뒹굴뒹굴 1 / 대장뽑기
동네 동갑내기 아이들 일곱이 모였습니다.
키가 가장 크고 잘 생긴 성길이가 말했습니다.
“우리는 모두 동갑내기다. 누가 대장이 될지 씨름으로 결정하자.”
연웅이가 대답했습니다.
“좋다, 우리 가운데 누가 대장인지 결판을 내 보자.”
지홍이도 좋다고 했습니다. 그 뒤를 이어 병석이도 좋아, 좋아하고 손뼉을 쳤습니다.
그러자 만석이가 나섰습니다.
“그럼 심판은 내가 맡는다. ”
황소 도련님으로 통하는 황수가 배를 쑥 내밀고 말했습니다.
“좋아. 나하고 상대할 사람 나와!”
아이들이 황소처럼 뒤룩뒤룩하고 뚱뚱한 황수를 바라보며 침을 꼴깍 삼켰습니다. 잠시 멈칫거리던 아이들 가운데 연웅이가 나섰습니다.
“나하고 한판 붙자!”
“좋아, 네가 감히!”
황수가 황소처럼 발을 쿵쿵 구르며 눈을 부라렸습니다. 만석이가 가운데 서서 말했습니다.
“좋다, 이제 황수하고 연웅이하고 한판 붙는다. 자자. 이렇게 잡고 시작!”
황수와 연웅이 제법 황소싸움이라도 하는 듯 식식거리며 맞붙었습니다.
“네가 감히!”
처음에는 황수가 뚱뚱한 배로 밀어붙이자 연웅이 밀려났습니다. 그러나 얼마 못 가서 황수가 쿵하고 나뒹굴고 연웅이가 그 뚱뚱한 배에 올라타고 소리쳤습니다.
“황소 잡았다. 야호!”
황수가 일어나 성길이를 노려보며 말했습니다.
“너 나와! 이번에는 너 가만 두지 않을 거다. 썅!”
두 번째로 성길이가 나섰고 상대를 하자마자 또 쿵하고 나뒹구는 건 황수였습니다. 심판 만석이가 또 성길이 팔을 들어 올렸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황수가 지쳤을 것 같다. 다음에는 지홍이하고 병석이가 겨루고 그 가운데 이긴 사람이 황수하고 겨루기로 한다.
단단하게 생긴 지홍이가 자신 있게 나섰고 홀쭉이 병석이가 갸름한 얼굴에 겁을 먹고 나섰습니다.
두 사람이 맞잡았을 때 만석이 크게 시작하고 외치자 병석이가 날쌔게 지홍이 다리를 걸어 넘어뜨렸습니다.
심판 만석이가 곁에 서 있는 상진이를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김상진, 방병석하고 붙어라!”
얌전하게 생긴 상진이 못 이기는 척 몸을 꼬며 나섰습니다. 지홍이를 한방에 넘어뜨린 병석이 자신 만만하여 말했습니다.
“상진이가 나를 상대하겠다고? 하하하.”
그렇게 하여 두 사람이 맞붙었습니다. 씨름은 쉽게 판결이 나지 않았습니다. 서로 다리를 걸고 밀고 밀리다가 상진이가 안다리 치기로 병석이를 넘어뜨렸습니다. 그것을 본 황수가 좋아서 손뼉을 쳤습니다.
심판 만석이가 다음 사람을 지적했습니다.
“황수를 이긴 연웅이 나와, 상진이하고 한판 붙어라.”
황수를 이긴 연웅이 자신만만하게 나서서 상진이를 상대했습니다. 그러나 상진이가 보기보다 얼마나 강한지 연웅이 무릎을 꿇고 말았습니다. 심판 만석이가 불렀습니다.
“다음은 성길이 나와서 상진이와 붙어봐.”
성길이 멋을 내고 나서서 주먹을 쥐어 보이며 자신 있게 말했습니다.
“김상진, 너 정도는 내 상대가 아니야 포기하는 게 어떨까?”
상진이 진득하게 대답했습니다.
“결과는 입으로 하는 게 아니다.”
두 사람이 맞붙었습니다. 서로 달라붙어 밀고 밀리다가 성길이가 벌러덩 나가떨어졌습니다. 심판 만석이가 상진이 팔을 높이 치켜 올리며 소리쳤습니다.
“김상진 만세! 다음 상진이와 겨룰 사람?”
황소처럼 식식거리고 섰던 황수가 나섰습니다.
“나!”
만석이 받았습니다.
“좋아, 황수하고 상진이!”
황수가 상진이 허리띠를 잡으면서 귓속말로 했습니다.
“알았지? 너 나 이기면 죽어. 내 체면 살려줘.”
상진이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러나 둘이 주고받는 귓속말은 아무도 몰랐습니다. 두 사람이 겨룰 준비가 되자 심판이 소리쳤습니다.
“시작!”
화가 난 듯 식식거리는 황수가 이리 밀고 저리 당깁니다. 몸 크기가 반밖에 안 되는 상진이 이리저리 끌려다녔습니다. 그리고 버티기도 하다 슬쩍 밀기도 하며 힘써 싸우는 척해 보였습니다.
아이들은 손뼉을 치면서 상진이 이겨라 황수 이겨라 편이 갈려 응원을 했습니다. 그렇게 싸우던 상진이 발을 헛딛는 척하며 한 무릎을 꿇었습니다. 심판 만석이 황수 손을 번쩍 들면서 판결을 했습니다.
“조황수 승리! 지금 다른 사람을 다 이긴 상진이를 물리친 황수가 우리의 대장이다.”
이렇게 하여 황수가 대장이 되었습니다.
아이들이 대장 뽑기 씨름을 했다는 소문이 온 동네에 퍼졌습니다. 그 소리를 들은 상진 아버지가 아들한테 물었습니다.
“상진아, 네가 동네 아이들을 다 이기고도 황수한테 졌다는 말이 맞느냐?”
“네.”
“동네 아이들을 다 이긴 네가 그 애들한테 황수가 졌다는데 그 말도 맞느냐?”
“네.”
“네가 황수한테 일부러 져 준 것이냐?”
“그래야 도련님 체면이 서지 않겠어요?”
그 말에 아버지가 정색을 하고 말했습니다.
2. 여우한테 놀란 호랑이
“그랬구나. 잘했다. 씨름 한번 져 주었다고 인생의 패배자가 되는 건 아니다. 져준 네가 멋지게 이긴 거다.”
“그렇지만 비굴한 생각이 들어요. 씨름은 당당히 겨루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맞다. 하지만 우리가 도련님 댁 덕분에 살고 있으니 어쩌겠느냐.”
“황수가 동네 대장이 된 건 내가 져주어서 된 것인데 앞으로는 대장 노릇을 하겠지요?”
“그래라, 끝까지 도련님이 대장 노릇을 할 수 있도록 네가 떡 버텨주어라. 너 때문에 대장이 된 것이기 때문에 아이들은 도련님보다 너를 더 무서워할 거다. 사자성어에 호가호위(狐假虎威)라는 말이 있다.”
“그게 무슨 말인가요?”
“여우가 호랑이 힘을 믿고 뽐낸다는 말이다.”
“여우가 어떻게 호랑이 힘을 믿고 뽐내나요?”
“어느 산 속에서 여러 동물들이 자기가 세상에서 가장 힘이 세다고 힘자랑했다고 한다. 그 가운데 호랑이에게 쫓기고 있던 여우가 있었는데 여우가 나타나서 ‘다들 물러가라 내 앞에서 감히 힘자랑을 하다니, 나하고 한판 붙을 힘이 있는 놈은 덤벼라!’ 하고 큰소리를 치자 모든 동물들이 뒤에 따라오는 호랑이를 보고 놀라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달아나더라는 이야기기다. 이만하면 설명이 되었느냐?”
“그런데 약간 재미가 없어요. 따라오던 호랑이도 여우가 그렇게 대단한 힘을 가진 줄 모르고 감히 따라온 게 실수였다는 걸 알고 그만 돌아서서 네 굽을 놓고 달아났다는 이야기로 했으면 더 재미있을 것 같아요.”
“하하하 그렇구나. 네가 나보다 낫다.”
남편이 아들과 하는 소리를 듣고 엄마가 다가와 물었습니다.
“무슨 이야기들을 그렇게 재미있게 하세요?”
남편 오준만이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당신 이야기를 하고 웃었다오.”
“네?”
“상진이가 나를 무서워하는 것 알잖소?”
“무서워하는 것보다 어려워하는 거지요.”
“어려워하든 무서워하든 상진이가 왜 나를 무서워하는지 아시오? 하하하.”
“그게 무슨 말씀이에요?”
상진이가 아버지의 말뜻을 알아채고 말했습니다.
“아버지가 호가호위하시기 때문이지요.”
“그게 무슨 말이냐?”
상진이 대답을 하려는데 아빠가 먼저 대답했습니다.
“당신의 위세를 믿고 내가 상진이한테 엄하게 군다는 말이오. 안 그렇소? 하하하.”
“내가 공처가라는 말이시우?”
“그것을 호가호위라 한다지 않소.”
상진이네 가족은 어려움 속에서도 이렇게 재미있게 삽니다. 그러나 황수네는 다릅니다. 황수 아버지나 어머니는 어디서든지 돈 자랑만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두 사람이 마음에 들지 않아도 부자이기 때문에 맞대꾸를 못하고 아쉬울 때만 마님마님 하면서 굽실거립니다.
상진이 언뜻 생각이 났습니다.
“아빠, 황수네도 호가호위하는 거 아닌가요?”
“그게 무슨 말이냐?”
“상진이는 나 때문에 호가호위하고 황수 부모님은 재산을 가지고 큰소리를 치고 살지 않나요?”
“그럴 듯한 말이다. 바로 그런 것이 호가호위라는 것이다.”
다음날입니다. 황수가 상진이를 불렀습니다.
“야, 너 숙제 다 했니?”
3. 숙제를 안 하는 대장
“응.”
“내 것도 해 주라. 난 공부하는 게 씨름하는 것보다 싫다. 내가 대장이니까 넌 내 말을 들어야 해. 알았지?”
그러면서 숙제장을 내밀어 놓고 어디론가 휭하니 달아났습니다. 상진이는 싫다고 하려다가 말았습니다. 그리고 숙제장 문제 답을 다 달아놓았습니다. 놀러 나갔다 돌아온 광우가 숙제 장을 가져가면서 시시덕거렸습니다.
“앞으로는 언제든지 네가 내 대신 해 주는 거다. 알았지?”
“응.”
광우의 숙제까지 해 주는 것을 안 엄마가 말했습니다.
“상진아, 숙제를 두 번씩이나 한다고 속상해 하지 마. 공부를 두 번 했다고 생각하면 된다. 알았지?”
“네, 엄마.”
며칠 지나서 동네 아이들이 씨름을 해서 골목대장을 뽑았다는 소문이 돌았습니다. 기환이가 응기를 보고 말했습니다.
“응기야, 네 생각에는 광우가 성길이를 당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어림도 없지. 성길이나 연웅이는 황소보다 기운이 센데 그 애가 어떻게 걔들을 이기냐?”
“그런데 연웅이하고 성길이가 상진이한테 졌다는 거야.”
“상진이는 보기보다 힘이 셀 것 같지만 그래도 연웅이는 못 이길걸.”
“연웅이하고 성길이가 무릎을 꿇어서 둘 다 이겼다는 거야. 그런 상진이가 광우한테는 졌다는 게 말이 되냐. 그렇지만 상진이를 이긴 광우가 대장이 되었다는 거야.”
응기가 킥킥거리며 말했습니다.
“기환아, 네가 한번 광우한테 도전해 보면 어떨까?”
“난 대장하기 싫어서 안 한다.”
“헤헤헤, 지는 게 창피하니까 그런 소리를 하는 거지?”
“내가 했다 하면 이기지만 안 한다면 안 해, 그럼 네가 한번 도전하여 골목대장을 해 볼래?”
“나도 한 한다. 대장을 하려면 나라 대장을 해야지 골목대장이 뭐냐?”
“흥, 두고 보자 네가 골목대장 명령을 어떻게 당하는지 두고 볼 거야.”
“두고 봐라. 내가 그까짓 게 대장이라고 날 어떻게 하려고 하면 가만 둘 줄 알고, 씨이.”
그리고 며칠 뒤에 동네 아이들이 놀이터에서 만났습니다. 골목대장이 된 광우가 기환이를 불렀습니다.
4. 엉덩이에 뿔난 망나니
“박기환!”
“왜?”
“이리 와.”
광우 뒤에서 광우 가방까지 둘러 멘 상진이 기환이 기색을 살폈습니다. 기환이 상진의 눈치를 보면서 대답했습니다.
“왜 불렀냐?”
광우가 상진이가 멘 가방을 가리켰습니다.
“저 가방 하나 네가 들어!”
“그걸 내가 들어야 하냐?”
“들라면 들어. 상진아, 내 가방 기환이한테 맡겨라.”
기환이 상진이가 내주는 가방을 둘러메면서 중얼거렸습니다.
“제 가방은 제가 지고 가야지 이게 뭐야.”
