으랏차!
1. 으랏차차!
“아빠, 안녕! 엄마, 안녕!”
내가 이렇게 인사하면 엄마 아빠도 할머니한테 똑같이 인사해요.
“어머니, 다녀오겠습니다.”
그러면 할머니는 어제 한 말을 그대로 해요.
“잘들 다녀와라.”
엄마 아빠가 대문을 나서면 꼬리를 살랑거리고 따라갔던 뭉크는 돌아서서 나를 바라보지요.
그 눈은 나를 보고 ‘오늘은 무슨 놀이를 할 거야?’ 하는 거예요. 내 친구 뭉크 귀엽지요?
엄마 아빠가 출근하고 나면 할머니는 나를 보고 또 똑같은 말씀을 하시지요.
“비아야, 나가지 마. 알았지? 집안에서 뭉크하고 놀아라.”
“네, 할머니.”
집안이 조용해지면 할머니는 책을 읽으시고 나는 뭉크와 마당에서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장난을 쳐요.
오늘은 뭉크가 대문 밖으로 갑자기 달아났어요. 나는 뭉크를 잡으려고 따라 갔지요. 뭉크는 지하도 입구를 지나 한강 둔치로 달아났어요.
“뭉크야! 거기 서, 가지 마!”
뭉크는 넓은 풀밭으로 나가 한 바퀴 돌더니 느티나무 아래 벤치 밑으로 들어갔어요. 그리고 힘이 드는지 헥헥거리며 나를 내다보았어요.
나도 달려왔기 때문에 힘이 들어서 벤치에 털썩 앉아 후! 후! 하고 숨을 쉬었어요. 강에서 파란 물결을 타고 놀던 파란 바람이 불어와 내 이마를 부드럽게 쓰다듬고 지나갔어요.
넓은 풀밭에는 여기저기 사람들이 옹기종기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한쪽 운동장에서는 씨름하는 사람들이 보였어요. 또 한쪽에는 벤치에 앉아 책을 읽는 사람도 있었고요.
잠시 후 저쪽 벤치에서 비스듬히 팔을 괴고 누워 있던 사람이 이쪽으로 걸어왔어요.
머리가 길고 수염도 엉성하게 난 사람인데 눈빛은 착하게 보였어요.
“넌 누구냐?”
아저씨는 나를 보고 물었어요.
“비아.”
“비아? 그게 이름이냐?”
“네.”
“몇 살?”
“여섯 살.”
나는 왼손을 쫙 펴 보이고 오른손가락 하나를 뿅하고 올렸어요.
“응, 예쁘구나.”
이때 뭉크가 내 다리 밑으로 와서 발등을 잘근잘근 물기도 하고 핥다가 올려다보았어요.
‘누구야, 저 아저씨는?’ 하는 듯이.
아저씨가 물었어요.
“이 개는 너희 집 개냐?”
“네, 뭉크예요.”
“뭉크?”
“예쁘지요 아저씨?”
아저씨는 혼자 중얼거렸어요.
“코가 뭉크러졌다고 뭉크라고 지었나?”
내가 물었어요.
“아저씨 이름은 뭐예요?”
“내 이름? 그건 네가 알아서 뭘 하게?”
“내 이름도 가르쳐 주었잖아요. 아저씨 이름도 알고 싶어요.”
“어라! 꼬막만한 게?”
“꼬막이 뭐예요?”
“그런 게 있어.”
“아저씨는 뭐 하는 사람이에요?”
“허허, 직업까지 물어?”
“넌 뭐하는 아이냐?”
“나는 뭉크를 보고 있잖아요. 아저씨는 무얼 하는 사람이냐고요?”
“나는 말이다. 말해줘도 네가 못 알아들을 거다.”
“다 알 수 있어요.”
“작은 녀석이 맹랑하네. 나는 시인이다.”
“시인이 이름인가요?”
“이름이냐고? 네가 나는 뭐하는 사람이냐고 물었지? 시인은 이름이 아니야. 난 시 쓰는 사람이야.”
“아저씨 직업이에요?”
“직업? 하하하하, 직업?”
이때 저쪽에서 운동하던 사람들이 크게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어요.
“화이팅! 파이팅!”
내가 물었어요.
“아저씨, 파이팅이 뭐예요?”
