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방/동화

노랑머리 키다리

웃는곰 2009. 12. 24. 18:38

노랑머리 키다리


심혁창 지음













                          도서출판 한글
















노랑머리 키다리

 

2009년 12월 20일 1판 1쇄 인쇄

2009년 12월 25일 1판 1쇄 발행

지은이 심 혁 창

발행자 심 혁 창

발행처 도서출판 한글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북아현동221-7

☎ 02) 363-0301 /영업부 02-362-3536

FAX 02) 362-8635

E-mail : simsazang@hanmail.net

등록 1980. 2. 20 제312-1980-000009

△ 본사는 반기독교서적은 발행하지 않습니다.

△ 파본은 교환해 드립니다.

IN GOD WE TRUST

정가 9,000원

 

ISBN 978-89-7073-306-7-83830

머리말



세계 여러 나라 글자 가운데 우리 한글만큼 훌륭한 글자는 없습니다.

영어나 일본어나 한자나 히브리어나 헬라어가 널리 알려져 있기는 하지만 우리 한글만큼 소리를 정확히 적을 수 있는 글은 없습니다. 우리글은 새소리도 적을 수 있고 물소리도 적을 수 있으며 바람소리마저 적을 수 있는 훌륭한 글입니다.

배우기 쉽고 쓰기 쉬운 한글을 우리는 잘 사용하고 보호해야 합니다. 어떤 나라는 자기 나라 글자가 없어서 다른 나라 글자를 빌려 쓰기도 합니다. 우리는 세계적으로 자랑할 글자와 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해야 합니다.

외국어를 못 한다고 주눅 드는 일 없이 당당히 우리말로 외국인을 상대할 수 있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어린이들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많이 써서 들려주고 싶은데 노력에 비해 지혜가 모자라서 부끄럽습니다.

이렇게 글을 쓸 수 있는 은혜를 베풀어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심 혁 창

차 례












7  / 노랑머리 키다리

23 / 거지 할머니

84 / 금붕어의 사랑

100 / 딸기

115 / 사람아 넌 무엇이 되고 싶으냐?







아기 없는 엄마와 엄마 없는 아기가 / 128

동물들의 항의 / 141

아빠 게의 사랑 / 152

엄마와 포도 / 156

노랑머리 키다리

오학년 삼반에 키가 장대 같고 머리가 해바라기처럼 노란 키다리 학생이 전학해 왔습니다.

선생님이 소개했습니다.

“여러분, 오늘 새 친구가 왔어요. 이 친구는 미국에서 왔고 이름은 아브라함이에요. 앞으로 친절하게 잘 해주고 좋은 친구들이 되어 주기 바라요.”

선생님은 반에서 키가 가장 큰 남정우를 가리키며 말했어요.

“남정우, 네가 우리 반에서 가장 크니까 너하고 짝꿍을 하는 게 좋겠다.”

선생님은 키다리 아브라함을 사다리라고 놀리는 남정우 옆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정우는 노랑머리 키다리에게 손을 내밀었고 그 아이도 손을 마주잡았습니다.

둘의 앉은키가 비슷했습니다. 그것을 본 납작이 명수가 제 짝꿍 짤막이 남구 귀에다 속삭였습니다.

“잘 어울린다. 이층끼리 잘 만났어. 너하고 나하고 땅짝처럼 말이야 히히히.”

짤막이 남구가 입을 삐죽 내밀며 중얼거렸습니다.

“키만 크면 제일인가. 공부도 못하는 것들이.”

“키다리가 공부를 잘하는지 못하는지 네가 어떻게 알아?”

“딱 보면 몰라? 미국서 온 것이 우리말도 못할 텐데 어떻게 공부를 잘하니?”

또 저쪽 구석에 앉은 승준이와 미환이가 낄낄거렸습니다.

“영어도 못하는 정우가 노랑머리 키다리를 만났으니 쌤통이다. 헤헤헤.”

“우리말도 못하는 벙어리 같은 노랑머리와 남정우가 이제 어떻게 하나 두고 보자.”

왕눈이 길자도 짝꿍 은주를 쿡 찔렀습니다.

“저 눈 좀 봐. 파랗고 큰 눈이 동화책에 나오는 주인공 같다.”

은주가 볼을 불룩 내밀고 대꾸했습니다.

“아무리 커도 네 눈보다는 작다!”

여자 중에서 가장 잘 재재거리는 유나가 짝꿍 상미 귀에다 대고 속삭였습니다.

“동화책에 나오는 왕자처럼 잘 생겼다. 그지?”

“정말, 사다리보다 더 잘 생긴 것 같은데.”

“그래도 난 사다리가 좋더라. 공부는 좀 못해도 우리 반에서 가장 잘 생겼잖아.”

“계집애, 너 사다리 좋아하는구나.”

“넌?”

“나도 좋아하기는 하지만.”

“저 노랑머리 키다리는 공부를 어떻게 할까?”

“어떻게 되겠지.”

“우리말도 모르면서 얼마나 답답할까…….”

선생님은 한 시간을 마치고 교무실로 가셨습니다. 아이들이 키다리 아브라함 앞으로 몰려들어 악수를 청했습니다.

“키다리 아브라함 반갑다. 난 은주야.”

키다리 아브라함이 허리를 꺾고 악수를 했습니다.

“아이에머 아브라함.”

“아이어미 아브라함?”

“예스.”

은주가 장난치는 소리로 말했습니다.

“아이어미면 뭐야? 학부형 아니야?”

그 소리에 아이들이 와 하고 웃었습니다. 그것도 모르는 키다리 아브라함은 자기가 좋아서 웃는 줄 알고 활짝 따라 웃으며 은주의 손을 잡고 좋아했습니다. 이어서 다른 아이들과도 악수를 했습니다.

새 친구가 들어오는 바람에 하루가 어수선하게 지나가고 노랑머리 키다리와 사다리 남정우가 학교 문을 나섰습니다. 남정우는 무슨 말이든 친절하게 해주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키다리 아브라함이 무슨 말인가 하는 것 같은데 그게 말인지 아닌지 몰라 아브라함에게 물었습니다.

“야, 너, 지금 뭐라고 했어?”

키다리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습니다.

“야? 너 노우.”

“오케이.”

사다리 정우가 아는 영어는 ‘오케이’하고 ‘노우’뿐입니다.

키다리 아브라함이 또 무슨 소리를 했습니다.

“두유 노우 잉글리시?”

“오케이.”

“원더풀!”

“오케이.”

“유아 마이 굿 프렌드.”

이게 무슨 말이야? 유아는 어린 아이라는 말인데 나 보고 어린애라고? 남정우는 손을 저었습니다.

“노우.”

“노우?”

“오케이.”

“오 마이갓!”

노랑머리 얼굴이 일그러졌습니다. 왜 그렇게 갑자기 어두운 얼굴로 변하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너 왜 그래?”

“노우노우.”

“노우가 뭐야? 이 바보야.”

“바보?”

“오케이.”

“아임 바보. 유아 마이 프렌드.”

“나 보고 어린애라고? 내가 왜 유아냐?”

“왓?”

“오케이.”

“오케이? 와이?”

“난 몰라 이 바보야.”

“바보? 베리 굿.”

“아이고(I go) 답답해.”

“고우?”

남정우는 가슴을 치며 아이고 소리를 했습니다.

“아이고 아이고 답답해.”

아브라함은 남정우가 ‘나 간다’ 하고 말하는 줄 알고 손을 저으며 인사했습니다.

“굿바이!”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에따 모르겠다.

“오케이!”

키다리는 휘청거리는 걸음으로 저만치 가다가 돌아보며 손을 저었습니다. 남정우도 손을 저었습니다.


다음 날 선생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세계 여러 나라 가운데 자기 나라 말과 자기 나라 글을 가진 나라는 많지 않아요. 우리나라는 한글이 있고 우리 고유의 말이 있어요. 우리는 옛 어른들께 감사해야 해요.”

선생님이 말씀하시자 아브라함은 눈을 껌뻑거리며 열심히 들었습니다.

“어제 아브라함이 우리 반에 전학해 왔지요? 앞으로 아브라함에게 우리글과 말을 가르쳐 주어야 해요. 사람들이 외국인을 만나면 그 나라 말을 할 수 없다는 생각에 주눅이 드는데 그러면 안 돼요. 자기 나라 말이 없는 국민은 그럴 수 있지만 우리말을 가지고 있는 여러분은 그럴 필요가 없어요.”

은주가 손을 번쩍 들었습니다.

“선생님, 우리가 다른 나라 사람을 만나면 그 나라 말을 하려고 하는 건 사대주의에서 온 습관이지요?”

“와아! 은주가 그런 말도!”

수다쟁이 지숙이가 웃어대며 말했지만 선생님은 담담히 대답하셨습니다.

“우리 민족은 고유의 말은 있었으나 글자가 없었기 때문에 중국 글자인 한자를 빌려 썼던 거예요. 그러나 지금은 세종대왕께서 중국 글자보다 훨씬 과학적이고 훌륭한 세계적 표음문자를 만들어 주셔서 어디에서도 자랑할 수 있는 글자를 우리는 가지고 있어요. 그러니까 영어를 모른다고 부끄러워할 게 없어요. 모르는 영어를 억지로 하려고 하지 말고 저 아이가 우리말과 글을 빨리 익히도록 도와주어요. 우리말을 듣고 쓰다 보면 자연스럽게 우리말과 글이 얼마나 훌륭한가를 알게 되고 또 여러분에게 영어를 우리말로 가르쳐 주게 될 거예요. 알았지요?”

선생님은 이어서 기쁜 표정으로 이렇게 덧붙이셨습니다.

“여러분, 인도네시아라는 나라를 아시지요? 그 나라에 속한 찌아찌아라는 소수 민족이 있는데 그 민족 학교에서는 이번 학기부터 세계 최초로 한글 교과서를 만들어 우리말과 글을 가르치기로 했대요. 우리말과 글이 얼마나 자랑스러운가를 아시겠지요?”

“네, 네, 네.”

아이들이 귀가 번쩍 틔어 힘차게 대답했습니다. 아브라함도 아이들을 따라 네네네 하고 웃었습니다.

승준이가 아브라함에게 물었습니다.

“야, 네네가 무슨 소린지나 알고 네네냐?”

아브라함이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오케이.”

“오케이, 좋다! 오케이.”

영어를 몰라서 당황해 하던 아이들이 선생님 말씀을 듣고부터는 자신감이 생겨서 아브라함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야, 꺽다리 아브라함, 네가 우리말을 알아?”

아브라함은 덩달아 신나는 소리로 대답했습니다.

“오케이.”

“아무거나 물어도 오케이. 넌 바보.”

“오케이 아임(나는) 바보, 바보.”

“바보가 따로 있나, 남들 다 아는 거 모르면 바보지.”

영미가 아주 똑똑한 척 한 마디 했습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이 물었습니다.

“왓?”

“왓이 뭐야? 바보야. 왓왓.”

우리말과 글에 자부심을 가진 아이들이 아브라함 앞에서 아무 말이나 마구 지껄였습니다.

“저 노랑머리 키다리는 우리가 욕을 해도 모를걸?”

“그렇지 뭐, 너는 바보야 해도 좋아서 자기는 바보라고 웃기만 하는 바보니까.”

명수가 아브라함을 올려다보며 손가락질을 했습니다.

“야. 노랑머리, 네가 우리말을 알아?”

아브라함은 빙긋이 웃으며 대답을 하지 않았습니다.

“저것 좀 봐, 저게 언제 우리말을 배워서 영어를 우리한테 가르친다는 거야.”

“저 노랑머리는 아이큐가 몇일까? 우리말에는 제로겠지?”

“당근이지.”

은주가 간단히 대답하고 아브라함을 측은히 바라보았습니다. 저쪽 자리에서 상미가 손가락질을 하며 유나에게 속삭였습니다.

“노랑머리가 불쌍하다. 어쩌자고 말도 모르면서 우리나라에까지 와서 고생이냐.”

유나가 낄낄거리며 대답했습니다.

“병신이 따로 있냐. 남 아는 거 모르면 병신이지.”

“그렇게까지 말하면 안 되는 거 아니니?”

아브라함은 눈길을 돌려 두 아이들이 하는 말을 들었는지 빙긋이 웃어 보였습니다.

 

국어 시간입니다. 아브라함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선생님 말씀에 귀를 기울입니다. 옆자리 남정우가 물었습니다.

“우리말도 제대로 할 줄 모르면서 선생님 말씀을 뭘 그렇게 열심히 듣냐?”

그러나 아브라함은 못 들은 체하고 선생님 말씀에만 열심이었습니다.

“저게 내 말을 알아듣겠어. 쇠귀에 경 읽기지, 어차피 나도 영어는 모르니까 우리말로 속 시원히 해 본 것뿐이야.”

이렇게 중얼거리는데 저쪽에서 미환이가 노랑머리를 비웃으며 한 마디 했습니다.

“웃겼어. 선생님 말씀도 못 알아들으면서 열심히 듣는 꼴이라니, 좋아, 너 수업 태도 하나는 됐어.”

이 소리를 들으신 선생님이 승준이를 꾸짖듯 주의를 주셨습니다.

“조용히 해. 말은 몰라도 설명을 열심히 들으면 이해가 된다는 걸 알아야 해. 다들 아브라함 같은 수업태도를 가져야 한다. 알았나?”

아이들이 찔끔하여 입을 오므리고 목을 쏙 움츠렸습니다. 선생님이 한 마디 덧붙이셨습니다.

“내가 오늘은 너희들에게 시험을 해 보이겠다. 아브라함을 앞으로 나오게 하여 무슨 말이든 하라고 하겠다. 그러면 그 아이가 하는 말을 너희들이 말은 못 알아들어도 그 마음은 이해할 것이다.”

선생님은 아브라함을 향해 눈길을 보냈습니다.

“아브라함, 이리 나와서 하고 싶은 말을 네 마음대로 해 보기 바란다. 아브라함 앞으로!”

노랑머리를 흔들며 아브라함이 앞으로 나가 섰습니다. 그리고 선생님께 꾸벅 인사를 하고 입을 열었습니다.

“여러분 감사아합니더. 지는 미국에서 갱상도 선생님한테 한국말을 배웠십니더. 잘은 몬 해도 무슨 말이든지 다 알아 들을 수 있고 하고 싶은 말도 다 할 수 있십니더.”

이 말에 아이들과 선생님 모두 눈이 휘둥그레지고 입이 딱 벌어졌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태연하게 말했습니다.

“지가 한국에 오기 위해 배운 한국말 참 어렵십니더. 미국에서는 아가 선생님께 유 하고 말하고 손자도 할아버지 할머니한테 유 하고 말하면 되는데 유라는 말이 한국에서는 함부로 쓰면 안 된다카는 것을 배워십니더. 한국은 예의 바른 나라로 예절을 소중하게 여기기 때문에 아들이 어른께는 어르신이락 하고 어른 앞에서 나는 저락하라고 배웠십니더. 맞지예?”

깜짝 놀란 아이들이 갑자기 조용해졌습니다.

아이들보다 더 놀란 것은 선생님이었습니다.

(2009년 12월 월간문학 게재)







거지 할머니







1.

아주 부자 할머니 한 분이 살았습니다. 할머니가 얼마나 부자인지 간단히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그림같이 아름다운 황금 지붕의 웅장한 이층집이 있고 집 둘레는 수천 평의 정원이 있습니다. 정원에는 비단잉어가 떼를 지어 노는 호수가 있고 호수에는 아름다운 배 한 척이 떠 있습니다.

할머니는 날마다 배를 타고 다니며 잉어들에게 먹이를 뿌려줍니다.

“예쁜 아이들아 많이 먹어라. 그리고 즐겁게 놀아라.”

할머니는 먹이를 주면서 잉어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습니다. 잉어들도 할머니가 배를 저어오시면 머리를 쓰다듬어 달라고 서로 밀치면서 머리를 내밀었습니다.

굉장한 부자 할머니는 아들도 없고 딸도 없습니다. 그래서 가정을 돌볼 사람을 썼습니다. 그리고 사람을 쓸  때는 자기 유산을 넘겨주어도 좋을 사람인가 아닌가를 눈여겨보았습니다. 남자든 여자든 나이가 많든 적든 따지지 않고 마음이 예쁜 사람에게 재산을 넘겨주고 싶어 했습니다.

팔십이 넘도록 사람을 눈여겨보았지만 정말로 마음에 드는 사람을 만날 수가 없었습니다.

어느 날 할머니는 밖으로 나가서 마음씨 고운 어린이를 만나보기로 했습니다. 할머니는 아무도 모르게 준비한 가방과 가발과 옷을 입고 거울을 보았습니다.

할머니는 자기 모습을 보면서 웃었습니다.

“호호호, 영락없는 거지꼴이야. 이 늙은이를 누가 쳐다나 볼까.”

할머니는 너절너절한 가방을 열었습니다. 겉은 지저분하고 걸레 같지만 속은 빨간 양단과 금빛 천으로 매우 아름답게 꾸며져 있고 안에는 커다란 금덩어리와 돈으로 가득히 채워져 있었습니다.

그것을 끌고 나온 할머니는 높은 육교 아래서 누군가가 도와주기를 바라는 눈빛으로 지나가는 사람을 바라보았습니다.

어른들은 힐끗 보고 옷이라도 닿을까봐 피하여 계단을 올라가고 아이들도 계단을 올라가며 저희끼리 재잘거렸습니다.

“거지 할머니다. 아이 더러워.”

“저 할머니는 왜 저기 서 있지? 거지가 길에 나와 있는 것도 도시공해야.”

“도시공해? 히히히히 너 유식하다.”

“거지가 서 있으면 동네가 거지 동네가 되는 거 아냐?”

“맞아 헤헤헤헤.”

할머니는 정말 거지처럼 지나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지켜보았습니다. 하루 종일 서 있었지만 아무도 말을 걸어주지 않았습니다.

할머니가 손수레를 잡은 채 높은 계단을 올려다보고 있을 때 한 가냘픈 여자 아이가 다가왔습니다.

“할머니 올라가실 거예요?”

“올라가야겠는데 계단이 너무 높구나.”

“제가 도와드릴 게요. 할머니 올라가세요. 제가 아래서 들어드릴게요.”

