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방/동화

헌 책방 할아버지 / 120매

웃는곰 2011. 6. 18. 10:10

헌책방 할아버지



“난 할아버지 때문에 창피해.”

“왜?” 

“쪽팔린다구우!” 

“왜, 이 할아버지가 어때서?”

“할아버지는 너무 늙었고, 수염도 지저분하고 이빨도 빠지고 머리도 하얗고 또…”

“또?” 

“할아버지 책방도 너무 늙었어.”

“하하하하, 책방이 늙었다는 말은 처음 듣는다. 누가 그러더냐?”

“내 친구들이 그러는데 할아버지 책방은 너무 늙어서 어린이들이 오고 싶지 않대.”

“그렇구나. 우리 책방은 할아버지보다 나이가 더 많으니 그런 말을 들을 만하겠구나.”

“아이들이 뭐라는지 알아?”

“뭐라더냐?” 

“우리 옆집 새나라문고에는 손님이 많아서 장사도 잘 되는데 할아버지 책방은 손님 하나 없이 무얼 먹고 사는지 모르겠대.”

“어린 것들이 별 걱정을 다 하는구나. 우리도 굶고 살지는 않았지?”

“우리도 동양고서화책방이라고 하지 말고 동양문고라고 하면 안 될까?”

“왜?” 

“다른 서점은 무슨문고 무슨서적센터라고 하는데 할아버지 서점만 책방이라고 하잖아? 그것도 창피해.”

“책방을 책방이라고 하는데 그게 창피하냐? 네가 이제 뭘 알게 되나 보구나.”

이때 이웃 고등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는 서지가인 정수자 선생님이 오셨습니다.

“서선생님 안녕하세요?”

서선생은 은지 할아버지입니다.

“어서 오시오.”

정수자 선생은 은지를 알아보고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습니다.

“은지가 있었구나. 할아버지하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는 중인가 보지?”

“안녕하세요?” 

은지는 얌전하게 인사를 했습니다. 할아버지가 웃으시면서 선생님을 바라보았습니다.

“아, 이 녀석이 오늘은 아주 다 큰 아이처럼 말을 해서 말대꾸를 하고 있었습니다.”

“무슨 이야기를 하셨는데요?”

“우리 책방이 마음에 안 드는 모양입니다. 다른 서점은 무슨 서적 무슨 서적센터라고 하는데 우리만 책방이라고 한다면서 불만이지 뭡니까. 하하하”

“은지 말도 일리는 있지만 여기는 다른 책방과 달라서 신식 이름에는 잘 어울리지 않을 것 같네요.”

“그건 그렇고, 오늘은 무슨 정보를 가지고 오셨습니까?”

“이 책은 1949년 12월 25일 발행도서입니다. 서선생님께서는 1950년 이전 책에는 관심이 없으시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 좀 망설이다가 한번 보여드리려고 가지고 왔습니다.”

은지 할아버지는 고개를 저었습니다.

“고맙기는 하지만 날짜가 모자라는군요.”

“그래도 어떻게 안 될까요?”

“어렵습니다.” 

“이 책을 가지고 온 아이가 집안 사정이 안 좋아서 이 책이라도 고서방에서 팔아보겠다기에 선생님을 찾은 것입니다.”

“그 학생 사정이 어렵다고 하니 그 책을 얼마나 받고 싶어 하는지 아시는지요?”

“큰돈이야 되겠습니까? 오만 원이 필요한 것 같았습니다.”

“그럼 됐습니다. 일단 내가 그 돈은 장학금 주는 셈치고 드릴 테니 그 학생에게 전해 주시고 책은 돌려주시지요. 닷새만 먼저 나왔어도 좋았을 걸……”

“그러실 것까지는 없습니다.”

“그 책 헌 책방에 가지고 가 봐야 만 원도 안 줍니다. 오만 원이 필요한 아이라니 도와주는 편이 좋습니다. 언제나 좋은 정보를 제공해 주시는 정선생님의 낯을 보아 그렇게 생각한 것입니다.”

“전에도 그런 일이 있으시지 않았나요?”

“먹고 살만하니 하는 것이니 그리 아시지요.”

“이 책을 다른 책방에서 만 원에 샀다가 손님이 찾으면 얼마나 받고 팔게 될까요?”

“십만 원은 부를 겁니다.”

“서선생님 같은 분이 사시면 그 이하로 주실 것 아닙니까?”

“그렇지요, 내가 샀다가 판다면 오만 원에는 쉽게 팔 수 있지요.”

“그럼 그렇게 하시지 않고……”

“아시다시피 저는 책과 시간 장사를 하는 사람입니다. 시간이 맞지 않으면 어떤 수익이 생긴다 해도 손을 대지 않습니다.”

“꼭 1950년 전의 책만 사고파신다는 신념은 철칙이시군요.”

“그렇지요. 이제 그만 가보시지요. 여기 작지만 오만 원을 넣었습니다.”

“이걸 어떻게 받습니까?”

“정선생님 드리는 게 아닙니다. 그 학생에게 전하여 달라는 말씀입니다. 다만 그 학생에게는 비밀로 해 주시기 바랍니다.”

정수자 서생은 할아버지가 내미는 봉투를 들고 돌아갔습니다.

지켜보고 있던 은지가 머리를 갸웃거리며 말했습니다.

3. 할아버지는 바보

“할아버지는 바보야?”

“그게 무슨 소리냐?”

“만원에 사서 오만 원, 십만 원에 팔면 수지맞잖아?”

“하하하, 네가 어느새 그런 계산도 할 줄 아는구나.”

“할아버지는 내가 백 원만 달라고 해도 안 주면서 선생님한테는 오만 원을 줬잖아?”

“그랬지.” 

“할아버지는 미워, 바보, 바보야.”

“하하하 녀석…….”

그 날 저녁 은지는 아빠한테 말했습니다.

“아빠, 할아버지는 바보인가 봐.”

“그게 무슨 말이냐?”

“할아버지는 장사를 할 줄 모르시는 거야.”

은지는 낮에 할아버지 책방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아빠한테 들려주었습니다. 그리고 아빠도 같은 생각일 거라고 말했습니다.

“아빠, 내 말이 맞지? 할아버지는 엉터리 책방을 하고 있는 거 맞지?”

“아빠는 다 알고 있지만, 네가 더 커 봐야 안다.”