기환이는 상진이가 무서워서 가방을 대신 짊어진 것입니다. 동네에서 상진이를 당할 아이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고 광우네 머슴의 아들이라 광우하고 싸우면 그 애 편을 들어줄 것이 빤하기 때문입니다.
어디서든지 상진이를 앞세우고 다니는 광우는 골목 대장노릇을 제법 합니다. 그러나 시험만 보면 빵점을 맡아 놓고 합니다.
골목대장 노릇을 하는 광우의 못된 짓은 일일이 말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상진이를 등지고 으스대던 시절도 중학교를 가고부터 끝났습니다.
상진이는 실력 좋은 중학교로 가고 광우는 그렇지 못한 학교로 진학하여 한 학교로 다니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골목대장 광우는 학교에서 공부는 못하고 일만 저지르는 말썽꾸러기들과 어울려 공부는 하지 않고 못된 짓만 하여 선생님과 부모님 속을 썩였습니다.
다른 아이들과 달리 돈 많은 집 아들인 광우는 아이들과 어울리는 사이에 돈을 펑펑 써서 아이들의 환심을 샀고 그리하여 광우파라는 아이들 그룹이 만들어지고 광우는 우두머리가 되어 설쳐댔습니다.
중학교 3년을 엉망으로 시간 채우기로 끝난 광우는 실력이 모자라서 고등학교를 가지 못했습니다. 다른 아이들은 고등학교를 다니는데 광우는 할 일이 없으니 집에서 말썽만 부렸습니다.
그러던 중 하루는 상진이 동생 상숙이를 제 하인 다루듯 괴롭히고 있었습니다. 광우는 큰 대야에다 물을 퍼다 놓고 마루에 걸터앉아 명령했습니다.
“야, 상숙아, 와서 내 발 좀 씻겨라.”
상숙이가 힐끗 쳐다보고 대꾸했습니다.
“네 발 네가 씻어라. 왜 남 보고 씻겨 달라는 거야?”
“뭐야? 내가 누군지 몰라?”
“네가 누군데?”
“나 이 집 주인 장남이다. 넌 우리 머슴 딸, 주인 발도 못 씻기냐? 어디다 대고 항의야?”
그러면서 물을 한 주먹 떠서 상숙이 머리에다 뿌렸습니다. 상숙이 바락 화를 냈습니다.
“네까짓 게 뭔데 나까지 부려먹으려고 그래?”
“네까짓 게라고 했니?”
“그래, 네까짓 게 뭔데 나까지 머슴으로 아느냐고 했다 왜?”
“저년이 그래도!”
이번에는 물을 더 많이 움켜쥐고 뿌렸습니다. 그 물이 동생 머리 위로 쏟아지는 것을 상진이 발견했습니다.
5. 그래도 말대꾸냐?
상진이 소리쳤습니다.
“마광우! 너 무슨 짓을 하는 거야?”
광우가 태연히 대답했습니다.
“나? 상숙이 머리에 물 좀 주었다. 빨리 커서 시집가라고.”
“뭐야?”
“왜 잘못한 거냐?”
화가 치민 상진이 욕을 뱉었습니다.
“너 이 새끼!”
“뭐라고? 나한테 이 새끼라고 욕했니?”
“그렇다. 이 너구리 새끼야.”
“뭐? 너의 애비가 나를 도련님이라고 부르라고 가르친 거 알고 하는 소리냐?”
“뭐야, 이 새끼야!”
상진이 달려들어 광우가 발을 담그고 있는 놋대야를 번쩍 들어 그 머리에 쏟아 부으며 소리쳤습니다.
“너도 물벼락 맞고 더 커 보아라, 이 너구리같은 새끼!”
갑자기 물벼락을 맞은 광우가 벌떡 일어서며 상진이 멱살을 잡았습니다. 그 순간 놋대야가 굴러가 마당 끝에 빈 항아리에 부딪치며 쨍그랑하고 시끄러운 소리를 냈습니다. 광우는 한 주먹에 상대를 날려버릴 생각으로 힘을 썼으나 상진의 날랜 팔 돌려막기에 걸려 오히려 쿵하고 나가떨어졌습니다. 벌러덩 자빠진 광우는 너구리처럼 꿈틀꿈틀 일어서며 와락 달라붙었습니다. 그러나 상진의 힘을 당할 수 없는 광우는 다시 철퍼덕 주저앉으며 황소 소리를 질렀습니다.
“허엉 엉!”
바로 이때 광우 아버지가 들어오면서 아들이 나뒹구는 것을 보고 소리쳤습니다.
“너 이놈, 무슨 짓이냐?”
상진이 굽실거리며 대답했습니다.
“광우가 우리 상숙이 머리에다 물을……”
주인 영감이 꽥 소리를 질렀습니다.
“뭐야? 이놈이 어디서 말대답이야?”
“…….”
“네 놈이 감히 내 아들을 둘러메쳐?”
“그런 게 아니고…….”
“그래도 말대답이냐? 못된 것 같으니!”
그리고 아들을 향해 소리쳤습니다.
“이놈아, 그렇게 튼튼한 놈이 머슴 아들 하나를 못 이기고 나가떨어지는 거냐?”
화가 치민 주인 영감이 상진의 멱살을 잡아끌며 욕을 해댔습니다.
“이 놈 나한테도 한번 해봐라. 네가 누구 덕에 먹고 시는데 주인을 몰라보고 행패냐? 그래도 네가 사람이냐? 개새끼만도 못한 놈!”
“주인님 제 말도 들어보시고 욕을 하시든지 말든지 하세요.”
“이놈이 그래도 주둥아리가 살아서 입을 놀려?”
“그게 아닙니다.”
“허허, 이놈이 누구 앞에서 꼬박꼬박 대꾸야? 당장 네 애비 불러와!”
바로 그 소리를 듣고 오기라도 하듯 상진 아버지가 들어오면서 물었습니다.
“주인마님, 무슨 일이십니까?”
주인 영감이 화가 난 소리로 대답했습니다.
“아, 이놈이 우리 아들을 개 패듯이 메치고 둘러치고 하면서 욕까지 하는 것을 내가 들었다. 아들 교육 어떻게 시킨 거야?”
사정을 알지 못하는 상진 아버지는 그저 죄라도 지은 듯이 굽실거렸습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아들을 타이르겠습니다. 우리 애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 용서하여 주십시오.”
이때 구경꾼처럼 서 있던 상숙이가 이마에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며 대답했습니다.
“아버지, 오빠가 잘못한 게 아니에요.”
주인 영감이 눈을 부릅뜨고 상숙이를 노려보며 한 마디 했습니다.
“저것도 제 붙이라고 거드는 것 보게. 아들이고 딸이고 교육을 잘 시켜야지. 어른이 말하는데 꼬박꼬박 말대꾸를 하는 버릇은 어디서 배워먹은 거야. 다 애비가 잘못 가르친 죄야 죄!”
상진이 모욕감을 느끼며 말대꾸를 했습니다.
6. 과감한 결심
“제가 잘못한 것 가지고 아버지까지 욕하지 마십시오. 주인어른 아들도 잘할 거 없습니다.”
주인 마씨가 화를 버럭 냈습니다.
“뭣이 어째? 그래도 꼬박꼬박 말대답이냐?”
“말대답이 아닙니다.”
“뭣이 어째? 이것들이! 머슴의 자식이 어디다 말대꾸냐?”
상진이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왜 내가 광우 머리에다 놋대야 물을 뒤집어 씌웠는지 사정을 알고 화를 내십시오.”
“뭐, 뭐라? 네 놈이 주인을 어떻게 알고 대드는 거냐? 이봐, 오씨. 이놈 버릇 좀 잘 가르쳐!”
상진의 아버지 오상준이 마지못해 아들을 꾸짖었습니다.
“어른한테 그게 무슨 말버릇이냐. 그만 하고 사과하거라.”
상진이 아버지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어른도 어른답게 처신해야 대우를 해드리지요.”
주인 마씨가 더 화를 버럭 냈습니다.
“저저 저! 말하는 꼴 좀 보라지. 저런 호래자식 같으니라고, 제 아비한테 대들어?”
곁에서 물이 줄줄 흘러내리는 옷을 쓸어내리며 광우가 씨부렁거렸습니다.
“아버지, 저 자식을 내쫓아요.”
주인 마씨가 한 수 더 떠 명령하듯 내뱉었습니다,
“당장들 내 집에서 나가거라. 오씨고 아들이고 다 보기 싫다.”
주인 마씨는 화를 못 이겨 울근불근 안채로 들어갔습니다. 그 뒤를 따라 어슬렁거리고 가던 광우가 혀를 쏙 내밀어 보이며 한 마디 던졌습니다.
“네깟 것들이 우리 집 아니면 갈 데가 어디 있어? 메롱!”
기가 차서 더 무슨 말인가 하고 싶은 상진이 아버지한테 말했습니다.
“아버지 우리 이 집에서 떠나요.”
아버지 오준만이 놀란 눈으로 물었습니다.
“떠나자고? 당장 어디로 가게?”
“아무 데로든 가요.”
“아무 데를 간들 이 집만 하겠니?”
“이 집에 살면 평생을 아버지는 머슴이라는 이름을 달고 살아야 하고 저는 머슴 아들이란 말을 달고 살아야 해요.”
“그건 그렇다만…….”
“서울로 가요.”
“서울? 우리 같은 것들이 서울을 어떻게 간다는 거냐?”
“우리라고 못 갈 것 없어요.”
“학교는 어떻게 하고?”
“학교는 안 다녀도 돼요.”
“학교라도 다니고 공부를 해야 네가 머슴의 자식 소리를 안 듣는다. 아니꼬워도 이 집에서 네가 고등학교 나올 때까지만 참고 살자.”
“고등학교를 안 나와도 얼마든지 살 수 있어요. 주인 영감이 학비 줄 때마다 하는 소리를 들으시지 않았어요.”
“들었지. 머슴 새끼까지 공부시키는 주인이 세상에 어디 있느냐고 할 때마다 고맙기도 했지만 마음이 아팠다.”
“서울에 가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을 거예요.”
“글쎄다. 누가 오라는 사람도 없고 아는 사람도 없는 서울이라는 곳으로 가서 살 수 있겠느냐?”
“제 친구 중에 고등학교를 못 가고 서울 가서 공장에 다니는 애가 있어요. 그 애 말로는 공장이든 어디든 사람이 사는 곳에서 죽으라는 법은 없더라는 말을 들었어요.”
이렇게 되어 상진은 부모님을 모시고 동생과 네 식구가 머슴살이를 접고 고향을 떠나기로 결정하고 가족회의를 했습니다.
7. 영원한 친구 영원한 영웅
상진이 먼저 입을 열었습니다.
“저도 이만큼 자랐고 상숙이도 많이 컸으니 우리도 이제 독립할 때가 되었습니다. 이 좋은 세상에 우리 식구 어디를 가면 굶어 죽겠습니까.”
아버지 오준만이 걱정스럽게 받아 말했습니다.
“그래도 어디 기댈 언덕이 있어야 서울을 가든 부산을 가든 갈 것 아니냐?”
“저한테 아주 작은 언덕이 하나 있습니다.”
어머니가 잠잠히 듣고 있다가 그 말에 귀가 솔깃하여 끼어들었습니다.
“언덕이라니? 너한테 무슨?”
“어머니, 염려 마세요. 제 친구 가운데 중학교만 마치고 서울로 가서 공장에 취직을 했는데 그 애가 근무하는 공장이 아주 크고 넓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공장 한쪽에는 넓은 공터가 있고 비어 있는 자재 창고가 있다고 했습니다. 일단 그 애 말을 믿고 우리 가족이 그 공장으로 밀고 들어가 보는 겁니다.”
상숙이 걱정스럽게 말했습니다.
“그러다 쫓겨나면 어떡하고?”
“포수도 품에 들어오는 새는 잡지 않는다고 했다. 사람끼리 아무리 각박한 세상이라 하더라고 그렇게는 하지 않을 거다.”
아버지가 고개를 뚝 떨어뜨리고 있다가 말했습니다.
“네 말대로 한번 해 보자. 이판사판 나서면 못할 일도 없을 게다. 거지 짓을 해도 마가네 집 머슴보다야 낫겠지.”
이렇게 가족회의를 마치고 아버지는 주인댁 마씨를 찾아가 그 동안 일해 준 사경을 받아 보리라 생각하고 집을 나섰고 상진은 친구들을 찾아 갔습니다.
먼저 가까이 지내는 응기를 찾아가 말했습니다.
“우리 서울로 이사하려고 한다. 그 동안 너희들 덕분에 즐거웠다.”
착하고 인정 많은 응기가 놀라 물었습니다.
“이사를 간다고? 어디 갈 곳을 마련한 거냐?”
“없어. 무작정 이사를 가는 거다.”
“없어. 무작정 이사를 가는 거다.”
“그건 위험해. 너 혼자 가는 것도 아닌데 가족까지 간다고?”
