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歸路
심 혁 창
(363-0301)
1.
“박교수, 이걸 좀 받아 두게.”
대학장 설재우 교수는 박상록 교수에게 열쇠 뭉치를 내밀었다.
“이게 뭡니까?”
의아한 박교수는 주춤하면서 물었다.
“일단 받아 들고 내 말을 듣기로 하지.”
“네.”
박교수는 두 손으로 받았다.
“고맙네.”
“……?”
“이 열쇠들이 무엇에 쓰일 것인지는 차후 알게 될 걸세. 이걸 자네에게 맡긴다는 건 자네를 가장 믿고 있다는 표시로 생각하면 되겠네.”
박교수는 영문을 몰라 엉거추줌한 자세로 학장을 바라보았다. 학장은 사려 깊은 눈으로 박교수를 향해,
“이상할 것 없어. 자네에게 큰 신세를 지기 위해 미리 부탁하는 것이라네. 이걸 깊이 간직했다가 내가 도움을 청하거든 써 주기 바라네.”
“그때 주셔도 되지 않겠습니까?”
“그때나 이때나 마찬가지야, 미리 해 두는 편이 좋을 것 같아서.”
학장은 잠시 창 밖으로 시선을 던졌다가 돌아섰다.
“박교수, 내일 특별한 약속은 없는가?”
“예, 없습니다만……”
“됐어, 그럼 우리 등산이나 함께 하지. 어떤가?”
박교수는 학장의 뜻을 따르기로 하고 자리를 떴다. 주머니 속의 열쇠 꾸러미 무게가 느껴졌다.
‘무슨 일이기에 이런 것들을 맡기실까? 어디에 쓰이는 것들일까? 멀리 다녀오실 예정이라도?……’
짐작 가는 바가 없었다. 때가 되면 알게 된다고 하셨으니 그 때나 기다려 보자는 막연한 생각을 하면서 그것들을 책상 서랍 깊이 넣었다.
2.
설학장과 박교수는 등산복 차림으로 길을 떠났다. 늘 그렇듯이 같은 코스를 밟았고 목적지도 같았다. 산모퉁이에 전설처럼 수그리고 낡아가는 주막집, 역사를 빚듯 부엌 깊이에서 걸러져 나온 막걸리, 옛 길손이 쉬었다 갔듯 또 그렇게 앉은 두 사람,
“박교수, 고향이 충주랬지?”
“네, 그렇지만 떠난 지가 오래다 보니 고향이 타향이 되고 말았습니다. 지금은 서울이 제 고향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고향이 따로 있나 정들면 고향이지’ 하는 노래도 생긴 게 아닐까.”
“그런 것 같습니다. 학장님께서는 고향이 많이 그리우시지요?”
“그립지. 그렇지만 그리우면 뭘 하겠나. 갈 수 없는 고향인 것을…….”
둘은 묵묵히 잔을 비웠다. 고향 말만 나오면 침울해지고 말끝이 잦아드는 얼굴은 여전했다. 박교수는 학장이 열쇠 꾸러미를 자기에게 넘겨 준 저의를 헤아릴 수 없었다. 물어볼까 하다가 참고 말았다. 하루 종일 산을 넘고 물도 건넜다. 들판도 지났고 산모퉁이도 수없이 돌았다. 그러나 둘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걷기만 하는 산행이었다. 산들은 언제나 그림 같은 모습 그대로지만 그 길을 가는 사람은 세월 따라 바뀌고 인심도 변한다.
이십 대에 산을 오르며 생각하던 것과 삼십대에 생각하는 것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더구나 오십이 넘고 육십이 넘어 산에 오르며 가슴에 품는 감정은 사뭇 다른 것이다. 어려서 오르던 산은 꿈동산이었다. 그러나 오십이 넘어 올라 보는 산은 꿈이 사라진 삭막한 모습을 감추지 못한 채 인생을 마무리하는 철학을 하게 한다.
박교수는 산을 타며 호연지기를 품고 야망에 불타 있지만 학장 설교수는 인생의 마지막은 왜 오는가를 생각했다. 겉보기에 둘은 의기가 같은 듯했지만 그 의미에는 많은 괴리가 있었다.
설교수는 주막 건너 비스듬히 흘러내린 풀밭을 가리키며 빙긋이 웃어 보였다.
“박교수, 내가 왜 저 비탈산을 샀는지 알겠는가?”
“……”
박상록은 대답을 직접 들어본 적은 없지만 그 이유는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 대답을 알고 있었기에 그의 물음에 응할 수가 없었다.
“저기다 은행나무 한 그루를 멋지게 심어 가꾸고 싶어서였어.”
“은행나무를……요?”
“은행나무, 아주 크게 자라 가지를 넓게 뻗은 은행나무를 가꾸고 싶어서라네.”
“네.”
무슨 말인지 알 수는 없지만 박교수는 자기의 짐작이 빗나간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면서 마음이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다.