“나도 다 큰 거 아니야? 내 말 맞지?”

“맞다.”

이렇게 말한 아빠는 보일 듯 말 듯하게 웃음을 지었습니다. 아빠는 할아버지가 하시는 일을 다 이해하고 있지만 아빠의 동생들, 그러니까 은지 작은아버지는 은지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은지 작은아버지는 언제나 이렇게 말했습니다.

“난 우리 아버지 하시는 일을 이해할 수가 없어. 무슨 돈이 된다고 헌책만 사들이시는지 알 수가 없단 말이야. 그것도 케케묵은 6.25사변 이전에 나온 고서들을 누가 사간다고 그러시는지 몰라. 그 돈으로 장사를 하면 거부가 되었을 거야.”

사실은 은주 작은아버지만 그런 게 아닙니다. 온 가족이 다 할아버지가 하는 고서방이 마음에 안 드는 것입니다.

손님도 오지 않고 파리만 날리면서도 무엇이 그렇게 좋은지 퀴퀴한 냄새가 밴 고서들 틈에서 할아버지는 늘 웃으며 즐겁게 지내십니다.

은주는 학교에서 돌아올 때는 길목에 있는 할아버지 책방을 지나다가 가끔씩 들어가 할아버지와 이야기를 하다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오늘도 은주가 서점 안을 들여다보니 몸집이 아주 큰 뚱뚱보가 할아버지와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선생님, 이 책은 1560년도에 나온 것입니다. 5백 년 전 책인데 얼마나 쳐주시겠습니까?”

“글세, 얼마나 받고 싶으시오?”

“백만 원이면…….”

“백만 원이오?”

“네, 너무 비쌉니까?”

“댁은 이 책이 어디서 나셨소?”

“저의 집 고리짝에 굴러다니는 아주 귀찮은 물건입니다. 그렇지만 들어보니 옛날 책일수록 비싸다고 하여 용돈도 궁하고 하여……”

“그럼 댁의 주소와 성함을 이 책갈피에 적어서 넣어 주시오. 나는 구하는 책마다 사고 판 사람의 신분을 밝혀 두고 거래를 하오. 그러시면 달라는 대로 드리리다.”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제 신분증을 보시지요. 그리고 제 이름은 길상조입니다.”

“길상조라……”

할아버지는 그 헌 책을 백만 원을 주고 사셨습니다. 그 사람은 돈을 받아가지고 신이 나서 나갔습니다. 은지는 할아버지가 아주 바보가 틀림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런 책은 돈을 주고 가지라고 해도 안 가질 거야. 껍데기는 너덜너덜하고 글씨는 새까만 한문……’

은지는 책을 보면서 말했습니다.

“할아버지 이 글씨를 다 읽을 수 있어?”

“읽을 수 있다마다. 못 읽으면 사겠느냐?”

“이런 고물 책을 돈을 주고 사는 할아버지는 바보야. 나 같으면 안 사.”

“그래서 너하고 나하고 다른 것 아니겠니? 이다음에 네가 커서 공부를 하면 이 책을 읽을 수 있는 날이 있을 거야. 이담에 너 읽으라고 산 거다.”

“난 안 읽을 거야. 그런 책을 누가 읽어.”

그 날도 집으로 와서 아빠한테 할아버지는 틀림없는 바보라고 말했습니다.

“아빠, 할아버지는 오늘 아주 시커멓고 낡은 책을 백만 원이나 주고 사셨어. 할아버지한테 그러시면 안 된다고 아빠가 말리면 안 될까?”

음식점을 하여 돈을 잘 버는 작은아버지가 마침 듣고 말했습니다.

“아버지는 은지만도 못 하시다니까. 돈을 주고 가지라고 해도 안 가질 고물 책을 돈을 주고 사시는 아버지는 이해할 수 없어. 안 그래요 형님?”

“글쎄다, 아버님이 좋아서 하시는 일을 누가 말리겠니.”

“형님은 무슨 말을 해도 글쎄다 글쎄다……”

은지 아빠는 언제나 할아버지 편을 드는 말을 합니다. 어쩌면 아빠도 할아버지 같은 바보인지도 모릅니다.

며칠 후 은지가 학교에서 나오는데 갑자기 소낙비가 내렸습니다. 우산이 없어서 할아버지 책방으로 달려갔습니다. 책방에는 언제 오셨는지 정수지 선생님이 오셔서 할아버지와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할아버지가 뚱뚱이 아저씨한테핮백만 원을 주고 산 고물 책을 내놓고 말했습니다.



4. 보물을 버리는 사람들

“요새 사람들 참 한심해요. 조상이 물려준 보배를 몰라보고 귀찮다고만 생각하고 마구 버리는 것을 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고쳐야 할 점은 그것뿐이 아닙니다. 건축물 등 문화재를 개발한다는 명목으로 얼마나 많이 허물어 버립니까.”

“이 책도 한심한 사람이 와서 거저 주고 갔어요.”

“네?” 

“그냥 주고 갔습니다. 거저 주고 가면서 좋아하더군요.”

“거저요? 이 귀한 것을 거저 주었단 말씀입니까?”

“네, 거저 주어서 그냥 받았습니다.”

은지는 할아버지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백만 원이나 주고 사시고 거저라고 하시니 할아버지는 건망증이신가 봐. 뚱뚱이 아저씨한테 돈을 주고도 잊으신 거야. 그러니까 할아버지는 틀림없는 바보야 바보.’


정수자 선생님은 비가 그치자 자리에서 일어섰습니다. 그 뒤를 따라 은지도 집으로 와서 아빠한테 말했습니다.

“아빠, 할아버지는 틀림없는 바보야. 바보,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야.”

“또 무슨 일이 있었기에 할아버지를 바보라고 하는 거냐?”

“할아버지가 백만 원을 주고 뚱뚱이 아저씨한테 책을 사셨다고 했잖아? 그런데 옆에 대영고등학교 정선생님한테 뭐라고 하셨는지 알아?”

“뭐라고 하셨는데?”

“할아버지가 백만 원 주고 책을 사셨는데 정선생님한테는  그 책을 거저 얻었다고 거짓말을 하셨어.”

“그러냐?”

“아빠가 할아버지께 여쭈어 보면 안 돼? 정말 거저 얻었느냐고.”

