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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 밝은 임금님 / 275매/ 1시간 여유있는분만 읽기

웃는곰 2012. 5. 19. 13:29

귀 밝은 임금님  / 275매

1. 내시의 속삭임


옛날에 귀가 아주 밝은 임금님이 있었습니다.

임금님은 귀가 얼마나 밝은지 어디서든지 백 미터 밖에서 하는 소리까지도 들을 수 있고 자면서도 사람들이 하는 소리를 다 들었습니다.

그러나 임금님은 생각이 깊은 분이라 남들의 말을 다 들으면서도 못 들은 체하고 말을 할 때도 가려서 하기 때문에 그런 것을 아무도 몰랐습니다.

임금님이 대전에서 나라의 앞일을 곰곰이 생각하고 있을 때 내시가 새로 입궐한 신하에게 하는 말이 들려왔습니다.

“여보게, 임금님 앞에서는 뭐든지 숨길 줄 알아야 해. 본대로 들은 대로 다 말하면 안 된다는 거 알지?”

“네, 잘 알겠습니다.”

“임금님께서 백성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가 하고 물으시면 모두가 임금님의 은덕으로 잘 먹고 잘 산다고 하게.”

“거짓말을 너무 하면 신하의 도리가 아니지 않습니까?”

“그게 왜 거짓말이라는 거야? 이 궁궐에 들어오면 매끼마다 기름진 고기에 상다리가 휘어지게 먹고 있는 판에 거짓말이라니?”

“궁궐에서는 그렇게 먹는지 모르지만 저만해도 평민으로 살 때는 매 끼니마다 다음 끼니를 걱정하고 살았습니다.”

“그렇다고 임금님 앞에서 그 말을 하지는 않겠지?”

“경우에 따라서는 말씀을 드려야지요.”

“조심해, 그 따위 소리를 했다가는 내가 당장에 관직삭탈을 할 테니 그리 알게.”

“임금님께서 내리신 관직을 어찌 아무나 올렸다 내렸다 합니까.”

“허허! 이 신출내기 세상맛을 모르는군. 앞으로 알아서 해.”

“지금 세상은 엉망입니다. 관원은 돈더미에 묻혀서 돈 냄새나 풍기고 백성은 배가 고파 비명을 지르는데 백성의 아버지라는 임금님이 그런 것을 모르시게 해서는 안 됩니다.”

내시가 화난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래서?”

2. 못된 내시의 아부

“임금님을 바로 모셔야 나라도 잘 되고 임금님도 백성의 존경을 받습니다.”

“네가 점점 못할 소리가 없구나. 이 사람아, 그걸 누가 몰라서 그러느냐?”

“아시면서 그러면 전하께 불충한 죄인 줄 아셔야 합니다.”

“과거 보는 시험장에서 전하의 눈에 한번 들어 여기까지는 왔다만 앞으로 두고 보겠다. 촌구석에서 살다 온 주제에 감히 여기가 어딘 줄 알고 함부로 지껄이느냐.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촌구석에 살았기 때문에 촌사람 사정을 전하께 아뢸 수 있는 것도 제가 아니면 할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네가 무슨 충신이라도 되겠다는 말이냐?”

“신하의 도리가 무엇입니까. 전하의 눈을 뜨게 하고 백성을 바르게 살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도리가 아닙니까. 임금님의 눈과 귀를 가리고 거짓말로 아부해 놓으면 나라는 점점 어지러워질 뿐입니다.”

“뭐, 뭐라고? 아부, 아부라고 했느냐?”

“다른 말은 생각이 나지 않아서 그렇게밖에 말을 못하겠습니다.”

“허허, 이 놈 큰일 낼 작자로다. 너 같은 건 전하 곁에 두어서는 안 되겠다.”

“아무리 지위가 낮은 저라도 전하의 특명으로 입궐한 이상 소신 없이 아부하는 일에 동조만 할 수는 없습니다.”

내시는 눈에 불을 켜고 소리쳤습니다.

“당장 내 앞에서 나가! 너 같은 놈이 있다가는 나라 망하겠다. 전하가 널 찾으면 없다고 할 테니 썩 물러나거라.”

“그렇게는 못합니다. 물러나더라도 전하의 명을 받고 나가겠습니다.”

풋내기 관원이 단호히 맞섰습니다.

임금님은 두 사람이 주고받는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음, 내 판단이 맞았어. 저만한 인물이면 나라를 위해 큰일도 해낼 수 있을 거야.’

임금님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아무것도 못 들은 체하고 다음날 해 질 녘 미복 차림으로 아무도 모르게 궁을 빠져나갔습니다.

임금님은 논길 밭길을 걸어 산골 마을 아주 작은 집으로 찾아들었습니다.

“주인장 계시오?”


3. 가난한 백성들

문짝이 삐그덕삑 하고 열리고 볼이 홀쭉하게 야윈 농부가 내다보았습니다.

“뉘시오?”

“길을 가다가 날이 저물어 하룻밤 신셀 좀 질까 하여 왔습니다.”

“딱하기는 하오만 우리 집은 누추하고 협소하여 모시기가 무엇합니다. 기왕이면 저쪽 큰 집으로 가보시지요.”

“아시다시피 잘 사는 사람들은 저 같은 사람 사정을 잘 모릅니다. 이왕 찾아 들었으니 하룻밤만 쉬게 하여 주시지요.”

주인은 난감한 표정이다가 나그네의 말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고 허락했습니다.

“누추하기는 하오만 듣고 보니 우리 집에서라도 쉬시지요.”

임금님은 주인의 안내로 윗방에 들었습니다.

갑자기 나그네가 찾아 들자 주인 부부가 아무도 듣지 못할 만큼 떨어진 울 밖으로 나가 속삭였습니다. 부인이 하는 소리가 임금님 귀에 들렸습니다.

“어쩌지요? 손님이 저녁을 안 드셨을 텐데 뭐가 있어야 대접을 하지요.”

“글쎄 말이오. 손님이 차림새는 허름해도 얼굴로 보아서는 아무렇게나 대접해서는 안 될 분 같소.”

“어쩌겠어요. 우리 먹는 대로 김치죽이라도 한 그릇 드립시다.”

“아니오. 내가 저 태경이네 집에 가서 보리쌀이라도 한 되 꾸어 보겠소.”

주인은 부지런히 언덕 위에 있는 태경이네 집으로 가서 사정을 했습니다.

“우리 집에 귀한 손님이 하룻밤 쉬어달라고 오셨는데 뭐 대접할 것이 없습니다. 보리쌀 한 되만 꾸어주시오.”

태경 엄마가 미안해하면서 하는 말이 임금님 귀에 들렸습니다.

“어쩌지요? 오늘 아침에 땅주인이 와서 도지를 내라면서 있는 것을 다 가져가고 우리도 이제 죽이나 쑤어 먹을 판인데요.”

먹거리를 구하러 간 주인의 목소리가 임금님 귀에 들어갔습니다.

“이놈의 나라가 어찌 될 것인지 지주들은 우리 사정도 모르고 먹을 것도 다 긁어가고 나라에서도 주는 것 없이 세금이라고 다 긁어가니 우리는 언제나 허리를 펴고 살 수 있을지 알 수가 없어요.”

“죄송합니다.”

“아니오. 손님이 귀하기는 하나 우리 먹는 대로 죽이라도 대접해야지요.”

주인이 돌아오는 발소리가 임금님 귀에 측은하게 들려왔습니다. 임금님은 슬그머니 집을 나와 궁으로 돌아왔습니다.


임금님은 이튿날 아침 내시를 불렀습니다.

“지금 백성들은 어떻게 살고 있더냐?”

“모든 백성이 태평성대를 누리고 있사옵니다. 모두가 전하의 은혜입니다요.”


4. 이장 부부

임금님은 내시를 내보내면서 새로 입궐한 신하를 들라 고 명하셨습니다.

내시는 내보냈던 신하를 불러 임금님이 안 들릴 만한 50미터쯤 떨어진 으슥한 곳으로 갔습니다.

“전하께서 보자고 하시니 들어가 보거라.”

“무슨 일입니까?”

“그걸 내가 알면 임금이 되겠다. 들어가거든 함부로 입 놀리지 말고 조심하거라. 알겠느냐? 바른대로 다 말씀드리면 안 되느니라. 백성들이 어떻게 사느냐 하명하시거든 모두가 태평성대 강구연월이라 하거라.”

“그런 것까지 제가 다 따라서 해야 합니까?”

“그러지 않으면 내가 밖에서 듣고 있다가 너를 가만두지 않겠다.”

“알겠습니다.”

임금님은 내시가 하는 말을 다 듣고도 아무 말 없이 신하가 들기를 기다렸습니다. 잠시 후 신임 신하가 들자 물었습니다.

“어떠하냐? 궁궐 생활이 불편하지는 않으냐?”

“불편하지 않사옵니다.”

“그럼 됐다. 짐에게 할 말은 없느냐?”

“없사옵니다.” 

“나가 보아라.”

임금님은 이 몇 마디 물어 보고 신하를 내보냈습니다. 밖에서 귀를 기울이고 있던 내시가 다행이라는 듯 가슴을 쓸어내렸습니다. 이 신출내기가 임금님이 묻는 대로 솔직하게 다 말할까봐 걱정을 했던 것입니다.

임금님은 해가 질 녘 아무도 모르게 또 미복 차림으로 궁을 빠져나가 산을 넘고 내를 건너 제법 큰 마을로 들어갔습니다. 임금님은 동네 아이한테 이장네 집을 물어 알아내고 문 앞에서 주인을 불렀습니다.

“주인어른 계십니까?”

이장이 나와서 물었습니다.

“누구를 찾으십니까?”

“과객인데 하룻밤 묵어갈 수 있겠습니까?”

“어디까지 가시는 길이신지요?”

“서울까지 갑니다만 너무 늦어서 더 갈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

“그러시면 사랑방이 비어 있으니 드시지요.”

임금님은 사랑방으로 들어갔습니다. 주인 이장은 안으로 들어가 부인에게 말했습니다.

“지나가는 나그네라고 하시며 하룻밤 묵게 해 달라 하시니 어쩌겠소. 행색은 남루해도 눈빛이 예사 사람이 아니고 귀가 얼마나 큰지 신발짝만하고 백년 장수할 사람으로 보였소.”

“그런 분이 오셨다니 잘 대접을 해야 할 텐데. 뭐가 있어야지요.”

“그래도 어쩌겠소. 이렇게 늦었는데 배가 많이 고플 것이오. 우리야 죽으로 살지만 손님한테까지 죽을 드릴 수는 없지 않소?”

“그렇지요. 군수영감님하고 면장님이 오시면 잡아드린다고 길러놓은 닭 두 마리 중에 한 마리를 잡을까요?”

“어쩌겠소, 땅 부자 황 지주 댁에 가서 닭 한 마리를 맡기고 보리쌀 한 말만 꾸어달라고 하시구려.”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하겠어요?”

“그리 하시오. 너무 늦지 않도록 하시오.”

이장 아내는 닭 한 마리를 잡아들고 나가고 주인인 이장이 사랑방으로 들었습니다.

“어디서 오시는지 많이 고단하실 텐데 편히 누워 쉬시지요.”

“아닙니다. 주인어른께서 이렇게 환대하여 주시니 고맙습니다.”

“저녁 전이라 시장하시겠지만 잠깐만 참으시오. 내자가 곧 저녁상을 보아올 것입니다.”

“낯도 모르는 사람한테 이렇게 사람대접을 하여 주시니 고맙습니다.”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잠시 기다리십시오.”

이장은 나가서 쇠죽을 쑤고 그 아내는 바로 와서 밥을 지어 상을 들고 들어왔습니다. 이장 아내는 손님이 어떤 사람인가 궁금하여 일부러 상을 들고 와서 살폈습니다. 과연 예사 사람 같지 않았습니다.

“우리들은 이렇게 삽니다. 손님한테 좋은 것을 대접하여 드리지 못하여 미안합니다.”

부인이 차려온 상은 자기들 사정으로는 잘 차린 것 같지만 임금님이 보시기에는 기가 막혔습니다.

새까만 보리밥에 된장과 풋고추가 놓여 있고 새로 만든 열무김치가 풀냄새를 풍겼습니다. 부인이 나가면서 말했습니다.

“마땅한 것이 없어서 막 자라는 열무를 좀 뜯어다 벼락김치를 버무렸습니다.”

임금님은 들어보지도 못한 검소한 밥상을 대하니 가슴에서 울컥하고 울음이 솟구치는 것을 누르고 밥 한 술에 김치 국물을 떴습니다. 밥보다 김치 국물은 궁궐에서 맛보지 못한 싱싱하고 독특한 맛이 일품이었습니다. 밥보다 김치가 맛이 있어서 김치 먹다가 밥을 다 먹었습니다.

식사가 끝나자 이장이 잠자리를 펴며 말했습니다.

“손님도 보아하니 외모는 출중한데 우리와 같은 신세인 것 같습니다.”

“예.”

“그렇게 좋으신 인물에 어쩌다가 이렇게 되셨습니까?”

“제 신세가 그렇게 딱하게 보이십니까?”

“인물은 좋은 분인데 행색이 저 같은 처지 같아서 한 말씀입니다. 섭섭히 생각지 마시지요. 저도 한때는 글줄이나 읽었습니다만 세상을 잘못 만나 이 신세가 되었습니다만.”

“그러시군요.”

“댁도 보아하니 글줄이나 읽으신 분 같은데……”

임금님은 태연히 대답했습니다.

“저도 세상을 잘못 만나 이렇게 되었습니다. 배울 만큼 배우고도 글을 써먹지 못하는 것도 나라님을 잘못 만난 탓이 아니겠습니까?”


5. 임금님 귀 농부의 입

주인이 나그네와 같은 처지라고 생각하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임금님은 착하기만 하고 세상을 잘 모르신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런 소문이 있습니까?”

“궁궐 신하들이 임금님 귀를 막고 눈을 가린 탓이지요. 임금님이 이 잘못된 세상을 아시게 되면 얼마나 실망을 하시겠습니까.”

임금님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러시겠지요.”

집주인인 이장이 볼멘소리를 했습니다.

“지금은 돈이면 다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똑똑해도 돈이 없으면 관직에 나갈 길이 막혀 있습니다. 보아하니 손님께서도 아무렇게나 살 분이 아닌 것 같은데 세상을 잘못 만나 이런 신세가 되시지 않았습니까?”

“맞습니다. 주인장은 억울한 사정이 많으신 것 같습니다.”

“내가 학교 다닐 때는 우등생이었는데 집안이 넉넉지 못하여 관청에 취직을 하려도 매관매직하는 사람들에게 내놓을 것이 없어서 이 지경으로 이장이나 하고 삽니다.”

“그러시군요.”

“우리 면의 면장도 군수도 다 저하고 같은 학교 한 반이었는데 그 사람들은 지주의 아들들이라 공부를 못하여 밑바닥에서 기었는데 졸업도 돈 주고 하더니 면장 자리며 군수 자리도 돈 주고 사서 떵떵거리고 삽니다. 제 경우는 그런 친구들이 제 길을 가로막아서 과거시험 한 번 못 보고 흙속에 살고 있지요.”

“많이 억울하시겠습니다.”

“억울한 건 둘째 치고 그런 인물들이 일이나 잘했으면 좋은데 관직을 돈으로 사더니 인물이야 어떻든 뒷돈 많이 찔러 넣는 사람만 공직에 앉힙니다. 그러니 백성을 위하여 일은 안 하고 엉뚱한 짓거리나 하고 사는 것을 보면 울화통이 터집니다.”

“허허, 아주 못된 사람들이로군요.”

“내가 군수라면 당장에 그런 면장들부터 제대로 세우고 관리들을 바꿀 것입니다. 주제 넘는 말이지만 말입니다.”