“화이팅이 파이팅이…… 싸우자, 이기자, 해내자, 뭐 그런 거 아닌가?”
“왜 그렇게 이상한 소리를 지르나요?”
“녀석아, 그걸 내가 어떻게 아니?”
“우리들도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했으면 좋겠어요.”
“어떻게?”
“아저씨 말대로 이기자! 해내자! 하면 되잖아요.”
“꼬막만한 녀석이 제법인데?”
“아저씨, 꼬막이 아니고 꼬마라고 하는 거예요.”
“허허, 녀석이. 그래 꼬마라고 하자.”
저쪽에서 씨름하는 사람들이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어요.
“으랏차차! 으랏차!”
“아저씨, 저 사람들이 하는 소리 들었지요?”
“그래, 으랏차차! 하는 소리 말이냐?”
“네, 우리들이 다 알아들을 수 있는 소리잖아요?”
“그게 무슨 소린데?”
“그게 씨름하는 사람들이 힘을 쓰면서 이기자 해내자 하는 소리 아닌가요?”
“꼬마 녀석이, 그런 거 어디서 들었어?”
“텔레비전에서 씨름할 때 들었어요. 아저씨는 씨름선수들이 하는 소리 못 들었어요?”
“들었다.”
“어른들도 파이팅 하지 말고 으랏차! 하고 외치면 안 될까요?”
“꼬막만한 게! 너 여섯 살 맞아?”
“가르쳐드렸잖아요?”
“허허! 녀석 갈수록 태산이네.”
“태산이 뭔데요?”
2. 날아다니는 글자들
아저씨는 팔을 하늘 높이 올려 보이며 말했어.
“태산이란 이렇게 높은 산을 말한단다.”
“높은 산? 가르쳐주셔서 고맙습니다.”
“어린 것이 인사성도 밝네!”
나는 머리를 갸웃 하고.
“아저씨, 시인이 뭔가요?”
“시인은 말이다. 에에에, 그러니까 에에에.”
“왜 에에만 에에해요?”
“에에, 그게 말이다. 설명을 해도 네가 알아듣지 못할 것 같아서 그런다.”
“알아들을 수 있어요.”
“어떻게 말할까? 에에에.”
“에에가 시인인가요?”
“시 쓰는 사람을 시인이라고 하는 거다.”
“시가 뭔데요?”
“하아, 참! 꼬마 녀석이 별걸 다 묻는구나.”
“시가 어려운 거예요?”
“너같이 어린애한테는 어렵다.”
“시가 어떻게 생겼어요?”
“시는 보이는 것이 아니야.”
“안 보이는데 어떻게 시인 줄 알아요?”
“글씨로 쓰던지 노래로 해야 하는 거야.”
“아저씨, 나 글씨도 알아요.”
“글씨를 안다고?”
“네, 다 읽고 쓸 수 있어요.”
“어린 것이 놀랍구나. 그럼 이 글씨 한번 읽어 볼래?”
아저씨는 들고 있는 공책을 내밀었어요. 거기에는 이런 글씨가 있었어요.
<강물엔 하늘이 내려 목욕을 하고
하늘엔 글자가 날아다닌다
가갸 거구 나냐 하우
닿소리 홀소리가 날아다니다
짝을 찾으면
글자가 되어
컴퓨터로 들어가 둥지를 튼다
글자는 종이가 싫다고
떼를 이루어
멋대로 날아다닌다
하늘엔 보이지 않는 글자들로 가득하다.>
이게 무슨 말인지 몰라서 아저씨를 말끄러미 바라보았어. 아저씨는 내 맘을 알고 말했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네, 글자들이 하늘을 날아다니는 건 못 보았어요.”
“글자가 날아다니는 걸 보는 사람이 시인이라는 거다. 알겠니?”
“정말 날아다니는 글자가 보여요?”
“보이지. 잘 보아라. 하늘이 지금 강에서 목욕을 하고 있지?”
“하늘이 목욕을 하는 건 안 보이고요. 구름이 물속에 가라앉았어요.”
“허허, 녀석이 제법인데? 하늘이 강물에 들어간 것이 아니라 구름이 들어가 있구나.”
“아저씨, 글자들이 하늘을 어떻게 날아다녀요?”