“저 밑으로 개간한 땅은 먼저 주인에게 뭐든 붙여 먹게 했고 내가 나무를 심으려고 예정한 땅만은 저렇게 풀밭으로 두었지. 저기까지는 개간을 해도 농사는 지을 수 없을 것 같아. 은행나무는 잘 자라겠지만……”
3
“햇볕이 잘 들고 뒤로 산이 안고 있는 형세라 무슨 나무든 심으면 잘 자라겠습니다. 은행나무가 자라기에는 아주 좋은 자리 같습니다. 이 부근에 은행나무가 많은 것을 보면 은행나무 성장에 맞는 환경 같고요. 언제 식수를 하실 예정이신지요. 그때는 저도 와서 도와 드리겠습니다.”
“고마우이, 꼭 그렇게 해주게나.”
“어떻게 여기까지 오시어 땅을 사시게 되었습니까?”
“그것이 궁금한가? 그만한 사연이 있었다네.”
노교수는 눈을 지그시 감고 지난날을 회상이라도 하는 듯 생각에 잠겼다가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내가 이북에서 도망쳐 나온 건 반동분자라는 딱지가 붙었기 때문이었다네. 그래서 인민군 입대를 피하여 단신 월남한 거였어. 정처 없이 무작정 남한으로 가기만 하면 살 길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개성에서 남행 열차를 타고 내려와 서울을 지나고 또 한 시간쯤 달리다 기차가 멈추기에 거기서 내렸다네. 그리고 해가 지는 석양을 따라 저녁 연기 평화롭게 피어 오르는 마을을 찾아들었지. 황혼에 초가지붕 굴뚝에서 피어오르던 저녁 연기는 참으로 아름다운 풍경이었어. 발길 닿는 대로 찾아들었지만 어디 들어갈 집이 있어야지. 낯선 동네를 한 바퀴 빙 돌았지. 정말 막연하더군. 몸 붙일 곳이 없을까 하여 기웃거리다가 발이 머문 곳은 그 동네에서 좀 외진 곳에 있는 교회였네. 교회 문은 열려 있더군. 나는 안으로 들어가 ‘하나님, 여기서 하룻밤 쉬어 가도 되겠습니까? 하고 인사를 여쭙고 한쪽 귀퉁이에 누워 그만 잠이 들었지. 너무 먼 길을 왔기 때문에 많이 지쳐 있었던 거였지. 얼마를 잤을까. 교회 종소리가 땡그렁 하고 나는 바람에 깨었어. 그때 골격이 장대한 한 노인이 들어오시더니 무릎을 꿇고 엎드려 기도를 하시는 거였네. 그 어른이 하는 기도 소리를 들으며 자는 체했지. 얼마 후 노인은 기도를 마치고 내 곁으로 다가오시더군. 그리고 나를 흔들어 깨우시는 거였어.”
노교수는 기억을 더듬느라 잠시 먼 하늘을 바라보다가 당시 일들을 어제의 일이기라도 한 듯 되새겼다.
“이보시오. 뉘신데 예서 주무시오?”
“네, 죄송합니다. 나그네입니다.”
“어디까지 가는 길이시오?”
“정한 곳은 없습니다.”
“그러시면?”
“아무데나 가는 대로 갈 생각입니다.”
“어디서 오셨소?”
“황해도에서 공산당이 싫어서 남하했습니다.”
“그러시다면 같이 내려갑시다.”
노인은 앞서 걸었고 그 뒤를 청년 설재우는 따랐다.
4
언덕을 넘었다. 아침 공기가 물결처럼 스며들어 가슴이 활짝 터지는 기쁨을 주었다. 앞선 노인은 느릿한 소리로 찬송가를 불렀다.
‘주 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
십자가 밑에 나아가 내 짐을 풀었네.
주님을 찬송하면서 할렐루야 할렐루야
내 앞길 멀고 험해도 나 주님만 따라가리’
노인은 4절까지 책도 보지 않고 다 불렀다. 동쪽이 환히 밝아올 무렵 그들은 높은 뜰 위에 활짝 열린 대문 앞에 당도했다.
“여기가 내 집이여, 집은 덩그러니 커도 사람은 없다네. 나 혼자 살고 있지.”
“……”
“저기 우물가에 가서 세수하고 안으로 들지.”
두 사람은 밥상을 마주하고 앉았다. 노인은 젊은이가 너무 급히 먹는 것을 보다가 타이르듯 말했다.
“그리 급할 것 없어. 갈 데도 없다는 사람이 왜 그리 서두나. 천천히 물 마셔가면서 많이 들어.”
이때 밖에 누가 왔다.
“장로님 계세요.”
“예, 들어오시오.”
가냘픈 허리를 한 사십대 후반쯤 보이는 여자가 들어왔다. 그녀는 교회 일에 대하여 의논을 하고 나갔다. 노인은 장로였고 부인은 집사였는데 그 분이 교회 살림은 다 맡아서 하는 듯했다.