“참 딱한 일입니다. 저도 힘이 없으니 듣기만 해도 주인장 마음을 알겠습니다.”

“편히 쉬셔야 할 텐데 쓸데없는 소리를 너무 많이 하였습니다. 편히 쉬시지요.”

집 주인은 농사꾼이지만 기품이 있고 지혜롭게 보여서 임금님 마음에 들었습니다. 주인이 나간 다음 임금님은 조용히 그 집을 떠나 궁궐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내시를 불러 물었습니다.

“여봐라. 새로 입궐한 신하가 네 보기에 어떠한지 느낀 대로 말하여 보아라.”

6. 내시의 간계

“솔직히 말씀 올리겠사옵니다. 그 사람은 촌구석에서 자란 사람이라 궁중 법도를 너무 몰라 궁궐 품위를 떨어뜨리고 있사옵니다. 그리고……”

“그리고?”

“공직 사회의 기강도 알지 못하여 전하를 곁에서 모시기에는 합당치 않은 인물이옵니다.”

“더는 없느냐?”

“그리고 말버릇이 없어서 위에서 시키는 대로 하면 될 일도 엉뚱한 소리를 자주 합니다.”

“그러하냐? 그런 인물이라면 멀리 보내야 하지 않겠느냐?”

“지당하옵신 말씀입니다.”

“알았느니라.”

임금님은 해가 지자 또 미복 차림으로 궁을 나가 면 소재지를 찾아갔습니다. 면사무소 직원들은 모두 퇴근을 하여 비어 있었습니다. 임금님은 숙직실을 찾아가 숙직 직원을 만났습니다.

“나는 지나던 나그네인데 날이 저물어 오갈 데가 없어서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하룻밤 묵을 만한 곳이 없을까요?”

면사무소 직원은 임금님을 위아래도 훑어보더니 껄껄거리며 한 마디 했습니다.

“당신 참 재미있게 생겼소. 귀는 짚신짝만하고 차림새는 거지를 겨우 면한 것 같은데 눈 하나는 살아 있어 하하하.”

“귀가 너무 커서 죄송합니다. 오늘밤 어디든 묵을 만한 데가 있을까요?”

“여기는 마땅치 않고 면장님 댁 사랑채에 빈 방이 있으니 거기라도 가서 하룻밤 보내시오.”

“감사합니다.”

임금님은 그 직원을 따라 바로 가까이 있는 면장 댁 사랑방에 들었습니다.

숙직 직원이 안채로 들어가 면장을 만나 말했습니다.

“나그네가 지나다가 하룻밤 재워달라기에 면장님 사랑방에 모셨습니다.”

“뭐야? 우리 집이 나그네집이냐? 행색은 어떻더냐? 돈은 있어 보이더냐?”

“행색이 말이 아닙니다. 그런데 면장님도 한 번 내다보실 만한 물건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

“거지같은 꼴이지만 귀가 볼만합니다.”

“귀가 어떻다는 거야?”

“귀가 면장님 구두짝보다 큽니다.”

“그럼 병신 아니냐?”

“병신은 아닙니다. 구경이나 한번 해 보시고 하룻밤 자고 가게 하시지요.”

면장이 사랑채로 오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임금님은 그들이 하는 말을 다 듣고 빙긋이 웃으시다가 옆으로 누워 잠든 척했습니다. 면장이 문을 열고 들여다보며 말했습니다.

“자는 모양이다. 네 말마따나 귀 한번 볼만하다. 사람의 귀가 당나귀 귀보다 더 크지 않으냐. 히히히히. 자빠져 자게 내버려 둬라.”

“저녁 식사는 어떻게 할까요?”

“자는 놈한테 밥 주는 거 보았더냐? 이만한 방에서 자고 가게 해주는 것만도 황송한 일이 아니냐.”

문이 쾅 닫히고 면장은 안으로 들어가고 숙직 직원은 숙직실로 갔습니다. 면장은 안으로 들어가 조금 전에 누군가와 하던 말을 계속했습니다.

“내가 뭐 무리한 요구를 하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영감님.”

7. 딸을 달라고?

“그렇지만 우리 딸은 나이가 이제 스무 살을 갓 넘겼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달라는 거 아니요? 젊은 애가 예쁘고 귀여워서 그러는 것이지 우리 면에서 내가 장가가겠다고 하면 과부도 처녀도 줄을 설 것이오.”

“그러시겠지요.”

“그래도 다른 사람 다 싫다 하고 영감님 딸을 달라는 것은 나도 그만한 자격이 있기 때문이오.”

“그렇지만 우리 딸은 아직 어리고 또 서울에서 젊은 사람을 만나 사귀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게 무슨 대수요. 살다가도 싫으면 이혼하는 마당에 그만한 얼굴을 가진 여자 애라면 남자가 따라도 줄을 서야지. 암, 난 그런 경쟁자가 있을 정도로 예쁜 여자가 아니면 아내로 들일 생각도 안 하오.”

“그렇지만……”

“아버지가 하라면 말 들을 아이이니 내 말 잘 알아듣게 해주고 당장 내려오라고 하시오. 나하고 혼인만 한다면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고 평생 호강시켜 줄 것이고 영감님한테도 땅 섬지기나 주고 일꾼도 하나 두어 드리겠소.”

“다 좋습니다만……”

“그래도 안 되겠다는 말이오?”

“죄송합니다.”

“좋소. 그렇다면 나도 할 말이 있소.”

“말씀하시지요.”

“내가 그 아이 학비 대준 돈 돌려주시오. 중학교에서 고등학교까지 대준 돈을 돌려달란 말이오.”

“그건……”

“못 하겠단 말이오? 나는 그 애가 어려서부터 영리하고 예뻐서 학비를 대준 것인데 은혜도 모르고 배은망덕하다니! 나도 가만히 있지 않겠소.”

“얼마나……”

“영감님 처지에 갚을 힘이나 있소? 쌀 70가마니면 나도 다 잊겠소.”

“그렇게 많이나요?”

“원금에 이자에 이자를 복리로 계산하면 그 정도도 싼 줄이나 아시오. 당장 갚아주시오.”

“……”

딸 가진 영감은 말을 못하고 있고 면장은 당장 딸을 주던지 학자금을 반환하라고 윽박질렀습니다. 임금님은 면장이 무슨 짓을 하는지 알고 조용히 사랑방 문을 열고 나와 궁으로 돌아왔습니다.

다음 날 아침 임금님은 내시를 불렀습니다.

“지금 백성들은 어떻게 살고 있더냐?”


8. 군수네 비밀 창고

“전하의 하해와 같은 은총으로 만백성이 태평서대 강구연월이옵니다. 네네.”

“알았다. 나를 원망하는 상소는 없었더냐?”

“당치도 않은 말씀입니다. 만백성이 영화를 누리고 전하의 선정을 높이 기리고 있사옵니다.”

“그 신출내기는 어떻게 지내고 있느냐?”

“행동거지를 조심하고 전하께서 특명이 있을 터이니 그때까지 자중하라 일러두었사옵니다.”

“잘 했다.”


임금님은 그 날도 해가 질 녘 궁을 빠져나와 초라한 차림으로 먼 길을 걸어 군수네 집 문간으로 갔습니다. 저녁이라 어둑한 골목길로 우마차가 한 대가 무엇인가를 가득 싣고 왔습니다.

미리 약속이 되어 있었던 듯 큰 대문이 열리고 경비원인 듯한 사람이 나타나 마차에 실린 짐을 부렸습니다. 나이가 지긋한 그는 길가에 서 있는 임금님을 보자 불렀습니다.

“형씨, 이리 좀 오시오.”

임금님이 가까이 가자 그는 무엇인지 묵직한 짐을 내주면서 메고 안으로 들라고 했습니다. 임금님은 그것을 군수네 창고 안으로 메고 들어갔습니다.   

창고 안에는 쌀가마니가 천장이 닿도록 쌓여 있고 여기저기 비단이며 각종 과일과 채소가 가득했습니다. 임금님은 그 사람의 지시를 따라 몇 차례 짐을 날랐습니다. 

일이 끝나자 우마차는 돌아가고 경비원이 임금님을 불렀습니다. 그 사람은 임금님 귀가 유난히 큰 것에 흥미를 가지고 말을 건넸습니다.

“뉘신지 모르지만 귀가 아주 볼만합니다. 수고하셨소.”

“아닙니다.”

“어디 사시는 분이시오? 괜찮으시면 수고도 하셨으니 우리 방에 가서 쉬시고 가시지 않겠소?”

“감사합니다. 그렇게 해주신다면…… 저 역시 오갈 데 없는 신세입니다.”

“그럼 됐소. 오늘 밤 우리 거처로 가서 한잔 합시다.”

임금님은 얼결에 그를 따라 군수 관사의 별채로 갔습니다. 그의 말로는 아주 누추하다고 했지만 호화로운 방이었습니다.

안으로 들어간 지 얼마 안 되어 부엌일 보는 아주머니가 술상을 차려 왔습니다. 그리고 임금님 귀를 보자 깔깔거렸습니다.

“호호호…… 세상에 살다 보니 별꼴을 다 보겠네. 어디서 오신 뉘신지 모르지만 귀가 당나귀 귀보다 크구려. 호호호…… 소문에 듣자니 우리 임금님도 귀가 크다던데 어쩌다 임금님보다 더 큰 귀를 가지고 떠돌아다닐까. 사람 팔자는 알 수 없어. 누구는 임금이 되고 호호호.”


10. 뒷다마치기

군수 관사 경비원이 정색을 하고 꾸짖었습니다.

“어디다 임금님 귀하고 비교를 하시오. 임금님께 불충한 말을 함부로 하면 안 되오.”

그는 임금님께 얼굴을 돌렸습니다.

“형씨, 노여워 마시오. 저 아주머니가 농이 좀 심했소.”

“아닙니다.”

“나도 실은 임금님을 뵙지는 못했어도 귀가 크다는 말은 들었소. 그러나 임금님은 덕이 높은 분이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임금님이 아무리 덕이 높으면 뭘 합니까.”

“……”

“자. 술이나 한잔 들면서 뒷다마나 칩시다.”

“그게 무슨 말씀이오?”

“요새 나온 유행어라는 것이오. 아이들이 쓰는 말인데 한문으로 하면 뒷 대화라는 말이오. 한문으로 대화라는 말을 아시겠소?”

“저는 배운 것이 없어서 잘 모릅니다만.”

“임금님 안 보는 데서는 욕도 한다는 말이오. 무슨 말인고 하면 누구 흉이든지 그 사람 안 보는 데서 말로 씹는다는 것이오.”

“아, 그러하군요.”

술 한 잔을 들어 임금님과 잔 부딪기를 하고 그는 단숨에 들이켜고 말을 이었습니다.

“난 여기서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일하고 있지만 우리들이 만나면 군수 뒷다마를 엄청나게 친답니다.”

“그게 무슨 말씀인지요?”

“군수가 돌대가리……”

“돌대가리?”

“아니오. 술이나 한 장 더 쭈욱 합시다.”

“……”

“형씨는 말씨가 드문 것 같소. 내가 임금님이라면 이런 군수는 가만 두지 않을 것이오.”

그 사람은 목에다 손 칼질을 했습니다. 임금님은 넌지시 물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군수는 임금님의 은덕에 똥칠을 하고 악한 군왕으로 만드는 불충한 인사지요.”

“무슨 말씀인지요?”

“군수는 한 마디로 도둑이란 말이외다.”

“도둑이오?”

“백성은 죽거리도 없는데 군수네 창고에는 먹을 것이 수두룩하고 음식이 썩어 나가기에 하는 말이오.”

“그럴 수가 있습니까?”

“그럴 수라니! 군수는 임금님의 명이라면서 면장을 쥐어짜고 면장이 바치는 세금을 나라에 바친다면서 거두어들인 것 중 반은 자기 창고에 숨기고 반만 나라에 바친단 말이오. 그런가 하면 면장은 이장들한테 군수의 명이라며 무거운 세금을 거두어들이고 거둬들인 세금의 반만 군수에게 바치고 반은 면장 뱃속으로 들어가오. 그러니 백성은 이리저리 빼앗기고 굶주리고 가난을 면하지 못하오. 가렴주구(苛斂誅求)라는 말을 아시오? 하급 것들이 저러니 임금님이 욕을 먹지 않을 수 없지요. 그뿐 아니라 궁으로 들어간 재물은 내신가 뭔가가 자식도 없는 것들이 반을 잘라 먹고 반만 국고에 들인다는 말도 있고……”

“저는 무지해서 그렇게 어려운 말은 모릅니다. 좀 알아듣기 쉽게 설명 좀 해주시오.”


11.  귀 잡힌 임금님

“딱도 하시오. 허우대는 멀쩡하게 생겨 가지고 까막눈이구려.”

경비원은 소리를 죽이고 말했습니다.

“내가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소. 군수는 제 배만 불리면서 가난에 허덕이는 백성은 돌보지 않는 것이 얄미워서 어떤 사람이 보내온 뇌물 가운데 쌀과 조기 두름을 아주 가난한 집에다 몰래 준 일이 있소. 그런데 보낸 사람이 알배기 굴비 맛이 어떻더냐고 묻는 바람에 내가 저지른 일이 들통 나고 말았지. 그 까닭에 군수한테 눈 밖에 났지.”

“그런 일이 있었으면 당장에 쫓겨났어야 하는데 어떻게 무사하십니까?”

“내가 아무리 미워도 군수는 나를 어쩌지 못하지. 군수 비밀을 내가 샅샅이 알고 있으니 미워도 나를 어쩌지 못해.”

“……”

“형씨는 정처 없이 다니는 부평초 인생 같소만 어디를 가도 굶어죽지는 않겠소.”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잠깐 실례. 하하하.”

경비원은 갑자기 임금님 귀를 잡아당기면서 웃어댔습니다. 임금님은 귀를 잡힌 채 말했습니다.

“장난이 심하십니다.”

“하하하하 아무리 보아도 귀가 일품이야. 이 귀를 베어 술안주를 한다면 열 사람은 먹고도 남을 거야 하하하하.”

“귀가 못 생겨서 늘 부끄러운데 그렇게 말하시니 더 부끄럽습니다.”

“내가 술이 과했나 봐. 갑자기 자네 귀를 잡아보고 싶은 충동이 생기지 뭐야. 난 잠깐 둘러 볼 데가 있어서 나갔다 올 테니 자네는 편히 자리 펴고 자게나. 본관은 늦을지 모르니 기다리지는 마, 알았지?”

경비원이 어디론가 나가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임금님은 가만히 그곳을 떠나 궁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이튿날 아침 내시를 불렀습니다.

“이 나라는 장차 어떻게 될 것 같으냐?”

“전하의 하해와 같은 은총으로 태평성대 일취월장할 것입니다. 백성은 배부르게 풍년가를 부르고……”

“알았다. 네 말을 들으면 걱정할 일이 하나도 없구나.”

“네네, 전하, 이 신만 믿으시옵소서.”

“그 신출내기 촌뜨기를 데려오너라.”

“무슨 일이시옵니까?”

“그 촌 녀석은 내보내야겠다. 네 말에 의하면 궁궐에 들일 인물이 아니라 하지 않았느냐”

“네네, 영명한 분부이시옵니다. 그런 철부지는 궁궐 음식이나 축낼 뿐 공직자가 될 자격이 없는 인물이옵니다.”

“당장 데려오너라.”

내시는 신이 나서 별실에 있는 신임 신하를 불러들였습니다. 임금님이 내시를 멀리 나가 있으라 이르고 신임 신하를 가까이 불렀습니다.

“짐이 하는 말을 새겨 듣거라.”

12. 내가 너를 죽이리라

임금님이 인자한 웃음을 보이더니 엄숙한 음성으로 말했습니다.

