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방/수필

기행문 / 김유정 문학탐방

웃는곰 2008. 5. 3. 21:00
 

문학기행 / 김유정 생가 답사기

풀꽃아동문학동인회 주최로 오월 이십오일 문학기행 모임이 있었다. 

40여 명이 승용차 8대로 양평 소재 대명 콘도에 모여 서산에 지는 해를 바라보며 저녁상을 즐겼다. 일정 계획표에는 24일 밤 취침은 절대 불가라고 해 놓고 기상은 25일 아침 7시로 되어 있었다.

자지 말라 해놓고 아침 7시에 일어나라니 무슨 이치가 이러냐는 책임자들에 대한 공박에 모두는 사심 없이 하하 호호 웃어 넘겼는데 노래방에 간 회원들이 밤을 새워 노래를 하는가 하면 지친 회원은 슬그머니 23호실로 올라와 여기저기서 쿨쿨.

이렇게 지내놓고 보니 취침 불가에 기상 일곱 시가 틀린 것이 아니었다.

밤을 새운 사람이나 잔 사람이나 9시에 출발, 춘천시 신동면 중리(실레마을;시루마을) 소재 소설가 김유정의 생가를 찾았다. 

김유정(金裕貞)은 1908년 출생하여 1937년에 29세로 요절한 청년 작가였다. 그는 혜성처럼 잠깐 나타났다가 무지개처럼 사라진 천재 작가였는데 딱하게도 연상의 여인들(박록주, 박봉자)을 사모하다가 실연 당하여 가슴이 헐어 아물지 않는 아픔을 안고 요절한 고독한 실연자이기도 했다.

그의 태어난 동네가 모두 문학의 배경이고 모든 작품은 동네 사람들의 이야기를 소재로 쓴 것이어서 농군의 땀내가 배어난다.

우리는 그의 생가와 기념관을 둘러보고 문맹퇴치를 위해 세운 움막학교가 불에 타 없어졌다는 움막 터를 보고 그 당시 의숙(학교)을 세웠다는 자리와 교회가 세 들어 사용중인 강의실을 돌아보고 봄봄에 나오는 점례네 집이며 곳곳에 김유정의 발길이 닿았다는 동네 꽃길을 동화속의 전설을 밟는 기분으로 돌았다.

김유정의 작품 세계를 소개하기 위하여 다니며 이야기하고 생각한 것은 다음에 더 쓰기로 하고 여기서 줄인다. 둘러보며 김유정에 관한 문학 자료를 올린다.

* 작가 연보와 기타 자료

 1908년 1월 11일 강원도 춘천부(春川府) 남내이작면(南內二作面) 증리(甑里-실례) 427번지, 지금의 강원도 춘천군 신동면 증리에서 부친 김춘식(金春植) 모친 청송(靑松) 심씨의 2남 6녀 중 일곱째이자 차남으로 출생, 10대조 김육(金堉)은 대동법(大同法)을 실시한 실학(實學)의 선구자였으며, 9대조 김우명(金佑明)은 현종(顯宗)의 국구(國舅-임금의 장인)였고 숙종(肅宗)의 외할아버지였다.

고조부 김기순(金基恂) 때 춘천 실레 마을로 이주했다. 증조부 김병선(金秉善)은 실레 마을에 화서학파(華西學波)의 거유(巨儒)인 김평묵(金平默)을 초빙, 학당(學堂)을 열고 자제들을 교육케 했다. 화서학파의 위정척사(衛正斥邪)학풍(學風)을 이어받은 조부 김익찬(金益贊)은 춘천 의병(義兵)봉기의 배후 인물로 재정 지원을 했다.

조부 때 6천 석 추수를 하는 춘천의 명가(名家)가 되었다. 음직(陰職)으로 도사(都事)벼슬을 제수 받았다.

김유정이 탄생하는 그 해에 춘천의 2차 의병봉기로 정미의병(丁未義兵)의 기세가 드높았다.

 

1914년 11월 26일 도사(都事) 벼슬을 했던 김유정의 조부 김익찬(金益贊)사망.

이때부터 부친 김춘식(金春植)을 참봉으로 호칭. 이해 겨울에 한양(漢陽-지금 서울)의 종로구 운니동(당시 진골)에 대저택을 마련, 가족이사. 춘천에 집을 그냥 두고 소작농으로 하여금 농사를 짓게 함.