그 날부터 설재우는 그 장로님 댁에 얹혀 살게 되었다. 머슴도 아니고 자식도 아닌 그는 장로님을 위하여 밥도 짓고 나무도 해 왔다. 김치며 밑반찬은 교인들이 해다 주어 그런 걱정은 할 필요가 없었다. 매일 때마다 쌀을 씻어 밥만 짓고 퍼다 먹으면 되었다.
사람들은 그 노인 장로님을 베드로라고 불렀다. 80노인이면서도 젊은 사람처럼 꼿꼿이 걸었고 일요일과 수요일 예배 때는 교인들 앞에서 설교를 하였다.
목사도 아니면서 장로님은 목사 노릇을 하고 있었다. 시골 마을이라 교인 수도 적고 경제력도 빈약하여 교역자를 모실 수 없어 장로님이 예배를 인도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베드로 장로님은 머리가 하얗고 희고 맑은 피부에 눈빛이 예사 사람과 달리 형형하여 위엄이 어린 얼굴이었다. 그러나 마음은 아기처럼 곱고 친절하고 겸손했다. 그분은 아침저녁 교회로 가시고 기도와 성경 읽는 일에 전념했다.
그리고 길에 갈 때나 한가히 앉았을 때는 으레 ‘주 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 십자가 앞에 나아가……’ 하는 찬송만 불렀다.
5
장로는 농토도 많이 가지고 있어서 마을 사람들이 소작을 하여 가을이면 많은 도지를 들여다 주었다. 먹고 입는 걱정을 모르는 그분에게 문제가 있다면 교회에서 어떤 말씀을 전할까 하는 그런 것이 걱정인 분이었다. 다행히 설재우는 그 덕에 편히 지낼 수 있었고 믿음이 무엇인지도 모르던 그가 하나님을 믿는 성도가 되었다.
진심에서 우러나 믿는 믿음이 아니라 노인이 먹여주고 재워주며 바라는 것이 함께 교회에 나가는 것이 그분의 소원이기 때문에 교인 노릇을 해주는 정도였다.
베드로 장로님 곁에서 꼭 이년이 차던 날 그는 군에 자원 입대하여 교육을 받고 소위로 임관하여 전방부대에 배치되었다. 휴전 때까지 소대장을 하다가 휴전 후 대위가 되었고 제대한 다음에는 서울에서 고학을 하여 대학을 마치고 대학 교수가 되었다.
먹고살기 바쁘고 공부하기 바빠서 베드로 장로님을 잊고 산 것이 20년이 지났다. 그러는 동안 그도 오십이 가까운 가장이 되어 있었다.
그가 베드로 장로님을 찾아갔을 때 장로님은 세상에 계시지 않았다.
예전 마을은 그대로인데 교회는 새로 건축되었고 마을 사람들 가운데는 알아볼 수 있는 얼굴이 하나도 없었다. 어른들 가운데 알 만한 분을 찾아보았지만 전혀 없었다. 교회에는 중년 목사님이 부임해 있었다. 목사를 만나 예전에 계시던 장로님을 찾았다.
장로님은 95세 되던 해인 5년 전에 세상을 떠나셨다고 했다. 그리고 그가 안내해 준 곳은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산 속 서풍바지 언덕이었다. 장로님의 유택이 거기 있었다. 5년밖에 안 됐다는 묘가 봉분도 허물어진 채 잡초에 덮여 있었다.
그 위엄 있고 건장하던 모습은 간데 없고 초라한 무덤 하나가 전부라는 것을 생각하니 숨이 막혔다. 그 위엄은 어디 가고 흙더미 밑에 깔려 계시단 말인가. 허탈한 가슴을 안고 묘 앞에 꿇어 기도를 드리고 잡초를 모두 뽑아내며 크신 은혜에 감사를 드렸다.
그가 마을을 떠날 때 목사님은 이렇게 말했다.
“자식이 열이면 뭘합니까? 돈이 모든 걸 뺏어갔습니다. 장로님의 많은 재산은 자식들이 싸움질을 해가며 팔아가고 묘소는 서너 해 이 아들, 저 아들 뿔뿔이 찾아오더니 2년 전부터는 아무도 오지 않습니다. 해마다 교회 남자 집사님 몇이 올라가 벌초를 해드리지요. 그것도 얼마나 가겠습니까. 자기 조상 산소 돌보기도 바쁜데 남의 묘 풀 깎은들 얼마나 가겠어요. 차라리 묘나 쓰지 않았으면 좋을 뻔했습니다.
묘는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서 수치를 당하고 큰 부담이 될 뿐입니다. 천당 가신 어른이 세상의 묘가 뭐 그리 중하겠습니까만, 어디 그렇기만 합니까. 우리 풍습은 그런 것도 아니지요.”
“네, 잘 알겠습니다. 앞으로는 제가 찾아와 돌봐 드리겠습니다.”
혈연으로는 아무 상관도 없는 어른이지만 그분은 설교수에게 부모만큼이나 소중한 은인이었다. 그렇게 하여 해마다 벌초를 하고 묘를 돌보면서 많은 것을 생각하고 살아온 설교수였다. 설교수의 회고담은 여기서 끝났다.
