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방/동화

놈과 나1-100

웃는곰 2018. 12. 22. 12:38

놈과 나 1 / 이상한 놈

놈은 황송아지 같은 성격이었다.
고집이 뿔 같고 무엇이든
제 맘에 안 들면
절대 용남하지 않고 들이받는
그래서 놈은 내 눈에 거슬렸다.

놈과 나는
스물네 살 군복을 입고서였다.
어디서 무엇을 하다 왔는지
놈도 나를 모르지만 나도 놈을 알 수 없었다.
다만 성격이 전혀 다른
불만을 안겨주는 그런 놈이라는 것밖에.

놈과 한 내무반에서
똑같은 모포를 덮고 나란히 자자니
저도 불만 나도 불만
부부가 이런 사이였다면 당장 이혼했으리라

엄한 군율 앞에 무슨 일이었는지 하다가
놈과 나는 의견이 달라 부딪쳤다.
놈과 나 2 / 한판 뜨자!
내가 동쪽으로 가자하면
놈은 서쪽으로 고집하고
내가 사이좋게 하자 하면
그 따위 소리 치우라고 고집

한두 번이 아니고
한 달 사이에 열 번도 더 부딪쳤다
내가 고개를 바짝 세우고
넌 뭘 하던 놈인데 매사가 이러냐?
네 놈은 뭘 하다 온 놈이냐
칼날 같은 대꾸.

내가 정색을 하고 전쟁선포
야! 한판 뜨자!
놈도 눈을 부라리며
좋다! 한판 떠 주마

일과 끝나고 보자!
좋다, 어디서 뜰래?
헬리콥터 비행장에서!
좋다 거기서 보자!
놈과 나 3 / 좋다 덤벼라!
그 날 놈과 나는 단단히 차리고
H자가 그려 있는 헬리콥터 비행장으로 갔다.
가운데는 모래 바닥 둘레는 둥그런 잔디밭
한판 붙기에 좋은 결투장이었다

놈과 나는 마주서서 눈에 불을 켰다.
자! 뜨자!
좋다! 덤벼라!
순식간에 둘이 엉겨 붙어 주먹질을 시작
발로 걷어차고 밀고 
이단 옆차기로 들어오면 돌려차기로 막고
머리를 박고 멱살을 잡고 뒹굴었다

놈의 입술이 터져 피가 났다.
나도 입술이 터져 피가 났다
그래도 놈과 나는 치열하게 치고받았다.
모래바닥이 뒤집혀 잔디 위에 덮이고
얼마나 걸렸는지 주먹질을 하다가
지쳤다. 내가 먼저 휴전 제의.
 
야! 쉬었다 뜨자!
 놈과 나 4 / 넌 누구냐?
놈은 나를 놈이라고 부르고
나도 그 이름 대신 놈이라 불렀다
그때 부르던 네놈 내 놈은 늙지도 않고 50년.

놈과 나는 잔디밭에 배를 쭉 깔고
마주 엎드려 바라보았다.
내가 손수건으로 놈의 입술을 닦아주었다
놈도 내 입술을 닦아주며 말했다
아프지?
넌?

놈의 눈에 사납던 빛이 걷히고 착한 빛이 돌았다.
나는 속으로 놈이 그렇게 나쁜 인간은 아닌 것 같다고 생각했다.
놈이 말했다.
때려서 미안하다.
나도 대답했다.
나만 맞았냐? 너도 많이 아프지?

우리가 머리를 맞대고 누운 머리 위로 아카시아 그늘이 내리고 머리 위로 구름이 흘러가며 내려다보고 있었다.
넌 누구냐? 똑같이 이구동성으로 물었다.
놈과 나 5 / 아픈 만큼 사랑하자
놈이 먼저 입을 열었다.
미안하다. 나는 자란 환경이 너희들과 좀 다르다. 6.25때 부모님을 잃고 고아원에서 자랐다. 거기서 학교도 다니고 나 같은 애들과 부딪치며 살다 보니 좀 날카롭고 사나운 데가 있다.

고아원서 살았다고?
나는 놀라서 일어나 무릎을 꿇고 사과했다.
정말 미안하다. 그런 줄도 모르고 너를 때리다니!  
네놈이 나보다 더 많이 맞았다. 너무 때려서 미안하다. 
아니야, 너 같은 친구를 때렸다는 게 마음 아프다.

넌 싸움 못 해 봤지?
왜?
주먹질이 서툴고 네가 때리는 건 간지럽더라. 하하하.
뭐라고?
나는 싸우면서 자랐기 때문에 네놈하고는 달라.
놈이 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했다.
우리 이제부터 좋은 친구로 지내자!

나는 놈의 손을 꼭 쥐고 감격해서 대답했다
그래, 우리 아픈 만큼 사랑하자.
놈과 나 6 / 코티 분 때문에
주먹질로 친해진 우리는 서로 형제처럼 지냈다.
나는 피엑스에서 물건을 팔고 놈은 훈련을 하면서 경비를 섰다.
피엑스에서는 무엇이든 먹을 것을 줄 수 있어서 주려고 해도 놈은 얼마나 강직하고 사리가 분명한지 무엇으로도 대접을 할 수가  없었다. 술이라도 한잔 주려 해도 거절.
어쩌면 그 점이 내 마음에 더 들었는지도 모른다.

어느 날 밤 10시였다. 부대에서 주먹이 세기로 유명한 중사가 술이 잔뜩 취해 피엑스로 들어와 프랑스제 코티 분을 내놓으라는 것이었다. 한 달에 10개가 나오지만 나오는 날로 팔려나가는 것이 그 화장품이었다. 피엑스에서는 9백 원인데 밖에서는 2400원이라고 했다. 그러기 때문에 대단한 인기 상품이었고 그것은 아무한테나 돌아가지도 않았다. 다 팔려서 없는 물건을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없어서 못 준다고 하자 중사는 화를 버럭 내며 실내의 탁자와 의자를 집어던지고 중앙의 난로에다 술통을 굴려 넘어뜨렸다. 순간 천장의 연통이 왈그랑쟁강 소리를 내며 떨어져 굴렀다. 중사는 더 열이 나서 나를 공격하려고 주먹을 쥐고 덤벼들었다.
바로 그 순간 친구 놈이 야간 경비를 나가다가 들어오며 물었다.
놈아, 왜 아직도 불을 안 끄고 있냐? 바쁘냐?
그 소리에 중사가 돌아서서 ‘넌 뭐야 이 새끼야!’하고 소리치며 주먹을 휘두르며 놈한테 달려들었다. 
놈과 나 7 / 나를 구해 준 고마운 놈
주먹왕 중사가 달려들자 놈은 노루보다 빠르게 달아났다. 그 뒤를 술에 잔뜩 취한 중사가 지그재그로 따라 달려 나갔다.
이크! 이때다. 살았다!
나는 잽싸게 실내 불을 끄고 문을 밖에서 잠그고 달아나 외등이 비치는 언덕에 숨어서 내려다보았다. 중사는 놈을 잡지 못하고 지그재그로 돌아와 피엑스 문을 흔들어대며 소리쳤다.
야, 병장! 문 열어! 안 열면 넌 죽었어! 문, 열어 열어!
미친개처럼 버럭버럭 외치다가 비틀거리며 문 앞에다 오줌을 찍찍 싸대더니 별수 없다는 듯 지그재그 걸음으로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다음날 나는 나를 구해준 놈을 만나 고맙다고 말했다.
중사가 행패를 부려서 난감했었다. 누군가가 와서 도와주었으면 하고 바라고 있을 때 바로 네놈이 나타나서 나를 구해준 거다.
달아난 네놈이 중사한테 잡히면 어떡하나 걱정을 했는데 중사가 비틀거리며 혼자 돌아오는 것을 보고 마음을 놓았다. 고마웠다.
이렇게 놈의 덕으로 위기를 모면했고.

그리고 얼마가 지나서였다. 놈이 보자고 하여 귀를 기울였더니 하는 말.
놈과 나 8 / 맨발의 소년
사격장에 보초를 서는데 초등학교 4학년 아이가 맨발로 호미와 깡통을 들고 땅에 묻힌 실탄을 캐고 있었다. 그래서 아이한테 넌 왜 맨발이냐고 물었더니 아이 대답이 이랬다.
엄마는 나가서 없고요 아버지는 병이 나서 집에 누워서 나오지도 못해요. 그래서 내가 밥도 해야 하고 돈이 없어서 운동화도 살 수가 없어서 맨발로 살아요.
이런 대답을 듣고 아이가 불쌍해서 너한테 찾아왔다. 방법이 없을까?
그리고 놈이 설명했다.
2400원이면 운동화를 살 수 있다는데, 피엑스에서 맘만 먹으면 그런 것 하나쯤 사 줄 수 있지 않을까?
2400원이면 당시 병장 월급이 9백 원, 3개월간 안 쓰고 모아야 하는 액수였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말했다.
피엑스 돈은 국가 재산이다. 그렇게 사용할 수는 없다. 내게 의견이 하나 있다. 부대 주변에는 사방에 빈병들이 널렸다. 그것을 주어모아서 팔자. 그렇게 하여 아이 신발을 우리 힘으로 사주자.