이렇게 말한 응기가 스마트폰을 들고 연웅이 성길이를 불렀습니다. 연락받은 두 친구가 이리저리 전하여 동네 골목대원이 다 모였습니다. 성길이가 물었습니다.
“학교는 어떡하고?”
“안 다닐 거야.”
연웅이가 더 걱정스럽게 말했습니다.
“야, 너같이 공부 잘하는 아이가 학교를 그만 두면 어떻게 한다는 거야?”
“인생이 공부가 다는 아니지 않아? 배운 사람이나 못 배운 사람이나 다 어떻게든 살아가게 마련이야.”
응기가 마음이 안 놓인다고 하면서 물었습니다.
“이사 갈 돈은 준비되어 있니?”
“어떻게 되겠지.”
연웅이 물었습니다.
“이사비용도 준비하지 않고 이사를 간다는 거냐?”
“아버지가 다소 해결은 하실 거야. 광우네 집에서 수십 년간 머슴살이를 했는데…….”
응기가 제안했습니다.
“아무래도 걱정된다. 내가 가지고 있는 돈 5만 원이 있다. 우리가 십시일반으로 힘을 모아 보자.”
그 말에 연웅이 십만 원을 내놓고 성길이가 칠만 원을, 그리고 연락받고 온 친구들이 만원, 이만 원 내놓아 사십만원이 되었습니다. 그것을 응기가 모아 상진에게 넘기자 상진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고맙다 친구들, 이 고마운 우정 잊지 않을게.”
이때 멀리 갔다 왔다면서 짐차 운전을 하는 아버지가 있는 수석이가 달려와 물었습니다.
“무슨 일인데 급히 모이라는 거냐?”
성길이 대답했습니다.
“마침 너 잘 왔다. 상진이가 서울로 이사를 한다는데 걱정이 되어서 우리가 모였다. 그래서 우리가 가진 것 있는 대로 모아 상진이 이사비용으로 조금 주었다. 너도 협조하기 바란다.”
“어디로 이사를 하는데?”
“서울.”
“서울? 그렇게 먼 데로 간다고?”
“그래.”
“이삿짐은 어떡하고?”
팔짱을 끼고 있던 병석이 한 마디 했습니다.
“벌써 넌 돈벌이를 생각하는 거냐?”
“돈을 벌다니 그게 무슨 말씀이신가?”
“이삿짐 걱정하는 건 너의 아버지 일거리를 생각한 거 아닐까?”
“이 놈아, 친구가 이사를 가는데 돈 받고 이삿짐 날라다 달라고 하면 그게 의리냐?”
기환이도 한 마디 했습니다.
“히히히, 그럼 네가 아버지한테 거저 날라 달라고 하겠다고?”
“암, 누가 이사를 가시는데 이삿짐을 날라다 드리자고 안 하겠나. 우리 아버지하고 상진 아버지는 친구 사이이니까 도와드릴 거야. 그리고 상진이는 실제로 우리의 영원한 영웅이 아닌가.”
성길이 받았습니다.
“그렇지, 광우가 무서워서 우리가 그 애를 골목대장으로 세웠나. 뒤에 버티고 있는 상진이가 무서워서 그랬지. 하하하.”
아이들이 모두 하하 하고 웃으며 인사를 하고 헤어졌습니다.
한편 상진 아버지 오준만은 주인 마영감을 만났습니다.
8. 울화통 터지는 소리
“주인어른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무슨 말인가? 내 아들 일로 사과하겠다는 건가?”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아니라니, 자네 아들이 우리 아들 머리에다 물을 퍼붓고 그것도 모자라 패대기를 쳤는데 그래도 할 말이 있다는 것인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제 아들놈이 그렇게 한 것은 광우 도련님이 먼저 우리 딸애한테 실수를 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아니, 내 아들이 발 좀 씻겨 달라면 씻겨줄 것이지 머슴의 딸이 그 정도도 못한단 말인가?”
그 말에 오준만의 가슴이 벌렁거렸습니다. 그러나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온 것이니 다 참고 본심을 말했습니다.
“저는 그 동안 마님 신세를 지고 살았지만 이제 떠날까 합니다.”
주인 영감이 눈을 치뜨고 물었습니다.
“떠나다니? 우리 집에서 나가겠다는 말인가?”
“그렇습니다.”
“뭐라? 뉘 집으로 가려고?”
“뉘 집이 아니라 어디든 사람이 사는 곳으로 가려 합니다.”
“그래서?”
“그래서 말씀인데 그 동안 저한테 한 푼도 주시지 않은 사경을 좀 쳐 주셨으면 합니다.”
“뭐야? 사경이라고 했나?”
“그렇습니다.”
“아니, 자네가 뭘 그리 당차게 한 일이 있다고 사경타령인가?”
“잘 해 드린 것은 없었습니다만 이사를 가자면…….”
“자네가 말한 대로 내 신세를 지고 살았다면서 신세를 졌으면 갚을 생각을 해야지 뭘 어쩌고 어째?”
“주인마님 그러시지 말고…….”
“그러지 말라니 내가 틀린 말했나. 자네가 오갈데 없이 가난하게 살아서 내가 거두어 자식들 키워주고 상진이 학교 뒷바라지까지 해주지 않았는가? 은혜를 알아야지 원 참.”
“그 은혜는 감사합니다만 우리 식구들이 모두 거저 산 것이 아니라 모두가 주인댁 시중을 들며 살았습니다.”
“허허, 머리 검은 짐승은 길러 봐야 소용없다더니 그 말이 딱 맞는구먼. 어디다 새경 타령이야.”
주인 영감은 큰소리를 치며 돌아섰습니다. 그것을 가로막고 사정했습니다.
“주인마님, 이러지 마시고 이제 헤어지는 저를 불쌍히 보시고 이사 갈 비용만 좀 주시면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떠나겠습니다.”
“뭐야? 이것저것 따질 것이 있단 말인가. 허허, 은혜를 원수로 갚는다는 말은 들었지만 내가 당할 일인 줄은 몰랐네.”
“제가 주인마님 댁에서 이십 년간 일을 해 드렸습니다. 일 년에 이십만 원씩만 처 주셔도 사백만 원은 됩니다. 그걸 다 쳐서 달라는 것이 아니라 단돈 백만 원만 주시면…….”
“백만 원? 그게 지나가는 개 이름인가? 내가 받아도 모자랄 판에 백만 원씩을 준다고? 허허 말세여 말세.”
오준만은 참다가 울화가 치밀어 곁에 있는 작대기를 들어 지게를 치면서 말했습니다.
“주인어른 이러시는 게 아닙니다!”
“허허, 이 사람 먹여주고 재워 줬더니 사람 잡겠네. 그러지 말고 날 치게, 자자자!”
“…….”
“물에 빠진 사람 건저주니 보따리 내놓으라고 한다더니 바로 그 꼴 아닌가. 허허허.”
오준만은 기가 차서 아무 말도 하기 싫었습니다. 봄이면 논밭 갈고 씨 뿌리고 풀뽑고 김매주어 가꾼 농사가 얼마였는데 그 대가가 겨우 이런 것이란 말인가. 무정하고 독한 주인 영감의 시커먼 속을 더 들여다보고 싶지 않아 들고 있던 작대기를 던져두고 그 집을 나섰습니다.
잘 가라 잘 있으라는 인사 한 마디 없이 헤어지게 된 처지를 생각하니 눈물이 펑펑 쏟아졌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아버지 얼굴이 부숙부숙한 것을 본 상진이 물었습니다.
“아버지, 무슨 일이 있었어요?”
9. 돼지하고 살았다
“아무 일도 없었다.”
상진 어머니 양씨도 한 마디 했습니다.
“당신 주인마님 만나서 사경 달라고 하러 가지 않으셨수?”
아버지 오준만은 긴 말이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런 말 하지 말고 이 마을을 떠납시다.”
상진이 아버지 심정을 이해하고 말했습니다.
“아버지 말씀대로 아무 말 말고 떠나요.”
어머니 양씨는 가만있지 않았습니다.
“아무 말 말고 떠나자니 말이 되는 거냐? 우리가 그 집 일을 이십 년이 넘도록 해 주었는데 그냥 맨손으로…….”
오준만이 말을 막았습니다.
“맨손이든 양손이든 따지지 않기로 했소. 이십 년 동안 사람하고 산 것이 아니라 돼지하고 살았다고 생각합시다.”
“아무리 그래도 무엇이든 받아야지 않아요?”
상진이 받아 말했습니다.
“평소에 광우 아버지가 어떻게 살아 왔는지를 잘 알지 않아요. 아버지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오신 것은 보고 듣지 않아도 다 알 수 있어요. 사람이 할 소리를 하지 않았을 거예요.”
오준만이 아들의 깊은 속을 알고 은근히 위로도 되고 대견하기도 하여 밝은 얼굴이 되었습니다.
“상진이 말이 맞소. 사람 같은 사람하고 말을 해야지 짐승 같은 사람하고 말을 섞는 건 같은 짐승이 되는 것이오.”
이때 수석이 아버지가 찾아왔습니다.
“준만이 집에 있었군. 내일 이사한다는데 그 말이 정말인가?”
“그렇게 되었네.”
“어디로 어떻게 이사를 한다는 거야?”
“어디든 갈 생각일세.”
“내 아들 수석이한테 들었네. 자네네 이삿짐은 내가 실어다 주겠네.”
“이삿짐이 뭐 있나. 솥이나 하나 가지고 가면 될 것을.”
“이 사람아, 그 동안 가지고 살던 것 다 챙기게. 내가 내일 와서 싣고 가게.”
“차 운임도 줄 수 없는데 차가 무슨 소용인가.”
“운임은 내가 외상으로 해 줌세. 이 담에 부자가 되거든 갚고 안 되면 떼어 먹어도 안 달랄 테니 그리 알게.”
“고마우이.”
이렇게 말을 해 놓고 수석 아버지는 동네 회관으로 가서 마을 사람들하고 의논을 했습니다.
의논 결과는 각자가 조금씩 추렴하여 이사비용을 마련해 주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마광우 아버지를 만나 이런 저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벽창호 같은 마영감의 속셈을 알고 모두가 혀를 내둘렀습니다.
이십 년이 넘도록 부려먹고 떠난다고 하자 그 동안 먹여주고 재워준 값 내라고 오히려 딴소리 치는 것을 알고 온 마을 사람들이 고개를 저었습니다.
그 일로 하여 마을 사람들 가슴속에는 앞으로 절대로 그 집일을 안 해 주리라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추렴한 돈이 칠십만 원이었습니다. 그만하면 상진이 가진 것하고 어디를 가도 굶지는 않겠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다음 날 수석 아버지 차에 이삿짐과 상진이네 네 식구가 탔습니다. 차가 떠나기 전에 마을 사람들이 모두 나와 눈물까지 흘리며 전송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광우네 집에서는 아무도 내다보지 않았습니다.
수석 아버지는 시골 사람이면서도 자동차를 많이 몰고 다녀서 길도 잘 알고 운전도 잘했습니다. 상진이 적어준 주소를 보더니 아는 길 가듯 곧장 달려 두 시간 반 만에 상진의 친구 광선이가 근무하는 공장에 도착했습니다.
공장 넓은 마당에 차가 들어오자 전무가 나와서 두리번거렸습니다. 그때 광선이가 차 앞으로 다가가 인사를 하는 것을 보고 물었습니다.
“김광선, 네가 아는 분들이냐?”
“네.”
“누구냐?”
“고향 친구인데 갈 데가 없다고 해서 제가 우리 공장에 넓은 터가 있으니 오라고 했습니다.”
“뭐야? 네 맘대로 그런 결정을 했단 말이냐?”
“어쩔 수 없어서…….”
“네가 오라고 한다고 오는 분들도 이상하지만 네가 철이 안 들어서 그런 거냐 미련한 것이냐?”
“죄송합니다.”
“이 사람아. 죄송하다고 해서 다 되는가. 사장님 허락을 받아야 하는데……. 큰일을 저질렀구먼.”
“전무님이 도와주세요.”
“내가 사장이라면 몰라도 나한테 무슨 힘이 있어서 도와주고 말고 하겠느냐?”
“저 친구네는 저 하나만 믿고 왔습니다.”
“너를 무얼 믿고 왔다는 거냐.”
10. 네가 큰 도적이 아닌가
넓은 마당 한가운데 차는 짐도 부리지 못한 채 서 있고 아직 풋내기 직원인 김광선이 전무를 따라 사장실로 갔습니다. 전무는 김광선을 가리키며 사장한테 말했습니다.
“사장님, 이 사람이 큰일을 저질렀습니다.”
대머리에 유순하게 생긴 사장이 썼던 안경을 코 위로 들어 올리며 물었습니다.
“큰일이라니? 무슨 일을 저질렀다는 말인가?”
“이 사람이 자기 친구네가 오갈 데 없다고 우리 공장마당으로 이삿짐을 끌고 오게 했습니다.”
사장이 눈을 크게 떠 김광선을 보면서 말했습니다.
“네가 그랬다는 것이냐?”
“네, 사장님.”
“어쩌자고 네 맘대로 이삿짐을 가지고 오게 하였느냐?”
