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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 사람 172 / 또 만난 저승사자

웃는곰 2026. 4. 7. 17:32

옆 사람 172 / 또 만난 저승사자

(오늘 4-7일 한 시간 전 이야기/ 집에 오자 씀)

 

나는 전철로 퇴근할 때는 영등포 신길역에서

240분 천안행 급행 2-4호차를 탄다.

 

내가 이렇게 구체적으로 쓰는 이유는 누구든 이 차를

만나면 한 번 2-4칸 경로석에 타보시라는 의미다.

 

내가 이사한 후 5개월 동안 그 차를 탈 때마다

그 자리에 꼭 앉아있는 승객이 있었다.

구석 자리에 넓은 챙이 새카맣고 둥그런 모자를 쓴 사람이다.

첫날 보았을 때 저승사자가 앉아 있군 하고 생각했는데

무려 5개월 동안에 20회 이상을 그와 동석했다.

 

얼굴도 까맣고 챙 넓은 모자도 까만데 모자 둥그런 지붕(?)에는

파란 띠가 둘러 있다.

볼 때마다 저승사자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옆에 앉아서 말을 나누어 보지 못했다.

그러다가 오늘 궁금증을 못 참고 말을 건넸다.

어른은 어디까지 가십니까?”

목소리가 친절했다.

, 천안까지 갑니다.”

날마다 이 차를 타시는 것 같은데 어디 출퇴근을 하시나요?”

아닙니다. 놀러 다닙니다. 농사일도 아직 할 때가 아니라

아침에 이 차를 타고 서울 가서 아주 재미있게 놀다 돌아갑니다.”

그렇게 재미있는 일도 있습니까?”

히히히 나는 즐기다 갑니다. 하루도 안 하면 못 배깁니다.”

 

이게 무슨 소리일까? 뭘 꼭 해야 한다는 소릴까? 구금해서

그게 무슨 일인데 그렇게 좋습니까?”

난 약 안 먹고도 상대를 죽여줍니다.”

?”

그가 나한테 물었다.

무슨 띠이십니까?”

용띠입니다.”

나는 말띠인데 아직도 싱싱합니다.”

 

이때 약간 이상한 감이 잡혔다. 그래서 고개를 끄덕였더니

댁은 무슨 일을 하시나요?”

출판을 합니다.”

하고 가방에서 울타리 15호를 내밀면서 책 읽기 좋아하느냐 물었더니

좋아한다면서 그 책 주시면 좋겠다고 했다.

 

그리고 자기가 쓰고 있는 똑같은 모자가 몇 개 더 있는데

나한테 주고 싶다고 했다.

나는 절대 싫었다. 그래서 모자 안 좋아한다고 하는데

바로 왼쪽에 앉은 점잖게 생긴 노신사가 내가 한 권 더 들고 있는

울타리를 손짓하며 자기도 달라고 했다.

그래서 울타리 17호를 주었더니 앞 페이지

머리말을 자세히 읽고 책 끝에 후원자 명단을 꼼꼼히 들여다보고 난

다음 샘터사가 폐간된다는 것이 안타깝다는 기사를 계속 읽었다.

 

그 자세가 진지해서 물었다.

선생께서는 독서를 좋아하시나 보지요?”

, 저도 이런 일을 합니다.”

출판을 하십니까?”

. 강남에서 오래 전부터 했는데 오늘 안양에 그 관계 업무가 있어서 갑니다.”

출판하신 지가 오래 되신 것 같습니다.”

한 오십 년 됩니다.”

올해 연세는?”

내년이면 80이입니다.”

작품도 쓰시나요?”

.”

나보다 약간 아래지만 보기에 대단한 실력자 같았다.

 

순간 같은 출판업자라 울타리를 허투루 볼 것 같지 않아 비판에 약간 겁도 났다.

그러는 사이 안양역에  도착.

그가 일어서며 말했다.

이 책 다 읽어보고 전화드리겠습니다.”

 

그렇게 헤어졌다. 저승사자는 의자에서 다리를 접고

울타리를 다리 사이에 끼고 자고 있었다.

수원역이었다.

내가 툭 치며 말했다.

그만 주무시고 안녕히 가세요.”

저승사자는 깜빡 잠에서 깨어 인사했다.

저 집에 가서 이 책 다 읽어보겠습니다. 좋은 책을 주셔서 고맙습니다.”

 

한 자리에서 두 사람한테 책을 주어보기는 처음이다.

돌아오면서 그 79세 출판사 사장이 무슨 말을 해 올까?

염려되고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뭐 이따위 책을 만듭니까. 종이가 아깝지 않습니까?”

이런 전화가 오면 어쩌나 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