놈은 고개를 갸웃거리다 대답했다.
빈병이 얼마나 간다고 어느 천 년에 2400원을 만드냐?
양주병은 하나에 5원, 맥주병은 3원, 사이다 소주병은 1원씩이다 많이만 모으면 그런 돈은 만들 수 있다. 어떠냐?
놈과 나 9 / 빈병 모으기
좋다, 네 의견대로 해 보자.
우리는 뜻이 통했다. 그날부터 눈에 띄는 대로 빈병을 모아들이기 시작했다. 몇 달 동안 모은 병이 천 개가 넘었다. 비싼 양주병과 맥주병이 많아서 5400원이 모였다.
놈은 날마다 사격장에 나가서 그 아이를 기다렸다. 그리고 저녁 이면 나한테 와서 말했다.
아이가 오늘도 안 왔다. 어떻게 되었을까? 무슨 일이라도 있나?
나는 더 기다려 봐. 언젠가는 나타나겠지 하면서 많이 궁금했다.
놈은 아이가 안 오니까 더 불쌍한 생각이 든다.
그런 아이는 고아원이라도 가면 좋을 텐데……. 하고 나는 막연히 고아원으로 어쩌고 중얼거렸다.
그러자 놈은 고아원에서 살아 보았기 때문에 고아원에서 사는 어려움도 만만치 않다는 말을 몇 마디 했다. 그러나 무슨 말을 했는지 지금은 기억에 없다.
다만 나는 놈이 동병상련의 아픔을 느끼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어쩌면 그 아이의 고통이 바로 놈이 겪었을 과거의 아픔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그 아이 운동화라도 사주고 싶었지 않았을까.
여름이 가고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와도 아이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래도 놈은 사격장 경비를 자청해 나가서 아이를 기다렸다.
다시 봄이 왔고 돈은 주인을 잃고 쓸 곳을 찾아야 했다. 중대장이 나한테 그 돈을 어떻게 써야 좋겠느냐고 물었다.
놈과 나 10 / 너나 잘 가라
나는 부대에서 좋은 일에 써 달라고 했고 중대에서는 훈련받다 다쳐서 수도육군병원에 입원한 전우들의 위로금으로 사용되었다.
이런 저런 추억을 남기고 복무기간을 마치고 놈과 나는 제대복을 입고 배출대에서 마지막 3일을 함께 보내고 귀향 날을 맞았다.
나는 고향으로 갈 생각에 들뜬 채 놈한테 물었다.
이렇게 헤어지면 우리 언제 또 만날까?
놈은 약간 어두운 얼굴로 대답했다.
너나 잘 가라. 나는 나가지 못한다.
왜?
귀향지가 없어서 내보낼 수가 없단다.
귀향지? 집으로 가면 되잖아.
나 집 없다. 고아원에서 자라서 입대를 했는데 그 고아원이 없어져서 갈 곳이 없다.
나는 순간 가슴이 막혔다. 무슨 말을 해야 할는지도 생각나지 않았다. 지금 같았으면 우리 집으로 가자고 하면 될 일인데 스무 살이 넘었어도 그런 머리는 못 쓸 만큼 아둔했다. 
놈은 나와 악수를 하고 부대 높은 언덕에 올라 나를 향해 손을 저었고 나는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제대병 대열에서 놈을 돌아보며 무거운 발길을 돌렸다. 언제 어디서 다시 만나자는 기약도 없이 놈과 나는 그렇게 이별을 하고 말았다.
놈이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궁금증은 내 마음을 떠나지 않았다.
놈과 나 11 / 찾았다
놈과 헤어진 지 7년이 지난 어느 날 우연히 한 부대에서 근무하고 절친하게 지내던 샌님을 만났다. 샌님은 내가 혼자 지어 부르는 그 친구 이름이다.
이 새님은 부대에서 대단한 인기가 있었다. 눈이 맑고 크고 시원하고 얼굴도 예쁘고 입술이 여자같이 생긴, 그래서 많은 선배들의 사랑을 받았지만 성격이 얼마나 까칠했던지 다른 사람하고는 말을 잘 않는 외톨이었다.
그런 샌님이 나한테는 허물 모르고 벽 없이 지냈다. 그도 피엑스 근무를 하다가 다른 부서로 가서 특수훈련을 많이 받았지만 언제나 조용하고 반듯한 인물이었다.
샌님과 만난 나는 누구보다 고집쟁이 놈 소식을 물었다. 그도 나보다 더 고집쟁이 놈을 더 보고 싶어 하였다. 고집쟁이 놈이 어디서 어떻게 사는지 알 길이 없는 샌님과 나는 고집쟁이 놈 이야기였다.
출판계에 있는 그와 나는 만나기가 쉬웠고 이야기는 출판에 관한 것이었고 남은 시간은 고집쟁이 놈 이야기였다. 고집쟁이 놈을 모두가 좋아한 것은 그 성격이 올곧고 불의를 용남하지 않는 깐깐함 때문이었다.
그런 반면 놈은 경우가 밝았고 사리판단이 빨랐다. 그렇게 놈을 찾고 있던 어느 날 샌님이 전화를 걸어왔다.
“찾았다 찾았어.”
“뭐라고? 뭘 찾았다는 거야?”
놈과 나 12 / 사랑한다는 말보다 진한 말
샌님이 기분 좋은 소리로 대답했다.
“고집쟁이 찾았다.”
“그래? 놈이 어디서 어떻게 지낸대?”
“광화문.”
“광화문 어디?”
“내가 당장 네 사무실로 갈 테니 찾아보자.”
“빨리 와라. 빨리.”
우리는 광화문 뒷골목에 있다는 맥주홀롤 찾아갔다. 맥주집이 백 평은 될 만큼 넓고 종업원이 여럿이었다. 한 종업원을 잡고 물었다.
“여기 아무개라는 사람이 있나요?”
“지배인 말입니까?”
지배인이라는 말에 약간 놀랐다. 놈이 지배인이라니!
그러나 잠시 후 지배인이라는 놈이 나타났다. 놈이다! 내가.
“야! 인마 너너?”
놈이 놀란 듯
“웬일로 네놈들이 여기까지 왔냐?”
“술 마시러 왔다. 지배인, 술 가져와라.”
놈놈 하면서 악수를 나누고 얼굴을 서로 들여다보았다. 7년씩이나 헤어졌다가 만난 인사가 욕지걸이다.
놈이라고 하든, 새끼라고 하든 무슨 소리를 해도 친근한 사이에 주고받는 말은 사랑한다는 말보다 진하다.
놈과 나 13 / 세상에 공짜가 어딨냐
종업원이 맥주와 땅콩 안주를 차려주어 우리는 둘러앉았다. 가장 궁금한 것 먼저 물었다.
“너 어떻게 나왔니?”
“말로 하면 길다. 술이나 먹고 가 놈들아.”
“대접이 겨우 이거냐?”
“술집에서 술보다 더 좋은 대접이 어디 있냐?”
“허긴, 공짜 술일 테니 마셔 보자.”
“세상에 공짜가 어딨냐?”
“술값을 내라고?”
“안 내면 못 간다.”
또 궁금한 걸 물었다.
“지금 어디서 사냐?”
“집도 없는데 어디서 살 것 같으냐?”
괜히 아픈 데를 건드린 것 같았다. 그런데 놈이 상상외로 쉽게 대답했다.
“네 놈들이 알다시피 집 없는 난 여기서 먹고 잔다.”
“불편한 건 없고?”
“내가 그런 거 따질 처지냐? 낮엔 일하고 밤에는 저 안에 방이 있는데 거기서 자다가 괴로워서 홀에 나와 의자를 깔아놓고 잔다.”
“무엇이 얼마나 괴로워서 방을 두고 의자에서 자냐?”
“그게 궁금하냐?”
놈과 나 14 / 여자한테 시달려 봤냐
“궁금하지, 방을 두고 왜?”
“네놈들 여자한테 시달려 봤냐?”
“그게 무슨 소리냐?”
“난 여기서 완전히 중성이 됐다.”
“중성?”
“남자도 아니도 여자도 아닌 것 말이다.”
“무슨 소리냐?”
이때 늘씬하고 예쁜 여자들이 나타나 우리 쪽에다 인사를 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궁금한 것이 또 생겼다.
“야, 저 아가씨들은 뭐냐?”
“여기서 일하는 애들이다. 예쁘지?”
“음.”
“여기 종사하는 미녀들이 열 명도 넘는데 다 쭉쭉 미인들이다.”
1970년대 초에는 많은 아가씨들이 가출을 하여 직장을 구하지 못하여 공장이나 술집으로 빠졌다. 얼굴이 예쁘면 다방에서 먼저 데려가고 다음에는 술집 그리고 다음은 다른 곳.
샌님이 한 마디.
“저 애들 가운데 하나 잡아라.”
“싫다. 저 애들이 하나도 여자로 보이지 않는다. 저 애들도 나를 남자로 보지 않으니까.”
“그게 중성이냐? 저렇게 예쁜 여자들이 여자로 안 보인다고?”
놈과 나 15 / 그런 황홀한 장면도?
놈이 맥주 컵을 기울이며 물었다.
“네 놈들이 보기에 저 애들이 예쁜 여자로 보이냐?”
“암.”
“네 놈들은 저 애들 틈에 끼어 보면 하루도 못 살고 달아날 거다.”
샌님이 호기심이 발동한 듯
“미인들 틈에 끼어 살면 좋지. 그보다 더 해피한 일이 어디 있냐?”
“놈들은 내가 어떻게 사는지 몰라서 하는 소리다. 저 애들이 내 방에서 홀딱 벗고 옷을 갈아입는가 하면 나체로 앉아서 화장도 하고 깔깔거린다. 내가 보든 말든 상관하지 않고.”
“와! 그런 황홀한 장면이?”
“말도 말아. 저것들이 손님하고 술이 떡이 되도록 취하면 내가 책임을 져야 한다.”
“책임??!”
샌님도 나도 엉뚱한 생각을 하며 놈한테 눈길을 모았다. 놈은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통행금지 시간이 되면 손님들은 다 돌아가고 나만 떡이 된 애하고 남는다. 어떻게 하겠니?”