김광선이 그 동안 상진이네가 광우네 머슴을 살면서 겪은 이야기를 대략하고 말했습니다.
“사장님, 용서하여 주십시오.”
“용서만 해서 될 일인가? 어디 한번 가 보자.”
사장님은 앞서서 마당 공터로 나갔습니다. 트럭에 이것저것 얹혀 있는 것을 돌아보고 있는 사이에 상진 아버지가 가까이 다가가 인사를 올렸습니다.
“사장님, 저는 시골서 올라온 오준만이라고 합니다.”
사장이 인자한 눈으로 바라보고 인사를 받았습니다.
“광선군한테 대략 이야기는 들어서 압니다. 먼 길을 달려 우리 공장까지 오셨으니 걱정 말고 마음 편이 가지십시오. 포수도 품에 날아든 새는 잡지 않는다고 했는데 우리 공장 넓은 터를 알고 오셨다니 쾌히 받아들이겠습니다.”
긴장해 있던 사람들이 이 말에 놀랐습니다. 전무가 더 놀랍다는 듯 말했습니다.
“사장님, 정말 이 분들을 받아들이실 겁니까?”
“받아들이고 말고는 이미 지나지 않았는가. 내가 부르기 전에 먼저 들어온 사람들인데 어쩌겠는가. 세상은 넓다지만 어려움에 당하면 바늘 하나 꼽을 데가 없는 세상인데 그래도 나한테 조그마한 빈 터가 있다고 칮아왔으니 받아들여야지, 하하하 안 그렇습니까?”
사장님이 오준만을 바라보며 크게 웃음까지 선물하는 것을 들은 수석 아버지가 운전석에서 나와 사장 앞에 허리를 깊이 숙여 인사했습니다.
“사장님 말씀 듣고 보니 막혔던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입니다. 제 친구가 막연하게 서울로 이사를 온다고 하여 짐을 실어다 주기는 했지만 오면서 걱정을 산더미처럼 했습니다. 눈 감으면 코도 베어간다는 서울에서 어른 같은 분을 만나 뵈오니 메시아를 만난 것 같습니다.”
사장이 눈을 둥그렇게 뜨고 물었습니다.
“기사 분께서는 하나님을 믿으십니까?”
“예, 엉터리 신자 흉내를 냅니다.”
“감사합니다. 진구 이삿짐을 실어다 주신 수고도 보통 우정이 아니고 보통 봉사가 아닙니다.”
사장은 쭈뼛거리고 서 있는 어머니 양씨와 상숙이, 상진이를 둘러보시더니 사랑이 넘치는 눈으로 입을 열었습니다.
“자, 다들 이러고 있지 말고 사무실로 가십시다. 먼 길에 피로할 테니 차라도 한 잔씩 하십시다.”
그 순간 오준만은 울고 싶었습니다. 세상이 얼마나 각박하다고 하는데 이렇게 도둑처럼 밀고 들어온 사람을 따듯한 말로 받아주다니 가슴 속이 뜨겁고 꿈을 꾸는 것만 같았습니다.
마당 가운데 차를 세워놓고 모두가 사장실로 들어갔습니다. 시골서는 들어보지도 못한 사장실은 말로 할 수 없을 만큼 정갈하고 품위가 있었습니다. 사장이 가장 가운데 자리에 앉았습니다. 김광선도 사장실에는 처음 입사할 때 한번 들어와 본 뒤에는 이렇게 들어오기는 처음입니다. 사장님이 김광선을 향해 웃으시며 말했습니다.
“김군이 아주 큰일을 저질렀구먼.”
“죄송합니다. 저는…….”
“김군이 저지른 일이니 김군이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 말해 보게.”
광선이는 주저하다가 용기를 내어 의견을 말했습니다.
“제 생각은 제 친구가 오면 빈 자재창고에서 살게 하고 친구는 힘도 좋고 머리고 좋으니 우리 회사에서 잡일을 하게 하여 주면서 대안학교라도 다니게 해 주고 싶습니다. 그리고 친구 아버지는 농사를 많이 지어 보신 분이니 공장 빈터에 고물을 주어다 모았다가 팔면 생활비는 구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사장님이 크게 웃으셨습니다.
“하하하. 네가 알고 보니 큰 도적이로구나. 남의 공장에 맘대로 사람을 들이고 공장 빈터를 맘대로 쓰도록 하겠다니 이런 도둑이 어디 있는가, 하하하.”
말은 뼈가 있는 것 같지만 시작할 때 하하하 마치며 하하하 하는 웃음소리는 불안한 마음의 그늘을 싹 거두어내는 햇빛 같았습니다.
사장이 이어서 말했습니다.
11. 믿음 위에 믿음
“아무리 악한 포수도 품으로 날아든 새는 보호하는 법이오. 김광선 군의 말대로 그렇게들 하시오. 당장에 짐을 빈 자재 창고에 부리시고 거기 달린 방도 하나 있으니 그 방에서 지내시면 될 것이오. 김군이 앞장서서 안내해 주기로 하고 모두 나가 보시오.”
이렇게 감격스런 일이 어디 있습니까. 모두가 흐뭇한 감동에 얼굴이 달아올랐고 발길이 가벼웠습니다. 전무만 사장실에 남았습니다.
“사장님, 어쩌자고 그리 쉽게 허락을 하셨습니까?”
“어쩌기는, 나는 포수도 아닌데 내 품으로 들어온 가족을 내쫓아야 옳겠소? 품으로 들어온 새는 보호하면 새도 은혜를 갚는 법이오. 나는 보상 받자고 한 것은 아니지만 광선군은 나를 믿기 때문에 저 사람을 들인 것이오. 나를 포악한 사람으로 알았다면 그런 일을 벌이지 않았을 것이 아니겠소? 광선군이 나를 믿고 한 일이고 나는 광선군의 평소 품행을 보고 믿으니 그의 의견을 따른 것뿐이오. 믿음 위에 믿음이란 이런 것이 아니겠소?”
“사장님 말씀을 듣고 보니 성인의 말씀보다도 마음에 깊이 새겨집니다.”
“앞으로 저분들이 잘 살아가도록 돌보아 주시오. 하는 것 보아 아들은 대안학교라도 보내어 공부를 하게 해야 할 것 같소.”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 운전수가 친구를 위하여 운임을 안 받고 여기까지 온 것 같으니 잠깐 부르시오.”
그렇지 않아도 운전수가 짐을 다 부리고 작별인사를 하러 오고 있었습니다.
“사장님 감사합니다. 친구가 훌륭하신 사장님 배려로 거처할 곳에 이삿짐을 부려 놓고 보니 마음이 놓입니다. 이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은혜라니요. 오히려 내가 고맙다고 해야지요. 먼 길 운전하고 오시고 또 돌아가시자면 기름 값도 적잖이 들 테니 작지만 이거라도 받아주시오.”
그러면서 오만 원짜리 다섯 장을 내밀었습니다.
“아닙니다. 저는 친구를 위하여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사양하겠습니다.”
“내가 연상인 것 같소. 위 사람이 주는 것은 거절하는 법이 아니오. 기쁘게 받아주시오.”
“그러시면…….”
운전수 수석아버지는 머리를 깊이 숙이고 그것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작별인사를 하고 상진 아버지한테 갔습니다.
“여보게, 내가 이삿짐은 옮겨다 준다고 하지 않았는가. 사장님한테 작별인사를 하러 갔더니 이렇게 많은 돈을 주시지 뭔가. 나는 이 돈 없어도 되니 자네가 받아주게.”
그러면서 돈을 친구한테 넘겼습니다. 상진 아버지도 안 받겠다고 사양을 하자,
“그럼 이렇게 함세. 나는 가다가 목이 마르면 음료수라도 한 병 사먹게 오만 원만 떼겠네. 그래도 안 되겠는가?”
“이건 인사가 아닌데 자네의 성의를 무시할 수도 없고…….”
상진 아버지가 두 손으로 그것을 받았습니다. 고향에서 같이 자라 한 사람은 머슴으로 한 사람은 운전대를 잡고 청춘을 보낸 두 사람은 뜨거운 사랑의 악수를 나누고 작별하였습니다.
이런 일이 있은 뒤에 상진이네는 사장의 배려로 매사가 잘 풀렸습니다. 아버지는 공터 구석에 고물상을 차리고 어머니는 공장 식당에서 봉사를 하고 상진은 공장 잡일을 도와주고 밤이면 대안학교를 다니고 상숙이는 집안 살림을 하였습니다.
막연하게 올라온 가족들에게는 그 동안 느껴보지 못한 사람의 정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한편 상진이네가 떠난 광우네 집은 사정이 달라졌습니다. 가을이 깊도록 거두어들이지 못한 밭곡식이 널브러지고 베지 못한 벼는 목이 꺾이고 새들이 바글거리며 이삭을 까먹고 집안에는 닭과 소가 싸놓은 똥으로 범벅이었습니다.
운동만 한다고 날뛰는 광우는 손끝 하나 까딱하지 않고 아버지는 일꾼을 구하려도 구할 수가 없었습니다. 동네 사람이 누구도 도와주지 않고 품삯을 배로 준다고 해도 일을 해주지 않았습니다. 완전히 왕따가 된 집안은 날마다 부부 싸우는 소리가 담을 넘고 부아가 난 광우 아버지는 몽둥이를 들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닭들만 두들겨댔습니다.
그럴 때마다 닭들이 시끄러운 소리를 지르며 이리 뛰고 저리 뛰고 날랜 수탉은 훌쩍 날아 지붕 위로 올라가 꼬끼오 하고 목청을 돋우어 소리치고 텅 빈 사랑방에는 쥐들이 들끓어댔습니다.
상진 아버지가 있을 때는 정갈하고 어느 구석 하나도 손이 가지 않은 곳이 없었는데 집안이 온통 난리를 치른 집 같았습니다. 부엌은 상진 어머니가 살림을 잘하여 모든 식기가 반들거렸고 마루는 상숙이가 걸레질을 잘하여 항상 반들거렸는데 부엌은 시커멓고 구석마다 거미가 줄을 늘이고 그네를 타고 마루는 먼지가 뽀얗게 쌓여가도 안방마님 노릇만 하던 광우 어머니는 가까스로 밥이나 지어 끼니를 이어갈 뿐 손도 까딱 않았습니다. 그래도 광우 아버지는 자기 잘못을 뉘우치기는커녕 떠난 상진이네만 원망했습니다.
“나쁜 놈들 수십 년을 먹여주고 재워줬더니 농사를 망쳐놓고 떠나? 나쁜 연놈들!”
아무리 마을 사람들을 붙잡고 상진이 아버지 욕을 해도 아무도 콧등으로 들을 뿐 상대도 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가을 농사도 망치고 겨울이 지났습니다. 추수도 못한 채 쌓아 두었던 양식만 먹고 사는 가운데 봄이 왔습니다.
겨우내 굶기다시피 한 소는 비루먹은 소가 되어 비쩍 마르고 개도 집을 떠나 남의 집 개밥을 구걸하여 먹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공부를 못하여 머리에 든 것이 없으면 힘이라도 있어야 한다고 아들을 읍내 태권도장에 보내었더니 한 달이면 반은 술에 취해 들어와 학원비만 내놓으라고 아버지를 볶아댔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봄 농사는 지을 엄두도 내지 못했습니다. 논에는 가을걷이를 못한 벼가 깔려 있고 밭에는 풀이 무성한 채 나자빠졌어도 어찌 할 도리가 없었습니다.
인심을 잃은 터라 마을 사람들은 누구도 상대를 하지 않고 왕따의 외로움은 아들이나 아버지나 이루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하루는 태권도장에서 돌아온 광우가 싱글벙글 아버지한테 기발한 의견을 내놓았습니다.
12. 향기로운 대화
“아버지, 우리가 농사를 짓지 않아도 잘 살 수 있어요.”
“그게 무슨 소리냐?”
“내가 다니는 태권도장 옆에 큰 카페가 하나 있는데 그 주인이 장사가 잘 되어 돈을 벌어가지고 다른 데로 늘여 가면서 가게를 내놓았대요.”
“그래서?”
“그 가게를 우리가 하면 되겠어요.”
“무슨 돈으로 한다는 거냐?”
“간단해요. 우리 밭과 논을 농협에 잡히고 대출을 받으면 넉넉하대요.”
“누가 그러더냐?”
“태권도장에 친한 형이 있어요. 그 형이 가르쳐 주었어요.”
광우 아버지는 그렇지 않아도 농사를 앞두고 골치가 아픈 터라 아들의 의견이 그럴 듯하여 아들이 하자는 대로 하기로 했습니다.
논밭 모두를 담보로 2억을 대출받아 1억은 가게 보증금과 권리금으로 주고 남은 일억으로 운영하기로 하고 일을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손님도 오고 괜찮은 것 같았는데…….
한편 상진이네 집에는 좋은 일이 있었습니다.
상진 아버지 오순만은 고물상을 시작한 지 6개월이 지나 새봄을 맞았습니다. 반년 동안 주워 모은 빈병이 수만 개가 넘고 신문지와 박스가 산더미처럼 쌓였습니다. 봄이 오자 한 차례 종류대로 수집하는 기업체에 팔아 이백 만원을 받았습니다. 그 돈을 들고 사장님을 찾아갔습니다.