6
“지금도 그 찬송가를 부르시던 장로님의 음성이 잊혀지지 않고 늘 생생한걸. 이제 그 찬송가는 내 노래가 되었어.”
설교수는 ‘주 안에 있는 나에게’를 나직이 불렀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그 날 새벽길을 걸으며 듣던 그 찬송가는 노인의 것이 아니라 나의 것이었지. 내 신세를 두고 지어진 가사 같아서 그만 눈물이 나던걸. 오래된 추억담이 되었지만 그날의 감동은 추억 이상의 의미가 있지.”
산행에서 돌아오고 일주일 뒤인 4월 4일 저녁 7시.
박상록 교수는 다음 날 강의 준비를 하려고 책상에 앉았다. 책을 펼치려는데 전화 벨이 울렸다.
“여보세요.”
“박교수시군. 잠깐 몇 마디 나누어도 폐가 되지 않겠소?”
“괜찮습니다. 그런데 웬 일로 전화를 주셨습니까?”
“박교수의 도움이 꼭 필요해서 했지.”
“네. 말씀해 주십시오.”
“내일 우리 집에 잠시 들러 주었으면 하네. 내가 전에 맡긴 열쇠를 가지고 와 주게.”
“네, 알겠습니다. 몇 시가 좋겠습니까?”
“강의에 지장이 되지 않는다면 아침이 좋겠어.”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박교수는 서랍 깊이 넣어 둔 열쇠를 꺼내 보았다. 그동안 무심코 받아 둔 묵직한 열쇠 꾸러미에는 번호가 적힌 견출지가 붙어 있었다. 참 꼼꼼한 어른이시라는 생각을 하면서 주머니 속에 넣었다.
다음 날 아침 박교수는 일찍이 서둘러 학장 댁으로 달려갔다. 열쇠꾸러미를 전해 드리고 바로 학교로 갈 예정이었다. 설학장 댁은 언제나처럼 대문을 잠그지 않은 채였다. 박교수는 전에 드나들던 습관대로 들어섰다. 이상하게도 집안이 말끔히 치워져 있었고 전에 느낄 수 없던 묘한 정적이 돌았다.
혼자 월남하여 하숙생활을 해가며 독학을 하여 교수가 된 뒤에도 독신으로 외롭게 사는 분이다. 집은 삼십 년 전에 사서 지금까지 지켜오는 안식처였다. 옛 기와집이라 허름하기는 해도 방이 여럿에 마당이 있고 마당 가운데는 우물까지 있어서 여름이면 그 물로 목욕을 하면 그렇게 시원할 수가 없더라고 늘 자랑하는 집이다.
7
정원에는 배나무, 감나무, 앵두나무, 대추나무가 우거져 철마다 과일이 흐드러지게 달렸다. 그것들이 익어도 누구 하나 따먹지 않고 그대로 둔 채 바라보기만 하여 원시림이 누리던 행복을 그 나무들은 마음껏 누리고 있었다. 그것이 늘 넉넉한 인심을 사람들 가슴에 심어 주곤 했다.
박교수는 뜰 안을 걸어 마루 위로 올랐다. 방문 앞에 다다른 그는 가슴이 철렁했다. 문고리에 하얀 종이 쪽지가 달렸는데 이렇게 씌어 있었다.
<박교수, 마음을 편히 가지고 내 자는 모습을 보아 주시게. 열쇠로 1번 자물쇠가 달린 장롱 서랍을 열어 보시기 바라네>
박교수는 불길한 예감이 스쳐 문을 열고 들어섰다. 학장은 이불을 곱게 덮은 채 잠든 모습이었다.
“학장님!”
꼭 다문 입술은 평소의 모습대로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은 인품 그대로였다.
“학장님, 어떻게 되신 겁니까?”
이불을 젖혔다. 흔들어 보았지만 아무 반응이 없었다. 전신이 차갑게 굳어 있었다. 하얀 한복 차림에 버선까지 신고 댓님까지 매었다. 일어서면 곧장 외출을 할 수 있는, 길떠날 차비를 마친 그런 모습이었다. 놀란 박교수는 1번 열쇠로 장롱 서랍을 열었다. ‘첫번째 부탁’이라고 씌어 있는 하얀 봉투가 있었다. 평소에 정성들여 쓴 글씨가 살아나듯 눈에 들어왔다.
<박교수, 정말 미안하네. 이 글을 읽고 있을 때 나는 이미 깊은 잠에 빠져 일어나지 못하고 그대들 곁을 떠난 뒤일 것일세. 당황할 것 없네. 내가 부탁한 대로만 해 주기 바라네. 먼저 자네와 내가 아끼는 의과대학 전채호 박사를 부르도록 하게. 지금 전화하면 내 말을 잘 알고 있을 것일세. 준비해 놓았으니 열쇠 번호대로 내 부탁을 들어 주시게나.>
박교수는 다이알을 돌렸다.
“전박사인가?”