“글자만 날아다니는 게 아니야. 그림도 날아다니고 소리도 날아다니고 온통 하늘은 빈틈이 없다.”
“아저씨는 귀신인가 봐.”
“귀신?”
“사람이 어떻게 하늘을 날아다니는 그림이나 글씨를 볼 수 있어요?”
“너 새들이 날아다니는 거 보았지?”
“네.”
“새들이 보금자리로 들어가는 것도 보았지?”
“네, 텔레비전에서 보았어요.”
“새들이 하늘을 날다가 보금자리로 돌아가는 것처럼 글자나 그림들도 보금자리를 찾으면 다 그리로 모인단다.”
“거짓말…….”
“텔레비전을 보았다고 했지?”
“네.”
“그 텔레비전이 바로 글자와 그림과 소리가 모이는 보금자리야.”
“네?”
“텔레비전이 없으면 하늘에 날아다니는 글씨도 그림도 다 갈 데가 없는 거야.”
아저씨 말이 틀린 것 같지는 않아요. 텔레비전에 그 많은 그림과 글씨들이 어디 있다가 모였겠어요. 텔레비전이 아니면 갈 곳이 없어서 날마다 하늘로 이리저리 날아다닐 거예요.
아저씨가 말했어요.
“시인은 사람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듣지 못하는 소리를 듣고, 만질 수 없는 것을 만지고 냄새가 나지 않아도 냄새를 맡는단다.”
“어떻게요?”
이때 저쪽 씨름장 옆에 있는 배구장에서 크게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어.
“파이팅! 화이팅!”
아저씨가 일어서며 말했어.
“저 운동장으로 가 볼래?”
“왜요?”
“거기 이상한 꽃이 있다.”
“무슨 꽃인데요?”
3. 꽃들이 좋아하는 말
나는 아저씨를 따라갔어.
아저씨는 술 취한 사람처럼 싱글거리며 비틀비틀 운동장으로 갔어.
왼쪽에는 배구장, 오른쪽에는 씨름판이 있고 그 사이 한가운데 장미 한 송이가 피어 있었어.
“꼬마야, 이게 무슨 꽃인지 아냐?”
“장미.”
“똑똑하네. 맞다, 장미.”
잔디밭에 혼자 핀 장미가 외로워 보였어. 가느다란 목에 큰 꽃을 받치고 있어서 힘들게 보였어.
“아저씨, 장미 목 아프겠어.”
“왜?”
“목이 너무 가늘잖아?”
“그렇지?”
“혼자 있어서 무섭겠어.”
“무엇이 무서워?”
“사람들이 꺾으면 어떡해?”
“녀석, 그런 걱정도 할 줄 알고…….”
이때 오른쪽 씨름판에서 코끼리같이 뚱뚱한 아저씨 둘이 달라붙어 겨루면서 소리쳤어.
“으랏차! 으랏차차!”
아저씨가 나를 보고 말했어.
“꼬마야, 으랏차차 할 때 장미가 웃으며 고개를 번쩍 든다. 잘 봐라.”
씨름하는 아저씨들이 또 으랏차차하고 소리를 지르자 정말 장미가 아저씨들을 보고 웃었어.
“봤지? 장미가 웃었지?”
“응.”
대답하면서 왼쪽을 바라보았어. 거기서는 배구선수들이 파이팅 파이팅하고 외치면서 공을 던지기도 하며 치고 있었어.
아저씨가 나를 보고 말했어.
“저 사람들이 파이팅하고 소리 칠 때 장미를 잘 보아라.”
“응.”
나는 파이팅 소리가 터질 때 장미를 보았어. 장미는 얼굴을 찡그리고 입을 다물었어.
시인 아저씨가 장미를 들여다보며 물었어.
“장미야, 왜 그래?”
“……”
나는 장미가 아무 말도 않는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아저씨가 이러시는 거야.
“장미가 뿔이 났단다.”
“왜?”
“우리나라 땅에서 난 장미나 풀꽃들은 모두 우리나라 말과 우리나라 춤을 좋아한다는구나. 그런데 우리말이 아닌 말을 해서 싫다는 거야.”
“정말?”
“그래, 저 장미가 얼굴을 어떤 쪽으로 돌리고 있지?”
“씨름판을 바라보고 있어.”
