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방/동화

안데르센과의 대화

웃는곰 2016. 5. 30. 17:29

안데르센과 대화


1. 나그네
내가 한적한 길을 터벅터벅 걷고 있는데 앞에 키가 크고 허리가 구부정한 사람이 뚜벅뚜벅 걷고 있었다.
‘이렇게 한적한 길에 나 말고 또 누가 저렇게 걷고 있을까?’
나는 궁금증이 들어서 부지런히 걸어 그 사람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그 사람은 키가 어찌나 큰지 나보다 머리가 하나 높아서 나는 그의 어깨에 머리끝이 닿았다.
‘사람이 키가 크군. 나이는 몇 살이나 되었으며 무얼 하는 사람일까?’
궁금증이 생긴 나는 그 사람 얼굴을 올려다보면서 물었다.
“선생, 당신은 뉘시오?”
그 사람이 나를 내려다보고 대답했다.
“저 말입니까?”
“그렇소. 우리나라 사람 같지는 않은데 어디서 오셨소?”
“덴마크에서 왔습니다만 왜 그러십니까?”
“덴마크라고요? 그 안데르센의 나라 말이오?”
“안데르센을 아십니까?”
“알다마다요.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당신도 그 사람을 아시오?”
“글쎄요…….”
“덴마크에서 왔다면서 어찌 어물어물하시오?”
“그 사람이 그렇게 유명합니까?”
“유명하지요. 우리나라 어린이들까지 아는 이름이라오.”
“그렇군요.”
그 키다리를 가만히 살펴보니 나보다 나이가 많이 낮아 보였다.
“선생, 키는 나보다 크지만 나이는 나보다 아래인 것 같소.”
“올해 저는 일흔 살입니다.”
“그러시면 나보다 일곱 살이 아래이시니 말을 놓아도 좋을 것 같은데…….”
“그러시지요. 저보다 일곱 살이나 위이시라니 제게 형님이 되십니다. 동생으로 알고 편히 말씀하시지요.”
“그럼세, 아무래도 나이 차가 있으니 말하기 편하게 하겠네.”
“그렇게 하십시오.”
“아우님이라고 하겠네. 괜찮겠는가?”
“좋습니다. 저도 형님으로 모시겠습니다.”
“자네는 잘 모른다 하니 그럴 만도 할 것이야. 안데르센아 몇 년 생인지 아시는가?”
“들은 말로는 1805년생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몇 년 전 인물인가?”
“금년이 2016년 4월 26일이까 211년 전 인물이지요. 지금 살았다면 211세지요.”
“그가 몇 살이나 살다 죽었는가?”
“칠십 세를 살았다고 하니 저하고 동갑이 됩니다.”
“그런가? 그럼 내가 살았을 때의 안데르센보다 일곱 살이 위이니 자네나 안데르센이나 내 아우뻘이 되지 않는가.”
“그렇습니다.”
“나는 참 부끄럽게 생각하네.”
“무엇이 말입니까?”
“나는 안데르센보다 칠년을 더 살았으면서 내 이름을 아는 사람은 우리 동네 사람이 겨우 아는 정도이고 해 놓은 것도 없으니 말일세.”
“형님은 무얼 하시는데 그러십니까?”
“난 안데르센 흉낼 내고 산다네.”
“그러시면 연극배우신가요?”
“이 외모 가지고 무슨 배우를 하겠는가.”
“안데르센도 배우가 되고 싶어 했지만 인물이 별로라 배우는 하지 못하고 작가가 되었다고 합니다.”
“나는 안데르센 같은 작품 하나 못 쓰면서 모양만 동화작가랍시고 껄떡거린다네.”
“헝님은 안데르센에 대하여 얼마나 아십니까?”
“깊이 아는 바는 없지만 막연하게 그런 사람이 부러워서 2013년도에는 그 사람 기념관을 다녀오기도 했다네.”
“그렇게 먼 나라를 다녀오셨단 말입니까?”
“멀기는 멀더군. 그래도 그런 사람 흉내를 내자면 그런 데라도 가 보는 것이 순서가 아닐까?”
“그렇기는 하지만 여기서 거기가 얼마나 멉니까. 그래 기념관에 가 보신 소감은 어떠십니까?”
“자네는 안 가 보았는가?”
“안 간 게 아니라 못 가 보았습니다.”
“너무 했어. 그렇게 유명한 작가가 나온 나라에 태어나서 그런 곳에도 못 가 보다니 딱하군.”
“형님, 그 기념관에 다녀온 이야기를 들려주실 수 있습니까?”
“그러지.”
“기왕이면 안데르센에 대하여도 아는 대로 말씀해 주시지요.”
“알았네.”
2. 한국에도 동화작가가 있나요?
“형님, 이백 년도 넘은 안데르센에 대하여 관심이 많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이야기를 하자면 좀 길지.”
“길어도 듣고 싶습니다. 이렇게 걷지만 말고 저 소나무 아래 평평한 바위가 보입니다. 거기서 앉아 쉬시면서 말씀해 주시지요.”
“그럼세.”
이렇게 하여 두 사람은 줄기가 구부정한 소나무 밑 바위에 걸터앉아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내가 긴 이야기를 시작했다.
“나는 2005년도에 필리핀 바기오라는 별장으로 유명한 섬을 여행한 일이 있었네. 돌아오는 도로 곁에 온천 수영장이 있어서 수영을 한 일이 있다네.”
“형님, 그렇게 둔하게 생겨가지고 수영도 하실 줄 아시나요?”
“말말게. 내가 이래봬도 물에만 들어가면 물오리보다 수영을 더 잘한다네. 물속에서 즐기는 것만큼 좋은 것도 없지.”
“부럽습니다.”
“그 수영장에서 우리나라 초등 1년생 여자 아이를 만났지. 그 아이는 수영을 할 줄 모르기 때문에 얕은 물에서 참방참방 물장난을 치고 있더군. 그래서 내가 수영을 가르쳐주겠다고 했더니 좋아하더군. 먼저 숨 쉬는 법을 연습시키고 물에 들어가 머리를 물속에 박는 연습을 시켰는데 어린 아이라 쉽게 수영법을 이해하지 않겠나. 노랑 수영복에 하얀 피부를 가진 아이는 내가 가르쳐 준 대로 물에 동동 떠다니는데 마치 금붕어같이 예뻤지.”
“수영이 그렇게 쉽게 배워집니까?”
“그 아이는 머리가 좋은 것 같았어. 몇 번 안 가르쳐주었는데 자유 수영과 배영을 하더군. 그렇게 하여 낯을 익히자 아이가 나를 보고 묻더군. 아저씨는 무얼 하는 사람이냐고.”
“그래서요?”
“난 동화를 쓰는 사람이다 했더니 그 아이가 금방 아저씨가 안데르센이에요? 하고 묻는 거야. 그래서 안데르센이 누군지 알고 하는 말이냐? 했더니 동화작가잖아요 하지 않겠나. 그래서 더 물었지. 너 우리나라 동화작가 중에 아는 사람이 있어? 했더니 우리나라에도 동화작가 있나요? 하고 반문하는 게 아닌가!”
“형님이 동화 작가라고 소개했는데도 못 알아보고 그런 질문을 했단 말입니까?”
“나야 무명작가니까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그래서 내가 물었지. 우리나라 동화작가 중에 최태호, 강소천, 윤석중, 어효선 하면서 이름을 대보았지만 아는 이름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 아닌가. 난 실망했어. 저 어린 것이 200년도 넘는 세월 저쪽 수만 리 밖에 있는 나라 작가는 알면서 우리나라 작가를 한 사람도 모르고 있다니 충격이 아닐 수 없었지.”
“그렇겠습니다.”
“그날 나는 각오를 했지. 나만이라도 동화를 부지런히 많이 지어서 아이들한테 좋은 작가로 남아야겠다. 누구 보고 그렇게 되어 달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스스로가 먼저 그런 인물이 되어야 한다. 하고 주제넘게 엉뚱한 생각을 하게 되었지.”
“그건 주제넘은 엉뚱한 생각이 아니십니다. 바로 그런 마음으로 글을 써야만 아이들이 알아주고 사랑하는 작가가 되는 것 아닙니까?”
“나는 이만하면 내 소개를 다 했는데 자네는 무엇을 하는 누구인가?”
“너무 부끄러워서 차마 이름을 대드릴 수가 없습니다.”
“이름이 부끄럽다니, 그렇게 말하면 내가 더 부끄럽지. 초등학생한테 한방 먹었은 사람이니 말일세.”
“하하하, 그렇군요. 앞에 동화작가를 두고 모른다고 하였으니 섭섭하셨겠습니다.”
“아우님, 사양 말고 자기소개도 좀 하시게나.”
“저는…….”
“무엇이 그리 부끄러운가?”