1915년 7세. 3월 18일 어머니 청송 심씨 사망. 춘천에 내려갔던 형 유근(裕近)이 미처 오지 못하자 홀로 상주가 됨.

1917년 9세. 5월 23일 아버지 김춘식 사망. 고아가 됨. 형님과 형수 누님의 사랑을 받음. 운니동(雲泥洞)에서 관철동(貫鐵洞)으로 이사. 1919년 봄까지 3년 동안 한학과 붓글씨를 익힘. 김유정 작품에 나타나는 동양 고전지식은 이때 익힘.

 1920년 12세 재동공립보통학교(齋洞公立普通學校)에 입학. 1921년 13세 3학년으로 월반

1923년 15세 재동공립보통학교 4년 (제16회)졸업. 4월 9일 휘문고등보통학교(徽文高等普通學校)를 검정(檢定)으로 입학. 숭인동(崇仁洞) 80번지로 이사.

학적부에는 가족 11명, 형제 2명, 재산 5만원, 성질을 질박, 키는 5척. 이름을 김나이(金羅伊)로 고쳐 집에서 부름. 소설가가 된 안회남(安懷南)과 같은 반으로 각별히 친하게 지냄.

1926년 18세 휘문고보 3학년을 마치고 휴학 1927년 19세 휘문고보 4학년에 복학1928년 20세형 유근 가족 춘천 실레로 이사. 유정은 봉익동 삼촌집에 얹혀 지냄.

인간문화재 박록주(朴綠珠) 공연을 처음 관람

1929년 21세 휘문고보 5년 졸업(제 21회). 삼촌댁에서 사직동 둘째 누님 유형(裕瀅)집으로 거처를 옮김(누님은 이혼 후 양복공장 근무)

 1930년 22세 연희전문학교(延禧專門學校) 문과에 입학하였으나 6월 24일 학칙 제 26조에 의거, 제명처분 당함. 하지만 김유정은 더 배울 것이 없어 자퇴했다고 함.

박록주를 짝사랑했으나 끝내 거절당함. 춘천 실레에 내려와 방랑생활. 들병이와 친해짐. 늑막염 재발. 안회남의 권고로 소설을 씀

1931년 23세 4월 20일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 상과에 다시 입학. 그 후 자퇴함(퇴학자 명단에만 있을 뿐 상세한 기록은 없음). 실레 마을에 야학당(夜學堂)을 열다. 농우회, 노인회, 부인회 조직. 농우가(農友歌) 지어 부름

1932년 24세 야학당을 금병의숙(金屛義熟)으로 넓히고 간이학교로 인가 받음. 느티나무를 식목함. 6월 15일 처녀작 단편 심청(深靑)을 탈고.(4년 뒤인 1936년 <중앙>에 발표) 충남 예산 등지의 금광을 전전함

1933년 25세 서울에 올라와 사직동에서 누님과 함께 기거. 폐결핵 발병진단. 1월 13일 <산골 나그네>탈고, 안회남의 주선으로 <제 1선>지 3월호에 발표. 8월 6일 '총각과 맹꽁이'를 탈고, <신여성> 9월호에 발표. 공식적으로 발표된 작품으로 처녀작은 '산골 나그네'가 됨. 사직동 시대 유정은 톨스토이가 되고자 함. 이석훈(李石薰), 채만식(蔡萬植), 박태원(朴泰遠), 이상(李箱) 등을 만남.

1934년 26세. 누님이 사직동 집을 처분. 혜화동 개천가에 셋방을 얻어 밥장사. 8월 16일 '정분'탈고. 9월 10일 '만무방'탈고. 12월 10일 '애기'탈고. '노다지', '소낙비'를 12월에 탈고.(1933년의 '따라지의 목숨'을 1934년 '흙을 등지고'로 개작, 신문사와 협의 '소낙비'가 됨) 안회남이 대신 신춘문예 응모작으로 부침

1935년 27세 조선일보 신춘문예 현상문예 현상모집에 '소낙비' 1등 당선. 조선중앙일보 신춘문예 현상모집에 '노다지'가작 입선. 1월 20일 아서원에서 신춘문예현상 1등 당선 축하회. 6월 3일 백합원서 조선문단사가 주최한 문예좌담회에 참석. 김유정은 안회남(安懷南), 김남천(金南天), 이학인(李學仁), 박영호(朴英鎬), 이선희(李善熙), 함대훈(咸大勳), 이헌구(李軒求), 이석훈(李石熏), 김환태(金煥泰), 이무영(李無影), 한인택(韓仁澤), 서항석(徐恒錫), 정지용(鄭芝溶), 김희규(金憘奎), 이하윤(李河潤), 김광섭(金珖燮), 방인근(方仁根), 최정오(崔定吾) 와 함께 연회에도 참석했다.