샌님과 나는 더 엉큼한 상상을 하면서 웃었다. 놈은 우리를 비웃듯 한 마디 욕을 뱉었다.
“속물들!”
“뭐? 속물이라고?”
놈과 나 16 / 밤에 업고 다니는 여자
“네놈들 겉으로는 점잖은 척하면서 생각하는 건 다…….”
“다 뭐냐?”
“그놈이 그 놈이다. 내가 술에 떡이 된 애를 들쳐 업고 여관까지 가서 어떻게 되었겠냐?”
글쎄? 차마 상상을 말하자니 속물소리를 더 들을 것 같고……. 주저하자 놈이 간단히 말해 주었다.
“술이 취해 몸을 가누지 못하는 것들을 여관까지 데려다 주고 나오면 거의가 똑같은 소리를 한다.”
“무슨 소리?”
“오빠, 나 안 취했어. 나하고 놀다 가면 안 될까? 그러면서 매달린다. 그럴 때 나는 칼같이 뿌리친다. 그 애들한테 잡히면 사람 꼴이 아니니까. 어떤 애들은 내 앞에서 홀딱 벗고 놀잔다. 그럴 때 나는 똑같은 대답을 했다.”
“무슨 대답?”
“난 그런 애들한테 솔직히 말했다. 나는 집도 없고 부모도 돌아갈 고향도 없는 신세다. 나한테 있는 것이라곤 자존심밖에 없다. 너희들이 하자는 대로 하면 내 자존심마저 무너지는 거다. 그러면 취한 애들은 똑같이 ‘나도 돌아갈 집도 고향도 없어요. 하지만 나도 자존심은 있다고. 자존심 다 버리고 말하는데 나하고 놀면 안 될까, 오빠?’ 한다. 그런 애들을 나는 수시로 업고 다녀야 한다. 너라면 어떡하겠니?”
놈과 나 17 / 변강쇠라도 되는 줄 알고
샌님이 웃기는 소릴 했다.
“그걸 질문이라고 하냐? 못된 놈.”
놈이 진지하게 말했다.
“날마다는 아니지만 일주일에 한두 번은 애들을 업고 여관으로 가야 한다. 그러면 여관 주인은 내가 변강쇠라도 되는 줄 알고 능글맞게 웃으면서 조용한 방을 내준다. 속물들만 상대한 사람들이라 제 멋대로 생각하는 거지.”
내가 엉뚱한 말을 했다.
“네놈의 성미는 내가 잘 알지만 아무리 그래도 여관까지 업고 가서 아무 일도 없었다면 누가 믿냐?”
“이놈아, 그래서 내가 중성이라고 하지 않았냐?”
“중성? 아무리 중성이라도…….”
“네 놈은 몰라. 그런 애들 잘못 건드렸다가는 신세 조진다.”
‘신세 조저 봐야 혼자 몸뚱인데 뭘’ 하고 생각하면서도 놈이 참 멋지다고 생각했다. 여자의 유혹은 꿀 같아서 그 달콤한 공격을 뿌리치기 어려운 것인데 놈이 그렇게 살아 왔다는 말은 믿을 수가 있었다. 그래도 나는 무슨 재미있는 이야기가 더 없을까 하고 물었다.
“여자 애들 업고 다니다 오해 받은 일은 없었냐?”
“오해하는 사람이 한둘인 줄 아냐? 그 이야기를 하자면 소설책이 나올 거다.”
“넌 방이 따로 있다면서 왜 홀에서 의자를 깔고 자는 거냐?”
놈과 나 18 / 왕언니는 이상해
“그 얘기해 줄까?”
“말 못할 비밀이라도 있냐?”
“있다. 언젠가 내가 혼자 자는데 누가 내 물건을 만지는 거다. 깜짝 놀라 눈을 떠 보니 왕언니가 잠옷 바람으로 나를 보면서 ‘혼자 자지 말고 나하고 같이 자자. 어때?’ 하기에 이러시면 안 됩니다 하니까 ‘내가 오늘 즐겁게 해줄게’하는 거다. 기가 차서.”
“그래서?”
“나는 일어나 옷을 입었다. 그런데 왕언니가 매달리는 거야. ‘나는 네가 좋아’ 하기에 ‘누나, 동생 같은 사람한테 말이 돼요?’ 하니 ‘누나가 동생하고 자자는데 왜 이래?’ 하고 나를 안 놓아주는데 어떻게 하겠냐?”
“왕언니가 뭐냐?”
“나보다 세 살 위로 이 집에 여자들 가운데 가장 고참이고 여자 애들을 관리하는 언니다.”
샌님도 나도 어이가 없어서 다음 놈의 말을 기다렸다.
“그 날 밤에 내가 정중히 말했다. ‘누나, 오늘은 여기서 자. 난 나가서 잘게.’ 하니까 ‘너 정말 이러기야?’ 하기에 ‘난 다른 애들하고 달라.’ 했지. 왕언니가 ‘뭐라고?’ 하면서 나를 노려보는 거라. 그래서 ‘난 다 알고 있어!’ 했더니 ‘뭘 안다는 거야?’하고 대들었다. 그렇게 하여 왕언니와 나는 사이가 뜸해졌고 나는 그 날부터 홀에서 의자 모아놓고 여기서 잔다.”
놈과 나 19 / 어우동을 아냐?
내가 물었다.
“네가 뭘 다 안다는 거냐?”
“그런 게 있어.”
샌님도 궁금한 듯 한마디.
“그런 게 뭔데? 궁금하게 해 놓고.”
“놈들아 그런 것까지 알려고 하지 마.”
내가 짚었다.
“그 왕언니 어우동이지?”
“어우동? 너 같은 놈도 어우동을 아냐? 그 왕언니는 스물아홉 살 인데 시집을 한 번 갔다 온 여자였다. 서방을 그렇게 바꾸고도 모자라 손님 중에 맘에 드는 사람 만나면 가만두지 않는 색마였다. 그 비밀을 여기서 일하는 사람들은 다 알고 있지만 아무도 그것을 모르는 줄 알고 겉으로는 얌전한 체하고 생글거리지만 밤에는 딴 여자가 되는 거다. 그런 여자 만나면 멍든다. 그런 걸 알면서 누나누나 하고 따르다가는 신세 조지는 거다. 놈들아 시원하냐?”
나는 놀랐다.
“세상에 그런 여자도 있구나!”
“그러니까 이런데서 뒹구는 거다. 그런데 신기한 일이 발생했다. 나한테 그렇게 당하고 태연하게 주인아줌마한테 뭐라고  했는지 아냐?”
“너를 당장 내보내라고 했겠지?”
놈과 나 20 / 전화위복
놈이 설명했다.
“난 이해가 안 갔다. 주인아줌마한테 나를 성실하고 믿음직스런 사람이라고 추켜세워 준 거다.”
“왜 그랬을까?”
놈은 고개를 저었다.
“나도 모른다. 내 상상을 뛰어 넘는 말을 했다는 것이.”
“너를 유혹하려는 고단수 수작이 아니었을까?”
“주인아줌마도 그 어우동이 어떤 여자라는 걸 알고 있었고 한편으로는 나를 의심의 눈으로 보고 있었던 거다. 밤중에 만취한 애들을 업고 여관으로 들락거린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 무슨 일이 있을 만하다고 오해하고 있었던 거다. 그런 터에 어우동이 엉뚱한 칭찬을 하는 소리에 아줌마가 다른 아이들한테 내 행동을 알아본 거다. 그런데 아이들마다 다 내 칭찬을 하였던 거다.”
나도 동감이 가는 소리였기에 한 마디.
“그래, 바로 네 놈은 그 점이 좋아. 그래서 내가 좋아하고 있다.”
놈이 다음 이야기를 했다.
“어우동이 그렇게 내 칭찬을 했고 다른 애들도 좋게 말해 주자 주인아줌마는 나를 완전히 신임하게 되었다. 그래서 지배인 겸 경리까지 맡겼다.”
“전화위복이로구나.”
“전화위복? 그 후부터 주인아줌마와 나 사이엔 갈등이 생겼다.”
놈과 나 21 / 월급보다 좋은 거
“무슨?”
“우리 맥주홀을 상대로 납품을 해서 먹고사는 사람이 많았는데 할결같이 가난했다. 그래서 내가 납품업자들이 물품을 들여오는 대로 현금을 지불한 거다. 주인 입장에서는 한 달이라도 외상을 해야 수익이 생기는데 꼬박꼬박 현금을 내주자 그래서는 안 된다고 주인아줌마가 주의를 주었다. 그렇지만 나는 주인 말을 안 듣고 현금 직불을 하면서 대답했다. 우리는 이 정도로 수입도 있고 여유가 있지만 저 사람들은 하루살이 인생입니다. 어차피 줄 돈 먼저 주면 그 사람들을 돕는 거 아닙니까? 하고 말하자 주인아줌마는 내가 돈을 주면서 삥땅이라도 치는 게 아닌가 하여 두고 보자 하고 나를 경계의 눈으로 지켜보았던 것이다.”
나는 또 고개를 끄덕이며 한 마디 했다.
“네 놈이라면 충분히 그랬을 거다. 너는 약자들을 그렇게 도울 수 있지. 다른 사람은 그렇게 못한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냐?”
“그렇게 몇 달을 보내자 납품업자들이 내 마음을 알아준 것인지  납품 단가를 전보다 싸게 청구한 거다. 그렇게 하다 보니 외상으로 납품받을 때보다 수익이 올랐지. 결국 주인아줌마가 내 진심을 이해하고 하루는 나를 조용히 불렀다. 뭐라고 했는지 아냐?”
나는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아서 멍하니 바라보다가 대답했다.
“잘했다고 월급을 올려주지 않았을까?”
“월급보다 더 좋은 걸 받았다.”
놈과 나 22 / 누나
“황금덩어리라도 받았냐?”
“돈이 아니라 언약이었다. 나를 동생으로 삼고 싶으니 우리 의남매가 되자는 것이었다. 나 보고 당장 누나라고 부르라는데 내가 평생 외롭게 자란 놈이 누나 소리가 쉽게 나오냐. 그 날은 누나 소리를 못하고 홀로 나가서 경리장부를 정리했다.”
“허긴 네 놈이 그렇게 누나 소리를 쉽게 할 인물이 아니지. 나도 아무한테나 누나라고 못한다. 그래서?”
“마음은 안 그런데 차마 누나 소리가 나오지 않아 한 달을 보내다가 용기를 내어 ‘누나’ 하고 불러 보았다. 그리고 내 의지를 밝혔다.”
“무슨?”