“그렇지? 장미 말고 작은 꽃들과 풀을 보아라. 모두 어디를 바라보고 있니?”
“씨름판.”
“꽃도 나무도 풀도 다 으랏차차 하면 어깨에 힘을 주고 고개를 드는데 파이팅 하면 고개를 떨어뜨리고 돌린단다. 넌 그거 몰랐지?”
“응.”
시인 아저씨는 자리를 떠나 강물이 찰싹거리는 물가로 가서 커다란 바위 위에 앉았어.
“이리 와, 너도 앉아라.”
나는 아저씨 옆에 다리를 쭉 뻗고 앉았어. 아저씨가 내 눈을 들여다보았어.
“네 눈에는 천사가 들어 있다.”
“응?”
“시가 무언지 알고 싶다고 했지?”
“응.”
4. 네가 바로 시인
“시는, 시인이 바람을 붙들어다 종이에 앉혀 놓기도 하고, 바위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알아서 종이에다 글씨로 적어 놓은 것이란다.”
“시인이 귀신이야?”
“이 녀석이 어디서 귀신 소리는 많이 들었나 보구나?”
“어른들이 그랬어. 귀신은 무엇이든지 한다는데 아저씨는 몰라?”
“귀신은 없는 거야. 이제 귀신이라는 말은 안 하기로, 알았지?”
“응.”
“너도 시인이 될래?”
“싫어.”
“네가 시를 쓰면 꽃들은 웃고 새들이 춤을 추고 나무들이 노래를 부를 텐데 그래도 싫어?”
“아저씨, 엉터리.”
“시는 너같이 때 묻지 않고 깨끗한 마음에서 나오는 거야.”
“그래도 싫어.”
“시가 얼마나 재미있는지 가르쳐 줄까?”
“……”
“저 강물이 하는 말 들리니? 파란 물에 네 맘이 묻어서 저기 떠내려가고 있다.”
“어디?”
“네 마음이 묻은 강물에서 들려오는 노래 소리가 안 들리니?”
“아니!”
“저쪽 언덕에서 흘러오는 풀 향기가 네 귀를 만지고 내 볼을 쓰다듬으며 아름답게 노래하는 소리도 들린다, 내 귀에는.”
“아저씨는 엉터리.”
“너는 볼수록 향기가 된다.”
“아저씨는 바람 같아.”
“왜?”
“안 맞는 말만 하니까.”
“네 눈빛을 만지고 있으면 나는 시인이 된다.”
“또 엉터리 소리. 눈빛을 어떻게 만져?”
“시인은 만질 수 있어.”
“아저씨는 도깨비야.”
“너 달빛이 웃는 소리 들어 보았니?”
“달빛이 웃어?”
“그래, 시인이 되면 보이는 것만 보는 게 아니야. 소리도 듣기만 하는 게 아니라 만지기도 하고 만지면 색깔로 변하기도 하는 거야.”
“아저씨, 너무 어려워.”
“그렇지만 너는 시인이 되었단다.”
“거짓말.”
“거짓말인지 정말인지 시험해 볼까?”
“응.”
“저 하늘에 떠 있는 구름을 보아라. 무엇 같으냐?”
“엄마가 빨아서 걸어 놓은 빨래 같아.”
“그렇지? 그 빨래를 보면 무슨 생각이 나?”
“빨랫줄도 없는데 누가 널었을까?”
“바로 그거다. 네가 바로 시인이 된 거야.”
“그리고 구름이 무슨 말을 하는지 들려?”
“바람아, 이리 와. 나 좀 밀어 줘 했어.”
“정말?”
“응, 바람이 불어야 강에서 나올 수 있대.”
아저씨는 갑자기 나보다 더 어린애가 되었어.
“비아야, 너는 나비야 나비. 이거 볼래?”
<나비야 나비야 이리 날아 오너라
노랑나비 흰나비 춤을 추며 오너라
봄바람에 꽃잎도 방긋방긋 웃으며>
아저씨는 아기처럼 발로 깡충깡충 춤추고 두 팔로 날개를 저으면서 하늘로 날았어. 아저씨는 진짜 내 동무가 되었어.
아저씨가 춤을 추자 납작한 코를 바위 밑에 대고 자던 뭉크가 깨어 저도 팔짝팔짝 뛰면서 한 바퀴 돌더니 내 운동화 끈을 물고 잡아당겼어.
