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장이 설명했다.
“그럴 것 없어요. 나는 우리 회사 직원이 1500명인데
그 중에 각 부서별로 10권씩을 주고 읽히려고 해요.
그러니까 앞으로 허선생은 150일 동안 책을 가지고 오셔야 합니다.”
“그런거람 쉽쥬. 150일이래야 다섯 달밖에 더 되나유.
일년도 안 되는대유.
회장님 깊은 뜻을 알았으니 내일 다시 와서 뵙지유.”
회장이 「귀 밝은 임금님」을 들고 물었다.
“이 책을 보면 내 생각이 난다니
어떤 내용인지 꼭 읽어 봐야겠소. 잘 가시오.”
허당은 회장실에서 나와 경비실로 발길을 돌렸다.
경비실장과 김씨가 기다리고 있었다.
경비실장이 먼저 입을 열었다.
“형씨, 어제 주신 헌책방 할아버지 다 읽었습니다.”
경비실장이 큰일이나 한 듯 자랑하는 소리를 듣고
허당이 곁에 선 김씨한테도 물었다.
“김선생님도 읽으셨쥬?”
“예, 다 읽었습니다.”
“뭐 좀 물어볼게유. 할아버지를 찾아오는
학교 여선생님이 있지유?
그 선생님 이름을 아시나유?”
두 사람이 다 대답을 못했다.
그러자 하나 더 물었다.
“그 할아버지 손녀가 할아버지를 뭐라고 불렀나유?”
경비실장이 대답했다.
“할아버지 최고야라고…….”
허당은 경비실장이 읽는 척은 해도 거짓말이라는 것을 알고
아무 말 없이 김씨한테도 물었다.
김씨가 바로 대답했다.
“할아버지 바보야라고 했지요.”
허당은 아무 말 없이 자리를 뜨면서 부탁했다.
“오늘 드린 책 틈나는 대로 읽어보세유.”
허당이 떠나자 경비실장이 김씨 들으란 듯 투덜거렸다.
“원 별것도 아닌 촌놈이 어쩌다 회장 눈에 들어서
사람을 놀리는 거야 뭐야?
재미있는 성인용 책이라면 몰라,
겨우 애들이나 읽는 동화책 나부랭이를 들고 다니며
억지로 읽으라는 꼴이라니 말세여.”
김씨는 듣고 놀랐다.
책 선생이 주는 동화책은 돈을 주고 사서 읽어도 돈이 아깝지 않을 양서인데
그것도 모르고 엉뚱한 소리를 하는 실장이 실망스러웠다.
김씨는 허당이 부지런히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속으로 ‘고맙습니다,
안녕히 가세요’하고 인사를 했다.
내 돈 내가 도둑맞은 꼴
하필이 우체국에서 예금 담당한테 불만을 했다.
“내가 저금하는 거 직접 눈으로 보았지?”
“네, 확실히 보았습니다.”
“그럼서 내 돈 내가 달라는디 안 내주는 건 뭔 경우여?”
“아무리 그러셔도 통장 주인이 와야 합니다.”
“내가 주인인디 허당이 안 오면 끝까지 못 준다는 겨?”
“예.”
“예에? 이런 날강도 같으니, 그럼 뭔 수가 없는 겨?”
“예금주 허당 씨가 오지 못할 경우 허당 씨 가족증명서를
가진 사람이 오면 방법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허당이 가족?”
“허당 씨 부모나 부인이 가족확인서를 가지고 온다면
방법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씀입니다.”
“장개도 안 갔는디 부인이 어딨능겨.”
“어쨌든 허당 씨를 데려오세요.
자그마치 3억이 넘는 거액을 어떻게 함부로 내줍니까?”
“허허, 내가 내 돈 가지고 내 손으로 도둑맞은 꼴 아녀.”
“그러니까 허당 씨를 어떻게든 모시고 오세요.”
“허당을 모시고까지 와?”
“예, 꼭 그러셔야 합니다.”
“허허, 이 하필이 허당에 빠진 꼴 아녀? 나 그냥 갈 겨.”
하필은 우체국을 나와 머리를 수그리고 걸으며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다.
‘결국 허당을 못 데려오면 아내라도 데려오라고? 우짠댜,
내 맴엔 족허지 않지만 그 방법밖에 없구먼…….