“누나, 나 독립하고 싶어요, 했지. 그랬더니 무슨 돈으로 독립을 한다는 거냐고 물으며 정말 누나의 마음으로 나를 받아들였다. 그래서 나는 그 동안 모아놓은 돈이 조금 있으니 그것으로 장사를 해 보겠다고 했다.”
“음.”
“누나가 무슨 장사를 하겠느냐고 묻기에 ‘가게 앞에 화단을 빌려주시면 거기서 리어카로 간이 필수품 장사를 해 보고 싶다’고 했다. 그랬더니 그렇게 하라고 하여 아는 사람한테 바퀴 둘이 달린 리어카를 샀다. 나는 리어카를 2층으로 꾸몄다. 아래는 통처럼 생긴 잠자리를 만들고 위에는 뚜껑을 열었다 접었다 하는 판매대를 만들어 비누 칫솔 휴지 손수건 등등 각종 소모품들을 사다 채웠다.’
놈과 나 23 / 별난 도둑놈
그렇게 하여 놈이 독립하여 노점 장사를 시작했고 나는 놈이 만들어 놓은 리어카 백화점이랄까 요새 유행하는 다이소라 할까 아무튼  놈의 고객이 되었었다. 우리 사무실에서 필요한 물건과 집에서 사용하는 자질구레한 것들을 놈의 백화점에서 사다가 썼다.
비록 노점이지만 없는 건 빼놓고 있을 건 다 있었다. 나는 놈이 독립한 것이 고맙고 대견하여 퇴근할 때마다 놈한테 가서 시시덕거리며 별별 소리를 지껄이다 돌아가곤 했다.
놈이 하는 소리가 그랬다. “여자 애들 틈에서 시달리는 것보다 좋다.” “남이야 뭐라든 나는 하루 종일 장사를 하다가 밤이 늦으면 이 리어카 속 호텔에서 잔다. 누나는 내 걱정을 하면서 가게에서 필요한 물건을 사주었고 잠은 방을 내줄 테니 거기서 자라고 했다. 참 고마운 말씀이었지만 거기서 자면 여자들이 괴롭혀서 가기 싫었다. 좁아도 리어카 호텔에서 자는 것이 천만번 편하다.”
어느 늦가을이었다. 놈이 하는 노상 백화점을 가보니 전에 안 보이던 쇠사슬로 리어카와 전봇대를 묶어 놓았다.
“이게 뭐냐? 왜 죄 없는 백화점을 전봇대에다 묶어 놓았냐?”
놈이 웃으며 대답했다.
“참 재미있는 일도 다 있다. 밤늦게 장사를 끝내고 판매 전시대 뚜껑까지 덮고 이 밑 호텔에 들어가 잠을 자는데 어떤 도둑놈이 나와 리어카를 통째 끌고 어디론가 가는 거였다.”
“그래서?”
놈과 나 24 / 주인까지 훔쳐가는 도둑
“나는 깜짝 놀라 내다보았다. 누군지 시커먼 놈이 털털거리는 리어카를 끌고 골목길을 돌아가는 거였다. 나는 단단히 차리고 덜덜거리는 리어카 문짝을 활짝 열어 제치며 ‘어떤 놈이냐?’ 하고 소리를 쳤다. 그러자 도둑놈은 놀라 이어카를 팽개치고 달아났다.”
“와! 그럴 수가.”
“다행히 도둑이 달아났으니 망정이지 싸우려고 덤빌까봐 바싹 긴장했었다. 그날 밤은 한잠도 못자고 뒹굴다가 다음날 리어카를 쇠사슬로 전봇대에다 저렇게 묶어 놓았다.”
“너도 놀랐지만 그 도둑놈은 얼마나 놀랐을까 주인까지 훔쳐가던 도둑놈이 하하하. 그 안에 주인님이 주무시는 줄도 모르고.”
나는 그 후부터 출근길에 놈의 리어카 백화점을 확인하였다. 또 어떤 도둑놈이 끌어가지는 않았는지, 놈이 편히 잤는지 궁금해서였다. 그런데 놈은 얼마나 부지런한지 누구보다 먼저 백화점을 열어놓고 골목길 청소를 말끔히 해놓았다.
전에는 화단 골목길이 매우 지저분했었다. 구석구석 술꾼이 토해놓은 것, 크고 작은 용변을 봐 놓은 것, 여기저기 널린 깨진 병과 쓰레기, 정말 어지러웠었다. 당시에는 도로 청소부가 없어서 뒷골목은 어디나 쓰레기장 같았다.
그런데 놈이 노점상을 차린 뒤에는 골목길이 꽃길이 되었다. 나는 칭찬을 하면서 물었다.
“골목길이 네 덕에 환하다. 뭐 재미있는 일은 또 없었니?”
놈과 나 25 / 어린 손님
“있었다. 들어 볼래?”
“들어보자.”
“하루는 장사를 마치고 이 리어카호텔로 들어가 자려고 기어들다가 깜짝 놀랐다.”
“뱀이라도 있었냐?”
“뱀은 아니었고 무엇인가 뭉클하여 잡고 보니 사람이었다. 어느 틈에 그 속에 들어갔는지 놀랍기도 했다. 안에서 어린 소년이 기어 나왔다. 나오자마다 달아나는 거였지  날씨도 추운데 통행금지 시간이 지난 뒤라 그냥 두면 안 되겠다 싶어 달려가서 붙들었다. 아이는 내가 잡자 놀라서 벌벌 떨었다. 나는 겁먹지 말라고 달래며 데리고 와서 리어카 속에서 안고 잤다. 너도 알다시피 나는 어렸을 때 그 아이처럼 갈 길을 모르고 살았잖니?”
“참 착한 일을 했구나.”
“그 아이는 어디서 왔는지 부모가 있는지 물어도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더 보호해 주고 싶었는데 그 날 어디론지 인사도 없이 달아났다. 못 먹어서 삐쩍 녀석이 어디로 가서 어떻게 되었을까 지금도 생각하면 딱하고 불쌍한 생각이 든다.”
나는 좀 잔인한 말을 했다.
“잘 갔지. 네 처지에 그런 애가 떠나지 않고 너한테 붙어 있었다면 어떡할 뻔했냐.”
“네놈은 모른다. 그 아이가 오죽했으면 길바닥으로 나왔겠니.” 
놈과 나 26 / 여자 손님
놈은 자기가 살아온 과거를 생각하며 그 아이를 염려하고 있었다. 그 마음을 읽으면서 나는 엉뚱한 말을 했다.
“뭐 또 재미있는 일은 없냐?”
“넌 내가 겪는 일들이 재미있는지 모르지만 나는 이 리어카 장사를 하면서 마음 아픈 일들을 밤낮으로 보고 산다. 내가 겪은 이야기를 다하자면 끝이 없지만 딱 하나만 더 해 주마.”
“좋아, 들어보자.”
“넌 내가 하는 말을 믿어줄지 모르지만……. 통행금지 시간이 다 되어 가는데 바로 앞에 아가씨가 털썩 주저앉아 일어나지를 않았다. 늦가을이라 날씨도 추운데 그 모습이 너무 안돼 보이기에 다가가 아가씨를 일으켜 세웠다. 술 냄새가 났다. 열아홉쯤 보였다. ‘아가씨 집이 어디요?’ 했더니 없어요, 하는 거다. 길바닥에 그대로 버려둘 수도 없고 모르는 애를 여관으로 데리고 갈 수도 없어서 내 침실 리어카 호텔로 들여보냈다.”
“그래서?”
“그 애는 내가 하라는 대로 순순히 그 속으로 들어가서 말했다. 아저씨도 들어오라고…….”
나는 흥미 있는 눈으로 놈을 보았다. 놈은 내가 무슨 엉큼한 생각을 하고 있으리라 짐작이 된다는 듯 말했다.
“엉큼한 놈 무슨 생각을 하는 거냐?”
“아아, 아무것도.”
놈과 나 27 / 아저씨 들어와
사실 나는 궁금하기는 했지만 놈이 짐작하는 것과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놈은 정직하고 꼬장꼬장하고 불의와 타협할 줄 모르는 성깔머리라 어떤 일이 있어도 아무 일이 없으리라는 걸 믿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 놈이기 때문에 왕언니의 유혹도 물리치고 다른 여자 애들을 업고 다니면서도 무사하지 않았던가. 그래도 나는 짓궂게 물었다.
“놈아, 아가씨가 예쁘던?”
“호리호리한 것이 미운상은 아니었다. 희미한 가로등빛에 비친 얼굴이 좀 창백하고 측은한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여자애가 아저씨 들어와 하고 반말을 하는 거라. 나는 못 들은 척하고 밖에 서서 골목길을 바라보았다. 골목길에 한 사람이 비틀비틀 그림자를 가로등 아래 끌고 가다가 남의 집 담에다 오줌을 싸고 돌아서서 내 쪽으로 오고 있었다. 나는 리어카 뒤로 숨었다.”
“겁났겠다.”
“그런 사람 잘못 건드리면 위험하지. 술꾼은 누군가를 찾는 듯 중얼중얼 왔던 골목길을 되돌아갔다. 바람이 제법 차가웠다. 그 술꾼이 사라지고 나자 안에서 또 불렀다. ‘아저씨 들어와’ 하는 거다. 나는 추워도 참고 괜찮다고 했다. 밤은 추위를 몰고 깊어 가는데 추위를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하는 수없이 그 애가 있는 속으로 들어가야 했다.”     
놈과 나 28 / 아저씨 총각이야?
“밤마다 그런 사람이 온 건 아니냐?”
“그런 건 아니지만 밤중에 통행금지 시간에 쫓기던 사람을 많이 보았지만 다 도와줄 수는 없었다. 이게 여관이라도 되냐?”
“여관보다 더 좋은 피난처지. 그 속으로 들어가서 어떻게 된 거냐?”
“그거 참, 계집애가 버르장머리 없이 반말로 또 하는 소리가 ‘아저씨 여기가 좁기는 하지만 둘이 자기에 딱 좋아.’ 하더니 기어들어간 내 품에 안기는 거다. 추운 겨울밤에 난로 없이 자던 나는 따듯하다고 느꼈다. 그렇지만 이런 리어카라도 있는 내가 고맙다고 생각하며 살아 왔는데 그 애를 안고 누우니 따듯해서 좋긴 하더라.”
“좋기만 했니?”