“내가 너를 여기까지 불러들이게 했던 네 시가 있지 않더냐?”

임금님은 나직한 소리로 그 시를 읊었습니다.


“관청 높은 담엔 백성들의 피로 절고

풍악 소리 높은 곳에 백성들의 원성 높다

구중궁궐 용상 임금 백성 한을 아시려나.”


신임 신하는 놀라 머리를 더 깊이 숙였습니다.

“황공하옵니다. 소신이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아니니라. 네가 바로 보고 바로 말한 것뿐이니라.”

“소신을 죽여주시옵소서.”

임금님은 갑자기 아주 딴사람이 된 듯 무서운 말씀을 하셨습니다.

“네가 죽기를 소원한다면 바라는 대로 죽여주마. 너는 일찍이 평민의 신분으로 감히 관아를 비방하고 짐을 비방하였으니 너는 죽어 마땅하니라.”

“전하를 비방하고자 한 것은 아니었……”

“듣기 싫다. 관청 높은 담은 바로 짐이 머무는 궁궐이 아니더냐. 내가 너를 죽여 나라를 구하리라. 네 이름이 박현태라 하였더냐?”

“그러하옵니다. 전하.”

신임 관리 박현태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습니다. 그러나 임금님은 태연히 말을 이었습니다.

“삼일 안에 너를 궁궐에서 쫓아내리라. 궁 밖으로 나가거든 곧장 십리쯤 가거라. 그러면 마을 입구에 큰 버드나무가 있느니라. 그 버드나무 아래 노부부가 사는 초가가 있으니 거기 가서 노인들에게 삼일간만 묵고 가게 해 달라고 하거라. 그러면 너를 사흘 동안 재워 줄 것이니라. 그들이 밥값을 달라거든 삼일 뒤에 집안 아저씨가 와서 갚아주실 거라고 하거라. 그리고 삼일이 되는 날 밤 너 혼자 버드나무 아래로 나와서 기다리면 너를 죽일 사람을 짐이 보낼 것이니라. 알겠느냐?”

“명을 받들겠사옵니다.”

신하는 굳은 표정으로 대답했습니다.


13. 아저씨가 된 임금님

신하의 표정을 읽고 난 임금님이 내시를 불러 일렀습니다.

“앞으로 삼일 안에 촌뜨기 서생 박현태를 출궁토록 하라.”

내시는 눈에 가시 같던 신출 박현태를 내보내라는 어명을 받고 좋아서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이 무슨 돈벼락 같은 말씀인가. 그 자를 내보내라는 어명니라니! 하늘이 나를 도우심이 아닌가. 야호!’

내시는 춤을 출 듯 기뻐하며 박현태를 쫓아냈습니다.

박현태가 출궁하고 삼일 뒤 해가 지자 임금님은 미복으로 갈아입고 궁을 빠져나왔습니다. 그리고 십리 길을 걸어 외딴 집 버드나무 밑으로 가면서 생각했습니다.

‘삼일이면 멀리 달아날 수도 있는 기간인데 그 우직한 녀석이 정말 죽을 각오를 하고 나와 있을까? 달아났다면 할 수 없지만 짐의 명에 따라 죽을 자리인 줄 알면서도 달아나지 않았다면 그보다 큰 충신은 없으리라.’

임금님은 어둑한 속에서 나무 아래 서 있는 신하를 발견하는 순간 가슴이 뛰었습니다.

‘죽을 자린 줄 알면서도 달아나지 않고 나와 있구나!’

이쪽에서 인기척이 들리자 박현태는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궁궐을 향해 절을 올린 다음 단정히 머리를 숙이고 죽여주기를 기다렸습니다. 임금님은 감격스러웠으나 마음을 진정시키고 나직이 입을 열었습니다.

“박현태가 맞느냐?”

박현태는 머리를 숙인 채 대답했습니다.

“맞습니다. 어명대로 하시옵소서.”

“어명이라니? 죽여 달라는 말이렷다?”

“그러하옵니다.”

“나는 어명을 받고 죽이러 온 사자니라. 박현태는 고개를 들라.”

임금님은 박현태를 잡아 일으켰습니다.

“너는 이미 죽었느니라. 짐을 알아보겠느냐?”

박현태는 놀라 다시 땅바닥에 넓죽 엎드렸습니다.

“전하가 아니시옵니까?”

임금님이 속삭이듯 가만히 말했습니다.

“이제부터 나를 그렇게 부르지 말거라. 나는 네 아저씨니라.”

“네?! 전하가!”

임금님은 신하의 입을 막았습니다.

“내가 네 충심을 보았으니 너를 믿고 모든 것을 너에게 맡기겠다.”

“무슨 말씀이온지……”

“오늘 밤에 너는 내 조카가 되고 나는 네 아저씨가 되느니라. 나를 아저씨로 불러야 한다. 절대로 내가 누구인지 아무도 알아서는 안 된다. 알겠느냐?”

“무슨 말씀인지……”

임금님은 초가 안으로 들어가 노인 부부를 만나 인사를 했습니다.

“저는 이 아이의 숙부되는 사람입니다. 며칠 동안 돌보아 주셔서 고맙습니다. 이 아이를 한 동안만 더 살펴주실 수 있으실는지요? 숙식비는 넉넉히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우리는 숙식비를 안 주셔도 젊은 사람이 우리와 함께 지낼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같이 살고 싶습니다. 사흘 동안 젊은이가 하는 것을 보니 보통 사람이 아닌 것 같았습니다. 아주 좋은 조카를 두셨습니다. 얼마든지 우리와 함께 살도록 해 주십시오.”

“감사합니다. 그러시면 영감님 말씀만 믿고 한 동안 맡기겠습니다. 이 아이는 제가 하는 장사를 돕는 터라 한 달이면 반은 전국 장터를 돌아다니다 올 것입니다. 조카가 오는 날 저도 와서 잠시 얼굴이나 보고 가겠습니다.”

“좋을 대로 하시지요.”

“그럼 오늘 밤은 제가 이 아이를 데리고 읍내로 나가서 시장 구경을 하고 돌려보내겠습니다.”

“그렇게 하시지요.”

이렇게 하고 임금님은 박현태를 데리고 으슥한 곳에 가서 들고 온 보따리를 풀었습니다.


14. 구타당한 임금님

보따리 속에서는 하얀 천과 빨간 물감이 나왔습니다. 임금님은 하얀 천에다 빨간 물감을 물에 적셔서 칠하고 그것을 이마와 어깨에 둘러매었습니다.

“전하 이게 무엇입니까?”

“이놈아, 내가 왜 전하냐?”

“전하.”

“이놈이 그래도 아저씨를 몰라본단 말이냐?”

“그렇지만……”

“넌 내 조카니라. 내가 죽을 때까지 너는 내 조카니라. 아저씨 하고 불러 보거라.”

박현태는 감히 아저씨 소리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아, 아아.”

“아저씨 소리가 그렇게 힘드냐? 넌 오늘부터 진짜 내 조카가 되는 것이다. 난 네 아저씨야.”

임금님은 마치 크게 상처를 입은 사람처럼 되었습니다. 박현태는 임금님이 왜 이러는지 알 수가 없어 어리둥절할 뿐이었습니다.

“전, 전하.”

“이놈이? 또 전하냐? 아저씨 해 봐.”

“아저씨.”

“됐다. 그렇게 불러. 난 네 아저씨야.”

임금님은 들길을 한참 동안 앞장서서 가다가 군청과 경찰서가 있는 읍내에 이르자 박현태에게 명했습니다.

“이제부터는 네가 나를 어깨에 메어라. 나는 아주 큰 상처를 입은 백성이다. 어떠냐? 내가 많이 두들겨 맞은 사람 같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전, 전.”

“또 전전했다가는 정말 엄한 벌을 주겠다. 난 많이 다친 네 아저씨다. 알겠느냐?”

“네.”

“이제 경찰서로 들어가자. 내가 저 산 너머 동네 부랑자들한테 맞아서 이렇게 된 것을 조카인 네가 구하여 데리고 왔다고 하는 거다.”

“쇼를 합니까? 전하가 어찌 이런……”

“이놈아 내가 왜 전하냐? 아저씨도 몰라보고 농담이 심하구나. 아이구구우! 나 죽는다.”

이때 지나가던 사람이 별일 다 보겠다는 듯 힐끔거렸습니다. 임금님은 박현태에 끌리듯 의지하여 경찰서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나이가 좀 들어 보이는 경찰관이 힐끗 보더니 부하 직원에게 명했습니다.

“저것들은 또 뭐냐? 보아하니 시끄럽게 생겼다. 네가 맡아 봐.”

새파란 경찰관이 불렀습니다.

“이리 오시오.”

임금님이 엄청나게 다친 듯 고통스러워하면서 비틀비틀 그 앞으로 갔습니다.

“왜 이렇게 다쳤소?”

“저 산 너머 동네에서 괴한들이 나타나 돈을 내라면서 협박하기에 없다고 했더니 이렇게 만들어 놓고 달아났습니다.”

경찰관이 곁에 서 있는 박현태를 바라보았습니다.

“두 사람 관계는 어떤 사이요?”

“집안 아저씨입니다.”

“그런데 어른이 저렇게 맞도록 보고만 있었소?”

“저는 동네에 들어가 먹을 것을 좀 구하러 갔다 온 사이에 이렇게 되었습니다.”

“알았소. 일단 저쪽 대기실에 가서 기다리시오.”

임금님이 말했습니다.

“범인을 잡아 주시오.”

“이 밤중에 어떤 놈들인지 알고 범인을 잡소? 날이 밝으면 봅시다.”


15, 대기실의 임금님


대기실 한쪽 귀퉁이에 박현태와 임금님이 나란히 앉았습니다.

대기실에는 이미 몇 사람이 우울한 얼굴로 앉아 있었고 한 사람이 투덜거렸습니다.

“망할 놈의 세상 유전무죄 무전유죄란 말이 남의 말이 아니야. 어유우! 울화통 터져서!”

또 다른 사람이 툴툴거렸습니다.

“경찰이라고 찾아와 봐야 아무 도움도 안 된다니까. 내가 미쳤지, 미쳤어.”

다른 사람이 하는 말.

“그래도 어쩌겠소. 억울하면 이런 데라도 찾아와 하소연할 수밖에 없는 걸. 임금님인지 상감인지는 뭘 하고 세상 돌아가는 걸 모르고 있을까.”

유전무죄를 지껄이던 사람이 또 입을 열었습니다.

“임금인가 뭔가는 아랫도리 방울도 없는 내시가 눈과 입을 막아 장님에 벙어리가 된 지 오래라오. 망할 놈의 세상 한번 엎어져야 하는데 하나님은 주무시나. 아래서부터 위까지 모두 푹푹 썩고 무전유죄 유전무죄, 칵칵칵!”

그는 바닥에다 침을 뱉고 긴 의자에 벌렁 누웠습니다.

이때 갑자가 밖에서 소란스런 소리가 들리더니 한 사람은 코피를 흘리고 한 사람은 주먹을 휘두르며 경찰서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피를 흘리는 사람이 억울하다고 소리를 지르고 멀쩡한 사람은 잘못이 없다고 대응을 했습니다. 경찰관이 피 흘리는 사람한테 물었습니다.

“이 사람이 왜 때렸습니까?”

“이 사람은 우리 동네에 살던 사람입니다. 삼년 전에 나한테 돈을 꾸어가고 갚지도 않은 채 이사를 갔다가 오늘 와서 또 돈을 꾸어 달라기에 나는 더 이상 꾸어줄 돈이 없다고 했지요. 그리고 먼저 가져간 돈이나 갚으라고 하자 언제 돈을 꾸어갔느냐고 오리발을 내밀지 뭡니까. 그래서 내가 먼저 홧김에 따귀를 때렸더니……”

이때 멀쩡한 사람이 말을 가로막았습니다.

“형사님, 이래도 되는 겁니까? 민주주의 사회에서 구타가 되는 말이냐고요. 저 사람이 먼저 폭행했습니다. 나는 정당방위로 막다가 코피를 터뜨렸습니다. 그리고 돈도 그까짓 걸 가지고……”

이때 코피를 흘리는 사람이 악을 쓰며 대들었습니다.

“이놈아, 네가 사람이냐? 이 집 저 집 돌아다니며 돈을 꾸어다 쓰고 안 갚는 걸 다들 알고 있다.”

경찰관이 그 사람을 조용히 하라고 일러놓고 멀쩡한 사람을 데리고 다른 방으로 갔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딴 방에서 그들이 하는 말을 듣지 못하지만 임금님은 귀가 밝아서 다 듣고 있었습니다. 경찰관이 물었습니다.

“당신이 저 사람을 때렸소?”

“정당방위라고 했잖습니까.”

“돈을 꾸어가고 안 갚았다면 그것도 잘못한 일이 아니오?”

“그깟 돈 몇 푼 안 되는 것을 주고 그것도 돈이라고 참 기가 막혀서……”

“이 봐요. 액수가 문제입니까?”

“형사 나리, 이러지 마시오. 골치 아프게 하시지 말고 이거나 좀……”

“이게 뭐요?”

“이십만 원밖에 안 됩니다.”

경찰관은 못 이기는 체하고 돈을 받아 주머니에 넣으면서 말했습니다.

“이러면 안 되는데……, 알았으니 나가서 그 사람을 들여보내시오.”

코피를 흘린 사람이 경찰관의 밀실로 들어갔습니다.

“저 사람 말을 들어보니 별것도 아닌 걸 가지고 그러시는 것 같소.”

“별것도 아니라니요. 나한테 삼십만 원이면 우리 식구가 반년을 사는 돈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별것 아니라고 하시다니요?”

“알았으니 적당히 해결해 보시오. 저 사람하고 누가 옳고 그름을 따지자면 수사비가 더 들어요. 적어도 오십 만 원은 들 텐데 그런 돈을 내시겠소?”

“백성의 시비를 가리는데 무슨 돈이 필요합니까?”

“다 들어가야 할 데가 있으니까 하는 말이오. 그만한 돈을 마련할 힘이 없으면 두 분이 적당히 해결해요.”

억울하다고 하소연하던 사람이 어이가 없다는 듯 실망한 얼굴로 나와서 임금님 곁에 앉아 한숨을 쉬고 있었습니다.

이때 밖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임금님도 박현태도 문 쪽으로 눈을 돌렸습니다. 문이 화닥닥 열리고 두 사람이 식식거리며 들어왔습니다.


16. 임금님의 윙크

경찰관이 불만스런 얼굴로 거만하게 물었습니다.

“당신들은 뭡니까?”

홀쭉한 사람이 경찰관 앞으로 다가서서 말했습니다.

“이 사람네 소가 우리 콩밭 농사를 망쳐 놓았습니다.”

경찰관이 물었습니다.

“그래서 어떻다는 겁니까?”

“우리 콩 농사를 다 망쳐 놓았으니 소 주인이 피해 보상을 하라고 했지만 이 사람은 들은 체도 안 합니다.”

경찰관이 곁에 서 있는 뚱보 영감에게 눈을 돌렸습니다.

“남의 농사를 댁의 소가 망쳐 놓았다면 당연히 변상을 해야 하지 않습니까?”

“우리 소가 저 집 콩밭 한 귀퉁이를 좀 뜯어 먹었습니다. 그걸 가지고 콩 농사를 다 망쳤다고 펄펄 뛰니 어이가 없어서 말대답을 안 했습니다.”

“알았소. 날 따라 오시오.”

경찰관이 그를 데리고 별실로 갔습니다. 그리도 아무도 못 듣게 말했습니다.

“별것 아닌 것 같소. 적당히 처리해 줄 테니 알아서 하시지요.”

임금님은 그가 하는 소리를 듣고 있었습니다. 소 주인은 굽실거리면서 속삭였습니다.

