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랍속의 아이들. 28 / 우정⑧ 닫힌 입엔 열쇠도 없다
“그러시면 내일 돈을 가지고 오겠습니다.”
“이 사람아, 안 된다면 안 되는 줄 알아!”
영감은 약간 화가 난 목소리였습니다.
“내일 다시 오겠습니다.”
영감이 까치소리를 냈습니다.
“오지 마!”
다음 날 덕구가 돈 보따리를 들고 좁쌀영감을 찾아갔습니다. 눈앞에 돈다발을 펴놓자 영감이 당황한 소리로 거칠게 말했습니다.
“이 돈 가지고 가서 차용증을 사오시게.”
“네?”
“난 그 차용증이 없으면 절대로 받을 수 없네.”
“차용증이 무슨 소용입니까? 신용이 더 중요하지요. 받으세요.”
“아닐세. 받아도 사 년 뒤에 받을 테니 가지고 가서 기다리게.”
“이자도 깎지 않고 예전처럼 한 달에 사십만 원씩 계산했습니다.”
좁쌀영감은 더 단호히 거절했습니다.
“이자고 뭐고 필요 없어. 도로 가져갔다가 사년 뒤에 보자 하지 않았는가. 난 급한 일이 있어서 나가 봐야 하네.”
영감은 일어나 횅하니 나가고 말았습니다. 덕구는 돈을 그대로 두고 나올 수도 없어서 도로 싸들고 나와 은행으로 갔습니다.
‘별일 다 보겠네. 돈이라면 독약도 마실 어른이 어찌 된 일인가? 참 이상해…….’
덕구는 교장선생님한테 거절당하고 돈을 갚겠다는데 그마저 영감한테 거절당하고 나니 제 정신이 아니었습니다.
‘내가 꿈을 꾸는 건가? 꿈인가 생시인가? 세상인심이 이렇게 좋을 수가, 허허허허.’
덕구는 세상에 태어나 이런 경험은 처음입니다. 거절을 당하고 허전해지는 순간 갑자기 잊었던 준태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자기한테 상의 한번 안 했다고 화가 나서 돌아가 연락이 없는 친구입니다. 그런데 왜 갑자기 그 친구 생각이 나는지 몰라 친구를 찾아갔습니다.
그렇게 화가 나서 떠났던 준태가 덕구를 보자 반가워했습니다.
“오랜 만일세. 덕구.”
“그래, 오랜 만이야. 잘 지냈나?”
“덕구찐빵이 그렇게 유명하다면서?”
“유명하기는, 그런 소문을 들었으면 시식하러 한번 왔어야지.”
“자네가 너무 괘씸해서 안 갔지. 하지만 덕구찐빵 덕에 우리 백화점 장사가 잘 된다고 하더군.”
덕구가 웃으며 물었습니다.
“그런가? 백화점에서 무슨 찐빵을 파느냐고 반대한 사람이 자네가 아니었던가?”
“나야 입점한 사람들이 하는 일이라 상관없지만 폼으로 해본 소리였지. 아무튼 자네 찐빵이 손님을 끌어 모아 우리 백화점이 덕을 크게 보고 있는 건 사실이야. 그러나 자네가 괘씸해서 한번 틀어진 화가 쉽게 안 풀려서 가 보지도 않고 연락도 안 했네. 미안하이. 그런데 오늘은 웬일로 여기까지 왔는가?”
친구 준태는 얼굴 색 하나 변하지 않고 태연하게 아무것도 모르는 양 딴소리를 쳤습니다. 그러면서 속으로 웃었습니다.
‘사랑하는 덕구야, 네가 잘살게 되어 고맙다. 이렇게 조금만 도와주면 팔자가 바뀌는 건데 어째서 나한테 말 한 마디 않고 고생을 했어, 이 사람아. 자네가 잘사니 내가 이렇게 기쁘지 않은가. 흐흐흐.’
친구 속을 모르는 덕구는 웃으며 말했습니다.
“난 오늘 아주 이상한 일만 당하고 왔어.”
“무슨 일인데?”
“나를 도와주신 교장선생님한테 이제부터는 학생들 간식을 내가 맡겠다고 말씀드렸더니 절대 안 된다는 거야. 그래서 나도 이렇게 살만하게 되었으니 누군지 모르지만 급식 후원자 분의 부담을 반만이라도 덜어드리려고 했는데 안 된다는 거야. 그래서 그 고마운 분을 만나게만 해 달라고 해도 그마저 안 된다고 하시는 거였네. 또…….”
“또?”
“이상한 일이야, 참 이해가 안 간단 말이야. 그 노랭이 돈벌레 좁쌀영감이 전혀 달라졌어. 내가 전에 비싼 이자를 쓰고 있다고 하지 않았나?”
“그랬지. 갚은 이자가 원금보다 많다는 말도 했고.”
“그 영감이 말일세, 허허허.”
“왜? 이자를 더 높이자고 하던가?”
“아니, 그게 아니고……. 영감이 내가 써준 차용증을 잃어버렸다는구먼.”
“그래서?”
“그래서 차용증을 찾을 때까지는 돈을 받을 수 없다는 거야. 그래서 이자 받으러 오지 않을 테니 이자를 적금으로 부었다가 사 년 뒤에 갚으라는 거야. 만약 차용증을 못 찾으면 받기를 포기하겠다면서 나 보고 잃어버린 차용증을 사오라는 걸세. 그걸 내가 어떻게 사겠나, 하하하.”
“그야 당연하지, 차용증 없이 어떻게 원금이나 이자를 받을 수 있는가.”
덕구는 이렇게 말하면서 속으로 웃었다.
'문학방 > 소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서랍속의 아이들. 30 / 우정⑩ 친구 이름으로 바치는 십일조 (0) | 2025.06.02 |
---|---|
서랍속의 아이들. 29 / 우정⑨ 내가 네 하나님이다 (0) | 2025.06.01 |
서랍속의 아이들. 27 / ⑦ 차용증보다 신용이 먼저 (0) | 2025.05.30 |
서랍속의 아이들. 26 / 두 제자의 우정⑥ (1) | 2025.05.29 |
서랍속의 아이들. 25 / 두 제자의 우정⑤ (0) | 2025.05.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