“저는 형님을 만나러 온 사람입니다.”
“허허, 이상한 소리를 하는구먼. 나를 만나러 왔다면서 자기소개를 꺼리다니 이건 실례가 아닌가.”
“실례인 줄 압니다만 저는 2백년 전 사람입니다.”
“그게 무슨 소린가. 초면에 사람을 놀리면 안 되네.”
“놀리는 게 아닙니다. 저는 이미 죽은 사람이지만 살았을 때의 나이로 세상에 다시 한 번 돌아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분을 찾았을 뿐입니다.”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군. 쉬운 말로 해 주게.”
“제 이름은…….”
“이름은?”
“안데르센…….”
“안데르센 후손이란 말인가?”
“아닙니다. 141년 전에 죽은 안데르센입니다.”
“농담 말게.”
“제가 죽은 나이까지 합하면 211세입니다만 죽은 후의 세월은 무시하고 살았을 때인 일흔 살로 형님을 만나 뵌 것입니다.”
“허허, 정신이 없군. 무슨 소린지 알아듣게 말해 주게.”
“저는 마지막 살았을 때가 70세였지만 형님은 77세이시니 저보다 일곱 살에 위이십니다. 그래서 제가 형님을 모시고 싶어서 이렇게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린지 나는 이해가 되지 않아 한참 동안 생각을 해 보았다. 141년 전에 죽은 안데르센이 일흔 살로 내 앞에 나타났다니!
내가 선배님이라고 불러야 할 대선배가 아닌가. 전 세계에 이름이 알려졌고 지금도 사람들의 머릿속에 명작가로 살아 있는 안데르센이 아닌가.
이 사람의 말을 믿어야 할까? 아니면 내가 들은 형이라는 소리를 받아들여야 하는가.   

3. 가난한 집 아이 한스
안데르센이 다시 설명하듯 말했다.
“살아 있는 사람한테는 죽은 나이가 필요 없는 것입니다. 살아서 나이가 그 인간의 존재가치이고 죽은 세월은 죽은 것입니다. 역사는 흘러가며 죽은 사람을 기록하지만 개인의 죽음은 의미가 다릅니다. 살았을 때 그 나이 때가 그 사람의 모두입니다.”
“그래서요?”
“그래서라니요? 왜 갑자기 존경어를 쓰십니까? 형님.”
“안데르센이 내 앞에 나타났다는데 어찌 감히 반말을 하겠습니까?”
“그래서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죽은 나이는 죽은 것이고 살았을 때 나이로 어느 때나 만나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제가  아우입니다.”
“아우라?! 허허, 이런 경우도 있는가? 죽은 나이는 나이가 아니다?”
“물론입니다. 죽은 나이는 살았을 때 건너 뛴 것입니다. 형님.”
“아무래도 내가 형 소리를 듣고 안데르센이라고 부르기도 무엇하니 이제 한스라고 편하게 부르겠소.”
“말씀도 낮추어 주십시오.”
“안 되오. 우리나라 말에 타향 벗 십년이라는 말도 있소. 7년 차이라면 타향 벗으로도 족하고 세월을 껑충 뛰어 넘었다 해도 세월 벗은 없는 것이오. 세월은 선후배를 갈라 줄 순 있지만 벗이 될 수도 없소.”
“그렇지만 아우로 아시고 말은 편하게 하십시오. 제가 형님으로 모시기에 불편하지 않게 말입니다.”
“정히 그렇다면 내 기분에 따라 반말도 하기로 함세.”
“좋습니다. 형님.”
“허허, 211년 전의 안데르센을 동생으로 두었으니 내 나이는 218세가 아닌가. 안 그런가 한스?”
“그렇게 생각하시고 저를 아우로 알아주시기 바랍니다.”
“좋아, 나이 타령은 그만 하고 우리 다른 이야기나 함세.”
“좋은 말씀을 하여 주시지요.”
“한스, 덴마크 오덴세가 고향이지?”
“네. 거기서 태어났습니다.”
“안데르센을 존경하는 나는 2013년에 오덴세를 방문하여 안데르센기념 문학관을 보고 왔지. 한스, 자네도 가 보았는가?”
“못 가 보았습니다. 제 고향에 그런 것도 있습니까?”
“있다네. 안데르센을 기념하는 기념관에 본인이 가보지 못했다니 유감이네.”
“그게 죽음의 강 건너편에서 일어난 일이라 그렇습니다.”
“내가 오덴세라는 도시에 들어가 기념관을 찾는데 길이 어찌나 막히는지 어느 길가에 차를 세워 놓고 있을 때였어. 길옆 잔디밭에 새까만 동상 다섯이 죽 늘어서 있더군. 그래서 가까이 가 무슨 동상인가 둘러보다가 거기서 한스 안데르센 동상이 있는 것을 보았지.”
“그렇습니까?”
“안데르센 기념관을 찾아 오덴세에 들어섰는데 길이 복잡하고 좁아서 한 곳에 차를 세우고 지도를 펴들고 길을 찾는 동안 길옆에 시커면 동상이 줄 서 있기에 이것들은  뭐야 하고 사진을 찍었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길이 막힌 덕분에 귀한 자료를 얻었지 뭔가. 그건 바로 한스의 일생을 동상으로 설치해 놓은 귀중한 자료였어.”
“그렇습니까?”
“맨 앞에 있는 동상은 거지 차림의 여자가 무엇인가를 담을 것에다 담고 있는 형상이었는데…….”
이때 안데르센이 목멘 음성으로 말을 가로챘다.
“제가 어렸을 때 어머니 생각을 하면 지금도 가슴이 아프고 눈물이 납니다. 저는 1805년 4월 2일, 덴마크 제2의 도시 오덴세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나폴레옹 전쟁에 참전했다가 돌아온 후 서리가 내리던 밤에 신경쇠약으로 갑자기 돌아가셨습니다. 구두수선공이던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어머니는 세탁부로 남의 빨래를 해주고 근근히 살았습니다. 집안 형편이 찢어지게 가난했습니다.”
“그랬던가?”
“제 이름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이라는 이름은 제가 루터교회에서 세례 받을 때, 대부모(代父母)가 붙여준 이름입니다. 크리스티안은 영어로 읽으면 크리스천입니다. 우리 가문은 할머니가 병원에서 청소부로 일할 정도로 가난했습니다. 그렇게 가난하게 살면서도 독실한 루터교회 신자인 어머니는 저에게 예수를 공경하는 순수한 개신교 신앙을 심어주었고, 아버지는 인형극과 독서를 통해 어린 저에게 옛날이야기와 <아라비안 나이트>를 자주 들려주며 상상력을 심어주셨습니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별세로 저는 한때 어린나이에 공장에서 일도 했습니다.”
“그랬구먼.”
“어머니는 날마다 이 집 저집 찾아다니며 빨래거리를 가져다 밤에는 빨래를 하고 다리미로 다려 가져다주고 몇 푼씩 받아 생활비를 대셨습니다. 늘 거지처럼 사시던 불쌍한 어머니 생각을 하면 지금도 눈물이 납니다.”
“그랬군.”
“외아들인 저는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이라고 불렸고 늘 외롭게 지냈습니다. 집안 형편이 그러하니 친구들도 사귈 수 없어 밖에서 혼자 뛰어놀았지요. 그러나 혼자 무슨 재미가 있습니까. 그래서 집안에 들어앉아 혼자 지껄이고 깔깔거리며 종이로 오려 만든 인형놀이를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저는 내성적이고 예민한 성격이 되었습니다.”
나는 측은한 생각에 무슨 말도 할 수 없었다.
“음…….”
“제가 열한 살 때 아버지가 병으로 돌아가시자 어머니와 저의 생활고는 더 심해졌습니다. 공장 일도 해 보았지만 저는 선천적으로 타고난 노래 솜씨가 좀 있어서 열두 살에 노래와 연기로 오덴세의 부유한 가정을 찾아다니며 재주를 보여주다가 동네 명물이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돈이 좀 모였지요. 그래서 그 돈을 가지고 본격적인 연기자의 길을 걷기 위해 혼자 무작정 코펜하겐으로 상경했습니다. 열네 살에 코펜하겐에 도착한 저는 여러 극단을 찾아가 입단을 요청했지만 번번이 퇴짜를 맞았습니다. 연기에 재능이 있긴 하지만 뛰어나지 않고 그저 평범하다는 것이 퇴자를 맞은 이유였습니다.”
“그래서 연기자의 꿈은 접었던 거군.”
“연기자의 꿈이 깨지자 새로운 길이 보였습니다.”
4. 성냥팔이 소녀
“새로운 길이라는 것이 무엇일까?”
