 논에 물을 대주겠다는 것인가?”
“예, 그렇게 될 것입니다.”
영감이 또 물었습니다.
“물 대주고 장사하려는 속셈은 아니고?”
이장이 한쪽 구석에 앉아 있는 정병철 노인을 힐끗 쳐다보고 나서 대답했습니다.
“아닙니다. 거기서 나오는 물은 우리 마을을 위해 쓰지만 물 값 같은 건 절대 받지 않습니다.”
배불뚝이 영감이 싫지 않은 얼굴로 말했습니다.
“그런 건 잘하는 거지. 암, 우리 동네 이장은 그 점이 좋단 말이야, 하하하하.”
이장이 다음 말을 계속했습니다.
“장차 우리 영농조합에서는 저수지 물을 받아 농사도 도우면서 윗말 앞에 수영장과 목욕탕을 짓고 그 아래 유리 온실을 지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때 대학 나온 마을 지식인이 말을 잘랐습니다.
“이장, 그만 하시게. 말로만 늘어놓고 실행하지 못하면 아니 한만 못하네. 무슨 계획이 있든지 말보다 행동으로 옮기게. 그렇게 하는 거 보아 가며 나도 이장 하는 일이 옳다고 생각되면 협조할 것일세.”
이 말에 이장이 용기를 얻었습니다. 마을에서는 학식과 학벌이 가장 높은 선배가 그렇게 말하는 것이 기뻤습니다.
“선배님, 감사합니다. 지금 말씀하신 대로 말보다 행동으로 대답해 드리겠습니다.”
이렇게 하여 마을 회관 모임은 끝났습니다. 모두가 돌아가고 나자 정병철 노인이 이장을 앞세우고 산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노인이 말했습니다.
“내가 포클레인 기술자들한테 설계도를 주었네. 공사는 그 사람들한테 맡기게. 앞으로 물이 가득히 차면 이 동네에서 실컷 쓰고도 물이 남을 것일세. 정치인은 치수 치산을 잘해야 하는 법. 물이 넘치는 샘을 두고 버려두었으니 해마다 동네는 가뭄을 겪어야 했던 것일세. 안 그런가?”
이장이 겸손히 대답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정병철 노인이 또 이런 말을 했습니다.
“물을 잘 다스리면 물이 사람을 도와주듯이 산도 잘 가꾸면 사람을 돕는 것일세. 산에 잡목만 가득하면 안 되네. 산세와 지질을 연구하여 거기에 맞는 식물을 가꾸면 논이나 밭보다 더 값진 소득을 볼 수 있지. 이제 한 달 뒤면 이 방죽에 물이 가득 찰 것이고 그 동안에 마을까지 물길을 만들어 놓아야 하네. 그리고 저 아래 보이는 언덕을 평지로 만들어 수영장 겸 마을 목욕탕을 만들면 좋을 것이야. 다만 물길을 어떻게 내는가가 좀 문제이긴 하네.”
“그게 무슨 문제이십니까?”
“저수지 둑에서 물받이 턱으로 내려오는 물을 마을까지 끌어오자면 이장네 산이 아닌 다른 사람 산자락을 파야 하는데 저 언덕이 보이는 산은 누구네 산인가?”
이장이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습니다.
“그게 좀 어렵겠습니다. 그 산은 동네에서 가장 부자로 사는 그 어른의 산입니다.”
“그 배불뚝이 영감 말인가?”
“그렇습니다.”
“당장 그 영감하고 합의를 보도록 하게. 산을 파고 시멘트 관을 묻어야 겨울에 물이 얼지 않고 흘러내릴 수 있게 되니 꼭 그렇게 해야 하겠네.”
이장은 배불뚝이 영감의 성질을 아는 터라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습니다.
“그 어른은 욕심도 많고 고집도 보통 분이 아니라 협조를 해 주실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그 영감의 허락을 받고 공사를 해야 하니까 한번 만나 보게.”
그렇게 하여 산에서 내려온 이장이 배불뚝이 영감을 찾아갔습니다.
“어르신께 드릴 말씀이 있어서 찾아 왔습니다.”
배불뚝이 영감이 배를 쑥 내밀고 물었습니다.
“뭔가?”
“저의 산에다 방죽을 만들고 나면 물길을 내야 하는데 그러자면 어르신네 산을…….”
영감이 갑자기 펄쩍 뛰었습니다.
“뭐라고? 내 산을 개기겠다고?”
“개기는 건 아니고…….”
“개기는 게 아니면 뭐여? 남의 산을 파고 거기다 도랑을 내겠다는 게 아닌가? 그건 절대 안 되네.”
“거기다 물길을 내야 산 밑으로 난 논에다 물도 대 줄 수가 있습니다.”
“언제 물이 없어서 농사 못 지었나? 방죽은 왜 쌓는다는 거여? 방죽 쌓고 물 막고 우리 농사 못 짓게 하겠다는 거 아닌가?”
“아닙니다. 물길로 낼 산은 몇 평 안 들어갑니다.”
“몇 평이 아니라 한 평도 못혀!”
20. 욕심을 채워주면 다 내준다
그 날 밤 이장이 사랑방에서 정병철 노인과 대책을 의논했습니다.
“어른님, 산을 못 건드리게 하는데 어떡하지요?”
“우리가 사용할 땅을 팔라고 해 보시게. 욕심 많은 사람은 욕심을 채워주면 무슨 짓이든 하는 법이니까.”
“거기서 물길 내는데 드는 땅은 백 평도 안 될 것입니다.”
“큰 것도 아니니 욕심껏 부르라고 하게. 과욕을 내고 채우고 나면 언젠가 과욕 부린 만큼 후회도 하는 법.”
다음 날 이장이 영감을 또 찾아갔습니다. 이장을 보자 영감이 반문했습니다.
“왜 또 왔는가?”
“물길 내는 데 들어가는 땅 만큼만 파시면 안 되겠습니까?”
영감은 화를 냈습니다.
“아예 산을 다 사가게. 그러면 팔지.”
“그렇게 큰 산을 어떻게 삽니까.”
“이 사람아, 그러니까 사라는 거야. 자네가 무슨 돈이 있어서 그 산을 다 사겠나.”
“그러지 말고 조금만 양보를 해 주십시오.”
“산을 다 산다면 모를까 말하지 말게.”
“그 산을 얼마를 드리면 되겠습니까?”
“이 근처 산들이 대개 평당 십만 원씩 하는 건 알지 않는가. 그 다섯 배를 준다면 팔까.”
“그렇게나 많이요?”
“필요한 사람은 소도 잡아먹는 법.”
“마을을 생각해서 양보도 좀 하시지요.”
“내가 언제 이 마을 사람들 덕 본 적 있는가. 다섯 배도 싼 줄 알아.”
“알겠습니다.”
그 날 밤 이장은 정병철 노인과 머리를 맞댔습니다. 이장이 말하기도 전에 정노인이 먼저 말했습니다.
“그 영감 뭐라던가?”
“산을 아주 사 가랍니다. 시가보다 다섯 배나 비싼 값으로 사라는 겁니다.”
“그런가? 그렇다면 달라는 대로 주게. 이장 재산이 느는 것 아닌가.”
“제가 무슨 힘이 있어서…….”
“허허 누가 자네 보고 돈 내라 하였는가. 돈 걱정은 하지 말고 일을 제대로 하라지 않던가.”
“예,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여 산을 비싸게 사들였습니다. 배불뚝이 영감은 산을 비싸게 팔았다고 좋아서 날마다 하하거리고 다니고 동네 사람들은 욕심쟁이 영감이라고 손가락질을 했습니다.
그러는 동안 방죽이 만들어지고 물이 차기 시작했습니다. 그와 동시에 산에다 콘크리트 관을 묻어 물길을 냈습니다. 물길이 만들어지자 넓은 수영장이 생기고 마을 목욕탕이 서고 목욕탕을 세우자 유리 온실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전 재산을 바친 영농조합원은 밤낮으로 조합 일을 도왔습니다.
그런가 하면 굴러들어온 정병철 노인은 아무 것도 하는 일 없이 산으로 들로 쏘다니다가 때가 되면 이장네 집으로 가서 한 끼도 거르지 않고 식사를 했습니다. 그것을 본 마을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이 이장한테 말했습니다.
“이보게 이장, 저런 늙은이 어디가 예쁘다고 삼시 끼니를 차려 드리나. 나 같으면 당장 내쫓았을 걸세.”
그러자 다른 사람도 한 마디 했습니다.
“밥값은 내고 얻어먹는 건가?”
조합원 가운데도 성질이 까다로운 사람이 불만을 했습니다.
“이장님, 저런 사람을 어쩌자고 집에 들이고 계십니까? 뭐라도 하는 것이 있어야지요. 우리 일을 돕는다든가 뭐라도 밥값은 해야 할 것 같은데 말입니다.”
이장이 침착하게 말했습니다.
“오갈 데 없는 노인이 바람처럼 구름처럼 떠돈다고 하면서 신세 좀 지자는데 어떻게 하겠는가.”
“제가 알아들을 만큼 한 마디 할까요?”
21. 뒷돈은 누가 대는가?
“뭐라고 하겠는가?”
“바람처럼 구름처럼 이 산 저산 돌아다니지 말고 밥값이나 좀 하라고 하면 알아듣지 않을까요.”
“다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니 그 어른에 대하여는 아무 말도 말아주게.”
마을 사람들이 모두 정병철 노인을 못 마땅하게 바라보았습니다. 날마다 산속으로 돌아다니는가 하면 허수아비처럼 들판에 서서 두리번거리다 이장 집 사랑채로 들어가면 얼굴도 안 내밀었습니다.
마을 한쪽에 천 평짜리 유리 온실이 세워지고 그 옆으로 천 평 물웅덩이가 생겼습니다. 그뿐 아니라 저수지에서 동네까지 물길을 낸 둑 위에는 태양광 발전기를 시설하여 전기가 동네 목욕탕 물을 데울 수 있도록 만들어졌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모습에 어안이 벙벙해 있고 조합원들은 날마다 내놓는 이장의 깜짝 아이디어에 감탄을 하면서 따랐습니다.
유리 온실 안에는 누구나 알 수 있는 채소를 심는가 하면 어디에 쓰이는지도 모를 약초가 심어지고 방죽 둑에는 오미자와 구기자 등 약에 쓰이는 나무들이 심어졌습니다.
또 하나 큰 변동은 논이며 밭과 산을 다 조합에 투자한 조합원들에게는 생활비 명목으로 월급이 주어지고 자녀들 학비까지 해결해 주었습니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의심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많은 돈이 어디서 누가 대는 것이냐?”
심지어는 간첩이 뒷돈을 대주는 건 아니냐? 는 등등 의심을 했지만 모든 것은 이장이 하는 것이니 구경이나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방죽에 물이 차고 흘러내리는 물이 수영장을 넘어 유리 온실 둘레로 설치한 물길을 따라 내려와 그 아래 파놓은 웅덩이를 채웠습니다.
이장은 정병철 노인의 말에 늘 따랐습니다. 노인이 말했습니다.
“물웅덩이는 깊이를 70센티로 평평하게 고르고 물이 차면 붕어, 우렁이, 미꾸라지 등 각종 민물고기를 넣어 기르게. 그리고 물고기가 좋아하는 식물을 물가에 돌아가며 심고 동네 아이들이 물에 빠질 염려가 있으니 둘레는 철망을 치게.”
“알겠습니다.”
영농조합원들은 하루 종일 유리 온실에서 일을 하고 이장이 내놓는 사업 계획대로 열심히 따르는 동안 가을이 되었습니다.
정병철 노인이 이장을 데리고 아무도 모르게 산 속에 산삼 씨를 뿌리던 날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 날씨가 좋으니 새로 산 산을 개간하세.”
“어떻게 개간을 합니까?”
“비탈이 완만한 산이라 쓸모가 있어. 당장 벌목을 하고 내가 그려주는 대로 작업을 하게.”
그러면서 종이에다 산비탈 개간 그림을 그려주었습니다. 이장은 노인의 말대로 새로 산 배불뚝이 영감네 산을 벌목했습니다. 그리고 포클레인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산기슭부터 비스듬히 파 올라 산꼭대기까지 계단식 밭을 만들었습니다.
배불뚝이 영감이 나와서 바라보면서 비웃었습니다.
“이장, 자네가 뭘 하자는 건가? 나무를 때서 밥해 먹던 시절에는 내가 한평생 나무를 해서 먹고 살았지만 지금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산을 저렇게 파서 뭘 하겠다는 건가? 묘 자리라도 만드는가?”
이장은 겸손히 대답했습니다.
“생각이 있어서 해 보는 것입니다.”
“내가 평생을 생각했지만 아무 쓸모없는 산이었어, 거기다 뭘 심겠는가? 나야 제 값 받고 팔았으니까 할 말은 없네만 영농조합인가 뭔가 하다가 망할 일은 하지 말게.”
“알겠습니다. 어르신.”
이장도 대답은 이렇게 했지만 산에다 뭘 하겠다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산에 계단식 밭이 이루어진 날 밤 정병철 노인이 가방을 뒤적이며 말했습니다.
“내일은 조합원과 일꾼들을 모아 이것을 개간한 산밭에다 심도록 하게.”
“이게 뭡니까?”
“별 것도 아니야, 백도라지와 삽주씨, 그리고 이것은 잔대, 그리고 이것은 더덕씨라네.”
“이런 것들을 어디서 구하셨습니까?”
“내가 이런 걸 구해 오느라고 늦었다고 하지 않았던가. 이것을 어디다 심을까 연구 중이었는데 마침 그 배불뚝이 영감이 산을 팔아서 잘 되었다 했지. 이것을 산에다 잘 가꾸면 삼 년 후에는 산값을 빼고도 남을 것일세. 이 씨앗을 내가 그려주는 대로 계단식 밭에다 심게.”
그러면서 또 종이에다 씨앗 심는 그림을 그려주었습니다. 이장은 아무리 생각해도 정병철 노인의 속을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무슨 일이든지 하자는 대로 따를 수밖에 없어 나무가 베어진 자리에 계단식 밭이 만들어지고 각종 씨앗을 심었습니다.
유리온실 안에는 각종 농산물이 무럭무럭 자랐습니다. 조합원들이 이장 앞에서 걱정을 했습니다.
“이 많은 채소들을 어떻게 하실 작정이십니까?”
“걱정 말게, 다 길이 있을 테니까.”
실은 이장도 걱정을 하면서 조합원 앞에서는 태연했습니다. 그 날 정병철 노인이 이장한테 서울로 가서 가장 큰 농산물 직판장 주인을 만나라고 했습니다. 농산물 직판장 주인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좋은 가격에 모든 농산물을 다 받아주겠다고 했습니다.
유리 온실에 가득하던 채소가 다 팔려나가고 나자 약초 만 남았습니다. 조합원들은 이장의 말대로 약초뿌리를 캐고 잎을 말리면서 물었습니다.
“이장님, 이게 다 무슨 약초인가요?”
22. 모르면서 아는 척
이장은 자기도 모르면서 아는 척을 했습니다.
“이것들은 다 중풍에 좋다는 것일세. 너무 캐묻지 말게.”
그리고 밤에 정병철 노인한테 물었습니다.
“어른님, 약초 작업이 끝났습니다. 그런데 그것들은 다 무슨 약초입니까?”
“약초마다 쓰임새가 다 다른데 어떻게 설명을 하겠는가. 다 되었다 하니 서울로 가서 이 사람을 만나고 오게.”
그러면서 만날 사람 주소와 이름을 적어 주었습니다. 이장은 다음날 그 주소를 찾아갔습니다.
또 재미있는 일은 그 사람이 어디다 쓴다는 말도 없이 다음 날 대형 트럭을 몰고 와서 몽땅 실어가면서 돈을 내놓았습니다. 영농조합은 아무 예산도 없이 시작하여 가을에는 억대의 수입이 생겼습니다. 그것이면 조합원이 일 년 내내 먹고도 남을 돈이었습니다. 그러나 누군지 모를 후원자가 생활비를 대주기 때문에 조합원은 열심히 일하는 즐거움만 누리면 되었습니다.
이 소문이 사방에 퍼지자 고향을 떠났던 사람들이 돌아와 영농조합의 일꾼으로 일하겠다는 사람이 생기고 동시에 그 가족이 모여들었습니다.
그렇게 한 해를 보낸 마을에는 떠났던 사람들이 돌아와 활기를 띠었고 마을에는 동화마을 학교 버스도 생겼습니다. 학생들이 읍내 학교를 편하게 다닐 수 있어서 모두 좋아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폐교 건물을 사들이고 거기서 마을 학생들이 소질에 따라 각종 취미 활동을 할 수 있도록 문을 열었습니다. 그런 소문이 나자 어디서 왔는지 모를 전문가들이 찾아와 특별 강의를 해주어 토요일은 날마다 잔칫날 같았습니다.
모든 학생들이 집에 있는 어느 날 이장님이 방송을 했습니다.
“학생들 참석할 때는 돼지저금통을 가지고 오시기 바랍니다.”
아이들은 이장님이 저금통을 가지고 모이라고 하면 기대와 호기심으로 신이 나서 모입니다. 아이들만 오는 게 아니라 젊은 아빠 엄마들도 따라 모였습니다.
아이들은 으레 이장님이 모이라고 하면 재미있는 동화를 들려주시고 또 저금통에도 뭘 넣어줄 것을 기대합니다.
학교 강당은 처음보다 많은 학생들과 학부형들이 모였습니다. 이장네서 하는 일 없이 밥만 얻어먹는다고 눈총을 받는 정병철 노인도 따라와 한쪽 귀퉁이에 앉았습니다.
이장이 아이들한테 물었습니다.
“여러분 오늘은 무엇을 해 드릴까요?”
학생들이 똑같이 대답했습니다.
“재미있는 동화요.”
“알았어요. 오늘은 장차 내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까 하는 생각을 해 보는 동화를 들려줄까 해요. 좋아요?”
“네네. 네네.”
아이들이 예쁜 입으로 똑같이 소리를 질러 대답했습니다. 이장님은 어디서 배워 온 것인지도 모르는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23. 운명의 세 갈래 길에서
학교에서 야외수업을 하는 날입니다.
선생님이 아이들을 데리고 높은 산 아래 잔디밭으로 갔습니다. 선생님이 산을 올려다보시며 말했습니다.
“저기 산으로 올라가는 길이 보이지요?”
아이들이 그쪽을 바라보며 한 목소리로 대답했습니다.
“네네, 네네.”
“길이 셋이 있어요. 잘 보고 선생님이 하는 말을 들어요. 오른쪽에는 아스팔트길이고 가운데는 흙길이고 왼쪽에는 자갈길이 보이지요?”
“네네, 네네.”
“저 길을 따라 산으로 올라가면 가장 높은 곳까지 갈 수 있어요. 그러면 그 위에서 어른들이 기다리고 있다가 저기 있는 가방에다 돌을 가득히 담아 주실 거예요. 각자 자기가 갖고 싶은 가방을 먼저 달려가서 가지고 오도록 해요.”
아이들 눈길이 한 곳으로 몰렸습니다. 거기에는 크고 작은 가방이 즐비하게 놓여 있었습니다.
선생님이 말했습니다.
“출발! 달려가서 자기 마음에 맞는 가방을 하나씩 가져오세요.”
아이들이 우르르 달려가 각기 작은 가방을 차지하려고 경쟁을 했습니다. 가장 작은 가방을 차지한 반장 똘똑이가 소리쳤습니다.
“내 가방이 가장 작다! 으흐흐흐흐,”
이때 가장 큰 가방을 질질 끌고 오는 아이가 있습니다. 반에서 굼벵이라는 별명을 가진 아이입니다. 무엇을 하든지 느리게 합니다. 그렇지만 끝까지 일을 해내는 아이입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그 아이를 바보바보 합니다.
“하하하, 저 굼벵이 바보 좀 봐. 거기다 돌을 가득히 담아주면 끌고 오지도 못할 걸 하하하하.”
아이들이 모두 굼벵이를 보고 웃으며 손가락질을 했습니다. 선생님이 말했습니다.