만에 하나 허당이 국자 딸허고 혼인이라도 하면 어떻게 되는 겨?
내가 저금한 걸 모두 국자 딸한티 도둑맞는 거 아녀? 안 돼, 그건 안 되는 거여.’
이런 생각을 골똘히 하며 곳간으로 간다는 것이 길을 잘못 들어
국자네 가게 앞을 지나고 있었다.
국자가 앞을 딱 가로막고 물었다.
“하필 왜 이 길로 오는겨?”
“하필? 허허 하필 내가 왜 국자네 집 앞으로 온 겨?”
“혼은 어디다 두고 자기 집도 제대로 못 찾는 거 아녀?”
“씰대 없는 소리 마.”
하필은 갑자기 나타난 국자가 위험한 적으로 보였다.
‘저것이 허당이를 사위 삼으려고 기를 쓰는디
허당이를 내가 뺏기면 우티기 되는 겨.’
하필이 부지런히 곳간으로 달려갔다.
마침 허당이 일찍 나와 회장한테 가지고 갈 책을 챙기고 있었다.
허당을 보니 갑자기 귀하게 여겨져서 친절히 말했다.
“일찍 나왔구먼.”
“야, 서둘러 서울 회장님한티 갔다 와서 헐 일도 있어서유.”
“그려, 잘 챙겨 갖고 싸게 댕겨와. 차비는 넉넉히 있지?”
전에 없던 차비 걱정까지 하는 하필의 속을 모르는 허당은
날마다 하던 대로 인사를 꾸벅 하고 나섰다.
“야, 차비 걱정은 마세유. 댕겨올게유.”
“그려 잘 댕겨와.”
허당은 예정대로 서울 회장이 기다리는 빌딩 앞에 도착했다.
이제는 시간에 맞추어 경비실장하고 김씨가 나란히 기다리고 있었다.
김씨가 먼저 인사했다.
“책 선생님 어서 오십시오.”
경비실장도 전에 없이 친절했다.
“형씨 날마다 보게 되어 반갑습니다.”
“이렇게 반겨주시니 고맙구먼유.”
실장이 앞장서서 회장실 앞까지 안내했다.
“실장님 이러시면 제가 죄송혀유. 저 혼자도 잘 다닐 수 있어유.”
“압니다. 제 맘이니 받아주세요.”
“고마워유.”
허당이 회장실에 들어서자 회장님도 비서도 반겼다.
“어서 오시오, 허선생.”
“저를 선생이라고 하지 마시고 미스터 허라고 불러주세유.”
“미스터 허? 그거 아주 좋지요. 미스터 허.”
“그러시면 하우두유두쥬.”
회장이 재미있다는 눈으로 물었다.
“하우두유두가 뭔가요?”
“제가 기분 좋을 때 하는 소리쥬.”
“듣기에 영어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데……?”
“하우는 제가 사랑한다는 말이구유. 유도 나를 사랑해! 하는 말을 제가 지은 것이쥬.”
“하하하. 원더풀 미스터 허! 책 좀 봅시다.”
회장이 고서만 들고 온 것을 보고 물었다.
“오늘은 덤이 없네요. 기다렸는데.”
“그러셨어유?”
회장이 웃으며 말했다.
“어제 주신 「귀 밝은 임금님」이 아주 재미있었어요.
옛날이야기 같지만 현재 우리 실상을 꼬집은 내용이 아닌가요?”
“그렇지유. 무엇보다 임금님의 심지가 대단히 깊고
지혜로운 분이라고 생각되시지유?
그 점이 회장님과 같다고 생각했지유.”
“과찬이시오. 다른 동화책이 많다고 했으니
「헌책방 할아버지」를 가져올 때마다 한 권씩 덤으로 주시오.”
“야.”
허당은 회장실을 나와 경비실로 갔다.
경비원이 기다리고 있다가 실장이 자랑이나 하듯이 먼저 입을 열었다.
“형씨가 준 「귀 밝은 임금님」 다 읽었습니다.”
“고마워유. 김선상님도 읽으셨지유?”
“예, 우리나라에 그런 임금님이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 임금님이 나오면 태평성대 강구연월이지유.”
경비실장이 놀란 눈으로 물었다.
“형씨, 지금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가요?”(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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