“제가 열네 살이던 1819년에 연극 배우의 꿈을 접은 이유는 특히 변성기 이후 목소리가 탁해지면서였습니다. 게다가 가난 때문에 정규교육을 받지 못해서 문법과 맞춤법이 엉망이라 연극대본을 극단에 제출해도 극단 측의 거부로 반송되기를 거듭했습니다. 저는 실망하여 자살을 생각할 정도로 극심한 마음의 고통에 시달렸습니다.”
“작품을 쓰면서 문법과 맞춤법이 엉망이었다니 내용이 아무리 좋으면 무얼 하나. 실망이 컸겠구먼.”
“그런데 다행히 저의 작가적 재능을 알아본 국회의원 요나스 콜린이라는 분이 그러셨습니다. ‘일단 기본 학력이 있어야만 훗날 뜻을 펼치는 데에도 유리할 것일세’ 하는 조언과 함께, 콜린은 왕실 후원금을 얻어주며 우선 수도 코펜하겐을 떠나 중등 과정을 마치고 돌아오라고 독려했습니다.”
“왕실 후원금제도가 있었다니 다행이군, 우리나라에는 아직도 작가를 위한 그런 제도하 없는데 말일세.”
“그렇지요. 저는 17세에 코펜하겐에서 멀리 떨어진 슬라겔세로 갔고, 동급생들보다 대여섯 살이나 더 많은 나이로 학교에 입학했습니다. 동생 같은 아이들과 고부하자니 부끄럽기도 했고 어색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열심히 공부하여 재학 중에 <죽어가는 아이>라는 제목의 시를 발표했는데 의외로 호평을 받아 연극배우 지망자가 작가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1828년, 23세의 늦깎이 학생이 6년간의 공부 끝에 코펜하겐 대학 입학시험에 합격했습니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첫 저서인 <도보 여행기>를 발표했고 몇 편의 희곡과 소설을 쓰면서 작가로서의 재능을 드러내게 되었습니다.”
“아주 멋지고 재미있군. 그 뒤에 무슨 작품을 썼는가?”
“1834년 29세에 <즉흥시인>으로 문학계의 호평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1835년부터 본격적인 동화 저작에 몰두했습니다. 어린이와 어른이 함께 읽는 동화를 썼습니다. 역시 독자들의 반응이 좋았습니다. 그러나 일부 문학비평가들은 <즉흥시인>을 쓸 정도로 뛰어난 작가가 고작 어린이를 속이는 이야기나 쓴다는 가혹한 비난을 받기도 했습니다.”
“동화는 어린이만 읽는 줄 생각하기 쉬운데 실은 어른들이 더 읽어야 할 작품이라고 생각하네. 어른들은 정서적으로 군더더기 때가 묻어서 동화를 읽음으로 마음을 정화시킬 필요하 있다고 생각하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저는 가난한 구두 수선공의 아들로 태어나 구걸까지 해야 했던 어머니를 소재로 <성냥팔이 소녀>를 썼습니다. 가난한 아픔이 가슴에 못 박혀 그런 글을 쓰게 되었지요.”
“그런가? 나도 그 제목은 아네만 읽어본 적이 없었는데 어떤 내용인가 들려줄 수 있겠는가?”
“예. 성냥팔이 소녀의 내용은 간단히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새해를 하루 앞 둔 그믐밤, 한 굶주린 성냥팔이 소녀가 추운 거리로 성냥을 팔러 나섰습니다. 성냥을 팔지 못하면 집에 돌아갈 수도 없는 소녀는 꽁꽁 언 손을 녹이기 위해 성냥 한 개비에 불을 붙입니다. 그러자 빨갛게 타오르는 불꽃 속에서 온갖 환상이 소녀 앞에 나타납니다. 첫 번째 성냥은 큰 난로가 되고, 이어서 맛있는 음식이 차려진 식탁, 그리고 예쁜 크리스마스트리가 나타납니다. 크리스마스의 트리에 달린 불빛은 높은 하늘로 올라가 환한 별이 됩니다. 그 불빛 속에 할머니가 나타나자 소녀는 자신도 그곳으로 데려가 달라고 부탁합니다. 소녀는 할머니가 계속 떠나지 않고 머물러 있게 하기 위해 남은 성냥을 몽땅 살라버립니다. 그러자 사방은 밝아지고 소녀는 할머니 품에 안긴 채 하늘로 올라갑니다. 추운 밤이 지나고 날이 밝자 소녀는 미소를 지은 채 죽어 있습니다. 그러나 소녀가 어떤 아름다운 것을 보았는지, 얼마나 축복을 받으며 할머니와 함께 즐거운 새해를 맞이하였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그슴 아픈 이야기로군. 그 할머니가 한스 할머니이고 소녀가 한스 어머니라는 상상을 한 것이겠지?”
“그렇게 생각하시어도 무리는 아닙니다.”
“그렇군.”
“평론가들도 제 사정을 아는 사람이 죽어가는 한 아이의 간절한 소망을 이야기하고 있는 이 동화는 작자가 빈곤하게 소녀 시절을 보낸 어머니를 생각하며 쓴 작품이라고 했습니다. 발표 후 영화, 뮤지컬 등으로 다양하게 재구성되었습니다. 2006년 월트디즈니(WaltDisney)사의 애니메이션 <성냥팔이 소녀가 있으며 한국에서도 이 동화를 모티브로 딴 영화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어머니를 소재로 쓴 작품이  성냥팔이 소녀라면 아버지를 소대로 한 작품은 없는가?”
“있습니다. <눈의 여왕>이라는 작품은 제가 어렸을 때 나폴레옹 전쟁에 참전했다가 돌아온 아버지가 서리가 내리던 밤에 신경쇠약으로 돌아가시자 고아가 된 저는 ‘눈의 여왕’이 데려갔다는 것으로 생각한 어린 시절의 기억이 소재가 되었습니다.”
“그런가. 그럼 한스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여 쓴 작품도 있는가?”
“있습니다.”
“그래?”
나는 귀를 바짝 세웠다.
5. 미운 오리 새끼와 한스
“저는 보잘것없는 가문에서 태어났고 정규교육도 제 때에 받지 못한 이유로 작가로 데뷔한 후에도 사회적으로 홀대당하는 경향이 컸습니다. 그래서 저의 처지를 생각하며 지은 동화가 <미운 오리새끼>입니다.”
“그랬군. 그렇지만 남들은 다녀보기 힘든 외국 여행을 하면서 작가 활동을 하신 것으로 아는데.”
“스물여덟(1833~4) 경에는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를 여행했고, 이때의 경험을 토대로 자전적 요소가 깃든 장편소설 <즉흥시인>을 발표해 격찬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1835년에는 <아이들을 위한 동화>라는 제목으로 첫 번째 동화집을 펴냈습니다. 제 동화를 읽은 어느 친구가 그러더군요 ‘<즉흥시인>이 자네를 유명하게 만들었다면, 이 동화는 자네를 불멸의 작가로 만들 것일세. 대단히 훌륭한 작품이야’ 하고 칭찬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미안하네만 나는 동화를 쓰기는 하지만 남들의 동화를 잘 읽지 않네. 이유는 남의 동화를 읽다 보면 내 실력이 달린다는 것을 느끼고 주눅이 들어서 더 이상 작품을 쓴 용기가 나지 않기 때문이고 또 다른 이유는 남이 쓴 동화를 자꾸 읽다 보면 나도 모르게 구상을 흉내 내고 표절할 위험성을 느끼기 때문이라네. 그런 이유로 그 유명한 <미운 오리새끼>도 못 읽어 보았는데 그 이야기도 간략히 둘려주지 않겠나.”
“그러시지요. 저는 비평가들한테 교훈의 전달보다는 환상적 묘사에 치중한 다는 혹평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러나 1843년에 발표한 동화집 <새로운 이야기들 1권>에 수록된 <미운 오리 새끼>가 대대적인 찬사를 받으면서 저는 그 어느 때보다도 명성이 확고해졌습니다. 그 결과 1846년에는 덴마크 국민으로선 최고의 영예인 단네브로 훈장을 받았고, 왕족과 귀족을 비롯한 상류층 인사들과 교제하는 명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고국 덴마크 비평가들한테는 제 작품이 혹평을 받았습니다. 가뜩이나 예민한 마음이 크게 상했던 적도 있었지만 독일이나 영국 같은 외국에서 명성을 얻어 위로를 받았습니다. 영국의 경우에만 해도, 당대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소설가 찰스 디킨스가 특히 저의 열성 팬이 되어서 여러 번에 걸쳐 만나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을 정도였습니다.”
“참 부럽네. 그러나 예수님도 자기 고향에서는 멸시를 당하지 않았던가. 나 같은 사람은 우리 동네에서도 존재를 알아주지 않는데 이웃나라 독일이나 바다 건너 영국에서 사랑을 받았다니 난 꿈꾸지 못할 영광을 누렸네 그려.”