“자, 이제부터 저 세 길 가운데 어떤 길로 가고 싶은지 헤쳐 모여요. 아스팔트길로 가고 싶은 사람?”
아이들은 반이 넘는 스무 명이나 그 길로 가겠다고 몰려들었습니다.
“다음 흙길로 가고 싶은 사람 이쪽으로!”
남은 아이들이 그쪽으로 모였습니다. 그런데 굼벵이만 혼자 남았습니다. 선생님이 물었습니다.
“넌 어떤 길로 갈 거야?”
“저는 자갈길로 갈래요.”
“왜?”
“제가 안 가면 아무도 안 가잖아요.”
“그래도 괜찮아 잘 생각해서 가.”
아이들이 혼자 남은 굼벵이를 향해 똑같이 소리쳤습니다.
“바보 굼벵이는 할 수 없어. 하하하하.”
선생님은 아이들이 택한 길을 향해 출발신호를 보냈습니다. 아스팔트길로 가는 아이들은 야호야호 소리치며 신나게 우르르 몰려갔습니다.
이어서 다른 아이들도 흙길을 향해 와와 소리치며 달려갔습니다. 그러나 굼벵이는 야호 소리도 못 지르고 자갈길을 혼자 느릿느릿 걸어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자갈길은 험하여 제대로 걸을 수가 없었습니다. 굼벵이는 이리 비틀 저리 비틀 땀까지 흘리며 걸었습니다.
한편 아스팔트길을 달리는 아이들은 누가 먼저 올라가나 시합하자면서 숨이 가쁘게 달렸습니다. 얼마를 달리자 아스팔트길이 끝나고 흙길이 나왔습니다.
“야호! 흙길이다. 부드러운 흙길이야!”
아이들은 흙길을 서로 앞질러 가려고 달리기 경주를 했습니다.
한편 흙길로 가는 아이들은 멀리 자갈길이 기다리고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자갈길이다. 저것 봐 자갈길이야.”
흙길을 신나게 달리던 아이들이 자갈길을 만나자 실망하여 말했습니다.
“아스팔트길로 갔어야 하는 건데 잘못 했어. 너 때문이야. 네가 좋아서 따라왔더니 이게 뭐야. 이게 뭐냐구!”
24. 처음에는 좋았지만
아이들은 서로 아스팔트길로 가지 않은 것을 후회하며 투덜거렸습니다. 그러나 돌아갈 수도 없습니다. 자갈길은 너무 힘들었습니다. 아이들은 비틀비틀 쓰러지고 넘어지며 걸었습니다.
또 한편 자갈길로 간 굼벵이는 앞에 흙길이 나 있는 것을 보고 빙그레 웃었습니다.
“흙길이잖아. 아! 내가 좋아하는 흙길이다.”
굼벵이는 큰 가방을 질질 끌고 흙길을 걸어 올랐습니다. 자갈길에서 걷다가 흙길을 걸으니 날아갈 것만 같았습니다.
아스팔트길로 간 아이들은 흙길이 점점 진흙구덩이로 바뀌더니 발이 푹푹 빠지는 수렁이 되어 갔습니다.
“야, 수렁이다 수렁이야. 나 좀 잡아당겨 줘!”
“나도 빠졌는데 널 어떻게 도와 주냐?”
아이들이 흙투성이가 되어 서로 도와달라고 외치고 얼굴이고 옷은 온통 흙 범벅입니다. 이때 커다란 보따리를 든 한 어른이 다가와 물었습니다.
“힘드냐?”
“네네, 네네.”
“더 올라갈래 그만 내려갈래?”
“그만 내려갈래요.”
“알았다. 내려가고 싶은 사람은 자기 가방을 가지고 이리 오너라. 선물을 담아주마.”
그 아저씨는 돌아가겠다는 아이들 가방을 열고 십 원짜리 동전을 가득히 채워 주면서 말했습니다.
“이 녀석아 덩치는 황소만한 녀석이 가방은 이게 뭐냐? 하나 가득 담아도 얼마 못 들어가겠구나.”
그 아이보다 큰 가방을 가지고 온 아이들은 입이 벌어졌습니다.
“아저씨 감사합니다. 내가 가장 많이 벌었다, 야아호호!”
아이들은 올라올 때 더 큰 가방을 가지고 오지 못한 것을 후회하며 동전이 가득 담긴 가방을 메고 선생님이 기다리는 곳을 향해 걷기 시작했습니다.
또 한편 흙길이 끝나고 자갈길을 올라가는 아이들은 지쳐서 발을 제대로 떼지 못했습니다.
“아야! 아아 난 아파서 더 못 걷겠어. 아스팔트길로 간 아이들은 얼마나 좋을까. 굼벵이는 이런 길을 제대로 걷기나 할까. 굼벵이나 우리나 별수 없어 하하하.”
아이들은 더 이상 올라갈 힘을 잃고 모두 주저앉아 길을 잘못 택했다고 후회만 늘어놓았습니다.
이때 아저씨가 나타났습니다.
“녀석들아 시간 없어 빨리 걸어.”
“못 가겠어요.”
“그만 돌아가고 싶으냐?”
“네네, 네네.”
“좋아, 그럼 각자 가지고 온 가방을 벌려라. 내가 오백 원짜리 은전을 가득히 채워줄 테니 가지고 내려가거라.”
가장 작은 가방을 메고 온 반장 똘똑이가 말했습니다.
“내 가방이 가장 작지 않아? 이럴 줄 알았으면 굼벵이가 가지고 간 큰 가방을 가지고 왔어야 하는데 이게 뭐야. 겨우 이거야.”
아저씨는 아이들 가방을 모두 채워주고 말했습니다.
“이제 선생님이 계신 자리로 가거라.”
아이들은 더 큰 가방을 가지고 오지 못한 것을 후회하면서 내려왔습니다. 선생님이 계신 풀밭에는 아스팔트길로 간 아이들이 먼저 와 있었습니다. 똘똑이가 소리쳐 물었습니다.
“아스팔트로 간 너희들 벌써 왔냐?”
아스팔트길 대장이 대답했습니다.
“너 가방에 무엇이 들었냐?”
“오백 원짜리 은전이야. 너희들은?”
대장 얼굴이 일그러졌습니다. 그뿐 아니라 다른 아이들도 찡그린 얼굴로 똘똑이한테 물었습니다.
“다른 애들도 다 오백 원짜리를 받았다고?”
“그래 우리들은 다 똑같은데 가방이 작아서…….”
오백 원짜리를 받은 아이들은 아스팔트길로 간 아이들이 모두 십 원짜리 동전을 한 가방씩 메고 있는 것을 보고 비웃었습니다.
“히히 꼴좋다. 십 원짜리라고? 저 애들이 지고 있는 거 한데 모아도 내 가방만 못하잖아 으히히히히.”
그 소리에 동전을 메고 있는 아이들이 모두 가방을 땅에 팽개치듯 내려놓고 이쪽 아이들을 부러워했습니다.
똘똑이가 아이들을 돌아보며 말했습니다.
“야, 굼벵이는 어떻게 되었을까? 걔는 그 큰 가방에다 돌을 한 짐 지고 오겠지. 하하하 꼴좋겠다.”
이때 저쪽에서 굼벵이가 큰 가방을 어깨에 메고 끙끙거리며 오고 있었습니다. 아이들이 재미있다는 듯 비웃었습니다.
25. 고진감래 감진고래
“저 바보, 돌도 주는 대로 받아 메고 올 거야. 흐흐하하.”
선생님이 따라가 거들어 주며 아이들 앞으로 왔습니다. 그리고 굼벵이한테 물었습니다.
“넌 어떻게 된 거냐?”
굼벵이가 대답했습니다.
“처음에는 자갈길이라 가기가 많이 힘들었어요. 그런데 흙길이 나오고 흙길을 지나 올라가니 아스팔트길이 나왔어요. 신나게 산꼭대기까지 갔더니 모르는 아저씨가 다가와 수고했다고 하면서 만 원짜리 종이돈을 이렇게 채워주시면서 저기까지 들어다 주셨습니다.”
아이들은 갑자기 입을 벌리고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 저런 바보가 만 원짜리 돈을 저렇게 큰 가방에다 가득히 담아 가지고 오다니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선생님은 굼벵이 가방을 열고 만 원짜리 돈 다발을 들어 보이며 말했습니다.
“얘가 가지고 온 이 돈 한 다발이 얼마나 되는지 아는 사람?”
“…….”
아무도 대답을 못했습니다. 선생님이 설명했습니다.
“너희들이 가진 것을 다 모아도 이 한 다발보다 적다. 그러니 이 가방에 가득히 담긴 돈이 얼마나 되겠느냐?”
아이들은 기가 막혀 굼벵이를 부럽게 바라볼 뿐 아무도 말을 못했습니다. 선생님이 말했습니다.
“오늘 수업은 여러분을 위하여 어느 큰 회사 사장님이 준비해 주셨어요. 지금 각자 가방에 가진 돈은 모두 부모님께 갖다 드려요.”
반장 똘똑이가 말했습니다.
“저 굼벵이가 가진 것도 말입니까?”
“그래, 그리고 네가 가지고 있는 것도 네 것이야. 알았지?”
이때 저쪽에서 한 아저씨가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선생님과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아저씨를 소개했습니다.
“여기 오신 분은 큰 회사 사장님이시다. 인사드려라.”
아이들이 일제히 허리를 숙였습니다. 사장님이 나직하면서도 사랑이 가득한 눈으로 말했습니다.
“여러분 반가워요. 오늘 이 경험을 잊으시면 안 됩니다. 아셨지요? 나는 여러분이 굼벵이라고 하는 학생처럼 살아왔어요. 젊어서는 아주 힘든 일을 꾸준히 열심히 해서 큰 회사를 만들었지요. 젊어서 편한 것만 찾으면 나이 들어서는 고생을 하기 쉬워요. 고진감래(苦盡甘來)라는 말 들어 보셨어요?”
“네네.”
“굼벵이 학생, 그게 무슨 말인지 대답해 보아요.”
“고생을 견디고 해내면 꿀 같은 행복이 온다는 말입니다.”
“오. 참 잘했어요. 그럼 감진고래(甘盡苦來)라고 하면 그것은 무슨 뜻이 될까요?”
반장 똘똑이가 대답했습니다.
“단맛이 다 빠지면 쓴 맛만 남는다는 말입니다.”
“똘똑이 반장이라더니 과연 대답이 훌륭해요. 쉽고 즐거운 일만 하다가는 더 어려운 일이 있을 때 넘어지기 쉽다는 말로 알면 돼요. 고진감래를 뒤집어서 해 본 말인데 여러분은 모두 참 똑똑해요.”
선생님이 마지막으로 말했습니다.
“보기에 좋은 것만 찾지 말고 해보기도 전에 짐을 덜기 위해 작은 가방을 잡는 것도 조심해야 해요. 알았지요?”
선생님은 아이들을 데리고 학교로 갔습니다.
여기까지 이야기 마친 이장님이 물었습니다.
26. 누구보다 귀한 사람
“이야기를 듣고 무슨 생각을 했나요? 6학년 규리가 말해 봐요.”
규리가 일어서서 대답했습니다.
“편한 것만 좋아했다가는 후회할 일을 당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장님이 아주 사랑스러운 얼굴로 말했습니다.
“아주 훌륭한 생각을 했어요. 또 다른 사람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엉뚱하게도 3학년 태수가 손을 번쩍 들고 말했습니다.
“아무 친구나 사귀면 안 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다른 사람이 간다고 따라가면 독립심이 없어집니다.”
그 말에 아이들이 와아하고 박수를 쳤습니다. 이장님도 3학년밖에 안 된 학생이 하는 말을 듣고 감동했습니다.
“태수 학생은 생각을 매우 깊이 했어요. 무엇을 하든지 자기 소신대로 하는 습관도 들여야 해요.”
아이들이 여기저기서 자기 생각을 발표했습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정병철 노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만족한 웃음을 지었습니다.
이장님 이야기가 끝나고 아이들은 모두 운동장으로 나가 뛰기도 하고 시소를 타기도 했습니다. 함께 왔던 어른들도 돌아가면서 말했습니다.
“우리 동네 이장님은 못 하시는 게 뭘까. 시골이라도 지도자를 잘 만나야 덕을 본다니까.”
“그래요 이장님은 동화작가가 되고도 남을 분이에요. 어떻게 그런 이야기를 지어서 했을까요.”
어른들은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마지막까지 강당에 남은 정병철 노인이 이장을 향해 빙그레 웃으며 말을 건넸습니다.
“어디서 그런 생각을 하시었소? 벌써 세 번째 이야기로 아이들 마음을 사로잡지 않았소? 나도 재미있게 들었소. 이장은 정말 동화마을 이장님답소.”
“죄송합니다. 저는 아는 것이 별로 없고 배운 것도 없어서 그냥 마음에서 나오는 대로 지껄였을 뿐입니다.”
“아니오. 이 마을 아이들한테는 아주 훌륭한 교육 동화였소. 이제 우리 이야기를 합시다.”
“네 말씀하시지요.”
“가을도 깊어가고 있는데 유리 온실에 무엇을 심었으면 좋겠소?”
“겨울에 나지 않는 농산물을 심으면 어떨까요?”
“이장이 내 속을 들여다보고 하는 소리요?”
“네?”
“내 속에 있는 생각을 맞추어 보시오.”
“무슨 말씀이신지요?”
“겨울에 나지 않는 농산물이 무엇인지 말해 보란 말이오.”
“한겨울에 참외나 오이나 수박을 재배하여 시장에 내놓는다면…….”
정병철 노인이 파안대소했습니다.
“하하하, 이장이 내 속을 환히 들여다보고 하는 소리 같소.”
이장이 의아한 눈으로 물었습니다.
“어른님께서도 그런 생각을 하시었습니까?”
“그렇소. 거기다 수박이며 참외를 길러서 먼저 마을 사람한테 나누어 주고 남는 것은 백화점이나 마트에 내놓으면 좋은 값을 받을 것이오.”
이장은 마을 사람에게 먼저 나누어 먹게 하고 싶다고 하는 노인의 말씀에 고마움을 느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렇게 귀한 것을 마을 사람들이 먹는다는 건…….”
“귀한 것이니까 마을 사람들이 먼저 먹게 해 주자는 것이오. 우리한테 마을 사람보다 귀한 사람이 어디 있소?”
이장은 그만 감동을 받고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노인이 환하게 웃으며 말했습니다.
“우리는 생각이 같았으니 올 겨울에는 눈 속에서 참외도 수박도 실컷 먹어 봅시다.”
27. 당신은 누구십니까
두 사람의 뜻이 같다는 것을 안 다음부터 유리 온실에는 새로운 일이 시작되었습니다. 흙을 갈아엎고 밑거름을 충분히 준 다음 2백 평씩 나누어 수박, 오이, 참외, 가지, 파프리카를 심었습니다.
유리 온실에는 이렇게 작업이 끝났습니다. 그리고 마을 앞에 파놓은 넓은 구덩이에는 물이 고이기 시작했고 조합원이 구해다 넣은 작은 물고기들이 이리저리 몰려다니며 헤엄을 치기 시작했습니다.
동네 아이들과 어른들은 물고기 떼가 몰려다니며 헤엄치는 것을 보며 모두 기뻐했습니다.
하루는 이장이 조합원들과 서울로 가서 커다란 그물 두 개를 사왔습니다. 하나는 망이 촘촘하고 하나는 망이 성긴 것이었습니다. 이장이 그물 공사를 하며 말했습니다.
“앞으로 물이 가득 차면 넘치는 물에 물고기들이 떠내려 갈 것입니다. 그래서 그물망을 고운 것과 망 눈이 성긴 것을 이중으로 설치하려 합니다.”
박인석 이사가 말했습니다.
“이장님 생각도 참 철저하십니다. 그러니까 물받이 그물을 이중으로 설치하여 빠져나가지 못한 성긴 그물 고기는 잡아먹고 새어나간 작은 것들은 도로 잡아다 웅덩이에 넣자는 말씀이시지오?”
이장이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그래요, 바로 그렇게 할 생각이오.”
서광선 이사도 한 마디 했습니다.
“이장님 머리에는 무엇이 들었기에 그렇게 다양한 구상을 하시나요? 신기합니다.”
이장은 속으로 뜨끔했습니다. 자기가 하는 것처럼 하기는 하지만 실은 정병철 노인의 머리에서 나온 지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른 이사들보다도 속으로 날마다 놀라는 것이 이장이었습니다. 어디서 무엇을 하다 오신 어른인지 모르는 분이 날마다 한 가지씩 새로운 의견을 내시는 정병철 노인이 더 궁금했습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알려고 하지 말라고 한 말씀 때문에 물어보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 속을 모르는 영농조합 이사들은 이장을 신기하게 바라보고 존경하기까지 했습니다. 이장은 정병철 노인이 지시한 대로 말했습니다.
“앞으로 물이 차고 고기들이 자라면 큰 고기들이 달아나다 성긴 그물에 걸릴 것이오. 그러면 이쪽에 만들어 놓은 통로로 고기를 몰아 양동이에 담으면 될 것이고 고운 그물망에 걸린 고기들은 이쪽 통로에서 받아다 웅덩이에 다시 넣을 것이오.”
이때 장정규 이사가 새로운 제안을 했습니다.
“천 평이나 되는 웅덩인지 못인지 논인지 알 수 없는 이곳을 어떻게 불러야 할까요? 못입니까 웅덩이입니까?”
다른 조합원들도 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그래요, 이곳을 호수라고 해야 하나요? 웅덩이라고 불러야 할까요?”
이장이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습니다.
“저도 역시 여러분처럼 생각했습니다. 아직은 물이 다 차지 않아서 그렇지만 물이 가득히 차고 넘실거리면 이름이 붙여져야 할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문제는 오늘 밤새도록 생각했다가 내일 의견을 발표하겠습니다.”
이렇게 하루가 가고 이장은 밤에 정병철 노인과 머리를 맞댔습니다.
“어른님, 마을 앞에 해놓은 물고기 양식장을 어떻게 불러야 할까요?”
정병철 노인이 빙긋이 웃으면서 대답했습니다.
“이름은 이장님이 이미 지어 놓으셨잖소.”
“네?”
“지금 그러지 않았소? 물고기 양식장이라고 말이오. 거기다 동화마을 민물고기 양어장이라고 붙이면 될 것 같은데 어떻소?”
28. 돼지 코에 금고리 달기
이장이 반문했습니다.
“그것도 괜찮을 것 같은데 이름이 너무 길지 않습니까?”
“동화마을 민물고기 양어장이 길면 그냥 동화마을 양어장이라고 하시오.”
“네, 알겠습니다.”
정병철 노인이 또 새로운 계획을 말했습니다.
“양어장 바로 앞에 넓은 밭이 영농조합 장 이사가 내놓은 땅이라고 했지 않소?”
“그렇습니다.”
“겨울이 오기 전에 거기다 공사를 시작합시다. 그 땅이 몇 평이나 되오?”
“오백 평은 실히 될 것입니다.”
“됐소, 그만하면 종합회관을 지어도 좋을 것 같소. 내가 그려놓은 그림대로 공사를 시작합시다.”
정병철 노인이 건물 설계도를 내놓고 설명했습니다.
“여기다 커다란 코끼리 모양의 3층 건물을 세우는 것이 어떻겠소?
이장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입을 열었습니다.
“어른님, 여기다 그렇게 근 건물을 세워서 뭘 하시겠습니까? 시골 동네에는 안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그 생각부터 바꾸시오. 내가 생각하는 것은 그렇지 않소. 시골일수록 도시보다 잘해 놓아야 한다는 걸 아시오.”
“…….”
이장은 아무래도 이해가 안 되어 아무 말도 못했습니다. 그러나 노인은 마음에 있는 말을 계속했습니다.
“1층에는 아이들이 운동도 하고 각종 게임도 할 수 있는 시설을 만들어 놓고 한쪽에는 계단을 올라가면 코끼리 코를 통하여 밖으로 나갈 수 있는 미끄럼틀을 만드시오. 아이들이 거기서 미끄럼 통을 타고 밖으로 나가게 하는 것이오. 그리고 코끼리 콧구멍 앞에 꽃밭을 만들어 아이들이 꽃을 즐기게 하고 2층에는 강당을 만듭시다. 거기서 각종 회의도 하고 연극과 영화도 감상할 수 있는 시청각 시설을 만들고 삼층은 도서실을 만듭시다.”