“십만 원입니다. 가지고 있는 것이 이것뿐이라……”

“알았소. 밭주인을 들여보내시오. 내가 적당히 처리하겠소.”

임금님은 여기까지 듣고 박현태 옆구리를 꾹 찔렀습니다.

“화장실에 안 가겠니?”

박현태가 따라 나서자 임금님이 나직이 말했습니다.

“우린 그만 돌아가자.”

“네.”

박현태와 임금님은 왔던 길을 돌아 노인 부부가 사는 초가로 돌아왔습니다. 임금님이 노인 앞에 봉투를 내놓으면서 말했습니다.

“주인어른, 약속한 대로 제 조카를 돌보아주시는 보답으로 얼마 안 되지만 올리오니 성의로 알고 받아주시지요.”

노인들은 안 받겠다고 하다가 마지못해 받아들고 고마워서 어쩔 줄을 몰라 했습니다.

“우리 늙은이끼리 살기에 적적했는데 이렇게 훌륭한 조카를 같이 있게 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정성껏 돌보겠습니다. 아무 때고 조카가 보고 싶을 때는 오십시오.”

“고맙습니다. 내일 밤에 또 오겠습니다.”

임금님은 집을 나서면서 박현태에게 일렀습니다.

“내일 다시 올 테니 어른들 잘 모시거라.”

“네, 아저씨.”

임금님은 노인들 모르게 박현태를 향해 눈을 찡긋하며 한 마디 남기었습니다.

“아저씨라는 말이 오늘 따라 왜 이렇게 듣기 좋으냐. 하하하하.”


17. 어명 

다음 날입니다. 임금님은 그 날도 미복 차림으로 박현태를 만나러 왔습니다. 그리고 노인들에게 잠시 시장 구경을 하고 오겠다고 앞장서서 길을 나섰습니다.

“전하, 어디로 가시나요?”

“네가 아직도 짐을 아저씨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이냐?”

“그게 아니오라.”

“맘으로 나를 진짜 아저씨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언제 어디서 실수를 할는지 모른다. 어려워 말고 아저씨라고 스스럼없이 불러야 한다. 나도 너한테는 아저씨로서 조금도 이상하지 않게 하겠다. 명심하거라.”

“네.”

임금님은 전에 갔던 이장네 집으로 갔습니다.

“이장님 계십니까?”

이장이 내다보다가 낯익을 손님이 온 것을 알고 반갑게 맞았습니다.

“어서 오십시오. 그렇지 않아도 많이 궁금했습니다.”

“미안했습니다.”

“그냥 그렇게 가시면 어쩌십니까.”

“그만한 사정이 있었으니 용서하시지요.”

임금님은 곁에 선 박현태에게 눈길을 돌렸습니다.

“이장님이시다. 인사 여쭙거라.”

박현태는 겸손히 인사를 했습니다.

“처음 뵙습니다. 박현태라고 합니다.”

임금님이 바로 이어서 소개했습니다.

“제 조카입니다.”

“네, 인물이 아주 좋습니다. 사랑방으로 드시지요.”

주인을 따라 임금님과 박현태가 방으로 들었습니다. 이장은 안으로 들어가 부인에게 말했습니다.

“여보, 그분 또 오셨소.”

“또라니요?”

“전에 왔던 당나귀 귀 말이오.”

“그 열무김치?”

“그렇소. 열무김치 잘 드셨던 분이오. 뭐라도 차려내시오. 두 사람이오. 우리 사정을 아시는 분이니 보리밥에 된장이라도 내시오.”

“알았어요. 그런데 어쩌나……”

임금님은 그들이 나누는 소리를 다 듣고 있었습니다. 얼마 있지 않아 상이 들어왔습니다. 새까만 보리밥에 풋고추와 된장이 다였습니다. 임금님은 상을 받고 고마워  하면서 말했습니다.

“전에 먹던 푸성귀가 맛이 있었습니다.”

“예, 지금은 그것도 떨어지고 올릴 것이라곤 변변치 않습니다.”

상을 들여다보고 박현태가 말했습니다.

“아저씨……”

박현태는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임금님이 수라상을 두고 이런 대접을 받는 것이 황송해서였습니다. 그러나 임금님은 태연히 수저를 들었습니다.

“어서 먹자, 아주 맛있겠다.”

임금님의 눈치를 살피며 박현태는 수저를 들었습니다. 까칠까칠한 보리알이 입속을 뱅뱅 돌고 시커먼 된장은 쓰고 떫었습니다. 그러나 임금님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된장에 고추장을 찍어 맛있게 드셨습니다.

상을 물리고 임금님이 이렇게 부탁했습니다.

“오늘 제가 또 찾아온 것은 이장님께 부탁드릴 말씀이 있어서입니다. 임금님께서 제 조카에게 전국을 돌아다니며 세상인심과 지방 관리들이 어떻게 일을 하는지 돌아보고 한 점 거짓 없이 고하라는 명을 내리겠습니다. 전에 이장님과 말씀을 나누는 동안 생각한 바가 있어서 우리 조카와 이장님을 만나게 하고 싶어서 왔습니다.”

“제가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제 조카가 한 달이면 보름쯤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녀야 하는데 길도 설고 세상도 잘 모르는 어린애라 이장님이 도와주시면 크게 힘이 될 것 같습니다.”

“그런 일이라면 보람 있는 일이 아닙니까.” 

“그렇게 생각하여주신다면 도와주십시오. 저는 먼 지방 지주라 살림은 넉넉합니다. 이장님께서 일을 못하고 제 조카를 도와주신다면 그만한 보답을 충분히 해드리겠습니다.”

“그러시지 않아도 됩니다. 손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제가 평소에 한번 해보고 싶은 일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기회가 없어서……”

“감사합니다. 그러시면 제 조카를 데리고 다니시며 많은 것을 지도해 주십시오. 일 년 뒤에 임금님께 모든 것을 보고하여야 하니 세밀하고 정확하게 조사하여 상소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그렇게 하겠습니다.”

임금님은 박현태를 보고 말했습니다.

“오늘은 이만 너희 집으로 가자.”

임금님은 이장 댁을 떠나 들길로 오면서 일렀습니다.

“내가 이장과 하던 말을 다 알아들었을 줄 믿는다. 앞으로 한 달에 보름씩 이장님을 모시고 다니며 그가 하는 대로 따르되 정확하게 모든 것을 파악해야 한다. 알겠느냐?”

“네.”

“너는 노인들 집으로 가거라. 나는 궁으로 돌아가야 한다.”

18. 검소한 부자

그 후 박현태는 이장과 관가를 돌아보기로 했습니다.

“이장님, 이렇게 관가를 살피러 다닌다고 생각하니 마치 암행어사라도 된 듯 기분이 으쓱합니다. 이장님 존함은 어떻게 되시나요?”

“성삼영이라고 하네. 성삼문 어른이 우리 선대시라네. 난 자네를 어떻게 불러야 좋을까?”

“박생원이라고 부르시면 어떠실까요?”

“생원이라? 정말 사마시를 거친 것은 아니겠지? 진짜 생원이라면 내가 함부로 대할 사람이 아닌데. 임금님께서 특명까지 내리셨다면…… 혹시 성균관에서 나오지 않았는가?”

“아닙니다. 그냥 부담 없이 붙여본 직함입니다.”

“좀 수상한 데가 있기는 한데 자네가 하라는 대로 그렇게 하지. 자네는 나를 이장이라고만 부르게.”

“예, 성 이장님.”

“우리야 마패도 없는 가짜 암행어사가 아닌가. 어디든 가면 떠돌이 장돌뱅이 노릇을 할 수밖에 없네.”

“그래야 민정을 확실히 알 수 있지 않을까요?”

“그렇지, 장터에도 가보고, 경찰서 민원실도 가보고 군청도 가봄세.”

나이는 차이가 있었지만 박현태 키가 이장보다 한 자는 더 크고 믿음직스러웠습니다.

이장 성삼영이 앞장서서 찾아간 곳은 군청 소재재지가 있는 읍내였습니다. 이장님은 담이 높고 큰 기와집 문 앞에서 안에다 대고 불렀습니다.

“이리 오너라.”

대문이 열리고 머슴 차림의 일꾼이 나와 맞았습니다.

“이장님, 서 오십시오.”

의아한 박현태가 물었습니다.

“이장님, 여기가 어딥니까?”

“아는 사람 집이라네.”

“집이 굉장히 큽니다. 부자 같은데요?”

“부자인지 아닌지는 차차 알게 되지.”

이장님은 앞장서서 사랑채로 들었습니다. 집 안을 살펴본 박현태가 고개를 갸웃거렸습니다.

“집은 덩그러니 큰데 부자 같지는 않습니다.”

“부자는 무엇이 다른가?”

“집안에 하인도 득실거리고 기름기가 반질반질하여야 할 텐데 매우 검소해 보입니다.”

“이 집뿐 아니라 이 고을 전체가 다 이러하다네.”

“모두가 못 산다는 말씀인가요?”

“아니야, 모두가 잘 산다는 말일세. 이 집이 어때서 그런가?”

“집만 크다 보니 아무래도 가난한 집 같아서 말입니다.”

“크나 작으나 밥 세 끼 거르지 않고 배불리 먹고 즐겁게 살 수 있으면 부자가 아니던가.”

“이장님 말씀이 맞습니다.”

“이 집은 내 외사촌 형님 댁이라네.”

“그러시군요.”

해가 질 무렵 허름한 차림의 집 주인이 들어왔습니다. 이장이 와 있는 것을 본 주인이 반갑게 맞았습니다.

“언제 왔는가? 아우님이 오신 줄 알았으면 좀 일찍 왔어야 하는 것을.”

“아닙니다. 우리도 온 지 얼마 안 됩니다.”

이장은 박현태를 소개했습니다.

“저하고 함께 온 서생입니다.”

주인이 박현태의 손을 덥석 잡았습니다.

“반갑소. 이렇게 오셨으니 오늘은 우리 집에서 편히 쉬시지요.”

인사를 주고받는 사이에 저녁상이 들어왔습니다. 박현태는 밥상을 보고 놀랐습니다. 보리밥에 풋고추와 된장국, 그리고 삶은 호박잎과 고추장이 다였습니다. 이 정도 집이라면 고기반찬에 쌀밥을 먹을 줄 알았는데 실망했습니다. 가난한 선비의 집이로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장은 주인을 따라 안채로 들어가 무엇인가 많은 이야기를 나눈 뒤에야 사랑방으로 돌아왔습니다.

“형제지간에 좋은 말씀 많이 나누셨습니까?”

“그렇다네. 우리는 외사촌간이지만 절친하여 친형제보다 자별하게 지내는 사이라 앞으로 내가 어디를 가서 무엇을 해야 좋을지 상의를 하였다네.”

 

하룻밤을 지내고 이튿날 아침 간소한 차림으로 길을 나서며 박현태가 입을 열었습니다.

“이장님, 이 댁은 겉보기보다 가난해 보입니다.”

“가난하지는 않다네. 검소할 뿐이지.”

“주인께서는 무엇을 하시는 분이신가요?”

“그게 그렇게 궁금한가?”

19. 내 귀를 잡아당겨 보아라

노부부 댁에서 궁으로 돌아온 임금님은 다음 날 아침 내시를 불렀습니다.

“여봐라. 청산 고을 김군수는 어떠하더냐?”

“예예, 그 사람은 백성을 사랑하고 생각이 깊으며 매우 모범적인 관리입니다요.”

“그러냐?”

그 청산고을 김군수 집은 임금님이 관사 창고에 뇌물로 가득한 것을 보고 온 바로 그곳입니다. 그러나 내시는 김군수에게서 재물을 받아먹은 터라 임금님께 거짓말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백성을 위해 좋은 일을 어떻게 했더냐?”

“적선이 산해와 같아 일일이 말씀 올리기가……”

“그렇더냐? 한번 보고 싶구나. 내일 자정에 들라 하라.”

“예, 예.”


다음날 군수가 들자 내시가 대전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밀실로 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김군수, 오늘 전하가 하명하시거든 이렇게 대답하게.”

임금님은 두 사람이 하는 말을 밝은 귀로 다 듣고 있었습니다.

“언젠가 들어온 알배기 굴비를 가난한 백성에게 주어 맛도 못 보았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렇습니다.”

“김군수가 백성을 먹이기 위하여 수하를 시켜 백성에게 전한 바가 있다고 하게. 그리고……”

내시는 아는 대로 여러 가지 주의를 주어 군수를 대전으로 들였습니다. 군수는 임금님 앞에 절을 올리고 겸손하게 허리를 숙이고 섰습니다.

내시가 군수의 선정을 칭찬하기 위하여 알배기 굴비를 가난한 백성에게 준 바도 있다고 고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임금님이 하문했습니다.

“그게 사실이오? 가난한 백성을 위해 자기도 안 먹고 적선을 산해같이 베풀었다니 가상하구려.”

“황공하옵나이다.”

“그 굴비는 군수가 직접 전하여 주었는가?”

“제 수하를 시켜서 보냈사옵니다.”

“그게 사실이라면 큰상을 내리리라. 수일 내에 증인으로 그 수하를 보내고 귀관은 그만 물러가오.”


다음 날 아침 김군수 수하에서 알배기를 전했다는 하급 관사 관리가 궁궐에 들었습니다. 내시가 군수 관사 의 관리를 가까이 불러 일렀습니다.

“내 말을 잘 듣거라. 너의 상전 김군수님께 들어온 알배기 굴비를 가난한 백성에게 전하라는 군수의 명을 받고 네가 직접 전한 바가 있다고 고하거라. 알았느냐?”

“그건 군수님이 전하라고 한 것이 아니라 제가 군수님 모르게 가난한 백성에게 빼돌렸다가 군수님께 발각되어……”

“허허, 이 자가 못 할 소리가 없구나. 언제 네가 한 일이냐? 군수 영감이 하라는 대로 했다고 하거라. 사실대로 말했다가는 네 목이 열 개라도 못 붙어나리라.”

임금님의 크고 밝은 귀는 그 소리를 다 듣고 있었습니다. 잠시 후 그 하급 관리가 대전 문 앞에서부터 머리를 박고 설설 기어 임금님 앞에 엎드렸습니다. 임금님은 내시를 내보냈습니다. 그리고 물었습니다.

“짐이 엄중히 묻노라. 하나라도 거짓을 고하면 엄벌하리라. 알겠느냐?”

“예, 예.”

임금님이 나직이 말했습니다.

“고개를 들라.”

말단 관리는 감히 고개를 들지 못하고 주저하다가 간신히 머리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용안을 보는 순간 자지러질 듯 놀라 입을 벌린 채 바보처럼 굳었습니다.

“신, 신은……”

임금님이 작은 소리로 속삭이듯 말했습니다.

“쉿! 나를 알겠느냐?”

“네, 네, 황공하옵니다.”

“소리를 낮추어라. 내시가 시킨 대로 네가 말하지 않아도 짐이 다 아노라.”

임금님의 큰 귀를 잡아당기며 술안주로 하면 여럿이 먹고도 남을 것이라고 한 말이 생각난 신하는 몸 둘 바를 몰라 벌벌 떨었습니다.

“짐이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니 네가 설명할 필요는 없느니라. 아직도 군수 관사 곳간은 뇌물로 가득하더냐?”

“그러하옵니다. 전하.”

임금님이 웃으시며 말했습니다.

“내 귀를 한 번 잡아당겨보지 않겠느냐? 하하하.”

신하는 머리를 땅에 박았습니다. 임금님의 웃는 소리는 대전 가득히 울려 퍼졌습니다.

“신을 죽여주시옵소서.”

“너 같은 충신을 죽이다니 하하하하, 너는 내 벗이 아니었더냐? 내가 명을 내릴 때까지 돌아가 기다리라.”