“그렇습니다. 제 자랑만 하다가 형님이 부탁하신 이야기가 빗나갔습니다.”
“미운 오리새끼 이야기 말인가? 들어 봄세.”
“제가 바로 미운 오리새끼와 같습니다. 유난히 큰 알에서 태어난 새끼 오리는 보통의 오리들과 다르게 생겼다는 이유로 다른 오리들한테 괴롭힘을 당합니다. 처음에는 어미 오리가 다독여주지만 나중엔 어미 오리마저 새끼 오리가 없어져 버렸으면 좋겠다고 한탄합니다. 이에 상처를 받은 새끼 오리는 집을 떠나 어느 마음씨 좋은 할머니의 집에서 지내게 됩니다. 하지만 그 집에 사는고양이와 닭이 괴롭혀서 견디지 못하고 새끼 오리는 도망쳐 나옵니다. 추운 겨울이 지나 봄이 오고, 어느 날 우연히 새끼 오리는 자신이 하늘을 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자기는 못생긴 오리로만 알았던 새끼 오리는 다름 아닌 아름다운 백조라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후 미운 오리새끼는 백조 무리 속으로 들어가 자유롭게 하늘을 날아다니며 행복하게 산다는 이야기입니다. 처음 제목은 어린 백조로 했다가 반전의 묘를 살리고자 미운 오리 새끼로 성장하는 이야기로 했던 것도 잘한 것 같습니다.” 
“그렇군. 아주 재미있는 구상이야. 만약 처음에 지은 어린백조라고 제목을 붙였더라면 작품으로 세상의 이목을 끌지 못했을 것일세. 작품의 반전효과는 독자를 매혹시키는 힘이 있지.”
“저의 이야기를 재미있게 들어주셔서 고맙습니다.”
“고마울 것 없네. 내가 더 고맙지 않은가. 작가 한스를 만나 동화 내용을 들을 수 있으니 말일세. 이왕이면 많은 것을 들려주게. 내 기억에 자네의 동화들은 <인어공주>, <엄지 공주>, <꿋꿋한 양철 병정>, <벌거벗은 임금님>, <전나무> <나이팅게일> 같은 대표작을 비롯해 200여 편의 동화가 있는 것으로 아는데 무슨 이야기를 더 들려주겠는가?”
“인어공주의 대략을 말씀드리지요. 인어공주는 깊고 깊은 바다 속 인어들이 사는 궁전에 살던 여섯 인어 공주 가운데 막내 여섯 번째 공주 이야기입니다. 여섯 공주 가운데 막내 인어공주가 가장 아름다웠습니다.
어느 날 막내 인어공주가 바깥세상을 구경하려고 바다 위로 얼굴을 살짝 내밀었습니다. 그 때 마침 커다란 배 한 척이 지나갔습니다.
그 배의 뱃전에는 잘생긴 왕자님이 나와 있었습니다.
“아, 저분은 누구실까?”
인어공주는 넋을 잃고 바라보았습니다. 그렇게 인어공주가 넋을 잃고 왕자님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폭풍이 몰아쳤습니다. 그 순간 왕자님이 탄 배가 뒤집히고 말았습니다.
배에 탄 사람들이 바다에 가라앉자, 인어공주가 물에 빠진 왕자님을 구해 내었습니다. 인어공주는 왕자님을 바닷가에 눕히고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날이 밝자 한 예쁜 아가씨가 마침 바닷가를 산책하고 있었습니다. 인어공주는 재빨리 바위 뒤로 숨었습니다.
예쁜 아가씨가 왕자님을 발견하고 돌보아 주었습니다. 그것을 본 인어공주는 깊은 바다 속으로 되돌아갔습니다. 그러나 인어공주는 왕자님을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바다마녀를 찾아갔습니다. 그리곤 아름다운 다리를 갖게 해달라며 사정했습니다.
“이 꼬리 대신 다리를 갖게 해 주세요.”
마녀가 조건을 달고 말했습니다.
“그러면 네 아름다운 목소리를 내게 주어야 한다. 그래도 좋으냐?"
인어공주는 망설이다가 왕자님을 사랑하는 마음만큼 목소리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네, 왕자님만 볼 수 있다면…….”
마녀가 이상한 약을 주면서 말했습니다.
“그럼 이 약을 먹으면 될 게야. 먹으렴. 그러나 네가 이 약을 먹은 후 일곱번째 아침이 오는 날까지 왕자님한테 사랑의 키스를 받아내지 못한다면 넌 물거품이 될 게다.”
인어공주는 얼른 약을 받아 삼켰습니다.
6. 잃어버린 사랑
인어공주는 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다음 날 아침, 인어공주는 바닷가에서 눈을 떴습니다. 먼저, 자신의 하체를 살펴보았습니다. 꼬리가 아닌 쭉 빠진 두 다리가 있었습니다.
인어공주는 너무 기뻐서 소리를 질렀지만 목소리가 나오질 않았습니다.
그 때, 바닷가에서 산책 중이던 왕자님이 인어공주를 발견하곤 다가와 말을 걸었습니다.
“아가씨는 누구신가요? 어디에서 오셨습니까?”
그러나 목소리를 잃은 인어공주는 대답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왕자님은 말을 못하는 인어공주를 불쌍히 여겨 자기의 성으로 데려갔습니다.
며칠 후, 인어공주는 왕자님이 결혼을 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 신붓감은 인어공주가 구해 놓은 왕자를 지나가다 들여다보던 그 예쁜 아가씨였습니다. 그 아가씨는 이웃나라 공주로 왕자와 결혼하기 위해 자기가 왕자님을 구했다고 거짓말을 한 것입니다.
그 사실을 안 인어공주는 매우 슬펐습니다. 그러나 말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슬픔을 감추고 춤을 추며 왕자의 결혼을 축하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엿새 째 되던 날 밤 인어공주는 슬픔에 잠겼습니다. 그 때, 인어공주의 언니들이 찾아와 칼을 주며 말했습니다.
“막내야, 이 칼을 받아라. 이 칼로 네가 왕자님을 죽이지 않으면, 넌 물거품이 되고 말 거야.”
인어공주는 언니들이 준 칼을 받아 들고 왕자님이 자는 방으로 숨어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왕자님을 사랑한 인어공주는 차마 왕자님을 죽일 수가 없었습니다.
‘아! 차라리 내가 물거품이 되고 말 거야.’
인어공주는 그냥 밖으로 나오고 말았습니다.
그때 마침 일곱 번째 새벽이 밝아오고 있었습니다. 인어공주는 아픈 가슴을 어루만지며 말했습니다.
“왕자님, 부디 행복하세요.”
그 한 마디를 남긴 인어공주는 바다 속으로 풍덩 뛰어들었습니다.
마침내 일곱 번째 아침이 밝았고 인어공주는 물거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슬프진 않았습니다. 물거품이 된 인어공주는 하늘 높이 떠올랐습니다.”
마치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듯이 인어공주 이야기에 빠졌던 나는 사랑했던 공주의 심정으로 말했다.
“한스, 사랑을 잃은 러브 스토리가 가슴 아프군.”
“형님, 덴마크를 다녀오셨다고 했지요?”
“그랬지. 사박오일 간 오덴세 변두리에서 민박을 했다네.”
“오덴세가 어떠하던가요?”
“나는 민박하는 동네 골목길을 돌아다니며 감탄했어. 말만 듣던 덴마크는 정말 아름다운 나라였어. 한 마디로 나는 그랬지. ‘이렇게 동화속의 천국 같은 마을에 살면서 작가가 되지 않는다는 것은 영혼이 죽은 것이라’고.”
“그렇게 아름다웠습니까?”
“길마다 꽃길에 마을 담장이 모두 꽃나무로 덮여 있고 내가 갔을 때는 닷새 동안 날씨가 얼마나 좋았던지 맑고 파란 하늘을 마음껏 날아다니다 왔으니까 말일세.”
“형님이 저보다 더 감상적인 것 같습니다.”
“정말 아름다운 나라였어. 내가 민박하는 집은 이층집 전체였는데 화단에 는 온갖 꽃들이 피어 웃고 있었고 그 가운데 나를 놀라게 한 것은 꽃나무였네. 한국에는 없는 크리스마스카드에 빨간 열매에 리본이 달리고 잎이 귀엽게 뾰족뾰족한 초록 그림이 실제로 있는 나무 그림이라는 것을 알았지. 하도 신기해서 그 꽃나무 사진도 찍고 몇 번씩 만져보고 왔았다네.”
“그러시면 코펜하겐도 가 보셨겠지요?”