이장은 아무래도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이런 시골에 누가 있어서 그런 시설을 이용할까 싶어서입니다. 그러나 노인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그리고 3층에는 세상에 있는 모든 아동도서를 구비하고 누구나 동화 동시를 읽고 감상할 수 있게 만들면 좋을 것이오. 아이들이 책과 친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어른들의 책임이오. 그렇게만 되면 이 마을에서 훌륭한 인물도 나올 것이오.”
이장은 노인이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적당히 대답했습니다.
“어른님의 생각이 그러하시다면 따르겠습니다.”
다음 날은 동네 공사를 하러 들어와 있는 포클레인이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터를 닦기 시작했습니다. 이장은 조합원들을 모아 놓고 앞으로 지어질 코끼리 빌딩 설계와 사용계획을 설명했습니다. 조합 이사들이 설명을 들으며 고개를 갸웃거렸습니다. 눈을 감도 있던 남 이사가 눈을 번쩍 뜨고 말했습니다.
“이장님, 아무래도 우리 동네에는 안 어울리는 공사를 하시는 것 같습니다. 이런 촌 동네에 누가 그렇게 큰 건물을 이용합니까.”
하 이사도 한마디 거들었습니다.
“아무래도 무리한 계획 같습니다. 우리 동네에다 그런 시설을 한다는 건 돼지 코에 금고리를 다는 것과 같습니다.”
이때 동네 배불뚝이 영감이 나타나 큰소리를 쳤습니다.
“이장, 동네를 아주 망칠 작정인가? 이게 다 무슨 짓거리야?”
29. 하트 태양 발전기
이장이 겸손히 대답했습니다.
“어르신 왜 이러십니까?”
“왜라니 몰라서 묻나? 우리 땅을 열 평이나 짓이겨 놓고 그게 할 소리야?”
이장은 그제야 영감네 땅 귀퉁이가 공사 터에 물린 것을 알았습니다.
“죄송합니다.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어떻게 하긴 다 사가든지 내 땅 흙을 찾아다 원상복구를 해 놓아야지.”
이장은 망설이다가 물었습니다.
“그 땅을 파신다면 얼마나 쳐야 하겠습니까?”
“다른 땅값의 열 배는 물어야 할 걸세.‘
“그렇게 많이요?”
“이 사람 보게. 그게 비싸단 말인가? 백배를 내려고 하다가 생각해서 열 배라고 했는데 그게 비싸?”
이장은 선뜻 대답을 못하고 굽실거렸습니다.
“알겠습니다.”
“알았으면 내일까지 땅값을 내든지 안 해 놓으면 손해변상을 시킬 테니까 그리 알아.”
영감은 휘적휘적 돌아갔습니다. 그 등 뒤에다 대고 조합원들이 한 마디씩 했습니다.
“죽으면 가져가지도 못할 재산 욕심은 왜 그리 많을까.”
“누가 아니래, 동네 사람 덕에 부자가 되어 가지고 땅 열 평을 열 배로 내라고? 도둑 심보.”
“나도 한번 저런 부자나 되어 보았으면 좋겠다.”
“나는 그런 부자는 되고 싶지 않네.”
이렇게 말하는 조합 이사들은 속으로 자기도 부자가 되어 보았으면 하고 부러웠습니다. 이장이 자리를 떠 공사장 끝으로 가자 다른 이사가 말을 바꾸었습니다.
“이장님은 참 이상한 분이야. 그렇게 좋은 머리를 가지고 이런 촌구석에서 썩다니!”
“누가 아니래, 그런데 그 집에 얹혀사는 늙은이는 도대체 누구야? 외삼촌도 아니고 먼 친척 같지도 않은데 날마다 먹고 산으로 들로 쏘다니기나 하고 말이야.”
“이장이 아니면 그런 늙은이한테 누가 밥을 먹여 주겠나. 이장은 어린애같이 좋은 사람이야.”
“그래서 아이들 모아 놓고 동화를 들려주지 않았남?”
하루가 가고 그 날 밤 이장은 정병철 노인과 머리를 맞댔습니다.
“어른님, 동네 영감이 자기네 땅을 건드렸다고 변상하라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대답은 간단히 돌아왔습니다.
“그 어른이 달라는 대로 주고 삽시다. 만약 그분이 붙은 땅을 더 판다고 하면 그것마저 사시오.”
“그렇게 말하면 그 땅도 열 배로 내랄 것입니다.”
“그럼 열 배로 사십시다.”
“그렇게 비싸게 사면 안 됩니다. 산도 바가지를 쓰고 비싸게 사지 않았습니까?”
“땅이든 사람이든 쓸모가 있으면 제값을 하는 법이오. 그 밭이 꽤 넓던데 사면 쓸모가 있을 것이오. 코끼리 회관에 그만한 땅은 더 있어도 되오.”
이장은 이해할 수가 없어서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도대체 이 어른이 누구신가? 돈이 얼마나 많으면 이러실까? 가지고 있다는 산을 다 팔아서 쓰실 작정인가?’
정병철 노인이 이장을 말끄러미 바라보며 물었습니다.
“왜? 걱정이 되시오?”
“아닙니다.”
“이장 얼굴에 그렇게 쓰여 있는데.”
“네?”
“아무 걱정 말아요. 내가 가진 산을 다 팔면 그런 땅 열배로 주고 사고도 남소. 돈 걱정은 말고 이 마을이 어떻게 하면 서울보다 더 살기 좋은 동화마을이 될까만 연구하시오.”
“저는 아무리 궁리를 해도 어른님의 계획을 흉내도 낼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 않소. 이장은 이제부터 남다른 머리를 쓰게 될 것이오.”
“과찬이십니다.”
“이제 코끼리 회관 건립에 대하여는 그만 생각합시다. 내가 업자들한테 모든 것을 맡겼으니 이장은 관리만 잘 하시오. 그리고 이제 새로운 일을 시작해야겠소.”
“또 말입니까?”
“또라니? 이제 시작인데 그렇게 묻소? 종합회관 건립과 내부 인테리어도 다 업자들이 할 것이오. 이장은 이제 마을을 둘러가며 커다란 울타리 치기나 구상하시오. 동네 중심의 맨 위에는 교회를 세우고 교회 십자가 탑을 중심으로 좌우로 커다란 하트 모양의 담을 둘러야 하오.”
“담을 쌓으신다고요?”
“흙담을 쌓는 것이 아니라 돌아가며 하트 모양의 태양열 발전기를 설치하자는 것이오. 둥그런 하트 중심 아래는 지금 짓고 있는 코끼리 종합회관 코끼리 꼬리에다 끝이 맞닿게 하면 좋을 것이오.”
이장은 상상만 해도 기가 찼습니다. 동화마을이 동화속의 마을보다 더 아름다울 것 같아서입니다.
“어른님, 그게 가능할까요?”
30. 교회는 안 다녀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
“가능하게 생각하면 가능하고 불가능하게 생각하면 불가능한 것이오. 동네 둘레에 태양열 발전기를 설치하고 돌아가며 외등을 달아 놓으면 십자가가 아래로 펼쳐지는 풍경이 하트 마을 같을 것이오. 그리고 거기서 나오는 전기로 마을 사람들이 사용하면 전기세도 물지 않고 좋지 않겠소?”
이장은 한 가지 의심이 나서 물었습니다.
“어른님은 기독교 신자신가요?”
“아니오. 그런데 왜 묻소?”
“십자가를 중심으로 하트 모양의 동화마을을 만드시자고 하니 여쭈어 본 겁니다.”
“내가 교회는 다니지 않지만 하나님은 믿소. 사람한테 실망할 때마다 하나님을 찾는 습관이 있소.”
“그러시군요.”
“이장은 교회에 안 다니시지요?”
“어떻게 그걸 아십니까?”
“교회에 가는 것을 보지 못했으니 알 수 있지 않소?”
“네, 저도 교회는 안 다닙니다만 하나님은 믿습니다.”
“하하하, 이장이 내 흉내를 내시는 게요?”
“아닙니다. 세상 믿을 수가 없으니 하나님이라도 믿어야지요.”
“맞는 말이오. 나는 예수는 안 믿었지만 전에 교회 종소리가 고향 산 너머 멀리서 은은히 들려올 때마다 이 나라 방방곡곡에 평화가 내리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소. 그런데 언제부턴가 종이 벙어리가 되고 나니 세상이 어두워지는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었소. 그래서 교회가 종을 울려야 세상이 밝아질 것이라 생각도 했고 십자가 빨간 등불이 하트 위에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소. 교회 종소리는 언제부터 다시 들리게 될 것 같소?”
“그 기대는 꿈같은 말씀입니다. 정치가 종을 벙어리로 만들었으니 정치가 되살려야 하지만 매우 어려울 것 같습니다.”
“교회도 안 다니는 사람끼리 이런 이야기는 그만 합시다. 이장은 뭐 좋은 생각리라도 한 것이 없소?”
“꿈이 있기는 한테…….”
“꿈이 있으면 현실로 이루어지는 법……. 그 꿈을 한번 들어봅시다.”
“예. 지금까지는 농사짓느라고 바쁘던 가정주부들이 시간 여유가 생긴 것 같습니다. 동화마을이 이루어지는 상황을 보아가며 부인들이 한 가지씩 일할 자리를 마련해 주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마을 출신으로 외지에 나가 있는 사람 중에 전기 기술자나 농기계 기술자, 교사로 정년퇴임한 분들이 우리 조합의 사업에 동조할 수 있도록 해 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있으면 일자리를 만들어 고향으로 돌아오게 합시다. 영농조합에 일자리를 만들고 모두가 돌아오게 하는 것은 좋은 생각이오.”
이장은 자기 생각을 알아주는 어른이 고마워 머리를 숙였습니다.
“또 좋은 계획이 있으시면 말씀해 주시지요.”
“좋은 생각이 있으면 바로 실행하는 것이 중요하오. 당장에 태양열 발전기 설치를 합시다.”
31. 욕심쟁이 말은 믿을 수가 없어
수백 년을 잠자듯 조용하던 마을에 큰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산속에는 저수지가 생기고 마을 한쪽으로는 공중목욕탕에 수영장, 그리고 유리 온실에는 농작물이 싱싱하게 자라고 양어장에는 물이 가득히 찼습니다.
이런 변화만 보아도 격세지감이 드는데 마을 앞 중심에는 3층 코끼리 종합회관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거기다 태양발전기 시설을 위한 공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정병철 노인은 한번 결정하면 일사천리로 일을 추진했습니다. 갑자기 온 마을이 시끄러워지자 동네에서 가장 부자로 목에 힘을 주고 거드름을 피우는 뚱보 영감이 눈을 부라리며 이장한테 호통을 쳤습니다.
“이장, 이게 다 뭐하는 짓인가? 온 동네가 시끄러워 살 수가 없지 않나?”
“어르신 당분간만 참으시면 좋아질 것입니다.”
“당분간이라니 겨울에도 시끄럽게 할 작정인가?”
“예, 겨울에도 해야 내년 여름에는…….”
“내년 여름까지 뭘 하겠다는 거야? 그건 그렇고 우리 집 마당을 자동차가 지나다니며 흙을 개개놓는데 그건 어떻게 변상하겠는가?”
“죄송합니다. 마당 끝을 좀 다치기는 했습니다만.”
“날마다 공사하는 차가 지나다니려면 사용세를 내든지 길 땅을 사가게.”
“어르신 그 정도는 마을을 위해 양해하여 주셔야 합니다.”
“못혀! 난 그렇게 못한다구!”
“차가 다니는 길을 파시겠습니까?”
“돈만 많이 준다면 팔지. 당장에 팔고말고. 그건 땅 값이 비싸.”
“얼마나 받으시겠습니까?”
“지난 번 밭 값의 다섯 배는 받아야지.”
“그건 너무 비쌉니다.”
“비싸면 차가 못 다니게 해! 그리고 듣자 하니 교회를 동네 언덕 위로 옮겨 짓겠다는데 그 말이 사실인가?”
“그렇습니다.”
“이런 기회에 다 쓰러져 가는 교회나 없애 버리지 왜 새로 지어준다는 건가? 자네가 교회도 안 다니면서 그게 할 짓인가?”
“교회는 안 다녀도 마을에 교회당이 하나 있는 것은 마을의 자랑입니다.”
“자랑할 게 없어서 교회 자랑을 해?”
“어르신, 이 마을에서 가장 높으신 분이…….”
그 말에 기분이 좋아진 영감이 약간 누그러졌습니다.
“길 값은 지난 번 밭 값만큼만 받겠네. 당장에 돈을 내게. 그리고 부탁이 있는데 올 여름에는 동네 젊은 것들이 영농조합인가 뭔가 한다고 우리 일을 안 해 주어서 뒷골 논은 농사를 망쳤어. 그건 어떻게 하겠는가? 이장이 왔다 갔다 하면서 누구를 꾀었는지 모르지만 갑자기 동네를 뒤집어 놓고 젊은 놈들이 모두 거기만 매달리게 해놓아 나는 농사를 지을 수가 없어. 장차 어쩌란 말인가. 내년 농사 책임지게.”
“정말이십니까?”
“암.”
“우리 협동조합이 농사를 지어드리면 얼마나 주시겠습니까?”
영감이 생각에 잠겼습니다. 금년처럼 일꾼을 못 구해 땅을 묵히면 안 되겠다 싶어서 억지로 대답했습니다.
“농사 지어 반씩 나누세.”
“알겠습니다. 조합원들하고 의논하여 결정하겠습니다.”
이렇게 말하고 돌아가 조합원들하고 의논한 결과 좋은 대답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영감님의 말을 믿을 수가 없다는 것이 이유였습니다. 그래서 이장은 밤에 정병철 노인과 의논을 했습니다.
“어른님, 동네 제일 부자 영감님이 자기네 마당을 차가 지나다닌다고 그 땅을 사라고 합니다. 그리고 자기 농사를 우리가 지어 준다면 수확의 반을 준답니다. 어떻게 할까요?”
정병철 노인의 대답은 시원했습니다.
“그렇게 하시오. 놀부 같은 영감이 동네에서 가장 부자라니 농토가 넓을 것 아니오?”
“예, 한 이만 평은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땅 만 평을 얻은 셈이 아니오?”
“그렇습니다.”
“그 집 마당 찻길은 달라는 대로 주겠다고 하고 농사도 짓는다고 하시오. 그렇지 않아도 트랙터를 사서 조합원들이 내놓은 땅을 평지직업을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했는데 잘 되었소. 봄이 되면 트랙터를 구해 오겠소. 그 대신 나가 사는 마을 사람 중에 트랙터 기술자가 있는지 알아보시오.”
“그렇지 않아도 외지로 나간 마을 사람들이 무슨 기술을 가졌는지 파악하는 중입니다.”
“잘하셨소. 지금 짓고 있는 코끼리 종합회관은 이렇게 꾸미시오.”
그러면서 내놓는 시설 설계도를 보고 이장은 놀랐습니다.
32. 할아버지 화난 거야?
정병철 노인이 설계도를 설명했습니다.
“코끼리 등처럼 둥그런 지붕 둘레 3층은 도서실이고 2층은 강당, 아래층에 돌아가면서 설치한 여러 칸은 이 앞쪽서부터 첫 칸은 생활용품 슈퍼, 그 옆은 야채 관리실, 그리고 옆은 병의원, 그 옆은 약국, 돌아서 이곳은 다용도실로 꾸몄네. 어떤가?”
“다 좋으신 것 같은데 병의원이나 약국이 좀 이상합니다. 이 산골에 그런 것이…….”
“이장은 생각을 바꾸어야겠소. 이런 산골이라고 환자가 없다는 법이 없지 않소?”
“그렇기는 한데 의사와 약사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 전문의들이 어떻게…….”
“그 문제는 걱정 말게. 내가 서울에 있는 유명한 의사 약사를 구해 놓겠네. 월요일은 내과의사, 화요일은 외과의사, 수요일은 치과의사. 목요일은 안과, 금요일은 물리치료사, 토요일은 침술사가 돌아가며 와서 병을 보아주면 종합병원이 아닌가. 그러면 안 되겠나?”
이장은 도저히 이해가 안 되어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렇게 훌륭한 분들이 와서 병을 보아준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렇겠지? 서울엔 기독교 신자들 가운데 농어촌 봉사를 지원하는 의사들이 많다네. 그 사람들이 와서 하루씩 봉사하게 하면 인근 동네에 소문이 날 것이고 소문 듣고 환자들이 모여들 것일세.”
“아무리 봉사를 좋아하는 분들이라 해도 마을에서 대접은 해야 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물론 대접을 해야지. 교통비는 내가 해결할 테니 마을에서는 좋은 농산물로 지은 점심 한 끼만 대접하면 될 것일세. 영농조합에서 생산한 좋은 것이 나면 그거나 좀 주면 좋을 것이고.”
“꿈같은 이야기이십니다.”
“그렇게 하고 난 다음에는 초등학교를 복교시키도록 신청하게. 그러면 이 부근 마을의 학생들이 모여 오고 이 마을에서 나가 있는 아이들도 돌아올 것일세. 학교가 정상으로 되면 학생들을 서울 사립학교 학생들보다 더 좋은 환경을 만들어 주고…… 어떤가?”
“말씀대로만 되면 서울이 부럽지 않겠습니다.”
“서울 사람들이 이 마을이 부러워서 이사 오겠다고 하는 말이 들려올 것일세.”
“어르신은 뉘신지 날이 갈수록 궁금해집니다.”
“그런 것은 알려고 하지 않기로 하지 않았나? 다시는 그런 생각은 마시게.”
이장은 머리를 숙였습니다.
“예, 알겠습니다.”
마을이 날마다 새로운 모습으로 바뀌자 동네 아이들도 호기심을 가지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구경하기 바빠졌습니다. 그런 가운데 배불뚝이 영감이 가장 귀여워하는 초등학교 2학년 손녀가 할아버지한테 엉뚱한 말을 했습니다.
“할아버지 창피해.”
이 말에 놀란 할아버지가 눈을 둥그렇게 뜨고 물었습니다.
“뭐라고? 이 할애비가 창피하다고?”
“응!”
“허허, 요 귀여운 것이 무엇이 창피하다는 건가?”
손녀가 엄지를 치켜 올려 보이며 물었습니다.
“할아버지가 우리 마을에서 가장 부자라면서?”
“그래, 부자다. 누가 뭐라더냐?”
“부자가 욕심 너무 많대.”
“누가? 누가 그런 쓸데없는 소리를 했다는 것이냐?”
“동네 어른들이.”
할아버지는 짐짓 노기 띤 얼굴로 물었습니다.
“누가 그런 소리를 했다는 거냐?”
“나도 몰라.”
“모른다면서 그게 무슨 소리야?”
“아이들이 나 보고 욕심쟁이 배불뚝이 손녀래.”
“뭐, 뭐라고 누가 그러더냐?”
손녀는 도리질을 쳤습니다.
“그런 말은 하면 안 돼.”
“부자가 왜 창피하냐? 가난한 게 창피하지.”
“부자가 부자답지 못하다니까 부끄럽지.”
할아버지는 정말 화난 얼굴로 물었습니다.
“뭐야?”
“할아버지가 길을 팔았다면서?”
“길을 팔다니, 누가 그랬다더냐?”
“강물을 팔아먹은 봉이 김선달보다 할아버지는 더 무서운 사람이래.”
할아버지는 얼굴이 빨개졌습니다.
“어떤 놈이 그 따위 소릴 했다는 거냐?”
손녀가 순진한 소리로 물었습니다.
“할아버지, 화난 거야?”
33. 이래도 호랑이 같으냐?
할아버지는 속으로 화가 났으면서도 겉으로는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흐흐흐, 할애비가 화난 것 같으냐?”
“할아버지 눈꼬리가 내려갔잖아?”
“눈꼬리가 내려가면 화난 것이냐?”