“놈아, 딴 생각은 하지 마. 여자 애는 여전히 반말로 ‘아저씨 몇 살이야?’ 했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애는 또 물었다. ‘아저씨는 집이 없어?’ 그래서 ‘여기가 내 집이다’ 했더니 ‘나도 여기서 같이 살면 안 돼?’ 그 다음부터는 묻는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무엇이 그리 궁금한지 별 걸 다 묻다가 ‘아저씨 총각이야?’ 하며 얼굴을 만졌다. 나는 생각에 잠겼다. 어디서 무엇을 하다가 굴러다니는 애인지 모르는 이런 애하고 말을 섞었다가는 재미없는 것이다. 통행금지 시간만 지나면 내쫓으리라.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버르장머리 없는 애가 나를 괴롭혔다. 나는 손도 까딱 않고 입도 봉했다. 그리고 날이 새기만 기다렸다.”
놈과 나 29 / 짐승만도 못한 사람
“그 애가 널 어떻게 괴롭혔냐?”
“내가 여자들 괴롭힘을 한두 번 당한 것도 아니고 이미 중성이 된 상태인데 제 까짓게 무슨 짓을 한다고 내가 꿈쩍이나 할 줄 아냐? 나같이 집도 없이 길바닥에서 사는 놈이 여자한테 홀려서 할 짓 못할짓 다하면 인생은 끝나는 거다.”
놈의 말에 나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자신이 없었다. 놈은 내가 믿어온 그런 놈이니까. 나는 마음 정리를 하고 말했다.
“너는 성인군자인지도 몰라. 너 같은 사람 이야기는 들어본 적도  만나본 적도 없으니까. 그래 통행금지가 해제되어 내쫓았냐?”
“실망하지 마라. 그 애는 잠이 들어 깨워도 안 일어났다. 죽은 건 아닌가 하고 흔들어도 꿈쩍 않는 거였다. 할 수 없이 나는 노점을 열고 장사를 시작했다. 점심때가 되어 옆집 호빵가게에서 빵을 사다가 주려고 들여다보니 애가 없어졌다. 어느 틈에 나갔는지 인사도 없이 사라진 거다. 기가 막혔다. 내가 사람하고 잔 건가 짐승하고 잔 건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
“그런 인간이었다면 조용히 사라진 편이 다행이다. 다시는 그런 인간한테 인정 베풀 것 없다.”
“네 말이 맞아. 나도 모질게 살아야 할까봐.”
나는 놈이 그렇게 사는 것이 마음 아팠다. 그런데 내가 지방 출장을 다녀와 놈을 찾아갔을 때 리어카 백화점이 없어지고 놈도 보이지 않았다. 
놈과 나 30 / 목소리
놈이 다른 데로 이사를 갔나?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닐까 하고 걱정스럽게 골목길을 바라보고 있을 때.
“놈아, 뭘 보냐?”
놈의 목소리였다. 소리 나는 쪽을 보니 맥주 홀 추녀 밑에 낯선 구멍가게가 보였다. 건물 추녀 밑 벽을 허물고 옆으로 2미터쯤 되고 너비가 1미터쯤 되는 추녀가게가 만들어져 있고 거기서 놈이 목을 내밀고 나를 불렀다.
“야, 이게 어떻게 된 거냐?”
놈이 빙긋이 웃으며 대답했다.
“맥주 홀 누님이 내 꼴이 불쌍하다면서 이 추녀를 허물고 이렇게 가게를 내주셨다.”
나는 그 말에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리어카에서 자고 있는 놈을 늘 걱정했는데 추녀 밑이라도 튼튼한 건물에 붙어살게 된 것이 얼마나 다행스럽고 고마운 일인가.
“참 고마운 누님이구나.”
“고맙지. 내가 리어카에서 장사하는 것을 늘 안쓰럽게 보시다가 이렇게 벽을 허물고 내 가게를 마련해 주셨다. 이 판매대 밑에는 널찍한 바닥도 있어서 편하고 좋다.”
“참 잘 되었다. 잘 되었어.”
놈 옆에는 백만 원이 넘는 백색 공중전화기까지 놓여 있었다. 
“이 공중전화기도 네 것이냐?”
놈과 나 31 / 추녀백화점
“그렇다 왜?”
“허, 전화 값이 금값인데 이걸 해 놓았어?”
“그 동안 모은 돈을 몽땅 주고 샀다. 전화 한 통에 10원씩이지만 하루에 천 원이 넘게 들어오기도 한다.”
“그렇게 많이?”
놈은 작은 추녀백화점에 더 많은 상품을 진열하고 신나게 장사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찾아갔더니 놈은 안 보이고 묘령의 아가씨가 점포 가운데서 목을 쏙 내밀고 내다보았다.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놈은 어디 가고 낯선 여자가?’
내가 물었다.
“여기 주인이 바뀌었나요?”
“아니요.”
“아가씨는 누구시지요?”
“주인아저씨가 일이 바빠서 제가 대신 보아주고 있어요.”
“주인아저씨는 무슨 일로 그렇게 바쁘신가요?”
“저도 몰라요.”
이때 놈이 자전거를 끌고 돌아왔고 놈이 나타나자 여자는 슬그머니 사라졌다. 궁금증이 나서 물었다.
“야, 저 아가씨는 누구냐?”
“왜, 궁금하냐?”
“암.”
놈과 나 32 / 네 짝 삼아라
놈이 설명했다.
“맥주홀 누님이 나를 도와줄 사람을 구해 주었다. 시골서 막 올라온 사람인데 얌전하고 참하여 누님이 잡아두고 집안일을 시키면서 내가 하는 일을 좀 도와주라고 하여 내가 자전거 배달을 할 때는 도와주기로 했다.”
“점원을 둔 거냐?”
“야, 내가 무슨 점원까지 두겠니. 누님이 나를 위해 맥주홀에 필요한 것들을 나한테 납품하라고 맡겨주시고 이웃 식당과 맥주홀에 필요한 물품도 납품해 보라고 길을 열어주어서 가게보다 납품배달이 더 많아지고 수입도 짭짤하다. 내가 자리를 비울 때는 그 아가씨가 여기를 보아 주어서 편하게 지낸다.”
“아가씨 인상도 좋고 얌전하게 생겼더라. 네 짝 삼아라.”
“그런 말 마. 저 아가씨는 환경이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살다가 온 사람이다. 나 같은 것하고는 안 맞아.”
“글쎄, 맞고 안 맞고는 운명이 결정해 주겠지.”
그렇게 몇 마디 나누고 여러 달이 지났다. 놈을 찾아갈 때마다 추녀백화점은 그녀가 지키고 있었고 놈은 납품하기 바빴다. 그리고 1년쯤 지났을까 어느 날 놈이 나를 불렀다.
“왜 불렀냐?”
“나 가게 하나 계약했다. 가 보자.”
“가게를?”
놈과 나 33 / 감동
가게가 어떻게 생겼든지 놈이 가게 계약을 했다는 말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리어카와 뒹굴다 추녀백화점에서 새로운 발전을 하게 되었다니 감동적인 소식 아닌가.
놈을 따라 국제극장 뒷골목으로 몇 발자국 안 가서 허술한 건물이 나란히 있는 가운데 비딱한 한 건물이었다. 베니다 천장에 벽도 베니다로 가린 바람막이 집이었다. 바닥은 우툴두툴한 시멘트 바닥. 들어가서 이리저리 둘러봐도 볼품이 없는 집. 놈이 물었다.
“어떠냐? 맘에 드냐?”
“네 맘에 들어야지 내 맘에 드는 게 무슨 의미가 있냐?”
“그래도 네가 좋다고 해야지.”
좋기로 말하면 진짜 좋았다. 놈이 이런 가게라도 얻고 새 사업을 하게 되었다는데 어찌 기뻐하지 않을까. 축하할 일이 아닌가.
“아주 좋다. 이제 여기서 부자되거라.”
“고맙다.”
“무슨 장사를 할 생각이냐?”
“며칠 있다가 와 봐.”
그 후 나도 바쁘게 살다 보니 한 일주일쯤 지나서 찾아가 보았다. 문 위에 커다란 글씨로 <부산회집>이라는 간판이 걸려 있었다.
나는 실망했다. 하필 내가 싫어하는 회집을 한다니! 놈이 물었다.
“너도 회 좋아하지? 먹으러 와.”
“회……?”
놈과 나 34 / 개벽
왜 하필이면 놈이 내가 못 먹는 횟집을 차렸는지! 놈의 장사를 위해서는 회를 먹어야 하는데 회를 먹어본 적도 없지만 냄새만 맡아도 달아나는 나다. 그런데 무슨 수로 놈을 돕는단 말인가.
그렇지만 놈이 궁금하여 횟집을 찾아갔다가 놀랐다. 그 허술한 집이 말끔하게 변하여 바닥도 매끈하고 천장도 벽도 고급 벽지로 도배를 하여 신방 같았다. 안쪽에는 주방이 정갈하게 차려져 있고 4인용식탁이 다섯 개나 놓였다. 눈이 휘둥그레진 나를 보고 놈이 물었다.
“어떠냐?”
“이거 네 가게가 맞냐?”
“웬 헛소리?”
“여자가 성형 수술하고 화장한 것 같다. 너 무슨 돈으로 이렇게 아담하게 차렸냐?”
“별 것 아니야. 이리 와 봐.”
놈이 나를 비릿한 냄새가 나는 주방으로 불렀다. 싫은 냄새를 참고 들어가 보니 60대쯤 영감(?)이 회를 뜨고 있었다. 영감이 보기도 이상한 기다란 장어를 껍데기를 쭉 벗기더니 하얀 살을 칼로 비스듬히 얇게 썰었다. 신기해서 회를 어떻게 만드나 지켜보았다.
장어 뼈를 바르고 하얀 살만 추려 미리 준비한 얼음 통에 넣고 젓가락으로 한참 동안 휘휘 저었다. 그리고 베 헝겊으로 꼭꼭 짜더니 물기를 쪽 빼고 정갈한 쟁반 한가운데다 그것을 풀어 놓았다.
 