“물론이지. 오덴세에서 참 멀더군. 세계에서 두 번째로 길다는 19킬로미터나 되는 긴 바다 다리를 건너갈 때 자네가 어린 나이에 무슨 용기가 그리 있어 이 바다를 건너갔을까 생각도 했지. 그리고 무얼 타고 갔는지. 지금은 기차도 다니고 일반 차도 고속으로 달리는 다리가 있지만 말일세.”
“그때는 지금 같지 않지만 구식 차가 다녔습니다. 저는 극단에 들어가서 유명한 배우가 되고 싶어서 겁도 없이 갔던 길입니다.”
“그랬군. 코펜하겐은 오덴세보다 화려하고 큰 도시였는데 많은 사람들이 인어공주를 보러 몰려드는 것을 보았네.”
“인어공주도 보셨습니까?”
“보기도 하고 그 앞에서 사진도 찍었네. 바닷가 바위를 비스듬히 타고 누운 자그마한 소녀상이 놀랍게도 작게 보이더군. 원래 유명한 것이라 기대가 하늘 같은데 실물을 보니 막 시집갈 나이의 자그마한 처녀상이라 더 작게 보였던 것 같았어. 그 소녀상을 보자고 밀려드는 수만 명의 인파는 바닷가를 하얗게 뒤덮더군. 우리나라에 그런 명품이 있었으면 하고 부럽게 생각도 했지. 한스, 자네는 나라를 위해 정말 훌륭한 작품을 남기고 갔어.”
“그만 하십시오. 제가 한 것이 아니라 덴마크 국민이 이루어 놓은 업적입니다. 저는 조국 덴마크에 감사를 드릴 뿐입니다.”
“나는 궁금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닐세. 한 때 <즉흥시인>을 쓸 정도로 뛰어난 작가가 고작 어린이를 속이는 이야기나 쓴다는 가혹한 비난을 받기도 했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랬지요.”
“그 작품을 요약하면 어떤 것인가?”
“그건 1835년에 쓴 것입니다. 제가 스무 살 중반에 전설 속에 나오는 선녀같은 아름다운 여자를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1833년 해 봄에 그녀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여 저를 떠났습니다. 그때 실연의 상처를 씻기 위해 덴마크를 떠나 두 번째 장거리 이탈리아로 갔습니다. 그해 가을부터 다음해 봄까지 거기서 보내면서 그곳의 아름다운 자연과 소박한 서민생활에 감동을 받고 소설을 구상했습니다. 무대는 이탈리아로 되었지만 역경 속에 살던 저는 청년의 시와 사랑, 그리고 유랑 이야기 등 저의 체험기에 가깝습니다. 밀하자면 이 소설에는 저의 체험 이외의 것은 하나도 없다고 할 정도입니다. 로마에서 쓰기 시작하여 덴마크로 돌아온 후에 완성하였습니다. 그 원고가 출판되자마자 많은 독자의 호응과 사랑을 받고 제 이름이 유명해졌습니다.”
“그런 가슴 아픈 사연이 작품을 쓰게 하였던 거 같으네. 스토리는 어떤 것인가?”
“주인공은 로마에서 태어난 안토니오라는 청년입니다. 마차 사고로 어머니를 잃고 고아가 됩니다. 그러나 타고난 즉흥시의 재능을 유일한 미끼로 청춘의 방황을 거듭하며 아름다운 가수 아눈차타를 알게 되고 사랑합니다. 그 가수를 둘러싸고 친구 베르나르와 결투를 벌이는 등 파란을 일으킵니다. 그러다가 마지막에는 베네치아 시장의 조카딸인 청순하고 아름다운 마리아를 만나 행복한 생활을 하는 과정을 그렸습니다. 부활제 축제 속에서 잃어버렸던 연인 아눈차타를 만나 마음이 통하는 애틋한 장면, 마지막으로 변두리 극장에서 몰락한 그녀를 만나는 장면 등이 작품의 클라이맥스입니다. 사랑의 갈등과 애절한 사랑의 몰락을 보며 로마, 나폴리, 베네치아, 캄파니아의 황야 등을 배경으로 고뇌하는 인간상과 아름다운 청춘의 이야기를 쓴 것입니다.”
“상상만 해도 멋지군. 또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네.”
7. 벌거벗은 임금님
“나는 어렸을 때 벌거벗은 임금님을 참 재미있게 읽었네. 그 이야기를 쓰게 된 동기는 어디에 있었는가?”
“그건 제가 1837년 <아이들을 위한 동화>집을 통해 발표한 작품입니다. 권력 앞에 진실을 말하지 못하는 어른들의 어리석은 모습을 꼬집어 표현한 것으로 나도 답답한 마음에서 쓴 글이지요. 내용을 간단히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옛날 어느 나라에 엄하고 욕심 많은 임금이 있었다. 그 못된 임금을 골탕 먹이기 귀해 하루는 거짓말쟁이 재봉사와 그의 친구가 임금을 찾아와 세상에서 가장 멋진 옷을 만들어 주겠다고 제안한다.
그러면서 입을 자격이 없고 어리석은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는 특별한 옷이라고 이야기한다.
임금은 기뻐하며 작업실을 내주고, 신하들에게 두 사람이 작업하는 것을 살피라고 명령한다. 아무리 보아도 신하들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어리석음이 드러날까 두려웠던 신하들은 모두 멋진 옷이 만들어지고 있다고 거짓 보고를 하였다.
임금은 신하들의 보고를 받고 흡족했다.
‘저것들이 그 지은 옷을 보았다 하니 지혜로운 자들이로구나.’
신하들이 어느 안전이라고 거짓말을 하랴 하고 신하들의 말을 믿었다. 시간이 지나고 재봉사는 임금에게 옷이 완성되었다며 입어볼 것을 권하였고, 임금님 눈에도 옷이 전혀 보이지 않았지만 임금 역시 어리석은 자라는 말을 듣지 않기 위해 옷이 보이는 척하고 입힌다.
그리고 임금은 입을 자격이 없고 어리석은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는다는 새 옷을 입고 거리행진을 한다. 백성들은 감히 웃지도 못하고 임금이 발가벗은 것을 말하지 못했다. 그런데 그 모습을 본 한 아이가 “임금님이 벌거벗었네!”라고 소리친다. 그제야 임금은 속은 것을 알아차리게 된다.
나는 이 이야기를 들으며 내 생각을 말했다.
“한스, 자네는 참 용기 있는 사람이로군, 나는 얼마 전에 <귀 밝은 임금님>이라는 동화를 발표했는네. 그 글을 쓴 목적은 우리나라 정치계를 한심스럽게 바라보면서 쓴 글이었지만 끝내는 하고 싶은 말을 못하고 적당히 줄여 쓰고 말았네. 우리나라같이 작은 나라에 국회의원 수가 너무 많다고 생각하네. 게다가 지방 자치제라는 것을 만들어 국비를 낭비한다고 지적하려 했던 것인데……. 국회의원을 백 명으로 줄이고 지방자치제를 폐지해야 한다고 귀 밝은 임금님께 고하는 글을 썼으나 어린이들한테까지 정치 이야기를 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사람들의 충고를 받아 끝내 완성된 글을 펴내지 못했지 뭔가. 많은 사람들이 나와 같은 생각을 하면서도 나서서 말하는 사람이 없고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던 사람마저도 막상 국회의원이 되고 나면 그런 말은 감히 하지 못하고 말지. 지방자치도 그랬어. 봉사직으로 한다고 했다가 결국은 고급 연봉 수혜자가 되고 말았다네. 그것을 과함히 말하지 못했는데 자네의 용기는 얼마나 대단했던가. 부럽기만 하이.”
“형님도 멋진 생각을 하셨던 것 같습니다. 귀가 어두운 척하며 신하들이 속삭이는 소릴 듣고도 못 들은 척하고 지혜롭게 정사를 처리하는 임금님의 지혜가 저의 작품과는 반대 구상이지만 재미있는 작품이십니다.”
“어느 나라나 작가는 많지만 정치 이야기는 작품으로 쓰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아. 골치 아픈 일이 따르기 때문이겠지.”
“그렇습니다. 정치하는 사람은 작가들이 하는 정치담에 매우 민감하니까요.”
“자네는 1872년 서른일곱 살 때 160여 편의 동화를 펴냈고 작품은 모두 유명해져서 연금까지 받는 행운을 얻었다지. 그뿐 아니라 자네 그림이 들어간 우표를 발행하는 등 대단한 영광을 누렸다고 들었네. 62세 때는 고향 오덴세의 명예시민으로 대우를 받고 1875년 병으로 세상을 떠났을 때는 장례식에 덴마크 국왕과 왕비까지 참석했다는 것을 자네 기념관에 가서 알았네. 알미니 멋진 인생인가. 참 부러운 삶이었어.”