“할머니가 그러시는데 할아버지는 화가 나면 눈꼬리가 내려간다고 했어.”
배불뚝이 영감은 눈을 크게 뜨고 웃는 얼굴을 지었습니다.
“이래도 화가 난 것 같으냐?”
손녀가 까르르 웃었습니다.
“헤헤헤 할아버지는 호랑이 눈 같아 헤헤.”
“예끼, 호랑이 같다니. 이래도 호랑이 같으냐?”
할아버지는 다시 눈을 가늘게 뜨고 밑으로 깔면서 말했습니다.
“이렇게 하면 어떠냐?”
“곰 같아.”
“곰이라고?”
손녀는 대답 대신 엉뚱한 말을 했습니다.
“할아버지, 이제부터 우리 식구들은 모두 날아다녀야 할 거래.”
“뭐야? 우리가 새냐? 길을 두고 왜 날아다녀?”
“우리 마당 끝으로 사람들이 지나다닌다고 길을 팔았다면서?”
“그래, 팔았다. 내 땅 내 맘대로도 못하겠니?”
“앞으로는 할아버지가 동네 길에 못 다니게 한 대.”
“뭐야? 누가 그러더냐?”
“사람들이.”
“허허 동네 사람들이 못하는 소리가 없구나.”
손녀가 더 화날 소리를 했습니다.
“애들이 그러는데 할아버지가 동네 길을 가다가 누구네 마당을 밟고 지나가면 돈을 받기로 했대.”
할아버지는 정말 화가 났습니다.
“뭐야? 애들이 그런 소리를 했다는 거냐?”
손녀가 얄밉게 헤헤거리고 웃으면서 대답했습니다.
“아이들은 어른들이 하는 말을 듣고 한 소리야.”
배불뚝이 영감은 화가 나서 손녀 곁을 떠나 당장에 이장을 찾아갔습니다.
“이장 나 좀 보세.”
이장이 겸손히 대답했습니다.
“왜 그러십니까? 어르신.”
배불뚝이 영감이 화난 소리를 질렀습니다.
“왜라니! 내가 내 땅 팔았는데 어떤 작자가 그 따위 소릴 한 거여?”
이장은 어리둥절했습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동네 사람들이 우리 식구는 날아다니라고 했다는데 누가 그런 소릴 한 거여?”
“이상도 하십니다. 어르신네 가족이 새들도 아닌데 어떻게 날아다닌다는 겁니까?”
“그래서 하는 말이 아니겠나. 이장은 알 거 아닌가?”
이장은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가지 않아서 또 물었습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습니다.”
“내가 우리 마당에 차가 너무 많이 지나다니기 때문에 그러려면 땅을 사서 길을 내라고 하였지 않나? 그랬다고 우리 식구들은 동네 길을 날아다니라고 했다면서?”
“그럴 리가 없습니다. 누가 그런 야박한 소리를 하겠습니까. 마당 넓은 집을 동네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것은 보통인데 누가 지나간다고 날아서 지나가라고 하겠습니까.”
“그렇지? 내가 언제 우리 마당 밟고 지나간다고 날아서 지나가라고 했소?”
이장은 영감의 속을 다 들여다보고 대답했습니다.
“자기네 땅 밟고 지나간다고 뭐라는 사람은 사람이 아니지요.”
영감은 자기 생각은 하지 않고 이장의 말에 기분이 좋아져서 지껄였습니다.
“그렇지? 누가 그렇게 야박한 소리를 하겠나. 요새 동네가 영농조합인가 뭔가 한다고 시끄럽게 하지만 이장 얼굴 보아서 참아 주는 줄이나 아시게. 또 태양전기 발전긴가 뭔가를 세운다고 우리 뒷동산 밭을 또 개갤 모양인데 우리 땅은 한 평도 건드리지 말게. 알겠나?”
“땅을 좀 건드린다면 그만한 보상은 전기를 사용할 때 몇 배로 갚아드릴 것입니다.”
“몇 배도 필요 없어. 난 그런 전기는 안 쓸 테니 우리 땅은 건드리지 말게.”
“잘 알겠습니다. 어르신네 땅은 한 평도 안 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이렇게 하여 태양열 발전기 시설은 영감네 땅이 안 들어가도록 설계를 바꾸었습니다. 그리고 겨울이 지나가고 봄이 되었을 때 태양열 전기발전이 시작되었습니다. 태양전기 발전기가 운전을 시작하던 날 군수를 비롯한 지역 유지들이 모여 축하를 했습니다. 그러나 부자 영감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군수가 축하객 앞에서 말했습니다.
“앞으로 이 동네는 자가 발전을 하게 되어 일반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도 되겠습니다. 곧 전기를 끊겠습니다.”
34. 그림보다 아름다운 설계
날마다 태양열로 발전된 전기는 충전소에 모여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집집마다 전기 시설이 아직 안 되어 전기는 아무도 쓸 수가 없었습니다.
이장과 정병철 노인이 머리를 맞대고 대책을 의논했습니다.
“어른님, 전기 시설을 너무 일찍 한 것 같습니다.”
“그렇지도 않아. 지금 해 놓았으니 건전지에 전기를 충분히 충전시켜 놓고 봄에 집을 모두 한꺼번에 건축하면서 전기 시설을 하면 될 걸세.”
“동네 집을 한꺼번에 다 지어주신다고요?”
“그래야지. 거저 지어 준다는데 싫다고 할 사람이 있을까? 지금은 집집마다 울타리만 넓고 사람 사는 공간은 좁지 않은가. 모든 집을 울타리 없이 짓되 거주 공간이 넓게 집을 지어 주는 것일세. 그리고 전기와 수도 시설도 해주고.”
“집을 정말 거저 지어주신다고요?”
“그렇다니까, 못 믿겠나? 집을 한꺼번에 지으면 건축비도 덜 들고 경제적일 것일세. 집집마다 공짜 전기가 들어오고 우물물 대신 도시처럼 수돗물이 나오게 해 주면 얼마나 좋겠는가. 모든 집이 변소를 따로 가지고 있는 것도 새 집을 지으면 화장실이 집안으로 들어가 살기에 편리하게 해 주는 것이지.”
이장은 그 공사를 하자면 얼마나 많은 돈이 들어갈 것인가를 생각하고 말했습니다.
“어른님, 그런 큰 공사를 하자면 큰돈이 들어가야 할 것 같은데…….”
“허허 이 사람, 무슨 일을 하든지 이상적으로만 한다면 돈 들어가는 걱정은 말라고 했잖은가.”
“그렇기는 합니다만.”
정병철 노인은 또 가방에서 계획서가 그려 있는 설계도를 꺼냈습니다.
“자네가 말했잖은가. 동네를 동화 속에 나오는 동네보다 더 아름답게 꾸미고 싶다고.”
이장은 겸손히 대답했습니다.
“그랬습니다만.”
“나는 자네를 처음 만났을 때 내 생각과 같은 꿈을 꾼다고 생각했네. 그래서 이 마을을 돌아보고 구상을 해서 서울 유명한 건축설계사를 만나 모든 것을 의논했고 사업계획을 세웠네. 지 설계도를 보게.”
이장은 설계도를 들여다보면서 어리둥절했습니다. 정병철 노인인 설계도를 가리키며 설명했습니다.
“지금 지어 있는 코끼리 회관 옆으로 2층짜리 거북이 집을 지을 걸세. 이 집에는 이장이 좋다고 하면 이장이 살면 되고 싫다면 이쪽 끝에 있는 호랑이 집으로 가고, 그것도 싫으면 저쪽 끝에 있는 사자 집으로 가게. 그것도 싫으면 동제 가운데 있는 돼지네 집으로 가게. 동물 형상으로 지은 다섯 채의 집은 모두 2층에 내부 구조가 똑같고 크기도 똑같으니 그리 알게.”
이장은 온 동네가 커다란 동물원같이 보였습니다. 그리고 교회 아래 있는 독수리 형상의 집을 가리키며 물었습니다.
“어른님, 이것도 집입니까?”
“집이지. 거기도 2층 구조로 되어 있고 다른 집과 좀 다르다면 양 날개 속에 전자 조종실이 있지.”
“그건 무얼 하는 곳입니까?”
“두고 보면 알게 될 걸세. 이장은 어느 집에 살고 싶은가? 다섯 개의 동물 형상의 집은 영농조합 이사들이 살 집인데 어떤가?”
이장은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도대체 이 노인이 누구기에 나라에서 못할 엉뚱한 상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노인은 또 다른 집들을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각 가정에서 반대만 하지 않는다면 집은 규모가 똑같게 해주고 지붕을 빨간 지붕, 파란 지붕, 노란지붕으로 배열하여 꽃밭같이 만들고 벽들도 가지가지 색으로 칠하고 거기에 맞는 벽화를 그리는 것일세.”
“벽화까지 그립니까?”
“그래야 마을이 그림보다 아름다울 것이 아닌가. 상상해 보게. 온 마을 지붕과 벽이 울긋불긋하고 사이사이 나무와 정원이 있고 길에는 꽃밭을 만들어 봄부터 가을까지 꽃이 피어 길을 밝히고 동네 앞에는 호수가 있으니 얼마나 아름답겠는가.”
“어른님, 상상만 해도 가슴이 벅찹니다.”
“다만 지금 동네 사람 가운데 이 설계대로 하는 것이 싫다는 사람은 억지로 집을 지어 줄 필요가 없네. 담을 허물고 집을 허물고 동네 길을 다시 시멘트 길로 만들자면 반대하는 사람도 있을 것일세. 그런 집은 있는 그대로 두면 될 것이니 강제는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일세.”
“그렇게 된다면 반대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면 다행이고. 자, 이 설계도대로 봄이 되면 공사가 시작될 것일세. 영농조합원은 지금 벌여놓은 작물 재배만 잘 하면 될 것일세. 이 설계도를 이해했으면 이제 마을 사람들한테 앞으로의 계획을 설명하고 동의를 받도록 하게.”
35. 부자의 거드름
다음날 이장은 동네 사람들을 마을회관으로 모았습니다. 동네에 큰 변화가 일어나고 있으므로 한 사람도 빠지지 않고 다 모였습니다. 이장이 입을 열었습니다.
“여러분, 요새 많이 시끄러우셨지요?”
마을 사람들은 모두가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였을 뿐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배불뚝이 영감이 큰소리로 한 마디 했습니다.
“이장, 시끄러운 것을 알고도 날마다 설쳐대는가?”
이장이 침착하게 대답했습니다.
“예,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앞으로 우리가 더욱 살기 좋은 마을을 만들기 위해 하는 일이니 이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배불뚝이 영감이 기가 등등한 큰소리로 말했습니다.
“언제 우리가 굶고 살았나? 이보다 더 잘 살면 어떻게 산다는 말인가?”
이때 동네에서 가장 많이 배우고 지식이 높은 키다리 학자가 대답했습니다.
“영감님, 이장이 하는 일은 우리가 이해하고 도와주어야 합니다.”
배불뚝이 영감이 버럭 화를 냈습니다.
“뭣이어? 내가 이장한테 말했는데 왜 자네가 대답을 하는가?”
키다리 학자가 영감은 무시하고 점잖게 말했습니다.
“이장님, 우리가 말싸움이나 하자고 모인 것은 아닐 것입니다. 긴히 하실 말씀을 해 보시오.”
이장이 대답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장차 우리 동화마을을 우리나라에서는 어디서도 볼 수 없는 아름다운 동네로 만들 계획입니다. 지금 마을 앞 중심에 지은 코끼리회관을 기점으로 온 동네 길을 쫙 펴놓은 부챗살 꼴로 도로를 내고 돌아가면서 둥그런 골목길을 놓고 길을 따라 집을 지을 계획입니다.”
이때 1반 반장이 물었습니다.
“이장님, 길을 그렇게 내놓자면 지금 있는 집들을 전부 헐어야 하고 집을 짓자면 한두 푼이 드는 것도 아닌데 그게 가능하겠습니까?”
이장이 한쪽 구석에 앉아 담담히 바라보는 정병철 노인을 힐끗 스쳐보고 나서 대답했습니다.
“집을 헐고 짓는 것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다 우리 영농조합에서 해결하겠습니다. 다만 여러분한테 오늘 모이시라고 한 것은 저의 의견에 동의를 해 주십사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계획이 좋아도 주민이 허락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모든 집은 규모가 같게 짓되 집집마다 둘러 있는 담을 허물고 도로변에는 화단을 만들 것입니다. 오늘 구두로 약속을 받고자 합니다. 저의 제안에 동의하시는 분은 손을 들어 주십시오.”
다들 손을 들었는데 배불뚝이 영감과 키다리 학자만은 손을 들지 않았습니다. 다른 사람이 모두 손을 들고 있는 것을 둘러본 배불뚝이 영감이 화난 눈으로 돌아보며 말했습니다.
“이보시게들, 지금도 잘 살고 있는데 뭘 어쩌자는 건가? 나는 절대 반대일세. 조상 대대로 지켜온 담을 허물다니. 그게 집구석인가? 온 마을이 담 하나 없이 길가에다 집을 짓는다? 이게 말이 되는가?”
키다리 학자도 한 마디 했습니다.
“나도 지금 집을 헐고 새 집을 짓는 것은 반대일세. 우리 집으로 말하면 수백 년 동안 내려온 순수 한국식 전통가옥이 아닌가. 다른 사람은 모르겠네만 나는 반대라는 것을 분명히 해 두는 바이네.”
이장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가 평온하게 대답했습니다.
“두 어른 댁은 반대를 하시니 그리 알고 다른 분들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동네에서 목소리가 가장 큰 박씨가 벌떡 일어서서 말했습니다.
“나는 이장이 하는 말에 대찬성이오. 우리 마을이 세상에서 가장 살기 좋은 마을로 만든다는데 반대할 이유가 하나도 없지 않소. 찬성한다고 손들었던 여러분, 이장이 하는 일에 모두 찬성을 하신다면 한 사람도 빠지지 말고 손뼉을 크게 치시오!”
이 말에 모두가 손뼉을 크게 쳤습니다.
이렇게 마을 회의는 끝나고 하루가 가고 밤이 왔습니다. 정병철 노인이 이장과 머리를 맞댔습니다.
“이장, 오늘 수고 하셨소. 동네 사람들이 그 정도로 협조한다고 했으니 성공이오. 봄이 되면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합시다.”
“예, 어른님 계획대로 하겠습니다.”
“내가 보기에 그 키다리 학자의 말에는 일리가 있었어. 아무리 새 동네를 만든다 해도 전통 가옥 한 채쯤은 있을 만 해. 다른 집들은 이렇다 할 특징이 없지만 그 집은 달라. 그리고 뚱뚱이 영감네는 집만 크지 건축술로 보아서는 아무 가치가 없는 집이야. 동네에서 가장 부자라고 목에 힘을 주고 살지만 머지않아 후회할 수도 있지.”
다음날 이장이 마을회관 앞을 지나는데 배불뚝이 영감이 불렀습니다.
“이장, 나 좀 보게.”
“네, 무슨 말씀이신지요?”
“자네네 집에 거지처럼 얹혀사는 늙은이는 누군가? 당장 내쫓지 않고 그게 뭔가. 일도 안 하고 남의 집에서 하루 삼시 끼니를 꼬박꼬박 얻어먹으면서 이리저리 쏘다니기나 하는데 그 늙은이가 그렇게 좋은가? 난 그 늙은이가 눈꼴이 시어서 보기 싫은데 어쩌자고 남의 동네 회를 하는 곳까지 따라다니는가? 그 늙은이가 또 참석하면 나는 동네 회에 안 나가겠네.”
“알겠습니다. 어르신.”
“내가 언제든 그 늙은이를 만나면 정신이 번쩍 들게 혼을 내 줄 거야.”
36. 죽 쒀서 개준다더니
영농조합원은 겨울이 깊어지는 동안에도 날마다 바빴습니다. 유리 온실 안에 정성들여 가꾼 채소들이 무럭무럭 예쁘게 잎이 피고 꽃이 피었습니다. 씨를 뿌린 지 얼마 안 되는 상추와 시금치와 고추, 딸기 등이 수확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온실을 둘러본 정병철 노인이 이장한테 말했습니다.
“눈발이 내리는 걸 보니 한겨울이 되어 가고 있는 것 같네. 이제 시장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우리 농작물이 모두 잘 자랐으니 내일은 일찍이 서울로 가서 이 사람을 만나고 오게.”
그러면서 명함 한 장을 내주었습니다. 명함에는 크기로 유명한 마트 상호가 적혀 있었습니다. 이장은 다음 날 명함을 들고 찾아가 사장을 만났습니다.
“사장님, 이렇게 찾아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정병철 어르신께서 사장님을 만나라고 하여 왔습니다.”
사장은 반가워하면서 인사를 받았습니다.
“반갑습니다. 앞으로 이장님께서 기르시는 모든 농작물은 우리 마트에서 받겠습니다.”
이장은 속으로 놀랐습니다.
‘이 사장이라는 분은 누구기에 우리가 하는 일을 알고 있는 것처럼 말하는가?’
사장이 빙그레 웃으며 이장 속을 들여다 본 듯 대답했습니다.
“그러실 겁니다. 제가 어떻게 그걸 다 알고 있느냐고요? 그 어른이 미리 일러두어서 압니다. 이장님은 아무 걱정 마시고 좋은 채소만 기르시면 됩니다. 그 온실에서 생산되는 모든 것은 우리 마트에서 받을 것입니다.”
“고맙습니다. 그럼 채소부터 납품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러세요, 가시거든 채소를 실려 보낼 수 있도록 준비해 두십시오. 2일 후에 우리 회사 차가 내려가서 다 싣고 오겠습니다. 대금은 이장님 통장으로 송금해 드리겠습니다.”
이장은 통장 번호를 알려주고 돌아오면서 생각했습니다.
‘참 산가하가도 하다. 어른께서는 언제 이렇게까지 치밀한 계획을 세우셨을까?’
이장은 집으로 돌아오는 즉시 채소를 뽑고 따고 일을 서둘렀습니다. 속사정을 모르는 조합 이사들이 물었습니다.
“이장님, 갑자기 저것들을 한꺼번에 거두시면 어쩔 생각이십니까?”
“내가 판로를 다 열어 놓고 왔네. 모레 오후에는 차가 들어올 것일세. 서둘게들.”
강 이사가 의아한 눈으로 말했습니다.
“이장님, 저는 정신이 하나도 없습니다. 동네가 온통 뒤집어지고 온실 작물이 넘쳐나서 저걸 어떻게 하나 걱정을 했는데 언제 그렇게 거래처를 트셨습니까? 이장님은 무엇 같습니다.”
이장이 물었습니다.
“무엇 같은가?”
“보지는 못했지만 귀신같기도 하고 도깨비에 홀린 것 같기도 합니다.”
실은 이장도 강 이사와 같은 심정이었습니다. 어렸을 때 할머니한테 들은 도깨비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어느 착한 사람이 도깨비하고 친했더니 밤마다 광에는 쌀을 채우고 돈 뒤주에는 돈을 채워 놓았다는…….
그러나 태연히 대답했습니다.
“이런 저런 생각 말고 내가 하자는 대로만 하게. 우리 후원자가 나한테 길을 열어주고 있다는 것만 알게.”
서 이사가 눈을 크게 뜨고 물었습니다.
“그 후원자가 누구십니까?”
“실은 나도 모르는 분일세. 농협을 통에서 지원해 주고 있어서 말일세.”
조합원들은 채소가 나가게 되었다는 말에 밤을 새워가며 일을 했고 약속한 날 굉장히 큰 탑 트럭이 와서 모두를 싣고 갔습니다. 그리고 트럭을 따라 온 직원이 온실 안을 돌아보고 말했습니다.
“시설이 기발하십니다. 저기 매달린 것은 수박이 아닌가요?”
이장이 대답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은 줄기를 받침대에 높이 올린 수박 덩굴이고 저쪽 것은 수경재배를 하는 토마토입니다. 오늘 내보내는 딸기도 이 받침대 위에 늘어진 가지에서 딴 것입니다. 며칠 안 있어서 수박도 따고 토마토도 따게 될 것입니다.”