“알았다. 다음에 여쭈어 보지.”

은지 아빠는 빙긋이 웃으며 속으로 말했습니다.

‘또 누가 보물을 돌 값을 받고 갔군. 우리 아버지는 그래서 또 새 역사를 만드신다니까. 후후후’

“아빠, 지금 웃는 거야?”

“그래 웃는다.”

“왜?”

“할아버지가 또 귀한 물건을 얻으신 거다.”

“그건 귀한 물건도 아니야, 아주 낡은 책이야. 그걸 돈을 주고 사셨어, 아빠는 내 말을 못 알아듣고 있어?”

“알아들었다. 가서 공부나 해라. 내가 할아버지한테 여쭈어 볼게.”


토요일 오후입니다. 은지는 할아버지 책방으로 갔습니다.

책방 앞에는 고물을 실은 리어카가 있고 할아버지는 안에서 고물 줍는 아저씨와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은지가 가만가만 다가가도 할아버지는 그 사람과 이야기하느라고 은지가 온 것을 모르고 계셨습니다.

할아버지가 그 고물 장수 아저씨한테 물었습니다.

“이런 것들이 다 어디서 났소?”

“저 윗동네 새 아파트 있잖습니까? 그 아파트에 이사 온 사람이 새 가구를 들여놓으면서 이 물건들을 버렸습니다. 깨끗한 집에 이런 구질구질한 물건이 있으면 집안 분위기만 버린다면서 내다버리라고 저한테 주었는데 그냥 버리기가 아까워서 선생님한테 가져왔습니다.”

“그래 이 물건을 다 어떻게 할 작정이시오?”

“이 병풍은 쓰레기장에다 버리고 이 액자나 족자도 버릴 생각입니다. 이 책은 여기서 사 두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이런 고물을 제가 어디다 쓰겠습니까. 종이 값보다 조금 비싸게 쳐서 대포 값이나 좀 주시면……”

“알았습니다. 저 병풍도 이 액자 족자도 버릴 것 없이 여기 두고 가시오. 술값이나 좀 달라 하시니 종이 값으로 오만 원만 드리겠소. 그 대신 이 물건을 버렸다는 집 주소를 알려주시오.”

고물 장수는 할아버지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선생님, 이 책 훔쳐온 것 아닙니다. 정말 그 집에서 버린 것을 주워 왔습니다.”

“알겠소. 자, 이 돈이나 받고 그 집이 어딘지나 알려주시오.”

“이렇게 큰돈을 주신다니 고맙습니다. 네, 네, 여기 그 집 주소를 적어 둔 것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기분이 좋아서 리어카를 끌고 가며 콧노래를 불렀습니다.

할아버지는 그 물건들을 아주 소중히 할아버지만 들어가는 비밀 창고에 넣었습니다.

은지는 할아버지가 또 오만 원씩이나 주고 고물들을 사시고 좋아하는 것을 보고 말했습니다.

“할아버지 고물 또 샀어?”

“그래 또 샀다.”

“할아버지는 고물이 그렇게 좋아?”

“암, 좋고말고 넌 안 좋으냐?”

“그런 고물을 돈을 주고 사신 거야?”

“넌 어떻게 할애비가 고물 살 때만 맞추어 오느냐? 가만 있자. 네가 복덩이야. 네가 올 때만 되면 귀한 손님이 오신단 말야. 허허허허.”

“그게 무슨 복이야?”

“복이지. 복이고 말고.”

이때 정수자 선생님이 오셨습니다.

“은지 안녕? 할아버지하고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재미있게 하고 있나?”

“안녕하세요?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에요.”

“그래?”

“우리 할아버지는 바보라고 말하려는데 선생님이 오셨어요.”

“왜 할아버지가 바보실까?”

“할아버지는 남들이 버리는 물건을 돈을 주고 사시거든요.”

“그랬구나. 할아버님은 훌륭한 바보시란다.”

“바보가 훌륭할 수 있나요?”

“은지 말솜씨는 내가 못 당하겠는걸. 은지는 저쪽에 가서 앉아 있을래?”

정선생님은 할아버지 곁으로 가 앉았습니다.

“선생님, 지난번에 보여주셨던 책 있잖습니까? 그 책을 구하는 사람이 있어요.”

“그래요?”

“얼마나 쳐서 드려야 한다고 전할까요?”

“글세 올시다. 그 책 정도는 좀……”

5. 한 장

할아버지가 말을 얼버무리자 선생님이 말했습니다.

“한 장 정도면 될까요?”

“한 장이라, 정선생께서 그렇게 부르신다면 그렇게 하시지요.”

은지는 한 장이라고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몰라 머리를 갸웃거렸습니다.

‘한 장이 뭐야? 한 장? 한 장?’


정선생님은 전화를 하여 그 분을 오시라고 했습니다. 얼마 있지 않아 말끔한 차림의 신사가 나타났습니다.

정선생님이 두 분을 소개했습니다.

“그 책을 사시겠다는 분이십니다.”

할아버지는 그분을 바라보고 말했습니다.

“아직 이런 책에 관심을 가지실 연대가 아니신데 어떻게 이런 책을 구하십니까?”

“네, 실은 제가 사는 게 아니고 아버님이 사시고 싶어하는 책입니다.”

“아버님은 무얼 하시는 분이시오?”

“중앙물산이라는 회사 이사장이십니다.”

“아, 그 큰 회사 이사장님 자제분이란 말씀이시오?”

“예, 저의 아버님은 1600년대 이전에 발행된 책을 수집하는 취미를 가지고 계십니다. 그런데 선생님께서 1560년대 책을 가지고 계시다 하여 구하려 합니다.”

은지는 깜짝 놀랐습니다.

‘오오마, 우리 할아버지보다 더 큰 바보가 계시네……?’

할아버지는 기분 좋게 그 책을 내놓았습니다. 신사는 책을 보며 말했습니다.

“여기 약속하신 대로 한 장이 들어 있습니다. 보시지요.”

할아버지는 봉투에서 종이 한 장을 살짝 꺼내어 보고 책을 건네었습니다.

“서선생님, 앞으로 좋은 물건이 나오거든 연락주십시오. 책값은 얼마든지 요구하시는 대로 드리겠습니다.”

그 사람이 나가자 정선생님도 따라갔습니다. 은지는 할아버지와 둘이만 남았습니다.