“부러우실 것 없습니다. 저는 고독한 일생을 산 불행한 사람이었습니다. 죽어서 받는 영화가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살았을 때 마음으로 사랑하는 한 사람이라도 마음껏 사랑하고 자녀를 낳아 기르며 살다가 죽는 그런 삶이 보람있는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고독 속에서 사랑을 그리다 사랑에 외면당하고 외롭게 살다 보니 어린이와 어른이 보는 동화를 썼지만 아이들을 품에 안는 것을 싫어했습니다. 얼마나 모순된 삶을 산 저입니까?”
“허허, 이야기가 이상해졌네, 자네가 쓴 엄지공주 이야기나 들려주게.”
8. 엄지공주와 실연
“예, 엄지공주는 1835년에 <아이들을 위한 동화>를 통해 발표하였습니다. 영국 동화에 엄지만한 주인공 <엄지손가락 톰>에서 영감을 얻어 창작한 것으로 그 동화에 나오는 엄지손가락은 쥐구멍에도 들어가고 달팽이 껍데기 속에도 들어가고 소매에도 들어갔다가 늑대 뱃속으로 들어가기도 하는 공상 동화였는데 그것을 읽으면서 느낀 영감에서 이런 글을 썼습니다.”“작가의 영감이란 지극히 짧은 순간에 스치고 가는 바람 같은 것이더군, 나도 늘 경험하는 것이 그런 영감이고 그것에 의해 동화를 쓰게 되더군. 그 짧은 순간에 섬광처럼 스치는 생각을 바로 기록하지 않으면 그 순간을 놓cl면 아무 생각도 안 나는 경험을 많이 했다네.”
“그렇습니다. 작가와 작품이 만나는 것은 지극히 짧은 순간에 이루어지는 인연처럼 느껴집니다.”
“엄지공주를 나는 읽어보지 못했지만 작은 존재가 이루는 큰 사건이 떠오르는군. 자네의 그 엄지공주 이야기를 해 주시지 않겠나.”
“그 내용은 이러합니다.”
옛날 어느 마을에 작고 예쁜 아이를 가지고 싶어 하는 한 부인이 있었다. 부인의 간절한 소원을 들은 요정은 그녀에게 꽃 한 송이를 건넸고, 얼마 후 꽃 속에서 아주 작은 아이가 태어났다.
부인은 그 아이에게 엄지처럼 작다고 하여 엄지공주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엄지공주를 아들의 신붓감으로 결정한 어미두꺼비가 엄지공주를 납치해 간다. 
엄지공주는 물고기들의 도움으로 연못을 탈출하지만, 엄지공주에게 반한 풍뎅이에게 또 다시 납치된다. 하지만 사랑이 식어버리자 풍뎅이는 무참히 엄지공주를 버리고, 엄지공주는 들쥐 아줌마의 도움으로 숲속 생활을 하게 된다.
 어느 날 들쥐 아줌마는 나이는 많지만 능력이 좋은 두더지와 결혼을 하라며 권하고 들쥐 아줌마의 제안을 거절할 수 없었던 엄지공주는 그러기로 한다. 
결혼을 앞둔 어느 날 엄지공주를 사랑한 제비가 엄지공주에게 함께 도망할 것을 속삭인다. 제비가 좋아진 엄지공주는 두더지와의 결혼을 하루 앞두고 제비 등에 올라 남쪽 나라로 달아난다.
남쪽 나라에서 엄지공주는 꽃의 요정들을 다스리는 왕자를 만나 둘은 서로 사랑에 빠지게 된다. 제비는 엄지공주를 진심으로 사랑한다. 하지만 사랑이란 좋아한다고 다 결혼하기보다는 자기가 해 줄 수 없는 것을 다 해주는 상대가 있다면 사랑하는 이의 진정한 행복을 위해 사랑을 단념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마음씨 고운 제비는 사랑하는 상대의 행복을 진심으로 빌기로 하고 왕자와 엄지공주가 결혼하여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본다.
여기가지 말한 안데르센이 감상에 잠긴 얼굴로 물었다.
“이런 줄거리입니다. 어떻습니까? 형님.”
“이 작품 역시 자네 이야기가 아닌가 싶네. 그토록 사랑했던 여자가 마음이 다른 사람한테 옮겨간 것을 아는 순간 자기 욕심을 버리고 상대의 행복을 빌어준 것이 아닌가. 그리고 제비처럼 자네는 쓰린 가슴을 안고 고독하게 하늘을 날아다닌 것이 아닌가. 일생을 독신으로 말일세.”
“형님 추리력이 대단하십니다. 바로 그런 심정이 저의 진심이었습니다.”
“후세 사람들은 자네의 그 진심을 알아주었던 것 같네.”
“무슨 말씀인지요?”
“내가 전에 말했지. 오덴세의 자네 기념관을 찾아가다가 길이 막혀서 차를 세우고 있는 동안 길 옆 잔디 공원에 세워진 검은 동상들을 보았다고 하지 않았나.”
“그러시었지요.”
“오른쪽 어머니의 상은 빨랫감을 구하여 들고 섰는 모습이었고 왼쪽 끝에는 몸은 매끈한 비너스인데 목에서 얼굴은 안데르센 바로 자네의 머리를 결합하여 만든 동상이었네. 혼합 상을 보고 혼자 고독하게 살아온 자네가 죽어서라도 아름다운 여자의 사랑을 받고 행복하라고 비너스와 자네를 결합시킨 동상이었다는 해석을 나 혼자 했는데 그 해석이 맞는 것 같으이.”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런 것 같습니다. 저 같은 것이 비너스와 결합을 한다는 것은 무리입니다. 못 생긴 외모에 서툰 대인 관계로 여자 마음을 휘어잡지 못한 바보였던 저랍니다 하하하.”
9. 그림 없는 그림책
“한스, 자네 작품 중에 그림 없는 그림책이라는 것이 있지?”
“있지요. 제가 공상을 마음대로 하던 작품입니다. 가난한 화가가 고향을 떠나, 대도시의 다락방에서 쓸쓸하게 지내고 있는 어느 날 밤, 창문 밖에 정든 달이 둥실 떠 있는 것을 보고 위안을 받는다는 이야기입니다. 달은 그때부터 밤마다 화가를 찾아와 창문을 통해서 세상을 내려다본 일들을 이야기해 주고, 화가는 그 이야기를 적습니다. 이러한 구성으로 서른세 밤의 스케치와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는데, 제가 35세에 초판을 내던(1840년까지)해 20일 밤까지, 재판은 31밤까지 수록되어 있으며 3판부터는 지금과 같은 내용이 되었습니다. 집필 자료는 인도 ·스웨덴 ·이탈리아 ·핀란드 ·아프리카 등 세계 각지에서 구한 것이며, 산문 시풍의 짧은 이야기 속에 인생을 음영 짙게 그리기도 하고, 천진난만한 어린이들을 스케치하기도 하였습니다. 연작(連作)의 단편집으로, 제3 ·9 ·10 ·16밤 등에는 인생 비평이 들어 있고, 제2 ·17 ·31 ·33밤 등은 동화의 정수로 평가받은 바 있습니다.”
“창문으로 들여다보는 달이 들려주는 이야기라……. 참 재미있는데 나한테는 그 달이 와서 이야기해 주지 않을까.”
“틀림없이 한번은 세상에서 일어나는 밤 이야기를 들려주실 것입니다.”
“왜 하필이면 밤인가?”
“달은 낮잠을 자고 밤에만 일어납니다. 어떤 때는 졸린 눈으로 나비 눈썹을 떴다가 어떤 때는 반쪽만 내놓고 윙크하면서 애교를 부리기도 하고요 어떤 때는 활짝 웃으며 온 얼굴이 입으로 변하고 그러다가 호랑이 눈썹을 하고 흘겨보기도 합니다.“
“자네는 어떤 얼굴이 좋던가?”
“달은 본 대로 얼굴 표정을 바꿉니다. 그래서 좋은 표정이 따로 없습니다.”
“어떻게?”
“세상 비밀을 보았을 때는 눈썹달로 뜨고 낯부끄러운 것을 보았을 때는 반달로 숨어서 보고, 좋은 일을 보았을 때는 둥그런 웃는 얼굴이 되었다가 배신하는 자가 못되게 구는 것을 보면 호랑이 눈썹이 됩니다.”
“하하하, 자네는 달보다도 더 재미있군. 그림 형제의 동화가 언어학과 민담 채집이라는 학술 연구 과정에서 생겨난 부산물로 간결하고도 직설적인 형식을 지녔다면, 자네 동화는 기발한 상상력과 화려한 묘사와 독특한 내용이 돋보이는 본격적인 문학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네. 이전에도 동화를 쓰는 사람은 있었지만 누구도 이 장르에서 그처럼 독보적인 지위에 오르지는 못했었네. 자네야말로 본격적인 아동문학의 창시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라고 생각하네.”