“고맙다. 넌 집이 어디냐?”

아이는 육교 건너편이 아닌 뒤쪽을 가리키며 대답했습니다.

“우리 집은 저쪽에 있어요. 저 언덕 위에 보이시지요?”

“그러냐? 네 이름은 무엇이냐?”

“저는 장은주라고 해요. 할머니 먼저 올라가세요. 제가 도와드릴게요.”

“장은주, 이름이 좋구나. 넌 집이 뒤쪽이라면서?”

“괜찮아요. 할머니 건너드리고 저는 돌아가도 돼요.”

“난 배가 고파서 더 갈 수가 없구나. 너의 집에 가면 먹을 것 좀 주겠니?”

“그렇게 배가 고프세요?”

“그렇단다. 아침부터 굶었어.”

“그럼 우리 집으로 가요. 우리 집은 가난해서 맛있는 음식은 없지만……”

“배고픈 사람이 입맛 가리겠느냐? 먹을 것이면 되지.”

이마가 예쁘고 갸름한 여자 아이는 티 없이 맑은 눈으로 할머니에게 가자고 했습니다.

“할머니 우리 집까지 가자면 힘드실 거예요. 저 언덕 위에 있는 작은 집이거든요. 수레는 제가 끌고 갈 테니 따라만 오세요.”

“고맙다. 고마워.”

“할머니, 가방이 아주 무겁네요. 이렇게 무거운 걸 어떻게 가지고 나오셨어요?”

“그게 내가 가진 전부란다. 내 재산이라고 생각하고 끌고 다니면 안 무겁단다.”

“할머니 눈빛은 아기 같아요. 헤헤헤.”

여자 아이는 할머니 눈을 들여다보며 숨김없이 말했습니다.

“그러냐? 고맙다.”

잠시 후에 할머니는 아이네 집에 도착했습니다. 아이네 집은 정말 좁고 허름했습니다. 방이 두 개에 달아 지은 부엌이 전부였습니다. 집안이 사람 사는 집 같지 않게 초라했습니다.

아이는 상을 차려 할머니 앞에 내놓았습니다. 할머니는 숟가락을 들면서 물었습니다.

“엄마 아빠는 어디 가셨느냐?”

“일 나가셨어요. 밤이 되어야 돌아오셔요.”

“고맙기도 하다.”

할머니는 밥을 맛있게 먹고 말했습니다.

“엄마 아빠가 오시는 동안 너는 무얼 하고 노느냐?”

“숙제하고 공부해요.”

“몇 학년인데?”

“사학년이에요.”  

“일요일에도 일을 나가시느냐?”

“아녜요. 모두 교회에 가요.”

“교회를?”   

“할머니도 교회에 나가시나요?”

“난 교회가 어떤 곳인지도 모른다.”

“사람은 늙으면 하늘나라로 갈 준비를 해야 한대요. 할머니도 나이가 많으시잖아요?”

“그래서?”  

“꼭 교회에 가라고 하는 건 아녜요. 그냥 여쭈어보았어요.”

“고맙다. 나는 이 동네 파출소를 좀 찾아가 볼 일이 있다. 잠시 다녀오마. 그래도 좋겠니?”

“빨리 다녀오세요. 우리 동네 파출소는 바로 저쪽 길모퉁이에 있어요.”

“알았다. 다녀오마.”

할머니는 손수레를 아이네 마당에 둔 채 집을 나서서 동네 파출소로 갔습니다. 경찰관이 무슨 일로 왔느냐고 물었습니다.

“여기서 우리 손녀를 만나기로 했어요. 손녀가 올 때까지 기다릴 테니 이해해 주세요.”

이렇게 한 마디 하고 해가 지고 날이 어둡도록 파출소 의자에 앉아 사람이 오기를 기다렸습니다.


2.  

날이 어둡고 밤이 깊었습니다. 그래도 할머니가 기다리는 손녀는 오지 않았습니다. 경찰관이 할머니 집이 어디냐, 손녀가 어디 사느냐 물었지만 대답하지 않았어요.

한편 은주는 날이 어둡도록 할머니가 오시지 않아 걱정을 하다가 손수레를 끌어다 부엌에 두었습니다. 밤이 되어 부모님이 일터에서 돌아오셨습니다.

엄마가 부엌에 놓여 있는 너덜너덜한 가방을 보고 물었습니다.

“은주야 이건 뭐냐?”

“어떤 할머니 거예요.”

“어떤 할머니라니?”

“아주 가난한 할머니가 끌고 다니는 거예요. 그 할머니는 이것이 전 재산이라고 하셨어요.”

“무슨 재산이 이 모양이냐? 그 할머니도 우리만이나 가난한 사람인가 보구나. 여기 두지 말고 밖에다 내놓아라. 이런 걸 누가 끌어간다고 부엌에까지 끌어다 놓았어.”

은주는 손수레를 끌어다 마당에 놓았습니다. 그것을 아버지가 보시고 물었습니다.

“그게 뭔데 이리 굴리고 저리 굴리고 하느냐?”

은주가 대답했습니다.

“어떤 불쌍한 할머니 거예요. 그 할머니한테는 전 재산이래요.”

“무슨 재산을 이렇게 지저분한 가방에다 넣고 다닌다더냐? 그 할머니는 어디를 갔고?”

“파출소에 알아볼 일이 있어서 다녀온다고 나가셨는데 아직도 오시지 않고 있어요.”

“허허 별 일도 다 있다. 누굴 찾으러 갔기에 아직도 안 오는 거야.”

이때 엄마가 가방을 툭 쳐보며 말했습니다.

“이게 뭔데 이렇게 무거우냐? 보기보다 무겁구나.”

아버지가 재미있다는 듯이 바라보다 말했습니다.

“거지 노인 같은데 가지고 다닐 것이 없으니 돌멩이라도 가지고 다니는지도 모르지……”

“아무리 그렇기로 노인네가 무거운 돌을 일부러 끌고 다니겠어요?”

“그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열어보시구려.”

아버지가 하시는 말에 엄마는 다가가서 가방을 열어 보았습니다.

“어마! 이게 뭐야?”

갑자기 엄마가 기절이라도 할 듯 큰 소리로 외치며 뒤로 물러섰습니다. 은주와 아버지도 무슨 일인가 궁금하여 다가가 가방을 들여다보았습니다.

“아아니! 이게?”

너무 놀라 입을 다물지 못하고 아버지가 은주를 바라보았습니다.

“너도 이 안에 이렇게 큰돈이 들어 있는 것을 몰랐니?”

“몰랐어요.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요?”

엄마가 걱정스럽게 말했습니다.

“빨리 할머니를 찾아야겠다. 이건 보통 문제가 아니야.”

아버지도 은주에게 다그치듯 말했습니다.

“빨리 파출소로 가 보자.”

엄마는 손수레를 부엌으로 끌로 들어가 긴장한 얼굴로 말했습니다.

“빨리 다녀오세요. 할머니가 길을 잃어서 못 오시는 걸 거예요.”

은주는 아버지와 급히 파출소로 갔습니다. 파출소에는 할머니가 앉아 은주가 찾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은주가 들어서자 아주 반갑게 맞았습니다.

“이제 오는구나. 네가 오기를 기다렸다.”

아버지가 할머니에게 인사를 했습니다.

“제가 이 아이의 아범입니다. 우리 집으로 가시지요.”

“고맙소. 가십시다.”

할머니는 경찰관에게 손녀가 왔다고 따라나서며 고맙다는 인사를 했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을 따라 걸었습니다.

은주는 할머니 손을 잡고 물었습니다.

“할머니 시장하지 않으셨어요?”

“시장했지, 네가 안 와서 배가 고파도 참고 있었다.”


“우리 집에 가시면 점심에 먹던 음식이 전부인데 어쩌지요.”

“아무려면 어떠냐. 배고픈 사람이 찬밥 더운 밥 따지겠느냐? 난 네가 주는 밥이면 다 맛있다.”

할머니를 모시고 집에 도착하자 기다리고 있던 엄마가 맞았습니다.

“할머니 어서 오세요.”

“고맙소, 거지 늙은이를 사람대접해 주시니 고맙소.”

“우리 집은 아주 누추하지만 방으로 들어가시지요.”

할머니는 조금도 어색하지 않게 자기 가족을 만났다는 듯 밝은 얼굴로 들어갔습니다.

“방이 누추한 게 무슨 걱정입니까. 방바닥 따뜻하면 천국이고 가족이 화목하면 천당이지요.”

은주가 웃으며 말했습니다.

“할머니는 교회도 안 다니신다면서 천국도 아시고 천당도 아시네요?”

“사람으로 태어나 그것도 모르면 사람이라고 하겠느냐?”

할머니는 엄마가 차려 내놓은 보리밥을 맛있게 잡수셨습니다. 그리고 엄마에게 물었습니다.

“난 오갈 데 없는 늙은이인데 오늘 여기서 하룻밤 자고 가도 되겠수?”

 “정 오갈 데가 없으시면 좋으실 대로 하시지요. 집이 좁아서 불편하실 테지만요.”

“고맙소. 그럼 오늘 하루 신세 좀 지십시다. 내 손수레는 마당에 두었었는데 안 보이던데 어디 두셨소?”

“부엌에 들여놓았습니다.”

“그깐 걸 뭐 마당에 두지 부엌에까지 끌어들이셨소?”

엄마는 태연히 대답했습니다.

“밤에 비라도 오면 젖을까봐 들여놓았습니다.”

“고맙소. 그게 내 전 재산이긴 하니……”

은주는 그 가방에 웬 돈이 그렇게 많이 들어 있느냐고 물어보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말하지 않았습니다. 은주 부모님도 마찬가지였지만 묻지 않았습니다.

할머니는 아주 피로한 듯 자리에 눕자마자 잠이 들었습니다. 잠든 할머니는 건드리면 먼지가 쏟아질 것같이 

지저분하고 더러웠습니다. 엄마가 할머니 곁에 눕고 아버지가 그 옆에 누웠습니다.

은주 엄마 아빠는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할머니는 곤히 자는 듯 코까지 가늘게 곯았습니다. 밤이 아주 깊었습니다. 잠을 이루지 못한 은주 아빠가 속삭이듯 말했습니다.

“이 할머니가 누구인 것 같소?”

“글쎄요, 차림으로 보아서는 거지인데 웬 돈을 그렇게 많이 가지고 있는지 알 수가 없네요.”

“거 참 이상한 일이오. 거지 노인이 돈을 손수레에 싣고 다니다니……”

“거지 노인이 어디서 훔쳐 온 것은 아닐까요?”

“이렇게 늙은 분이 어디서 훔치겠소?”

“로또 복권이라 맞았나?”

“행색으로 보아서는 로또 복권을 살 노인 같지도 않아요.”

“앞으로 어쩌지요? 노인은 이 많은 돈을 어디로 끌고 다니실까요?”

“글쎄 말이오. 못된 사람한테 걸리기라도 한다면 다 빼앗길 텐데……”

“그래서는 안 되지요. 노인이 어디로 갈는지 지켜보십시다.”

“큰일 아니오? 비밀을 알았으니 그냥 길바닥으로 나가게 둘 수도 없고 일 안 나가고 따라 다니며 지켜줄 수도 없는 노릇 아니요? 당장 내일 아침이 문제예요.”

“할머니가 당장 갈 곳이 없다고 하면 며칠 더 우리 집에 묵게 하고 찾아갈 연고를 알아보아 드리는 것이 좋겠어요.”

“당신이 불편해 하지 않는다면 그렇게 합시다. 노인네가 웬 돈을 이렇게 많이 가지고 다니는지 알 수가 없구려. 거지가 아니라 부잔데…… 거지부자, 거지부자 아니오? 허허허.”

“웃지 말아요, 잠깨시겠어요. 우리도 잡시다.”

“세상 참 이상도 하지. 우리 같은 놈은 뼈가 빠지게 일을 하고도 이렇게밖에 못 사는데 어떤 거지는 돈을 수레에 끌고 다니며 동냥을 다나니!”


3.   

할머니는 그들 부부가 주고받는 소리에 잠을 이루지 못한 채 자는 척하고 코까지 곯아가며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내가 사람을 바로 만난 것 같다. 웬만한 사람들 같으면 나를 죽이고라도 저 돈을 차지하려고 할 텐데. 내 가방에 돈이 들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내 걱정을 하다니……’

밤이 많이 깊었는데 부부는 잠을 못 이루었습니다. 할머니가 듣고 있는 것도 모르고 가만가만히 속삭였습니다. 아내가 웃는 소리를 내며 말했습니다.

“이 할머니가 예수님인지도 몰라요.”

“예수님은 남자고 이렇게 늙지도 않았어요.”

“난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건지 깨어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어요.”

“당신 돈 욕심이 나서 하는 소리요?”

“지나친 욕심은 하늘나라 꿈을 포기해야 한다고 했어요.”

“그래, 하나님은 우리 집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지켜보실 거야. 저 돈이면 우리가 팔자를 고치고도 남을 액수 같은데……”

“하나님이 우리를 시험하고 있는지도 몰라요.”

“그렇지, 우리가 남들처럼 악하게 살았다면 이런 집에서 살지도 않았을 것이오.”

“돈에 눈이 멀면 천당이 안 보인다고 했어요.”

“누가 그렇게 가르쳐 주었소?”

“내 양심이 하는 말이지요, 호호호.”

“할머니 깨시겠소.”

할머니는 이미 두 사람의 말만 듣는 것이 아니라 그 마음씨까지 읽고 계셨습니다.

‘참 좋은 부부야. 딸 은주의 말로는 교회에 다닌다고 했지.’

할머니가 이런 생각을 하며 거짓 잠을 자고 있는 동안 잠을 이루지 못하는 남편이 말했습니다.

“견물생심이라더니 돈 뭉치를 보고 우리가 할머니를 잘 모시는 것 아니오? 당신 양심껏 말해 보시오.”

“돈이 없으면 어떡하겠어요. 우리 집에 온 노인을 길바닥으로 내보낼 수는 없지 않아요? 거지에게 사랑을 베풀고 목마른 이웃에게 물 한 그릇 주는 것이 예수님을 대접하는 것이라고 하지 않았어요?”

“맞소. 돈보다 인간이 먼저지요. 거지 노인을 우리가 잘 모시면 하나님이 그 값을 대신 갚아주신다고 한 말씀도 있으니…… 차라리 노인이 돈 없이 하룻밤 우리 집에서 자고 가는 것이라면 더 편할 걸 그랬소. 욕심한테 시험당하고 잠 설치는 것보다 쿨쿨 잘 자는 것이 우리한테는 유익 아니오? 그만 잡시다.”

부부는 잠이 들었습니다. 정작 잠을 못 이루는 것은 노인이었습니다. 돈 걱정이 아니라 이 착한 부부의 마음이 너무 아름다워서 감격하여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4.

다음 날 아침입니다.

은주는 학교로 가고 엄마는 가정부 일을 나갔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할머니를 위해 일을 나가지 않았습니다. 

아무도 없는 집에 할머니와 은주 아버지가 마주앉았습니다. 할머니가 물었습니다.

“주인께서는 무슨 일을 하시우?”

“공사장에서 잡일을 하고 일당을 받고 삽니다.”

“혹시 괜찮은 자리가 있으면 가보시겠수?”

“어디 그런 데가 있어야지요.”

“내 꼴은 이래도 친구 가운데 괜찮게 사는 사람이 있다우. 마침 그 집에서 집안 잡역부를 구하고 있는데 대우는 잘 해 준다고 하니 한번 생각해 보시면 어떻겠수?”

“잡역부면 어떻습니까. 안정된 생활을 할 수만 있다면 어디든 가야지요.”

“그럼 애 엄마 오거든 상의하여 결정하시우. 두 분 뜻이 맞아서 가시겠다고 하면 내가 일러주는 주소로 찾아가 보시오.”


할머니는 주소를 불러주었습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섰습니다.

“지난밤에는 고마웠수. 다음에 신세는 갚기로 하고 내 친구한테 단단히 일러두겠으니 꼭 찾아가 만나 보시우. 그 친구는 마음에 들기만 하면 딸애가 대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학비를 대 줄 것이고 두 부부도 편안하고 불편 없이 살도록 해 주실 것이오. 꼭 찾아가서 누가 보냈느냐고 묻거든 이 손수레를 가지고 왔다고 하시면 받아들일 것이오.”

할머니는 손수레를 두고 길을 나섰습니다.

“이렇게 가시면 어디로 가시는지 목적지는 있습니까?”

“있다우. 내 친구를 만나러 가오. 저 앞에 가서 택시를 타면 친구네 집으로 갈 수 있고 친구를 만나면 택시비는 친구가 대주니까 걱정할 것 없어요. 내가 손수레를 끌고 가기 힘들어서 그러니 가실 때 가지고 가서 그 집에다 맡겨 두시우.”

“아닙니다. 할머니 것은 할머니가 가지고 가셔야 합니다. 제가 택시 타는 곳까지 끌어다 드리겠습니다.”

“그럴 것 없어요. 내 친구를 만나려면 물증이 있어야지. 이것을 끌고 올 것이니 그리 알라고 일러둘 것이오. 그럼……”

할머니는 그렇게 집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택시에 오르자 등을 기대고 눈을 감은 채 중얼거렸습니다.

‘그만하면 괜찮은 사람들이야. 가방에 든 돈쯤이야 그런 사람들이 쓴다면 아까울 것도 없어…… 그 돈이 탐나서 가지고 달아난다면 그것으로 좋고…… 가방을 가지고 온다면 내 재산을 다 주어도 아깝지 않아. 작은 욕심을 부리지 않는 사람들이라면 더 큰 것을 상으로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지.’


5 

은주 아빠는 할머니가 가시는 것을 보고 돌아서서 손수레를 풀어 너덜거리는 가방을 방안으로 가지고 들어갔습니다.

손수레 가방에 돈이 가득 들어 있다는 것 때문에 갑자기 큰 걱정거리가 생겼습니다. 아무것도 모를 때는 마당에 뒹굴려도 좋을 너덜거리는 가방이 지금은 큰 짐이었습니다. 얼마나 되는 액수인지는 모르지만 생전 만져 보지도 못한 큰돈임에는 틀림없었습니다.