그 직원은 입을 벌리고 감탄했습니다.
“아, 놀랍습니다. 저는 채소 구매 담당으로 안 가 본 데가 없는데 여기처럼 초현대식 시설로 재배하는 온실 농장은 보지 못했습니다. 곧 한겨울이 될 텐데 수박이 그 때를 맞추어 따게 될 것 같으니 우리 마트에서는 굉장히 인기 있는 상품이 되겠습니다.”
조합원들은 그 사람이 떠나자 신이 나서 말했습니다.
“이장님, 신기합니다. 이렇게 빨리 팔려나갈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저 사람들이 돈은 내고 가져갔습니까?”
“내일 통장으로 들어올 것이오.”
“얼마나 들어올까요?”
“나도 그건 모르오.”
똑 불어지게 말 잘하는 장 이사가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이장님, 무슨 장사를 그렇게 하십니까? 무얼 믿고 값도 안 받고 물건을 내주십니까? 그런 법이 어디 있어요?”
이장이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어디 있느냐고요? 바로 여기 있지요, 하하하.”
“아니, 맨손으로 물걸을 내주시고도 웃음이 나오십니까?”
이장이 차분히 말했습니다.
“상거래는 믿고 하는 것이오. 우리가 달란다고 다 줄 사람도 없지만 좋은 물건을 거저먹으려는 사람도 없소. 내일 통장에 돈이 들어오면 공개하겠소.”
실은 이장도 속으로 장 이사와 같은 생각을 했습니다.
‘나도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모른다네. 값도 정하지 않고 주었으니 형편없는 가격을 쳐 주어도 할 말이 없지 않은가.’
장 이사가 불만스런 얼굴로 한 마디 더 했습니다.
“죽 쒀서 개준다더니 죽도록 일해서 호랑이 아가리에 물려 준 꼴이 아닙니까?”
37. 양옥 원형 현관문에 꽃그림
대형 탑 트럭으로 채소가 올라가고 사흘째 되는 날 이장 통장으로 송금이 되었습니다. 은행에 다녀온 것을 안 장 이사가 기다렸다는 듯이 물었습니다.
“이장님, 대금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돈이 왔더군.”
“얼마나 왔습니까?”
“한 장.”
“한 장이 뭡니까? 십만 원이란 말씀인가요?”
“그게 십만 원밖에 안 되겠소?”
“그럼 백만 원?”
이장이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장 이사가 놀란 눈으로 말했습니다.
“백만 원이란 말씀인가요? 여름 같으면 오십만 원어치도 안 될 물건이 아닌가요?”
“여름 같으면 그렇겠지.”
다른 영농조합 이사들도 모여들었습니다. 그리고 장 이사가 하는 말을 듣고 모두 놀라 한 마디씩 했습니다.
“앞으로도 몇 차를 거둘지 모르는 저 채소를 그렇게 좋은 값을 받았다고요?”
장 이사가 신이 나서 대답했습니다.
“그렇다네. 올 겨울 내내 온실에서 나올 채소와 수박이 얼마인가. 우리 조합 땡잡았어, 땡.”
언제나 침착한 박인석 이사도 놀랍다는 듯 한마디 했습니다.
“겨우 내내 저걸 다 팔 수만 있다면 수천만 원은 되겠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이장님?”
이장이 대답했습니다.
“물론이지. 다 팔 수 있다면이 뭔가. 다 팔 수 있으니 좋은 상품이나 만들어 봄세.”
그리고 이장이 이사들을 둘러보며 말했습니다.
“돈만 따지지 말고 좋은 상품을 생산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이사들이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각자 맡은 자리로 갔습니다.
그 날 저녁 이장은 정병철 노인과 마주앉았습니다.
“오늘 서울에서 채소 값이 왔습니다.”
정병철 노인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말했습니다.
“그런가? 수고했네.”
“제 생각보다 많은 액수의 돈이 왔습니다.”
“제 값을 제대로 쳐서 보낸 것 같군.”
“한 차에 백만 원이나 받았습니다.”
이장은 돈에 대하여 말할 줄 기대했는데 노인은 전혀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런가? 다들 수고한 대가지. 앞으로 겨우 내내 몇 차 분량이나 더 낼 수 있을 것 같은가?”
“채소를 다 수확하면 스무 차는 넘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토마토와 수박이 나오면 채소에 비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렇겠지. 한겨울에 수박이 쏟아져 나오면 금값이 될 것 아닌가.”
“그렇습니다.”
“수박이 나올 때까지는 잘 가꾸고 토마토를 먼저 내면 될 것일세.”
“그러겠습니다.”
도대체 누군지 알 수 없는 정병철 노인은 온실을 몇 번 둘러보았을 뿐인데 많은 것을 알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노인은 또 종이 한 장을 내밀었습니다.
“마을에 우리가 지어줄 집의 내부 구조일세. 어떤가 보시게.”
모든 집이 크기가 같고 내부에는 붙박이장이 있었고 화장실이 편리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이장은 아무 말도 더 할 수가 없어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렇게 해놓으면 서울 사람도 부러워하겠습니다.”
“그런가? 그럼 이장은 집 외모를 어떻게 지었으면 서울 사람들이 좋아할지 말해 보게.”
이장은 잠시 망설이다가 평소에 생각했던 것을 말했습니다.
“어른님 보시기에는 어떠실지 모르겠지만 저는 이 마을을 동화 속의 그림처럼 만들고 싶다고 생각하면서…….”
“그런가? 한번 들어봄세.”
이장이 종이를 한 장 펴놓고 그림을 그리면서 말했습니다.
“지붕들을 유럽처럼 경사 각도가 높게 짓고 집집마다 벽에는 각종 꽃그림이나 동물 그림을 그리고 현관문은 보름달처럼 둥그렇게 만들고 문에는 벽화에 맞는 꽃그림을 그려놓아 사람들이 문으로 들어가고 나갈 때는 마치 꽃 속으로 들어가는 것 같고 나올 때는 사람이 꽃 속에서 나오는 것같이 지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허허, 좀 색다른 생각을 했구려. 왜 그런 생각을 하시었소?”
“지금 모든 집 현관문은 네모 각이 날카롭게 똑같이 지어져서 너무 차가운 감이 든다고 생각했습니다. 꽃그림이 있는 둥그런 문으로 들어가고 나갈 때는 마음도 부드러워지지 않겠습니까.”
“좋은 생각 같소. 그리고 벽화는?”
“예를 들어 벽화를 장미꽃밭으로 그린다면 원형 현관대문에도 커다란 장미꽃을 그리고 호박 덩굴을 그린 벽화의 집은 호박꽃을 환하게 그려놓고…….”
노인이 어울리지 않게 아이처럼 큰소리로 웃었습니다.
“하하하, 호박꽃이 그려 있는 집이라? 사람들이 호박꽃도 꽃이냐고 하는데 현관문에다 호박꽃을 그린다면 하하하.”
“안 될까요?”
“호박꽃 대문을 좋아할 사람은 이장밖에 없을 것이오. 이장네 집을 호박꽃으로 그리시오, 어떻소?”
“그렇게 하지요. 호박꽃에는 꿀이 많습니다.”
“하하, 그렇구먼. 역시 이장은 호박보다 부드러운 사람이야.”
정병철 노인은 이렇게 말하고 이장이 내놓은 종이에다 덧그림을 그리며 말했습니다.
“동네 길을 부채꼴로 내놓으면 동네 비탈에 가로로 삼 겹으로 배열해야 할 것 같소. 먼저 교회를 짓고 바로 아래 견본 집을 지으면 좋을 것이오. 그리고 그 견본 집에는 한 집마다 집을 지으려면 살던 집을 비워야 하니 임시로 그 집으로 이사를 하게 하고 집을 지은 다음 자기 집으로 이사하게 하고 다음 집을 지을 때 또 그렇게 하는 것이오.”
“그렇게까지도 생각하셨습니까?”
“그래야 불편하지 않을 것이 아니겠소. 그렇게 집을 짓다 보면 내년 겨울에는 모든 집들이 새로 지은 집에 들어 살게 될 것이오.”
“모든 집을 울타리가 없는 양옥으로 지어 놓고 나면 벽화를 그려야 할 텐데 그게 쉬울 것 같지 않습니다.”
“그런 걱정은 마시게. 내가 미술대학에 아는 교수가 있으니 학생들이 좀 수고하게 하면 집을 다 짓는 날 벽화도 끝나고 모든 집들이 이장 꿈대로 꽃 대문을 꽃 천사들이 벌처럼 들락거릴 것이오. 상상만 해도 그렇게 되면 동화마을이 아니겠소?”
“상상만 해도 가슴이 벅찹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일러둘 것이 있소. 양어장에는 민물고기들이 많이 자랐던데 그것도 겨울이 깊어지기 전에 팔 것은 팔아야 되지 않겠소?”
“그런 것까지……?‘
“내일은 서울로 가서 이 사람을 만나시게.”
“그게 누굽니까?”
38. 세상이 온통 도둑놈 판인데!
이장은 큰 수산물시장에 가서 그 사람을 만났습니다. 입이 메기같이 크고 시원스런 사람이었습니다. 하얀 바닥에 아무 기록도 없는 노인의 사인만 씌어 있는 명함을 내밀자 반기며 물었습니다.
“이장님이 오시기를 기다렸습니다. 벌써 고기들이 그렇게 자랐습니까?”
“예, 큰놈은 손바닥만 합니다.”
“그렇습니까. 고기를 잡을 그물은 있나요?”
이장은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질문이었습니다.
“그런 건…….”
“그럼 고기를 어떻게 잡으실 생각이신가요?”
“글쎄요. 죄송합니다.”
그 사람은 시원하게 말했습니다.
“그러실 줄 알고 미리 준비해 놓았습니다. 오늘은 그냥 내려가시되 오늘 내일은 고기들한테 먹이를 주지 말고 모레까지 굶기십시오.”
“예.”
“그럼 모레 제가 도구를 가지고 내려가겠습니다.”
“도구가 따로 있습니까?”
“달아나는 고기를 잡자면 머리를 좀 써야지요. 물고기를 처음 길러보셔서 잘 모르시는 것 같습니다.”
이런 대화를 하고 이장은 돌아왔고 하루가 지나고 약속한 날짜에 그 사람이 이상한 도구를 특수차에 싣고 내려왔습니다.
물고기 잡는 전문가 두 사람이 함께 왔고 그들은 차 뒤 칸에 낚싯대처럼 길게 벋은 쇠막대기에 설치한 도르래를 이용하여 둥글고 널따란 그물을 물 가운데로 내렸습니다. 그물이 물에 가라앉자 고기들이 모두 달아났습니다. 그랬다가 그물 안에다 먹이를 끼얹어 주자 고기들이 떼를 지어 비늘을 비비적거리며 그물 안으로 몰려들었습니다. 그러자 도르래에 설치한 그물은 위로 끌어 올렸습니다.
물고기를 잡는다고 하는 소리에 마을 사람들은 물론 영농조합 이사들도 다 모였습니다.
누군가가 말했습니다.
“물고기 잡는 귀신들이 왔군.”
“놀라운 일이야. 어떻게 저런 생각을 했을까.”
“순식간에 물고기를 다 잡았잖아.”
그러는 사이 들려 올린 그물에서 물이 주르르 흐르고 작은 새끼 고기들은 그물을 빠져나와 물속으로 번개처럼 달아났습니다.
이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이사들을 향해 말했습니다.
“큰 고기만 잡아가고 작은 것들은 남겨 놓는구먼.”
동네 사람이 이장을 행해 물었습니다.
“저 사람들은 전문 어분가 보지요?”
“글쎄요, 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는 사이 고기잡이꾼들은 양어장 네 구석에 돌아가며 같은 방식으로 고기를 몰아 잡아 올렸습니다.
잠깐 사이에 차에 설치된 물두멍에 고기가 우글거렸습니다. 서울서 만난 어물상 주인이 이장한테 말했습니다.
“물고기를 아주 잘 기르셨습니다. 뼘치 붕어도 좋고 메기 구구락지, 쏘가리가 제법 씨알이 좋습니다. 오늘은 이대로 올라가서 고기를 분류하고 파악하여 대금을 곧 보내드리겠습니다. 그리고 겨울이 깊기 전에 한 번 더 오겠습니다.”
그 사람은 이장의 저금통장 번호만 알아가지고 떠났습니다. 차가 멀리 가고 나서 장 이사가 물었습니다.
“이장님, 오늘도 그냥 보내십니까?”
“그렇소.”
“그게 얼마치나 되는지 알고 내주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장 이사가 생각하기에 얼마치나 되는 것 같소?”
“제가 그걸 어떻게 압니까?”
“나도 역시 모르기는 마찬가지요. 모를 때는 아는 사람이 하는 대로 따르는 것이 순리가 아니겠소?”
곁에 섰던 서 이사도 한 마디 했습니다.
“아무리 모른다 해도 저 사람들만 믿는다는 건 좀 이상합니다.”
이장이 대답했습니다.
“이상할 거 없어요. 얼마를 치든지 양심껏 계산해 줄 것을 믿는 편이 좋을 것이오.”
마을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물고기를 거저 내주는 것이 못마땅했던 듯 고개를 갸웃거렸습니다. 일찍부터 나와서 모든 것을 말없이 지켜보던 배불뚝이 영감이 이윽고 한 마디 했습니다.
“이장, 어찌 그리 맹한가. 저렇게 많은 고기를 한차나 거저로 실려 보내다니 제 정신인가?”
이장이 겸손히 말했습니다.
“다 믿고 살아야지요.”
영감이 불끈하여 덧붙였습니다.
“뭘 다 믿는다는 거여? 세상이 온통 도둑놈 판인데 여름내 기른 고기를 그렇게 내줘도 되는겨?”
영농조합 이사들이 날마다 먹이를 주고 돌아볼 때는 전혀 관심도 없던 분이 돈 문제에는 예민해졌습니다.
“이장, 저 사람들이 한 푼도 안 주고 입 싹 닦으며 어쩌겠나? 이장이 책임질 수 있어?”
39. 왜 그런 눈으로 보는가?
이장은 침착하게 대답했습니다.
“어르신, 아무 염려 마세요. 앞으로 3일 내로 돈이 올 것입니다.”
“자네가 그걸 어떻게 믿어? 이미 차는 떠났어. 돈 한 푼 못 받고 그 많은 물고기를 거저 내주는 사람이 무슨 이장이야. 3일 되는 날 보세. 그 날 물 고기값이 안 오면 내가 가만히 있지 않을 테니 그리 알게.”
영감은 뒤뚱거리며 자기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이사들만 남자 하 이사가 투덜거리듯 말했습니다.
“저 노인이 무슨 자격으로 큰소리를 치는 거야. 양어장에 언제 관심이나 있었나. 우리도 가만히 있는데 왜 자기가 나서서 큰소리람.”
차 이사가 말했습니다.
“너무 걱정 말고 이장님이 하는 일이니 믿고 보세나. 언제 이장님 믿어서 손해 본 적 있었나?”
이 말에 모두가 입을 다물고 각기 자기 일 자리로 돌아갔습니다.
그 날 밤 이장은 여느 날과 같이 정병철 노인과 마주앉았습니다. 노인이 먼저 입을 열었습니다.
“수고했네. 내가 지켜보니 이장은 믿을만한 사람이야. 그것도 모르는 배불뚝이 영감이 너무 했어.”
이장이 겸손히 말했습니다.
“다 마을을 사랑해서 하시는 말씀이 아닙니까.”
“그렇지. 영농조합이 하는 일에는 관심이 없었지만 조합원이 기른 물고기 값에는 욕심이 나서 하는 소리 아니겠나.”
“그렇습니다. 하지만 물고기 값은 얼마나 쳐 줄는지 궁금하기는 합니다.”
“믿고 기다려 보게. 그 사람은 정직한 사람이라 남한테 피해를 주는 사람이 아니니까.”
이렇게 말하는 소리를 들으며 이장은 궁금한 생각이 들어서 물었습니다.
“어른님, 제가 한 말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말씀해 보게.”
이장은 주저하면서 말했습니다.
“어른님께서는 그렇게 좋은 분들을 어떻게 다 알고 계셨습니까?”
“이 나이이가 되면 그런 것은 알고 있어야 하지 않겠나. 정직하고 욕심 없이 잘사는 사람은 나뿐 아니라 누구나 아는 법일세.”
“그래도 이해가 안 갑니다.”
이장은 말이 나온 김에 당신은 누구십니까 하고 묻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망설이며 노인의 눈을 바라보니 이쪽 속을 꿰뚫어보기라도 하는 듯 엉뚱한 대답이 왔습니다.
“왜 그런 눈으로 보는가? 내가 이상한 사람으로 보이는가?”
이장은 네라고 대답하고 싶었지만 딴 소리를 했습니다.
“아닙니다. 동네 집들을 다 새로 짓자면…….”
“그런 걱정은 말고 내일은 키다리 학자를 만나서 폐교된 초등학교를 정규학교로 복구하자고 의논을 해 보게. 내년에 마을이 새로워지고 영농조합이 잘 된다는 소문이 나면 떠났던 젊은 사람들이 돌아올 것이고 마을에는 초등학생이 늘어날 걸세. 그리고 이 부근에 있는 마을에서도 여기 학교가 다시 개교를 한다고 하면 모두 가까운 거리로 올 것일세. 그러자면 학교를 맡아 돌볼 사람이 필요할 것일세. 그 키다리 학자가 적당한 인물로 보여서 하는 소리네.”
이장은 노인의 안목에 놀라 머리를 숙였습니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다음 날 이장은 키다리 학자 집으로 갔습니다. 키다리 학자는 이장이 하는 말을 다 듣고 아주 반가운 대답을 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우리 마을이 새로워지는 것을 보면서 장차 우리 마을에는 도시로 나갔던 젊은 사람들이 돌아올 것이고 그렇게 되면 폐교된 학교도 새로 출발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을 했었다네.”
이장은 눈물이 날 듯 기뻤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러시면 앞으로 복교시키는 방법과 학교 관리를 맡아 주십시오. 우리 영농조합에서 적극적으로 지원해 드리겠습니다.”
“알았네. 그 점은 내가 힘껏 도울 테니 이장의 소신대로 잘 해보시게.”
이장은 말이 나온 김에 한 마디 더 했습니다.
“선생님 댁은 전통 고택이라 손을 대지 않는 것이 좋을 것으로 생각하지만 다 낡은 담의 벽만은 손을 좀 보았으면 합니다.”
“좋지. 마을이 모두 새롭게 변하는데 우리 집 담이 너무 우중충해서 어쩌면 좋을까 걱정 중인데 그렇게 함세.”
사흘이 지나고 통장을 확인한 이장은 놀랐습니다.
40. 터놓고 싶은 비밀
이장이 정병철 노인한테 먼저 알렸습니다.
“어른님, 통장에 물고기 값이 백만 원이나 들어왔습니다.”
“그런가? 잘 쳐 주었구먼.”
이렇게 말하면서 물었습니다.
“물고기가 아직도 많은 것 같던데 어떤가?”
“이번에 잡아간 것은 전체의 오분의 일도 안 됩니다.”
“그렇게 많은 고기가 있었던가?”
“예, 많습니다.”
“앞으로 네 번은 더 잡아가면 되겠구먼.”
“그렇습니다.”
이렇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밖에서 배불뚝이 영감이 와서 찾았습니다.
“이장 있나?”
이장이 사랑문을 열고 대답했습니다.
“예, 어르신 어서 오세요.”
배불뚝이 영감은 곁에 선 정병철 노인을 힐끗 보고 인사도 없이 다짜꼬짜 물었습니다.
“물고기 값은 왔는가?”
“예, 왔습니다.”
“얼마나 왔나?”
“백만 원이 왔습니다.”
영감은 놀란 눈으로 다시 물었습니다.
“뭐야? 백만 원이라고?”
“예.”
영감은 기가 막힌다는 듯 주절거렸습니다.
“그까짓 게 얼마나 된다고 백만 원씩이나 주나? 허허. 우리 동네 떼부자 되겠네. 내가 보기에 반에 반도 못 잡아간 것 같은데 그게 백만 원?”
“그렇습니다.”