“모든 것이 제가 살아온 인생사가 바로 제 작품에 대한 최상의 주석이 될 것입니다.”
“그 말도 일리는 있어, 한스 동화는 굴곡 많은 본인의 인생을 상당 부분 반영한 것으로 해석해도 좋을 테니까. 전기 작가 재키 울슐라거에 따르면 자네는 “성공한 ‘미운 오리새끼’이며, 고결한 ‘인어공주’이고 ‘꿋꿋한 양철 병정’이자, 왕의 사랑을 받는 ‘나이팅게일’이며, 악마 같은 ‘그림자’이다. 우울한 ‘전나무’이기도 하고, 불쌍한 ‘성냥팔이 소녀’이기도 하다고 했으니까.”
“그렇게 평가한 작가가 있었습니까?”
“그런데 자네 동화는 그 당시 유행했던 낭만주의의 환상적인 작품 세계를 계승한 것이어서 그런지 매 작품이 행복한 결말을 약속하지 않는 점이 나한테는 불만이었네. 나는 사람들이 미숙한 작가라고 할 만큼 결말을 행복하게 맺지 않으면 마음이 편지 않아. 그래서 소망을 향해 달려가는 결론을 내리지. 그 점이 자네와 달리 나의 작가적 미숙인 것 같네. 역시 자네는 멋진 작가야. 비교적 덜 유명한 자네 작품 가운데는 의외로 음산하고 기괴한 분위기를 풍기는 것들도 없지 않다는 말을 들었지만…….”
“형님 고맙습니다. 제가 세상에 없는 동안 있었던 일을 알려 주시어서 감사드립니다.”
“죽어서  듣는 소리는 지나가는 바람만도 못한 것이야. 하하하.”
10. 빨간 구두 주인공 같은 삶에서
“한스, 내가 전에 그대 전시기념관을 다녀왔다고 했지?”
“그러셨지요.”
“참 부럽도록 아름답게 꾸며 놓았더군,”
“어떻게요?”
“약간 한산한 골목길을 걸어 기념관 입구에 들어서니 융단을 깔아놓은 듯 연초록 잔디밭이 곱게 펼쳐져 있고 여기저기 수백 년 묵은 듯한 정원수가 심겨 있었는데 잔디밭에 내린 그늘이 참 평화로워 보이더군. 적어도 천 평은 될만한 잔디 정원을 지나면 지붕이 둥그런 기념관을 중심으로 5미터는 될 만한 연못이 둘러쳐져 있고 연못에는 각종 수풀이 곱게 머리를 들고 허리로 물몰이를 하더군. 그 호수 한편네 기념관으로 건너가는 돌다리가 있고 다리를 건너가면 휴게실이 기다리는가 하면 더 안쪽으로 서점이 있더군, 서점에는 한스의 작품들이 판매되고 덴마크 국내 아동도서가 진열되어 있었네.”
“그렇게 되어 있었습니까?”
“우리나라에는 그런 작가 기념관이 없는 것으로 아네만 내부로 들어가니 더 잘 되어 있더군, 나는 서점에서 일하는 담당을 만나 내가 지은 동화 아홉 권을 방문기념으로 증정하고 자네의 서재로 들어갔지. 서재 입구에 들어서면 맨 앞에 보이는 것이 자네가 아이들과 사랑스럽게 어울리는 동상이었어. 그것을 보면서 자네는 아이들을 참 많이 사랑했구나 생각했지.”
“형님, 약간 오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동화를 썼지만 아동문학가라는 장르에 묶여 낙인찍히는 것을 싫어했습니다. 제가 살았을 때 내가 아이들과 어울리는 모습의 동상을 세우려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저는 화를 냈습니다.”
“그 좋은 일에 왜 화를 냈는가?”
“나는 한 번도 아이를 내 등에 태우거나 무릎 위에 올려놓아 본 적이 없습니다. 내가 쓴 작품들은 어린이만 위한 것이 아니라 어른을 위한 것이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어린이들은 다만 내 이야기의 표면만을 이해할 수 있으며, 성숙한 어른이 되어서야 온전히 내 작품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 말에는 나도 동감일세. 나도 동화를 쓴다고 하면서도 동화작가라는 이름에 거부감이 들었으니까. 동화라고 하면서 실은 어른들의 세계를 아이들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 순수 동화에 대한 결례라고 할까 그런 것을 느꼈기 때문이지. 내 동화도 역시 어린이들은 겉만 보는 것이고 어른들이 읽어야 속뜻을 아는 것인데 어른들은 동화라는 소리만 들어도 자기들과는 상관없는 것으로 생각하고 동화 책을 주면 인사치레로 받고 나 안 보면 아무데나 던져버리는 것 같더군. 그러니 자네 같은 대작가가 동화작가라는 이름에 만족했겠는가.”
“제 생각도 형님 생각하고 비슷했습니다.”
“자네가 지은 빨간 두구라는 작품이 있지?”
“그것도 아십니까?”
“그 동화는 또 어떤 생각으로 지었는지 듣고 싶네.”
“그다지 긴 동화는 아닙니다만 생각을 깊이 하자는 의도로 썼습니다. 한 가난한 집 아름다운 처녀 이야깁니다. 처녀의 미모에 관심을 가진 부잣집 미망인이 양녀로 삼습니다. 미망인의 집에 살게 된 처녀는 아름다운 빨간 구두를 얻어 신습니다. 그 신은 마술에 걸린 듯 신기만 하면 자기가 얼마나 가난한 집안 출신의 딸인지도 모르는 듯 미친 듯이 춤을 추지 않고는 못 배깁니다. 심지어는 양모의 장례식 날에도 무도회에 나가 춤을 춥니다. 그런데 신이 벗겨지지 않아 가시밭길과 돌밭 위를 춤을 추며 돌아다닙니다. 결국은 구두를 신은 채 발목을 자르게 됩니다. 그제야 처녀는 죄를 뉘우치고 경건한 생애를 보내며 가까스로 구원받는다는 이야기입니다.”
“결국은 허영심에 빠져 날뛰다가 죄의 대가를 철저히 치르고 새 사람이 된다는 이야기로군. 기독교적인 교훈이 짙은 작품이었지 않은가?”
“그렇습니다. 후에 이 작품은 디즈니에 의해 영화로도 만들어졌습니다.”.
자네는 동화 속 주인공 성냥팔이 소녀처럼 외롭고 버거운 삶을 꿋꿋이 이기고 살아왔다는 것을 오덴세 도로 잔디 공원에서 느꼈다네. 빨랫감을 들고 있는 어머니 곁에 좌절하여 모로 누워 실의에 빠진 자네가 다시 일어서서 신문을 파는 총각의 동상으로 세워진 것을 보면서 동화 작가로서 불멸의 명성을 얻긴 했지만 불행했던 젊은 시절은 모질게 고생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네, 그런 자네가 동화는 수많은 작품 가운데 일부분에 불과했고 시와 소설, 기행문과 희곡 등 다양한 장르에서 활동했다는 것도 알았네, 특히 극작가로 성공하기를 원했지만 평생 뜻을 이루지 못했다는 것도 자네 기념관에서 알았지. 자네 작품은 우리나라에서도 많이 번역 출판되었고 그 책들이 서재 한구석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더군.“.
“저는 내면의 불안과 외면의 허영 사이의 모순된 인간으로 살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재키 울슐라거는 자네의 성격 자체가 무척이나 모순적임을 지적한 것을 알지. 즉 일생 동안 전형적인 아웃사이더로 비천한 배경과 불확실한 성적 정체성, 그리고 외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끊임없이 싸웠으며 그로 인해 괴로워했던 인간이었다. 그리고 외모도 못생긴 데다 눈치마저 없는 사람이었다고 했는데 어떤가?”
“맞습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나보다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우월한 사람들 앞에 나가 시선을 끌어 모음으로써 생계를 유지하고 출세한 바 있었습니다. 그래서인지 내면적인 불안감과 자괴감, 출세욕과 허영심이라는 모순된 감정이 공존했었습니다. 순진무구한 동화를 쓸 수 있었던 원동력이 바로 그것이었으며 가끔은 마치 어린애 같은 자기 과시욕을 드러내어 비난을 받기도 했습니다.”
“어린애 같은 자기 과시욕이라면?”
“바로 이런 것입니다. ‘25년 전에 나는 작은 짐 꾸러미 하나를 들고 코펜하겐에 왔다. 그때는 가난한 이방인 소년이었으나 오늘 나는 식탁에서 왕과 여왕을 마주하고 앉아 함께 코코아를 마신다’고 자랑했으며 27세 때인 1832년에는 과감히 자서전을 발표했고, 이후 거의 10년 단위로 그 증보판을 펴내며 나의 성공담을 구구절절 묘사하기도 했습니다. 가난한 구두수선공과 빨래하는 세탁부인의 아들인 내게 러시아 황제의 손자가 입을 맞추고 있다 생각하니 눈물이 쏟아져 내렸습니다. 과거와 현재가 전혀 다른 존재가 된 것입니다. 어쩌면 백조가 된 이후에도 미운 오리새끼 시절을 잊지 못하는 건 아닌가 생각도 합니다. 하하하.”