그는 방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한 채 아내와 딸이 돌아오기를 기다렸습니다. 학교에서 돌아온 은주가 물었습니다.

“할머니는 어디 계셔요?”

“가셨다.”  

은주가 손수레를 보고 물었습니다.

“할머니가 이걸 두고 가셨어요?”

“두고 가시면서 엄마하고 의논하여 이 수레를 어떤 집으로 가지고 가라고 하셨다.”

“이렇게 많은 돈이 들어 있는 가방을 두고 그냥 가셨단 말이에요?”

“그렇단다. 난 도무지 무엇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구나.”

이때 밖에서 돌아온 은주 엄마가 물었습니다.

“할머니는 어쩌시구요?”

은주 아빠는 할머니가 하신 말씀을 그대로 들려주며 아내의 뜻을 물었습니다.

“어떻소? 그 노인 말대로 그 집을 찾아가 볼까요?”

“꿈만 같아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어차피 우린 남의 일이나 해주고 사는 처지가 아니오. 이래나 저래나 마찬가지. 우리 그 할머니 친구네를 찾아가 보십시다. 그리고 이 가방도 전해 주어야 하니까.”

“이상한 할머니 다 보았네. 우리를 무엇을 믿고 이 큰 돈 가방을 두고 가시는지 이해가 안 가요.”

“어쩌면 할머니는 가방 속의 비밀을 우리가 모르고 있는 줄 아는 모양이오. 정말 이상한 노인이오. 이 무서운 세상에서 무얼 믿고 우리한테 이같이 하는지 알 수가 없구려.”

“노인이 망령이 난 것인지도 몰라요. 아무튼 돈을 돌려줄 곳을 알았으니 일은 나중 문제고 내일 당장 가방이나 돌려주고 봅시다.”

“그 집에서 우리를 일꾼으로 써 준다고 하면 당신이나 은주도 따라 가겠소?”

“그러지요. 우리가 잘해 주면 그 집에서도 잘해 줄 것이라 했다니 일단 가 봅시다.”

이렇게 하여 부부는 밤잠을 설치고 뒹굴었습니다. 큰돈이 있으니 문도 잠가야 했습니다. 전 같으면 열어놓고 자던 방이고, 이웃이 다 내 식구 같아서 좋았는데 갑자기 돈 가방이 들어 있으니 마음속에 별별 걱정이 다 모여들었습니다.

이웃집 청년이 두렵고 자주 드나들던 사람들이 도둑처럼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어제만 해도 너덜너덜한 가방이 거지주머니같이 보였으나 이제는 귀한 보물단지로 보였습니다. 잠을 이루지 못한 아내가 물었습니다.

“당신도 잠이 안 오시우?”

“글쎄 일을 안 해서 그런지 잠이 안 오는구려.”

“저 가방 때문이에요. 나도 저 가방을 생각하면 잠이 안 와요.”

“돈 없이 사는 사람이 편한지도 모르겠소. 가진 것 없으면 도둑도 오지 않는 법……”

“맞아요. 저 가방은 사람을 불안하게 만들어요.”

“당신 저 가방 가지고 달아나고 싶지 않소?”

“농담도 그런 말씀은 마세요. 노인이 저 돈을 어떻게 모았는지는 모르지만 그분의 전 재산이라고 하였잖아요. 젊은 우리가 노인의 돈을 감히 넘겨다본다는 건……”

“해 본 소리요. 이 험한 세상에 돈 보따리를 아무한테나 맡기는 사람도 있다니……”

“내일 일찍이 그 주소로 가 봅시다. 남의 돈을 너무 오래 가지고 있으면 욕심이 생겨서 안 되오.”

“그럽시다, 내일…… ”

부부는 다음 날 일찍이 그 주소를 찾아갔습니다.


6.

노인이 가르쳐준 주소를 찾기는 쉬웠습니다. 그 번지에는 커다란 철대문이 궁궐 문처럼 있고 돌아가면서는 성처럼 높은 담이 둘러쳐 있었습니다. 부부는 대문 앞에 도착하자 주눅이 들어 대문에 붙은 초인종을 못 누르고 주저했습니다.

은주 아빠가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말했습니다.

“무슨 집이 이렇게 커! 무서워서 저 단추도 못 누르겠네. 당신이 눌러 보오.”

“싫어요, 당신이 눌러요.”

은주 아빠는 긴 담을 둘러보다가 마지못해 다가가며 구시렁거렸습니다.

“대문 안에서 무서운 게 튀어나올 것만 같은데…… 무슨 집이 이렇게 무시무시해…… 사람 사는 집은 맞나?”

“그런 배포로 뭘 하겠어요. 단추를 꽉 눌러요.”

은주 아빠는 눈을 꽉 감고 단추를 힘 있게 눌렀습니다. 안에서 누군가 나오는 소리가 나고 대문이 철커덩 하고 천둥소리를 내며 열렸습니다.

“누구를 찾습니까?”

말끔한 차림에 얼굴이 미국 사람처럼 하얀 남자가 나타나 물었습니다. 은주 아빠는 허리를 굽실거리며 손수레를 가리켰습니다.

“이, 이것을 이 댁에 가져다 달라는 부탁을 받고 가지고 왔습니다만……”

“알고 있습니다. 가지고 들어오시지요.”

“아닙니다. 이미 알고 계신 것을 보니 제대로 찾아 온 것 같습니다. 이것만 전해 드리고 가겠습니다.”

“어제 이 댁 주인어른의 친구분이 오셔서 이것을 가져오는 사람을 그냥 보내지 말고 꼭 대접하여 드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또 당부하신 말씀에 대답도 들어 보라고 하였습니다.”

부부는 손수레를 끌고 마당으로 들어섰습니다. 넓은 잔디밭이 그림속의 공원같이 펼쳐 있고 저쪽으로는 배 한 척이 떠 있는 맑은 호수가 보였습니다. 대문에서 현관까지는 대리석이 깔려 있고 양쪽에는 각종 꽃이 피어 향기를 바닥에 깔았습니다.

은주 아빠는 꿈을 꾸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며 말끔한 청년의 뒤를 따랐습니다. 아내도 죄인이나 되는 듯 어깨를 움츠리고 발소리를 죽여 가며 걸었습니다.

말끔한 젊은이는 두 사람을 아래층 응접실로 안내하였습니다. 그들이 앉자마자 어디서 알고 나타났는지 곱고 단정하게 차려 입은 여자가 차를 들고 나타났습니다.

집안에는 은은한 향기가 가득하고 금을 바른 듯 고운 무늬의 벽이 환하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전체 집안이 돈을 발라도 이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다 싶을 만큼 으리으리했습니다.

부부는 얼이 빠져 천장을 보다가 벽을 보고, 다시 유리알 같은 바닥에 눈을 깔고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습니다. 엄숙한 분위기를 젊은 사람이 깼습니다.

“오시느라고 힘드셨지요? 저는 이 집 어른의 비서입니다. 편안한 마음으로 차드시면서 이야기 나누세요.”

“아, 아닙니…….”

부부가 똑같이 대답하다가 멈칫 했습니다.

“어제 주인어른 친구가 단단히 일러두고 가셨습니다. 댁들이 오시거든 차와 식사를 대접하고 부탁하신 말씀에 대하여 대답을 들어보고 승낙하거든 주인어른께 알려드리라고 말입니다.”

부부는 그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지만 으리으리한 집을 보니 감히 여기 들어와 살겠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은주 아빠가 어물어물 대답했습니다.

“저희는 그 할머니의 말씀대로 하고 싶지만……”

“뭐 부족한 게 있으십니까?”

“아, 아닙니다. 저희 같은 것이 감히……”

“됐습니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계시다니 주인어른께 이 집 정원 관리인으로 일하시겠다는 대답이 있었다고 말씀드리겠습니다.”

“……”

“내일이라도 이사를 오시기 바랍니다. 저 밖으로 나가시면 댁들이 거처할 집을 보실 수 있습니다. 가시지요.”

부부는 얼결에 그 비서라는 사람을 따라 나섰습니다. 넓은 정원에는 호수가 있고 집 뒤로는 수영장이 보였습니다. 그러나 산동네서만 살아온 사람들이라 수영장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여 거기도 물고기를 기르는 호수로 생각했습니다.

넓은 잔디밭을 지나 동쪽 끝에 아담한 집 한 채가 있었습니다.

“이 집은 정원 관리인의 집입니다. 먼저 살던 사람이 떠난 뒤 아직 마땅한 사람을 찾지 못하여 비워 두었습니다. 안으로 들어가 보시지요.”

집안으로 들어선 부부는 눈이 휘둥그레져 입도 다물지 못했습니다. 고급 장식을 해놓은 대청은 바닥에 기름을 바른 듯 말끔하고 온 집안이 별장 같았습니다.

비서는 한쪽 귀퉁이에 놓인 탁자에 앉기를 권했습니다.

“이리 오셔서 앉으십시오. 그리고 제가 드리는 말씀을 잘 들어 주십시오.”

“……”

부부는 비서라는 사람을 조심스럽게 바라보았습니다. 비서는 길에서 흔히 찾아보기 힘든 귀공자 같은 얼굴이었습니다. 하얀 피부에 옥수수 알처럼 고르고 백옥 같은 치아가 더욱 인상적이었습니다.

“두 분이 입주하실 것으로 알고 몇 가지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네, 네……”

“이 집안에는 저하고 요리사가 있고 댁에서 세 식구가 오시면 여섯 명이 살게 됩니다.”

“……”

“우리 주인어른께서는 보통 분이 아니십니다. 그러므로 주인어른의 눈에 나는 일만 하지 않으시면 댁들은 딸이 대학을 나오고 세상에 나가기까지 학비는 물론 입고 먹는 문제를 해결해 드리고 두 분에게는 월급을 드릴 것입니다. 월급은 두 분이 부족하지 않게 드릴 것이니 그리 아십시오. 다만……”


7. 

비서는 말을 잠시 끊고 더욱 신중히 입을 열었습니다.

“주인어른의 일과는 아주 정확하십니다. 모든 의사 교환은 저를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불편한 점이나 요구 사항이 있으면 저에게 말씀하셔야 합니다. 만약 주인어른이 댁들을 보시자고 할 때는 이 집에서 나가 달라는 부탁을 할 때만 얼굴을 마주 대합니다. 그러니까 주인어른을 보지 않으시는 것이 좋습니다. 주인어른은 저 외에는 어떤 업무도 다른 사람과 상의하지 않습니다. 대단히 까다롭고 엄한 분이지요.”

“……”

“예를 들자면 주인어른이 호수에서 배를 타고 비단잉어들에게 먹이를 주며 호수에서 즐기시는 시간에는 이 집에서 나오시면 안 됩니다. 오후 1시부터 2시까지입니다. 아시겠지요?”

“그런 것쯤이야……”

“주인어른은 2층에서 나오시지 않습니다. 그리고 토요일 오후에는 우리가 일찍 퇴근하고 나면 댁들을 소개한 그 할머니가 오셔서 주인어른과 놀다가 일요일 밤 늦게 가십니다. 그 할머니는 주인어른이 가장 좋아하는 분이십니다. 그런 분이 소개했기 때문에 댁들은 이 집에서 편안하게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주인어른이 마음에 안 드시면 내보낼 때 얼굴을 마주한다는 것 명심하시고 절대 주인 얼굴은 보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예, 명심하겠습니다.”

이렇게 하여 은주네는 이사를 하였습니다. 은주 아버지는 정원을 돌보며 잔디를 가꾸었고 은주 엄마는 요리사를 도와 장을 보고 주방 심부름하는 것이 일과였습니다.

식사는 요리사가 만들어 주는 음식을 일층 식당에서 온 가족이 함께 먹고 주인어른 음식은 요리사가 직접 이층으로 차려 올렸습니다. 음식도 산동네에서는 보지도 듣지도 못한 귀한 것들입니다.

좋은 환경에서 공부하는 은주는 자기를 이 집으로 소개한 할머니가 보고 싶었습니다.

“엄마, 그 불쌍한 할머니는 우리를 도와주시고 어디로 가셨을까요?”

“글쎄다. 참 고마우신 할머니인데……”

“할머니를 만나려고 그 육교 앞에서 기다려 보아도 나타나지 않으시는 거예요.”

“설마 그 육교에만 서 계시겠니? 비서 아저씨 말로는 토요일마다 그 할머니가 오셔서 주인어른과 놀다 가신다고 하더라.”

“정말이에요?”

“다음 토요일이면 알게 되겠지.”

은주뿐 아니라 엄마 아빠도 그 할머니가 정말 토요일에 오시기를 기다렸습니다.

토요일 오후 한 시입니다. 은주와 부모가 방에서 나갈 수 없다는 비서의 말을 지키기 위하여 안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밖에서 누가 문을 두드렸습니다.

“누가 오셨나?”

은주 엄마가 문을 열다가 깜짝 놀라 소리쳤습니다.

“어마! 할머니! 은주야 할머니 오셨다!”

“할머니가요?”

은주와 아빠는 놀라서 문 앞으로 달려갔습니다. 정말 할머니가 거기 서 계셨습니다. 

“이리로 이사했다는 말을 들었소. 그 동안 지낼 만하던가요?”

“네, 고맙습니다. 안으로 들어오시지요.”

“그럽시다.”

할머니는 안으로 들어서면서 은주를 품에 안으셨습니다.

“귀여운 것 그 동안 공부 잘했고?”

“네, 할머니 많이 보고 싶었어요.”

“나도 네가 보고 싶었다.”

“할머니 마실 것 드릴까요?”

“뭐 있거든 좀 다오.”

“점심은 잡수셨어요?”

“안 먹었더니 배가 고프구나.”

“그러시면 잠깐만 기다리세요.”

은주 엄마는 점심 차릴 준비를 하러 나가려 했습니다.

“어디를 가시나?”

“주방으로 갑니다.”

“그럴 것 없어요. 내가 오늘은 주방장인 걸.”

“네?”

“내 친구는 토요일마다 내가 차려주는 음식을 먹는다오.”

“네……?”

“마실 것이나 있으면 주고…… 난 좀 놀다가 친구 만나야지. 내 친구는 지금 내가 여기 와 있는 걸 모르고 있거든.”

“그러시다가……”

“괜찮아, 내가 호수에 가서 잉어 밥 주고 올라가면 친구는 자고 있을 거야. 토요일부터 일요일 밤까지는 내가 당번이라오. 나는 토요일마다 이 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거든 호호호. 그래야 나도 먹고 살고 돈도 모으지.”

“네!?”

은주도 엄마 아빠도 놀랐습니다. 할머니가 아르바이트를 하다니 믿어지지가 않았습니다.

“뭘 그리 놀라시나?”

“아, 아닙니다.”

은주 엄마가 놀란 것은 할머니가 아르바이트를 한다는 것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보다 엄격하고 무서운 주인어른이 어떻게 거지차림으로 다니는 할머니가 차려주는 음식을 먹을 수 있을까 해서였습니다.

“난 이 집 주인하고 아주 친한 사이라오. 내가 와서 무슨 짓을 하든 간섭하거나 잔소리를 하지 않아요. 그러니 내가 하는 대로 따르기만 하면 되오.”

할머니는 은주가 따른 주스를 마시고 일어섰습니다.

“은주야, 너 나하고 저기 좀 가자.”


8. 

할머니는 은주를 데리고 호수로 갔습니다.

“날마다 오후에는 비단잉어들에게 먹이를 주어야 한다. 오늘은 내가 주인 대신 먹이도 주고 너하고 재미있게 놀 생각이다. 어떠냐?”

“좋아요, 그런데……”

“그런데 뭐냐?”

“주인어른께서 아시면……”

“괜찮다. 내 친구는 내가 하는 일은 무엇이든지 오케이야. 염려 말고 내가 하는 대로 하기만 해라. 알았지?”

할머니는 아주 사랑이 가득한 눈으로 은주를 바라보셨습니다. 거지 차림만 아니면 할머니 눈은 천사의 눈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할머니는 배에 올라 은주를 곁으로 불러 앉혔습니다. 그리고 준비된 잉어 먹이를 집어 들었습니다.

잉어들은 할머니가 배에 오르는 순간부터 아우성을 치면서 배를 맴돌고 머리를 불쑥불쑥 내밀며 입을 뻐끔뻐끔 벌렸습니다. 할머니는 아주 사랑스런 목소리로 잉어들에게 말했습니다.

“알았다. 알았어. 내가 그렇게 보고 싶었다고? 점심 먼저 먹어라.”

할머니는 잉어들에게 먹이를 뿌려주기도 하고 가까이 와서 머리를 쑥 내민 커다란 잉어의 입에 먹이를 먹여 주기도 했습니다. 잉어들은 마치 강아지가 그러는 것처럼 할머니 손에 든 먹이를 물고 물속으로 들어가며 꼬리를 쳤습니다. 아주 즐겁다는 듯 춤을 추는 모습이 귀여웠습니다.

“은주야, 너도 먹이를 주어 보아라. 잉어들은 이 집 주인이 길을 잘 들여 놓아서 사람처럼 순하고 재롱도 부린단다.”

“네.”

은주도 먹이를 한 주먹 들고 잉어들에게 뿌렸습니다. 할머니는 가까이 다가와 입을 벙긋거리는 잉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습니다. 잉어는 할머니가 쓰다듬어 주는 것이 즐겁다는 듯 꼬리를 치며 물 위로 불쑥 튀어 올랐습니다. 그뿐 아니라 어떤 잉어는 제 키보다 훨씬 높이 뛰어올라 배 안으로 떨어지기도 했습니다. 할머니는 아주 귀엽다는 듯 그 잉어를 안아 입을 맞추고 다시 물에다 넣어주었습니다.

은주는 세상에 태어나 이렇게 아름다운 모습은 처음 봅니다. 누구한테 들어본 일도 없는 동화 속에나 나오는 그림 같은 장면이었습니다.

할머니는 잉어들에게 밥을 다 주고 넓은 풀밭을 지나 수영장이 있는 곳으로 갔습니다. 오후의 따가운 햇살이 할머니 이마에 쏟아지고 은주 이마에도 땀이 솟았습니다. 할머니는 아주 씩씩한 걸음으로 수영장 곁에 둥그렇게 소나무를 심어 숲을 만든 그늘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시원한 솔바람이 부는 숲속에는 벤치가 길게 여름 더위에 낮잠이라도 자는 듯 한가하게 빈자리를 준비해 놓고 비스듬히 누워 있었습니다.