“알았어, 뭉크.”
아저씨가 물었어.
“뭘 알았다는 거야?”
“이제 집에 가야 해. 할머니가 기다리셔.”
“그래? 그럼 언제 또 만날까?”
나는 고개를 저었어. 언제 만날지 누가 알겠어.
“비아야, 내 말 잊지 마.”
“무슨 말?”
“너는 시인이 된 거야. 시인은 마음에 때가 묻지 않고 맑고 고와야 해. 알았지?”
“때 안 묻은 맑은 아음이 어떤 거야?”
“욕심이 없고, 미움이 없고, 시기하지 않고, 남의 흉을 보지 않고, 짜증내지 않고, 부모님 말 잘 듣고, 누구든지 사랑하고……”
“그만 해, 난 미워하는 아이도 있고 짜증도 잘 냈는데…….”
“그렇지만 바로 마음에서 지워지지?”
“응.”
“그럼 된 거다. 공책에 연필로 글씨를 썼다가 고무개로 지우면 깨끗이 지워지지?”
“응.”
“그런 거야. 고무개로 지운 것처럼 지우면 마음도 깨끗해지는 거야.”
“그럼 난…….”
“그래, 넌 시인이 되었어.”
“아저씨 엉터리.”
뭉크가 기다리다가 먼저 집 쪽으로 달려갔어. 나는 뭉크를 따라 달리며 소리쳤지.
“으랏차! 으랏차차!”
“잘 가거라. 또 보자.”
아저씨 목소리가 나를 따라와 등에 붙었어.
난 뭉크를 따라 집으로 돌아왔어. 할머니가 나를 보고 반가워하시며,
“비아야, 집에서만 놀랬더니 어딜 갔다 오는 거냐?”
“강가에 나갔다 왔어.”
“거기서 뭘 하고 놀았니?”
“시인을 만났어. 시인이 나를 시인이라고 했어. 할머니.”
“호호호, 네가 무슨 시인이야. 그 시인이 어디 있니?”
5. 넌 시인이 아니야
나는 갑자기 이런 말이 하고 싶었어.
“할머니, 해가 마루 밑으로 들어갔어.”
할머니가 마루 밑을 들여다보시면서 말했어.
“하늘에 떠 있는 해가 왜 마루 밑으로 들어가?”
“할머니, 해가 하는 소리 들려?”
“무슨 소리가 들린다는 거야?”
“해가 ‘마루 밑은 너무 답답하다.’ 그랬어.”
그리고 마루 밑을 들여다보면서 말했지.
“해가 살살 기어서 나오고 있어, 할머니.”
할머니는 나를 이상하게 보시며 물었어.
“무슨 소리냐? 해가 왜 거기 있다는 거야?”
“시인이 그랬어. 소리를 만지고 바람이 이야기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으면 시인이라고.”
“그래서 네가 시인이라도 된 거냐?”
“나는 시인이 싫다고 했어.”
“그러면서 왜 시인 흉내는 내는 거냐?”
“흉내를 내는 게 아니고…….”
“그런데?”
“사람들은 눈으로 보이는 것만 보고 말하지만 하늘에는 보이지 않는 것들이 훨씬 많은 거야.”
“그게 무슨 소리냐?”
“소리, 글자, 그림 그런 것들이 하늘에 가득하다는 걸 할머니는 몰라?”
“저 빈 하늘에 뭐가 있다는 거냐?”
“할머니도 시인을 만나 보면 알 수 있어.”
할머니는 내가 이상한 소리를 한다고 생각하시면서 걱정스럽게 말했어.
“네가 누굴 만났는지 모르지만 널 바보로 만들어 놓았어. 그 사람 어디 있니?”
“바보는 할머니야.”
“내가 왜 바보냐?”
“할머니는 텔레비전을 보면서 그것도 몰라?”
“얘가 무슨 말을 하는 거야?”
“하늘에 돌아다니는 글자와 그림과 노래가 텔레비전 속에 모여 할머니를 만나는 거야.”
할머니는 내 말을 믿지 않고 나만 어린애라는 거야. 그래서 내가 말했지.
“할머니, 꽃들이 좋아하는 소리가 뭔지 알아?”