“응. 나야, 그렇지 않아도 자네 전화가 올 줄 알고 기다리고 있었지.”
“그건 무슨 말인가?”
“어제 저녁에 설학장님께서 내게 부탁을 해 놓으셨거든. 오늘 아침 자네가 부르거든 아무 것도 묻지 말고 자네 있는 곳으로 곧장 가 달라는 말씀이셨다네. 그런데 자네가 나한테 부탁할 일이라도 생긴 건가?”
“아무것도 묻지 말고 최대한 빨리 좀 와 주게.”
“알았네.”
전박사가 도착한 것은 11시였다. 학장의 자는 듯한 모습을 본 그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
“어찌 이런 일이……”
박교수가 곁으로 다가서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
“이보게, 지금이라도 어떻게 손을 써 보면 안 될까?”
“늦었어.”
8
“어떡한다.”
“이럴 줄 알았으면 어제 내가 왔어야 하는 건데.”
“무슨 기미라도 있었나?”
“자네 전화가 오거든 자네를 도와 일을 잘 좀 해 달라는 부탁을 하시면서 이런 부탁은 처음이자 마지막이지만 나 이외에 다른 사람은 이러한 부탁을 아무에게나 함부로 하는 일이 없기를 바라신다는 간곡한 말씀이셨어. 헌데 웬 일인지 예감이 그렇게 유쾌하지 않았거든”
“이미 예정하신 일을 계획대로 하신 거야. 별 방법 없지. 하시겠다고 말씀하신 대로 따를 수밖에. 자네가 할 일은 의사로서 진단서를 먼저 작성하여 법적 장례 절차를 밟는 것이 순서겠네. 나는 하라신 대로만 할 것일세.”
박교수는 2번 열쇠를 열었다. 그 안에도 역시 하얀 봉투가 있었다.
<수고 하셨소. 내가 영면한 것을 확인했으면 전박사는 사망진단서를 작성하여 관청에 약물 과다 복용사로 신고하여 장례를 치를 수 있도록 하고 박교수는 장의사에 연락하여 주시게. 여기 적힌 번호를 돌리면 이미 장의사에서는 알고 있을 것일세. 장사 절차는 거기서 오면 알아서 잘 해 줄 것일세. 모든 비용에 대하여 약속해 두었으니 그들이 오거든 확인만 하고 이 함에 들어 있는 누런 봉투에 준비된 돈을 내어 주게. 그분들과 약속한 금액에서 여유 있게 더 넣어 두었으니 혹시라도 불편한 일이 생기면 더 주기 바라네.>
박교수는 장의사로 연락했다. 약속한 대로 그들이 당도했다. 비용도 약속한 대로였고 그만한 것이면 자기들이 알아서 완전히 장지까지 가서 잘 모시고 오겠노라 했다. 일은 쉽게 진행되었다. 박교수는 3번째 열쇠를 열었다.
<고맙네. 아무래도 나를 아는 사람 가운데는 내가 아무 인사도 없이 떠나 버리면 못된 친구라고 할 사람도 있을 줄 생각하여 평소에 나를 아껴주던 몇 분을 모시도록 준비했다네. 여기 그 명단과 전화 번호가 있으니 연락하여 주기 바라네. 그리고 그분들이 오면 그냥 보낼 수야 없지 않겠는가. 이 번호에 전화를 하면 오늘 안으로 내가 약속해 둔 분들이 와서 음식 준비를 해 줄 것일세. 그 비용은 이 통장에서 지불하여 주게나. 부족하지는 않을 것일세.>
박교수는 울음이 터져 나오는 것을 참고 학장이 일러주는 대로 전화를 했다. 잠깐 사이에 음식점에서는 사람들이 몰려와 음식 준비를 했고 전화를 받고 놀란 친지들이 조문객으로 몰려왔다.
박교수는 4번째 열쇠를 열었다.