“할아버지, 그 책 돈 받고 팔았지?”

“그래, 왜?”

“얼마 받았는데?”

“모른다.”

“한 장 받았잖아?”

“그래, 왜?”

“한 장이 뭐야?”

“한 장이 한 장이지.”

“오만 원?”

“그래.”

“그 책 100만원 주고 산 건데 5만 원 받고 팔았어?”

“그래, 왜?”

“할아버지는 바보야 바보.”

“할아버지가 바보면 넌 바보 손녀 맞지?”

 

그날 저녁 은지는 아빠한테 말했습니다.

“할아버지가 백만 원 주고 산 책을 오만 원에 팔았대.”

“그러냐?”

“겨우 한 장 받고 팔았다는 거야.”

“한 장만 받으셨다더냐?”

“그렇가니까. 두 장도 아니고 한 장이 뭐야.”

아빠는 빙긋이 웃으며 중얼거렸습니다.

“한 장이라. 천이야? 억이야?”

6. 할아버지는 못 말려

은지가 할아버지 책방에 갔을 때 허리가 구부정한 노인이 왔습니다.

“주인장 좀 뵙시다.”

할아버지가 안에서 나오셨습니다.

“여기서는 오래 된 책만 취급하신다지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1950년대 이전의 책이면 사고팝니다.”

“참 좋은 일을 하시오. 그래 장사는 잘 됩니까?”

“밥은 굶지 않을 정도로 됩니다. 취미지요.”

“취미라 하시니 참 행복하십니다.”

“행복합지요. 좋아하는 책들을 모아 놓고 있으니 아주 즐겁습니다.”

“저도 취미로 고서를 수집했는데 모아 놓기만 하다 보니 입에 풀칠하기가 어렵습니다. 더 이상 고서를 안고 있을 수가 없어서 이렇게 찾아 왔습니다.”

“고서가 얼마나 됩니까?”

“1900년도 이전 책만도 한 리어카는 될 것입니다.”

“그런 것이라면……”

“그래서 말인데요, 요새 우리 아들 사업이 부진하여 제가 사는 집을 처분하여 사업자금으로 돕다 보니 저는 작은 집으로 셋방을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이제 책을 쌓아둘 자리마저 없습니다. 둘 곳도 없는 책이니 처분하여 볼까 합니다.”

“그럼 한번 가지고 와 보시지요.”

노인은 나갔다가 한참 만에 리어카에다 책을 가득히 싣고 왔습니다.

“젊어서 이것들을 수집할 때만 해도 즐거웠는데 이렇게 늙고 보니 짐이 될 뿐입니다.”

은지 할아버지는 책들을 이리저리 펴보고 살피고 나서 말했습니다.

“쓸 만한 책이 좀 있습니다. 얼마나 쳐 드리면 될까요?”

“뭐라고 할 수는 없고 적당히 쳐주시지요.”

“책의 가치로 말하면 십억을 주어도 모자라는 것이지만……”

“그렇게야 나가겠습니까. 주인장 생각대로만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할아버지는 그 한 장이 든 봉투를 들고 나왔습니다.

“큰돈은 아니지만 이 정도면 노인께서 노후를 편히 지낼 수 있으실 겁니다.”

노인은 봉투를 받아 열어보고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

“아아니! 이렇게 큰돈을 주십니까?”

“노인장께서도 이만한 책을 구하실 때는 이보다 더 큰 수고와 돈이 들었을 것입니다.”

노인은 굽은 허리를 코가 땅에 닿도록 숙이고 굽실거렸습니다.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노인은 허리를 고추 세우고 아주 힘있게 걸어 돌아갔습니다. 할아버지는 그 모습을 보며 빙긋이 웃으셨습니다.

‘얼마나 되는 돈인데 할아버지는 저 헌책들과 바꾸셨을까?’

은지는 그 한 장이 얼마나 큰돈인지 상상을 할 수 없었습니다.

“할아버지 또 이 헌책을 한 장 주고 사셨어요?”

“그래 한 장 주고 샀다.”

“한 장이 얼마인데요?”

“넌 알 것 없어. 쪼그만 것이 언제부터 돈 따지기를 배웠느냐?”

“나면서부터 배웠지롱. 호호호호.”

“녀석두…… 할아버지는 여기 앉아서 거저 주는 책 맡았다가 또 필요한 사람한테 거저 주고 돈을 조금 받는다.”

“할아버지는 바보야. 수지맞는 장사를 해야지.”

“허허허허.”

할아버지는 은지를 안아주며 웃으시기만 했습니다.


그 날 밤 은지는 아빠한테 또 일러바쳤습니다.

“아빠, 할아버지는 정말 바보야. 오늘 어떤 노인한테 아주 묵은 책을 한 리어카를 받고 그 때 받은 한 장을 내주었어.”

“한 장을?”

“며칠 전에 받은 한 장을 주고 고물을 잔뜩 샀다니까.”

“할아버지는 고물 사는 재미로 사시는 분이야. 알겠니?”

이때 작은아버지가 들어와 은지가 하는 이야기를 듣고 말했습니다.

“형님은 언제나 아버지 편만 드시지만 세상은 그렇지 않아요. 우리 식당도 전보다 못해요. 장사가 안 되어 문 닫을 지경이라고요.”

“그렇게 어렵다고?”

“아버지가 고물 책 사들이는 돈을 나한테 투자하시면 내가 식당을 더 크게 차리고 돈을 펑펑 벌 텐데, 우리 집은 아버지 고물책장사 때문에 망할 거예요.”

“그런 말 하지 마라. 그래도 아버지가 헌 책방을 하시어 우리 남매들을 기르고 가르치셨다.”

“난 아버지 하시는 일은 반대예요.”

은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할아버지는 헌 책을 사들이는 바보 같으니까요. 누가 그 누더기 책을 돈을 주고 삽니까. 버려도 안 집어갈 책을 돈을 주고 사는 건 바보가 하는 일이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아빠마저 할아버지를 닮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은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빠, 작은아버지 말씀이 맞아. 아빠가 할아버지한테 고물 책을 그만 사시라고 말하면 안 돼?”

7. 고구마 추억

“아들은 아버지가 좋아서 하시는 일은 같이 즐거워하고 도와드리는 것이 효자의 할 일이야, 넌 효도가 무슨 뜻인지 알겠니?”