내시는 안에서 울려 퍼지는 임금님의 웃는 소리에 필경은 좋은 일이 있으리라 생각하고 생글거리며 대전에서 나오는 말단 관리에게 친절하게 말했습니다. 

“수고했다. 너야 말로 충신이다. 전하가 저렇게 웃고 계시니 좋은 일이 아니냐? 돌아가거든 김군수님 잘 모시거라.”

하급관리는 내시의 말에는 아무 대꾸도 않고 궁궐을 나왔습니다. 임금님이 무슨 명을 내리실지 그것이 더 궁금했습니다.


20. 선한 목민관

박현태는 이장님의 외사촌 형님이라는 분이 어떤 인물인지 궁금해서 물었지만 이장님은 그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말해주지 않았습니다.

두 사람은 한나절을 걸어 면사무소가 있는 어느 허름한 음식점으로 들어갔습니다. 안에는 많은 사람들이 점심을 먹고 있었습니다.

이장이 한 노인 곁에 앉으며 점심과 막걸리 한 주전자를 시켰습니다. 그리고 노인에게 술을 권했습니다.

“노인장, 초면이오만 이렇게 한 자리에 앉으셨으니 제 술 한잔 받으시지요.”

노인은 주름진 얼굴에 웃음으로 환한 그림을 그리며 대답했습니다.

“고맙소. 우리 고을에는 훌륭한 군수님이 오신 뒤로 세상인심이 많이 바뀌었소.”

“그렇습니까?”

“이것 보시오. 옛날 같으면 술자리에서 누구 하나 이런 대접하는 사람이 없었소. 하지만 지금은 백성이 모두 편안하고 인심을 써가며 살고 있으니 이보다 좋은 세상이 어디 있소.”

“새로 부임하신 군수님이 그렇게 훌륭하십니까?”

“훌륭하다마다요. 군수님은 우리 늙은이들까지도 마치 자기 아버지나 되는 듯 존경하고 모신다오.”

“어떻게 하시기에?”

“말로는 못다 하오.”

“어떤 분이신지 몇 말씀 들려주시지요.”

“그 분은 몸소 검소하게 사시며 백성 돌보기를 가족 돌보듯 하오.”

“그렇습니까?”

노인은 자기 경험을 들려주었습니다.

“우리 군수님은 자기가 누구라는 것을 숨기고 사는 분이오. 지난봄에는 너무 가물어서 논에 물을 대기 위하여 늙은 아내를 데리고 웅덩이에서 두레박 끈을 양쪽에서 잡고 물을 푸는데 지나가던 낯선 사람이 다가오더니 아내 대신 두레박 끈을 잡고 도와주지 않겠소. 그 사람은 웅덩이 물을 다 푸고 나서 아무 말 없이 돌아가는 것이었소.”

“그래서요?”

“나도 지쳐서 인사도 제대로 못하고 주저앉아 쉬고 말았소. 그 사이에 그 사람이 멀리 가서 따라 갈 수도 없었구려.”

“그런 일도 있으셨군요.”

“그런데 말이오. 그해 가을에 벼 공출을 하러 군청 마당에를 갔더니 그 사람이 노인들을 도와주고 있잖겠소.”

“어떻게요?”

“노인들이 못 드는 무거운 볏가마니를 번쩍 들어다 검사관 앞에다 놓아 주시는 것이었소. 결국 노인들이 먼저 일을 보고 돌아가게 배려해 주신 것이었소.”

“참 고마운 군수님이십니다.”

“그런데 말이오. 내가 공출한 돈을 받으러 군청 안으로 들어가 경리한테 간다는 것이 길을 잘못 들어서 군수님 방으로 들어갔지 뭐겠소.”

이장이 장단을 맞추듯 말했습니다.

“재미있습니다. 노인장.”

“하하하 재미있었지, 암 재미있고말고. 내가 세상에 태어나서 그렇게 재미있는 일을 당하기는 처음이었어. 하하하하.”

노인은 아주 기쁜 듯이 입을 크게 벌리고 막걸리를 마시더니 하던 말을 마저 했습니다.

“공출한 돈 받으러 왔소, 하고 책상 앞에 앉은 사람을 보니 이거 참 기가 차서. 그 사람이 누군가 하면 봄에 나하고 물 퍼주고 간 사람이고, 공출하던 날 늙은이들 볏가마니를 앞으로 들어다 주던 사람이란 말씀이야. 그래서 내가 물었지, 아니 당신은 내가 물 풀 때 도와주고 간 사람이 아니오? 그런 당신이 어찌 여기서…… 하다가 책상 명패를 보니 군수 명패라. 그래서 군수님은 어디 가고 당신이 여기 있소? 했지.”

“그랬더니요?”

“군수님은 잘 보지 않으면 보이지 않습니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하고 묻기에 공출한 돈 받으러 왔다고 했더니 옆 사무실로 나를 안내하고 나가시는 것이었소. 그래서 서기한테 그 사람이 누구냐고 물었더니 하, 참 기가 막혀서. 그분이 바로 군수라는 거야. 하하하. 내가 군수님한테 은혜를 입은 게 아니겠소?”

“군수님이 참 훌륭하십니다.”

“그뿐이 아니오. 사람마다 그런 이야기가 많다오.”

박현태는 그런 군수라면 의당 만나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이장한테 말했습니다.

“들어보니 훌륭한 분 같습니다. 군청에 가서 군수님이 과연 그렇게 훌륭한 분인가 확인하고 가시지요.”

“백성이 그렇다면 그런 것이지. 원성이 아니니 확인할 것도 없잖은가.”

이장님은 휘적휘적 앞으로 걸어가며 한 마디 했습니다. 그러나 박현태는 따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한 자리에 선 채 꼼짝도 않았습니다.

“왜 그러는가?”

“저는 군수님을 꼭 만나 보아야겠습니다. 그런 분이라면 1년 뒤에 전하께 상을 내려야 한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악한 사람에게 벌을 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선한 목민관에게 상을 내리는 것은 그보다 더 중요합니다.”

이장은 안 된다고 했지만 박현태는 고집을 부려 군청이 있는 읍내를 향해 걸었습니다. 이장도 마지못해 따랐습니다.

군청 직원들은 마침 도시락을 펴고 점심 식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군수실로 들어가 보니 군수님도 도시락을 펴놓고 식사 중이었습니다. 이장이 들어서자 군수가 물었습니다.

“아니! 자네, 멀리 간다더니 웬일로?”

그 훌륭하다는 군수가 바로 이장님의 외사촌 형님이었던 것입니다. 박현태는 놀라 속으로 중얼거렸습니다.

‘아, 참으로 검소한 군수님이다. 관사에서 본 그대로가 군수님의 진면목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한 박현태가 물었습니다.

“이장님, 어제 우리가 쉬었던 곳이 군수님 관사가 아니었던가요?”

“그렇다네.”

“그런데 왜……”

“군수나 백성이나 사는 모습은 다 같은 것 아닌가.”

군수가 이장의 외사촌 형이면서도 평소에 자기 모습대로 보여준 것이 군수의 진실한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더 재미있는 것은 자기 고을 군수가 외사촌 형님이라는 것을 자랑하지 않고 그가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이장이 아닌가 하는 점이었습니다.


 

21. 임금님의 윙크

임금님은 내시에게 하명했습니다.

“얼마 전에 들었던 청산고을 김군수와 군수 관사 창고지기를 들도록 하라.”

내시가 작은 소리로 중얼거리듯 말했습니다.

“무슨 일이시온지. 대단한 사안이 아니시면 신에게 맡겨주시옵소서. 알아서 처결하겠사옵나이다.”

“무엄하다. 짐의 말대로 내일 아침 들도록 하라.”

그 다음 날 아침 김군수와 하급관리가 궁으로 들었습니다. 내시가 두 사람을 대전 밀실로 데리고 가서 단단히 일렀습니다.

“김군수, 어쩌면 오늘 좋은 일이 있을 것 같소. 지난  번에 전하께서 대전이 떠나가게 웃으신 것으로 보아 좋은 일이 있을 것이오.”

그리고 관사 관리자에게 경고하였습니다.

“잘 듣거라. 전하가 하문하시거든 버릇없이 곧이곧대로 대답하지 말고 적당히 하되 김군수님이 얼마나 훌륭한 분이신가만 말씀 드려라. 알겠느냐? 헛소리를 쳤다가는 네 목이 달아날 줄 알아라. 알겠느냐?”

임금님은 용상에 앉아 내시가 비밀로 하는 말을 다 듣고 빙긋이 웃으시었고, 하급 관리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습니다.

“알겠느냐? 대답을 제대도 하거라.”

“알겠습니다. 대답을 제대로 하겠습니다.”

“됐다. 제대로 하거라.”

두 사람이 대전에 들자 용상의 임금님이 하문했습니다.

“김군수에게 묻소. 듣자 하니 백성을 위하여 베풀기를 자기 자식같이 한다는데 그 말을 믿어도 되겠소?”

“그러하옵니다. 전하.”

“그러하다니 고맙소. 짐이 이르는 말을 명심하시오.”

“하명하시옵소서.”

“김군수 창고에는 무엇들을 보관하고 있소?”

김군수는 기가 막혀 대답이 막혔지만 거짓을 고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무것도 없사옵니다.”

“그래야지. 백성을 자기 가족같이 사랑하자면 관리들의 창고는 비어야 하고 백성들 곳간에는 쌀가마니와 반찬거리다 끊어지지 않아야 하오. 훌륭한 관리가 제 창고는 비우고 백성의 창고를 채워놓으면 백성의 곳간이 바로 짐의 곳간이고 군수의 곳간이 아니겠소?”

“지당한 말씀이옵니다.”

군수는 양심이 걸려 머리도 못 들고 허리를 꺾고 엎드려 있고 하급관리는 임금님의 다음 명령을 기다리며 고개를 들었습니다. 임금님이 하급 관리를 내려다보며 의미 있게 한 눈을 찡긋하고 하명했습니다.

“창고 관리를 하는 그대는 군수의 말에 한 치의 거짓도 없다고 하겠는가?”

군수는 창고지기가 바르게 말할까 두려워 벌벌 떨었습니다. 창고기지가 분명하게 대답했습니다.

“전하, 군수님 창고에는 아무것도 없사옵니다. 농부들이 잘 가꾸어 거둔 곡식과 어부들이 잡아 잘 말린 좋은 굴비를 군수님께 바치면 군수님은 신을 시켜서 가난하고 헐벗은 백성을 찾아가 나누어 주라고 하심으로 창고에는 들일 것이 없었사옵니다.”

임금님은 또 한눈을 찡긋해 보이고 크게 웃으시었습니다.

“하하하…… 듣던 중 반갑고 기쁜 소리로다. 훌륭한 목민관의 창고는 배가 고파야 하느니라. 잘 했도다. 너는 성실한 창고 관리자로 보이는데 혹여 가난한 사람한테 가져다준다고 들고 나갔다가 네가 슬쩍 한 적은 없었느냐?”

“없사옵니다.”

대전 밖에서 허리를 접고 들여다보지도 못한 채 귀만 바짝 들이댄 내시가 좋아서 입이 쩍 벌어졌습니다.

‘저 녀석이 시키는 대로 잘 하고 있어. 잘 했어. 야호!’

이렇게 쾌재를 부르고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르고 허리를 숙이고 선 내시를 임금님이 불렀습니다.

“여봐라. 밖에 없느냐?”

“네네. 대기하고 있사옵니다.”

“들라.”

임금님은 자애로운 얼굴로 세 사람을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습니다.

“김군수의 백성 사랑하는 마음이 갸륵하고 어진 것 같아 짐이 매우 흡족하도다. 이 젊은 창고 관리자에게 제수(除授)하노니 출궁당한 박현태 자리에 이 자를 앉히도록 하라.”

내시와 김군수는 가슴이 쿵하고 내려앉았습니다.

자기들의 비밀을 다 알고 있는 자가 임금님 곁에 있게 된다는 것은 대단한 위협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명을 어길 수는 없는 터. 대전을 나온 내시와 군수가 어명을 제수 받은 관리자 앞에 머리를 숙이고 애원했습니다.

“우리의 생사는 자네 손에 달렸네. 잘 보아주게, 부탁하네.”

22. 악한 목민관

박현태와 이장은 군청에서 나와 길을 걸었습니다. 이장은 외사촌 형인 군수가 지적해 준 고을을 찾아가는 길입니다.

“이장님, 어디로 가십니까?”

“어디든.”

“거기가 어딥니까?”

“가 보면 아네.”

“무작정 가시면 안 됩니다.”

“그럼 자네가 앞장서게, 내가 따름세. 어디 갈 데를 정하기라도 했는가?”

“……”

“왜 말이 없어? 대답할 말이 없으면 묵묵히 나만 따르게.”

하루 종일 걸어서 도착한 곳은 도청과 시청이 있는 도시였습니다. 박현태도 할 말은 없었지만 이장님도 종일 아무 말 없이 걷기만 했습니다.

이장은 상점이 즐비한 골목길을 걷다가 한 곡물가게 앞에 섰습니다. 그리고 상점 주인에게 쌀값을 물었습니다.

“주인장 이 살 한 말에 얼마나 갑니까?”

“삼만 원입니다.”

“삼만 원이면 다른 데보다 비싸지 않습니까?”

“비싸지요.”

“다른 데와 같이 파셔야 하지 않을까요?”

“그랬으면 좋겠는데 마음대로 안 됩니다.”

“그게 무슨 말씀인지요?”

“그 말은…….”

이때 젊은 사람이 장부를 들고 와서 주인을 만났습니다. 그 사람은 가게에서 돈을 거두어 갔습니다.

이장이 주인한테 물었습니다.

“저 사람은 누굽니까?”

“시장 끄나풀이지요.”

“왜 장사한 돈을 저 사람이 가져갑니까?”

“그럴 사정이 있습니다.”

“주인장은 무얼 먹고 사십니까?”

“쌀장사를 하지만 쌀밥은 입에도 대지 못합니다.”

“자기 쌀 자기 맘대로 먹으면 되는 것 아닙니까?”

“저는 월급을 받는 사람입니다.”

“월급을 받으시며 장사를 하시다니요?”

“우리 고을에서는 아무도 쌀을 다른 고을에서 살 수가  없지만 위에서 정해준 값 아래로는 살 수도 없습니다.”

“이 세상에 그런 법이 있나요?”

“호랑이보다 무서운 시장 때문이지요.”

호랑이보다 무서운 시장이라면 어떤 인물일까? 박현태와 이장이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데 가게 주인이 불만을 털어 놓았습니다.

“우리 시의 시장은 과거를 보아 된 사람이 아니라 지주의 아들로 태어나 돈으로 자리를 샀지요.”

“그럴 수도 있습니까?”

이장은 다 알면서도 모르는 체하고 물었습니다.

“댁들이야 뉘신지 모르지만 내 말이 이해될는지 모르겠습니다. 시장은 돈으로 자리에 올랐고 시가 있는 이 군의 반 이상이 관찰사를 지낸 그 할아버지의 땅입니다. 그래서 소작을 하는 사람들은 정한 대로 곡식을 바쳐야 하고 바친 성과에 따라 해마다 월급을 정하여 줍니다. 얼마나 박하게 주는지 농부나 장사꾼인 나나 모두 겨우겨우 살아갑니다. 쌀농사 지어주고 보리쌀 사먹습니다. 이건 공산당보다 더 무서운 착취지요.”

“그렇군요. 소작농을 하는 사람은 반드시 시장이 풀어놓은 쌀만 사 먹어야 합니다. 우리 시의 모든 곡물상은 다 시장의 것이고 농부는 제 손으로 지은 농산물을 제가 사먹는 꼴이지요.”

“한심한 인물이군요.”