<정말 고맙네. 이제는 집안이 씨끌씨끌하겠구먼. 그것도 모르고 나는 곤한 잠에 빠져 있겠지. 여기에 비디오 테이프가 준비되어 있네. 내일이 식목일이잖나. 내일 내 장사를 지내 주게. 식목일에 하면 일이 수월할 것일세. 내가 이 집을 떠나기 전에 나를 보내기 위해 찾아 온 사람들에게 잠깐만 보여 주면 좋겠네. 그리고 장지는 며칠 전에 우리 함께 가서 술 마시며 바라보던 밭언덕으로 하여 주게나. 묘를 만들지 말고 그 밭머리 평평한 곳을 찾아 나를 묻고 그 위에 은행나무를 한 그루 심어 주기 바라네. 지금 농사 짓는 밭 주인에게 전화를 하여 내가 부탁한 나무에 대하여 말하면 다 알아서 할 것일세. 은행나무를 심고 그 둘레에 잔디나 잘 입히면 나무는 건강하게 잘 자랄 것으로 생각하네. 나는 묘지를 반드시 잘 꾸며 놓아야만 한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네. 나무 한 그루의 양분이 되어 그 나무의 성장을 지키며 나도 다시 태어난 기분으로 그 밑에 묻히고 나무만 잘 돌보아 주면 묘 자리 하나 줄고 나무 하나 잘 크지 않겠나 하고 생각해 왔기에 그렇게 묻히기로 했네. 그것이 내 소원이니 그렇게 해 주기 바라네. 인정이 가로막거든 잠시라도 거기 한 인골이 묻혔노라는 표적으로 은행나무 식수 연월일이나 새기고 그 끝에 내 이름 석자나 넣어주게. 아무리 단단한 돌에 글자를 깊이 파고 이름을 새겨 두어도 세월 앞에서는 아무 소용이 없는 것, 나무나 잘 자라게 돌보아 달라고 하면 그 밭 주인은 그렇게 해 줄줄 믿네.>
9
박교수는 전 밭 주인에게 전화를 했다. 그들과도 이미 약속이 되어 있었다. 튼실한 은행나무 한 그루를 이미 준비해 두었다는 것이었고 학장의 전화를 며칠 전에 받았는데 나무 심을 자리를 한 길 깊이로 하고 넓이도 사람 하나가 들어가 누울 만큼 파 두라는 부탁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나무에 줄 거름도 준비해 두었으니 밑거름만 잘 묻어 주면 된다고 했다는 것이다.
박교수는 기가 막혔다. 이건 연극이다 하고 생각도 했다. 그러나 연극은 아니었다. 엄연한 현실 앞에서 현실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모든 절차는 전화만 걸면 다 이루어지게 준비되어 있었다. 박교수는 5번째 서랍을 열었다. 거기엔 테이프로 봉해 놓은 봉투 다섯 개가 있었다. 첫째 봉투를 열었다.
<수고 많이 했네. 이제는 내일 나를 이 집에서 떠나 보내기 전에 비디오 테이프 하나만 틀어 주면 되겠네. 여기에 봉투 네 개가 있네. 2번 봉투는 자네에게 사례로 남기는 것일세. 이 집문서와 모든 나의 유물은 자네에게 맡긴다는 약속과 함께 밝힌 명세서일세. 그리고 적금도 다 부어 놓았으니 필요한 대로 찾아서 유용하게 사용하도록 하게나. 그것이 내 장사를 치러준 작은 보답일세. 그리고 3번 봉투는 우리 학교 장학기금에 기탁하기 바라네. 4번 봉투는 누구든지 나에게 받을 돈이 있는데 못 받았다고 하는 사람이 나오면 내어 주게나. 내 기억으로는 누구에게도 빚을 지고 살지 않았는데 혹 어디선가 외상이라도 하고 내가 잊고 갚지 못한 것이 있지나 않나 하여 마련해 놓은 것일세. 한 세상 살면서 마음의 빚이야 한없이 많이 지고 가네만 하나도 갚지 못하는 것이 죄송하구먼. 자네에게만은 하고 싶은 말도 많았고 해 주고 싶은 것도 많았는데 아무것도 못 해주고 신세만 지고 가니 용서하게나.>
근검 절약으로 건실하게만 살아오던 한 학자는 이렇게 정리하고 깊은 수면에 들었다. 할 일들을 유언으로 남긴 학장은 다시 일어날 수 없고 그런 줄 아는 까닭에 마음 아파하는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학교에서는 고인의 공덕을 기리며 학교장으로 장례를 모시기로 했다. 공휴일인 식목일이라 장례식장에는 설학장을 아는 사람들 모두가 한 자리에 모였다. 연락을 받은 사람, 연락을 못 받았지만 애도하는 마음으로 찾아온 사람들로 운동장은 만원을 이루었다.
장례위원회가 결성되고 발인식이 시작되었다. 고인의 뜻에 따라 박교수는 비디오 테이프를 조문객들 앞에서 상영케 되었다. 학교 배려로 대형 스크린이 준비되었다. 많은 조객들이 숨을 죽이고 화면에 눈길을 모았다. 고인이 된 설학장이 살아 있는 모습 그대로 활짝 웃는 낯으로 스크린에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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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너무 놀라게 해 드려 송구스럽습니다. 오늘은 제게 있어서 가장 복된 날이기를 바랍니다. 사정이 있어서 이 자리에 참석하지 못한 분도 계시리라 믿습니다만 이렇게 오셔서 저를 위해 아직도 남은 사랑을 베푸시는 뜻에 감사드리는 바입니다. 비록 육신은 여러분 곁을 떠나겠습니다만 여러분이 베풀어주신 사랑만은 영원히 잊지 못할 것입니다. 소찬이나마 준비했사오니 약주나 한잔씩 드시면서 제 말씀을 더 들어 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박교수님, 잠시 스크린을 꺼 주시고 오신 분들께 약주나 한잔씩 하시게 하시지요.”
일단 화면을 끄고 박교수는 조용히 마이크를 잡았다.
