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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나의 유럽여행기 21 / 암스텔담의 안네 프랑크 기념관

웃는곰 2010. 8. 14. 05:41

네덜란드에서 유명한 곳  가운데 하나가 안네의 일기를 쓴 안네  프랑크가 나치를 피해 숨어 살았던 집이다. 안네가 살던 집은 안네 기념관 안에 있다.

암스텔담은 중앙역을 중심으로 부채꼴로 빙빙 돌아가며 파놓은 운하가 명물이다.

중앙역 앞은 세계 각국에서 몰려든 관광객으로 붐볐고 전차가 줄을 이어 들어오고 나가는가 하면 같은 선로 위를 버스가 비집고 다니고 사이사이 승용차도 어울려 사람과 차가 매우 혼란스러웠다.

그 바로 역과 운하를 도는 관광 유람선이 연이어 운하에 있어 차 타려는 사람 배 타려는 각국각종 인종이 서로 다른 말로 지껄이며 무리져 있는 사람도 구경거리, 그것도 재미있었다.

 

 

 

 

 

중앙 광장에는 인파의 물결

 

 

교회와 성당이 둘러 있는 광장과 기념탐

 

 

약간 한가한 곳에서 사람 구경하는 곰

 

 

 

안네가 2년간 숨어 살았던 집/ 안네 기념관  문패 앞에서 

 

안네  프랑크에 대하여

 

* 출생 1929년 6월 12일(1929-06-12) / 독일 프랑크푸르트

* 사망 1945년 3월 12일 (15세) / 유대인 강제수용소 베르겐 벨젠에서 병으로 죽음.

* 국적  독일

* 주요 작품 《안네의 일기》


아넬리스 마리 프랑크 또는 안네 프랑크는 독일의 유대인 소녀로 나치가 네덜란드를 지배한 시기에 쓴 일기로 유명. 그 일기는 한국어로는 《안네의 일기》라는 제목으로 출판. 애칭 안네(Anne)로 불림.

안네의 일기에 따르면 안네는 1929년 독일의 상업도시 프랑크푸르트에서 유대인 은행가 오토 프랑크(Otto Frank)와 어머니 에디트(Edith) 사이에서 태어났다. 1933년에 나치당의 히틀러가 독일의 정권을 잡으면서 유대인들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자, 삼촌들은 미국으로 망명하였으며, 안네 프랑크의 가족은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으로 망명했다. 몬테소리 학교에서 개별 자유 수업을 받았으며, 중학교는 유대인 중학교에 진학하였다. 그 이유는 1938년 이후 유대인들을 유럽사회에서 소외시키려는 나치의 인종차별 실시로, 학교 진학에서도 차별을 받았기 때문이다. 13세 생일에 (후에 《안네의 일기》라고 불리게 된) 붉은 체크무늬 일기장을 선물로 받았다. 안네는 일기장을 “키티”(Kitty)라고 이름을 지어주었으며,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시작으로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안네 프랑크의 생전 모습

1944년 8월 4일 밤, 익명의 밀고를 받은 나치의 게슈타포는 이 은신처를 급습하여 8명 전원을 체포하고 안네의 가족을 유대인 강제수용소로 이송했다. 그래서 안네의 일기는 1944년 8월 4일로부터 불과 3일 전인 8월 1일에서 끝나 있다.


안네의 일기 해설에 의하면, 안네의 가족을 잡아간 나치의 게슈타포 카를 실베르바우어는 훗날 검거되었다. 안네의 가족을 고발한 밀고자의 신분에 관해서 지금까지 서너 가지 추측이 있었다. 이를테면 창고지기가 한 사람당 5길더를 받고 밀고를 했다는 설이 있는데, 모두 이를 뒷받침하는 증거는 없다. 안네는 16세의 나이로 1945년 3월에 유대인 강제수용소 베르겐 벨젠(Bergen-Belsen)에서 영양실조와 장티푸스로 죽었으며, 어머니는 정신이상으로 죽었다. 언니 마르고트도 장티푸스으로 죽었는데, 그녀의 죽음을 본 안네가 상심이 커서 죽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안네의 가족 가운데 아버지 오토만이 옛 소련군의 수용소 해방으로 생명을 건졌는데, 네덜란드로 돌아온 그는 '이제 두번 다시 이런 비극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며 안네의 일기를 책으로 출판했다.

안네가 쓴 일기는 1947년에 아버지 오토의 편집(안네의 성(性)에 대한 사춘기적 관심이 드러나는 부분, 부모와 은신처의 다른 가족을 비난하는 부분이 삭제되었다.)을 거쳐 출판되었으며, 이 일기는 약 60개 국어로 번역되어 약 3천 2백만 권이 팔린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이중 한국어판은 안네 아버지가 편집한 원고를 출판해오다가, 원고를 모두 번역한 무삭제판이 안네가 습작한 단편소설들과 함께 출판되었다. 안네의 가족이 피신하여 살던 집은 현재 안네 기념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안네 프랑크 기념관을 찾은 사람들이 300미터 정도 늘어서 있다(매일 수천 명이 모여 든다고)

 

 

운하를 내려다보고 있는 교회

 

 

 

무궁화

 

여기도 무궁화가/ 나라마다 다니면서 한 나라에서 한 그루씩을 보았을 뿐

여러 그루가 있는 것은 보지 못했다. 

나는 돌아다니면서 여러 꽃을 보지만 특히 무궁화를 열심히 찾았다.

신경을 써서 이 나라에도 무궁화가 있나 하고 찾았고 무궁화는 나를 반겼다.

에펠탑 거리 모퉁이에 목이 말라 어깨가 출 처진 무궁화에 물을 주지 못하고

사진만 찍은 나는 지금도 안쓰러운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반 고흐 박물관 옆을 지나면서

 

 

네덜란드 국립 박물관 앞 광장 잔디밭

 

 

서북부 유럽  교통의 요지 / 비행장이 도심에 있고 고속도로를 가로질러 놓인 활주로 위로  육중한 비행기가

느릿느릿  건너가고 있었다.

 

 

출처 : 문화예술인신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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