“사장님, 그 동안 리어카도 내어주시고 사업장을 내주신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가을부터 반년 동안 모아 판 수입금이 이백 만원이나 되었습니다. 이 돈은 사장님께 올리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여 가지고 왔습니다. 받으십시오.”
정사장은 놀라며 눈을 크게 뜨고 물었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요?”
“고물 모아 판 것이 이렇게 되었습니다. 받으시지요.”
“뭐요? 내가 그 돈을 받으라는 것이오?”
“예, 저는 한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다 사장님이 주신 터에서 일을 했을 뿐입니다. 그러니 이 돈은 사장님께 드려야 옳다고 생각합니다.”
“아니오. 어차피 놀리는 빈 땅에서 그렇게 큰 소득을 냈다니 다행이오. 나는 상관없는 일이니 오씨가 유용하게 사용하시오.”
“아닙니다. 저는 온 가족이 사장님 은혜로 잘 지내고 있는 것만도 족합니다.”
맘씨 좋은 정사장은 빙그레 웃으며 손을 내밀었습니다.
“그렇게 모은 것을 주시겠다니 받겠소만 그 대신 반만 받으리다. 백만 원은 날 주고 반은 가져가시오.”
그리고 돈 다발 둘 가운에 하나는 받고 하나는 되돌려주었습니다.
“사장님, 이러시면 안 됩니다.”
“내가 하라는 대로 하시오. 명령이오. 그래도 안 받겠소?”
오준만은 허리를 굽실거리며 돈을 받아들었습니다. 돈을 넘겨준 사장이 말했습니다.
“상진 군이 아주 성실해 보입니다. 듣자 하니 대안학교에서 공부도 가장 잘한다고 하니 다행이오.”
“네. 그 애는 어려서부터 성실하고 공부를 좋아하더니 좋은 성적을 냈다고 합니다. 이제 고등학교 검정고시를 보아 합격하면 대학을 가겠답니다. 다 사장님 은혜입니다.”
“그래요? 검정고시 합격하고 대학시험에 합격하면 입학 등록금은 내가 내주리다. 그러니 마음 단단히 먹고 공부하라고 하시오
오준만은 아주 기쁜 얼굴로 사장실을 나섰습니다. 사장님이 등 뒤에서 한 마디 더 했습니다.
“부인께서도 공장 식당일을 잘 해 준다고 모두가 칭찬하는 소리를 들었소. 가시는 대로 부인을 잠깐 들라고 하시오.”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오준만 부인이 사장실로 들었습니다. 언제나 웃음이 꽃향기같이 풍기는 정사장이 반기며 말했습니다
13. 비단 옷에 꽃수를 놓고
“어서 오세요, 아주머니.”
상진 어머니는 수줍게 고개를 숙이고 인사를 했습니다.
“감사하고 죄송합니다, 사장님.”
“뭐가 죄송합니까?”
“모두가…….”
“내가 보자고 한 것은 상을 드리고 싶어서 불렀습니다. 아주머니가 우리 공장 식당일을 잘해 주신다고 사원들의 칭찬이 자자합니다. 그 소리를 듣고 아주 기뻤습니다.”
정사장은 서랍 속에서 봉투 하나를 꺼내었습니다.
“그간 수고하셨는데 대우를 한 번도 못해 드렸습니다.”
“아닙니다. 식당일을 하면서 먹고 남은 음식으로 우리 가족이 포식을 하고 삽니다. 다 사장님 은혜입니다.”
“그러시다니 다행입니다. 이것 받으시지요.”
“뭡니까? 사장님.”
“상금입니다. 일 잘하시는 성적에는 못 미치지만 받으시지요.”
“아닙니다. 저는 받을 수가 없습니다.”
“아주 작은 액수입니다. 한 달에 오십만 원씩 쳐서 반년 분 삼백만 원을 넣었고 부상으로 오씨가 고물상을 하여 벌었다고 가져온 것 백만 원을 얹었습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합니다.”
“부탁은 제가 드려야 하지요. 사장님이 주신다는 돈은 받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 식구가 길바닥에 나앉을 지경에서 구해 주신 것만도 감지덕지한데 보수까지 주신다는 건 경우가 맞지 않습니다.”
“고맙소. 부인의 마음씨도 고우시군요. 앞으로 우리 공장에서만 살 생각이라면 안 받으셔도 좋습니다. 그러나 장차 내 집도 마련하고 남부럽지 않게 살자면 꿈을 가지셔야 합니다. 이 돈은 보통 돈이 아니라 꿈을 가꾸는 씨앗 종자돈입니다. 앞으로 식당에서 일하시는 보수도 다른 사람처럼 쳐 드리도록 할 테니 열심히 모아서 자립하십시오. 내가 도울 수 있는 것은 그것밖에 없습니다. 자. 꿈을 품으시려면 사양치 말고 받으세요.”
상진 어머니는 아무 말도 더할 수가 없었습니다. 죄송한 생각으로 두 손을 내밀어 봉투를 받았습니다. 사장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습니다.
“잘들 오셨습니다. 댁들이 우리 공장에 오신 후로는 일도 잘 풀리고 좋은 일이 많았습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니 고맙습니다.”
상진 어머니는 사장실을 나와 남편한테 달려갔습니다.
“여보, 나는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아요.”
“무슨 일이 있소?”
“사장님께서 상금을 주셨어요. 그리고 당신이 가져다 드린 돈도 부상으로 주셨어요. 우리한테도 이런 날이 있네요.”
“다 당신이 성실하고 고운 마음씨를 가졌기 때문이오.”
“광우네 부엌에서 주인마님 잔소리를 들어가면서 일할 때는 짜증이 나고 서러웠어요. 그런데 같은 일을 해도 공장 식당에서 일하는 것은 놀이 공원에서 즐기는 것처럼 기뻤는데 돈까지 한꺼번에 사백만 원을 주시니 이게 꿈이 아니고 뭐겠어요"
“축하하오. 내게 있는 백만 원도 마저 받아 오백만 원을 채우시오. 그러면 반 천만 원이 되지 않겠소?”
부부는 너무 좋아서 과거의 쓴 기억을 잊어버리고 하하 호호 크게 웃었습니다. 이때 학교에서 돌아온 상진이 부모님 웃음소리를 듣고 물었습니다.
“어머니, 무슨 좋은 일이 있으셨나요?”
어머니는 신이 나서 대답했습니다.
“얘야, 우리가 아주 부자가 되었다.”
“부자라니요?”
“생전에 만져볼 꿈도 못 꾼 돈이 오백만 원이나 생겼어. 이게 꿈이면 깨지 말았으면 좋겠다. 꿈은 아니겠지?”
“꿈이 아니에요.”
상진 아버지도 한 마디 안 할 수가 없었습니다.
“나도 기쁜 소식 하나 가지고 있다.”
“무슨 소식인가요?”
“네가 검정고시 합격하고 대학시험에 붙는다면 사장님께서 입학등록금을 대주신다고 했다. 열심히 해서 사장님을 기쁘게 해 드려라.”
상진도 아버지 말씀이 꿈만 같았습니다. 공부를 하면서도 대학 등록금 걱정을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때 우체국 직원이 왔습니다.
14. 꽃피는 집, 서리 맞는 집
“이 댁에 전보요.”
굳이 이 댁이라고 한 것은 창고에 사는 사람들한테 이상한 전보가 왔다는 것을 강조한 것입니다. 상진이 누구보다 잽싸게 나가서 전보를 받았습니다.
그 순간 상진의 가슴속에는 표현하기 어려운 기대감이 넘쳤습니다. 아무도 모르게 고등학교 검정고시를 치고 결과를 기다리는 중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전보용지에는 간단히 한 마디가 적혀 있었습니다.
<검정고시 합격을 축하합니다>
상진은 좋아서 얼굴이 빨갛게 상기된 채 부모님 앞으로 갔습니다.
“아버지, 저 검정고시 합격했어요.”
어머니가 듣고 환성을 질렀습니다.
“뭐야 합격? 내 아들이! 아직 졸업도 하지 않았는데!”
집안에는 기쁜 일이 홍수처럼 몰려들었습니다. 아버지가 웃으며 한 마디 했습니다.
“이제 대학 합격통지만 남았구나.”
상진이 자신있게 대답했습니다.
“네, 이제 대학을 향해 도전하겠습니다.”
어머니도 한 마디 했습니다.
“그렇게 해라. 네가 대학에 붙으면 입학할 돈은 준비되었으니 염려 말고 공부만 더 열심히 해라.”
“네, 어머니 내년 봄에는 대학 합격통지서를 받겠습니다.”
어머니는 사람들한테 아들 자랑이 하고 싶어서 식당으로 달려갔습니다. 막 식당 문을 열고 들어서는데 뒤에서 전무가 불렀습니다.
“아주머니.”
“예? 전무님!”
“무슨 좋은 일이 있으십니까? 얼굴에 꽃이 활짝 피셨습니다.”
“네, 아주 좋은 일이 있습니다. 전무님.”
“아무리 좋은 일이 있어도 제가 알려드리는 것만큼 기쁜 일은 없으실 겁니다.”
“무슨 좋은 일이 있습니까?”
“사장님께서 오늘부터 아주머니 월급을 백이십만 원으로 정하여 드리라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네? 백이십만 원씩이나요?”
“그 동안은 봉사만 하시지 않았습니까?”
“식당 덕에 우리 가족이 먹고 살았는데 무슨 봉사입니까?”
“어쨌든 남의 집 일해주고 월급 올려 받는 것보다 기쁜 일이 어디 더 있습니까? 아주머니가 기뻐하시는 자랑거리가 이보다 더 좋은 소식인가요?”
“네, 아주 기쁜 일이 있습니다. 우리 아들이 낮에는 공장에서 일하고 밤마다 대안학교에서 공부하더니 고등학생 자격을 주는 검정고시에 합격했다지 뭡니까?”
“그래요? 경사가 겹쳤습니다. 이게 바로 금상첨화 아닙니까.”
“우리 애는 법과대학을 가고 싶다는데 뜻대로 이루어질 수 있도록 전무님이 지도해 주세요.”
이렇게 좋은 일이 있는 상진이네 집에는 비록 창고 방이지만 날마다 웃음소리가 넘쳤습니다.
한편 시골 읍내에서 큰 카페 호프집을 차린 광우는 날마다 지옥으로 끌려들어가는 세월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밤마다 몰려드는 읍내 건달들은 다 모여서 시끄럽게 떠들고 마시고 술 값은 장부에 달아 놓으라고 하면서 나가고 종업원 월급날이 되면 여기저기서 돈을 꾸어 주어야 했습니다.
읍내에서 악명 높은 건달패들이 득실거리자 처음에는 잘 되는가 싶었는데 점잖은 손님들이 발을 딱 끊었습니다.
거기다 농협에서 대출받은 이억 원 원금을 상환하라는 독촉장이 몇 차례 오더니 경매하겠다고 으름장을 놓고, 건물 주인은 육 개월째 월세 삼천만 원이 밀렸다고 독촉을 해댔습니다.
“마사장, 월세를 반년씩이나 내지 않으면 난 어떻게 사는가. 나도 더 이상 참을 수가 없네. 가게를 내놓던지 하게. 보증금 오천만 원에서 삼천 만원 빼고 나면 이천만 원밖에 남지 않았네. 그것도 알고 있게.”
“알았습니다. 밀린 외상값만 다 받으면 한 몫에 갚아드릴 테니…….”
“이보시게, 자네가 받겠다는 외상 먹은 사람들이 다 누구인가. 자네하고 친구랍시고 어울리고 읍내를 주름잡는 건달패들이 아닌가. 그 사람들이 갚을 사람들인가? 그렇다고 자네가 힘이나 있어서 휘어잡을 수 있는 것 같으면 모르거니와 몸집만 뚱뚱할 뿐 힘은 개미 한 마리도 잡을 위인이 못 되는 것을 내가 아는데 그 돈을 받겠다고?”
“받을 수 있습니다.”
“어느 하년에? 더 외상이나 지지 않으면 다행이지. 내가 이 바닥을 다 아는데 자네는 꿈을 꾸고 있어. 읍내 깡패들이 자네 뭘 믿고 친구랍시고 달라붙는가. 외상 잘 주고 시시덕거리니까 그런 것 아닌가.”
“어떻게든 다 받아서 갚을 테니 기다리십시오.”
“앞으로 넉 달 안에 갚지 못하면 보증금이 다 월세로 날아가는 줄만 알게. 알았는가?”
이런 마당에 광우 어머니는 아들이 큰 카페를 운영한다고 흰소리를 쳐대며 읍내 바람잡이 여자들을 모아 계를 한다 무슨 사업을 한다고 설치면서 읍내를 들락거리고 돌아올 때는 택시만 타고 다니고 동네 사람을 우습게 보았습니다. 하지만 실은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래도 바람이 난 어머니는 큰소리를 치고 치맛바람을 일으켰습니다.
