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인이 드문 일본이 잘 사는 이유
심 혁 창
(도서출판 한글 대표)
세계 전쟁사는 민족과 종족간의 싸움보다 기독교와 반기독교 국가간의 싸움이 많았고 모든 전쟁은 결국 기독교 국가의 승리로 끝났다. 세계적으로 기아에 허덕이는 나라는 모두가 반기독교 국가들이다. 특히 불교를 숭앙하는 국가들이 삶의 어려움을 많이 당하고 있다. 우리 역사만 돌아보아도 고려 시대는 불교가 국교였다. 그때 우리 선조들은 얼마나 많이 굶주리고 가난을 경험해야 했던가.
이조 때는 유교가 국민을 허식과 율례로 묶었고 샤머니즘이 나라를 어지럽혔다. 그러한 가운데 기독교가 들어오면서 국민 의식과 환경의 변화를 맞게 되었다. 카톨릭이 들어온 지 200여 년, 기독교 전파 100여 년, 역사는 비록 일천하지만 국민의 25%가 크리스천이 될 만큼 기독교세는 급성장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하나님을 잘 믿는 우리 나라 백성을 기쁘게 보신 하나님은 이 땅을 축복하셨다."고 말하면 "웃기지 마라. 무슨 하나님이 복을 주어 잘 사느냐, 세계적 조류가 그렇게 된 것을 기독교인들은 억지로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하더라. 기독교를 믿지 않는 일본은 우리보다 몇 백 배 잘만 살더라" 하고 한 마디로 일축해 버린다. 이런 경우 기독 신자는 대꾸할 말이 없어 주저하고 만다.
겉으로 보아 비기독교 국가 같은 일본이 잘 사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불교나 잡신을 많이 믿어서 잘 사는 것이 아니다. 그 땅에는 그만한 하나님의 축복이 임해 있는 증거가 있다. 일본에는 5% 미만의 기독교인이 있지만 세계 어디서도 찾아보기 힘들만큼 독실한 의인(크리스천)이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일본에는 1525년 포르투갈의 선교사 Almeida가 처음으로 구주(九州)에서 의료사업을 하면서 선교한 것이 효시가 되었고 그후 1549년에 기독교가 본격적으로 전파되어 1600년대에는 신자가 30만 명을 넘을 만큼 부흥했다. 인구 비율로 볼 때 450년 전의 30만 명이라는 숫자는 대단한 수치다. 기독교도가 크게 늘어나자 도요또미히데요시(豊臣秀吉)가 반기독교 정책을 펴 150명의 포르투갈, 스페인, 프랑스 선교사를 추방하고 1614년부터 26년간 공식 확인된 숫자만도 4,000(집단처형)명의 순교자를 냈다. 1840년부터 18년간은 각처의 기독교 혐의자를 색출, 608명 중 218명을 참수 등 잔학한 수법으로 처형했다. 그러나 우리 나라는 순교자가 카톨릭에서 103명, 기독교에서 수십 명이 있는 정도이다.
기독교를 철저히 박해하던 일본이지만 끝내는 1858년 그리스도교를 공인하게 되었고 1880년에는 신약성서를, 1887년에는 구약성서를 완역 반포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신구약성서가 반포되기 이전인 1520년에는 루터의 《그리스도인의 자유》, 1521년에는 《신학총론》이, 1536년에는 칼뱅의 《그리스도교 綱要》를 발행할 만큼 일본은 이미 우리보다 470년 전에 그리스도교를 연구한 학자가 있었던 것이다. 외국 선교사가 들어와 선교를 하기 이전에 학문서로서의 기독서가 발행되었다는 것은 일본인들이 학문적으로 서양 문화를 얼마나 일찍이 접했나를 알 수 있다.
우리 나라가 일본 치하에서 굴욕의 역사를 치러야 했던 것은 가슴 아픈 일이지만 기독교 문서의 전파와 한국 기독교의 발전, 서양 문물의 조기 흡수를 위하여는 하나님의 섭리였는지도 모른다. 이미 발행된 우리 나라 기독교 서적의 50% 이상이 서양 신학서적을 일본어로 번역한 일본어 번역판을 우리 글로 중역하여 펴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 나라 학자들이 영어나 독어, 프랑스어 서적을 직접 번역한 신학 서적은 30년도 채 안 되고 그 분량도 번역 신학서의 10% 내외 정도다. 1945년 해방 전후의 전 신학서적은 모두가 일본어로 된 것을 중심으로 편집하여 편저나 저서로, 어떤 것은 일본어판을 자기가 저작한 양 저서로 둔갑 발행하여 지금도 서가(書街)에서 유통되고 있는 실정이다.
만약 우리가 일본어를 몰랐다면 일어로 된 서적들을 어떻게 중역이라도 할 수 있었겠는가. 영어나 독어를 아는 사람이 없고 히브리어는 아예 알파벳의 상하도 모르던 시대가 30년 전이다. 지금은 히브리어로 된 서적도 번역할 수 있을 만큼 우리 학자들의 수준이 높아졌고 일어나 영어, 독어는 우리말 쓰듯 번역해내는 단계가 되었지만 50년 전에는 일본어만 해독하는 능력이 있으면 대단한 실력이었고 그때 공부한 신학자들이 일어로 된 서양 서적을 우리말로 옮김으로써 우리 나라의 기독교 전파를 도울 수 있었다.
우리는 기독교가 무엇인지도 모르던 16세기에 일본에는 성도가 30만이나 되었다는 것은 오늘의 일본만 바라보는 안목으로는 매우 놀라운 사실이다. 기독교 전파와 기독교 서적 보급에 있어서 일본은 우리에게 유모(乳母)와 같은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강압적으로 우리가 일본어를 배워야 했던 치욕의 역사는 서양 문물을 받아들임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섭리였는지도 모른다. 하나님은 이 땅에 기독교 신학을 서적으로 전파하기 위하여 36년 동안 일본어학 교육을 강제로 시키셨다고 하면 무리일까?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실 때 하나님은 거기에 의인이 몇이나 있느냐고 물으셨다. 처음에는 50명만 있어도 구하겠다고 했고 마지막에는 열 사람만 있어도 구원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다섯 사람도 없어서 결국 유황불의 형벌을 받고 말았다. 일본에서는 4천 명 이상의 순교자가 나올 정도로 400년 전에 그 조상들이 나라와 후손을 위하여 피를 흘리면서 신앙과 기도의 탑을 쌓아두었던 것이다. 바로 그 피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이 너희 후손 3,4대까지 축복하시겠다고 약속하신 그대로 축복하여 주신 것이다. 1500년대의 한국은 어떠했는가? 선조(宣祖) 전후를 당쟁과 정저와적(井底蛙的) 안목으로 급변하는 세상을 모른 채 후진의 역사 바퀴를 돌리고 있었다.
한국에는 1천 2백만의 기독교인이 있다고 숫자를 자랑한다. 신자의 숫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의인이 몇이나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정치적으로 가혹한 핍박 속에서도 믿음을 지켜온 신앙과 선대들의 기도가 지금도 일본이라는 복지국가를 지켜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일본의 기독교 역사를 모르고 함부로 종교 분포만 보고 예수 안 믿어도 잘사는 일본 운운하는 것은 영적 장님이 하는 소리다.
일본인들이 계속하여 앞으로 3,4대 잡신 앞에 절하고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생활을 하지 않는다면 일본은 소돔과 고모라보다 더 무서운 형벌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오늘의 일본이 잘 사는 것은 그들이 잘나서가 절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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