11. 오해
‘’한스, 자네는 왜 혼자 살다가 갔는가? 재키 울슐라거라는 비평가는 자네의 생애에서 그간 크게 주목받지 못했던 성의 정체성 부분에 주목했다고 하네.”
“이상한 말씀을 다 하십니다.”
“자네가 평생 독신이었던 까닭은 마음에 두었던 여성들로부터 번번이 사랑을 거절당했기 때문이라는 말이 있는가 하면 한편으로는 동성애자였다는 말도 있어서 하는 말일세”
“그런 말은 저를 폄하하려고 한 말일 것입니다. 저는 작품과 결혼을 하고 살았으니까요.”
“거짓말 하지 말게 전해지는 말에 따르면 자네는 여러 번이나 남성에게 사랑 고백을 했고, 실제로 육체관계를 맺기도 했다고 하며 심지어는 남매지간인 한 남자와 한 여자를 동시에 사랑한다고 고백한 적도 있었다는데 그래도 변명을 하려는가?”
“죽은 사람한테 무슨 말은 못하겠습니까.”
“그러다 보니 자네의 애정행각은 우정과 이성간의 애정구분을 잘못한 때문이고 평생 대인관계에 서툴렀던 성격에서 비롯된 감정의 혼란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는 거야”
“저는 한 평생 사람을 보면서 사람을 그리워했고 가족의 정을 그리워한 고독한 생활을 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버지는 일찍 세상을 떠나셨고, 어머니는 내가 어린 시절에 다른 남자와 재혼했으며 사춘기 이후로는 줄곧 혼자 외롭게 살았기 때문에 평생 의지할 친구가 그립고 가족이 그리웠던 것입니다. 제 심정은 아무도 모를 것입니다.”.
“그렇게 살았던 것은 이해가 가네. 그러니까 대신 주위의 지인이나 후원자들에게서 일종의 대체 가족을 찾으려고 시도한 것이 엉뚱한 오해를 불러왔을 것으로 이해도 되네만 글은 잘쓰면서 어찌 대인관계에는 그렇게 눈치 없이 굴었는가. 남들한테 지나치게 사랑을 그리워하며 적극성을 보여줌으로써 역효과를 내어 도리어 남들의 눈총을 받았던 것 같으이.”
“그 말씀이 맞는 거 같습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주위 사람들의 호감을 사서 동정을 이끌어내는 데는 능숙했지만 정작 누군가와 진실한 인간관계를 맺는 데는 엉망이었으니까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혼자 살다 간 저를 두고 별 소리를 다 할 수 있습니다.”
“자네와 이야기를 하다 보니 약간 이해가 가는군. 눈의 여황이라는 작품이 있던데 들려주기 않겠나?”
“예, 들려드리지요.”
12. 산 자의 시간 죽은 자의 시간
“눈의 여왕은 이런 내용입니다. 무엇이든 실제보다 흉측하게 비추는 거울을가진 악마 트롤이 천사들을 놀리기 위해 하늘로 올라갑니다. 그러던 중 들고 있던 거울을 놓치고 맙니다. 그 거울은 수억 개의 조각들로 깨져 인간 세상 사람들의 심장과 눈에 박혀버립니다.
거울 조각이 박힌 사람들은 차갑게 변하고 또 무엇이든 나쁘게 보게 되는데, 작은 마을에 살던 소년 카이의 심장과 눈에도 이 거울 조각이 박혀버립니다. 그 후 카이는 단짝 소녀 게르다와 멀어지게 됩니다. 
그러던 어느 겨울 날 카이는 눈의 여왕을 만나게 되고, 여왕은 카이에게 추위를 느끼지 않게 하고 게르다와 가족을 잊게 하는 입맞춤을 합니다. 그리고 카이를 자기 궁전으로 데려가 얼음 조각으로 된 퍼즐을 풀어야만 그 궁전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갑자기 사라진 카이를 찾아 길을 떠난 게르다는 갖가지 고난과 역경을 만나지만 친구를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고난을 이겨내며 마침내 눈의 여왕의 궁전을 찾아갑니다.
게르다는 강에 홀로 서 있는 카이를 발견합니다. 그리고 그녀는 뜨거운 눈물을 흘립니다. 그 눈물이 카이의 심장에 박힌 거울 조각을 녹입니다. 카이도 따라 눈물을 흘립니다. 그러자 그의 눈에 박힌 거울 조각이 모두 빠져 나오게 됩니다.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카이는 게르다와 함께 얼음 조각 퍼즐을 맞추고, 둘은 무사히 그곳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재미있는 이야기로군. 그런데 다 듣고 보니 그것도 자네의 처지에서 스스로를 구하고 싶은 의지에서 나온 작품 같은데 어떤가?”
“그렇습니다. 제가 창작동화작가로 변신한 뒤 사람들에게 등을 돌리기보다는 진실된 사랑으로 감싸주었을 때 다시 예전의 모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메시지를 남기려고 했습니다.”
“역시 자네는 고독한 작가였어. 그렇지만 2005년 4월 2일에는 자네 탄생 200주년을 맞아 200주년 기념 웹사이트가 개설되기도 했다더군. 내가 알아본 결과 자네는 1867년에 반세기만에 고향 오덴세를 찾아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고, 1869년에는 코펜하겐 입성 반세기를 축하하는 대대적인 행사가 열렸다고 하더군. 그러다가 말년에는 류머티즘에 시달리며 병상에 누워 있었고 창작은 눈에 띄게 줄었다고 하였네.”
“그렇습니다. 세상에서는 잊히고 있는 저를 동양에 먼 길을 찾아 덴마크가지 다녀 오셨다니 감사합니다.”
“존경받는 작가는 나 같은 무명작가에게는 어떤 영웅보다 훌륭하게 여겨지는 것일세. 나보다 일곱 살이나 짧게 살면서 앞으로도 수백 년 그 이름이 전해질 터이니 부럽기만 하이. 나는 우리 마을에서도 알아주지 않는 사람인데 말일세.”
“형님도 언젠가는 후세 사람이 알아줄 때가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자네는 살아서 호강을 하지 않았던가. 나보다 외롭게 살아서 좀 안됐기는 했네만…….”
“아무리 호강을 해도 고독이 주는 고통과는 비교가 안 됩니다. 차라리 호강을 버리고 고독을 벗어나고 싶었던 날들이 제 인생 전부였습니다.”
“더 이상 이야기해 봐야 자네는 고독과 싸운 이야기고 나는 호강을 그리는 속물 같은 말뿐이니 이만 헤어짐세.”
“그러시지요. 시간이란 살아 있는 자에게 필요한 것이고 죽은 사람한테는 아무 소용없는 것이 시간입니다. 형님, 살았을 동안 시간을 즐기십시오.”
“알았네. 이만 자네는 죽은 시간 속으로 돌아가게.”
 
안데르센은 1875년 8월 4일 오전 11시 5분, 7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평생 독신으로 살았으며 딱히 가족이라 할 만한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8월 11일에 열린 장례식에는 덴마크 국왕과 황태자를 비롯한 수백 명이 찾아왔지만, 정작 그와 혈연관계가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굴곡 많은 인생을 살다 간 안데르센은 동화작가의 대명사이며 특히 창작 동화 분야에서는 그야말로 일인자에 해당한다. 예술을 제외한 다른 분야에서는 무능한 것이 예술가의 특징이라면, 안데르센이야말로 초 일류급 예술가인 셈이었다. 재정 관리는 물론이고 원고 정리조차도 남의 손을 빌려야 했고, 특히 은인인 요나스 콜린의 아들 에드바르 콜린에게 안데르센은 만사를 전적으로 의지했다.
평소에 안데르센은 절친한 사이인 에드바르 부부와 죽어서도 나란히 묻히고 싶다는 소원을 피력했고, 그의 말대로 훗날 세 사람은 같은 묘지에 나란히 묻히게 되었다. 그러나 몇 년 뒤에 콜린 가문의 후손들이 에드바르 부부의 무덤을 이장함으로써 그때부터는 안데르센 혼자 남게 되었지만, 그가 전혀 외롭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것은 그의 사후로부터 지금까지 ‘미운 오리새끼’의 무덤은 수많은 사람들이 찾는 일종의 순례지가 되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의 기념관도 큰 정원에 호수를 파고 그 포수 위에 유리집을 건축한 것도 아직도 물에 뜬 오리 새끼를 상징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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