“세상이 이 지경이니 악한 자는 잘 살고 선한 사람은 죽지 못해 삽니다. 댁들은 뉘시오?”

“우리는 청산 고을에 사는 장돌뱅이입니다.”

“거기 소문도 좋지 않게 나 있던데, 그래도 여기보다는 낫지요?”

“그런 것 같습니다. 어느 고을 군수나 다 나쁜 것은 아니잖습니까?”

“암은요, 저 영주골 군수님은 요순임금보다 훌륭하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런 분도 있군요. 언제 영주골이나 한번 가 보아야겠습니다.”

영주골은 바로 이장의 외사촌형님이 군수로 있는 곳입니다. 떠날 차비를 하고 한 마디 더 물었습니다.

“시장은 그렇게 모은 재산을 다 어디다 쓴답니까?”

“어디든 땅이 나왔다 하면 사 들입니다. 그리고 판 사람을 소작인으로 삼지요. 돈이 급한 사람은 땅 팔아 돈 쓰고 농사는 그대로 짓게 해 주니 굽실거리지요. 그렇지만 그게 얼마나 갑니까. 농사 지어 다 내주고 쥐꼬리만한 월급을 정해 주면 고생이 이만저만 아니지요.”

“장사하시는데 지장을 드려 죄송합니다. 내친 김에 우리는 영주고을이나 한번 구경하고 가야겠습니다.”

이장이 나서자 박현태는 뒤를 따랐습니다. 시내를 벗어나려는데 도청이나 시청보다 더 큰 건물이 보였습니다.

“이장님, 저 건물은 무엇인가요? 새로 지은 것 같은데 어마어마합니다.”

“저 건물은……”

23. 우매한 목민관이 불러들인 화

이장이 큰 건물을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저건 도의회 건물이라네.”

“도의회라면 지방자치회 의원들이 세운 건물이란 말씀입니까?”

“그렇다네. 자네는 지방자치제에 대하여 아는 게 있는가?”

“글쎄요. 나라에는 국회가 있고…… 지방의회는 국회보다 상위 기관같이 생각됩니다.”

“이 사람 무식하기는, 우리나라에 국회보다 상위 기관이 어디 있단 말인가?”

“저는 국회의원 회관이 지방에 따로 있는 것은 본 적이 없습니다. 서울에 하나가 있을 뿐인데 지방도시에 저렇게 큰 건물로 보아서는 도지사보다 높고 군수나 시장보다 높은 신분으로 보이지 않습니까.”

“허허 답답한 사람. 건물만 크면 높은 사람, 귀한 사람이 일 보는 곳이라고 생각하는가?”

“부잣집이 가난한 사람 집보다 크고……”

“자네는 세상을 한참 더 살아야겠어.”

“죄송합니다. 저는 모든 가치를 겉으로 보이는 크기에 따라 평가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부자란 무엇인가?”

“부자는 돈이 많아야지요.”

“그뿐인가?”

“집도 크고 자가용도 아주 큰 것을 타야지요.”

“더 없는가?”

“음식점도 고급 집으로 가고 술도 고급으로 마시고 노는 것도 골프채나 메도 다닐 정도……”

“허허, 이 사람 부자보다 더 부러운 사람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군. 그만 하세.”

“그럼 부자들도 그 사람을 부러워합니까?”

“속으로는 부러워하면서 겉으로는 자기가 더 잘난 체 뽐내고 산다네.”

“저도 그런 부자가 되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이장님도 그런 부자를 보신 적이 있습니까?”

“역사에 그런 인물이 많았다는 말은 들었지만 세상에서는 아직 못 보았네.”

“그러시군요. 저는 그런 분을 만날 수 있을까요?”

“그런 분을 보자면 자네 같은 눈으로는 어렵지.”

“왜 그렇습니까?”

“겉으로 보이는 크기만 보고 가치를 평가하는 버릇이 있는데 그 버릇을 고치면 모를까? 그것도 어려운 일이야.”

“지방 의회는 어떻게 하여 생겼습니까?”

“공무원들이 제 구실을 못하고 사리사욕에만 빠져 있으니 그 결과가 지방의회를 만들게 한 것이라고 하면 될까?”

“지방의회가 있으므로 모든 지역은 발전하고 더 좋은 세상이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겠지요?”

“그렇지도 않아. 처음에는 무보수로 자기 지방 발전을 위해 봉사하겠다고 나선 사람들이 지방의회 의원으로 겸손하게 시작했는데 결과는 전혀 다르게 나타난 것이 문제일세.”

“어떻게 달라졌나요?”

“의원 가운데는 처음의 약속대로 무보수 봉사를 하겠다는 사람이 많았는데 그 다음 의원들 가운데는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정당한 보수를 받고 일해야 제대로 한다면서 최소한의 보수를 받아야 한다고 결의하여 유급 의원이 되었다네. 자네는 어느 나라 사람인가 그런 것도 모르고 있다니.”

“죄송합니다. 배운 것도 적고 견문이 좁아서 그렇습니다. 지금은 지방의원들이 무슨 일을 합니까?”

“잘은 모르지만 결국 군수나 시장 위에 상전을 더 둔 셈이지. 군수나 시장이 무엇을 계획하면 시시비를 벌이고 쌈질을 하고 지방행정이 마비되는 사태가 일어나고 있다네.”

“해결책은 없을까요?”

“없지. 임금님이 결정을 하시면 모를까 아무도 막을 수도 없고 폐할 수도 없다네.”

“시청이나 군청보다 크게 지은 저 건물이 시의회 건물인가요?”

“그렇다네. 시의원이 되면 지역 발전을 위하여 이렇게 저렇게 하겠다고 무리한 정강정책을 내놓고 그것을 하겠다는 의원들의 주장을 군수나 시장도 막을 수 없는 단계에 와 있다네,”

“시의회 건물을 저렇게 크게 지어야만 좋은 정책을 내놓을 수 있나요?”

“건물만 크면 뭘 하나. 그 안에 들어가는 사람이 큰사람이 들어가 좋은 정책을 연구해야지. 그게…….”

“그럼, 군수나 시장이 필요 없지 않습니까?”

“지방의회 의원들이 잘만 하면 그럴 수도 있겠지.”

“군수나 시장이 자기 할 도리를 제대로 해야 하는데 매관매직이나 하고 자기 배만 채우려다가 결국 시의회와 도의회를 만들게 하였고 백성은 세금 부담만 커진 셈이 아닙니까?”

“자네가 비로소 제대로 된 말을 하는군. 그러나 자네나 내가 무슨 힘이 있어 잘못 되어가는 세상을 바로 잡을 수 있겠나. 이 세상이 온통 돈으로 휘감겨 있어서 돈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세상이 되고 말았으니……”

해가 지고 어두운 길을 이장은 한숨을 쉬면서 자기 집으로 돌아가고 박현태도 노인들 집으로 돌아오자 노부부가 반겼습니다.

“어서 오게, 아저씨가 오셔서 기다리고 계셨다네.”

“아저씨가요?”

임금님이 기다렸다는 듯 물었습니다.

“어디를 갔다가 이제 오느냐?”

“네, 여기저기 다니다 늦었습니다.”

저녁상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임금님은 박현태가 저녁을 다 들기까지 기다렸다가 입을 열었습니다.

“나하고 좀 가볼 데가 있다.”

임금님은 노인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집을 나서서 밤길을 걸으며 물었습니다.

“무엇을 좀 보았느냐?”

24. 부자가 부러워하는 사람

“네.”

“이장은 어떤 사람이더냐?”

“그 사람은 농사나 짓기에는 아까운 인물인 것 같았습니다.”

“그게 무슨 뜻이냐?”

“저도 확인을 해 보아야겠지만 그분 말에 의하면 부자중의 부자는 부자가 부러워하는 부자라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 말이 더 어렵구나.”

“전하, 오늘은 시골 마을 사랑방을 한번 찾아가 보았으면 합니다.”

“또 전하냐?”

“아, 아닙니다, 아저씨. 하온데 둘이 있을 때는 전하라고 부르게 허락하여 주시지요.”

“안 된다. 한번 아저씨는 영원한 아저씨니라.”

“황공하옵니다.”

“허허, 그런 말도 쓰지 말거라. 숙질간에 그게 무슨 말투냐? 어디 가 볼 만한 데가 있느냐?”

“예,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박현태는 한 곳에 큰 마을이 있고 마을 가운데 큰 사랑채가 있는 집을 눈여겨보아 두었었습니다. 거기는 동네 사람들이 밤마다 모여 이야기꽃을 피우는 곳입니다. 사랑방에는 과연 동네 어른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박현태가 사랑방 문에 서서 문안 인사를 했습니다.

“동네 어른님들 안녕하세요? 저는 길을 찾는 나그네입니다.”

사람들이 내다보았습니다.

“그렇게 서 있지 말고 들어와서 말하시오.”

임금님과 박현태가 한쪽 구석자리에 앉았습니다. 임금님도 겸손히 허리를 숙이고 인사를 올렸습니다. 그때 임금님 귀를 본 사람들이 킥킥거렸습니다.

“나랏님 귀도 크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저렇게 크지는 않을 것이구먼, 허허허.”

한 사람이 점잖게 꾸짖었습니다.

“이런 실없는 사람 보았나. 초면에 그 무슨 망발을 그리 하는가. 손님, 이해해 주십시오.”

임금님이 겸손히 받았습니다.

“괜찮습니다. 귀가 좀 커서 남들에게 웃음을 종종 나누어 드립니다.”

방안 사람들이 참고 있던 웃음을 한꺼번에 터뜨렸습니다.

“하하하, 히히히, 흐흐흐, 명답이야 명답!”

점잖은 사람이 사람들을 조용히 가라앉히고 입을 열었습니다.

“이 밤에 무슨 일로 어디를 찾아 가시는 길이십니까?”

박현태가 대답했습니다.

“부자가 부러워하는 부자를 찾아 왔습니다.”

이 말에 어이가 없다는 듯 사람들이 한 마디씩 했습니다.

“부자가 무엇이 부러워서 부자를 부러워한단 말이오?”

“아 사람들 아주 웃기지 않아? 부자가 뭐가 부러워서 또 부자를 찾는단 말이오?”

“살다 살다 별 일을 다 보네. 부자가 부러워하는 부자를 찾아다니다니! 에이 이보슈, 낮잠이나 주무시구려.”

소란스런 소리를 제지하고 점잖은 사람이 한 마디 했습니다.

“이 사람들아, 손님이 하시는 말을 잘 새겨들어야 하네,”

“뭘 새겨들으라는 거야? 손님들이 이상한 사람들 아닌가 말이야.”

점잖은 사람이 임금님을 보고 말했습니다.

“보아하니 귀인으로 생기셨는데 이 밤에 길을 잘못 드셨으니 딱하십니다. 제가 아는 대로 한 말씀드리겠습니다.”

임금님이 고맙다고 허리를 숙였습니다.

“고맙습니다.”

그 사람이 처음에 킥킥거리던 사람한테 물었습니다.

“이 사람아, 우리 면에서 누가 가장 부자인가?”

그 사람은 대뜸 대답했습니다.

“그야 삼척동자도 다 아는 면장 아닌가?”

“그렇지, 그 면장이 가장 부자지. 그럼 그 면장이 가장 부러워하는 사람이 누구던가?”


25.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점잖은 사람이 말했습니다.

“내가 그 사람을 알고 있네.”

한쪽 눈이 찌그러진 사람이 나섰습니다.

“그 사람이라니? 그게 누구냐?”

“면장하고 나는 학교 동창이고 우리 동창 중에서 공부를 가장 잘하던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를 시기하는 자가 면장이란 말일세. 언젠가 면장이 그 친구가 부럽다고 하던 소리를 들었지.”

그 말을 듣는 순간 박현태는 이장을 떠올렸습니다. 임금님도 그 이장을 떠올리고 있었습니다. 점잖은 사람이 말했습니다.

“면장은 우리 반 친구들 중에 성적으로는 꼴찌였는데 돈이 뭔지. 그 친구는 부모 잘 만나서 면장 자리를 사서 앉아 놀고먹고, 우리 동창 중에서 공부를 가장 잘하고 뛰어난 친구는 가난하고 고지식하여 세상 빛을 못 보고 고작 이장 노릇……”

눈 짝짜기가 말을 막았습니다.

“그 산정리 마을 이장 말인가? 그 사람은 법 없이도 살 사람이라는 소문을 들은 것 같은데.”

“그렇다네, 그 사람은 외사촌 형님이 군수라는데 그 군수 역시 고지식하다는 거야. 형제가 똑같은 거지. 동창끼리 도와주면 좋을 텐데 공부 잘하는 친구가 출세를 하여 저보다 높아지면 안 되니까 면장이 친구의 앞길을 막아서 과거 한번 못 보게 해놓은 거라네. 그러면 외사촌 형을 찾아가 빽이라도 써 달라면 될 텐데 무슨 똥고집이 그런 것도 안 하고 겨우 동네 이장이라네. 그런 사람이 높은 자리에 앉아야 나라가 잘 되는 건데……”

곁에서 듣던 사람이 끼어들었습니다.

“그러니까 부자 면장이 부러워하는 인물이 바로 그 산정리 이장이란 말이 아닌가?”

“그렇지. 답은 나왔어.”

임금님은 이미 알고 있는 터라 떠날 준비를 했습니다.

“쉬시는 중에 저희가 방해를 너무 한 것 같습니다. 부자가 부러워한다는 분을 찾은 것 같습니다. 산정리 이장이라고 하셨으니 내일 날이 밝으면 한번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이때 실없이 지껄이기 좋아하는 사람이 벌떡 일어서더니 임금님 곁으로 갔습니다.

“나는 신기한 것을 보면 그냥 참지 못하는 버릇이 있어서 탈이야. 여보시오, 손님, 나 그 귀 좀 한번 만져봅시다.”

그리고 임금님 귀를 잡아당기며 시시덕거렸습니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하하하하.”

박현태가 조심스럽게 말렸습니다.

“어르신님 그만 하시지요.”

“암, 그만 하고말고. 어떤 사람은 이런 귀를 가지고 나라님도 하신다는데 이 어른은 어쩌다 밤길을 가시나. 임금이 따로 있소. 부르면 임금이지. 임금님, 안녕히 가시옵소서. 전하, 하하하.”

임금님은 속으로 웃으시며 조용히 그 마을을 떠나 궁으로 돌아가고 박현태는 다음날 이장을 찾아 갔습니다.

이장은 군수인 외사촌 형으로부터 얻은 전국 관청과 관리들의 정보를 가지고 박현태와 함께 일 년 동안 방방곡곡을 누비며 관리들의 실태를 정리하여 보고서를 만들었습니다.

전국을 다 돌아보니 선한 군수가 다스리는 고을은 면장이 모두 선하고 악한 군수가 다스리는 고을은 면장도 악했습니다.

박현태가 임금님께 올릴 보고서를 챙겨들고 이장한테 말했습니다.

“이장님, 그 동안 수고 많으셨습니다. 오늘은 저와 함께 궁으로 들어가 임금님을 뵙도록 하시지요.”

“자네가 이제 농담도 제법 하시네 그려.”

“농담이 아닙니다.”

“나 같은 사람이 어찌 임금님이 계신 궁전까지 갈 수 있단 말인가.”

“우리 아저씨가 다 마련해 놓으셨으니 저를 따라 오시면 됩니다.”

“자네 아저씨라면 그 당나귀 귀 말씀인가?”

“그렇습니다. 그 아저씨가 임금님과 형제지간이십니다. 그래서 제가 입궁한다고 하면 임금님이 만나주실 것입니다.”

“글쎄, 생각해 봄세.”


26. 내시의 오만

이장은 진지한 사람이라 박현태의 말을 쉽게 믿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미 수집한 정보만은 임금님께 올려야 된다는 생각이 굳어졌습니다.