“이리 와 앉거라. 아주 시원하고 좋다.”

“할머니 저것도 호수인가요?”

아직까지 수영장을 보지 못한 은주는 하늘이 파랗게 내려 평화롭게 찰랑거리는 물결을 가리켰습니다.

“저건 수영장이란다. 너 수영해 보았니?”

“아니요.”

“알았다. 내가 수영하는 법을 가르쳐주마.”

“할머니가 수영도 할 줄 아세요?”

“암, 이 집 친구하고 전에는 자주 했으니까. 내가 이 집 주인 친구하고 친한 것도 수영을 하면서부터란다.”

“주인어른도 수영을 잘하시나요?”

“잘하지. 나만큼은 못해도 호호호호.”

할머니 웃음소리에 은주는 갑자기 마음의 문이 활짝 열리는 기분을 느꼈습니다. 거지 할머니가 어딘가 주인어른의 친구라 하여 좀 조심스러웠는데 보통 할머니처럼 호호 하고 웃으니 마음의 벽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할머니, 궁금한 것은 무엇이든지 물어 봐도 괜찮아요?”

“암, 무엇이든지 내가 모르는 것 빼놓고는 다 물어 보거라.”

“그렇게 어려운 질문은 없어요.”

“그럼 더욱 좋고, 물어 보렴?”

“아무거나 물어 보아도 친구 어른께 비밀 지켜 주길 거지요?”

“아무렴, 너하고 나하고 가진 비밀을 주인 친구가 알아서 좋을 건 없잖겠니?”

“난 할머니가 정말 좋아요.”

“나도 네가 정말 좋단다.”

할머니는 두 팔을 벌려 은주를 와락 끌어안으며 얼굴 가득 웃음꽃을 피웠습니다.

“은주야, 너는 나를 정말 할머니처럼 생각하니?”

“네, 할머니는 좋으신 분이에요.”

“고맙구나. 그렇게 생각해 준다니.”

“그럼 궁금한 것 여쭈어 볼게요. 주인어른께는 비밀이고요.”

은주는 궁금했던 것들을 물어보기 시작했습니다.

9.

“할머니, 주인어른은 뭘 하시는 분인가요?”

“자세히는 모르지만 굉장한 부자인 것 같다.”

“이렇게 큰집에 사시는 걸 보면 진짜 부자 같아요.”

“너도 그렇게 생각하느냐?”

“네, 어떻게 이런 큰 부자가 되셨을까요?”

“주인어른은 손이 닿는 것마다 돈이 된단다.”

“무슨 일을 하시는데요?”

“내 친구는 은행 이자만도 한 달에 수천만 원씩 들어오고……”

“이자가 그렇게나요?”

“그뿐 아니다. 큰 공장을 가지고 있는데 거기서는 더 많은 돈을 번단다.”

은주는 기가 막혀 말도 못했습니다. 아버지는 일 년 내내 일을 해도 천만 원, 아니 백만 원도 못 모으시는데 한 달에 몇 억이라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할머니, 우리 아버지도 그런 공장에 들어가 일을 할 수 있게 해 주실 수 있나요?”


“그런 청을 내가 친구한테 부탁할 수는 없단다. 왜? 지금 사는 것이 불편하냐?”

“아니에요.”

“또 궁금한 거 있으면 물어보거라.”

“주인어른은 왜 한 번도 밖에 안 나오시나요?”

“그분은 너무 바빠서 자리를 뜨지 못하신단다.”

“그렇게 바쁘신가요?”

“내 친구 하루의 이야기를 들려줄까?”

“네.”

“내 친구는 매일 오전에는 비서를 통하여 회사 일이며 은행관계 업무보고를 받고 점심 식사 후에는 호수에 나가서 잉어들 먹이를 주면서 잉어들과 놀고 오후 세 시부터는 먹을 간단다.”

“먹을 갈아요?”

“한 시간 동안 먹을 갈면서 마음을 간다더라.”

“마음을 간다니 그게 무슨 뜻인가요?”

“새까만 먹을 갈면서 마음에 끼는 때를 씻어낸다고 하더라. 그리고 월요일에는 한문 네 자를 몇 번씩 쓰는데 쓰고 버리는 일을 몇 번씩 반복한단다.”

“무슨 글자인데요?”

“네가 알아들을 수 있을까 모르겠구나. 천자문에 노겸근칙이라는 말이 있다.”

할머니는 땅바닥에다 한문자를 쓰셨습니다.

노(勞) 겸(謙) 근(謹) 칙(勅)

“이게 무슨 뜻인가요?”

“쉽게 말하면 노는 반드시 사람은 자기의 노동의 대가로 살아야 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겸은 언제나 겸손한 인품을 갖추어야 하고 근은 매사에 조심하고 삼가야 하며 칙이란 자기가 감당할 수 없는 큰 힘이 다가올 때는 그 앞에 순종해야 한다는 말이다. 사람이 감당하기 힘든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


은주는 갑자기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잘 모르겠어요.”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이 누구겠느냐?”

“왕이 아닐까요?”

“맞았다. 임금님 명령은 백성이 거슬리지 못한다. 그런데 임금님도 거슬리지 못하는 것이 있단다. 무엇이겠느냐?”

“가뭄과 장마가……”

“넌 머리가 아주 영특하구나. 가뭄과 장마를 가져오는 대자연의 힘이지. 그리고 계절과 나이이다. 이렇게 더운 여름이 싫다고 아무리 거부해 보아도 가을이 될 수 없고 나이 먹는 것이 싫다고 거절해 보아도 세월이 가면 나이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바로 그런 거다. 도저히 자기 힘으로는 막을 수 없다고 판단되면 순종하는

것이 지혜라는 말이지.”

“아주 좋은 말 같아요. 그래서 주인어른은 그 글자를 열심히 쓰시는 거로군요?”

“그렇지, 그리고 화요일은 난초를 그리고, 수요일은 매화를 그리고, 목요일은  대나무를 그리고, 금요일은 국화, 그리고 토요일은…… ”


10.

“토요일은 요?”

토요일엔 잉어를 그린단다. 그리고 글씨 그림을 한 달 동안 썼다가 가장 마음에 드는 작품 하나씩을 골라 표구를 한다. 그러면 하나는 은행에서, 하나는 대학에서, 하나는 기업체 등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줄을 이어 가져간단다.”

“주인어른이 그렇게 유명하신 분이신가요?”

“꽤 알려진 편이지.”

“그림은 거저 주시나요?”

“거저 주겠다고 하지만 그것을 받아간 사람들은 자기 들이 알아서 오백 만 원도 주고 천만 원도 주고 한단다. 내 친구는 잉어 그림을 그릴 때 하나를 잘 보았다가 그 모습을 그리고 그림을 가져가는 사람한테 그 비단 잉어를 주기도 한단다. 그러면 받은 사람이 잉어 값의 몇 배로 돈을 쳐서 가져오는 것도 보았다.”

“주인어른은 돈을 엄청나게 많이 버시겠어요?”

“그래, 아주 많이 버는 사람이다. 그러니까 네가 잘만 하면 대학까지 공부도 시켜주고 부모님도 평생 걱정 없이 살게 해 드릴 수 있는 사람이다.”

“할머니 고맙습니다.”

“왜 내가 고마우냐?”

“그렇게 훌륭한 어른을 우리가 모실 수 있게 해 주셨잖아요?”

“그렇게 생각하면 다행이다.”

할머니는 자리에서 일어나 호수 가에 지어 있는 작은 건물 앞으로 갔습니다.

“따라 오너라. 너 수영할 줄 모른다고 했지?”

“네.” 

“이 건물은 샤워장이다. 이 안에는 탈의실도 있다.”

“탈의실이 뭔데요?”

“수영복을 갈아입는 곳이란다. 오늘은 수영하기에 아주 좋은 날씨다. 탈의실로 들어가자, 따라 와.”

탈의실에는 여러 모양의 수영복이 있었습니다. 어른 것 말고 어린이용도 있었습니다. 할머니는 은주에게 예쁜 수영복을 갈아 입혔습니다. 그리고 수영복으로 갈아입은 할머니는 물속으로 들어갔습니다.

“내 수영 솜씨 좀 볼래?”

할머니는 잉어처럼 물속으로 쏙 들어가더니 한가운데서 솟아올라 물결을 타고 끝까지 갔다가 돌아와 활짝 웃어 보이며 물었습니다.

“어떠냐?”

“멋져요.”

“너도 해 볼래?”

“못해요.”

“오늘은 첫날이니까 물에 뜨는 법을 가르쳐 주마. 내가 하라는 대로 해 보거라.”

할머니는 엎드려 머리를 물속에 박고 팔과 다리를 쭉 펴고 발장구를 치셨습니다. 그리고 일어서면서 말했습니다.

“잘 보았지? 내가 한 대로 하면 너도 물에 뜰 수 있단다. 숨을 크게 들이쉬어 배에 바람을 잔뜩 채운 다음 숨을 멈추고 머리를 물에 넣으면 몸이 둥실 뜬다. 그러면 팔과 다리를 쭉 펴고 발장구를 친다. 그리고 숨이 차면 코로 바람을 천천히 내뱉으면서 팔을 앞뒤로 저으며 발길질을 하면 몸이 앞으로 나간다.”

은주는 할머니가 가르쳐준 대로 해 보았지만 물만 켜고 몸이 뜨지는 않았습니다.

할머니는 몇 번씩 물에 뜨는 자세를 보여주며 연습을 시켰습니다. 거의 한 시간 가까이 연습을 한 끝에 은주는 물에 머리를 박고 뜨는 방법을 익혔습니다.

“이제 되었다. 아주 잘 했어. 다음에는 물에서 얼굴을 내미는 연습만 하면 된다.”

할머니는 칭찬하시고 물속으로 가라앉으며 은주를 잡아당겼습니다. 은주도 물속으로 들어가 물안경을 건너로 할머니를 바라보았습니다. 할머니는 안경 속에서 환하게 웃으며 은주에게 다가오셨습니다.

거지 옷을 입었을 때의 할머니는 가난한 노인으로 보였지만 수영복을 입은 물속의 할머니는 거지같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습니다.

물오리들처럼 물속으로 들어갔다 솟아오르고 이리 달아나고 저리 달아나는 동안 할머니와 은주는 친손녀처럼 친할머니처럼 정이 들었습니다.

얼마의 시간이 흐른 다음 수영장에서 나온 할머니는 급히 너덜너덜한 옷을 주워 입으며 서둘렀습니다.

“너하고 놀다가 시간 가는 줄을 몰랐구나. 내 친구 화났겠어. 나는 빨리 들어가 봐야 한다. 다음 토요일에 올 테니 그때까지 기다려라 알겠지?”

“네 할머니.”

할머니는 급히 친구한테로 간다고 안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은주는 할머니와 헤어지는 것이 싫었습니다. 하지만 토요일을 기다리기로 하고 돌아섰습니다.

금붕어의 사랑

나는 한 살짜리

거북입니다. 


오백 원에 판다는

글씨를 종이에

써 붙이고 손님을

 


                  기다리는

                  아주머니가

                  제 주인입니다.


한 아저씨가 다가왔습니다.

“이거 오백 원이 맞습니까?”

“네, 마지막 남은 거라 싸게 팔려고요.”

“아주 귀엽게 생겼는걸.”

아저씨는 새끼 거북이라고 하며 앙증맞고 예쁘고 귀엽다면서 나를 사서 비닐봉지에 담아 차에 태워 집으로 왔습니다.

집안에는 커다란 어항이 있고 속에는 아름다운 꼬리를 살래살래 젓는 금붕어 한 마리가 밖을 내다보고 있었습니다.

아저씨가 나를 작은 그릇에 쏟아 놓으면서 말했습니다.

“여보, 이리 와 봐요. 복거북이 사왔어요.”

아주머니가 다가오며 말했습니다.

“그런 것들은 왜 자꾸 사와요.”

아주머니는 반가워도 하지 않고 귀찮다는 듯이 말했습니다.

“내가 이런 물고기를 얼마나 좋아하고 사랑하는데 무슨 말을 그렇게 해요? 자꾸 사오다니.”

“그건 사랑도 아니고 좋아하는 것도 아니에요.”

“사랑하지도 않고 좋아하지도 않는데 비싼 돈 주고 사왔겠소?”

“사랑한다고 사들이면 뭘 해요?”

“뭘 하다니?”

“며칠이나 갈까. 당신이 금붕어를 사다가 죽인 게 몇 마리나 되는지 알아요?”

“허허 이 사람, 복 거북이가 다 듣겠소.”

“거북이가 듣고 밤에 달아나기나 했으면 좋겠어요.”

나는 다 듣고 있는데 아저씨와 아주머니는 내가 못 알아듣는 줄 알고 이렇게 말을 주고받았습니다.

아저씨는 나를 커다란 어항 속에다 넣으면서 말했습니다.









“거북아 여기 금붕어가 있다. 싸우지 말고 잘 지내거라.”

나는 어항 속으로 들어가 물이 뽀글뽀글 솟는 작은 바위 위에 잠시 엎드렸습니다.

겁쟁이 금붕어가 멀리 구석으로 가서 나를 겁먹은 눈으로 바라보았습니다. 나는 엉금엉금 기어서 금붕어 곁으로 다가갔습니다. 금붕어는 빠르게 반대쪽 구석으로 달아나 더 겁먹은 눈으로 나를 쏘아보았습니다.

주인아저씨는 재미있다는 듯 바라보다가 방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금붕어는 아주 예뻤습니다. 나는 또 엉금엉금 기어 그 곁으로 갔습니다. 금붕어가 눈을 흘기며 말했습니다.

“가까이 오지 마, 얘. 무서워.”

“난 무서운 거북이 아니야.”

“싫어, 징글맞고 싫어.”

“난 네가 예쁜데……”

“난 싫어. 저리 가.”

금붕어는 빛깔도 예쁘지만 까맣고 동그란 눈이 더 예뻤습니다. 나는 또 그쪽으로 다가갔습니다.

금붕어는 더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싫다는데 왜 자꾸 다가오는 거야?”

“무서워하지 마. 난 아직 아기거북이야. 금붕어야 넌 몇 살이니?”

“별꼴이야 네가 내 나이를 왜 묻니?”

“난 한 살이야. 오늘 엄마하고 헤어졌어.”

“……”

금붕어는 갑자기 내가 불쌍한 듯 눈물이 글썽한 채 바라보았습니다.

“난 세상에 나와서 겨우 하루를 살았는데 엄마를 누가 데려가 버렸어.”

금붕어는 갑자기 피하지 않고 나를 들여다보다가 아주 작고 예쁜 소리로 물었습니다.

“엄마를 잃었다고?”

“응.”

“엄마가 보고 싶지? 불쌍하기도 해라. 세상에서 가장 슬픈 건 엄마를 잃는 거야.”

금붕어는 부드럽고 예쁜 지느러미로 나를 쓰다듬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동그란 눈을 내 눈에 맞추었습니다.

“거북아, 내가 몇 살이냐고 물었지? 나는 다섯 살이야. 너보다 네 살이 위니까 내가 누나다.”

거북이 물었습니다.

“그럼, 누나라고 불러도 괜찮아?”

“그럼! 좋지.”

“누나.”

“응, 거북아, 엄마 생각은 하지 말자. 나도 엄마를 잃고 동생과 같이 이 어항에 왔는데 내 동생은 바로 죽었어.”

금붕어는 동생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누나 울어?”

“아니야 안 울어. 사람들은 우리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우리가 무엇을 바라는지는 알려고 하지 않고 아무것도 몰라.”

“누나 고마워.”

금붕어와 거북이는 신이 나서 물속을 한 바퀴 돌았습니다.

주인아저씨는 먹이를 가져다 물에 던져주고 들여다보며 중얼거렸습니다.

“귀여운 녀석들 잘도 노는구나. 아저씨가 출장에서 돌아올 때까지 싸우지 말고 잘 지내거라.”

주인아저씨는 전보다 많은 먹이를 던져주고 출장을 떠났습니다. 아저씨는 날마다 한 번씩 먹이를 주고 들여다보시지만 주인아주머니는 한 번도 들여다보지 않았습니다.

한낮이었습니다. 환한 햇빛이 창문 가득 흘러드는 것을 보며 금붕어가 말했습니다.

“거북아, 저쪽에 있는 게 무언지 알겠니?”

“나는 세상에 나온 지 얼마 안 되어 아는 것이 없어, 누나.”

금붕어가 창가에 옹기종기 놓여 있는 화분의 꽃들을 가리켰습니다.

“저건 거실에 만들어 놓은 꽃밭이야.”

거북이는 고개를 빼고 말했습니다.

“참 예쁘다.”

“사람들은 꽃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화분에 꽃나무를 심어 놓고 좋아하지만 꽃들은 사람들의 놀이 감이 되고 마는 거야.”

“그렇지만 추운 겨울에 밖에서 떠는 것보다 얼마나 좋겠어?”

“나무나 꽃은 겨울에 밖에서 겨울잠을 자야 하는데 사람들은 잠을 깨워놓고 꽃을 피게 한단다.”

“겨울에 꽃이 피면 좋지 않아?”

“꽃한테는 나비가 있어야 해. 그런데 사람들은 꽃을 피게 해놓고 나비를 주지 않거든. 그건 사랑이 아니야.”

거북이 한쪽 벽에 매달린 새장을 가리켰습니다.

“누나, 저 새는 행복하겠어.”

금붕어는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습니다.

“저 새는 엄마 새를 잃고 혼자 남았단다. 저 소리는 넓은 하늘을 달라고 외치는 것이란다.”

“사람들은 물과 들과 하늘에 사는 생물들을 자기 집에다 가두고 사랑한다면서 좋아하는 거 아닌가?”

“그렇지. 사람들은…… ”


주인아저씨가 출장에서 돌아오시지 않은 지가 일주일이 넘었습니다. 그래도 주인아주머니는 어항을 한 번도 들여다보지 않았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주인아저씨가 매일 물을 주던 화분에도 물을 주지 않아 꽃들이 시들기 시작했습니다.