“뭐, 아빠 엄마한테 잘하는 거 아니야?”

“그래, 그런 거다. 아빠 엄마한테 잘하는 것에는 여러 가지가 있단다. 말 잘 듣고 공부 잘하는 것은 아이들 때 하는 효도이고, 어른이 되면 아들은 부모님이 하시고자 하는 뜻을 이루어 드리고, 그 계신 곳에서 마음 편히 지내게 해 드리고, 잡수시는 음식을 맛있게 해드리고, 주무시는 곳을 따듯하게 해드리며, 정갈하고 따듯한 옷을 해드려야 한다. 그리고 부모님 곁을 떠날 때는 반드시 어디를 갔다 오겠다고 말씀드리고 돌아와서는 반드시 잘 다녀왔다고 말씀드리는 것이 효행이란다.”

“그래서 아빠는 할아버지가 하시는 일을 반대하지 않는 거야?”

“그렇지, 할아버지가 좋아서 하시는 일은 같이 좋아하는 것이 아들이 할 도리란다.”

곁에서 듣고 있던 작은아버지가 나가면서 불만스럽게 말했습니다.

“형님이나 효도 잘 하시우.”

은지는 작은아버지가 하는 말이 다 맞다고 생각했는데 아빠한테 그렇게 말하시는 건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아빠, 난 효도를 잘 할 거야. 무엇이든지 아빠가 좋아하는 것은 나도 좋아하면 되는 거네?”

“알았다. 가서 공부 잘하고.”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왔습니다. 할아버지는 날마다 퀴퀴한 책 냄새가 밴 책방에서 언제나 웃으시며 여름을 보내시었고 은지는 할아버지 바보, 할아버지 못 생겼어 하면서도 곁에 찰싹 붙어 놀았습니다.

할아버지는 화를 내실 줄 모르십니다. 사람들이 헌 책을 가지고 오면 달라는 대로 돈을 주고 똑같은 말을 하셨습니다.

“거저다 거저.”

그럴 때마다 은지도 똑같은 말을 했습니다.

“돈 주고 샀잖아, 할아버지 바보.”

“넌 모른다. 다들 모르는 거야. 자기가 가지고 온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모르고 있어. 그 소중한 것을 싸게 샀으니 공짜 아니냐?”

“난 그런 책 돈하고 같이 주어도 돈만 가질 거야.”

“허허, 너도 이 담에 커 봐라. 할아버지를 닮아서 이런 책이 얼마나 귀한지를 알게 될 게다.”

“난 할아버지 안 닮을 거야. 난 새 책을 파는 동양문고, 동양서적센터를 할 거야.”

“그것도 좋다. 그렇게 하거라.”

이때 먼저 번에 왔던 젊은 신사가 들어왔습니다. 그 큰 회사 이사장의 아들이라는 사람입니다.

“서선생님 안녕하세요?”

“어서 오시오. 무슨 볼일이 있으시오?”

“요새 뭐 좋은 자료가 안 들어왔습니까?”

“들어온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니 어떤 것을 말해야 할지 모르겠소.”

“목록을 좀 보여주시겠습니까?”

“그렇게 하시오.”

할아버지는 컴퓨터 앞에 가서 그 동안 새로 산 책 목록을 보여주며 말했습니다.

“이것들이 모두요.”

“선생님은 연세도 많으신데 컴퓨터도 잘하시네요.”

“필요한 것만 할 줄 알지요.”

“그 목록을 프린트해 주실 수 있나요? 그러시면 그것을 저의 아버님께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그렇게 하시오. 가지고 가서 보고 구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다시 오시오.”

은지는 아직 컴퓨터를 못 합니다. 그런데 할아버지는 컴퓨터를 아주 잘 하시고 거기다 글도 쓰십니다.

“할아버지는 바보인데 딱 하나는 아니야.”

8. 할아버지 짱


“무엇이 아니냐?”

“다른 집 할아버지들은 컴퓨터를 못하는데 우리 할아버지는 잘 하잖아.”

“그것이 할아버지가 바보가 아니라는 거냐?”

“응! 우리 할아버지는 짱이야!”


그리고 며칠이 지났습니다.

은지가 할아버지와 햇고구마 찐 것을 수북이 쌓아 놓고 먹는데 큰 회사 아들 신사가 나타났습니다. 젊은 신사가 들어오고 그 뒤를 따라 배가 불룩 나온 대머리 사장이 따라 들어왔습니다.

할아버지가 일어서며 맞았습니다.

“어서 오시오.”

인상 좋은 대머리 신사가 코를 벌름거리며 할아버지를 향해 웃어 보였습니다.

“아, 책 냄새 좋다, 참 좋아…. 그런데 더 좋은 냄새가 나는데 주인장 혼자만 잡수시겠소?”

할아버지는 밀어 넣었던 고구마 접시를 내보이며 말했습니다.

“죄송합니다. 별것도 아닌 겁니다.”

큰회사 사장이라는 대머리 영감이 활달하게 말했습니다.

“죄송해 하실 것 없습니다. 다 같이 늙어가면서 뭘 따집니까. 죄송하지만 그 고구마 저도 좀 먹게 해주시면 어떠실는지요?”

“사장님께서 좋으시다면 드려야지요.”

할아버지가 내민 고구마를 받아든 사장님은 코에다 대고 고구마 냄새를 맡으며 말했습니다.

“아! 이 냄새! 먼 추억의 냄새입니다. 육이오 때 이것도 제대로 못 먹고 배가 고파 부모님 속을 썩여 드리기도 했는데 바로 그 냄새입니다.”

“그러셨군요. 저도 어려서 고구마라도 실컷 먹었으면 소원이 없겠다고 생각하며 자랐지요. 그래서 지금도 햇고구마만 나오면 남들보다 먼저 사다가 먹는답니다.”

할아버지와 사장님은 고구마를 먹으면서 금방 친숙해졌습니다. 은지는 저렇게 생긴 어른도 고구마를 먹을 줄 아나 보다고 생각하며 신기해서 바라보았습니다.

사장님이 책방 안을 둘러보며 말했습니다. 

“지금은 헌 책방이 다 없어지고 새 책 서점들만 대형화되는데 영감님은 이렇게 고서점을 하고 계시니 애국자이십니다.”