광우가 부모님을 속이고 사업이 잘된다면서 큰소리를 쳐대는 바람에 그 아버지 어머니는 자식 말만 믿고 거드름을 피고 돌아다녔습니다.
그런 어느 날 광우 아버지 앞으로 등기우편물이 하나 도착했습니다.
15. 못난 부자의 말싸움
등기 우편물을 받은 광우 아버지가 털썩 주저앉아 탄식했습니다.
“이게 무슨 날벼락인가. 아이구! 하나님, 조상님, 아버님.”
조상 덕에 떵떵거리고 하인 두고 머슴을 거느리고 살던 부자가 아닌가. 농사는 접어두고 대출받아 아들이 큰 사업을 잘 하고 있다는 말만 믿고 거드름을 펴고 다녔는데 이게 무슨 변인가. 등기우편물에는 <7월 17일 담보물 경매>라는 한 마디가 전부였습니다.
광우 아버지는 당장에 아들한테 달려갔습니다.
“광우야, 사업이 잘된다면서 이게 무슨 날벼락이냐?”
광우는 이미 짐작하고 있던 일이 터진 것입니다.
“아버지, 너무 염려 마세요.”
“염려 말라니?”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했어요.”
“네가 뚫린 입이라고 못하는 소리가 없구나. 당장 경매가 들어온다는데 어떡할 거냐?”
“경매가 그렇게 쉽게 되나요. 어차피 이렇게 된 것 대책을 세워 봐야지요.”
“대책?”
“우리 집이 경매로 넘어가자면 길면 일,이 년은 걸릴 거예요. 그 안에 방법을 써야지요.”
“너 요새 네 엄마가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지 알지?”
“엄마는 읍내에서 지역 유지로 활동하시고 있지 않나요?”
“지역 유지 좋아한다. 지금 너의 엄마는 숨어도 모자란다.”
“왜요?”
“곈가 뭔가 하다가 깨어졌다고 요새 읍내에도 잘 나가지 않고 방구석에서 술타령만 한다. 넌 그것도 모르고 있었니?”
“난 엄마가 잘 나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렇게 되셨다고요?”
“이 놈아, 너 때문에 집안 망했어. 정신 차려.”
“아버지는 왜 이 지경을 만들었는데요? 상진이네 식구를 내쫓지 않았으면 이 지경은 안 되었을 거 아니에요?”
“이놈아, 상진이네를 내쫓게 만든 게 누군데?”
“상진이네한테만 농사를 맡기셨던 아버지도 잘한 건 없어요.”
“넌 뭐냐? 대가리만 크고 공부도 못하여 빌빌거리다가 겨우 한다는 게 술집인지 뭔가 하다가 이렇게 된 것이 아니냐?”
“알았어요. 그만 하세요.”
“그만하게 생겼냐? 너는 가게 말아 먹고 너의 엄마는 계를 깨고 숨어 살고 땅과 집은 경매를 당하게 생겼는데 어떻게 할 거냐?”
“경매로 정리될 때까지 일 년이든 이 년만 기다리세요.”
“그러면 좋은 꼴이 보이겠니?”
“부자가 망해도 삼년은 간대요.”
“어이구, 이 못난 놈. 대가리만 커 가지고 허허, 허어.”
16. 황금알을 낳는 고물상
고물상을 하는 상진 아버지 오준만은 6개월 전에 이상한 물건을 샀습니다. 고물상에서 돈 주고 고물을 사는 경우는 지극히 드문 일입니다. 그런데 하루는 말쑥하게 차린 사람이 와서 말했습니다.
“우리 출판사에 정부 방침이 바뀌어 못쓰게 된 책이 있습니다. 보관비도 비싸고 보관하기도 지쳐서 이제 쓰레기로 버릴까 합니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제 값을 받으면 일억이 넘을 것이지만 지금은 쓰레기가 되어 쓸모가 없습니다. 그러니 이 고물상에서 운반해 오시고 오만 원만 주시오.”
“무슨 책인데 억대가 넘는 것을 오만 원만 달라고 하십니까?”
“저울로 달아서 팔면 오십만 원은 될 것입니다. 주인께서 치워주시고 섭섭하니 오만 원만 달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트럭으로 네 트럭이나 되는 책을 오만 원에 샀습니다. 산 것이라기보다 주워다 고물더미에 쌓아놓은 것입니다. 한 동안 한문교육을 안 시킨다고 한문교육 철폐를 하는 바람에 출판사에서 만든 책이 휴지가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고물 값으로 책을 사놓았는데 그 책을 사고 6개월이 지난봄에 정부 시책이 바뀌어 한문교육을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소문이 나자 큰 서점에서 보냈다는 사원이 찾아왔습니다.
“이 고물상에서 한문기초강좌라는 책을 가지고 있다는데 아직도 잘 있습니까?”
“네, 저렇게 잔뜩 쌓아놓고 있습니다.”
“저 책을 얼마면 파시겠습니까?”
이때 아들 상진이 학교에서 돌아와서 물었습니다.
“아버지, 무슨 흥정을 하시나요?”
“고물로 사 둔 책을 사시겠다는구나.”
“얼마나 주신다는 데요?”
“모르겠다. 먼저 판 사람 말로는 제 값을 받고 팔면 일억이 넘을 것이라고 했는데 나는 짐작이 안 간다.”
이런 일로 서점과 흥정을 한 결과 일억을 받고 넘겨주기로 했습니다. 서점에서는 더 이상 군말하지 않고 당장에 돈을 주고 책을 다 실어갔습니다.
갑자기 일억이 생긴 오준만은 흥분하여 돈을 들고 사장님을 찾아갔습니다.
“사장님, 아주 좋은 일이 생겼습니다.”
“무슨 일인데 그렇게 흥분해 있소?”
“억, 억을 벌었습니다.”
“억이라니?”
“고물을 팔아 일억을 벌었습니다. 이것 보십시오. 사장님 받으시지요.”
사장은 놀라서 물었습니다.
“그런 돈을 왜 나한테 맡기시오?”
“맡기는 게 아니고 드리는 것입니다.”
“날 주겠다고요?”
“그렇습니다. 사장님 터에서 벌었으니 사장님이 가지셔야지요.”
“허허, 기막힌 소리를 하시는구려.”
“어서 받으십시오.”
사장은 마지못해 돈뭉치를 받아들고 말했습니다.
“내가 이 돈을 받자면 조건이 하나 있소.”
“말씀하십시오.”
“이 돈을 받을 테니 고물상 터를 가지시오. 그렇다면 받겠소. 거기다 집도 한 채 짓고 터를 잡으시오.”
“아닙니다. 저는 이렇게 사는 것만도 만족합니다.”
“그렇다면 나도 돈을 받지 않겠소. 언젠가는 오씨도 자리를 잡아야 하니 다른 생각 말고 거기다 자리를 잡아요. 그러면 이 돈으로 내가 집도 지어 주리다.”
오준만은 감격했습니다. 땅도 주고 집도 지어주겠다고 하는 사장 말에 정신이 얼떨떨했습니다.
“그렇게까지 하실 것은 없습니다. 제 힘으로 집은 지을 테니 땅값 받는 셈 치시고 받으십시오. 그러면 큰 은혜로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여 고물상 터를 얻은 오준만 씨는 고물 수집터가 노다지 황금광이 되어 좋은 일이 또 일어났습니다. 한번은 단골로 고물을 수집해 오는 노인이 무슨 책인지 알 수 없는 새까맣게 묵은 고서를 한 리어카 싣고 왔습니다.
오준만이 물었습니다.
“그건 어디서 났습니까?”
“새로 지은 아파트 앞을 지나오는데 주인인 듯한 젊은 부부가 나를 부르기에 갔더니 새로 든 집에 고물 책이 집안 분위기를 망친다면서 다 가져가면 오만 원을 주겠다고 하기에 횡재를 만났구나 하고 실어 왔습니다. 나는 이미 주인한테 돈을 받았으니 오사장님은 그냥 받았다가 고물 나갈 때 버리시면 될 것 같습니다.”
“노인장, 나를 사장이라고 부르지 마시오. 우리 사장님이 들으시면 노여워하십니다. 고물이나 모았다 팔고 사는 사람한테 어울리지 않는 호칭이오. 그래도 고생하고 가지고 왔는데 거저 받을 수는 없지요. 나는 오천 원만 드리겠소.”
“그렇게 많은 돈을 주신다면 고맙게 받겠습니다.”
이 고물이 황금덩어리일 줄은 두 사람이 다 몰랐습니다. 노인이 돌아가고 얼마 있다가 밖에서 돌아온 상준이 그것을 보고 물었습니다.
“아버지, 이 책들은 다 어디서 났나요?”
“나도 모른다. 가끔 파지 모아 오는 노인이 가지고 왔다.”
이미 대학입시공부까지 하는 상준의 눈에는 책들이 예사롭게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것들 가운데 몇 권을 들고 고고학을 연구하는 교수님을 찾아갔습니다.
17. 사장님 전화 왔습니다
교수님은 책을 보는 순간 흥분해서 말했습니다.
“아아니! 이 귀한 책이 어디서 났는가?”
상진이 머뭇거리다 대답했습니다.
“훈민정음 원본 같은데 맞습니까?”
“진짜 원본일세. 그리고 또 들고 있는 책은 무엇인가?”
교수님은 책들을 펴놓고 감탄에 감탄을 거듭했습니다.
“이건 황금 밭이야, 황금도 이렇게 좋은 황금은 없지.”
고서에 대한 가치를 잘 모르는 상진이 물었습니다.
“그렇게 귀한 것들입니까?”
“귀하다마다. 이런 책을 지금까지 소장해온 사람은 누구였단 말인가. 이런 건 국립도서관에도 없는 문건이야.”
“저도 모릅니다. 아버지가 하시는 고물상에 굴러들어온 것입니다.”
“이 정도의 책을 소장했던 집안이라면 과거에 행세깨나 했던 집안일 텐데 누가 이런 것을 버렸을까. 아까운 줄도 모르고…….”
이런 일이 있은 후 들고 갔던 책은 모두 국립박물관에 기증하고 나머지는 경매장에 내놓았습니다. 고서를 수집하는 분들이 책을 보자 서로 사겠다고 하여 한 권에 어떤 것은 오천 만원을 받기도 하고 적게는 오백 만원씩에 팔아 이억 원이 생겼습니다.
그 돈으로 사장님이 주신 땅에다 번듯한 이층집을 짓고 온 가족이 날마다 노래하며 살았습니다. 오준만은 고물상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일을 해도 즐겁기만 했습니다. 그런 가운데 상진이 법대를 졸업하고 사법고시에 합격을 하여 당당한 검사까지 되었습니다.
그렇게 큰 변화를 일으키고도 상진 어머니는 공장 식당일을 부지런히 도우면서 덕을 쌓고 상숙이도 대안학교를 마치고 정규대학에 들어갔습니다. 공장 사장님은 한 가정이 순식간에 크게 일어나는 것을 보고 자기 일이나 되는 양 좋아하고 무엇이든지 도우려고 했지만 이제는 상진이의 힘을 받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누가 보아도 부자인데 오준만은 노동자 차림으로 살고 어머니 양씨는 그 나름대로 검소하게 살면서 머슴 아내로 살아오던 그 성실함을 조금도 잃지 않고 살았습니다.
그렇게 큰 변화 속에 칠 년이 지난 어느 날 이삿짐을 날라다 주었던 수석이 아버지가 찾아왔습니다. 넓은 마당 구석에 자재 창고에다 이삿짐을 부려놓고 내려간 뒤 늘 상진이네 걱정을 하다가 찾아온 것입니다.
마당에 큰 고물상이 있고 그 곁에 말끔한 이층 양옥이 있는 것을 보고 낙담했습니다.
‘이 친구들은 어딜 가고 고물상이 되었는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 고물상 안으로 들어가 물었습니다.
“여기 예전에 살던 사람 어디로 갔습니까?”
일꾼으로 일하는 사람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습니다.
“예전에 여기 누가 살았습니까?”
“시골서 농사짓다가 이리로 이사 온 내 친구가 있었는데 너무 많이 변해서 알 수가 없습니다.”
일꾼이 안으로 들어가 주인을 찾았습니다.
“사장님, 누가 찾아오셨습니다.”
“누구라던가?”
“칠 년 전에 왔다 간 사람이랍니다.”
“누가?”
안에서 허술한 옷차림의 오준만이 나왔습니다. 그는 수석 아버지를 알아보고 반겼습니다.
“아니! 이게 누군가? 어떻게 오셨는가?”
“반가우이. 전에 이삿짐만 내려놓고 돌아간 뒤로 걱정이 많이 되어서 혹시나 하고 찾아왔더니 여전히 잘 있었군.”
“자네도 잘 지냈는가?”
“여전히 차를 타고 다니며 늙는다네. 자네는 이 고물상에서 일하는가?”
“여기가 내 일터라네.”
“가난한 놈은 오나가나 고생이라니까. 자네도 나아진 것 없이 이렇게 막일만 하고 사는구먼.”