단편 '금따는 콩밧' <개벽> 3월호, '금'발표지 미상, 1월 10일 탈고, '떡'<중앙> 6월호, '만무방' <조선일보> 7월, '산골' <조선문단> 7월호, '솟' <매일신보> 9월, '정분'의 개고작(<정분>이 <솟>으로 개작되었다), '봄·봄' <조광> 12월호 등을 발표한다. 이 한해에 소설 9편과 수필 '잎이 푸르러 가시든 님이' <조선> <중앙일보> 3월 6일, '조선의 집시-들병이 철학' <매일신보> 10월, '나와 귀뚜람이' <조광> 11월호 등, 3편을 발표, 6월 3일 '조선문단'이 주최한 문예좌담회에서 이태준(李泰俊)에 대해 깊은 관심을 보임. 구인회(九人會) 후기 동인으로 참여. 이상과 깊은 친분을 가짐. '안해'를 <사해공론(四海公論)> 12월호에 발표하여 문단의 찬사를 받음

1936년1월부터 8월까지 9편의 소설과 4편의 수필을 발표.

단편 '심청' <중앙> 1월호, '봄과 따라지' <신인문학> 1월호, '가을' <사해공론> 1월호, '두꺼비' 구인회 동인지<시와 소설> 3월호, '봄밤' <여성> 4월호, '이런 음악회' <중앙> 4월호, '동백꽃' <조광> 5월호, '야앵' <조광> 7월호, '옥토끼' <여성> 7월호 가 각각 발표됨. 미완의 장편소설 '생의 반려'는 <중앙> 8,9월호에 연재됨.

수필 '오월의 산골작이', '어떠한 부인을 마지할까', '전차가 희극을 낳어', '길' 등을 5월에서 8월 사이에 발표하고 '행복을 등진 정열'은 여성지 10월호에, '밤이 조금만 짤럿드면'은 <조광>지 11월호에 발표.

단편소설 '정조'는 <조광>지 10월호에, '슬픈 이야기'는 <여성>지 12월호에 발표.

마지막 여인 박봉자를 짝사랑하였다.

1937년 병이 깊어져 김문집이 병고작가 구조운동을 벌임.

서간문 '문단에 올리는 말씀'을 <조선문학> 1월호에 게재.

수필 '강원도 여성' <여성> 1월호, '병상 영춘기' <조선일보> 1월 29일∼2월 2일 발표. 2월 조카 진수에 의지하여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 신상곡리 100번지의 매형 유세준의 집으로 옮겨와 요양 치료함.

소설 '따라지' <조광> 2월호, '땡볕' <여성> 2월호, '연기' <창공> 3월호 발표.

서간문 '병상의 생각'을 <조광>지 3월호에 발표하고, 세상 뜨기 11일 전인 3월 18일 '필승전'으로 되어 있는 마지막 편지를 안회남에게 보냄.

3월 29일 오전 6시 30분에 30세의 나이를 다 채우지 못하고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 산상곡리 100번지 매형 유세준의 집에서 사망함. 서대문 밖(홍제동 화장터)에서 유해는 화장되어 한강에 뿌려짐.

이 해의 사후 발표작으로 수필 '네가 봄이런가' <여성> 4월호, 단편소설 '정분' <조광> 5월호, 번역동화 '귀여운 소녀' <매일신보> 4월 16일∼21일, 번역 탐정소설 '잃어진 보석' <조광> 6월∼11월호 발표됨

1938년 단편집 '동백꽃'(三文社) 발간됨

1939년 사후 발표된 소설로 '두포전'<소년> 1∼5월호, '형'<광업조선> 11월호, '애기'<문장> 12월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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