“별 말씀을 다 하십니다.”

“제가 듣기로는 영감님 고집이 대단하시다고 하던데 만나 보니 그렇지도 않은 것 같습니다.”

“저는 우리 손녀한테 바보 소리만 듣고 산답니다.”

은지는 깜짝 놀랐습니다. 낯선 할아버지 앞에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부끄러웠습니다.

“손녀시군요. 아주 예쁘게 생겼습니다. 몇 살이냐?”

은지는 부끄러워서 대답도 못했습니다. 할아버지가 대신 대답했습니다.

“일곱 살이랍니다. 금년에 초등하교에 들어갔지요.”

“공부도 잘하게 생겼습니다.”

“예, 공부를 아주 잘합니다.”

“보내주신 도서 목록을 보니 모두 욕심이 납니다.”

“고서를 많이 좋아하시는군요.”

“예, 그래서 우리 회사에 고서 박물관을 만들 생각으로 고서를 구하고 있습니다. 이제 고서보다 더 귀한 것이 고서점입니다. 고서점이 없어지면 고서가 갈 곳을 읽게 되고 옛 정신문화가 사라지는 것 아니겠습니까.”

“말씀이 맞습니다. 사장님같이 뜻이 있으신 분이 회사 차원의 고서 박물관을 만드시겠다니 듣던 중 반가운 말씀입니다.”

“그렇게라도 고서를 소장해야 할 것 같아 이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바쁘신데 긴 말씀 드리기는 그렇고 일단 흥정이나 하십시다, 하하하하.”

“좋으실 대로 하시지요.”

“이 목록에서 도저히 팔 수 없는 책이 혹시 있습니까?”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을 빼고는 다 드릴 수가 있습니다.”

9. 일곱 장

“바로 이 책은 당분간 제가 가지고 있을 생각입니다.”

“저도 그 책이 가장 욕심이 나는데 하필이면 왜 그 책을……”

“사정이 있습니다.”

“그 책값을 더 많이 받고 싶은 것이라면 그렇게 대접해 드리겠습니다.”

“아닙니다. 사정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거저 드릴 수도 있습니다.”

“저도 거저는 안 가져갑니다. 좋습니다. 그것만 빼고 얼마나 쳐드릴까요?”

“저보다 고서적에 조예가 깊으시니 알아서 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그럼, 제가 정해도 오해는 안 하시는 거지요?”

“예 좋습니다.”

“일곱 장만 받으시지요.”

“그렇게나 많이요?”

“아닙니다. 열 장은 드려야 되는 줄 알지만 좀 야박하게 깎았습니다.”

사장님은 지갑에서 종이 일곱 장을 내밀었습니다. 할아버지는 허리를 굽실거리며 두 손으로 받았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이것만 빼고 다 내드리겠습니다.”

대머리 사장님은 책을 차에 싣고 떠나면서 말했습니다.

“더 좋은 책이 나오면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 서점 안에 가지고 계신 책 중에 귀한 것을 주시겠다고 하면 언제든지 섭섭하지 않은 값으로 가져가겠습니다.”

할아버지는 아주 기분이 좋은 얼굴입니다. 옆에서 본 은지도 그 일곱 장이 얼마나 되는 것인지 몰라도 기뻤습니다.

“할아버지 돈 벌었네?”

“그래 벌었다.”

“얼마야?”

“일곱 장.”

“일곱 장이 얼마냐고?”

“그냥 일곱 장이라고만 알아라. 넌 그것만 알면 되는 거야.”


그 날 밤 은지는 아빠한테 말했습니다.

“아빠, 지난번에 할아버지가 고물 책 한 리어카를 한 장 주고 샀다고 했지?

“그랬지. 무슨 일이 있느냐?”

“그것을 일곱 장 받고 대머리 사장님한테 팔았어.”

“일곱 장?”

“그렇다고요. 아빠가 할아버지한테 물어 봐.”

“어른들이 한 일을 어린이가 이것저것 묻는 거 아니다. 어른들이 하시는 일은 가만히 보고만 있으면 되는 거야. 아빠도 할아버지한테 그런 것까지 묻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야.”

“그런 것 안 물어보는 것도 효도야?”

“그래, 어른들이 가르쳐주시기 전에는 조용히 있는 것이 예의다.”

“알았어, 아빠. 그런데 왜 자꾸 알고 싶어지지?”

“어렸을 때는 그런 거야. 그래서 어려서는 많은 것을 배우게 된단다.”


그날 밤 할아버지와 아빠가 안방에서 작은 소리로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은지는 가만히 귀를 기울였습니다.

아빠가 하는 말입니다.

“아버님 좋은 일이 있으신가 봅니다.”

“왜?”

“가만히 계셔도 얼굴에 웃음이 얹혀 있습니다.”

“있지, 지난번에 한 장 주고 산 책들을 오늘 일곱 장을 받았다.”

“일곱 장이나요? 한 장 주고 사셨다고 하시잖았습니까?”

“그랬지. 그런데 일곱 장이 문제가 아니다. 웬 돈 많은 사람이 타나나서 우리 가게를 통째로 사 갈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네?”

“그 사람이 자기 회사에다 고서적 박물관을 만들겠다는 게야. 그런데 이번에 우리 가게에 와서 둘러보는 눈치가 우리 책을 다 사가고 싶은 눈치였어.”

“그랬으면 얼마나 다행이겠습니다.”

“다행일 것도 없지. 만약 그 책들을 그 사람이 다 사가고 난다면 난 빈 가게에서 무엇을 하겠는가.”

“다시 헌책을 사들이면 되지 않을까요?”

“헌책이 무한정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떤 책은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도 있으니까.”

“돈이 문제지 돈만 있으면 무엇은 못하겠습니까.”

“아니야. 난 돈이 있어도 무엇을 다시 하고 싶지는 않아.”

“아버님 좋으신 대로 하시지요.”

“내가 그 책을 모은 것이 오십 년이고 할아버지 아버님이 모은 세월을 보태면 백년이 넘는다.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책은 거의가 삼백 년을 넘은 것도 많거든. 아무리 돈을 준다 해도 할아버지가 소중히 간직하고 팔지 않은 책이 있고 아버님이 아까워서 못 팔고 가지고 계시다가 나한테 넘긴 책이 있다. 그것을 내가 돈하고 바꿀 수는 없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아버님.”