“고 설재우 학장님께서는 오늘 우리가 이렇게 학교장으로 장례를 모시리라고는 생각지 못하셨던 것입니다. 몇몇 분만 당신 댁에서 모여 바라보실 줄로만 생각하시고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기서는 아무것도 차릴 수가 없어서 미처 준비를 못했습니다. 잠시 짬을 이용하여 고인을 추모하는 마음에서 꼭 한마디하고 싶으신 분은 앞으로 나오셔서 말씀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바로 가까이에서 눈시울이 시뻘겋게 눈물을 흘리고 섰던 같은 연배의 허교수가 겸허한 자세로 나왔다.
“이렇게 많이 참석하시어 고인의 마지막 가는 길을 지켜봐 주시는 여러분께 고인의 친구로서 심심한 감사를 드리는 바입니다. 저는 비보를 접하고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설교수야 말로 누구보다 건강했고 누구보다도 건실한 자세로 세상을 살아온 사람입니다. 어제 저녁만 해도 저와 같이 어울려 지금 세종문화회관에서 전시중인 월당 김종수 박사의 서화전을 감상했고 나올 때는 김화백과 기념사진까지 찍으며 쾌활하게 웃고 즐기다가 헤어졌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타계하다니요. 이건 꿈이 아니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입니다. 가만히 생각하면 이 친구한테 크게 배신을 당한 기분이 들기도 합니다. 그렇게 갈 사람이……”
허교수는 원망스럽다는 듯 말끝을 못 맺고 내려오면서 울음을 터뜨렸다. 모두가 허교수와 같은 심정으로 이렇게 떠나가는 설학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박교수는 계속하여 화면을 밝혔다. 역시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고인은 온화한 웃음을 담은 눈으로 관중을 둘러보았다.
“제가 왜 독신으로 살다가 이렇게 돌아가야 하는지 알고 싶으신 분도 계실 줄 믿습니다. 저는 6․25 당시 공산당을 거부하고 남하할 때 고향에 아내와 백일된 아들 하나를 두고 떠났습니다. 바로 돌아올 테니 아무 염려말고 아기나 잘 돌보라고 하곤 남쪽에 온 뒤 지금까지 돌아가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두고 온 아내는 정말 아름답고 마음이 고운 여자였습니다. 그런 아내를 두고 기다린 것은 오직 통일의 날이었습니다. 그러나 통일은 오지 않고 인생만 늙어 이젠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인간이 되었고 이제는 생사도 알 수 없는 아내를 기다릴 수도 없습니다. 설사 만난다 하더라도 지금은 재가하여 남의 아내가 되어 있을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통일의 날을 기다리면서도 한편으로는 통일이 두렵기도 했습니다. 나야 아내만을 위하여 독신으로 살아가고 있지만 만약에 다시 만난 아내가 재혼이라도 해서 새 가정을 차렸다고 생각하면 그보다 큰 비극은 없을 것입니다. 나는 그래서 더욱 독신으로 살아야 했습니다. 통일이 되어 사랑하는 아내가 아들을 안고 나를 만나러 왔을 때 내가 남의 남편이 되어 있는 것을 본다면 어떻겠습니까. 상상도 하기 싫은 일입니다. 남한에는 정말로 내 아내보다 예쁜 여자도 많았고 그러한 분들이 청혼도 했지만 나는 모든 욕망을 누르고 끝내 이북의 아내를 위하여 독신으로 지냈습니다. 내가 죽어도 아내에게 떳떳이 할 수 있는 말이 있다면 독신으로 열심히, 성실하게 살았노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끝까지 공산당을 거부하고 민주 사회를 택하여 여러분과 더불어 오늘에 왔다는 것도 자랑스럽습니다. 죽어서까지 정치 얘기를 늘어놓아 죄송합니다. 박교수님, 잠깐 껐다가 쉬고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켜 주시오”
고인의 청에 따라 화면은 꺼지고 여기저기서 고인에 대한 추억담이며 아픈 마음의 정을 주고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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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좋은 세상이야. 죽어서까지 자기 할 말은 다하고 갈 수 있으니 말야.”
“누가 아니래, 이 친구 아주 재미있는 데가 있었어. 엉뚱한 친구야.”
“고약한 친구지. 어떻게 이렇게 저 혼자 갈 수 있어.”
“죽는 길에도 같이 가는 사람 봤나. 죽을 때 같이 죽는 것은 동반자살밖에 없어.”
“참 좋은 친구였는데 너무 일찍 갔어. 뭐 그리 급하다고 아직 7십도 못되어 가지고 먼저 가. 예순 여덟이면 청춘이라구.”
“내가 등록금을 못 내고 있을 때 교수님께서 내주시면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셔서 말을 못했는데 은혜를 갚을 기회도 주지 않으시고 가셨습니다.”
여기 저기서 별 이야기들이 다 오갔다. 그러나 잠시뿐 모두의 눈길은 다시 화면으로 돌아갔다. 고인은 여전히 밝은 얼굴로 말을 계속했다.