“이게 어때서?”
“상진이도 이제 청년이 되었을 텐데 자네가 이런 일을 하게 그냥 두고 보는가?”
“그 애는 그 애대로 바쁘게 산다네.”
“아주머니는?”
“공장 식당에서 일하고 있네.”
“오나가나 부엌때기 노릇은 버리지 못하고 계시네 그려.”
“그렇지. 그래도 날마다 즐겁다는데 어쩌겠나.”
“자네네 부러운 건 바로 화목한 모습이야. 가난해도 부자들이 못 누리는 화목한 가정이었지.”
“그랬던가?”
이때 일꾼이 다가와서 오준만한테 말했습니다.
“사장님, 전화 왔는데요.”
오준만이 대답했습니다.
“어디라던가요?”
그 말에 수석아버지가 놀라 입을 딱 벌렸습니다.
“아니! 그럼 이 큰 고물상이?”
18. 말로만 전도하면 안 통해
오준만이 말했습니다.
“친구, 사무실로 가세.”
“이런 곳에 사무실이 다 있는가?”
“일하는 곳이 사무실이지.”
수석 아버지는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고물을 올려다보고 돌아보며 상진 아버지 뒤를 따랐습니다. 고물상에 어울리지 않게 깔끔한 사무실이 있고 거기 푹신한 소파까지 있었습니다. 수석이 아버지가 소파에 앉으며 물었습니다.
“이보게 준만이. 이 사무실이며 고물상이 정말 자네 것이란 말인가?”
오준만이 손수 커피를 내놓으며 대답했습니다.
“그렇다네. 다 자네 덕분이었지.”
“정말 자네가 사장이 된 건가?”
“그렇다네. <부자고물상> 주인 오준만이 맞네.”
그러면서 명함을 내놓았습니다. 명함을 받아든 수석 아버지는 그제야 제정신이 든 듯 감탄했습니다.
“오! 정말 장하이. 몸뚱이만 달랑 와서 이렇게 성공을 하다니.”
“다 이 회사 사장님 덕분이었네.”
“그때 그 사장님이 아직도 계신가?”
“건강하시다네.”
“참 인자하게 생기고 마음씨도 고운 어른이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네.”
“요새 고향 사람들은 어떻게 지내는가?”
“고향 소식은 나중에 묻고 자네네 사정 이야기나 먼저 들어 봄세.”
“보다시피 나는 고물상 주인이 되었고 아들은 서울 검찰청 검사가 되었고 딸은 대학에 다니고 있고 마누라는 식당에서 일하고 산다네.”
“뭐야? 상진이가 검사가 되었다고?”
“검사도 남의 아들이 하는 것을 보면 대단한 것 같았는데 내 아들이 검사가 되고 보니 그 놈이 그 놈이더란 말일세, 하하하.”
“자네가 팔자를 폈네 그려.”
“다 하나님이 도우신 덕분이지.”
“자네도 하나님을 믿는가?”
“여기 공장 사장님이 교회 장로님이 아닌가. 그 은혜를 생각하여 교회에 나가고 있네.”
“어쩐지 그 어른이 장로님 같다 했더니……. 장로님은 대개 어딘가 남 다른 데가 있어 보이는 걸 느꼈었지.”
“우리 사장 장로님은 이상한 분이더라구. 우리를 음으로 양으로 도우면서도 우리 보고 교회 나가라는 말을 한 마디도 하지 않으셔서 교인이 아닌 줄 알았지. 그냥 좋은 분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우연한 기회에 교회 장로님이라는 것을 알고 놀랐네. 그래서 우리 가족이 회의를 했다네. 사장님이 장로님이신데 우리가 이대로 있어서는 안 된다 장로님을 따라 교회에 나가자 하였더니 모두 찬성하여 교인이 되었다네.”
“참 훌륭한 어른이시군. 나도 가끔 교인을 만나는데 하나님을 믿으라고 강요하는 말을 하는 거야. 그때마다 반발심이 생겨서 너나 잘 믿어라 하고 속으로 말하고 지금까지 술주정뱅이 운전수를 못 면하고 있지. 자네네 사장 같은 분을 만났더라면 나도 교회에 나갔을 것이네.”
“나는 하나님을 안 믿을 때와 지금은 크게 차이가 있는 것을 느끼네. 자네도 이제 술 담배 끊고 대신 하나님이나 따라다녀 보게. 하하하.”
“보이지도 않는 하나님을 따라다니라니. 보인다면 날마다 차를 몰고 모시고 다니겠네. 하하하.”
“고향 사람들 소식이나 좀 전해 주게나.”
19. 한번 마님은 영원한 마님
수석 아버지가 고향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우리 동네도 많이 변했다네. 동네 아이들이 어느새 청년이 되어 모두가 사회적으로 크게 출세하였다네. 요새는 젊은이들 시대라 아직 어린 것 같은데 모두가 사회에 진출하여 쟁쟁한 자리에 올라 멋지게 살고 있다네.”
“그랬구먼. 그 중에 상진이하고 가장 친하던 성길이는 어떻게 되었는가?”
“성길이는 서울 버스조합 전무가 되었고. 연웅이는 교육청 국장이 되었으며 응기는 연합통신사 국장이 되었다네.”
“그렇게 출세들을 했구먼. 또 다른 사람은?”
“병석이는 큰 회사 씨이오가 되었고 덕성이는 파출소장이 되었다네. 우리도 그 사람 덕을 보았지. 자네 아들은 검사가 되었다니 경찰보다 더 높은 자리가 아닌가?”
“경찰만 못한 것 같던데……. 또 다른 사람은?”
“지홍이는 사업가가 되어 장로까지 되었고 광선이는 큰 금은방을 하여 돈을 억수로 벌어서 요새는 골프나 치러 다닌다더군, 그리고 고향을 떠난 줄 알았더니 명배는 도시로 나가서 동물병원 원장이 되었다는 거야.”
“그럼 동네에는 아무도 안 사는가?”
“우사를 크게 짓고 소를 키우며 농사를 짓는 삼영이가 마을의 촌장이 되어 있다네. 그 사람이 마을을 지키기 때문에 우리 농촌이 든든하다네.”
“그런데 내가 가장 궁금해 하는 마님댁은 어떠하신가?”
“아직도 마님인가?”
“아직도라니, 한 번 마님은 영원한 마님 아닌가.”
“마님 좋아하지 말게. 그 영감 요새 죽을 지경이라네.”
“그게 무슨 말인가?”
“자네가 떠나자 농사를 지을 힘이 없는 영감이 논밭을 잡히고 농협 돈을 쓰고 갚지 못하여 경매를 당하고 있는데 다음이 삼차라네.”
“삼차는 뭐고 경매를 당하면 어떻게 되는 건가?”
“몽땅 망하는 거지. 아들은 카페인가 뭔가 하다가 다 들어먹고 요새는 택시 운전수가 되어 있고 그 영감은 경매를 당하게 되면 집에서도 쫓겨나 알거지가 될 판이지. 그렇게 욕심 많고 못된 심보를 가진 영감이 망하게 되자 온 동네 사람이 동정하기는커녕 잘 되었다고 구경을 하는 판이라네.”
“그래서야 되겠는가. 우리 마님이 그렇게 딱한 처지가 되셨다니 한번 찾아뵈어야겠네.”
“자네는 간도 쓸개도 없는가? 그 영감한테 그렇게 혹사를 당하고 학대를 받고도 마님 마님 하고 동정심이 생기는가?”
“그런 것이야 이제 잊으면 되는 과거사일세. 그렇다고 현실마저 그러면 되겠는가? 하나님은 원수도 사랑하라고 하셨는데 그 어른이야 우리 가족한테는 고마운 어른이셨지. 나 같은 사람을 머슴으로라도 써 주어 살게 했다는 건 고마운 일이 아닌가.”
“자네가 벌렁 누워 먹고만 살았나? 뼈가 빠지게 일하고 겨우 죽만 얻어먹고 살았으면서 그래도 그 영감 편을 들겠는가?”
“이 사람아. 과거는 잊는 거라고 하지 않았는가. 한번 마님은 영원한 마님인 게야.”
“허허, 자네 예수 믿고 새 사람이 되었구먼.”
“난 예수님을 믿기 전이나 지금이나 마음에 변함이 없다네. 모두를 감사하면 감사할 일이 생기는 것이고 무엇에나 불평하면 불평할 일이 생기는 법이야.”
“좌우간 자네 고운 마음씨는 누가 나무라겠는가. 나도 자네한테는 밑바닥이야.”
“이러지 말고 오늘 우리 집에서 하룻밤 자고 내일 자네 차 타고 고향으로 가 보고 싶네. 마님이 그렇게 되셨다는데 못 들은 척하면 사람이 아니지.”
이런 대화를 나눈 다음 수석 아버지는 상진이 집에서 하룻밤을 자기로 했습니다.
오준만은 광우네 걱정이 되어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회사 사장 장로님을 만나 의논했습니다.
“사장님, 제가 머슴살이 하던 마님 댁이 아주 어려움을 당한 것 같습니다. 제가 힘이 있으면 도와드리고 싶은데 힘이 모자랍니다. 그 댁이 경매를 당할 정도로 사정이 나빠졌답니다.”
“그래서요?”
“경매를 어떻게 당하고 있는지 알아서 웬만하면 사장님께서…….”
“날 보고 경매에 가담하라는 말씀이시오?”
“그게 아니고…….”
“그게 아니면?”
“그 댁의 부채를 모두 갚아주고 집과 땅을 돌려받으면 제가 가서 농사라도 지을까 합니다.”
“여기는 어떡하고요?”
“여기는 저 없어도 되지만 그 댁의 논밭은 제가 가꾸지 않으면 안 됩니다.”
“허허. 남들은 농사하기 싫어서 서울로 온다는데 그 나이에 농사를 지을 생각이시오?”
“죄송합니다. 그렇게만 되면 사장님 재산도 느는 것이고 그 댁도 길로 쫓겨나지 않아도 되지 않겠습니까?”
“대출 받은 돈이 얼마라고 하던가요?”
20. 놀부보다 독한 심보
오준만이 자기 집에 머물고 있는 수석 아버지를 데리고 사장실로 왔습니다. 사장한테 인사를 드린 수석 아버지가 그간의 광우에 사정을 설명했습니다.
“시골 마영감은 동네에서 손꼽히는 부자였습니다. 평생 에 친구 오준만만 믿고 살다가 오준만이 손을 떼자 논이고 밭이고 모구 묵혔습니다. 그러다가 농협에서 대출을 받아 아들이 사업을 한다고 하다가 다 들어 먹고 지금은 대출받은 이억 원을 갚지 못하여 경매를 두 번이나 당했습니다. 아직도 대드는 사람이 없어서 또 경매를 할 예정입니다.”
“이억 원이나 대출을 받았다고요?”
“예.”
“지금은 얼마면 낙찰을 보겠습니까?”
“일억 오천이면 될 것입니다.”
“그럼 오사장 의중을 들어보고 결정하겠습니다.”
그리고 오준만한테 물었습니다.
“오사장은 그 땅을 받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제가 가서 농사를 짓고 싶습니다.”
“정말 그럴 결심이 서 있는 것이오?”
“사장님이 결정하시는 대로 따르겠습니다.”
“그렇다면 다음 경매에 응찰하여 보시오. 뒤는 내가 보아드리리다.”
“감사합니다.”
이런 결정을 하고 다음 날 수석 아버지와 오준만이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오준만이 맨 먼저 찾아간 곳은 마광우 아버지였습니다.
“마님, 그간 평안하셨습니까?”
오준만의 인사를 받은 마영감은 엉뚱한 대답을 했습니다.
“그간 평안하지 못했네. 자네는 어디를 떠돌다가 왔는가? 우리 집안을 망쳐놓고 나갔으니 저도 잘 될 일이 없겠지. 어험.”
이때 옆에 있던 수석 아버지가 끼어들었습니다.
“영감님, 이 친구는 크게 출세를 했습니다.”
마영감이 비웃는 얼굴로 대꾸했습니다..
“출세가 뭐야? 머슴 주제에 밥술이나 굶지 않고 살겠지.”
“그게 아닙니다. 부자가 되었습니다.”
영감은 더욱 심통 난 소리를 했습니다.
“부자부자 하지 말게. 부자가 다 얼어 죽으면 모를까 머슴 주제에 부자가 무슨 얼어 죽을 부자. 흐흐흠!”
오준만이 겸손히 입을 열었습니다.
“마님 말씀이 맞습니다. 그저 굶지 않고 사는 걸 본 친구가 말씀을 그렇게 드리는 것입니다.”
수석 아버지가 오준만을 꾸짖듯 말대답을 했습니다.
“이보게, 무슨 말을 그렇게 하는가? 아들은 검사까지 되었는데…….”
마영감이 입을 씰룩거리며 한 마디 던졌습니다.
“검사?? 허허 농협 공판장에서 등급 먹이는 검사라도 되었다는 말인가?”
수석아버지가 대답했습니다.
“그런 검사가 아닙니다.”
마영감이 받았습니다.