거북이는 배가 몹시 고팠습니다. 여기저기 찾아보았지만 먹을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물에 떠다니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먹었습니다. 금붕어도 배가 고파 힘을 잃고 한쪽 구석에서 숨만 할딱거렸습니다. 거북이 다가가 물었습니다.

“누나 어디 먹을 거 없을까?”

금붕어는 예쁜 눈을 깜박거리며 고개를 저었습니다.

“주인아저씨가 오시지 않으면……”

“아이 배 고프다.”

“주인아저씨가 오실 때까지 참아야 해.”

“난 배가 고파 죽을 것만 같아, 누나도 배고프지?”

“……” 

“누나도 배고프지?”

금붕어는 실낱같은 소리로 말했습니다.

“말 하지 마. 배고플 때는 말도 하지 말고 가만히 있어야 해.”

“주인아저씨가 곧 오실까?”

“……”

“누나 가만히 있으면 배가 더 고파지고 무서워져.”

“……”

거북이는 다리에 힘을 주어 작은 바위에 올라가 주인아저씨를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주인아저씨는 열흘이 되어도 오시지 않았습니다.

“누나 배고파 죽겠다. 뭐 아무 거나 먹을 거 없을까?”

금붕어는 힘이 다 빠진 몸짓으로 거북이가 있는 바위 곁으로 왔습니다.

“거북아 그렇게 못 참겠니?”

“이제 죽을 것만 같아.”

금붕어는 지느러미를 거북이 앞에 하늘하늘 늘어뜨리며 말했습니다.

“그렇게 못 참겠으면 내 지느러미 끝을 조금만 따먹어.”

“누나 안 아플까?”

“아프지는 않아, 전에도 다른 고기한테 물려 보았어.”

“그렇지만 어떻게 누나를 물어뜯어.”

“배고파 괴로운 것보다 나을 거야. 긴 끝을 조금만 물어뜯어.”

“누나 미안해.”

“너라도 힘을 내야지.”

거북이는 목을 쑥 빼고 금붕어의 기다란 지느러미 끝을 살짝 물어뜯었습니다.

“누나 많이 아프지?”

“괜찮아, 이제는 배 안 고프지?”

“고마워 누나. 이제 힘이 나.”

금붕어는 다시 힘을 주어 저쪽을 향해 헤엄을 치려고 지느러미를 저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몸의 중심이 잡히지 않고 흔들렸습니다. 그리고 가고 싶은 방향으로 갈 수가 없었습니다. 금붕어는 힘껏 지느러미를 저으며 중얼거렸습니다.

“왜 이럴까?”

거북이가 걱정스럽게 말했습니다.

“누나 조심해.”

“알았어.”

금붕어는 힘없이 대답을 하고 물 바닥으로 내려앉았습니다. 거북이 다가가 지느러미를 밀어 올리며 말했습니다.

“누나, 힘내.”

“알았어.”

금붕어는 대답을 하면서도 더 힘을 잃고 옆으로 누웠습니다. 거북이 금붕어의 등을 밀어 올리며 말했습니다.

“누나, 힘 좀 써 봐.”

금붕어는 더 힘을 잃었습니다.

“……”

“누나, 누나!”

거북이 불러도 힘을 잃은 금붕어는 눈을 스르르 감은 채 배를 뒤집고 벌렁 누워 물 위로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숨이 끊어지는 소리로 말했습니다.


“이제 누나는…… 내가 죽으면 네가 나를 뜯어 먹…

그리고 넌 죽지 마. 주인아저씨가 올 때까……”

금붕어는 물에 배를 내민 채 둥둥 떴습니다. 

거북이는 하루 종일 울었습니다. 주인아저씨는 오지 않고 배는 또 고파왔습니다. 거북은 물 위에 뜬 금붕어를 바라보았습니다. 동그랗고 예쁜 눈을 뜬 채 꼼짝도 않았습니다. 거북은 헤엄을 쳐 다가가 금붕어 지느러미 끝을 한 입 물어뜯었습니다.

금붕어는 거북이 물어뜯자 바닥으로 내려앉았습니다. 빨갛고 아름답던 지느러미와 머리와 배가 풀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누나 미안해, 누나.”

거북이는 배가 고플 때마다 금붕어를 뜯어 먹으며 울었습니다. 사랑스런 눈으로 바라보던 금붕어, 친절하고 유순한 금붕어가 거북에게 모두 내어 맡기고 거북이 밥이 되어 준 것입니다.

“누나. 누나 미안해, 미안해 너무 배가 고파서……”

거북이는 금붕어를 뜯어 먹으면서 미안하다는 말만 했습니다. 며칠이 지나 금붕어에 붙어 있던 살과 지느러미는 다 거북이 뱃속으로 들어가고 남은 건 앙상한 뼈와 머리에 달리 눈뿐이었습니다. 거북이는 배가 아무리 고파도 금붕어의 눈은 건드리지 않기로 했습니다.

주인아저씨가 돌아왔을 때 어항에는 금붕어의 앙상한 뼈와 비틀거리는 거북이만 남았습니다. 아저씨는 물에 가라앉은 금붕어의 뼈를 건져내며 말했습니다.

“거북이 녀석이 의리도 없이 금붕어를 잡아먹었군. 동물은 할 수 없어.”

금붕어와 거북이 어떻게 지냈는지 모르는 아저씨가 금붕어의 뼈를 가지고 밖으로 나갈 때 거북이는 엉엉 울었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미안해 누나, 누나 안녕.”





(2009년 상록수문학 봄호 게재)

딸 기

1.

“엄마 한 달 동안 있다가 오면 저 딸기와 방울토마토는 어떻게 되는 거야?”

“물 안 주면 다 말라 죽는 거지 뭐.”

“그럼 어떡해?”

“그러니까 사지 말자고 했잖아?”

소희는 책가방만한 스틸로플 상자에 아기들처럼 옹기종기 담겨 있는 어린 딸기순과 지팡이나무 방울토마토 허브 순에 물을 듬뿍 주면서 말했습니다.

“너희들 죽으면 안 돼 알았지? 한 달 동안 못 볼 것 같다. 그때까지 안녕!”

소희는 몇 번씩 돌아보며 아파트 옥상 계단을 내려왔습니다. 넓은 옥상에 고아들처럼 남은 딸기와 토마토가 실바람에 한들거리며 손짓을 했습니다.

“너도 안녕!”

소희는 할머니 집에서 한 달 동안 아주 재미있게 놀았습니다. 너무 재미있게 지내느라고 옥상에 두고 온 딸기와 토마토 생각은 까맣게 잊었습니다.

“소희야 이제 집에 가자.”

엄마가 짐을 싸면서 말했습니다. 소희는 할머니와 더 지내고 싶었지만 엄마를 따라 서울로 가는 고속버스를 탔습니다.

차창 밖으로 파란 들판이 지나갑니다. 먼 산은 버스를 구름처럼 따라오고 가까운 산들은 바쁘게 뒤로 밀려가며 얼굴을 감추었습니다.

소희가 엄마에게 물었습니다.

“엄마, 걔들은 다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누구 말이냐?”

“딸기 토마토.”

“다 말라 죽었을 텐데 뭘 생각하니?”

“정말 죽었을까? 불쌍해서 어떡해?”

“불쌍하긴. 주인 잘못 만나서 그렇게 된 거지.”

“주인? 내가 주인이야?”

“네가 주인이 아니면 누가 주인이니?”

“그렇구나, 걔들은 내가 사오는 게 아니었어.”

엄마는 묵묵히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습니다.

“엄마, 걔들이 정말 다 죽었을까?”

“한 달 동안 물 한 모금 안 주었는데 무슨 수로 사니?”

엄마는 무심하게 대답했습니다.

“엄마, 정말 다 말라죽었을까?”

“잊어버려.”

소희는 서울에 도착할 때까지 그 생각만 했습니다. 

‘주인이 책임을 지지 않아서 그것들은 다 말라죽었을 거야. 내가 안 사왔으면 다른 집에서 꽃도 피고 열매도 맺었을 텐데…… 물을 주고 가꾸어 주었다면 지금쯤 많이 자랐겠지?’

집에 도착하자마자 소희는 옥상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한 달 전에 놓아 둔 자리를 보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다들 어디로 가고?’

먼저 사다 놓은 스틸로플 상자에는 바싹 말라 죽은 지팡이나무만 달랑 서 있고 그 곁에는 크고 작은 화분에 토마토가 훌쩍 자란 채 꽃과 열매를 달고 있고 딸기는 가지를 길게 늘이고 파란 잎 사이에 하얀 꽃을 달고 있었습니다. 허브들도 예쁜 화분에 담겨 작은 손을 내밀고 인사했습니다.

“소희야 안녕?”

소희는 너무 기뻐서 엄마한테 달려갔습니다.

“엄마 걔들이 다 살아 있어요.”

“살아 있어? 거짓말 하면 못 써.”

“아니에요. 가 보세요.”

엄마도 올라가 돌아보고 기뻐했습니다.

“정말 다 살아 있구나. 누가 이렇게 화분갈이까지 하고 물을 주었을까? 고맙기도 하지.”

“누가 이렇게 해 놓았을까요?”

“글쎄다. 누군지 참 고맙기도 하구나. 이것들이 주인을 잘 만난 거야.”

“주인이요?”

“그래, 이제 너는 주인이 아니야. 얘들을 살려준 분이 주인인 거야. 그분이 아니었으면 저 지팡이나무처럼 다 말라죽었을 테니까.”

“엄마 말씀이 맞아요. 저는 주인이 아니에요.”

그렇게 이야기를 나눈 뒤에도 소희는 누가 그렇게 돌보아 주었을까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아침에 유치원에 갈 때는 옥상에 올라가 그것들을 돌아보았습니다. 어느 틈에 누군가가 물을 듬뿍 주어 파란 잎들이 싱싱하게 아침햇살에 반짝이며 무럭무럭 자랐습니다.

며칠 뒤에 딸기 줄기에는 굵은 딸기가 빨갛게 익어 매달려 있고 토마토 줄기에는 방울토마토가 다닥다닥 붙어 빨갛게 익었습니다. 날마다 토마토와 딸기가 예쁘게 익어 가는데 아무도 따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딸기와 토마토 줄기 옆에 하얀 종이가 놓여 있었습니다.

[주인님 딸기가 다 익었어요. 이제 따 잡수셔도 됩니다. 그리고 토마토도 이제 따도 됩니다.]

소희는 놀라 엄마한테 달려갔습니다.

“엄마 옥상에 가 보세요. 편지가 왔어요.”

“편지? 무슨 펀지가 옥상으로 오니?”

엄마는 옥상으로 올라가 편지를 읽었습니다. 그리고 기뻐하는 얼굴로 돌아와 그것보다 더 큰 종이에다 이렇게 써서 토마토 화분 옆에 달아놓았습니다.


[주인은 화분갈이를 해주고 길러주신 생명의 은인이 주인이십니다. 저희는 열매를 따먹을 권리가 없습니다. 주인님이 따 잡수세요. 저희는 보는 것만으로도 날마다 기쁩니다. 감사합니다.]

엄마는 아주 기뻐하며 옥상에서 내려왔습니다. 소희도 너무 기뻐서 노래를 부르며 내려왔습니다.

누군지 몰라도 마음씨 고운 분이 우리 곁에 있다는 것만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날마다 보는 분들 가운데 그 분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 아파트 사람들이 다 고마운 사람들로 보였습니다.


2

“엄마, 알아냈어요.”

소희는 아침 일찍 아무도 모르게 나갔다가 돌아와 현관문을 열면서 엄마를 불렀습니다.

“알아내다니 뭘 알아냈다는 거냐? 그런데 넌 언제 나갔었니?”

“다섯 시에 나가서 그 분을 보았어요.”

“그분이라니?”

“딸기에 물주고 방울토마토 익었다고 따가라는 편지 보낸 분을 알아냈다고요.”

“그래?”

그제야 엄마도 알아듣고 반가워했습니다.

“그 분은 할머니였어요.”

“할머니? 어떻게 생긴 분이시더냐?”

“아주 점잖게 생긴 품위 있는 분이셨어요.”

“그분을 알아내기 위해 그렇게 일찍 일어나 나갔던 거야? 잠꾸러기가.”

“예, 그분은 7층 1호에 사는 분이더라고요.”

“그래? 우리와는 3층 사이에 사는 분이었구나. 참 고마운 분이신데 그것도 모르고.”

“엄마 우리 이렇게 해요.”

“어떻게?”

“오늘 숨어서 보니까 할머니는 물을 정성껏 주시고 빨간 토마토를 쓰다듬어 주시고 내려가셨어요. 우리가 따다 먹을 때를 기다리시는 것 같아요. 딸기도 많이 달렸고 토마토도 다 따면 열 사람은 먹을 수 있을 거예요.”

“그걸 우리가 다 따다 먹자고?”

“그러면 안 되지요. 그것들을 따다가 할머니를 모시고 잔치를 하는 거예요. 엄마 그러면 좋겠지요?”

“그것도 좋은 생각 같다.”

소희와 엄마가 하는 말을 곁에서 듣고 계시던 아빠가 빙긋이 웃으며 끼어들었습니다.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고 있구나. 네 말대로 하면 좋겠다.”

“아빠도 찬성이에요?”

“암. 그렇지 않아도 어떤 분이 우리 딸기에 물을 주어 살려내고 가꾸셨는지 궁금했거든.”

이렇게 이야기를 나눈 다음 날 저녁입니다. 옥상에 꽃처럼 빨갛게 주렁주렁 매달린 방울토마토를 따고 맛있는 음식을 준비하고 소희가 7층 할머니를 모시고 왔습니다.

귀여운 소희가 할머니를 초대하자 할머니는 아주 기뻐하면서 소희네 집으로 오셨습니다. 소희가 문을 열고 들어서면서 엄마를 불렀습니다.

“엄마! 할머니 오셨어요.”

주방에서 엄마가 나오시며 인사를 했습니다.

“어서 오세……”

엄마는 갑자기 말을 못하고 놀란 듯 굳은 얼굴로 할머니 얼굴을 살피셨습니다.

“혹시 할머니는?”

할머니는 겸손하게 대답했습니다.

“네, 제가 그 늙은이입니다.”

엄마는 할머니를 뚫어지게 바라보시며 물었습니다.

“할머니는 혹시 계명초등학교 교장선생님이 아니셨나요?”

“아니, 그걸 어떻게 아셨습니까?”

“맞습니다. 교장선생님, 저는 그 학교 41회 졸업생입니다.”

“우리 학교 졸업생이셨다고요?”

“네, 벌써 20년이 넘었습니다. 그런데도 교장 선생님은 옛날 모습 그대로십니다.”

“그럼 이 아이 엄마가?”

“네, 제가 제자입니다.”

이렇게 인사하는 것을 보고 놀란 것은 소희였습니다. 소희도 겸손히 할머니 앞에 머리를 숙였습니다.

“그런 줄도 모르고 할머니라고 불러서 죄송합니다. 교장선생님.”

“귀엽기도 하지. 할머니 보고 할머니라고 한 것이 뭐 그리 죄송할까? 할머니 보고 아가씨라고 불러 보아라. 그랬다가는 크게 야단맞을 거 아니겠니?”

할머니 교장 선생님은 활짝 웃으면서 엄마가 안내하는 자리에 앉으셨습니다. 오늘 계획을 알고 계신 아빠도 일찍 돌아오셨습니다.

엄마가 할머니를 소개했습니다.

“여보, 인사드리세요. 초등학교 때 교장선생님이세요.”

“그 딸기 할머니가 당신의 스승님이시라고요?”

“네.”

아빠는 허리를 깊이 숙이고 인사를 올렸습니다.

“반갑습니다. 이렇게 누추한 곳까지 오시게 하여 죄송합니다.”

할머니 교장 선생님은 흡족한 미소로 아빠를 바라보며 손을 내밀었습니다.

“이렇게 만나게 되어 참 반가워요.”

할머니 교장 선생님과 마주앉은 아빠는 머리를 갸웃거리며 할머니를 뜯어 보셨습니다. 그리고 물으셨습니다.

“혹시 지난겨울 눈이 많이 내리던 날 제 차에 사과 박스와 신문지를 덮어 주신 분이 아니신가요?”

할머니 교장 선생님이 더 놀라운 듯 눈을 크게 뜨셨습니다.

“아니 그럼?”

“맞습니다. 감사합니다. 저는 그 날 퇴근을 하고 차를 세워둔 다음 슈퍼에 가서 과일을 좀 사가지고 돌아오다가 어떤 할머니가 내 차에 신문지를 정성껏 덮어놓고 들어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시는 바람에 인사할 기회를 놓쳤습니다. 그 뒤에 인사를 하려고 했지만 할머니를 만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만나게 되다니 기적입니다.”


할머니 교장선생님은 어이없다는 듯 아빠를 바라보시다 입을 열었습니다.

“그건…….”

아빠는 너무 감격한 듯 할머니가 무슨 말인가 하시려는 것을 가로막았습니다.

“그렇게 마음씨가 고우신 분이 아니면 옥상에 있는 딸기를 살려내지 못하셨을 겁니다. 추운 날 남의 차에 신문지까지 덮어주신 교장선생님은 천사이십니다.”

엄마도 거들었습니다.

“정말이에요. 우리 선생님 같으신 분이시니까 딸기를 살려내신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 차에 신문지를 덮어 주신 거고요. 우리 교장 선생님은 옛날부터 인자하신 분이셨거든요.”

할머니 교장 선생님은 제자 부부가 차려주는 음식과 옥상에서 따온 딸기를 맛있게 드시고 방울토마토 한 봉지를 들고 소희네 집을 나섰습니다.

그리고 중얼거렸습니다.

“늙으면 내 차 남의 차도 몰라보지만 자기 제자도 몰라보는 바보가 되는 거야.”

할머니가 소희 아빠 차에 신문지를 덮어준 것은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눈이 너무 많이 와서 다음날 일찍 강의장에 나가려면 눈이 차에 덮이면 안 되겠다 싶어 자기 차인 줄 알고 신문지를 덮어 놓은 차가 바로 똑같이 생긴 소희 아빠의 차였습니다.

할머니는 웃으며 또 중얼거렸습니다.