“앞으로 얼마나 더 잡아 갈 것 같은가?”
“다섯 번은 더 잡아가도 될 것 같습니다.”
영감이 심통스럽게 말했습니다.
“다섯 번이나 더 잡아갈 수 있다고? 그럼 얼마치나 된다는 거여? 그까짓 논배미에서 오백만 원이 나온다는 말이 아닌가?”
“그런 셈입니다.”
영감은 손가락으로 세어가며 따졌습니다.
“오백만 원이면 쌀이 몇 가마 값인가, 쌀로 20가마니 값이 아닌가 말이야. 그러고도 새끼 물고기가 남아 있고 그것들이 또 자라면 내년에는 천만 원은 나오겠군.”
이장이 겸손히 말했습니다.
“그렇게 따지면 일 년에 열두 번 정도 잡아가고 백만 원씩 받으면 한 해 수입이 농사지은 것보다 배가 많을 것 같습니다.”
영감도 셈은 빨랐습니다.
“그렇겠군. 벼농사 지을 것 없이 물고기나 키워서 팔면 되겠어.”
이렇게 주고받는 말을 곁에서 듣고 있던 정병철 노인이 빙긋이 웃었습니다. 그것을 본 영감이 화를 벌컥 냈습니다.
“이봐, 늙은이. 왜 웃는 거여?”
정병철 노인이 점잖게 대답했습니다.
“하시는 말씀이 재미있어서 웃었습니다.”
“재미있다니 그게 말이라고 하는 거여? 남의 일에 낯도 부치도 모르는 늙은이가 무슨 참견이야? 어디서 굴러들어온 것이 남의 동네에 와서 빌빌거리며 밥이나 축내는 주제에. 에이 재수 없어.”
이장이 민망해서 절절맸습니다.
“어르신, 참으십시오.”
배불뚝이 영감은 얼굴을 붉히고 대답도 없이 휑하니 자리를 떴습니다. 이장이 정병철 노인하테 사과를 했습니다.
“어른님, 못 들은 것으로 하시고 용서해 주십시오.”
배불뚝이 영감은 영농조합 일에 상관도 없는 처지로 이장이 무슨 일을 하든 간섭할 자격도 없는데 자기가 부자라는 위세만 믿고 그러는 것입니다. 이장이 어쩔 줄을 모르고 절절매는 것을 보고 정병철 노인이 위로했습니다.
“괜찮아, 이장이 미안해 할 것 없네. 내가 그런 말을 듣게 하고 있지 않은가.”
“죄송합니다.”
“아니야, 그 사람 말이 맞지. 누군지도 모르는 내가 이장네 집에 얹혀살며 빈둥거리니 그런 소리도 할 만하지. 동네에서 가장 부자라니 무슨 소린들 못하겠나. 다 이해하네.”
이장은 그제야 마음이 좀 놓였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정병철 노인이 어떤 분인가를 동네 사람들 앞에서 털어놓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그럴 수도 없는 것은 자기도 그 어른이 어떤 분인지 모르고 도움만 받는 터라 함부로 입을 열 수가 없었습니다.
영농조합의 일에는 전혀 도움도 되지 않고 오히려 방해만 하는 영감이 물고기 값 받는 일에는 왜 그렇게 관심을 보이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정병철 노인이 다른 말을 했습니다.
“부자들이란 다 그런 거 아닌가. 제 것은 아끼고 남의 것은 우습게보고 다 차지하지 못해 안달하는 것 말일세. 그 영감이 한 말에는 마음 쓰지 말고 이제부터 아름다운 동네 만들기에 머리를 쓰기로 하세. 이번 주 중에 공사 팀이 들어와 견본 주택을 짓고 단계적으로 동네를 바꿀 것일세. 양어장에선 돈이 쑥쑥 자라며 헤엄치고, 비닐하우스에도 수박 덩이가 황금덩이처럼 매달려서 자라고 있지 않은가. 올 겨울에는 영농조합에 돈이 펑펑 들어올 것 같네. 그런 생각만 하고 다른 생각은 하지 말게. 동네 집 새로 짓고 더 좋은 일을 하자면 부질없는 생각은 할 새가 없네.”
정노인의 계획이 철저해서 이장은 무슨 말이든 할 수가 없어서 허리만 굽실거렸습니다.
“어른님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이때 밖에서 누가 이장을 부르는 소리가 났습니다.
41. 기쁜 일 위에 좋은 소식
이장이 문을 열고 내다보았습니다. 키다리 학자가 와서 찾고 있었습니다.
“이장님께 알려드릴 일이 있어서 왔습니다.”
“무슨 일인지 방으로 드시지요.”
키다리 학자는 조심스럽게 말했습니다.
“어른께서 계신데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괜찮습니다. 들어오세요.”
키다리 학자가 방으로 들어서며 정병철 노인에게 인사를 했습니다.
“이렇게 무례를 해서 죄송합니다. 어른님께 인다드립니다.”
정병철 노인도 겸손히 인사를 받았습니다.
“어서 오세요. 저는 이장님 덕분에 이 방에서 편히 지내는 식객 나그네입니다.”
“아닙니다. 저는 먼빛으로 뵙기는 했지만 인사를 못 드려서 죄송하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장이 물었습니다.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이렇게 오셨습니까.”
키다리 학자가 대답했습니다.
“교육청에 다녀왔다는 말씀을 전하려고 왔습니다. 제가 교육청에 가서 분교 이야기를 했더니 거기 분들이 모두 우리 마을에 큰 변화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장차 우리 마을 학교는 다시 복교해도 좋을 것 같다고 말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이장이 기뻐했습니다.
“그렇습니까. 좋은 소식입니다. 앞으로 우리 마을이 이 근방에서는 알아주는 모범 마을이 되면 도시로 나갔던 사람들도 돌아오고 인근의 마을에서도 좋아할 것입니다.”
키다리 학자가 정병철 노인에게 눈길을 돌렸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이런 산골이 좋으신가 봅니다. 항상 산으로 들로 다니시는 걸 보면 학처럼 여유로워 보였습니다.”
정병철 노인이 손사래를 쳤습니다.
“아닙니다. 저 같은 사람한테 선생이라는 호칭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냥 편하게 영감이나 노인네라고 불러 주십시오. 저는 구름처럼 바람처럼 떠돌다가 인심 좋은 이장님을 만나 공밥을 얻어먹고 할 일이 없으니 산으로 들로 구경을 다니는 재미로 삽니다. 곁에서 듣자하니 좋은 일이 있을 것만 같습니다. 폐교했던 학교가 다시 문을 열고 아이들 뛰노는 소리가 들린다면 얼마나 듣기 좋겠습니까.”
키다리 학자가 겸손히 말했습니다.
“그렇지요, 아이들이 뛰노는 소리가 들리고 집집마다 젊은이들이 들어와 새 아기 우는 소리가 들린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이장도 좋아서 한 마디 했습니다.
“이 마을이 머지않아 반드시 옛날처럼 아이들 뛰어노는 소리와 아기 울음소리가 메아리칠 것입니다.”
정병철 노인이 아주 시원하게 웃으며 말했습니다.
“하하하, 이장님 말씀만 들어도 가슴이 뿌듯합니다. 아이들 뛰노는 소리와 갓난아기 우는 소리는 바로 활기차게 살아가는 사람 소리가 아니겠습니까.”
키다리 학자가 정병철 노인의 말뜻을 새겨들으며 생각했습니다.
‘이 어른은 겉 사람과 속사람이 전혀 다른 분 같다. 차림새는 허술하지만 눈빛이며 말씨가 보통 사람이 아니야…….’
이장이 앞으로 마을에 많은 변화가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하려는데 키다리 학자가 밖을 내다보며 말했습니다.
“눈이 옵니다. 첫눈입니다.”
이장도 내다보고 한 마디 했습니다.
“그렇군요. 함박눈입니다. 첫눈이 이렇게 오다니…….”
이때 영농조합 장 이사가 급히 달려오며 소리쳐 말했습니다.
“이장님, 반가운 첫눈이 옵니다. 그런데 눈보다 더 반가운 손님이 오셨습니다.”
이장이 물었습니다.
“누가 오셨기에 첫눈보다 반가운 손님입니까?”
장 이사가 손짓을 했습니다.
“지금 저 온실에다 손님을 모셔 놓고 왔습니다.”
“누구신데요?”
“우리 영농조합에서 재배한 수박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오셨답니다. 우리 수박을 모두 사가겠다는 분입니다.”
“그래요? 좋은 소식입니다.”
이렇게 말을 주고받는 사이에 조합의 남 이사가 부지런히 눈발을 뚫고 달려왔습니다. 이장이 보고 물었습니다.
“남 이사, 이 눈을 맞으며 무슨 일로 달려오시오?”
남 이사가 급한 말로 대답했습니다.
“이장님, 좋은 소식입니다. 좋은 소식!”
“무슨 일인데요?”
42. 엄마 바보, 할아버지 미워!
남 이사가 하얀 눈을 털면서 대답했습니다.
“물, 물고기를 또 사러 왔습니다.”
장 이사가 신이 나서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물고기를 또 사러 왔고요? 하하하.”
이장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정병철 노인과 키다리 학자에게 인사를 했습니다.
“저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양어장으로 가 봐야겠습니다.”
키다리 학자도 따라 일어섰습니다. 사랑방에는 정병철 노인만 남았습니다. 자리를 뜬 사람들이 모두 눈발을 맞으며 마을회관으로 갔습니다. 거기에는 먼저 물고기를 사간 사람이 와서 기다리고 있다가 말했습니다.
“이장님, 날씨가 더 추어지고 얼음이 얼기 전에 양어장의 큰 물고기를 모두 사가고 싶어서 왔습니다. 어떻습니까?”
이장이 말하기도 전에 남 이사가 먼저 대답했습니다.
“그렇게 하시면 좋지요. 안 그렇습니까, 이장님?”
이장도 장 이사도 또 따라왔던 키다리 학자도 모두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렇게 하여 양어장의 물고기는 다섯 차나 잡아갔고 유리 온실의 수박도 주렁주렁 달려 겨울 동안 팔아서 많은 수입을 냈습니다.
겨울 동안 유리 온실에서는 수박이 돈을 벌어주고 동네는 차례로 집을 새로 지어 날마다 다른 모습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러는 동안 봄이 오고 동네는 전원마을로 변했습니다.
봄이 되자 미술대학 학생들이 몰려와 집집마다 벽화를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키다리 학자네 담도 새 단장을 하고 아름다운 그림이 그려졌습니다. 담을 화려하게 해놓으니 기와 늪은 지붕에 고풍스런 기풍이 더 빛나 보였습니다.
겨울 동안에 온 동네가 빨갛고 파랗고 초록색 지붕에 화단이 만들어졌습니다. 어떤 집 화단에는 꽃이 피기 시작하는데 오직 한 집만은 우중충한 담으로 둘러쳐진 채 점점 초라해 보였습니다.
겨울 동안 도시로 나갔던 사람들이 돌아오고 폐교된 학교도 다시 정식 학교가 되어 동네 아이들이 동네 학교를 다니고 동화마을 버스는 중고등 학생들만 읍내로 등교시켜 주었습니다.
이런 변화 속에 배불뚝이 영감네 손녀가 뾰로통해 가지고 학교에서 돌아와 할아버지한테 짜증을 냈습니다.
“할아버지, 창피해!”
배불뚝이 영감이 배를 쑥 내밀고 사랑 가득한 눈으로 대답했습니다.
“무엇이 그렇게 창피하냐?”
“전에도 내가 창피하다고 했지?”
“그랬지. 부자라 창피하다고 했지 아마? 부자가 왜 창피하다는 게냐?”
“할아버지 우리 집이 이 동네에서 가장 거지 집 같아!”
배불뚝이 영감 얼굴에 노기가 어렸습니다.
“뭐라고? 우리 집이 거지 집 같다고?”
“할아버지는 아무 것도 안 보여? 지성이네 집, 정우네 집, 필순이네 집, 다영이네 집, 다린이…….”
할아버지가 말을 막았습니다.
“그만, 그만 해라. 그 애들 집이 어떻다는 거냐?”
“우리 집은 할아버지처럼 너무 낡고 지저분해.”
배불뚝이 영감이 화난 얼굴로 변했습니다.
“우리 집이 나처럼 낡았다고? 이 녀석이 아무 말이나 하면 다 말인 줄 아나?”
손녀가 손가락을 접어 보이며 말했습니다.
“다른 집은 보두 집안에 화장실도 있고 주방도 있고 옷장도 벽에 붙어 있고, 수도도 나오고 또…….”
영감은 더 듣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만 해라, 그래도 우리 집보다 부자는 없다.”
손녀는 감정이 안 풀렸습니다.
“할아버지는 바보야, 바보!”
“뭐야?”
“다른 집들은 예쁜 지붕에 대문도 모두 꽃 대문인데 우리 집은 변소도 뚝 떨어져 있고 수도도 없이 마당에서 우물을 퍼먹고…….”
배불뚝이 영감 화가 났습니다.
“허허, 어린 게 말버릇이 그게 뭐냐? 할애비를…….”
이때 부엌에서 일하던 엄마가 나오며 딸을 꾸짖었습니다.
“영은아, 너 할아버지한테 그러면 못 써!”
영은이라고 불린 손녀가 대들 듯 말했습니다.
“할아버지 창피해! 엄마도 다 알면서!”
엄마가 말했습니다.
“엄마가 뭘 다 안다는 거야? 어른들이 하는 일은 네가 아무렇게나 말하는 게 아니야.”
영은이가 지지 않고 말대답을 했습니다.
“엄마 바보, 할아버지 미워!”
배불뚝이 영감도 엄마도 어이가 없다는 듯 입을 딱 벌렸습니다. 그래도 영은이는 하고 싶은 말을 더 했습니다.
“우리 집 때문에 동네에 큰 흉터가 있는 것…….”
배불뚝이 영감이 화가 나서 버럭 소리쳤습니다.
43. 나 같은 늙은 호박을?
“뭐야? 누가 그런 소리를 했느냐?”
할아버지가 눈을 부라리자 영은이가 놀라서 물었습니다.
“할아버지 왜 그래?”
“누가 우리 집이 흉터 같다고 하더냐?”
은영이 태연하게 대답했습니다.
“동네 사람들이 다 그러는데 내가 보아도 우리 집은 시커멓고 예쁘지는 않아.”
배불뚝이 영감은 자기네 집을 흉가라고 하는 줄 알고 화가 났었으나 그런 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약간 누그러졌습니다.
“그래도 우리 집이 가장 크고 동네에서는 제일 부자다. 남은 없는 높은 담도 있지 않으냐.”
영은이가 사정했습니다.
“할아버지, 우리 집 담에도 그림을 그려요.”
배불뚝이 영감은 어이가 없어서 웃었습니다.
“허허허, 우리 담에다 무슨 그림을 그리느냐?”
“할아버지 같은 늙은 호박을 그려요.”
할아버지가 그만 눈을 크게 떴습니다.
“뭐야? 나 같은 늙은 호박을 그리라고?”
“헌 집에는 꽃그림, 새 그림은 안 어울려. 늙은 호박이 어울려.”
“이 녀석아! 아무리 담이 늙었어도 늙은 호박이 뭐냐?”
“그럼 늙은 호랑이나 늙은 곰 그림을 그리면 안 될까?”
“우리 집이 그렇게 늙은 집 같으냐?”
“할아버지는 새로 지은 집들이 얼마나 예쁜지 몰라?”
“껍데기만 예쁘면 좋은 줄 아느냐.”
영은이는 꼬박꼬박 대꾸를 했습니다.
“지성이네, 정우네, 다린이네 집은 주방이 있고 식탁이 있어서 식구들이 의자에 앉아서 밥도 먹고…….”
영감이 말을 막았습니다.
“그만 해라.”
그러나 영은이가 또 다른 말을 했습니다.
“할아버지, 우리 집은 이제 전기불도 안 들어온대요.”
영감이 심통 난 소리로 물었습니다.
“뭣이? 뭐라고 했느냐? 우리 집이 어째?”
“우리 집에는 전기가 이제 안 들어온대요.”
“왜 안 들어온다는 거냐?”
“다른 집들은 모두 집을 새로 지으면서 태양열 전기가 들어오게 해 놓았지만 할아버지가 반대하여 우리 집에는 전기 시설이 안 되어서 전기를 쓸 수가 없대요.”
“누가 그 따위 소리를 하더냐?”
“내 동무들이 그랬어.”
“네 동무 누가?”
“다들.”
“허허 우리 집을 어떻게 보고 그 따위 소리를 하는 거냐.”
이때 이장이 모르는 사람을 데리고 왔습니다. 함께 온 사람이 인사를 했습니다.
“어르신 안녕하세요?”
배불뚝이 영감이 거만하게 물었습니다.
“뉘신데 무슨 일로 오셨소?”
“용건만 간단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마을은 태양열 발전기를 설치하여 각 집마다 얼마 전부터 태양열 전기를 쓰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마을 전체의 전기를 끊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댁만은 태양열 전기 시설이 안 되어 있어서 협조를 받으러 왔습니다.”
“협조라니?”
“이 댁에서도 태양열 전기 시설을 하여 쓰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배불뚝이 영감이 화가 난 얼굴로 물었습니다.
“뭐요? 내가 내 돈 내고 쓰는데 왜 전기를 끊는다는 거요? 나는 싫소. 돌아가시오.”
그 사람이 다시 말했습니다.
“어르신, 잘 생각해서 말씀하셔야 합니다. 전기가 끊어지면 이 댁은 밤에 촛불을 키셔야 합니다.”
배북뚝이 영감이 이장한테 삿대질을 하며 화를 냈습니다.
“이장! 무슨 일을 그 따위로 한 거여? 동네를 엉망으로 만들어 놓더니 이제 전기까지 못 쓰게 만들어?”
이장이 얼른 대답을 못하고 어물거리자 영은이가 끼어들었습니다.
44. 할아버지한테 대드는 손녀
“할아버지, 그것은 이장님 잘못이 아니야.”
배불뚝이 영감이 노여운 얼굴로 손녀를 나무랐습니다.
“네가 뭘 안다고 나서?”
영은이는 놀랍도록 야무진 대꾸를 했습니다.
“할아버지는 부자 자랑만 하지 말고 이장님이 하시는 이을 도와드릴 수 없어?”
배불뚝이 영감 목소리가 커졌습니다.
“뭐야?”
영은이 지지 않고 말했습니다.
“우리 동네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할아버지도 알잖아? 이장님이 하신 일이라는 걸 우리들도 다 알고 있어.”
이때 이장이 나섰습니다.
“영은아, 할아버지한테 그러면 못 쓴다. 할아버지도 다 알고 계신 거야.”
은영이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우리 집에 전기가 안 들어오게 되었다고 하잖아요? 전기가 안 들어오면 어떻게 살아요? 이장님이 도와주세요.”
어린 것이 하는 말에 이장은 대답할 말이 없어서 난감하여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알았다. 어떻게든 잘 될 거야. 네가 염려하지 않아도 어른들이 알아서 할 거야. 알았지?”
영은이 공손해졌습니다.
“에, 이장님.”
이렇게 말하고 영은이는 친구 집으로 갔습니다.
이장이 영감님한테 말했습니다.
“지금이라도 집을 새로 짓고 전기 시설도 하시지요. 그러면 비용도 덜 들고 유리하십니다.”
배불뚝이 영감은 엉뚱한 대답을 했습니다.
“우리 집을 헐고 새로 집을 짓는다고? 어림도 없는 소리. 우리 집은 조상 대대로 지켜온 명문가인데 무슨 소리를 하는가? 이장 잘 듣게. 나는 전기가 안 들어오면 자가발전을 해서라도 동네 전기는 안 써!”
배불뚝이 영감의 고집은 대단했습니다. 자기네 집이 동네에서 가장 부자이고 부러울 것 하나 없는 처지라고 목에 힘을 주면서 말했습니다.
“자가발전을 해서 쓴다고 겁날 것 없어. 일 년에 쌀 열 가마니 값이면 쓰고도 남을 것이구먼. 흠흠!”