“알았네, 검사라는 것도 별별 것이 다 있으니 그런 검사를 두었다고 내가 부러워할 것 같은가?”
수석 아버지가 답답한 듯 말했습니다.
“영감님, 닷새만 있으면 경매 날짜입니다.”
“알고 있어 이 사람아. 괜히 사람 속 뒤집는 소리 말어.”
“이번 3차 경매가 떨어지면 영감님은 길바닥으로 나앉을 판입니다.”
마영감이 오준만을 원망에 찬 눈으로 바라보았습니다..
“이게 다 저 놈 때문이야. 저 놈이 집을 나가지만 않았어도 우리 집이 이 지경은 안 되었을 것이구먼. 이 봐 오씨, 책임지게.”
오준만이 겸손히 말했습니다.
“마님, 염려 마십시오. 제가 책임을 지겠습니다.”
“그려? 어떻게 책임을 질는지 말해 보게.”
“제가 경매에 응찰하여 마님 재산을 다 찾겠습니다.”
“다 찾으면 어떡할 텐가? 그러면 그 재산은 내가 가져도 된단 말인가?”
수석 아버지가 끼어들었습니다.
“영감님, 웬 욕심이 그렇게 많습니까? 이 친구가 경매에 낙찰되면 이 친구 재산인데 왜 영감님을 줍니까?”
“원래 내 재산인데 저 오씨가 집안을 망쳐놓았으니 제 손으로 해결하는 건 당연하고 그러면 내 것은 내 것이지. 아암!”
수석 아버지는 마영감을 쥐어박고 싶었습니다. 도대체 오준만이가 이 집에서 나갈 때 어떻게 해서 내보냈는지는 생각도 않는 못된 심보가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준만은 겸손했습니다.
“마님, 아무 염려 마십시오. 제가 일을 해서 그 돈을 다 갚고 마님 재산이 되게 하여 드리겠습니다.”
“그려? 그럼 약속을 지키나 두고 보지. 이 땅과 집은 내거야. 누구도 못 건드린다고.”
그리고 오준만을 바라보며 오금을 박았습니다.
“자네가 지금 한 말 책임지지?”
21. 사람이 버리면 하늘도 버린다
“예, 수년 안에 낙찰금액을 갚고 마님께 돌려드리겠습니다.”
“그려, 자네는 평생 헛소리를 하는 건 못 보았으니 그 말을 믿어주지.”
“저는 이만 돌아갔다가 다시 오겠습니다.”
“다시 올 때는 돈 가지고 와.”
수석 아버지가 듣다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영감님, 그 돈이 누구 돈인데 가져오라 말라 하십니까? 그 돈은 경매장에서 낙찰 받는 사람이 가져오는 것입니다. 낙찰자가 나오면 영감님은 이 집도 내놓아야 하고 땅문서도 모두 그 사람 손에 넘어가는 것입니다.”
“뭐라고? 내 땅문서를? 그렇게는 못한다.”
“할 수 없지요. 집달리가 와서 모두 밖에다 내놓으면 영감님은 길로 나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하기 싫으면 당장 돈을 내놓으시면 됩니다.”
오준만이 말을 받았습니다.
“마님, 염려 마십시오. 누가 낙찰되든 마님이 이 집에서 쫓겨나게는 하지 않겠습니다.”
“정말인가?”
“낙찰자한테 말하여 그렇게 되지는 않도록 하겠습니다.”
“그려, 난 자네 말은 믿을 거여.”
“제가 돌아갔다가 다시 와서 마님을 도와드리겠습니다.”
수석 아버지가 비위에 거슬려서 한 마디 했습니다.
“이봐, 준만이! 뭐가 아쉬워서 좋은 집 두고 다시 내려온다는 것인가? 언제 한번이라도 저 영감님한테 사람대우 받아본 적이 있었는가? 소 부리듯 하는 영감님을 마님 마님하고 설설 기는 꼴이라니. 더는 못 보겠네. 난 이 꼴 보기 싫어서 가겠네.”
수석 아버지가 휑하니 떠나자 오준만도 인사를 하고 서울 길에 올랐습니다.
수석 아버지는 자기 집으로 가지 않고 마을 회관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을 모아놓고 입을 열었습니다.
“여보게들 저 준만이 생각들 나는가?”
한 사람이 말했습니다.
“그 사람 여기 떠난 지 거의 십년은 되어 가지 아마.”
다른 사람이 말했습니다.
“십년이 될 것일세만 나는 마영감이 그 사람 떠날 때 하던 수작을 생각하면 지금도 울화통이 터진다네. 이십 년이 넘도록 머슴살이 한 사람한테 십 원 한 장 안 주고 내보내는 노랭이가 그것도 사람인가.”
또 다른 사람이 말했습니다.
“그 영감 그래서 천벌을 받은 거여. 농사를 지으려고 해도 우리 마을 사람 누구 하나 그 집 일 해주었던가. 사람 벌을 먼저 받고 그것도 모자라 천벌을 받은 거지. 집안이 망하게 되지 않았나.”
또 다른 사람이 말했습니다.
“사람이 주는 벌이 첫째고 하늘이 주는 벌이 둘째야. 광우 자식 하는 꼴이란 눈꼴이 셔서 못 보지. 읍내에서 크게 영업을 한다고 꺼덕거리더니 허허허.”
수석 아버지가 가만히 듣고 있다가 말했습니다.
“난 알다가도 모를 것이 준만이 뱃속이야. 그렇게 천대를 받고 떠난 사람이 아직도 마영감을 마님 마님하고 굽실거리는 꼴이…….”
다른 사람이 말을 가로막았습니다.
“준만이는 세상에서 보기 드문 호인이야. 언제나 겸손하고 부지런하고 경우 밝은 사람이니 어디를 가서 살아도 하늘이 도와줄 사람이지. 하늘이 그런 사람을 버린다면 안 되지.”
수석 아버지가 그 말끝을 이었습니다.
“그런 사람이라 몸뚱이만 떠났어도 하늘이 도와주고 있더라 이 말씀이야.”
다른 사람이 눈알을 굴리면서 말했습니다.
“하늘이 돕다니 그게 무슨 말인가?”
수석 아버지는 자기 일이나 되는 듯 상진이네가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신이 나게 떠들어댔습니다.
22. 하나님이 도와서라도
“자네들 내 얘기 좀 들어보시게. 상진이, 아니 오준만이 네가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아는가?”
평소에 오만한 박씨가 받았습니다.
“뭘 어떻게 살겠는가. 삼시 끼니나 놓치지 않고 살면 다행이겠지.”
곁에서 임씨도 한 마디 했습니다.
“거지보다도 못한 꼴로 떠났는데 무슨 수로 번듯하게 살겠는가. 더구나 서울 바닥에서.”
수석 아버지는 좌중을 둘러보면서 소처럼 빙긋이 웃어보였습니다.
“허허. 상전벽해라는 말 들어 보셨는가?”
무식하면서도 아는 체 잘하는 천씨가 지식을 동원하여 한 마디 했습니다.
“상전벽 뭐라고 하는데, 그건 사람이 상전을 떠나면 벽이 무어진 집에 사는 것과 같이 해롭다는 말이지. 준말이가 마씨 영감을 떠나 객지로 떠돌았으니 그 말이 그 말 아닌감?”
기가 차서 잠잠하던 전씨가 말을 막았습니다.
“이 사람아 제대로 모르는 말은 안 하느니 만도 못한 법이여. 아무 말이나 주워다 붙이면 다 말인 줄 아는가?”
천씨가 찔끔하여 목을 움츠렸습니다. 그 모양을 보던 전씨가 말했습니다.
“준만이네 집 이야기나 마저 해 보게.”
“상전벽해란 말은 바로 오준만이를 두고 한 말인 것 같았네. 그 사람이 지금 이 동네에 오면 어떻게 되겠는가? 어쩌면 우리 동네에서 가장 부자일지도 모른다네.”
사람들 눈이 모두 휘둥그레졌습니다.
“뭐, 뭐라고?”
“내가 그 집에서 하룻밤 자고 왔는데 수년 전에 내가 차에다 이삿짐을 실어다 주고 한심한 모양을 보고 돌아왔지 않은가. 아무래도 궁금하여 찾아가 보았다네. 그런데 내가 짐을 부려놓은 공장 빈터가 지금은 커다란 이층 양옥이 서 있고 그 담을 경계로 삼백 평쯤 될 넓은 터에 고물상이 있는데 고물을 엄청나게 많이 쌓아 놓고 있지 않던가.”
수석 아버지는 두 팔을 벌려 큰 집이며 산더미 같은 고물이 얼마나 많던가를 설명했습니다.
“내가 고물상으로 들어가서 사람을 찾으니 일꾼이 나와서 안에다 대고 사장님 하지 않던가. 그 사장이란 사람이 나타나는데 나는 깜짝 놀랐네. 그 사람이 오준만이더란 말일세.”
안씨가 끼어들었습니다.
“고물상도 돈벌이가 된다던가?”
“되다 말다. 한 달에 한 번씩 각 공장에서 분류한 고물들을 저울로 달아 돈을 주고 사 가는데 한 달 수입이 천만 원이 넘더라 이 말이야.”
안씨가 고개를 저었습니다.
“거짓말도 정도껏 하게. 그까짓 고물 얼마를 팔아서 천만 원이 되겠는가.”
“내 말이 믿어지지 않거든 한번 오준만이네 집에 가서 직접 보고 오게. 내가 더 부럽게 말하고 싶은 건 고물상이 아니라네. 자네들 상진이를 알지?”
전씨가 대답했습니다.
“상진이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그 애는 어려서부터 똑똑하고 힘도 좋아서 우리 동네 골목대장의 고문이 아니었나.”
“그 말이 맞네. 지금 그 아이가 얼마나 출세를 했는지 아무도 모르고 있지. 어려서부터 뛰어나더니 아직 장가도 안 간 어린 사람이 검사가 되었다네.”
사람들이 귀를 의심하며 말했습니다.
“검사, 검사라고?”
“검사가 되었더란 말일세.”
“그 애가 몇 살인데 벌써 검사가 되었다는 거야?”
“천재가 따로 없다네. 바로 상진이가 천재였던 거여. 옛말에 후생가외(:어린 아이라도 후에 어떤 인물이 될지 모르니 함부로 대하지 말라)라고 하는 말 들어보지 않았던가. 지금 우리가 그 아이를 우습게 본 것이 얼마나 실수였는지 알만 하이.”
동네 사람들이 모두 놀랍다는 듯 입을 다물지 못했습니다. 수석 아버지가 말을 이었습니다.
“내가 준만이네 집에서 하룻밤 자면서 집안을 둘러보고 더 놀랐다네. 이층집에 아래층에는 주방이 있고 주방 앞쪽 입구에는 손님이 누구나 쉬어 갈 수 있는 사랑방 같은 것이 있는가 하면 이층에는 상진이 방이 있는데 한쪽에는 책이 산더미 같고 한쪽에는 목욕실이 달린 침실이 있고 준만이 부부 침실이 딸 침실 곁에 있고 넓은 거실은 온갖 미술 작품과 조각 작품이 있는가 하면…….”
안씨가 말을 막았습니다.
“자네 서울 가서 하룻밤 자고 오더니 소설가가 되었구먼. 소설 속에 보면 부자들 집이 그렇다고 하던데 아무것도 못 보고 와서 소설 쓰는 거 아닌가?”
수석 아버지는 태연히 대답했습니다.
“자네는 모든 것을 부정적으로 보는 게 흠이야. 내가 소설을 쓰든 거짓말을 하든 다 들어 보고 토를 달게.”
전씨가 재촉하는 말을 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다는 건가?”
“아침이 되자 새까만 관용차가 공장 넓은 마당으로 들어와 상진이를 태워가지고 가더란 말일세. 운전수가 젊은 상진이를 보고 영감님 검사님 하고 굽실거리며 모시고 검찰청으로 가더란 말일세.”
안씨가 아무래도 믿을 수 없어서 한 마디 더 했습니다.
“맨손으로 간 사람이 어떻게 이층집에 살며 큰 마당이 있는 고물상을 차린단 말인가. 아들이 검사가 되자 체면상 커다란 셋집을 얻었겠지. 안 그런가 자네들?”
안씨는 좌중이 자기 말에 그렇다고 수긍할 줄 알았는데 점잖고 유식한 이장 유씨가 대답했습니다.
“상진이네가 그렇게 잘 되었다는 건 우리 모두 기뻐할 일이오. 설사 거짓말을 우리가 들었다고 해도 그렇게 엉뚱한 거짓말은 아닐 것이오. 내가 보아온 오준만이는 사람이 안 도와주면 하나님이 도와서라도 잘살게 해주실 것이오. 그 사람 성품이며 행실이 어떠한지는 모두가 아는 처지가 아니오? 그렇게 잘 살게 되었다면서도 마영감한테는 겸손히 아직도 마님이라고 하였다는 말을 듣고 나는 충분히 그 사람이 복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소. 언제 준만이가 온다 하였다니 오거든 동네잔치라도 열어 축하해 줍시다.”
이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며 박수를 쳤습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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