 

10. 독서의  계절

은지는 할아버지 가게로 들어서자마자 물었습니다.

“할아버지, 독서의 계절이 뭐야?”

“그 말을 어디서 들었느냐?”

“선생님이 그러셨어. 지금은 독서의 계절이라고. 그게 무슨 말이야?”

“지금이 바로 독서의 계절이란다.”

“지금이?” 

“그래, 이렇게 가을이 되면 날씨가 선선하여 책읽기에 아주 좋은 때란다. 그래서 가을을 책 읽는 계절이라고 하는 말이다.”

“가을이라고 책을 더 읽는 사람은 못 보았는데?”

“옛날에는 가을에 책 읽는 사람이 많았단다. 그러나 지금은 독서의 계절이라도 사람들이 책을 안 읽으니 독서의 계절도 없어진 것 같다.”

“사람들이 왜 책을 안 읽어?”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책보다는 텔레비전이나 인터넷에 빠져서 책을 멀리하기 때문이다.”

이때 옆집 새나라문고의 젊은 주인이 왔습니다.

“서사장님 안녕하세요?”

“어서 와요. 바쁘신 분이 웬일로 우리 책방을 다 찾아오셨소?”

“사장님은 경기가 어떻습니까?”

“그냥 저냥 심심하지는 않소만. 요새 새 책들이 많이 나와서 신간 서적 서점은 활기차지요?”

“신간만 많이 나오면 뭘 합니까.”

“그게 무슨 말이오?”

“독자가 줄어들어서 시간 서점도 못하겠습니다.”

“출판사들이 위탁한 것, 팔리면 돈 주고, 안 팔리면 반품하는, 그렇게 안전한 장사도 없는데 무슨 문제가 있겠소.”

“그렇지도 않습니다. 저는 더 이상 서점을 하기 힘들어서 사장님을 뵙고 드릴 말씀이 있어서 왔습니다.”

“나 같은 게 무얼 안다고 물어볼 게 있겠소.”

“저는 문을 닫을 지경입니다. 그래서……”

“문을 닫다니?”

“이번 주 토요일에 어음이 돌아오는데 막을 길이 막막합니다.”

“손님이 줄을 이어 들락거리는데 그만한 돈이 없단 말이오?”

“아무리 많이 팔아도 인건비며 건물 임대료 등등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겉보기는 그럴 듯하지만 다른 서점들도 다 문 닫기 일보 직전입니다. 요새는 대형서점이 생기면서 독자들이 그리로 몰리고 우리 같은 변두리 서점은 힘듭니다.”

“오, 오……”

할아버지는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오오만 하십니다. 은지는 어른들의 말을 들으며 생각했습니다.

‘우리도 저렇게 새 책만 파는 문고를 하면 얼마나 좋을까 했는데 새나라문고가 어렵다고?’

어른들이 하는 말이라 다 알 수는 없지만 새나라문고가 많이 어려운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서사장님은 삼대 째 하시는 서점이라 안전하시지요?”

“날 보고 사장님이라고 하지 마오. 우리 책방은 올해로 120년을 이 자리에서 해왔지만 내 할아버님도 아버님도 사장이라는 소리를 안 들으셨소. 이 작은 고서점하는 사람이 듣기에는 부담스런 호칭이오. 그냥 영감님이라고 부르시던지 그것도 아니면 서선생이라고 불러 주시오. 선생도 가르치는 선생이 아니라 먼저 세상에 나왔으니 선배님이라는 의미 말이오. 요새 사장이라는 말 너무 많이들 써요. 아무나 사장이니 난 그 소리를 들으면 부끄럽고 낯 뜨거워서……그냥 ‘책방 영감’ 하고 부르는 것이 듣기 편하오.”

은지는 할아버지 말씀이 옳은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무 가게나 주인을 사장님이라고 부르는 것을 보았고 혼자 가게 하는 사람도 사장이냐고 하는 말도 들은 적이 있었지요.

새나라문고 주인이 말했습니다.

“웬만하시면 저의 문고를 맡아 보시면 어떠실는지요?”

“내가 그 문고를?”

“네, 아무리 생각해도 저의 문고를 맡으실 만한 분은 선생님밖에 없을 것 같아서요.”

“그건 안 될 말이오, 하지만 하나 물어봅시다. 얼마나 있으면 문고를 제대로 운영할 수 있겠소?”

“적어도 넉 장은 있어야 합니다.”

“넉 장이라…… 처음에 얼마나 가지고 시작하시었소?”

“다섯 장 가지고 시작했지요. 선생님이 인수를 생각해 보시지요.”

“난 헌 책방이 좋소. 이것은 우리 가업이었으니 다른 생각을 하고 싶지는 않소.”

은지는 할아버지가 새나라문고를 맡아 하시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면 반 아이들한테도 자랑하고 선생님께도 자랑할 수 있으니까요.

‘할아버지, 우리가 새나라문고하세요.’

은지는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할아버지는 퀴퀴한 냄새만 나는 헌 책방을 너무 좋아하십니다.

할아버지는 한참 생각한 다음 이렇게 말했습니다.

11. 바보 할아버지

 “내 생각인데 말이오. 지금은 서점도 전문화하는 게 좋을 것 같소. 다양한 책을 다 수용하자니 매장도 넓혀야 하고 그에  따른 관리 직원도 더 있어야 하고, 이래저래 비용이 많이 나게 마련이오. 그 서점에서 가장 많이 팔리고 주인이 관리하기 쉬운 책을 중심으로 전문 서점으로 전환해 보시오. 그러면 될 것 같소.”

“옳은 말씀입니다. 저는 서점을 내고 십 년을 못 넘기는데 이 동양서점은 백년이 넘으셨으니 본받고 배워야 할 점이 많습니다.”

“예전에도 전문서점은 그런대로 되었지만 그렇지 못한 서점은 오래 가지 못하였소. 우리 책방도 고집스럽게 1950년대 이전 책만 취급한 것이 밑천이 되었던 것이오. 같은 고서점이라고 다 잘 된 것은 아니오. 아무 것이나 헌 책을 다 사들이고 팔다 보면 특성이 없어서 단명할 수밖에 없어요. 전국에서 고서를 구하는 사람이나 고서를 내놓는 사람은 우리 집을 먼저 찾아오고 있는 것도 그 특성 때문이오.”