“그게 아닌데, 그게 아닌데……” 

(한국크리스천문학 제42집 게재)

사람아 넌 무엇이 되고 싶으냐


조물주가 온갖 새와 짐승과 벌레를 모아 놓고 말했습니다.

“사람이 되고 싶으면 앞으로 나오너라.”

아무도 나가지 않았습니다. 이상하게 생각한 조물주가 까치를 바라보았습니다.

“까치, 너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으냐?”

“싫습니다.”

“이유는?”

“사람이 되면 걸어 다녀야 하기 때문이에요.”

“그럼 너는 무엇이 되고 싶으냐?”

“호랑이가 되고 싶어요.”

“그 이유는?”

“동물 중에 가장 무서운 것이 호랑이기 때문이지요.”

“알았다.”

이번에는 바퀴벌레에게 물었습니다.

“너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으냐?”

“사람은 싫어요. 법을 만들어서 서로 얽어매고 잡혀가고 그 꼴은 못 봅니다. 저는 안 할래요.”

“그걸 어디서 보았느냐?”

“제가 사는 집 주인은 직업이 없어요. 그래서 밤마다  남의 집에 남아도는 물건을 가져오는데 그걸 도둑질이라고 경찰이 잡아가는 것을 보았어요. 경찰도 없고 도둑도 없는 우리가 얼마나 좋아요.”

“너는 더 큰 도둑이라는 걸 모르느냐?”

“제가 무엇을 했다고 도둑이라 하십니까?”

“넌 도둑이 사는 집에서 집세도 안 내고 숨어들어 도둑 살림을 차리고 처자식들을 데리고 사람들이 해놓은 음식을 훔쳐 먹고 살지 않느냐? 너야말로 경찰이 잡아가야 할 존재니라.”

“헤헤헤 다행히 사람들은 우리를 잡아갈 법을 만들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법에만 안 걸리면 통과입니다요.”

“못된 놈.”

조물주는 나비한테 물었습니다.

“너는 사람이 되고 싶겠지?”

나비도 고개를 저었습니다.

“사람은 싫어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은 이유는?”

“사람 노릇은 너무 힘들어요. 아이 때는 학교를 가고 과외를 하고 공부로 실력 싸움을 하고 어른이 되면 군대에 가고 전쟁을 하고 자식 걱정에 먹고 살 걱정을 하는 사람이 싫어요. 날마다 춤만 추고 사는 우리가 얼마나 행복한데요.”

“음, 그럼 땅속에만 숨어 다니는 두더지는 사람이 되고 싶겠지.”

“왜 하필이면 저보고 사람이 되라 하십니까?”

“땅속에만 숨어 살자니 자존심이 많이 상하지 않느냐?

“자존심이란 사람한테나 해당되는 것이지 우리들한테 자존심이 왜 필요합니까. 자존심을 따지고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불쌍합니까? 그래서 사람 되는 것이 싫습니다.”

“내가 공연한 것을 물었구나.”

조물주가 소를 보고 물었습니다.

“너는 사람이 되어 너희를 혹사하는 사람들에게 복수를 하고 싶겠지?”

황소가 껄껄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모르시는 말씀입니다. 우리야 사람이 하자는 대로 하면 주인은 우리의 종이 되어 하루에 세 번 먹을 것을 차려주는데 왜 하필이면 사람이 됩니까.”

노동하기 힘들지 않느냐?”

“그걸 물으시면 어떡해요? 우리들한테 조물주님께서 특혜로 주신 것이 무엇입니까?”

“음, 힘이지.”

“바로 그 힘은 우리가 꼭 써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안 쓰면 우리는 비대증에 걸려 제 명대로 못 삽니다. 고맙게도 사람들이 우리에게 힘 쓸거리를 만들어 주어 얼마나 다행입니까. 사람들은 우리를 종으로 알고 부리지만 우리는 사람을 하인으로 알고 단지 하자는 대로 놀아줄 뿐입니다.”

“허허허 사람이 너희를 못 당하고 있구나. 그런데 사람들은 너희를 실컷 부려먹고 마지막에는 잡아먹는데 그것도 억울하지 않으냐?”

“그건 더 좋은 일입니다. 사람들은 죽으면 장사를 지내고 묘를 만들고 벌초를 하고 제사를 지내고 얼마나 복잡합니까. 그러나 우리는 늙어 죽을 때가 되면 사람들이 즐겁게 먹어주고 우리 장사는 사람들이 치러주잖아요.”

“억지 같지만 그럴 듯한 변명이로구나.”

조물주는 개에게 물었습니다.

“너는 사람과 가장 가까이 살지만 사람들이 저희끼리 말할 때 개만도 못하다고 하는 말을 들으면 어떠하냐? 그 소리를 들으면 당장 사람이 되고 싶지 않으냐?”

“컹컹컹.”

“그게 무슨 소리냐?”

“웃는 소리입니다요.”

“웃다니?”

“우리 개들끼리 개를 무시할 때 뭐라고 하는지 아십니까?”

“너희끼리?”

“예. 개 중에 못된 개를 우리는 사람만도 못한 놈이라고 합니다요.”

“그건 또 무슨 소리냐?”

“우리는 의리를 중요시합니다. 그런데 어쩌다 도둑질을 하는 녀석이 생기면 그럴 때 사람 같은 놈 하고 비웃습니다.”

“어째서 그런 말이 나오느냐?”

“동물 중에 도둑이 가장 많은 동물이 사람 아닙니까?”

“그래도 사람은 의리가 있느니라.”

“의리로 말하면 사람이 우리만 합니까? 우리 개들은 주인 모시기를 하나님 모시듯 합니다. 주인이 집을 비우면 집을 지키고 도둑이 들면 왕왕 짖으며 물어뜯어 내쫓고 주인과 동행할 때는 주인의 보호자가 되어 드립니다. 그런데 가끔 주인한테 불만이 있어서 주인을 물어뜯는 개가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사람만도 못한 놈이라고 왕따를 시킵니다.”

“듣자듣자 하니 못 하는 소리가 없구나.”

“그래서 사람은 되고 싶지 않다는 것 아닙니까?”

조물주가 호랑이게 물었습니다.

“너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으냐?”

“어흥 어어흥흥.”

“그게 무슨 소리인고?”

“영어로 노우 노우 하는 소리입니다.”

“네가 영어도 아느냐?”

“우리야 동물들이 내는 소리를 다 알아 듣지 않습니까.”

“그랬던가.”

“너도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는 말이냐?”

“물론입니다. 동물 중에 만물의 영장이라고 사람들은 자기들을 추켜세우지만 만물의 영장은 따로 있지 않을까 합니다요.”

“오만하도다.”

“사람들은 옛날에 우리들을 영물이라고 했습니다. 영물이 뭡니까? 조물주님 다음으로 카리스마가 있다는 말 아닌갑쇼?”

“건방진 것 같으니. 네가 영어를 알면 얼마나 안다고 아무데서나 영어를 지껄이느냐?”

“사람을 저희와 비교하시니 존심이 좀 상했습니다요.”

“네가 사람이 되고 싶지 않은 이유가 또 있느냐?”

“이유가 한두 가지겠습니까. 저는 산 속에서 어슬렁거리고 산책이나 하다가 배고프면 아무 것이든 잡아먹고 졸리면 아무데서나 누워 잡니다. 저한테는 집도 필요 없고 먹을 것도 걱정이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들 좀 보시지요.”

“사람이 어때서?”

“사람은 집이 없어 거지가 되고 먹을 것이 없어 거지가 되고 입을 것이 없어 거지가 됩니다. 거지한테는 거지가 친구일 뿐 거지 아닌 사람들은 거지를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습니다. 거지는 도둑이 되고 도둑은 살인범이 되고 살인범은 죄수가 되고 죄수는 감옥에 갇혀 죽어야 하고…….”

“그런 것까지 아느냐?”

“그뿐 아닙니다. 날개도 없는 사람들은 빨리 갈 욕심에 날틀을 만들어 하늘을 질러가고, 지느러미도 없으면서 물속을 다니겠다고 배를 만들고, 길을 빠르고 편하게 다니겠다고 차를 만들어 타고 다니고 얼마나 복잡합니까. 사람은 복잡하고 힘겹게 살다가 욕심을 못 채우고 사라집니다. 세상에 무서울 것 하나 없는 영물로 사는 저에게 사람이 되라고 하시다니 지상의 왕 영물을 너무 무시하셨습니다.”

조물주는 어떤 동물이 사람이 꼭 되고 싶을까 생각하다가 가장 천하게 살고 지저분한 돼지에게 물었습니다.

“너만은 사람이 되고 싶겠지? 그 지저분한 우리 속에서 엉덩이에 오물을 덕지덕지 붙이고 사는 것이 얼마나 괴롭겠느냐. 네가 사람이 된다면 양복을 빼입고 넥타이를 매고 머리 기름을 자르르 바르고 자가용을 타고……”

“꽥! 꽤꽥꽥!”

“시끄럽다. 그게 무슨 소리냐?”

“가장 불쾌할 때 내는 소리 아닙니까?”

“불쾌하다니! 내가 너한테 못할 말을 했느냐?”

“사람이 되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사람이 어때서?”

“우리는 사람들이 가장 선망하는 왕입니다.”

“허허 왕이라 했느냐?”

“이 세상에서 가장 편하게 먹고 놀다 가는 동물은 우리 돼지밖에 없습니다.”

“무슨 소리냐?”

“보십시오. 개도 밤낮으로 경비를 서야 하고, 소는 온 종일 주인을 위해 일을 해야 하고, 호랑이가 만물의 영장이라고 큰소리치지만 사람이 무서워 산에서 나오지 못하고, 바퀴벌레는 약을 치면 온 족속이 몰살을 당하고, 새도 강한 새한테 잡아먹히는 것이 두려워 눈치를 살피며 먹이를 찾아 거지처럼 돌아다녀야 하고, 나비도 꽃을 찾아 날개가 아프도록 날갯짓을 해야 하고 안 그렇습니까?”

“너는?”

“우리 돼지들이야 자고 싶으면 자고 먹을 때 되면 우리가 거느린 사람들이 먹을 것 가져오고 무엇이 부족합니까. 게다가 우리는 사람처럼 목욕을 하고 화장을 하고 예의 법도를 만들어 지킬 필요도 없습니다. 왜 화장이 필요하고 목욕이 필요합니까. 먹고 싸고 뒹굴고 그게 진자 행복한 여유 아닙니까. 우리를 사람들이 얼마나 부러우면 복돼지라고 합니까. 귀여운 아기를 ‘복개’ ‘복호랑이’ ‘복늑대’ ‘복나비’ ‘복소’ ‘복두더지’ ‘복여우’라고 하는 것 보셨습니까? 오직 우리를 복돼지라고 하는 것만 보아도 우리가 얼마나 귀하고 행복한 존재인데 무엇이 아쉬워 사람이 되겠습니까?”

조물주는 끝내 사람이 되겠다는 동물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동물 중에 사람이 가장 불쌍한 동물이 아닌가 생각한 조물주는 사람을 찾아가 물어보기로 했습니다.

“사람아, 넌 무엇이 되고 싶으냐?”

아기 없는 엄마와

엄마 없는 아기가

백년 만에 처음이라는 큰 홍수가 났습니다.

홍수에 학교도 떠내려가고 면사무소마저 주저앉았고 동네가 있던 자리는 모래벌판이 되었습니다.

근처에 남은 집이라고는 몇 년 전에 산기슭에 지어 놓은 기도원뿐입니다. 갈 곳 없는 수재민들이 모두 기도원으로 몰려들었습니다.

“기도원을 지을 때 내가 앞장서서 반대를 했는데 이렇게 신세를 질 줄 누가 알았나.”

한 사람이 이렇게 말하자 다른 사람도 덧붙였습니다.

“글쎄 말일세. 나도 별별 소리를 다했지. 그래놓고 아쉬워서 찾아들자니 면목이 없군그래.”

이렇게 모인 사람들이 넓은 예배당에 가득했습니다. 기도원의 목사님과 봉사하는 집사님들이 친절하게 마을 사람들을 돌보았습니다.

기도원에서는 아침과 저녁 두 번씩 예배를 드렸습니다. 기도원 목사님은 재난을 당하여 온 사람들에게 양해를 구했습니다.

“홍수를 당하고 오신 여러분께 무슨 말씀으로 위로해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을 믿지 않던 분이나 다른 종교를 가지고 계신 분들이라도 저희가 드리는 예배에 함께 하여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절대로 개종하라는 말씀이나 전도를 위한 말씀은 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니 편히 잠시만 참아 주시기 바랍니다.”

밖에는 아직도 비가 내리고 있어서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어쩔 수 없이 앉아 있어야 했습니다. 목사님이 홍수로 피해를 입은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 기도가 얼마나 정성스럽고 간절했던지 믿지 않는 사람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목사님의 설교가 끝나고 각자가 기도하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교인들이 모두 머리를 숙이고 웅성웅성 소리를 내어 기도했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도 머리를 숙이고 ‘하나님이 만약 있으시다면 이 어려움에서 구해 주시오’라고 중얼거렸습니다.

건너 마을에서 피해를 입고 온 아주머니는 하나님을 믿지 않던 분입니다. 그렇지만 남들이 하는 대로 따라 엎드려 하나님께 기도를 하고 있는데 곁에 앉은 아이가 울면서 애절히 기도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하나님 저는 어떻게 해야 해요? 아빠도 엄마도 동생도 형도 다 물에 떠내려가고 저만 남았어요. 저는 친척도 없어요. 이웃 사람들도 다 떠내려가고 저만 남았어요. 하나님 저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어떻게 해야 하나요 어떻게 해야 하나요 하나님 어떻게 해야 하나요.”

아이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어떻게 해야 하나요 하고 같은 소리만 되풀이했습니다. 실은 아주머니도 그 말밖에 할 말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기도 따라 어떻게 해야 하나요 하고를 되뇌면서 기도가 끝나기를 기다렸습니다.

밖에 비가 잠시 멈추고 하늘에 구멍이 난 듯 파란 하늘이 보이고 그 사이로 햇살이 쏟아졌습니다. 예배실 안에 갇혔던 사람들이 우르르 나와 기도원 언덕 위에 서서 골짜기를 휩쓸고 흘러가는 물결에 마음을 흘려보내고 있었습니다.

여섯 살쯤 보이는 그 아이도 밖으로 나와 멀리 산허리를 감싸고 흘러가는 흙탕물결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아주머니가 그 곁으로 다가갔습니다.

“넌 어디서 온 아이냐?”

“이쪽 골짜기에서 왔어요.”

“너 혼자 살아남았니?”

“네. 갑자기 저쪽 산골짜기에서 물이 쏟아져 내려왔어요. 들에 나가신 아빠는 저 아래서 물에 떠내려가셨어요. 갑자기 물이 집안으로 들어와 엄마는 동생을 업고 장독대로 피했고 형은 장독대 옆에 있는 큰 감나무 위로 올라갔어요.”

“너는?”

“저는 놀라서 산위로 기어올랐어요.”

“그래서 너는 살았구나. 그래 형은 어떻게 되었고?”

“물이 장독대까지 찼어요. 그래서 엄마도 동생을 업고 형이 올라간 감나무의 큰 가지를 타고 올랐어요.”

“그래서?”

“물이 자꾸 차올라 형도 엄마도 나무 끝까지 올랐어요.”

아이는 잠시 말을 못하고 울먹였습니다. 당시의 이야기를 차마 할 수 없어서였습니다. 아주머니가 애처롭게 바라보는 것을 느낀 아이는 말을 이었습니다.

“형이 올라간 감나무 가지가 부러지려고 했어요. 그 옆에 있는 가지를 잡고 있는 엄마가 손을 내밀며 ‘이쪽으로 건너와라’ 하고 소리쳤어요. 그러나 형이 매달린 감나무가지는 부러지고 형은 흙탕물에 휩쓸려 떠내려가며 엄마를 불렀어요.”

“저런!”

“형은 두 번 엄마 엄마 하고 부르다가 물속으로 말려들어가 없어졌어요.”

“엄마는?”

“엄마는 물이 차 오르기 때문에 업고 있던 동생을 어깨 위에다 높이 들어 올리고 나뭇가지를 잡고 있었어요.”

“그래서?”

“물결이 엄마 머리를 덮었어요. 그래도 동생을 높이 추켜들고 있었어요.”

“오! 하나님.”

“엄마가 추켜올린 동생은 아무것도 모르고 나를 보고 웃었어요.”

“딱도 하지.”

“엄마는 물속에서 동생을 받쳐 들고 있다가 물에 떠내려갔어요.”

“동생은?”

“동생도 웃으면서 엄마를 따라 물속으로 빠졌어요. 우리 식구들을 다 삼킨 흙탕물이 저 산모퉁이로 흘러가고 있어요.”

아이는 이렇게 말하고 멀리 흘러가는 물결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아주머니는 어린것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자기의 아픔은 잠시 잊고 있었습니다.

아주머니도 아이만큼이나 가슴이 아팠습니다. 아침에 들에 나간 남편과 학교 간다고 집을 나선 아이들이 눈 깜작할 사이에 물에 휩쓸려 떠내려가고 혼자만 남았기 때문입니다. 

아주머니는 아이를 잡아 당겨 가슴에 안고 울었습니다. 아이도 따라 울었습니다.


이튿날 아침에는 골짜기를 휩쓸던 물이 빠졌습니다. 사람들은 기도원을 나서서 자기가 살던 집터를 찾아 떠났습니다. 아이도 아주머니도 떠나야 하는데 집은 이미 모래더미 속에 묻혔고 갈 곳이 없었습니다.

아주머니가 아이를 불렀습니다.

“너는 나하고 가자.”

“어디로 가요?”

“아무데로나 가자.”

“아줌마 집에 안 가시고요?”

“집이 떠내려가고 아무것도 없다. 너도 그렇지?”

“네.”

“나도 너도 갈 곳 없고 만날 사람 없는 신세는 똑같구나. 이렇게 되었으니 너하고 나 어디든 같이 가 보자. 그래도 살 길이 있겠지.”

다행히 아주머니는 집에서 소 판돈을 가지고 나왔습니다. 그것으로 읍내에서 작은 방 한 칸을 얻었습니다.