놈과 나 35 / 아나고
조금 지나자 아나고는 마치 벚꽃 피듯 뽀얗고 동그랗게 피어올라 쟁반에 꽃송이처럼 볼록하게 퍼졌다. 신기한 구경거리였다.
“이게 뭡니까?”
요리사 영감이 대답했다.
“아나고회라는 것이오.”
“아나고요?”
“회를 못 먹는 사람도 이건 먹는다오. 한번 드셔 보겠소?”
“저는 그런 거 못 먹습니다.”
“그러니까 맛만 보라는 게요.”
놈도 나처럼 회를 모르는 육지 출신이라 호기심을 가지고 말했다.
“나도 처음 보는 건데 한번 먹어보자.”
장어로 뜬 이름도 이상한 회를 눈을 딱 감고 먹어 보았다. 처음 먹어보는 것이라 이상했지만 비린내가 나지 않아 좋았다. 놈의 장사를 해주자면 이 정도는 참고 먹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후 며칠을 들여다보아도 손님이 없었다. 손님이 없어서 걱정하던 터에 H신문사 문화부 김기자가 찾아왔다. 나는 그를 데리고 놈의 가게로 곧장 갔다. 그리고 놈한테 큰소리를 쳤다.
“나 오늘 손님으로 왔다. 잘 모셔라.”
“네네, 특별히 모시겠습니다. 무엇으로 드릴까요?”
나는 당당히 대답했다.
“아나고!”
놈과 나 36 / 하루 만에 또?
놈이 재미있게 웃으며 굽실거렸다.
“네네, 아나고로 모시겠습니다.”
김기자가 나한테 물었다.
“아나고를 좋아하십니까?”
나는 자신 있게 대답했다.
“좋아요, 아주 맛있어요.”
“나는 아나고는 별로인데…….”
“그럼?”
“병어나 방어회가 맛있지요.”
나는 그런 것들이 무엇인지도 몰랐다. 아는 것은 고작 아나고뿐.
“오늘은 아나고로 합시다. 아주 맛있어요.”
맛도 멋도 모르면서 아나고를 먹자고 했다. 다른 것은 비린내가 나서 코도 대지 못한다. 그 날 나는 술을 들면서 김기자한테 이 가게가 만들어지기까지 내 친구 놈의 고생담을 길게 늘어놓았다. 내 이야기를 다 들은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진지하게 말했다.
“그런 사람이라면 도와주어야지요. 난 아나고를 시시하게 생각해서 먹지 않았는데 오늘 먹어보니 그런대로 맛이 괜찮습니다.”
“그렇지요? 다음에 또 오시면 아나고로 얼마든지 대접하지요.”
그렇게 먹고 헤어진 다음 날 오후 김기자 전화가 왔다.
“오늘 저녁 아나고 먹으러 갑니다. 거기서 기다리세요.”
하루 만에 또? 이거 큰일 났네. 밤마다 사달라고 하면 어쩐담?
놈과 나 37 / 그 말씀이 좋아서
아나고는 한 접시에 6천원, 소주는 2병에 6백 원이다. 나는 돈을 준비해가지고 나갔다. 김기자가 함께 온 낯선 사람을 소개했다.
“K신문사 오기자, 인사하시오.”
“감사합니다. 나는 이 횟집 친구입니다.”
그 사람은 익숙하게 내 인사말을 받아들였다.
“잘 알고 있습니다. 김선생한테 선생님과 이 횟집 주인 이야기를 듣고 왔습니다. 두 분이 어떤 분들인가 알고 싶어서 왔습니다.”
“감사합니다. 저기 하얀 모자 쓰고 있는 사람이 제 친구입니다. 못생기고 깐깐하고 고집스럽게 생기지 않았습니까.”
“그렇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착하게 보입니다.”
“그렇게 보아주시니 감사합니다.”
오기자는 키가 크고 호리호리한 몸매였지만 인상이 좋았다. 그가 웃으며 말했다.
“이 횟집 아나고가 그렇게 맛있다고 하여 오늘은 두 친구분도 볼겸 제가 한턱내겠다고 저 김선생을 졸라서 왔습니다. 오늘은 제가 냅니다. 마음껏 드십시오.”
“아닙니다. 제 친구를 위해서 제가 내야지요.”
“바로 선생님 그 말씀이 좋아서 제가 오늘은 꼭 내겠습니다.”
그렇게 하여 셋이 아나고회 두 접시에 소주 4병을 치우는 동안 김선생한테 들은 말이 사실인지 확인이라도 하듯 이것저것 물었다. 그렇게 첫 인사를 하고 헤어진 다음날 오후 그 오선생의 전화가 왔다.
놈과 나 38 / 내 장사처럼 기뻤다
인사를 나누고 하루 만에 또 만나자고 하니 오늘은 내가 꼭 대접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나갔다. 그런데 이번에는 오선생 혼자가 아닌 다른 사람 둘을 데리고 왔다. 나는 속으로 이크 이거 큰바가지 쓰게 됐구나 하고 생각하면서도 낯선 두 사람과 인사를 나누었다.
두 사람 다 D일보 문화부 기자였다. 오선생이 나와 인사를 시킨 다음 주방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하얀 모자 쓴 사람이 그 사람이고 이분은 저분의 친구….”
신기자라는 사람이 말했다.
“두 분이 한 부대에서 근무하셨고요?”
나는 속으로 그걸 어떻게 알지? 하고 놀라면서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두 분이 정말 한판 뜨고 친해지셨다는데 정말입니까?”
“그렇습니다. 하하하.”
낯선 두 기자와 오기자 그리고 나는 아나고를 3접시에 소주 5병을 치웠다. 나는 속으로 이게 얼마치야? 아나고값 만 팔천 원에 소주를 합하면 2만원? 허허 준비한 돈이 모자라는데……. 에라 모자라는 건 외상으로 하자.
넷이 앉아서 나눈 이야기는 놈의 이야기뿐이었다. 지금까지 놈이 지내온 이야기를 확인이라도 하듯 그들은 묻고 나는 대답하고. 그 동안 여러 손님이 왔다가 갔다. 나는 손님들이 들어올 때마다 내 주머니에 돈이라도 들어오는 듯 반갑고 기뻤다. 우리가 일어섰을 때.
놈과 나 39 / 꼬리에 꼬리를 물고
어디서 술을 마셨는지 얼굴이 벌건 김기자가 낯선 사람을 데리고 들어왔다. 김 기자가 오 기자를 보자마자 한 마디 던졌다.
“배신자. 나 몰래 혼자 왔어?”
오 기자가 미안하다는 듯.
“아니야, 저 신 기자가 이 횟집 주인 이야기를 듣더니 당장 가보자고 졸라서 왔어.”
김 기자, 신 기자한테 손을 내밀었다.
“신선생 오랜만이오. 요새 재미가 어떻소?”
“아주 좋습니다. 하하하.”
이렇게 하여 몇이 둘러앉았지만 아나고는 두 접시밖에 먹지 못했다. 나는 아나고 값 다섯 접시만 계산하고 있었는데 오 기자가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며 말했다.
“여기까지 1차는 내가 내겠소. 2차는 누가 내실…….”
술들이 잔뜩 취한 채 비틀거리며 일어서면서 놈을 향해 인사했다.
“주인장, 잘 먹고 갑니다. 꼭 부자 되시오.”
다른 사람이 또 한 마디를 남겼다.
“주인장, 내일 친구 데리고 올 테니 기다리시오.”
모두가 놈의 이야기를 들은 터라 의미 있는 인사를 나누고 돌아갔다. 나는 아나고 값 생각을 하다가 돌연 해방! 그 기분 누가 알까. 그 뒤로 기자들이 그 놈 이야기를 하면서 횟집을 찾았고 문화부 교육계 사람들이 몰려 들어 가게는 날마다 손님들로 바글거렸다.
놈과 나 40 / 결혼을 한다고?
나는 놈의 횟집엘 가도 자리가 없어서 들어갈 수가 없었다. 놈은 혼자 서빙을 하다가 예쁜 여종업원도 두었고 탁자 다섯 개는 손님이 꽉꽉 차서 자리가 나기를 기다리는 손님들이 밖에 줄을 섰다.
이게 성업이라는 것이리라. 나는 밖에서 기웃거리다 흐뭇한 마음으로 돌아갔고 어떤 날은 나도 자리를 하나 차지하고 있다가도 손님이 밀려오면 양보하고 일어섰다. 손님이 날마다 미어터졌다. 그러던 어느 날 낮에 조용한 시간에 놈을 만나러 갔다.
놈은 좀체 웃지 않는데 그 날은 빙긋이 웃으며 수줍게 말했다.
“나……. 결혼하기로 했다.”
나는 깜짝 놀랐다.
“뭐라고? 결혼? 네가 결혼을 한다고?”
“그렇다 이놈아. 왜 그렇게 놀라냐? 나는 장가들지 말라는 법이라도 있냐?”
“네놈이 장가를 든다고? 중성이라면서 장가를 들어?”
“병신, 내가 중성이라니까 그것도 없는 줄 알았냐?”
“누구하고 결혼하냐?” 
“여자하고 한다.”
“어떤 여자냐고?”
“그건 네가 알아서 뭘 하게? 궁금하거든 결혼식에 와 봐.”
“결혼식? 날까지 잡았냐?”
“그렇다. 5월 5일 시민회관 별관에서 한다. 꼭 와.”
놈과 나 41 / 축하객
이건 쇼킹한 뉴스. 나는 당장에 샌님을 만나 놈의 소식을 전했다.
“야, 박가 놈이 결혼한단다.”
“걔가 결혼을 한다고?”
“그래. 좋은 소식 아니냐?”
“그렇지.”
“놈은 외로운 처지라 결혼식을 해도 축하객이 없을 것 같다.”
“그렇겠지.”
“놈 결혼식 날 우리라도 가서 축하해주고 박수를 크게 져주자.”
“그래야지. 일가친척도 없는 친구니까.”
드디어 결혼식 날이 다가왔다. 놈도 나도 딴에는 축의금을 준비해 가지고 시민회관 별관으로 갔다. 아직 12시가 되려면 먼데 별관입구에 도착해 보니 웬 사람들이 문 앞까지 꽉 차 있었다.
“웬 사람들이야? 앞 사람 결혼식이 아직 끝나지 않았나?”
내가 말하자 샌님도 두리번거리며 대답했다.
“이상하다. 놈이 여기서 한다고 했다면서 잘못 안 거 아니냐?”
“틀림없이 오늘 열두 시라고 했다. 그런데 무슨 일이지?”
걱정스러운 내가 사람들을 비집고 들어가 식장 안을 들여다보았다. 150석 식장 의자가 꽉 차고 사방에 서 있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식장 단상은 화려한데 너무 깊어서 신랑 신부 얼굴을 알아볼 수가 없었다. 내가 날짜를 잘못 안 것 같아 샌님한테 말했다.
놈과 나 42 / 도깨비에 홀렸나
“야, 오늘이 아닌가 보다.”
“바보같이 날짜도 제대로 모르고…….”
우리는 돌아서려다가 접수대로 가서 물었다.
“지금 결혼식 하는 신랑 이름이 뭡니까?”
그 사람이 탁자 밑을 가리키며 대답했다.