“여러분, 이제 간단히 말씀을 마칠까 합니다. 저도 인생인데 왜 오래 더 살고 싶지 않았겠습니까. 하지만 아무 의지할 데 없이 독신으로 살아온 제가 이만큼 살아도 많이 산 것이 아니겠습니까? 6․25 때 새파란 나이로 억울하게 죽어간 사람을 생각하면 이 정도 살았다는 것이 장수가 아니겠습니까. 혼자 사는 사람이 수명에만 애착을 가지고 살다가 정말 힘 잃고 돈 떨어진 뒤에 죽는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피해를 주겠습니까. 비록 태어날 때는 조물주의 뜻으로 왔다지만 가는 길이야 자기가 선택할 수도 있는 것이지요. 종교적으로는 하나님께 죄가 되는 일이지만 저는 이 길을 택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인간은 힘있을 때 할 수 있는 일이 몇 가지 있습니다. 돈 버는 일, 자선을 베푸는 일, 사회에 봉사하는 일, 그런 것들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남을 용서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남을 용서할 때는 반드시 돈 있고 힘있을 때 해야 합니다. 돈 떨어진 뒤에 하는 용서는 용서가 아니고, 힘이 없어 하는 용서는 비굴한 자기 보호로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힘있을 때 용서하고 돈 있을 때 용서하면 후에 덕이 됩니다. 죽는 것도 그렇습니다. 돈 있고 힘있고 활동할 수 있을 때 가지 않으면 저 같은 독신자는 때를 놓칩니다. 힘이 없어 죽는 사람보다도 돈이 없어 약 못 먹고 죽는 사람이 불쌍한 사람입니다. 더 늙고 병들어 불쌍한 사람으로 여러분 곁에 추한 꼴 보이다가 가기 싫어서 먼저 가기로 했으니 용서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고 80, 90이 되어 거동도 못하면서 여러분 곁에 살고 있다고 생각하면 이웃들이 얼마나 마음 아파하겠으며 사회에 짐이 되겠습니까. 그러다가 혼자 죽고 아무도 와 보지 않는 마지막보다 오늘 같은 나의 이별이 얼마나 행복한 축복이 되겠습니까. 불쌍하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괘씸한 녀석이라고 꾸짖어만 주십시오. 마지막으로 하나 고백할 것이 있습니다. 저는 일생을 돈의 주인은 되어 보았지만 돈의 종은 되지 않았고 돈의 힘을 빌려 내 유익을 꾀하는 야비한 짓은 모르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죽음 앞에서는 어쩔 수 없이 마지막으로 돈의 힘을 빌리기로 했습니다. 모든 장례 절차를 돈을 주고 맡겼습니다. 오직 한 사람만은 사랑으로 샀습니다. 내 장례 절차를 맡아 수고해 주시는 박교수에게 모든 걸 일임하고 떠나기로 했습니다. 건강하고 행복한 여러분이 되시기를 빕니다. 이렇게 긴 시간을 유언할 수 있는 저는 그저 행복하고 만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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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면은 꺼졌다. 설교수의 마지막 모든 것도 끝났다. 장내는 숙연해졌다. 식순에 따라 절차가 진행되고 넓은 마당 한가운데를 장례행렬이 줄을 섰다.
운구차 뒤로 조객들의 차가 꼬리를 물고 따르고 걸어서 돌아가는 모습도 보였다. 장례식이 끝나고 모두가 떠나간 마당을 마지막 떠나는 늦겨울 바람이 훑고 지나갔다.
바람이 굴러가 먼지를 피우는 양지바른 언덕에서 장례식을 지켜보던 팔순 노인 둘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 장사는 남의 일이 아니여. 당신과 내 얘기여.”
“그렇구먼, 내가 죽으면 누군가가 묻어 줄 것이라고 생각하고 살기에는 세상이 너무 각박해져 버렸어.”
“자네 아들이 미국에 산다지?”
“그려, 갸들은 아주 호강하고 산댜.”
“왜 자네는 따라 가지 않고 그렇게 산댜?”
“난 여기가 좋으니께. 갸들이 다달이 돈을 부쳐 줘서 잘 지내고 있잖여.”
“돈이면 다랴? 늙은이만 둘이 살다 병이라도 나서 덜컥 죽어봐, 누가 와서 송장을 치워줄겨?”
“그런 걱정꺼지 하고 우티기 산댜. 우티기 되것지. 근디 자네는 무슨 뾰죽한 수라도 있는겨?”
“있긴 뭐가 있어. 쥐뿔도 없는 것이. 애들은 다 따로 나가 살고…… 갸들이 같이 살자고는 하지만 나 혼자 사는 것만 못혀서 나대로 살고 있지. 아직은 할망구가 밥혀 주니께.”
“자네나 나나 걱정이여. 저 사람 봐. 잘한 건지 잘못 하는 건지 도무지 판단이 안 서지만 잘한 것 가텨.”
노인은 고개를 크게 주억거렸다.
“잘혔지. 이제는 자기 장사도 자기가 지내지 않으면 곱게 갈 수 없는 자기장사시대가 되�어. 저 사람처럼……”(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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