배불뚝이 영감은 그렇게 말하고 자리를 떴습니다. 전기회사 직원이 이장을 보고 말했습니다.
“저 어른이 부자는 굉장한 부자인 것 같습니다. 태양 전기를 쓰면 거저인데 자가 발전을 하여 쓰자면 일 년에 그 비용이 얼마나 들어가는지 모르고 하는 소리지요.”
그렇게 하여 배불뚝이 영감네는 태양 전기를 쓰지 않고 자가 발전기를 돌렸습니다. 그 일로 하여 배불뚝이 영감은 동네에서 왕따를 당하고 살았지만 자기 재산만 자랑하면서 언제나 큰소리를 치고 살았습니다.
봄이 되고 날씨가 좋아지자 밭도 갈아야 하고 논도 농사준비를 해야 했습니다. 배불뚝이 영감은 동네 사람들한테 밭을 갈고 씨를 뿌려 달라 했지만 아무도 일을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동네 사람들이 모두 영농조합 일에 매달려 일하기 바빠서 배불뚝이 영감을 도와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영감은 멀리서 삵을 배로 주어가며 일꾼을 구해다 밭을 갈았습니다. 그러면서 날마다 동네 사람들을 원망했습니다.
“못된 놈들. 두고 보자. 영농조합인지 뭔지가 망할 날 두고 보자. 그때는 내가 원수를 갚을 게다.”
배불뚝이 영감은 비싼 품 삵을 주어가며 농사를 짓다 보니 소득이 없었습니다. 논농사는 영농조합에서 지어서 수익의 반을 나누기 때문에 식량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었지만 밭농사는 지으나 마나였습니다.
봄이 무르익었습니다. 낮에 마을 앞 언덕에 올라가 동네를 바라보면 동화 속에 나오는 꿈동산보다 더 아름다웠습니다. 그리고 밤에는 커다란 하트 등이 둘러 밝힌 마을은 알록달록한 사탕봉지처럼 예쁘게 보였습니다.
이렇게 밤과 낮의 아름다운 마을 모습이 처음에는 이웃 동네의 구경거리가 되었고 그 소문은 퍼져서 서울까지 갔습니다. 그래서 낮에는 인근 학교의 학생들이 구경을 오는가 하면 서울에서도 다른 지방에서도 구경을 왔습니다.
그뿐 아니라 방송국에서도 와서 동네를 촬영해 가서 전국에 알리고 신문에도 여기저기 나와 2년 만에 동화마을은 유명해졌습니다.
그런가 하면 배불뚝이 영감의 고집도 유명해졌습니다. 이유는 다른 집들은 영농조합원이 하자는 대로 새로 집을 짓고 일을 돕는데 영감만은 재산을 자랑하며 고집을 부려서 동네를 들여다보면 낮에도 밤에도 그 집만은 시커먼 모습이 흉터처럼 보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도 배불뚝이 영감은 비싼 기름을 써가며 자가발전을 하였고 기름 많이 들어간다고 밤에만 발전기를 돌려서 낮에는 냉장고와 전기밥솥이 음식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살면서 영감님한테 효도를 하던 가족들이 마침내 불만을 못 참고 항의를 하게 되었습니다. 똑똑이 영은이가
“할아버지, 창피해.”
하고 말하자 배불뚝이 영감이 반문했습니다.
“무엇이 또 창피하다는 거냐?”
45. 부럽도록 행복한 동화마을
“할아버지는 몰라. 내 동무들이 할아버지 보고 뭐라고 하는지 알아? 창피해.”
배불뚝이 영감이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물었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냐? 누가 너를 창피하게 한다는 거여?”
“할아버지 뚱뚱한 배에는 욕심만 가득하대.”
“뭐야? 누가 그러더냐?”
“할아버지를 아는 아이들은 다 그래.”
“그래, 내 배에는 욕심만 가득하다. 그게 뭣이 그리 부끄러우냐? 욕심 없는 사람이 어디 있더냐.”
“우리 시커먼 지붕 때문에 동네가 병든 것 같대.”
“뭐야?”
“그것뿐이 아니야.”
“또 뭐가 있다는 게냐?”
“할아버지는 우리 동네 코끼리 회관에 한 번도 안 가 보았지?”
“안 가 보았다. 그것도 잘못이냐?”
“다른 집 할아버지들은 코끼리 회관에 새로 생긴 병원이며 약국에 들러 축하인사도 했다는데 할아버지만 한 번도 안 오셨대. 한 동네에서 그럴 수가 있느냐고 쑥덕쑥덕…….”
배불뚝이 영감은 화가 났습니다.
“누가 쑥덕거리더냐?”
“동네 사람들이 그런다고 아이들이 그래.”
“허허, 별것도 아닌 것들이 허허.”
할아버지는 기가 차서 손녀가 하는 말을 더 듣고 싶지 않아 자리를 떴습니다. 배불뚝이 영감은 언제나 남들은 무시하고 자기 재산 자랑만 하고 거드름을 피십니다.
여기서 그 동안 영농조합원들이 이루어 놓은 변화를 밝혀야겠습니다.
이 동화마을에는 코끼리 종합회관이 중심에 있고 그 회관 1층에는 약국이 생겼고 옆에 병원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야국 옆에는 영농조합 직영 슈퍼가 있고 그 옆에는 농산물 직영 채소 판매소가 있습니다.
슈퍼에는 읍내에 나가지 않아도 될 만큼 모든 생활필수품과 학용품까지 갖추어 있고 병원에는 날마다 유명한 각과 전문 의사들이 교대로 와서 진료를 해줍니다.
동네를 소개한다면 마을 언덕 중심에 교회가 있고 동네 가운데 병원이 있고 약국이 있고 슈퍼가 있고 초등학교가 있고 또 수영장과 마을 공중목욕탕이 있습니다.
그래서 가까운 동네에서는 초등학생들이 동화마을초등학교로 전학을 오고 있습니다. 또 병이 나면 안과 의사가 오는 날은 눈병을 고치러 오고 치과의사가 오는 날은 노인들이 이를 고치러 몰려옵니다.
동화마을은 시골 동네지만 읍내 사람들이 부러워할 만큼 살기 좋은 마을이 되어 있습니다.
유리 온실에서 나오는 채소 중 일부는 영농조합 슈퍼에서 직접 팔고 많은 물량은 서울 마트에서 와서 실어갑니다. 그리고 산에서 나오기 시작한 약초들은 제약회사에서 모두 사갔습니다.
날마다 유명한 마을이 되어 가자 전국 각지에서 구경 오는 사람들이 줄을 서고 싱싱한 채소를 사가기도 합니다. 그뿐 아니라 슈퍼 물건도 다른 데보다 싸기 때문에 거기서 장을 보아가는 사람들이 늘어났습니다.
관람객들이 많이 모여들어 영농조합에서 생산하는 식료품을 사가기 때문에 영농조합은 날로 번창하고 동시에 마을 사람들의 생활에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동네 소문이 날마다 퍼져나가고 마침내 마을에 큰 경사가 생겼습니다.
46. 도깨비 마을이라고?
이장이 면사무소에서 아주 기쁜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집으로 달려오다가 산자락을 거닐고 있는 정병철 노인을 만났습니다.
“어른님, 반가운 소식이 있습니다.”
노인이 이장의 얼굴에 화색이 짙은 것을 보고 물었습니다.
“무슨 좋은 일이 있는가? 이장 얼굴에 꽃이 피었어.”
“네, 아주 좋은 소식입니다.”
“그렇게 좋은 소식이라면 귀를 열고 들어 봄세.”
이장은 기쁨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어른님 덕으로 우리 마을에 큰 경사가 생겼습니다.”
“내 덕이랄 게 뭐가 있는가. 이장이 출중한 인물이라 다 이루어지는 경사가 아닌가. 좋은 소식이라니 뭔가?”
“우리 마을을 모범마을로 나라에서 특별 표창을 한답니다.”
“무슨 상인가?”
“부대통령 상을 특별히 제정하여 우리 마을에 상패와 특별상금을 내린답니다.”
“부통령상이라고?”
“그렇습니다. 그 동안 나라에서는 큰 상을 대통령이 주는 것만 알았지 부통령을 소홀히 대하여 온 전통을 바로 잡고 부통령의 역할도 크다는 것을 국민이 인식하게 하기 위하여 특별히 정했답니다.”
“그 말도 일리가 있어. 부통령을 제대로 의식하지 못하고 한직으로만 오해하기 쉬운 경향도 있었지. 잘한 일 같네. 그래 시상은 언제 한다던가?”
“면장께서 우리 마을이 발전하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이제 거의 완성되었다고 생각이 들어서 저를 부른 것입니다. 시상행사는 우리 마을 코끼리회관에서 하는 것으로 하고 날짜만은 우리 좋은 대로 정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문제만은 어른님께 상의 드리고 대답하려고 미루었습니다. 언제가 좋겠습니까?”
“동네 큰일을 나 같은 나그네한테 물어볼 게 뭔가. 적당한 날을 이장이 영농조합 이사들과 상의하여 정하면 될 일을.”
“그렇게 해도 좋겠습니까?”
“허허, 이 사람, 내가 누군가? 자네네 집 식객이고 구름처럼 바람처럼 떠도는 나그네가 아닌가? 나한테는 그런 거 묻지 말게.”
이장은 마지못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면 5월 5일 어린이날로 하면 어떻겠습니까?”
“이장이 그렇게 생각했으면 그렇게 하는 것이지, 나한테 묻지 말라고 했는데 또 묻는가?”
“죄송합니다. 그러면 어린이날 우리 동화마을 축하행사의 날로 정하겠습니다.”
이장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영농조합이사들을 만나 기쁜 소식을 전했습니다.
“영농조합 여러 이사님들의 적극적인 협조로 우리 마을이 새마을로 아름답게 바뀌었습니다. 오늘 면장님을 만났더니 우리 마을을 모범마을로 인정하여 상부에 큰 상을 신청했었다고 합니다. 그 결과 부통령 상을 받게 되었답니다.”
장 이사가 약간 불만스럽게 말했습니다.
“이왕 주려면 대통령상을 주실 것이지 부통령이 뭡니까?”
이장이 받아 말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꼭 큰 것만 좋아하는 의식도 고쳐야 합니다. 부통령이라면 대통령 못지않은 사회적으로 큰 공로가 있기 때문에 그 자리에 오른 것입니다. 상이란 누가 주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누가 인정해 주느냐가 중요합니다. 우리 마을을 사랑하는 면장님이 주시든지 군수나 도지사가 준다면 안 받겠습니까? 사회적 지위로 부통령은 도지자보다도 장관보다도 높고 귀한 분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서 이사가 이장의 말을 거들었습니다.
“우리 마을에 부통령님이 오신다는데 그보다 큰 영광이 어디 있습니까. 특히 부통령님 상을 받게 되었다니 모두 만세를 부릅시다. 만세!”
이 말에 이사들이 모두 한 목소리로 부통령만세를 세 번이나 크게 외쳤습니다. 그 모습을 멀리서 바라보던 배불뚝이 영감이 휘적휘적 다가오며 물었습니다.
“뭣들을 하는겨? 만세가 무슨 만세여?”
하 이사가 겸손히 대답했습니다.
“어르신 기뻐하십시오. 우리 동화마을에 경사가 났습니다.”
배불뚝이 영감이 못마땅한 얼굴로 대답했습니다.
“경사라니? 무슨 경사여?”
“우리 마을이 모범마을이 되어…….”
영감이 말을 잘랐습니다.
“모범마을? 이게 무슨 모범 마을이야? 온 동네를 울타리도 없이 부서뜨려 놓고 전기도 끊어놓고 집집마다 울긋불긋한 지붕에다 도깨비 집처럼 대문마다 꽃을 그려 놓고, 벽에는 또 그게 뭐야? 이래도 모범 마을인가?”
하 이사가 대답했습니다.
“어르신 지금은 시대가 바뀌었습니다. 개량 가옥으로 온 마을 사람들이 모두 좋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라에서는 우리 마을에 부통령 상을 주신답니다.”
“뭘 준다고?”
47. 동화마을 부통령 방문
“나라에서 부통령 상을 준답니다.”
“허허, 못된 것들. 누가 부통령을 알아준다고 부통령 상을 준다는 겨? 줄라면 대통령상을 준다면 모를까.”
이장이 조심스럽게 말했습니다.
“어르신, 부통령 상도 아무나 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마을을 위해 나라에서 특별히 정한 상이랍니다.”
“그래도 그렇지, 상금도 얼마나 있다던가?”
“예, 있답니다.”
“상금이나 듬뿍 준다면 모를까……. 뭐니 뭐니 해도 상에는 큰 돈이 묻어와야 하는 겨. 그 상금 나오면 누가 쓰는가?”
하 이사가 대답했습니다
“영농조합기금이 되겠지요.”
“동네 사람한테 준 거면 똑같이 나누어 가져야지. 나 같은 사람은 영농조합에 안 들었는데 동네로 나온 상금을 저희끼리만 먹는다고? 그런 건 경우가 아니지, 암 아니고말고.”
배불뚝이 영감은 욕심이 나서 이렇게 지껄이고 돌아가면서 한 마디를 남겼습니다.
“나한테 한 푼도 안 주고 저들끼리 나누어 먹으면 가만 안 뒤!”
좋은 소문이 동네를 몇 바퀴 도는 동안 5월 5일 어린이날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영농조합원들은 모두가 나서서 마을 청소를 하고 마을 입구에 부통령님 오심을 환영한다고 현수막도 걸고 온 동네가 잔치 분위기였습니다.
면장이 와서 돌아보고 살피는가 하면 군수가 왔다 가고 마지막으로는 도지사까지 와서 이장과 영농조합원들에게 인사를 하고 갔습니다. 이 마을 생긴 이래 군수 도지사가 왔다 가기는 이번이 처음입니다. 그런 마을에 부통령이 오신다니 얼마나 경사스런 일입니까.
하얀 지붕에 아름다운 꽃들이 둘러 있는 코끼리 회관 회의실이 꽃 장식으로 채워졌습니다. 그리고 동화마을초등학교 어린이 합창단이 예쁘게 차려 입고 부통령을 맞이하는 환영의 노래와 어린이날 노래를 합창하기 위해 준비를 했습니다.
식이 시작되기 한 시간 전에 경찰 버스가 오고 동네 요소요소에 경찰관들이 자리를 잡고 경계를 하는가 하면 도지사 군수 면장이 모두 나와 부통령 맞을 준비를 했습니다.
온 동네 사람들도 모두 태극기를 들고 나와 동네로 들어오는 길목에 줄을 서서 부통령이 오기를 기다렸습니다.
이윽고 9시에 부통령이 탄 차가 도착했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모두 태극기를 흔들며 환영했고 도지사가 맨 앞에 나가 인사를 했습니다.
키가 크고 늘씬한 부통령은 차에서 내리며 손을 흔들면서 도지사와 악수를 나누며 말했습니다.
“이장님은 어디 계신가요?”
도지사가 멀찍이 서서 바라보는 이장을 가리키며 손짓을 했습니다.
“이장님, 이리 오시지요.”
이장이 겸손하게 허리를 숙이고 부통령 앞으로 갔습니다. 부통령이 반가워하면서 악수를 하면서 이장을 품어 안으며 말했습니다.
“이장님, 감사합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이장도 활짝 웃으며 인사했습니다.
“이렇게 저희 동네까지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부통령님.”
그 모습을 본 동네 사람과 영농조합 이사들이 감격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부통령이 마을을 둘러보며 말했습니다.
“듣기보다도 더 아름다운 마을입니다. 우리나라에 동화책에서나 볼 수 있는 아름다운 마을을 만드시느라 얼마나 노고가 크셨습니까.”
“부통령처럼 훌륭한 어른의 도움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부통령이 이장의 손을 잡고 말했습니다.
“어떤 마을인지 많이 궁금했습니다. 이장님이 이 마을을 한 바퀴 돌면서 소개를 해주시겠습니까?”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이장은 앞서서 골짜기 위에 설치된 저수지로 갔습니다. 그날따라 날씨가 화창하여 저수지 둑에 만발한 구기자와 오미자 꽃이 꽃동산처럼 보였습니다. 저수지에 가득히 찬 맑은 물이 봄바람에 찰랑거리며 잔잔한 물결을 일으키고 그 물속을 팔뚝만한 물고기들이 이리저리 헤엄치고 있었습니다. 부통령이 꽃그림 같은 방죽 둑을 보며 감격하여 말했습니다.
“참 아름답습니다. 물도 맑고 꽃도 좋고 물고기마저 나를 반기는 것 같습니다. 이장님은 어떻게 이 골짜기에다 저수지 만들 생각을 하셨습니까.”
“모두가 높으신 어른님의 덕입니다.”
부통령은 그 말뜻을 정부에서 도와서 그렇게 했다는 말로 듣고 대답했습니다.
“내야 뭐 한 것이 있나요. 과찬이십니다.”
이장은 속으로 그런 말이 아닌데 하고 생각하며 물길을 따라 동네 수영장과 공중목욕탕과 탈의실까지 소개했습니다. 부통령은 파란 하늘이 가득히 내려앉아 찰랑거리는 수영장을 들여다보며 또 감탄했습니다.
“놀랍습니다. 이렇게 좋은 수영장을 가지고 있는 마을 사람들은 얼마나 행복하시겠소.”
이장이 환히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름이면 마을 사람들은 물론 초등학교 학생들이 와서 수영교육을 받기도 합니다. 장차 우리 동네에서 세계적인 수영선수도 나올 것입니다.”
부통령은 만족하여 크게 웃었습니다.
“하하하, 아무렴요, 우리나라를 빛낼 수영선수가 나오고도 남을 것 같습니다. 산속 마을에 이렇게 훌륭한 수영장이 있다는 말을 들어본 일이 없습니다. 이장님 감사합니다.”
“과찬이십니다.”
이장은 발길을 유리 온실로 옮겼습니다. 초여름이 다가오고 있는데 온실 속에는 오이, 토마토, 참외, 수박이 주렁주렁 매달려 부통령을 보고 싱싱하고 파란 얼굴로 환영하는 듯 반짝거렸습니다. 부통령이 수박을 가리키면서 말했습니다.
“언제 심었기에 수박이 저렇게 자랐습니까?”
“겨울 동안에 수십 트럭을 따내고 아직도 더 딸 수 있게 남은 것들입니다.”
“하하하, 한겨울에도 수박을 내다 팔았습니까?”
“예, 한겨울에 파는 수박은 제 값을 톡톡히 합니다.”
부통령이 고개를 돌려가며 말했습니다.
“나는 그런 줄도 모르고 살았습니다. 이 수박들을 한겨울에 누가 사다 먹는가요?”
“서울 부자들이 사먹는 줄 압니다.”
부대통령이 웃으며 물었습니다.
“이 마을 사람들은 한겨울에 나는 수박을 먹고 살지 않았습니까?”
48. 부통령님 왜 이러십니까
“네, 집집마다 몇 통씩 돌리기도 했습니다.”
부통령이 밝게 웃으며 말했습니다.
“바로 이 동네가 서울 사람이 부러워할 부자로군요. 하하하.”
“그렇습니다.”
“부자가 따로 있나요. 이 동네 사람들이 바로 부자지요.”
이장은 또 양어장으로 안내했습니다. 양어장은 마치 봄 바다처럼 잔잔하고 크고 작은 물고기들이 이리저리 몰려다니고 있었습니다. 부통령은 또 감격해서 물었습니다.
“이렇게 기른 물고기는 어떻게 하십니까?”
이장이 겸손히 대답했습니다.
“일 년 내내 민물고기 집에서 사갑니다.”
“참 대단하십니다. 이렇게 다양한 생각을 하시는 줄은 몰랐습니다.”
기자단이 몰려와 동네와 유리 온실과 양어장을 찍는가 하면 부근 동네에서 부통령을 보려고 온 사람들로 붐볐습니다. 이장이 앞장서서 동네 안으로 발길을 돌렸습니다. 집집마다 마당에는 잔디와 꽃밭이 어울려 있고 빨갛고 파란 지붕과 둥그런 현관문과 꽃그림이 아름다운 집들을 보고 부통령이 말했습니다.