“신랑 이름이 여기 있지 않습니까?”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보니 신랑 박가 놈의 이름이 적혀 있지 않은가! 외로운 놈이 어떻게 된 건가? 도깨비를 앞세우고 손님을 몰아온 것일까? 이건 상상도 할 수 없는 대성황이다. 웬 축하객이 어디서 이렇게 많이 몰려왔단 말인가.
샌님과 나는 코가 쑥 빠졌다. 박수라도 크게 쳐 주자고 왔는데 축하객들 틈에서 존재마저 확인할 수 없으니 말이다. 내가 아무리 박수를 쳐도 놈은 들을 수가 없을 것이다.
주례사가 끝나고 축하연은 부속실인지 어딘지 모를 곳에서 대단하게 벌어졌다. 놈은 멋진 예복을 입고 축하객들한테 인사하기 바쁘고 샌님과 내가 있는 쪽으로는 오지도 않았다.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본다고 했던가. 놈과 나는 축하객 축에도 못 들고 어물거리다가 점심만 먹고 패잔병처럼 돌아서며 내가 물었다.
“웬 손님이 그렇게 많으냐?”
“글쎄 말이야. 그게 다 누구들일까?”
“마치 도깨비에 홀린 것 같다. 그렇지?”
놈과 나 43 / 누구하고 결혼했냐?
놈이 결혼식을 한 다음 며칠 간격을 두었다가 샌님과 나는 놈을 만났다. 샌님과 내가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축하한다.”
“고맙다. 그런데 니네는 못 왔냐?”
내가 넌지시 대답했다.
“안 갔다, 아니 못 갔어.”
놈은 섭섭한 얼굴로 받았다.
“다들 바빠서 못 왔구나.”
내가 엉뚱한 소리.
“바쁘기는 네가 더 바쁘더라.”
“나야 날마다 바쁘지만.”
“그렇게 바쁜 놈이 언제 결혼식까지 했냐?”
“그렇게 됐다.”
내가 물었다.
“누구하고 결혼했냐?”
“넌 왜 자꾸 그런 것만 묻냐? 여자하고 했다.”
난 놈이 그 가게를 보아주던 아가씨와 했다는 말이 듣고 싶었던 거다. 내가 또 지껄였다.
“너 도깨비하고 결혼한 건 아니냐?”
“뭐라고?”
“네 결혼식에 어디서 그렇게 많은 축하객을 모아들였느냐 말이다.”
놈과 나 44 / 음덕
놈이 눈치를 채고 말했다.
“니들 왔었구나?”
샌님이 받았다.
“누구 결혼식인데 안 가겠느냐?”
“고맙다. 난 너희가 보이지 않아서 못 온 줄 알았다.”
내가 물었다.
“웬 축하객이 그렇게 많으냐? 우리는 놀라서 도망쳤다.”
놈도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놀랐다. 너희들과 내 가까운 친구들만 알렸는데 웬 사람들이 와글와글 몰려들어 정신이 없었다.”
“그게 다 누구들이었냐? 도깨비가 떼로 몰려왔냐?”
“맥주홀 누님이 아는 사람들한테 연락을 했는데 내가 물건 대주는 가게 주인들이 서로 소문을 내고 몰려왔고 광화문 축구동호회 사람들까지 몰려와서 나도 내가 결혼식을 하고 있는 건지 뭔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내가 해설하듯 말했다.
“네 놈이 쌓은 음덕이 바로 그런 거다. 너의 그 성실성과 정직성을 인정하는 사람들이 축하해 준 거다. 우리도 갔다가 네가 정신이 없는 것 같아서 조용히 빠져나왔다. 잘 살아라.”
“고맙다.”
놈은 신방을 횟집 2층 다락방에 차렸다.
놈과 나 45 / 온통 횟집으로 개벽 
부산횟집은 날로 손님이 몰려들어 광화문 뒷골목 횟집 앞에는 사람들이 긴 줄을 잇고 섰다. 낮이고 밤이고 손님이 몰려들자 그것을 본 옆집 구멍가게가 가게를 횟집으로 꾸몄다.
그런데 그 가게에는 한 달이 지나도 아무도 들어가지 않아 텅텅 비고 놈의 횟집 문 앞에만 줄을 서서 자리 나기를 기다렸다. 나도 놈의 가게를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렇게 두어 달 지나자 기다리다 지친 손님들이 옆집으로 들어가고 두 집에 손이 북적거리자 또 옆 다른 가게가 문을 닫고 횟집을 차렸다. 그리고 또 얼마 안 가서 그 옆집, 또 그 옆집이 횟집으로 바뀌어 골목길이 횟집골목이 되었다. 이 사실은 광화문 횟집 뒷골목을 아는 사람한테는 재미있는 뒷골목 추억담이 될 것이다.
그 많은 횟집 가운데 지식인층 손님이 가장 많은 곳은 놈의 횟집이고 거기는 고정손님으로 밤낮없이 바글거렸다.
가게는 놈의 신부와 점원 아가씨가 서빙을 하고 놈과 주방장 영감은 음식 만들기에 정신이 없었다. 1년쯤 지난 어느 날 점심시간에 가 보니 손님이 몇 있다가 가고 조용했다. 내가 물었다.
“너 장사 잘 된다. 보기 좋아. 지금도 다락방 신혼이냐?”
“아니야. 다락방은 심부름하는 애들 주고 우리는 저쪽 경기여고 옆에 무슨 장관이 살던 집이 전세로 나와서 거기서 산다.”
“장관이 살던 집에? 허허, 네가 장관이 된 거 아니냐? 그럼 부자 된 건데 또 무슨 좋은 일이 더 있냐?”
놈과 나 46 / 놈이 잡혀가다니!
놈의 말 / “용인에 밭과 논이 붙은 산 12,000평을 샀다.”
“그리고 또?”
“서소문에 작은 아파트도 하나 샀지.”
“자랑 그만해라. 나 배 아프다 이놈아.”
“넌 벌어놓은 것 없냐?”
“만들어 놓은 건 책뿐이고 벌어놓은 것은…….”
놈은 어느새 부자가 되어 있었다. 적금도 100만 원짜리를 붓고 예쁜 아내한테 아들까지 얻었다. 손님은 온 종일 바글바글. 놈은 광화문 뒷골목의 유지가 되어 활동했다.
나와 친한 기자들은 놈의 집에 오면 나한테 연락을 했다. 자기가 와서 내 친구 장사시켜주고 있다고 알리는 거다. 그럴 때마다 나는 고맙다고 인사도 하고 때로는 내가 나가서 술을 사기도 했다. 문화부 기자들한테는 교수 작가 등 문화계 인사가 많이 따르고 술을 모두 좋아한다.
그 덕에 광화문 일대의 신문사 기자들을 많이 알게 되었고 신간이 나올 때마다 신문에 신간안내 기사를 쓰게 하여 우리 책이 종로 서적이나 출판회관에 나가면 맨 앞 진열장에 전시되어 책장사도 그런대로 되었다.
그런데 어느 날 놈이 경찰서인지 어딘지 잡혀갔다는 거다. 나는 샌님한테 연락했다. 
“야, 박가 놈이 무슨 사고를 당한 것 같다. 가 보자.”
놈과 나 47 / 나는 서빙!
우리가 놈을 찾아간 곳은 법원이었다. 법정을 찾는데 한참 걸렸다. 우리가 들어서자 놈의 아내가 걱정스럽게 우리를 맞았다.
놈이 판사 앞에서 무슨 소린지 모를 소리를 주고받았다.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 놈은 닭장 같은 경찰차에 실려 어디론가 가 버렸다. 놈의 아내는 가게 일이 바쁘다고 급히 돌아가고 샌님과 나는 허망하여 한쪽 돌계단에 앉아 한동안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내가 물었다.
“무슨 잘못을 해서 놈이 재판을 받을까?”
“잘못할 놈이 아닌데…….”
“그렇지? 세상에서 가장 정직하고 꼬장꼬장하고 원칙대로 살아온 놈인데 재판받을 만큼 죄를 짓다니 이해가 안 된다.”
“어디로 갔는지 알 수도 없고 무슨 죄를 지은 것인지도 알 수 없으니……. 그렇다고 너나 내가 도와줄 힘도 없고 걱정이다.”
우리는 서로 무능하고 별 볼일 없는 인간이라는 것만 확인하고 법원 문을 나섰다. 다음 날 나는 궁금하여 놈의 가게로 가 보았다. 놈은 없지만 손님은 평소처럼 바글거렸다.
손님들을 비집고 들어가 놈의 아내한테 무슨 소식이라도 들을까 하여 다가가는데 한 테이블 손님이 컵을 달라기에 내가 얼른 가져다주었다. 그랬더니 다른 손님이 나를 향해 ‘소주 한 병 추가’ 했다.
나는 얼른 소주를 가져다주었다. 또 다른 손님이 무엇인가 가져다 달라고 하여 그것도 가져다주었다. 또 한 손님이 여기 회 한 접시 했다. 나는 그만 서빙이 되고 말았다.
놈과 나 48 / 미녀한테 홀려서
내가 왔다 갔다 하면서 손님 심부름을 하자 놈의 부인이 말했다.
“이 분도 손님이세요. 이제 그만 시키세요.”
이 말에 손님 가운데 내 서비스를 받은 분이 일어서서 큰소리로 “손님이신 줄 모르고 실례했습니다. 용서를!” 하자 다른 사람들이 나를 주목했다. 그런데! 한쪽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어어! 심선생, 나 여기 있어요.”
돌아보니 김 기자였다.
“선생님이 와 계셨군요.”
“우리 동석합시다.”
나는 얼결에 그 옆에 앉았다. 앉자마자 소주잔이 왔다. 나는 잔을 받아들고 맞은편 구석자리에 앉은 미녀와 눈길이 마주쳤다. 그녀가 술잔을 들고 나한테 건배하자는 손짓과 눈빛을 보냈다. 내가 웃으며 잔을 들어 보이자 그녀도 잔을 높이 들었다가 입술로 가져갔다. 
술잔이 몇 번 오가는 사이 그녀가 잔을 들고 나한테 건배 사인을 날렸다. 나도 잔을 들고 눈으로 건배! 했고, 그러는 사이에 우리는 술잔에 눈을 담고 야릇한 감정에 빠졌다. 그쪽 젊은이들이(나도 젊었지만) 그녀가 잔을 들고 건배하는 눈길을 잡다가 내가 잔 받이를 한다는 걸 알아채고 한 녀석이 일어섰다. 이어 다들 자리를 떴다. 그녀도 녀석들 뒤를 따라 나가다가 내 등을 쿡 찌르며 내 마음을 데리고 나갔다. 그 순간 무언가 놓친 감정에 마음이 산란했다. 김 기자가 이상하다는 듯 갸웃거리며 물었다.
놈과 나 49 / 잃어버린 사랑은 시가 된다
“심선생, 오늘은 웬일로 술을 넙죽넙죽 잘 받으시지요?”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술잔에 사랑이 떠돌 때 맛이 나는 겁니다.”
동석한 김 기자의 친구가 받았다.
“그 말씀은 어느 시집에서 읽은 것도 같은데 맞습니까?”
“시보다 더 진한 잃어버린 애틋한 감정에서 나오는 소리지요.”