아주머니는 시장에서 부엌살림 도구를 사고 쌀과 반찬거리를 마련하여 왔습니다. 그리고 아이와 저녁을 먹고 집 앞의 언덕으로 올라가 나란히 앉았습니다.

하늘에는 별들이 언제나처럼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평화롭게 반짝거리고 어디선지 멀리 기차 달려가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하늘을 바라보던 아주머니가 물었습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니? 엄마 생각하고 있니?”

“네.”

“나도 너 같은 아들을 떠내려 보냈다. 불쌍한 것…… 그렇게 갖고 싶어 하던 자전거를 못 사준 것이 가슴 아프구나. 넌 무엇이 갖고 싶었지?”

“없어요.”

“엄마는 고향이 어디였어?”

“충청도 진천이라는 곳이었어요.”

“외가가 거기 있겠구나?”

“모르겠어요. 가보지 않아서 어딘지 몰라요.”

“그래? 엄마 이름은 알고 있지?”

“김미연이라고 해요.”

“김미연? 김미연이라고?”

“네. 그런데 왜 놀라세요?”

“아니다. 엄마가 어떻게 생겼었지?”

“우리 엄마는 키가 작은 편이었지만 아주 예뻤어요. 그리고 코와 입술 사이에 작은 점이 있었는데 사람들이 그 점을 매력점이라고 놀렸어요.”

“매력점…….”

아주머니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무슨 생각에 잠겼는지 서쪽 멀리 보일 듯 말 듯한 별을 바라보며 중얼거렸습니다.

“별처럼 갔구나. 잡을 수 없는 별처럼 떠났어. 슬프게……”

아이가 물었습니다.

“우리 엄마를 아시나요?”

“아니야, 별을 보고 있으니 슬픈 생각이 나서……”

아이가 문득 생각난 듯 말했습니다.

“엄마는 고향에 아주 친한 친구가 있었대요.”

“그랬니? 그 친구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니?”

“이경미라고 했어요.”

“……”

아주머니는 아이를 끌어안았습니다. 그리고 속으로 말했습니다.

‘미안하다 미연아. 미안해, 미안해. 이 애가 네 아들이라니……’

아주머니는 바로 아이의 엄마 친구 경미였습니다. 십년 전에 사업자금을 빌려다 쓰고 아직도 갚지 못하여 늘 죄책감에 빠져 살아오던 터였습니다. 돈 때문에 십년이 넘도록 못 만난 친구의 아들을 이렇게 만난 것입니다.

아주머니는 아이의 이름을 물었습니다.

“넌 이름이 뭐냐?”

“황태수입니다.”

“태수, 태수…… 난 이름이 없단다. 이제 너하고 나만 남았으니 나한테 엄마라고 부르면 안 되겠니?”

“……”

“엄마 하고 불러봐.”

“……”

“당장 그렇게 부르지 않아도 좋아. 네가 마음으로 엄마라고 부를 때까지 기다릴게. 난 너의 엄마가 되고 싶어.” 


동물들의 항의

세상에서 가장 착한 동물은 토끼입니다.

놀라기 잘하고 먹는 것도 예쁜 입으로 조금씩밖에 먹지 않습니다. 욕심도 없고 불만이 있어도 말하지 않습니다. 얌전하고 순한 토끼장 앞에 동물들이 모여 회의를 했습니다.

맨 먼저 귀뚜라미가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참 이상합니다. 우리가 노래하면 운다고 합니다. 귀뚤귀뚤 작작작 귀뚤귀뚤 색색색/우리는 사는 동안 행복합니다/달밤엔 책 펴놓고 귀뚤귀뚤귀귀뚤 /어둔 밤엔 사랑 안고 귀뚤귀뚤 내 사랑. 이렇게 즐기며 부르는 노래가 얼마나 듣기 좋습니까. 이게 우는 소리로 들리는 사람들은 참 불쌍합니다.”

이 말을 들은 뻐꾸기가 거들었습니다.

“맞습니다. 뻐꾹! 사람들은 참 답답합니다. 내가 목을 빼고 친구를 찾으며 노래를 하면 나 보고도 운다고 합니다. 친구들아 모여라 뻐꾹 뻐뻐꾹 / 진달래가 피었다 뻐꾹 뻐뻐꾹/ 사랑하는 민숙아 뻐꾹 뻐뻐꾹/ 진달래 꽃 따줄게 뻐꾹 뻐뻐꾹/ 오목눈이 둥지 속에 알을 낳았다./ 오목눈이 엄마 새야 미안해 뻐뻐꾹. 이렇게 노래를 하는데 우리를 보고 운다고 하니 그게 말이 됩니까?”

이때 닭이 소란스럽게 나섰습니다.

“두 분 말씀이 맞습니다. 나는 사람들과 가장 가까이 지내며 새벽마다 날이 밝았으니 일어나라고 목청을 돋우어 꼬끼오! 꼭 깨오! 외치면 게으름뱅이들은 새벽닭이 운다면서  귀찮아합니다. 내가 왜 새벽부터 울겠습니까? 꼭 끼어 안고 싶다 나의 사랑 닭순아 꼭끼오 꼭끼오/ 아침 먹고 놀이 가자 닭순아 꼭끼오/ 하는 말을 사람들은 알아듣지 못하고 운다고 합니다.”

이때 매미와 개구리가 한꺼번에 자기가 먼저 말하겠다고 나섰습니다. 그래서 사회를 맡은 돼지가 말했습니다.

“자, 그러지 마시고 이제부터 발언할 분은 미리 접수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접수는 가나다순으로 하겠습니다. 매미보다는 개구리가 먼저 되겠습니다. 또 접수할 분 있습니까?”

참석자 뜸부기, 부엉이, 소쩍새가 가나다순으로 접수했습니다.

돼지가 개구리에게 발언권을 주자 개구리가 말했습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모내기할 때 올 농사는 풍년일세 개굴개굴 일하세/ 남자들은 모를 심고 아주머니 밥 내온다 개굴개굴 신난다/ 우리도 짝을 짓고 결혼하자 개굴개굴/ 그런데 사람들은 우리가 운다고 합니다. 울면서 사랑할 짝을 찾는 동물이 어디 있습니까?”

참석자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뒤를 이어 매미가 연미복 차림으로 나와 말했습니다.

“앞에 분들도 다 그러셨습니다만 우리가 나무 위에서 여름 내내 노래를 부르며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는 것을 사람들은 너무 모릅니다. 맴맴 쓰르르맴 아이들은 꿈을 꾸고 어른들은 쉬시지요 맴맴 쓰르르맴/ 아름다운 세상에서 함께 있어 좋아요 맴맴 쓰르르맴/ 우리들은 사람들을 사랑합니다 맴맴 쓰르르맴. 그런데 우리가 운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참 이상해요.”

이때 뜸부기가 날개를 활짝 펴 올리며 뜸북 뜸북하고 외쳤습니다.

“내 소리 들어보셨지요? 이게 우는 소리입니까? 농부들이 일할 때 우리는 농부들 일손에 맞추어 뜸북뜸북 장단을 맞추어 주면서 노래를 하는 것입니다. 왼손으로 파고 오른 손으로 덮어요 뜸북뜸북 뜸뜸북/ 아주머니 밥 내와요 뜸북뜸북 뜸뜸북/ 새참에 막걸리는 나도 한잔 먹고 싶네 뜸북뜸북 뜸뜸북/ 올 가을에 아들 장가 뜸북뜸북 뜸뜸북/ 쉬엄쉬엄 하시지요 뜸북뜸북 뜸뜸북 이 얼마나 정다운 노래입니까? 이것도 모르고 우리가 운다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노래까지 있어요. 뜸북뜸북 뜸북새 논에서 울면 우리 오빠 말 타고 서울 가시며 비단구두 사가지고 오신다는데 어쩌고 말입니다. 비단구두 사오면 얼마나 기쁜 일인데 운단 말입니까. 뜸북뜸북 뜸북새 노래를 하면 우리 오빠 말 타고 서울 가시고 돌아올 때 웃으며 구두 사온대 하면 얼마나 듣기 좋습니까.”

모여 있는 동물들이 모두 옳소 하고 박수를 보냈습니다. 부엉이도 뜸부기처럼 부우엉 부우엉 하고 말을 시작했습니다.

“제 소리가 우는 소리로 들리는 분 앞으로 나오십시오. 나는 밤이 깊어가고 있으니 그만들 자라고, 그만 주무시지요 부엉부엉 / 좋은 꿈 꾸세요 부엉부엉 / 부부 싸움 하지 말고 안고 자세요 부엉부엉 부우엉 / 도둑들아 물러가라 부엉부엉 그런데 내 마음을 알아주지 않는 사람들이 원망스럽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소쩍새 어른?”

소쩍새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했습니다.

“부엉 어른이 말씀하신 대로 사람들은 우리의 노고를 너무 몰라줍니다. 나도 밤이면 밤마다 돌아다니는 도둑들을 지키며 도둑이 서쪽으로 갑니다 서쪽서쪽 / 내 짝은 어디 있나 서쪽이냐 동쪽이냐/ 달 밝으니 참 좋구나 서쪽서쪽/ 처녀 총각 저리 가네 서쪽서쪽 외치면 내 속도 모르고 내가 운다고 합니다. 무엇이 아쉬워 한밤중에 울겠습니까?”

사회를 맡은 돼지가 좌중을 돌아보며 말했습니다.

“아침에 우는 새는 배가 고파 울고 저녁에 우는 새는 임이 그리워 운다는 노래도 있습니다. 그건 사람들 생각이지요. 아침에 새가 우짖는 것은 우는 것이 아니라 해가 뜨니 기쁘다는 노래이고 저녁에 짖는 것은 여기 잠자리를 마련했으니 이리 오라고 친구 부르는 소리 아닙니까?”

이때 잠잠히 듣고만 있던 토끼가 빨간 눈을 굴리며 말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까마귀님과 까치님. 개님들은 사람들이 운다고 하지 않고 짖는다고 하니 다행입니다.”

까치가 돼지에게 말했습니다.

“개가 짖는다는 말은 그럴 듯하게 들리지만 우리 새들을 보고 짖는다고 하면 개가 된 기분이 들고 자존심이 좀 상합니다.”

이때 개가 멍멍하고 소리쳤습니다.

“무엇이 어때요? 자존심이 상한다고요? 나는 새들이 짖는다고 하는 말이 귀에 거슬렸습니다. 새가 짖다니 새들 수다에 우리는 잠도 제대로 못 자요. 우리가 멍멍하고 소리치는 것은 우리만 다니는 길로 도둑이 들어옵니다. 구멍을 보세요 개구멍 보세요 멍멍/ 쥐구멍 보세요 멍멍/ 개구멍은 우리같이 정의로운 무리가 다니는 길을 감히 도둑과 쥐가 다니기 때문에 불쾌한 것입니다. 그리고 수다나 떠는 새들이 그런 소리를 낼 수 있습니까?”

까치가 받아 말했습니다.

“우리가 수다를 떤다고 하셨습니까? 나는 높은 나무 위에서 멀리 손님이 오시는 것을 알고 반가운 손님이 오십니다 하고 누구보다 먼저 알리는 일을 합니다. 그런데 가끔 사람들은 우리가 운다고 하는 소리도 들었습니다만 개처럼 짖는다는 말을 더 많이 들었습니다.”

이때 까마귀가 까치의 말을 막고 입을 열었습니다.

“사람들은 저를 흉조라고 하는 나라도 있고 길조라고 하는 나라도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저를 흉조라고 합니다. 까악까악 하고 소리 내는 것은 노래도 짖는 것도 아닙니다. 매사에 조심하셔야겠습니다. 조심하세요 조심하세요 하고 외치는 소리입니다.”

동물들의 항의는 끝없이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나 사회자 돼지가 졸려서 잠 좀 자야겠다고 하면서 결론을 내렸습니다.

“여러분의 소원을 들었으니 앞으로는 사람들이 새들이나 개구리가 운다는 말을 못하게 하겠습니다. 노래를 운다고 생각하는 마음을 고쳐주어야 합니다. 서양에서는 모두 노래한다고 합니다. 어두운 역사를 가지고 슬프게 살아온 사람들은 무슨 소리든 우는 소리로 듣는 것이 운명을 더 어둡게 만듭니다. 나는 늘 즐거워서 웃고 삽니다. 음식마다 꿀맛이라 꿀꿀/ 잠을 자도 꿀맛이라 꿀꿀/ 세상에 꿀맛 아닌 게 어디 있습니까. 그래서 사람들은 내가 운다는 말은 안 하고 모두 나만 보면 꿀꿀합니다. 여러분 앞으로는 모두가 꿀꿀꿀꿀 삽시다.”

(2009년 가을 창조문학 게재)

아빠 게의 사랑

바닷물이 빠져나간 갯벌에는 여기저기 웅덩이만 남았습니다. 

웅덩이 물가에 두루미 한 마리가 내려와 목을 길게 빼고 눈을 두리번거렸습니다.

엄마 게가 아이들에게 소리쳤습니다.

“얘들아, 위험하다. 다들 구멍 속으로 숨어라.”

아빠 게도 소리쳤습니다.

“빨리 숨어라. 위험하다. 빨리.”

아기 게들은 모두 구멍 속으로 쏙쏙 들어가 숨었습니다.

이때 두루미가 아빠 게를 발견하고 성큼성큼 다가왔습니다.

“이게 웬 떡이냐, 아주 큰 놈인데.”

엄마 게가 소리쳤습니다.

“위험해요. 빨리 굴속으로 들어가세요.”

아빠 게는 두 팔을 벌리고 대답했습니다.

“아니야. 난 저 두루미가 다시는 얼씬도 못하게 혼쭐을 내 줄 거야. 우리를 위협하는 저 두루미를 오늘은 가만 두지 않을 거야. 아이들과 당신이나 조심해.”

두루미가 기다린 부리를 쑥 내밀어 아빠 게를 물려고 했습니다. 이때 아빠 게는 잽싸게 집게를 쫙 벌리고 두루미 부리를 꽉 물었습니다. 기다란 부리는 미처 입을 벌리지 못한 채 게의 왕 집게발에 물렸습니다.

“음음, 음음.”

두루미는 부리를 물린 채 껑충껑충 뛰었습니다.

아빠 게는 더욱 힘을 주어 집게에다 힘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못된 두루미야, 네가 우리 형제들을 얼마나 물어갔는지 알아? 넌 오늘 나한테 죽어 봐.”

두루미는 부리를 물린 채 음음 소리만 질렀습니다.

아빠 게는 더욱 힘을 주어 물었습니다. 엄마 게는 다가가지도 못하고 숨어서 마음을 졸였습니다.

부리가 잡힌 두루미는 양 날개를 활짝 폈습니다. 그리고 긴 다리를 접었다 쭉 펴며 날개를 저었습니다. 그리고 하늘 높이 날아올랐습니다.

아빠 게는 두루미 입을 꽉 문 채 놓아주지 않았습니다.

엄마 게는 하늘 높이 두루미를 물고 날아가는 아빠 게를 향해 소리쳤습니다.

“그만 놓아 주세요. 그렇게 높이 올라가면 위험해요!”

그러나 아빠 게는 집게에 더욱 힘을 주면서 대답했습니다.

“염려 말아요. 난 괜찮아아아. 아이들이나 잘 지켜어어어.”

그 소리도 작아지고 두루미 입을 문 아빠 게는 아주 높이 날아올라 아래서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잠깐 사이에 두루미는 멀리 구름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그렇게 하여 아빠 게는 새끼 게들을 지키려고 하늘로 올라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엄마 게는 아이들을 모아 놓고 말했습니다.

“앞으로 너희들은 적이 나타나면 빠르게 숨어야 한다. 그리고 아무리 억울해도 우리가 당할 수 없는 적이 나타나면 대들지 말고 숨는 것이 사는 길이다. 감정에 못 이겨 함부로 대적을 상대해선 안 된다. 알았지?”

그러나 새끼 게들은 하늘로 올라간 아빠 게가 돌아오기만 기다렸습니다. 새끼 게 맏형이 말했습니다.

“우리 아빠는 세상에서 가장 힘센 집게를 가졌어. 두루미도 아빠를 당하지 못할 거야.”

새끼들은 엄마 말을 다 잊어버리고 하늘만 바라보았습니다.


엄마와 포도

엄마가 포도밭에 나가시는 날 나는 하루 종일 집을 봅니다.

그러다가 해가 질 때쯤 들길로 나가 엄마를 기다리면 엄마는 온 종일 포도밭에서 일을 하시고 포도처럼 까만 얼굴로 돌아오십니다.

나는 달려가 엄마 손을 잡고 부지런히 걸으면서 말했습니다.

“엄마는 좋겠어요.”

“그게 무슨 말이냐?”

“엄마는 온 종일 포도를 따먹다가 오시는 거 아녜요?”

“포도밭을 하는 사람이 포도를 다 따먹으면 무엇을 가지고 팔겠니?”

“정말 하루 종일 포도 한 송이도 안 따 잡수셨어요?”

“한 송이가 아니라 한 알도 안 따 먹었단다.”

“오늘 엄마가 이고 오는 포도는 파실 거예요?”

“이건 올 농사를 지은 첫 열매란다.”

“그래서 우리 식구가 먹을 건가요?”

“아니야, 이건 아주 귀한 분에게 드릴 거야.”

“우리 식구들보다 더 귀한 분이 있나요?”

“그럼, 우리 식구보다 더 귀한 분이 계시지.”

“아빠보다요?”

“그 분 다음이 아빠지.”

우리 집에서 아빠보다 더 귀한 분이 누굴까?


다음 날 아침 엄마는 곱게 차려 입으셨습니다. 그리고 포도 바구니를 이고 내 손을 잡으셨습니다.

“가자.”

“장으로 가실 거예요?”

“아니다. 교회로 간다.”

“포도를 가지고 교회로 가요?”

“이 포도는 하나님께 바칠 것이란다.”

“하나님이 포도를 잡수시나요?”

“그럼, 하나님은 이 포도를 받으시면 아주 기뻐하시면서 혼자 잡숫지 않고 여러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단다.”