“저 현관문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꽃 속으로 들어가는 벌 나비 같을 것 같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이장이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온 가족이 꽃 대문을 열고 들고 나면서 꽃 같은 마음을 가지라고 그렇게 했습니다.”
온 동네를 다 둘러본 부통령이 배불뚝이 영감네 집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습니다.
“어째서 저 집만은 옛날 그대로 있나요?”
“그 댁은 우리 마을에서 가장 부자이고 주인어른이 옛것을 지키려는 의지가 깊으셔서 그대로 있습니다.”
“이 아름다운 동네에 그렇게 우중충한 집이 끼어 있으니 마치 흠집 같네요. 하하하.”
부통령이 언덕 위에 높이 서 있는 십자가 탑과 교회를 바라보면서 물었습니다.
“이장님은 교회에 다니시나요?”
이장은 머리를 숙이고 대답했습니다.
“저는 교회를 다니지 않습니다. 그러나 교회 건물만은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고 있습니다. 동네에 교회가 있는 것은 구색이 맞는 것 같지 않습니까?”
“그렇지요. 교회가 하는 역할이 큽니다. 누가 그랬지요. 파출소 열 개 짓지 말고 교회 하나를 지으라고 말이오.”
“그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부통령님께서는 교회에 나가시는지요?”
“나도 교회는 안 나갑니다. 그러나 교회가 하는 역할만은 인정하지요.”
대답을 한 부통령이 교회 십자가를 중심으로 동네 전체를 하트 모양으로 둘러쳐진 태양광 발전기와 외등을 보면서 물었습니다.
“이렇게 설치한 태양광 발전으로 동네 사용량의 전기가 충분한가요?”
“예, 쓰고도 남습니다.”
“참으로 보기도 좋고 실용적인 아이디어요. 돌아가며 세워놓은 외등이 밤에 켜지면 장관이겠습니다.”
“예, 동화속의 그림 같다고 밤에 구경 오는 사람들도 적지 않습니다.”
“이 마을 명이 동화마을이 아닌가요?”
“그렇습니다. 동화마을입니다.”
부통령은 집집마다 벽화가 그려 있는 것과 마을 여기저기에 동물 형상의 집이 있는 것을 보면서 고개를 끄덕이면서 중얼거렸습니다.
“과연 동화 속에 나오는 마을 같군. 기발한 구상이야. 이렇게 하자면 막대한 재원이 필요했을 텐데 그 돈이 어디서 나서 이런 공사를 했을까? 정부에서도 이런 예산을 내준 적이 없는 것 같은데…….”
동네를 다 둘러본 부통령이 코끼리 회관으로 들어갔습니다. 수행하던 도지사와 군수와 국회의원이 따라 들어갔습니다.
회관 안에는 화려한 꽃 장식에 부통령 동화마을 반문 환영이라는 플랜카드가 크게 걸려 있고 단상에는 의자 일곱 개와 강단이 준비되었습니다.
서울과 지방 방송국 촬영 팀과 신문사 기자들이 플래시를 터트리는 불빛이 번쩍거려서 식장은 더욱 화려하게 빛났습니다.
단상 의자 중앙에 부통령이 앉고 그 왼편으로 도지사 군수 지역 국회의원이 앉고 부통령 오른편에는 배불뚝이 영감이 앉고 그 옆에 이장이 앉았습니다. 그리고 끝에 빈 의자가 하나 놓였습니다.
동네 사람들이 쑥덕거렸습니다.
“저 배불뚝이 영감이 무얼 했다고 그 자리에 앉는 거야? 그 자리는 이장이 앉아야 맞지.”
“누가 아니래, 저 욕심쟁이 배불뚝이 영감, 아래 위도 모르고 높은 자리 좋은 것은 알아서…….”
“이장이 거기 앉으라고 하면 양보할 것이지 제가 뭔데 그 높은 자리에 앉는 거람? 심술만 부리던 영감쟁이, 여기 일반석에 앉아도 내쫓고 싶은데 말이야.”
“동네에서 가장 나이가 많고 부자니까 이장이 대우하는 거 아닌감.”
동네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쑥덕거렸습니다. 심술만 부리던 배불뚝이 영감이 단상에 올라 있는 꼴은 눈꼴이 셔서 못 보겠다는 것입니다.
자리가 정리되자 면장이 사회를 맡고 환영식을 시작했습니다. 국기에 대하여 경례를 하고 애국가를 부르고 식순에 따라 이장이 동화마을 가꾸기 경과보고를 한 다음 부통령의 축사가 있을 예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장이 경과보고를 시작하려고 강단에 섰을 때 부통령이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일반석을 향해 손을 저으며 소리쳤습니다.
49. 부통령이 자리를 내 준 사람
“회장님, 정병일 회장님!”
부통령이 이렇게 부르는 소리에 단상은 물론 단 아래 일반석에서도 부통령이 가리키는 쪽으로 눈길을 쏘았습니다. 뒷좌석에 앉은 하 이사가 강 이사한테 속삭였습니다.
“정병일이 누구야?”
“글쎄 처음 들어보는 이름인데 혹시……?”
하 이사가 물었습니다.
“혹시라니? 아는 사람인가?”
이때 부통령이 다시 손짓을 했습니다.
“회장님, 이 자리로 올라오세요.”
사람들의 눈길을 받고 있는 정병철 노인이 안 된다고 손을 저으며 자리에서 일어서지 않았습니다. 부통령인 다시 손짓을 하며 불렀습니다.
“회장님이 안 오시면 제가 내려가겠습니다.”
그제야 정병철 노인이 마지못해 자리에서 일어나 단상으로 올라갔습니다. 그 모습을 배불뚝이 영감이 눈을 흘겨보면서 중얼거렸습니다.
“정병일이라고 하는데 저 늙은이는 정병철이라면서 왜 제가 일어나? 허허 별꼴이야.”
그리고 바라보니 자리에서 일어선 부통령이 정병철의 손을 잡고 자기 자리를 내주었습니다. 동화마을 사람들은 모두 놀랐습니다. 그 모습에 놀란 막일로 살아가는 동네 영감이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중얼거렸습니다.
“저 늙은이는 이장네 집에 얹혀사는 식객이 아닌가. 그런 사람이 어떻게 된 거야, 세상에 이럴 수가…….”
옆에 앉은 부인도 한 마디 했습니다.
“별꼴이네유. 하늘같은 부통령님이 저 늙은이한테 자리를 내주다니 이게 우찌된 일이래유.”
하 이사 옆자리에 앉았던 서 이사가 말했습니다.
“하 이사, 나는 저 노인을 어딘가 특이한 점이 있는 노인이라고 생각해 왔는데 자네는 어떤 생각을 했는가?”
“그렇게 생각한 적은 없고, 아무 것도 안 하면서 일가도 친척도 아닌 사람이 남의 집 사랑방을 차지하고 공짜 밥 먹는 걸 보고 너무 뻔뻔스런 인간이라고 생각했지.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인지 모르겠구먼.”
“부통령이 자리를 내 줄 정도면 대통령이 아닌가?”
“후후후, 그렇게 말하니 말이 되네.”
이때 부통령 옆에 앉았던 도지사가 자리를 내주고 일어섰습니다. 그러자 옆에 있던 군수가 자리를 내주고 일서서자 끝에 앉았던 국회의원이 자리를 한쪽 끝에 비어 있는 자리로 옮겨 앉았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모두 놀라운 눈으로 그것을 바라보고 신문 기자들은 그럴 때마다 카메라 셔터를 눌러 번쩍거리고 티브이 방송기자들은 따라다니며 앵글을 돌려댔습니다.
단상에는 한바탕 쇼가 벌어졌습니다. 그 모습을 배불뚝이 영감은 한 자리에 떡 버티고 앉아 꼼짝도 않고 바라보았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숙덕거렸습니다.
“저 배불뚝이 영감 뭐가 잘났다고 버티고 앉아 있담.”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는 늙은이가 대접받는 건 알아서.”
“어이구, 당장 쫓아가 끌어내리고 싶구먼.”
“체면도 안면도 없는 늙은이라니까.”
이때 부통령이 정병철 노인 손을 잡고 인사했습니다.
“회장님, 어떻게 여기까지 와 계십니까?‘
정병철 노인이 점잖게 받았습니다.
“왜 나는 이런 마을에 오면 안 되겠습니까?”
부통령이 허리를 굽실거리며 말했습니다.
“교수님, 말씀 낮추십시오.”
“아닙니다. 이 나라에서 일인지하 만인지상이십니다.”
“그런 말이 저한테는 안 통합니다.”
정병철 노인이 진지하게 말했습니다.
“부통령님, 너무 겸손하지 마시고…….”
부통령이 반가움을 감추지 못하고 벙글거리며 말했습니다.
“이런 귀한 자리에서 교수님을 뵙게 되어 기쁩니다. 이 동네가 우리나라 최고의 모범동네로 인정이 되어 제가 왔습니다만 교수님을 여기서 뵈올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이 동네에 연고라도 있으셨습니까?”
“그런 건 없어요.”
“교수님은 삼년 전인가 약재 연구를 위해 외국에 가셨다는 소문은 들었습니다. 그런데 언제 귀국하셨는지요?”
“맞아요. 내가 약재 연구를 위해 서울을 떠난 지는 3년이 거의 되어 갑니다. 약재를 연구하기 위해 돌아다니다가 아주 무서운 사람을 만나서 그 사람한테 잡혀 있습니다.”
“네? 잡혀 있으셨다고요?”
“그렇습니다. 꽉 잡혀서 못 벗어나고 있지요. 하하하.”
“그 사람이 누굽니까?”
정병철 노인이 이장을 가리켰습니다.
“저 사람이오. 저 사람 때문에 내가 꼼짝을 못하고 있소.”
부통령이 이장을 바라보았습니다. 이장이 민망하여 어쩔 줄을 모르고 굽실거렸습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부통령이 이장을 바라보며 크게 웃음소리를 던졌습니다.
“죄송하다고요? 이런 어른을 삼 년씩이나 인질로 잡아 놓고 죄송하다고만 하면 됩니까? 하하하하.”
이장이 더 허리를 굽혔습니다. 부통령이 웃음 가득한 얼굴로 또 말했습니다.
“동화마을 이장님 대단하시오. 이렇게 훌륭한 어른을 어떻게 하셨기에 꼼작도 못하게 하시었소? 장하십니다. 정말 장하십니다, 하하하.”
부통령이 정병철 노인의 손을 잡고 강대상 앞에 서서 입을 열었습니다.
“제가 존경하던 어른님을 여기서 뵙게 되어 진심으로 한없이 기쁩니다. 저와 정병일 회장님은…….”
50. 정병철이 누구인가
부통령이 강당 사람들을 둘러보며 말을 계속했습니다.
“이 자리에 함께하신 어른님은 제가 대학 다닐 때 감동적인 명 강의를 하시던 교수님이셨고 본래는 한경구릅 총회장님이십니다. 구릅 안에는 여러분이 잘 아시는 한경제약주식회사가 있고 전국에 천 개가 넘는 한경 마트와 한경자동차주식회사를 가지고 계신 분이시며 국가적으로 어려울 때 재정적 지원을 아끼지 않고 해 오신 어른이십니다.”
이 말에 동네 사람들이 서로 얼굴을 바라보며 놀란 눈으로 숙덕거렸습니다.
“어마! 그런 어른이 우리 동네에서! 그런 줄도 모르고 난 만날 때 인사도 안 했는데.”
“누가 아니래, 이장네 집에서 얹혀사는 식객이라고 무시했는데 이럴 수가!”
“사람은 겉으로 보아서는 모르는 거야.”
“그렇게 유명한 어른이 어떻게 날마다 우리보다도 못한 옷을 입고 다닐 수가 있담!”
“역시 훌륭한 분은 어딘가 다른 데가 있다니까.”
어린이날 노래를 부를 합창단 예쁜 차림의 아이들도 저희기리 속닥거렸습니다.
“할아버지 짱이다 짱!”
“놀랐어. 그렇게 훌륭한 할아버지였다고!”
“할아버지, 길에서 만났을 때 인사 안 드려서 미안해요.”
“저 할아버지가 우리 동네를 이렇게 만든 건 아닐까?”
“우리 학교도 저 할아버지가 도와주셨는지 몰라.”
부통령이 좌중을 둘러보며 말했습니다.
“저는 이 모범 동화마을에 와서 놀라운 변화를 보면서 하고 싶은 말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저보다는 제가 존경하는 교수님을 만났으니 저의 축하의 말씀은 다 드린 것으로 하고 그 대신 교수님께서 어떻게 하여 이 마을에 오셨으며 무슨 일을 하셨는지 직접 들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때 박수가 울러 퍼지는 가운데 정병일 회장이 마이크를 잡았습니다.
“감사합니다. 내가 진정 하고 싶은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오늘이 있기까지 동화마을에서 가장 큰 공을 세운 이장님의 소감을 들어보겠습니다.”
이장 이신욱이 자리에 일어나 인사를 했습니다.
“우리 동화마을이 이렇게 아름다운 마을이 되어 부통령님까지 모시고 마을 행사를 치르기까지 적극적으로 협조하신 영농조합 이사님들과 온 정성을 다하여 조합 일을 도우신 여러분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저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었습니다. 다만 정병일 회장님의 고견을 받들어 심부름을 했을 뿐입니다. 저도 이렇게 되기까지 모시고 살면서도 정회장님이 어떤 분이신지 많이 궁금했었습니다. 그래서 몇 번이고 어떤 어른이시냐고 여쭈어 보고 싶었지만 알 수 없는 위엄이 있으신 분이라 감히 여쭈어보지 못하였습니다. 다만 저와 같이 동화마을을 동화속의 마을처럼 아름답게 꾸며 보자는 그 말씀이 좋아서 말씀을 따르다 보니 이렇게 영광스런 자리에까지 서 보게 되었습니다. 저는 더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다시 정회장님을 모시겠습니다.”
정병일 회장이 자리에서 일어나 강대상에 섰습니다.
“저는 야생 약초를 찾아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고 다니는 나그네였습니다. 특히 우리나라에서 나는 약초의 효능이 다른 나라 것보다 월등히 좋다는 것을 알고 우리나라에 숨어 있는 약초를 찾아다니다가 숲속에 숨어 있는 약초보다 더 귀한 인간 약초 이신욱 이장을 만났습니다. 이 마을에서 태어나 마을을 지키는 이장님이 생각하는 것이 나와 같은 꿈을 꾸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이 마을을 살기 좋은 마을로, 고향을 떠난 사람들이 다시 돌아올 수 있는 마을을 만들어 보겠다고 생각하여 여기에 정착했던 것입니다. 마을 주민 여러분 그 동안 저를 받아 주시어서 고마웠습니다.”
그 말에 좌중이 떠나갈 듯한 박수가 터졌습니다. 정회장은 박수가 끝나기를 기다려 다시 입을 열었습니다.
“나는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지만 세계적인 부자가 한 말을 잊지 않고 살았습니다. 즉 <가난한 집에 태어나 가난한 건 당신 잘못이 아니지만 죽을 때도 가난한 건 당신의 잘못이다.> 라는 말이 저를 부지런한 사람으로 만들었고 남들이 부러워할 만큼 돈을 벌고 보니 또 세계적인 부자들이 재산을 어떻게 쓰는가를 보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 부자는 자기 재산을 자식들한테만 물려주려고 합니다. 세계적인 큰 부자는 자식한테 재산을 물려주기보다 보이지 않는 재산을 물려주고 보이는 재산은 사회적으로 가치 있는 곳에 사용합니다. 나는 작은 힘이나마 이 마을을 아름답고 살기 좋은 마을로 만든 것을 매우 기쁘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때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선 배불뚝이 영감이 말을 막았습니다.
51. 끝 / 그런 줄도 모르고
“영감! 아니 정회장님이라고 했지. 나도 한 마디 합시다.”
마을 사람들이 긴장했습니다. 허 이사가 장 이사한테 속삭이는 소리로 말했습니다.
“저 심술통 영감이 또 무슨 실수를 하려고 저러나…….”
“글쎄, 걱정스럽네.”
정병일 회장이 돌아서서 영감님한테 겸손히 말했습니다.
“어른께서 하실 말씀이 있으시면 하시지요.”
배불뚝이 영감이 배를 쑥 내밀고 물었습니다.
“영감, 아니. 정회장. 올해 몇 살이시오?”
“제 나이가 궁금하십니까? 올해 78세입니다.”
배불뚝이 영감이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반문했습니다.
“일흔 여덟이란 말이오?”
“그렇습니다.”
“허허, 정회장 미안하오. 나는 일흔 여섯 살이오. 늙은이가 너무 젊어 보여서 나보다 네댓 살 아래일 것으로 생각했는데 잘못 보아 미안하오. 이제 형님으로 모시겠소.”
말과 동시에 그 앞에 허리를 푹 숙여 보였습니다. 숙인 등 위에 우레 같은 박수가 쏟아졌습니다.
정병일 회장이 겸손히 말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저는 어른께서 마을의 어른으로 존경 받는 모습을 보면서 부러워했습니다.”
배불뚝이 영감이 그 앞에 다시 허리를 깊이 숙여 인사를 하면서 마이크를 잡고 사회자한테 양해를 구했습니다.
“내가 한 마디 더 하고 싶은데 사회자 면장님,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괜찮습니다. 말씀하시지요.”
이장은 속이 탔습니다. 이렇게 거창한 행사에서 또 무슨 말을 하여 놀라게 해 줄까 걱정이 되어서입니다. 배불뚝이 영감이 예를 갖추고 부통령과 도지사를 향해 정중히 인사를 하고 입을 열었습니다.
“나는 이 동네에서 가장 부자입니다. 그래서 부러울 것도 없고 무서울 것도 없이 큰소리치며 살았습니다. 동네 사람을 우습게보았고 이장이 하는 일을 같잖게 보았는데 오늘서야 감았던 눈이 떠졌습니다. 진짜 큰 부자 정회장님의 말씀을 듣고 해 오신 일을 보니 나는 부자도 아니고 사람도 아니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진짜 부자는 나같이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이 나이가 되도록 둘러보니 죽을 때 재산 많이 남긴 사람 치고 자식들한테 대접 제대로 받는 사람을 못 보았습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자식들이 재산 싸움하느라고 부모도 형제애도 모르고 남만도 못하게 깨지는 집안을 수없이 많이 보았다는 말입니다. 나는 이제 재산을 모두 영농조합에 바치고 영농조합에서 하는 일을 적극적으로 도울 것이며 집도 4백 평 대지 중에 50평만 내 집을 짓고 동네 사람들과 어울려 살겠습니다. 정회장님께서 내가 부럽다고 하신 말씀은 인사의 말씀이고 나는 그 말씀에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내 집 짓고 나머지 400평에는 영농조합 창고를 지어 드리겠습니다.”
이 말에 부통령과 도지사, 국회의원이 일어서서 박수를 치자 참석한 모든 사람이 박수를 치면 기뻐했습니다. 박수가 그치고 잠잠해지자 배불뚝이 영감이 강당 한쪽 구석 자리에 앉아 있는 목사님을 향해 말했습니다.
“목사님한테 사과할 일이 있습니다. 나는 일평생 교회가 동네에 있는 것이 마땅치 않아서 없애버리고 싶어서 별짓을 다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보니 교회가 있는 마을이 얼마나 아름다운 마을인가를 깨달았고 내 죄가 얼마나 컸었는지도 알았습니다. 이제 하나님이 나를 용서해 달라고 교회에 나가고 싶은데 목사님이 받아주시겠습니까?”
목사님이 기뻐서 벌떡 일이나 큰소리로 환영했습니다.
“할렐루야!!”
그 소리를 따라 동네 교인들이 모두 자리를 차고 일서서서 할렐루야를 외쳤습니다.
부통령도 도지사도 모두 한 목소리로 두 팔을 치켜들고 외쳤습니다.
“할렐루야!”
사방에서 기자들이 누르는 셔터 소리와 플래시 터지는 불빛이 온 강당을 대낮같이 밝히고 박수 소리가 코끼리 회관이 들썩거릴 만큼 크게 울려 퍼졌습니다.
“할렐루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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