“네, 알겠습니다. 저도 전문문고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하지만 당장이 문제입니다.”

“넉 장이면 문제를 해결하고 전문서점으로 바꿀 수 있겠소?”

“할 수 있습니다. 실은 저도 전문서적을 해 보고 싶었는데 하다 보니 이렇게 되었습니다.”

“종합도서는 대형 서점에 맡기고 소형서점은 전문성을 가지고 하는 것이 좋을 것이오. 전문서적을 취급하자면 일반서적의 유혹을 물리치고 고집스럽게 외길을 가야 하오. 만약 우리 책방이 1950년도 이후 발행된 책 중에 수익성 있는 책이라고 하여 마구 받아들였다면 이 공간으로는 장사를 할 수도 없었을 것이오. 그러나 어떤 일이 있어도 발행 연도를 따지고 고집스럽게 하다 보니 할아버지 때부터 혼자 해도 할 수 있었소.”

“존경스럽습니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내가 넉 장을 주겠소.”

“정말이십니까?”

“내 말대로 했다가 사업이 안 되면 어쩔 수 없고 잘 되면 이자를 쳐서 갚으시오.”

가만히 듣고 있던 은지는 깜짝 놀랐습니다. 어른들이 하는 말이라 다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할아버지가 넉 장을 주시겠다는 말은 분명히 이상합니다.

꾸어주는 것도 아니고 그냥 준다고 하시는 것 같습니다. 새나라서적 주인이 가고 난 다음 은지가 참지 못하고 물었습니다.

“할아버지, 넉 장을 그냥 주시겠다고요?”

“그래.”

“거저요?”

“그래, 거저다.”

“할아버지, 그러시면 안 되지요.”

“왜?”

“가져 가지고 가서 안 갚으면 어떡하실 건데요?”

“안 갚는 게 아니고 못 갚으면 할 수 없지 않으냐?”

“그러시면 안 돼요 할아버지.”

“괜찮다, 할아버지는 한 장 주고 일곱 장 받았고 그 중에 넉 장을 주어도 석 장이 남지 않았느냐.”

“할아버지는 바보야 바보.”


그 날 집에서 은지는 아빠한테 또 일러바쳤습니다.

“아빠, 할아버지는 정말 바보야.”

“왜? 무슨 일이 있었니?”

12. 할아버지는 멋진 선생님

“할아버지한테 물어 봐. 할아버지는 정말 바보야.”

그 날 밤 할아버지가 아들을 서재로 불렀습니다. 은지는 할아버지가 또 무슨 말씀을 하실까 궁금하여 밖에서 귀를 기울였습니다. 할아버지가 말했습니다.

“나 좋은 일 한 번 하고 싶은데 들어볼래?”

“네, 아버님.”

“우리 책방 옆 새나라문고 주인이 찾아와서 날 보고 그 서점을 인수해 보라는 거야.”

“그래서요? 그런 사정이라면 서점을 싸게 인수할 수 있겠지요?”

“그 사람의 약점을 이용하려면 그럴 수도 있지. 그러나 인수할 생각은 없고 그 젊은이는 언제 보아도 성실해 보이기에 운영자금을 도와주기로 했다.”

“얼마나 도와주시려고요?”

“넉 장.”

“넉 장씩이나요?”

“그래, 많으냐?”

“많지요.”

“그래도 나는 아직 석 장이나 남는다.”

“담보나 약정서는 작성하셔야지요?”

“다 필요 없는 거다. 담보도 약정서도 사업이 무너지면 아무 소용없는 거야. 인간의 신뢰와 성실성이 담보이고 약정서여야 한다. 넌 그렇게 생각하지 않느냐?”

“그렇기는 하지만……”

“성실하고 근면한 젊은 사람한테는 기대해 볼 만한 가치가 있는 거다. 어려울 때 좋은 충고와 도움을 주면 어떤 어려움에서도 성공할 수 있지만 어렵다는 것을 알고 이쪽에서 이용하면 안 된다.”

“동생이 알면 섭섭해 할 것 같아요. 그 애도 요새 장사가 안 된다고 한 장만 도와 달라고 사정하는 중인데……”

“그러냐?”

“차라리 그 넉 장을 아우한테 투자해 주시면 어떠실까요?”

“알았다. 내 그 애한테 한 장을 도와주마. 넌 돈이 안 필요하냐?”

“돈이야 있으면 얼마든지 필요한 거 아닙니까.”

“그렇지. 너도 한 장 주마.”

“예? 아버님은요?”

“나도 한 장 남지 않느냐?”

“남 도와주자고……”

“괜찮다, 마음으로 마음을 사면 실수가 없지만 돈으로는 사람을 못 산다. 돈으로 살 수 있는 사람이 있고 돈으로 살 수 없는 사람이 있어. 난 그 젊은이를 나는 마음으로 사고 싶은 거다.”

“아버님은 고서점을 하시면서 철학만 하신 것 같습니다.”

“철학은 생활 속에서 얻어지는 진리지, 이론으로 얻는 철학은 학문일 뿐이야.”

“그렇지만, 아버님 몫이 너무 적습니다.”

“내 몫? 내 몫은 본시 5만 원밖에 없었다. 그 5만 원이 한 장이 되었는데 그만하면 큰 장사한 것 아니냐?”

“아버님 좋으실 대로 하십시오. 저는 아무것도 드린 것 없이 한 장을 주신다니 그보다 더 큰 수입이 어디 있습니까.”

“네가 나한테 준 마음은 돈으로 계산할 수 없이 크다. 됐다. 네가 나를 이해하고 바보 소리 안 하니 고맙다. 이 애비를 이해하여 주는 네가 난 좋아.”

“아버님은 저한테 아버지이시고 선생님이시잖아요.”

은지는 할아버지가 바보라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아주 훌륭한 선생님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할아버지는 좋으신 분이야. 아빠가 할아버지를 선생님이라고 부르셨잖아. 다른 사람들도 자기 아빠를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있을까? 나도 아빠 보고 선생님이라고 해야지.’

은지는 동네 친구들한테 큰 소리로 할아버지를 자랑하고 싶어졌습니다.

“우리 할아버지는 세상에서 가장 멋지고 훌륭한 선생님이다!”

이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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