“내가 감히 궁궐에 든다는 건 과분하지만 자네가 그렇게 말하니 자네를 한번 믿고 가기로 했네.”

이장과 박현태는 서울을 향해 길을 떠났습니다. 산 고개를 올라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는 나무 밑에서 땀을 식히면서 이장이 한숨을 섞어 말했습니다.

“우리 면에 참 딱한 사정이 하나 있다네. 면장이 어려운 집안 아이가 예쁘고 영리하다는 소문을 듣고 그 아이 학비를 대주어 공부를 시켜주었다네.”

“면장님은 참 훌륭한 분 같습니다.”

“나하고 그 면장은 초등학교 동창이었는데 공부를 지지리도 못했지. 공부시간마다 졸고 시험은 모두 빵점. 그래도 할아버지 때부터 관리를 지내어 재산이 많은 집안이라 면장 자리도 돈으로 샀던 거였는데……”

“그렇지만 좋은 일은 하였잖습니까?”

“끝까지 좋은 일을 했으면 미담이 되겠지. 그런데 그 면장이 자기 부인과 이혼을 하고 그 집 딸을 아내로 달라고 한다는 걸세.”

“어찌 그럴 수가 있습니까.”

“그 딸은 서울 가서 가정교사 노릇을 하며 대학을 다니고 과거 시험을 준비하는 사람과 사귀고 있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네. 그래서 딸을 줄 수 없다고 하자 이거 참……”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 동안 학비 대 준 걸 갚으라는 거지. 그것도 쌀 70가마니나……”

“그렇게 많이요?”

“정확히 따지면 쌀 스무 가마니면 되는 것을 세 배가 넘게 바가지를 씌우는 거지. 그것을 못 내겠으면 자기 요구를 들어 달라는 거야. 그런 인물이 면장을 하고 있으니 백성들이 뭐라고 하겠나.”

“이장님, 이번 기회에 그런 면장은 엄별해야 합니다. 보고서에 그 사실도 보고서에 적으셨습니까?”

“적지는 않았지만 혹 기회가 있으면 어떻게 해 볼 생각이라네. 내가 넉넉하면 면장의 요구를 들어주고 가난한 농부를 돕고 싶네만.”

“임금님께 고하여 가난한 농부를 도와 드려야겠지요.”


두 사람은 먼 길을 걸어오는 동안 초췌해진 모습으로 궁궐에 들었습니다. 박현태가 대전 내시를 만났습니다.

“전하께 문안을 드리고자 왔습니다.”

대전 내시는 아주 교만하게 받았습니다.

“이봐, 자네는 전하께서 일찍이 내친 자가 아닌가?”

“그러하옵니다.”

“그런 인물이 감히 전하를 뵙겠다는 게 말이 되나?”

“부탁드립니다. 문안하게 하여 주십시오.”

“절대 안 돼! 감히 여기가 어디라도 쫓겨난 말단 관리가 전하를 만나겠다는 거야? 지금까지 어디서 무슨 짓을 하다가 왔는지도 모르는데. 썩 물러가게. 그리고 이 사람은 또 뭐야?”

곁에 초라한 차림으로 서 있는 이장을 낮잡아보며 한 마디 던졌습니다.

“이분은 시골 마을 이장님이십니다.”

“이장님이라고 했는가? 이장이지 이장님이 무슨……”

이때 임금님 음성이 대전 문을 넘었습니다.

“밖에 누구냐?”

내시가 굽실거리며 간사한 소리로 대답했습니다.

“예, 예, 별것 아니옵니다. 감히 전하를 뵈올 인물들이 아니오라 당장에 물리치겠사옵니다.”

“들라 이르라.”

“알겠사옵니다. 곧 시행하겠사옵니다.”

내시는 급히 두 사람을 밀실로 데리고 가서 주의를 주었습니다.

“박현태, 그게 무슨 꼴인가. 누가 자네를 한때는 관리였다는 걸 믿겠는가. 그리고 이 사람, 이장인가 삼장인가 하는 사람 차림새가 이게 뭔가. 전하를 뵙겠다는 자들이 차림새가 거지꼴이 아닌가 말이야. 적어도 이장이면 마을의 대표인데 이장이라는 자가 이 꼴로 산다고 전하께 보여드린다면 전하는 어찌 생각하시겠는가. 태평성대 강구연월로 알고 계신 전하께서 얼마나 실망이 크시겠느냐 말이야.”

임금님은 내시가 하는 말을 다 듣고 계셨습니다. 내시는 한동안 잔소리를 퍼붓다가 두 사람을 대전으로 들여보냈습니다.

내시가 하는 말에 잔뜩 기가 죽은 이장은 대전 안에 들자 벌레가 기어가듯 무릎을 꿇고 바닥을 설설 기었습니다. 박현태도 이장이 하는 대로 나란히 기어서 용상 앞에 꿇었습니다. 내시가 대전 밖으로 나간 다음 박현태가 슬그머니 고개를 들자 임금님이 한 눈을 찡긋하고 빙긋 웃으시며 하명했습니다.

“고개를 들라.”


27. 감에 갇힌 이장

잔뜩 긴장한 이장이 꺾었던 고개를 간신히 들고 용상을 올려다보았습니다.

“아, 아!”

이장은 다시 고개를 땅에 박고 몸을 벌벌 떨었습니다.

박현태가 이장의 무릎을 툭 쳤습니다.

“놀라셨지요?”

“으으음. 전하가, 전하일 줄은……”

“전하시었습니다. 전혀 모르셨지요?”

“알았다면……”

임금님이 가까이 오라 명하고 이장에게 말했습니다.

“이장, 그러실 것 없소.”

“전하!”

임금님은 기다렸다는 듯 다그쳤습니다.

“준비해온 것이 있을 터……”

박현태가 보고서를 조심스럽게 올렸습니다. 임금님은 그것을 받아 품에 넣고 아주 작은 소리로 말했습니다.

“이장님, 조금은 어렵겠지만 짐이 하는 대로 따르기 바라오.”

“하명하시옵소서.”

“너무 긴장 마오. 두 사람은 짐과 각별한 사이이니 짐이 하는 일이 이상하더라고 때를 기다릴 것이며 당분간 두 사람은 사람들이 가장 가기 싫어하는 곳으로 보낼 것이니 거기서 별명이 있을 때까지 기다리도록 하라.”

이렇게 속삭인 임금님이 갑자기 큰 소리를 질렀습니다.

“여봐라! 누구 없느냐?”

내시가 밖에서 귀를 기울이고 있다가 간사하게 대답했습니다.

“신이 여기 있사옵니다. 하명하시옵소서.”

임금님이 더 큰 소리로 하명했습니다.

“이 자들을 당장에 감옥에 가두어라.”

내시가 옷자락을 잘잘 끌고 달려오더니 두 사람에게 뒤로 물러서라고 눈짓을 했습니다.

이때 임금님이 내시에게 단호한 음성으로 물었습니다.

“이 사람들 말을 들으니 세상은 네가 말하던 태평천하 강구연월이 아니라 하는구나. 네가 짐을 우롱한 것이냐 아니면 이 자들이 짐을 우롱하고 있는 것이냐? 내가 이 자들의 죄를 엄중히 물으리라. 그리고 만약 이 자들의 말이 옳다면 너는 짐을 우롱한 죄로 목이 달아날 줄 알라.”

그리고 임금님이 노한 얼굴로 일렀습니다.

“저자들을 감옥 깊은 곳에 가두고 아무도 접근할 수 없게 하라. 짐이 직접 국문할 때가지는 누구도 가까이 해서는 안 되느니라. 알겠느냐?”

“예, 예.”

내시는 두 사람을 데리고 밀실로 가서 크게 꾸짖었습니다.

“건방진 것들 같으니라구. 여기가 어딘 줄 알고 감히 들어와 전하의 심기를 어지럽히는 것이냐?”

이장이 허리를 못 펴고 굽실거렸습니다.

“죄송합니다. 죽을죄를 졌습니다.”

내시는 둘러선 수하들에게 명했습니다.

“이 자들을 가장 깊은 감옥에 가두고 아무도 근접하지 못하게 하라. 만약 이 자들을 돕는 자가 있으면 엄벌하리라.”

두 사람은 생각지도 않게 깊은 감옥에 갇히고 말았습니다.

임금님은 용상에서 박현태와 이장이 작성한 보고서를 살피고 나서 내시를 불렀습니다.

“여봐라. 내시는 들라.”

내시가 종종걸음으로 전하 앞에 조아리고 섰습니다.

임금님이 엄숙히 말했습니다.

“짐이 사심 없이 묻노라.”

“하명하시옵소서.”

“지금 세상은 어떠하냐?”

“세상은 태평성대 강구연월이옵니다.”

“네 말을 믿어도 되겠느냐?”

“믿으시옵소서. 잠시 전에 들었던 하급 것들은 세상을 모르고 철없이 전하의 심기를 어지럽혔사옵니다. 전하를 우롱한 저 자들은 능지처참해야 할 줄로 아옵니다.”

“알았느니라. 만약 저 자들 말이 사실일 때는 네가 능치처참을 당하리라.”

내시는 속으로 바들바들 떨면서 대답했습니다.

“소인은 거짓을 고한 바가 없사옵니다.”

“거짓이 없다 하였느냐?”

“예.”

“네가 챙긴 재물은 얼마나 되느냐?”

28. 안 통하는 거짓말

“소인은 자식도 없고 제 몸뚱이 하나뿐인 신세라 재물이 필요 없사옵니다.”

“그래서 아무 것도 없다는 말이렷다?”

“예, 그러하옵니다.”

“내일 아침 청산 고을 김군수를 들라 하라.”

“하명할 일이라도 있사옵니까?”

“네가 알 바 아니니라. 내일 일찍 들라 이르라.”

내시는 청산 고을 군수에게 뇌물을 받은 것이 있어서 간이 콩알 만해졌습니다.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한 내시가 새벽길을 달려온 군수를 밀실로 데리고 가 타일렀습니다.

“먼 길을 달려오느라 수고 많았네. 전하께서 만약……”

군수가 더 궁금하여 물었습니다.

“전하께서 무슨 일로 저를 부르셨는지 아시면……”

“이 사람아, 지난번 자네 고을 문제가 생겼을 때 내가 힘 좀 써 주었다고 내놓은 땅이 있지 않던가?”

“그래서요?”

“자네가 나한테 그런 땅을 준 바가 없다고 하게. 나는 혼자 몸이라 아무것도 없다고 하였네. 그 사실이 드러나면 나도 자네도 끝장나네.”

“알겠습니다. 그런 걱정은 마십시오.”

“난 자네만 믿겠네. 고맙네.”

대전에서 임금님은 두 사람이 하는 말을 다 듣고 계셨습니다.

청산군수가 대전에 들자 임금님이 하문했습니다.

“군수는 내시와 무슨 말을 나누었는고?”

“아무 말도 나눈 바가 없사옵니다.”

“믿어도 되겠는가?”

“믿으시옵소서.”

“다시 나갔다 오라. 나가서 내시와 밀실로 가서 내시한테 다시 상의하고 들라.”

군수는 물러나 내시를 만나 밀실로 갔습니다. 내시가 물었습니다.

“전하가 무슨 말씀을 하시기에 금방 나왔는가?”

“나도 모르겠소. 대전에 들기 전에 당신과 무슨 말을 나누었느냐 하문하셨소.”

“그래서?”

“아무 말도 나눈 바가 없다 하였더니 나가서 다시 상의하고 오라시는데 무엇을 상의하라는 것인지 모르겠소.”

“상의할 것이 무엇인가. 그 땅은 내 것이 아니라고 끝까지 숨겨야 하네.”

“알겠소. 전하가 무엇을 하문하실는지 짐작 가는 것이 없소?”

“김군수가 큰 건물 하나를 강제로 사들였다면서? 혹시 그것을 아시는 게 아닐까?”

“그것까지는 전하가 알 리 없지 않소?”

“일단 들어가 보게.”

군수가 대전으로 들어 용상 앞에 엎드렸습니다. 임금님이 엄하게 하문했습니다.

“청산군수, 지금 밀실에서 나눈 말을 한 마디도 숨기지 말고 말하여 보라.”

군수는 입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두 사람이 나눈 말을 하지 않으면 짐이 들려주리라.”

군수는 잔뜩 긴장했습니다. 임금님이 입을 열었습니다.

“대전에 들기 전에 군수와 내시는 옛날에 골치 아픈 사건이 있을 때 짐을 속이고 적당히 처리하고 땅덩어리를 떼어 준 이야기를 하지 않았는가?”

“……”

“지금 밖에서 나눈 이야기를 내가 하게 하겠는가?”

“전하,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내시와 나눈 이야기 중에 군수가 강제로 사들인 건물에 대하여 말하지 않았는가?”

“전하,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짐은 김군수의 죄를 다 알고 있고 그 동안 챙긴 재물을 알고 있느니라. 가진 것을 하나도 숨김없이 고하라.”

“……”

“짐이 그대의 집 창고에 들인 재물 목록을 다 말하기 전에 스스로 고하라.”

군수는 더 이상 숨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모든 죄와 재물을 낱낱이 고백했습니다. 다 듣고 난 임금님이 하문했습니다.

“솔직히 고했으니 짐이 경의 목숨만은 살려주리라. 끝까지 이실직고하지 않았더라면 능지처참했으리라.”

“전하,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죽여주시옵소서.”

“경은 한때 양심적인 생각을 가지고 고을을 돌본 일도 있는 줄 아노라. 짐의 말이 틀렸느냐?”

“그게 무슨 공이 되겠사옵니까. 신을 죽여주시옵소서.”

“신하의 죄를 잡고 죽인다면 백성이 얼마나 남겠느냐? 분명히 약속하라. 가진 재물을 모두 가난한 고을 백성에게 나누어 주고 경은 나라에서 책봉한 것으로 만족한 줄 알고 살 것이며 청렴한 공복으로 나라와 백성을 위하여 전심전력하겠다고 하면 현직은 물론 생명과 가문의 명예를 지켜 주겠노라.”

“황공하옵니다. 전하의 명을 따르겠나이다.”

“물러가라. 약속대로 하는지 지켜보겠노라.”

군수가 엉금엉금 기어 물러가자 임금님은 내시를 불러 하문했습니다.

“너는 재물이 전혀 없다고 하였는데 짐이 믿어도 되겠느냐?”

29. 믿으라는 거짓말

“믿으시옵소서.”

“그러면 김군수하고 한 말은 무엇이었더냐?”

“……”

“왜 대답이 없느냐? 김군수가 너한테 준 땅덩어리는 네 것이 아니더냐?”

“황공하옵니다. 그것은……”

“변명할 것 없다. 짐이 모든 걸 다 알고 있느니라. 너는 짐을 우롱하고 전국에서 올라오는 상소문을 재물을 받고 적당히 처리하지 않았더냐?”

“황공하옵니다.”

“네가 숨겨둔 재물을 모두 밝히고 그것을 만백성에게 골고루 나누어 잘 살게 해 준다면 네 목숨과 명예는 지켜 주겠노라. 하나 그렇지 못하면 재산도 네 목숨도 다 내놓아야 할 것이니라. 선택하도록 하라.”

내시는 땅바닥에 납작 엎드려 빌었습니다.

“전하 황공하옵니다. 신이 미련하여 불충한 죄를 지었사옵니다. 죽여주시옵소서.”

“되었느니라. 네 재산 목록을 하나도 숨김없이 밝히도록 하라. 그 분배와 처분은 짐이 하리라.”

“그리 하옵소서.”

“앞으로 너는 이 나라의 평안과 백성의 안위를 위하여 충심을 다 하고 백성의 원성이나 불만이 올라올 때는 추호도 숨김없이 고하라. 마지막으로 묻노라. 아직도 이 나라가 태평성대 강구연월이더냐?”