엄마는 포도를 교회 강대상 위에 올려놓으셨습니다. 목사님이 아주 기뻐하시면서 설교를 마치고 광고 시간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오늘은 아주 기쁜 날입니다. 서울에서 귀농하여 포도밭을 개간하고 삼 년 동안 땀 흘리신 우리 교회 한천자 자매님께서 오늘은 금년에 처음 딴 포도를 하나님 앞에 먼저 바치셨습니다. 네 처음 소산을 하나님께 바치라고 한 말씀을 따라 드린 이 귀한 포도가 앞으로 열 배 백배의 수확을 보장할 것입니다. 한천자 자매님께 축하의 박수를 드립시다.”

많은 교인들이 온 얼굴에 웃음으로 화장을 하고 박수갈채를 보냈습니다. 나는 엄마가 이렇게 칭찬받을 일을 하시리라고 생각지 못했습니다.내가 먹지는 못해도 엄마가 박수 받는 것이 아주 기뻤습니다.

예배를 마치고 목사님께서 포도 바구니를 들고 식당으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 앞에서 축복 기도를 하시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식사 후 디저트로 이 포도를 나누어 드리겠습니다. 한 분도 빠짐없이 한 알이라도 드시면서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농사를 잘 지으신 한천자 자매님께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한천자 자매는 일찍이 서울 일등고등학교에서 미술 교사로 근무하시다가 우리 고장으로 오셔서 포도원을 개간하여 오늘 삼년 만에 첫 수확을 하셨습니다. 그 귀한 것을 하나님께 바치셨고 우리 고장에 오신 날이 오늘 천 번째 되는 날입니다. 귀농을 결정하신 용단에 박수를 보냅니다.”

식당 안에는 다시 천둥 같은 박수 소리가 넘쳤습니다. 그리고 식사를 마친 분들이 목사님이 나누어 주신 포도를 한 알씩 입에 넣으면서 눈을 감으셨습니다. 모두가 포도를 입에 넣고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귀한 농사를 짓게 하시고 소득을 주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귀한 것을 주신 하나님 한천자 자매에게 백배 천배의 복을 내려주시옵소서.”

포도 맛을 보시던 장로님께서 큰소리로 말씀하셨습니다.

“이 포도 맛은 지금까지 내가 먹어 본 포도 중에 가장 맛이 달고 향이 진합니다. 금년에 지으신 한천자 자매님의 포도는 모두 제가 사서 우리 교회 성찬식용 포도로 바치겠습니다. 이렇게 좋은 것으로 포도주를 담가 성찬식에 사용하면 하나님도 기뻐하실 것입니다.”

이 말에 더 큰 박수가 식당이 흔들릴 정도로 울렸습니다. 

Lunch Time

심혁창 지음 / 황계정1) 옮김




It was lunch time.

The teacher unpacked his lunch box, along with his students. He asked, “Is there anybody who would like to share my rice with me?” He looked around the kids.

All the students began to eat their lunches, but Youngjoon was reading a book instead, for he didn't bring lunch. He was so poor that he could not afford to prepare lunch.

The teacher said to Youngjoon.

“Youngjoon Park, come on here and share my rice with me. My wife prepared too much lunch for me. I can not eat it up for myself.”

Youngjoon dropped his head without any answer. He was ashamed of being sopoor. The teacher called Youngjoon as if commanding him.

“Youngjoon Park, won’t you come help me to eat up my rice? If I leave any of it, the leftover goes bad before I return home. My wife will grumble about that severely.”

Youngjoon listened to the teacher and came to him.

“Thanks. If you would help me, I might not be blamed by her.”

It seemed to Youngjoon that the teacher’s lunch was really a little too much for him. That thought made Youngjoon feel less sorry. The teacher divided the rice into two parts and filled Younjoon’s share in the reserve box. The teacher said.

“How can I eat up this much rice? It's too much for me. isn.t it?”

“Yes, it looks so.”

“Anyway, thank you so much. Enjoy meal.”

“Yes, sir. You, too.”

Youngjoon has never eaten so delicious a lunch. He was very happy.

“I like you to help me with my lunch tomorrow. too. I’ have been blamed for leaving food in the lunch-box, for a long time. Now, I need not be afraid of my wife’s nagging anymore.”

Youngjoon could not bring lunch for a while. He spent the daytime hungry everyday. But from now on he can share lunch with the teacher.

He is full and strong now. He is good at his studies. He brought about good results. In his four-year class, he was in average. But in his five-year class, he got the second place. The teacher always encouraged him.

“If you study a little harder, you will sure get the first place next semester. Ipray you could obtain excellent results in the writing contest held under the auspices of The Education Office next month. I am sure your writing faculties are much better than any other student's in our school. Do you believe me?”

“Yes, sir.”

At last, the day of the writing contest came. The teacher was expected to accompany his student as a matter of course, but unfortunately he was absent from school because he got ill. Therefore, Youngjoon could not help participating in the writing contest by himself, representing his school. However, as the school teacher expected, Youngjoon succeeded in winning the first prize and receiving extra prize money. He was very happy. He could not wait to show the prize and the extra prize money to his teacher. He thought that his teacher would feel very glad to hear of his results in the writing contest. Youngjoon called at the teacher’s.

“Teacher, this is Youngjoon Park.”

“……”

Nobody answered.

“Teacher, I am here to see you.”

He listened carefully. Silence. It seemed that there was no body at home, The moment he would turn back, a fit of choking cough was heard from the room side.

“Anybody in?”

“Who is it?”

The teacher’s weak voice was heard.

“I am Youngjoon, Teacher.”

“Um.” 

There was a fit of coughing. Youngjoon entered the teacher's room. The teacher was suffering from a bad cold. He could not sit up.

“I wonder you are not well. You are suffering from something serious, aren’t you?”

“I guess it's just a slight fatigue.”

“Shall I go to the pharmacy?”

“No, thank you. I'll get well soon. How did you do in the writing contesttoday?”

“I did my best.”

Youngjoon put out a big document envelop which contained the diploma of honor, the first prize and the extra prize money, The teacher shouted for joy and sat up.

“You did good job. You did really great job, Youngjoon. Thanks.”

“You helped me with every thing. I have owed all these honors to you.”

“On the contrary! The pleasure is mine.”

“Teacher, I'd like to give the prize and the extra prize money to Misses.”

“Thank you for your offer, but I cannot receive your good will.”

“Where is she now?”

“My wife……”

“Are all the other family out of the house?”

“Yes, they are. They will stay out for a long time.”

“Teacher, have you taken any medicine?”

“No, not yet. But as you know, it is just a fatigue. I'll get well in a few days.”

“Would you get me some medicine for fatigue from the pharmacy?”

“Why not? I'll be back in no time.”

Youngjoon ran to the pharmacy with the prize money envelop in his handHe said to the pharmacist that his teacher fell in a serious fatigue. The pharmacist asked in return worriedly.

“You mean the teacher is suffering from a bad fatigue cold?”

“Yes, Madam.”

“It's a regret that such a good person fell in a disease. He, as a single person,should always stay healthy.”

Youngjoon, taken aback, asked.

“Did you say that my teacher lives alone?”

“Yes, he does.”

“What for?”

“Last year, he had his wife and sons killed by a traffic accident. He has left hislittle daughter with one of his relatives, and has been living these days byhimself.”

“Then, who is the person that prepares lunch for him everyday?”

“The teacher himself has prepared his lunch, Nobody else.

“!?”

Youngjoon learned that the teacher himself had filled too much rice for him in his lunch-box on purpose since.

독후 평 / 어른과 함께 읽는 동화

이 아래 글을 저자가 지은 동화를 독자가 평한 것을

옮겨 실은 것입니다.


대왕 람세스와 집시



    김  상  기

(목사 재미 시인․문학평론가)

고대박물관의 유리관 속에 있는 해골 이야기를 하다가 “나는 너의 미래 모습이고 너는 나의 과거 모습이다”라는 말에 번쩍이는 영감을 받고 집필한 판타지 동화다. 저자는 해골이 된 ‘대왕 람세스’와 사막을 떠도는 집시와의 대화를 통해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생생한 교훈을 던져주고 있다.

첫째, 복음을 포장한 메시지라는 점에서 기독교사적 <천로역정>과 비슷하게 꾸며졌다. 인간과 짐승이 다른 점을 비교하여 영혼의 가치와 최후의 심판, 이 땅에서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을 구체적으로 지적한다. 특히 ‘고향이란 네가 머물 집이 있고 만나서 이야기 할 사람이 있을 때 고향이니라. 네가 살던 곳에 가 보아도 거기에는 너를 상대해 주는 사람이 없을 때는 고향이 아니니라.’p151. 라는 설명으로 인간의 고향은 하나님이 함께 하는 가족이 있는 ‘천국’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둘째, ‘잠언’이 한국 풍으로 이해하기 쉽게 들어 있다. 집시가 대왕께 건방지게 질문한다. ‘마음을 죽이는 악의 오염은 어디서 오느냐?’ 해골 대왕께서 말하기를 ‘욕심에서 오느니라. 악이 마음을 죽이면 마음은 바로 몸을 죽이느니라.’p20. 이처럼 작은 동화 한편에 수십 개의 ‘잠언’이 들어 있다.

셋째, 인간윤리를 선언하고 미신을 배척한다. ‘점쟁이는 눈치로 반은 맞추고 반은 점치러 온 사람이 하는 말을 듣고 맞추느니라.’p118. 동화는 인간이 지켜야 할 도리가 무엇인지를 설명하고 무위도식인 미신을 배척하는 메시지가 강하다.

넷째, 무한한 상상력을 동원했다. ‘잠시 후면 지구는 우리 시야에서 사라지고 아주 작은 별로 가물가물 멀어질 것이다. 우주에는 생물이 살고 있는 별이 셀 수 없이 많으니라. 성경은 지구인을 다스리는 율법이니라. 지구는 하나님이 보실 때 산골짝에 한두 집 등잔불을 켜고 사는 동네 같은 존재일 뿐 이다. 인간에게 시간이란 외상없는 소모품이다.’pp166-67. 저자는 무한한 상상력을 동원하여 하나님의 위대함을 소개한다. 그의 동화 속에서의 설명은 과학적이고 그 수치는 정확성을 유지하고 있다. 즉, 은행의 예금자가 22%이고 78%가 대출을 요구하는 일이나, 선한 사람이 78%고 악한 사람이 22%라는 점, 바다의 염분 비율이나 우리 사회 속에서 20%가 80%를 지배하고 먹여 살린다는 이론 등은 어느 사회에서나 있는 공통적이라는 점도 잘 지적하고 있다.p129.

다섯째, 이 동화의 저자는 ‘하나님’이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복음에 대한 이해와 천국과 지옥을 선명하게 설명해 준다. 인간이 알아야 할 기본적인 잠언이 동화전체에 흐르고 있다. 인간의 존엄성과 영혼의 가치를 이야기 속에 숨겨놓아 독자 스스로 자신의 구원을 점검하게 한다. 인간윤리를 기초로 상상력을 동원했지만 사실에 근거하고 있다. ‘독후감’을 마치면서 해골이 나를 보고 지금 말하고 있는 듯하다. ‘나는 너의 미래의 보습이고 너는 나의 과거의 모습이다.’

동화 독후평 1

대왕 람세스와 집시를 읽고


신  외  숙

(소설가) 

동화 ‘대왕 람세스와 집시’는 사자(死者)와의 대화를 통해 이루어지는 판타지 동화다. 사막에서 떠도는 집시가 해골이 든 유리관을 발견하면서 대화가 시작된다. 7000년이라는 세월을 두고 왕과 집시의 대화가 오간다. 말은 궤변처럼 들리지만 그 안에는 많은 의미가 숨겨져 있다.

왕과 집시는 그 신분이 하늘과 땅 차이다. 신분의 차이는 곧바로 지식와 두뇌의 차이로도 이어진다. 그 차이에도 대화는 철학적이고 사색적이다. 더구나 그 대화에는 역사가 흐르고 있다. 역사에는 철학이 스며 있고 은연중 진리를 표출하고 있다.

재미있는 건 대왕 람세스 1세가 누워 있는 유리관에 대한 설명이다. 그 유리관은 사막에서 나는 고귀한 것(수정관)으로 원자폭탄에도 깨지지 않고 열을 가해도 전혀 상하지 않는 특수한 재료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더구나 지구가 깨져도 우주 밖으로 밀려나도 전혀 손상을 입지 않는다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의구심이 들지만 어디까지나 판타지니까 이해하고 넘어간다.

그 수정관은 박물관으로 옮겨져 고고학자를 비롯한 사람들의 평가와 입담에 오른다. 사람들은 각자 자기 의견을 철칙처럼 내세우는데 전혀 사실과 무관하다. 그때 영의 눈을 가진 장님이 나타나 제대로 된 의견을 제시한다. 사람들은 장님을 향해 비난과 욕설을 퍼붓는다. 그러나 람세스는 그 장님이야말로 보통 사람들이 가질 수 없는 탁월한 안목과 감각을 갖추었다고 칭찬한다.

즉 장님은 육의 눈은 멀었지만 신이 내려준 특별한 감각, 손에 물질의 가치와 시간을 만지는 능력이 있다고 강변한다. 그것을 신이 내려준 균등한 은혜로 표현한다. 왕과 집시는 그곳에서도 많은 대화를 나눈다. 그 중 특이할만한 것이 있다. 지구의 생성 과정과 생명체에 관한 이야기다.

사막을 파면 반석이 나오고 그 밑에는 지하수가 흐르고 그 아래 암반이 있는데 그 밑으로 유전(油田)이 흐른다는 것이다. 중동 땅 사막 기운을 쬐고 유전이 흐른다는 건 지형의 특색상 그럴 듯하다. 그 유전을 지나면 뜨거운 바위층 열반이 나오고 다시 열반을 지나면 용암이 소용돌이치는 염하(炎河)가 나오고 거기를 지나면 냉반이 나오고 그 다음 과정으로 지구를 중심으로 한 정액(精液)의 호수가 있다.

그 정액은 생명체를 만들어 내는 일종의 호르몬이다. 정액은 냉반을 뚫고 염하와 열반과 암반, 다시 지하수와 반석, 네 개의 바위층과 지하 강을 지나 흙과 모래를 만나고 풀과 나무뿌리에 이른다. 나무뿌리에서 정액은 열매를 맺게 해주고 그 나무와 풀과 열매를 사람과 짐승이 섭취한다. 다소 억측같이 들리지만 재미있는 발상이다.

람세스는 집시와의 대화에서 자신의 철학을 장황하게 설명한다. 왕이었던 시절을 추억하며 상당히 설득력 있는 의견을 제시한다.

말(言語)은 선한 사람이 사용하면 진리가 되고 악인에게는 독언이 된다. 또 가장 아름다운 건 욕심의 크기를 줄이고 작은 것에 감사하라는 것과 욕심을 뜯어내고 신이 내린 모습으로 남는 것이라고 말한다. 또 가장 강한 힘은 무욕(無慾)이라 주장하기도 한다. 사람에 대해서는 영적인 존재로 표현하며 만물의 이치를 78;22로 표현하고 있는 것도 특이하다. 그 수치가 어디에서 나왔는지 모르지만 수긍이 갈 듯도 하다. 인체의 비율과 물질의 비율을 78:22로 표현했는데 여기에는 근거가 있어야 할 것 같다.

람세스왕은 예지적인 능력을 가지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대화를 이끌어 간다. 그 사이 집시는 호칭을 너에서 전하와 마마로 바꾼다. 그러다 어느덧 대화는 영적인 부분에 이르는데 거기에서 많은 신학적 의견이 대두된다. 지구의 생성과정에서부터 천국과 지옥, 심판론 등이다.

람세스의 예언대로 수정관은 사람들에 의해 우주선에 태워지고 지구를 떠나 우주 전체를 떠돌면서 끝없는 항해가 이어진다. 여기에서 지구는 생명체가 존재하는 흙덩어리별로 개칭된다. 그리고 지구에서 우주로 나가는 통로로 사람들의 죽은 영혼이 빠져나간다는 논리가 펼쳐진다. 지구를 빠져나간 영혼들은 각기 생전의 행위에 따라 낙원별과 지옥별로 옮겨진다. 여기에 바로 판타지의 묘미가 있다. 별은 색깔로도 구분되는데 즉 노랑별은 천사별이고 빨강은 강도별, 주황은 간음죄별, 초록은 살인죄별, 남색은 거짓죄별, 보라는 불효죄별, 파랑은 욕심죄별, 회색은 질병을 공급하고 검정은 악령별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지옥도 그 죄과대로 층층이 있다는 상상이다. 이것은 정말 공감할만한 부분이다.

동화 <대왕 람세스와 집시>는 시종일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면서 이야기가 진행된다. 하루가 갑자기 36년 세월로 바뀌고 우주 공간에서는 하루가 십 년 세월로 변한다. 수천 년이 한꺼번에 오가기도 하고 지구의 삼라만상이 한 마디의 이치로 설명되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영적인 논리와 함께 내세를 별로 표현해 재미를 더하고 있다.

이십 년 전, 우리 새문안의 청년 지체들끼리 내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천국은 한 군데로 상천(上天)을 의미해 논란이 없었다. 그런데 지옥은 땅속에 있다는 것에 이해가 되지 않아 별로 표현한 기억이 난다. 즉 지구를 떠난 영혼이 죄과별로 천국과 지옥별로 간다는 이야기를 우스갯말로 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때 한 말이 <대왕 람세스와 집시>에 나오는 이야기와 맞아떨어지는 것이다. 가보지 않은 내세를 별로 표현한 것에 공감이 가면서 동화다운 상상력과 판타지의 극치가 엿보인다. 생전의 행위대로 사후의 세계가 결정된다는 논리는 종교적 의미를 새삼 일깨우고 있다. 죽어 천국별(노랑별)이 아닌 다른 지옥별로 가지 않으려면 행위의 심각성을 깨닫고 회개하고 돌이켜야 한다는 의미가 가슴에 와 닿았다. 만일 위와 같은 발상을 소설에 사용했다면 많은 무리수가 있었을 것이다. 동화이기에 가능했던 판타지의 묘미였다. 처음에는 내용이 산만한 감이 있었으나 갈수록 내용이 진지하고 깊이가 있어 흥미로웠다. 어린 동심에는 상상력을 극대화시켜주고 어른에게는 자성의 기회를 일깨워 줄 법한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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