“꽃들이 무슨 소리를 좋아한다는 거냐?”
“꽃들이 좋아하는 소리는 으랏차차!야.”
할머니는 이상한 눈으로 나를 보시며 물었어.
“그게 무슨 소리냐?”
“꽃들은 파이팅을 싫어해.”
“네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통 모르겠다.”
이때 엄마가 퇴근해서 오셨어. 할머니가 말했어.
“어미야, 비아가 한강 둔치에 나갔다 오더니 이상한 소리만 하는구나.”
“무슨 소리인데요?”
“시인이라는 사람을 만났다는데 이상한 소리만 하는구나.”
내가 엄마한테 말했어.
“엄마, 난 시인이 아니야.”
“알아, 네가 무슨 시인이냐?”
6. 너는 시인
며칠 뒤 토요일 아침이었어.
엄마가 출근하지 않는 날이야.
“엄마, 강가에 나갈래?”
“강가는 왜?”
“그 시인 아저씨가 왔을지 몰라.”
“시인이 날마다 나오니?”
“가 봐, 엄마.”
“글쎄, 바람이나 쐬러 나가 볼까?”
나는 엄마와 강가로 나가 시인과 앉았던 벤치로 갔어.
엄마가 강을 바라보며 말했어.
“날씨도 좋고 강도 파란 빛이 아름답구나.”
“엄마, 내가 시 써 볼까?”
“네가 무슨 시를 써?”
“기다려, 내가 써 가지고 올게.”
나는 종이와 연필을 들고 강가로 가서 내 맘대로 썼어. 그리고 엄마한테 보여드렸어.
엄마는 나를 장난꾸러기로만 보고 말했어.
“네가 무슨 시를 쓴다는 거야?”
“읽어 봐, 엄마.”
“얘가.”
“그래도 읽어 봐. 시인이 그랬어. 보이는 것만 보는 것이 아니라고.”
엄마는 내가 쓴 시를 읽었어.
나는 강에 뜬 종이배
예쁜 바람에도 흔들리고
비단 파도에도 흔들리는
작고 예쁜 종이배
엄마는 내가 쓴 시를 읽으면서 눈이 점점 커졌어.
“엄마, 왜 그래?”
엄마가 눈을 더 크게 뜨고 묻는 거야.
“이거 그 아저씨가 써 준 거지?”
“아니야, 내가 썼어.”
“거짓말, 네가 어떻게 이렇게 써?”
“거짓말 아니야.”
엄마는 나를 믿어주지 않았어. 나는 엄마가 밉고 울고 싶어졌어.
“엄마, 나를 못 믿는 거야?”
“믿어주고 싶지만…….”
“그럼, 엄마 저기 강가로 가 봐. 내 말이 거짓말이 아닌 걸 알 거야.”
나는 엄마와 장미꽃 옆으로 갔어.
“먼저 보여준 것은 강물을 보면서 내가 생각한 것을 쓴 것이지만 이번에는 이 장미꽃을 보고 써 볼게.”
“그래, 한번 엄마 보는 앞에서 써 봐.”
나는 엄마가 보는 앞에서 장미가 하는 말을 적었어.
꽃으로 피어난 나
예쁘다고 말고
곱다고도 말아요
다가오지 말아요
사람이 무서워요
나는 향기로 바람 따라 갈래요
엄마는 내가 쓰는 것을 보면서 또 이러시는 거야.
“그 아저씨가 한 말을 네가 적은 거지?”
“아니야.”
“그런데 어떻게 금방 쓸 수 있니?”
“어마는, 엄마는!”
나는 골이 났어. 그러나 엄마는 나를 믿지 않는 거야. 얼마나 내 맘이 아픈지 몰라. 그래서 또 엄마한테 말했지.
“내 맘이 어떤지 써 볼까?”
“그게 무슨 말이냐?”
“엄마가 나를 안 믿어 주어서 엄마 맘과 내 맘을 쓰고 싶어.”
“써 봐라, 그러면 믿지.”
나는 이렇게 썼어.
나는
얇은 은빛 풍선
바늘 끝에만 찔려도
팡 터지는
눈물
엄마는 나를 와락 끌어안았어.
“미안해 비아야, 미안해, 너는 정말 시인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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