“황공하옵니다.”

“그 동안 너한테 재물을 바치고 부정을 저지른 관리를 모두 불러 들여 그들이 축재한 재물을 회수하고 그것으로 백성이 두루 잘 사는 나라를 만들도록 하라.”

“전하, 높고 깊은 성은에 감복하오며 신명을 다하여 받들겠나이다.”

“너는 옛날의 네가 아니니라. 만에 하나 옛날의 너로 돌아갈 때는 목숨을 내놓아야 할 것이니라.”

“명심하겠나이다.”

“짐이 들라 하는 지방 관속을 대전으로 불러들일 것이며 내일은 삼정승을 비롯한 문무백관을 대전으로 들라 하라.”


다음 날 아침 문무백관이 대전에 들었습니다. 임금님이 엄숙하게 명을 내렸습니다.

“지금까지는 짐의 곁에서 가장 충성을 하여야 할 내시가 짐을 우롱하고 권세를 남용하여 여러 백성의 한을  풀어주지 못하였소. 이 자리에 함께한 백관 가운데는 청백리로 책무를 다한 사람도 많지만 부정축재를 하여 백성의 원성을 사고 있는 자가 있소. 그 동안 내시를 통하여 이권을 챙긴 관리는 짐 앞에 신명을 다해 충성하겠다는 맹세를 해 주기 바라오.”

도열한 신하가 한 목소리로 대답했습니다.

“전하, 분부를 받들어 모시겠나이다.”

임금님은 영의정서부터 판서 참판 모두를 한 사람씩 불러 부정한 재물을 확인하였습니다. 이미 부정축재로 배를 불린 지방 관리와 중앙 관서의 우두머리들이 소유한 재물의 과소를 다 아는 임금님은 거짓을 고하는 사람마다 꼼짝 못하고 다 고백하게 하였습니다.

박현태와 이장이 조사한 내용은 한 점의 착오도 없이 완전했습니다. 임금님은 내심 그들의 치밀하고 성실함을 인정하고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문무백관의 충성서약을 받은 임금님은 백성이 잘 살고 관리가 부정 없는 태평성대 강구연월한 나라를 만들 기초를 세우고 감옥에 가둔 두 신하를 데려오라 명하였습니다.

내시가 두 사람을 감옥에서 풀어 밀실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리고 타일렀습니다.

30. 이실직고


“자네들이 무슨 말을 어떻게 고하였는지 모르지만 전하께서 크게 노하신 것은 사실이다. 전하 앞에 나가거든  그저 죽을죄를 지었다고 고두사죄하고 목숨만은 건져가지고 가거라.”

“예, 알겠습니다.”

박현태는 겸손히 대답하고 이장과 나란히 대전으로 들었습니다. 임금님이 두 사람을 가까이 불렀습니다.

“수고들 많았느니라. 너희들 공로로 이 나라는 태평성대 강구연월의 나라가 될 것이니라.”

“황공하옵니다.”

임금님이 박현태에게 하문했습니다.

“넌 내 조카가 아니더냐. 세상을 돌아보고 세상 실정을  바르게 고하였으니 상을 내리고 싶지만 아직은 아니니라. 아직도 고할 말이 더 없느냐?”

“있사옵니다.”

“뭔고?”

“각 고을을 돌아보니 도청이나 군청보다 더 화려하고 거대한 건물을 세우고 군수와 시장이 하는 일까지 좌지우지하는 기관이 있습니다.”

“무엇이더냐?”

“지방자치제가 문제이옵니다. 지방의원은 처음에 주민을 위한 봉사를 하겠다고 나선 인사들이 선거를 통하여 시의원 도의원이 되자 지방 관서를 관리하고 엄청난 예산을 들여 청사를 거창하게 짓는 등 사정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어떻게 달라졌는가?”

“무급제로 시작하였으나 지금은 유급제로 바꾸고 군수나 시장이 행정적으로 시도하는 사업을 시정 의결기관이 된 지방의회에서 좌지우지하여 관리들은 관리대로 불만이고 백성은 백성대로 원성이 높사옵니다. 그들이 진정으로 백성을 생각하고 나라를 위한다면 청사가 크건 작건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그런 예산으로 백성의 일자리를 더 만들었어야 합니다.”

“그 문제는 어찌 하면 좋겠느냐?”

“군수와 시장을 폐하든지 지방자치제를 폐하든지 양자택일을 하는 것이 옳은 줄 아옵니다. 앞으로는 군수나 시장은 옛날처럼 나태하지 않을 것이고 청렴결백할 것이며 민생을 돌볼 것이오니 전하의 영명한 결정이 이 나라 기틀이 될 것이옵니다.”

“알겠노라. 짐은 지방자치제를 폐하고 모든 지방 관리들이 자기 지역 발전을 위하여 전심전력하도록 하겠노라. 더 고할 말은 없더냐?”

“우리나라는 국토 면적에 비해 국회의원이 과다하다고 생각됩니다. 군마다 선출한 국회의원이 사백 명을 넘는 것도 무리입니다. 지방 관리들이 일을 제대로 하면 군단위로 세운 국회의원이 지역을 위하여 실지로 할 일이 없어집니다. 그러므로 국회의원은 진정으로 봉사와 애국하고 존경받는 인물들이 국가적 대사를 연구하고 의논하도록 하여야 할 것입니다. 지역마다 국회의원을 선출하다 보니 국회의원이 지방색을 띠고 패거리를 이루어 진정으로 국가를 위해 해야 할 일은 외면하고 자기 이익과 지역을 위한다는 구실로 국가 차원의 이상적인 법을 제대로 만들지 못하고 당파싸움에 힘을 소모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일리가 있느니라. 국회의원은 몇이나 세워야 하며 어떤 인물이 되어야 하겠느냐?”

“백 명 이내로 하여도 국사에는 부족하지 않을 줄로 사료되옵니다. 각 군에서 군수가 덕망 높은 인물을 한 명씩 추천하면 4백 명이 모이게 됩니다. 그 4백 명이 훌륭한 인물을 스스로 선출하여 100명을 가려내게 하면 그 의원들은 직무를 바르게 수행할 것입니다.”

“네가 많은 생각을 하였구나. 이제 지방자치제를 폐지하고 국회의원 수를 백 명으로 하여 이 나라가 태평성대 강구연월의 국가로 만들겠노라.”

“황공하옵니다.”

“더 할 말은 없느냐?”

31. 꼴좋다 호호호

“없사옵니다.”

이장은 대전에 들어서부터 용안을 바로 보지도 못하고 허리를 숙인 채 망부석처럼 서 있었습니다. 임금님이 영을 내렸습니다.

“짐이 두 사람에게 특명을 주노라. 이장에게는 암행어사의 직을 제수하노니 신분을 숨기고 지방 관리들이 짐과 약속한 대로 나라 일을 잘 보는지 확인하고 상벌을 정할 것이며 박현태 또한 암행어사로 제수한다. 중앙관서의 관리들이 맡은 일에 충실한가를 살피고 부정부패가 다시는 발생하지 않도록 감시하여 고하라.”

이장이 떨리는 음성으로 다짐했습니다.

“신명을 다하여 분부 받들겠사옵니다.”

임금님은 두 사람을 더 가까이 불러 귀에다 대고 속삭였습니다.

“짐이 너희를 내보낼 때는 크게 벌을 내리는 듯이 할 테니 그리 알라.”

이때 박현태가 작은 소리로 입을 열었습니다.

“궁금한 것 한 가지만 더 여쭙겠습니다. 감옥에서 듣자니 부정축재를 한 죄인들을 벌하지 않고 모두 용서하셨다 하는데 어찌 엄벌을 내리지 않으셨습니까?”

“임금이라고 죄인을 벌로만 다스리면 악이 악을 낳는 법이니라. 범인 잡겠다고 법을 자꾸 만들면 법을 벗어나려는 자들이 더 악한 꾀를 부려 세상은 더 악하여지느니라. 죄를 법으로만 다스리면 다른 죄를 낳는다는 말이니라. 중국 수나라 태조가 범인 없는 세상을 만들고자 좀도둑도 사형에 처하는 엄벌을 행했지만 시중에는 도둑이 떼로 생겨 실패했으며, 당태종은 법망을 풀고 엄벌하지 않는 정책을 썼을 때 백성들이 밤에도 문을 잠그지 않고 잘 만큼 도둑이 없었느니라. 지장은 사랑으로 다스려서 성공하지만 용장은 힘으로 다스리다 패하는 이치니라. 짐의 뜻을 알겠느냐? 내 소리에 놀라지 말고  물러가 명을 충실이 수행하라.”

임금님은 갑자기 대전이 떠나갈 듯 큰 소리로 두 사람을 꾸짖었습니다.

“이 놈들아! 그래도 짐한테 거짓을 고하겠느냐? 이 나라는 내시가 말한 대로 태평성대 강구연월이니라. 짐이 이제부터 선정을 베풀기로 한 터, 죽어 마땅한 너희들이지만 더는 죄를 묻지 않겠노라. 당장에 물러가거라.”

허리를 조아린 내시가 큰소리로 꾸짖는 임금님 목소리를 듣고 고소해서 춤을 추듯 어깨를 들썩거렸습니다.

“꼴좋다. 내 그럴 줄 알았지. 촌것들이 감히 호호호.”

 

32. 태평성대(太平聖代) 강구연월(康衢煙月)

그로부터 1년 뒤 임금님은 미복 차림으로 궁궐을 빠져나와 맨 처음 찾아갔던 가난한 농부를 찾아갔습니다.

전에는 보지 못하던 쌀가마니가 봉당 구석에 쌓여 있고 마당에는 황소가 고삐에 매인 채 무릎을 꿇고 앉아 되새김질을 하고 있었습니다.

저녁을 드는 듯 문은 닫혀 있고 조용했습니다. 임금님이 나직이 주인을 찾았습니다.

“실례합니다. 주인 계십니까?”

방문이 열리고 전에 보았던 농부 부부가 내다보다가 알아보고 반겼습니다.

“아니, 전에 한번 들렸다 가신 어른이 아니십니까?”

“그렇습니다. 전에 한번 지나다가 들렸지요. 그 때는 사정이 있어서 인사도 못 드리고 가서 죄송했습니다. 오늘 돌아가는 길에 잠깐 인사나 드릴까 하여 왔습니다.”

“잘 오셨습니다. 누추하지만 방으로 드시지요.”

“식사 중이신 같은데 그래도 되겠습니까?”

“아직 저녁을 안 드셨으면 한 술 드시지요.”

“아닙니다. 오는 길에 시장하여 장터에서 국수 한 그릇 사 먹고 오는 길입니다.”

“그래도 뭘 좀 드셔야지요. 지난번 오셨을 때도 그냥 가셨는데요.”

“참 이상하지요. 한번 잠깐 들렀을 뿐인데 지나다 생각하니 이 댁으로 발길이 옮겨지지 않겠습니까.”

“그게 인연이라는 것입니다. 잘 오셨습니다.”

“사정이 좀 나아지신 것 같습니다. 쌀가마니도 있고.”

“손님은 어디 사시는 분이시기에 세상 돌아가는 것도 모르시는 것 같습니다.”

“세상이 돌아가다니요?”

“손님께서 다녀가신 지가 꼭 일 년이 되는 것 같습니다만 그 동안 우리나라는 새나라가 되었답니다.”

“새 나라라고요?”

“예, 자비하신 임금님께서 백성을 위하여 큰 용단을 내리시고 나라꼴을 제대로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임금님께서 무슨 용단을 내리셨습니까?”

“손님은 꼭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처럼 말하십니다.”

이때 곁에서 답답하다는 듯 듣고만 있던 안주인께서 한 마디 했습니다.

“손님은 귀만 크고 소문은 못 들으시는 것 같은데 세상 바뀐 것을 정말 모르신다는 거예요?”

“죄송합니다. 저는 귀만 크지 아무 소리도 제대로 못 듣습니다. 게다가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다 보니 아는 것이 없지요.”

주인이 아내를 꾸짖었습니다.

“무슨 소리를 그렇게 하시오? 손님이 얼마나 민망해 하시겠소. 손님 용서하십시오. 우리 마누라는 주책이 없어서 마음에 있는 말을 못 참는 버릇이 있어 탈입니다.”

“괜찮습니다. 저는 오나가나 귀 때문에 수난을 많이 당해서 누가 무슨 소리를 해도 귀는 들은 체도 안 합니다. 아무 염려 마시고 하고 싶은 말은 마음대로 하십시오.”

안주인이 웃으면서 또 끼어들었습니다.

“전에 오셨을 때도 그 귀가 하도 재미있게 생겨서 만져보고 싶었는데 그만 가시는 바람에 못 만져 보았더니 얼마나 섭섭했는지 모릅니다.”

임금님이 껄껄 웃으시며 대답했습니다.

“그럼 오늘 만져보시지요. 그 대신 세상이 어떻게 별했는지 제가 알아들을 수 있도록 설명도 부탁합니다. 하하하.”

“호호호 손님이 만져보라 하시니 좀 부끄러운 생각이 듭니다. 만져 본 것으로 하고 세상 이야기나 말씀드리지요.”

주인이 아내를 또 꾸짖었습니다.

“저래서 여자는 턱에 수염이 나지 않는 거 아니겠습니까? 하던 짓도 멍석 펴놓으면 안 한다고 하더니, 마누라가 바로 그 꼴입니다. 이해해 주십시오.”

주인은 상을 물리며 말했습니다.

“간단히 술상이나 좀 봐 오구려.”

이렇게 하여 임금님은 농부와 술상을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농부는 술을 따르며 말했습니다.

“세상이 많이 달라졌다오. 작년만 해도 우리 집에 술상을 차릴 처지가 아니라 죽도 끓어먹기 힘들었다오.”

“그렇습니까.”

“우리 임금님께서 얼마나 지혜로우신 분인지 대전 내시와 고위 관원들과 군수 시장이 모두 임금님 앞에 재산을 내놓고 충성을 맹세하였다고 합니다.”

“그런 일이 있었군요.”

“그뿐이 아닙니다. 백성의 원성을 사던 지방의회가 없어지고 싸움질이나 하던 국회의원이 백 명으로 줄어드니 국회에서는 당쟁이 사라지고 오직 나라의 발전을 위해 지혜를 모으는 기관이 되었다 합니다.”

“반가운 소식입니다.”

“손님은 어디를 돌아다니셨기에 그런 것도 모르십니까?”

“저는 귀가 너무 커서 세상에서 하는 소리를 하나도 듣지 못합니다.”

“보기보다 좀 답답한 어른이시구려. 군수들은 자기 가 가진 재물을 백성에게 나누어 주고 부자 지주들이 가진 땅을 나라의 영이라고 하며 내놓게 하여 농부들한테 돌려주니 이제 일할 맛이 납니다. 세금도 줄어들어서 나라에서 내라는 대로 다 내놓고도 이렇게 술도 빚어 먹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지금이야 말로 태평성대 강구연월이고 요순시대가 부럽지 않습니다.”

임금님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태평성대 강구연월이라 하셨습니까?”

“임금님의 은혜가 하해와 같다는 말은 내시들이나 하는 말인 줄 알았는데 지금이야 말로 임금님 은혜가 우리 백성에게 넘치고 있습니다. 손님, 이 은혜를 임금님께 감사드립시다.”

주인은 일어서서 임금님이 계신 서울을 향해 엄숙히 서면서 말했습니다.

“우리 하해와 같은 은혜를 베푸신 임금님께 큰절을 올립시다. 자, 일어서시오. 손님께서도 머지않아 임금님의 은혜로 좋은 일이 있으실 것이오.”

임금님은 농부를 따라 서울을 향해 큰절을 올렸습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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