김 기자가 물었다.
“실연한 적이 있으십니까? 마치 실연한 시인 같습니다.”
“시인이 따로 있나요? 잃어버린 사랑의 아픔을 표현하면 시가 아닙니까?”
나는 그녀를 따라 나간 마음이 방황하는 가운데 시인의 감정이 되었을 뿐 시인은 아니었고 지금도 아니다. 참 묘한 경험을 했다. 이름도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과 건배, 건배 하다가 술에 취해 시인 같은 소리를 지껄이고 있었던 거다.
김 기자가 물었다.
“그런데 이 집 주인은 어디 가고 심선생이 서빙을 했지요?”
“나도 잘 모릅니다. 어디 출장을 갔나 봅니다.”
김 기자가 웃으며 말했다.
“난 올 때마다 주인한테 눈도장을 찍었는데 며칠 동안 안 보여서 어디 병이라도 나셨나 걱정이 돼서…….”
“감사합니다. 주인이 어디 가겠습니까. 곧 오겠지요.”
놈과 나 50 / 빙초산
놈이 어디론가 잡혀갔고 부인은 물어도 제대로 대답을 못했다. 그러기를 어느덧 6개월.
나는 날마다 한 번씩 들러보고 놈이 보이기를 기다렸다. 놈은 오지 않고 부인은 종업원과 바쁘게 영업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놈이 가게에 나타났다. 얼굴이 수척해 있었다.
“야, 어떻게 된 거냐?”
놈이 빙긋이 웃으며 대답했다.
“휴가 좀 갔다 왔다. 왜?”
“휴가? 그래 얼마나 즐거웠는지 들어보자.”
“살다 보니 참 이상한 경험도 다 했다.”
“무슨 죄로 휴가를 갔느냐고?”
“그 이유를 듣고 싶으냐?”
“물론, 들어보자.”
“어느 날 한 사람이 나한테 빙초산을 한 병 가져다주면서 말했다. ‘회에는 이것을 써야 제 맛이 나는 거라고.’ 그래서 그것을 받아 들고 주방장님한테 말했더니 그런 거 절대 쓰면 안 된다고 갖다 버리라는 거였다.”
“그래서.”
“그 아까운 걸 왜 버리냐. 그래서 한쪽 귀퉁이에 처박아 두었지. 그런데 어느 날 식품위생검사를 한다면서 한 사람이 나타나 구석에 처박힌 빙초산을 발견하고 나를 입건한 거다.”
놈과 나 51 / 함정
“네가 입건을?”
“그래, 그 조사관이 가고 다음 날 경찰서로 오라는 통지를 받고 아무 생각 없이 갔지.”
“그래서?”
“그 빙초산이 그렇게 큰 문제를 일으키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나는 그 날 유치장에 갇히고 이어서 어딘지 모르는 곳으로 넘겨졌다.”
“…….”
나는 무슨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누가 왜 빙초산을 갖다 주었을까? 그리고 뒤이어 식품위생검사관이 나타났다는 건 우연이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 판단으로는 광화문 뒷골목이 횟집 골목이 된 것은 놈 때문이고 놈은 다른 가게들과 달리 떠돌이 젊은 것이 장사를 잘 하자 시기심에서 누군가가 놈을 잡으려고 함정을 판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한 마디.
“너를 골탕 먹이려고 누군가가 한 짓 같다. 그렇지 않고는…….”
놈이 내 말을 막았다.
“그런 생각은 하지 마. 아무리 세상이 험하다고 해도 그렇게까지 할 사람이 어디 있냐?”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건 누군가가 함정을 만들어 놓고 너를 빠뜨린 거다.”
놈은 자기 맘만 믿고 성인군자 같은 소리를 했다.
놈과 나 52 / 범죄 학교
“아니야, 남을 그렇게 오해하는 것은 죄야. 내가 아무한테도 피해를 주지 않았는데 누가 나를 함정에 빠뜨리겠나.”
“너보다 내가 나쁜 놈이라는 생각이 든다. 넌 성인군자 같은 말을 하고 난 그 반대로 생각을 하고 있으니 내가 못된 인간 아니냐?”
“나도 성인군자는 아니다. 하지만 남을 의심을 하는 건 도둑질을 하는 것보다 나쁜 것이라고 생각한다.”
“알았다. 그럼 네가 잡혀가서 반년 동안 겪은 이야기나 들어보자.”
“자랑할 것도 아니지만 한번쯤은 인생이 무엇인가 알고 싶으면 거기도 한 번 가 볼만한 곳이었다.”
“그래?”
“인간 말종이 모여 있는 세상을 넌 모를 거다. 나도 모르고 살았으니까. 그런데 내가 거기서 배울 것도 있었지만 절대 배워서는 안 되는 것도 배웠다.”
“그게 무슨 소리냐?”
“한 하늘 아래서 같이 사는 사람 가운데는 악행만 연구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다는 걸 보았다. 감방은 악을 배우는 학교다. 아무것도 아닌 경범죄인도 감방에 들어가면 중범 죄인이 되는 법을 배우고 나가는 것도 보았으니까.”
“경범자가 중범자가 되는 법을 배워가지고 나가는 사람이 있다는 말이냐?”
“그래, 먹물 옆에 있으면 검어진다는 말이 바로 그 말이더라.”
놈과 나 53 / 억지 자백
“빙초산 한 병을 가지고 있다고 범인이 될 수 있나?”
“물론 한 병으로는 범인이 될 수 없는 거다. 그런데 나는 잡혀 들어가 취조관한테 똥을 쌀 만큼 심한 고문을 당하다가 항복했다. 처음에는 한 병이 가게에 있었지만 쓰지 않았다고 했다. 그러나 취조관은 내 말을 인정하지 않았다.”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이 나를 의자에 묶어 놓고 주리를 틀면서 고백하라고 강요했다. 처음에는 한 병이라고 고집했지만 다리를 부러뜨릴 것같이 아프게 조이며 요구하여 둘이라고 자백했다. 그러나 사실대로 말하라고 고문을 계속하여 견디지 못하고 세 병이라고 했다. 그래도 고문을 가하면서 사실대로 말하라는 것이었다. 사실은 한 병인데 세 병까지 거짓말을 하여도 인정하지 않는 거였다. 그 고문이 얼마나 심한지 이빨이 부러질 만큼 악물어도 견딜 수가 없었다.”
놈은 당시를 생각하며 굳은 얼굴이 되었다. 나도 그 말만 듣고도 긴장하여 무슨 말도 할 수 없었다. 놈이 이었다.
“견디다 못해 네 병이라고 했다. 그랬더니 확인하라면서 네 병을 썼다고 적어놓은 종이에 손도장을 찍으라 하여 항복하고 손도장을 찍었다. 그랬더니 고문을 풀어주며 구치소로 넘겼고 죄인이 된 나는 재판을 받게 되었다.”
내가 물었다.
“너 재판 받는 날 샌님하고 내가 간 거 아냐?”
놈과 나 54 / 법 앞에 눈먼 양심
“누가 왔는지 어떻게 아냐? 한 병밖에 안 가지고 있었는데 4병이라고 강요당한 것이 억울해서 판사한테 빙초산을 쓰지도 않았지만 한 병밖에 안 가지고 있었다고 사실대로 말했지만 판사는 내 말을 믿지 않고 ‘만약 피고의 말대로라면 왜 인정하는 손도장을 찍었는가? 법정에서 거짓을 말하면 가중 처벌된다는 걸 알라. 피고의 주장을 인정할 수 없다. 식품위생법 위반죄로 6개월 구류에 처한다.’ 이렇게 판사도 내 말을 인정하지 않는 거였다. 억울하면 상소하라 하였지만 나는 포기하고 감방생활을 택하고 말았다.”
“눈먼 법 앞에는 양심도 눈이 머는구나. 양심을 믿지 못하고 법으로 범인을 만드는 세상이라는 것이 네 말을 들으니 실감이 난다.”
“너 감방이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지?”
“안 가 보았으니까.”
“나는 6개월 형을 받고 감방으로 갔다. 그때 나하고 동시에 입실하는 죄수가 하나 더 있었다. 좁은 감방 한 구석에 두툼한 메트리스 위에 방장이란 자가 비스듬히 누워 있고 다섯 명의 죄수들이 눈을 반짝이며 우리를 맞았다.”
“감방장이 뭐냐?”
“감방에서 대왕노릇을 하는 사형수가 감방장이다.”
“사형수가 일반 죄수들과 같이 있다고?”
“같이 있더라. 들어봐라.”
놈과 나 55 / 신고식
“대개 감방장은 사형수가 차지한 것 같았다. 다른 죄수들은 형기가 차면 출옥하지만 사형수한테는 죽는 날이 출옥하는 날이니까. 그 사람은 이미 같이 자고 먹고 웃어도 이 세상 사람이 아니지.”
“그렇구나. 거기 신고식이 있다던데 넌?”
“신고식 했다. 나하고 같이 온 사람이 들어서자 감방장이 우리 둘을 마주 세우더니 나한테 시선을 꼽으며 명령했다. ‘차렷! 뺨치기!’ 나는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만 상대를 보고 감히 뺨치기를 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나보다 십년은 위로 보이는 형님 같은 사람이었고 이런 데 올 사람 같지가 않았다. 그 사람의 뺨을 때리라는 것이었다. 나는 감히 손을 들 수 없어 주저했다.”
“그렇겠지. 연장자 뺨을 감히 치다니.”
“내가 어물거리자 감방장이 미친개처럼 날아들어 내 눈에 불이 번쩍하게 갈겼다. 나는 순간 아아! 하고 머리를 돌렸다. 이때 방장이 나보다 연장자인 그 사람한테 명령했다. ‘네가 때려!’ 순간 그 사람이 힘 빠진 손으로 찰싹 때렸다.”
“……음”
“그도 어쩌면 동생 같은 나를 때리기가 어려웠던 것 같았다. 감방 안의 규율은 군대와 달랐다. 우리가 7725부대에 배치 받고 선배들한테 신고식을 한 생각 안 나냐?”
“생각나지. 난 선배들 앞에서 무슨 노랜지 부르라고 해서 춤을 추며 불렀지. 넌?”
놈과 나 56 / 이름이 수인번호로
“그 정도는 양반이다. 나는 궁둥이로 트위스트 춤을 추라고 해서 추었더니 고향 주소를 궁둥이로 쓰라고 해서 쓰고 애를 먹었다. 그런데 감방은 범인들이 갇힌 방이라 그런 정도가 아니었다. 방장이 몸을 홱 돌리며 나보다 연장자 따귀를 때리면서 ‘이렇게 치란 말이다!’ 하자 그의 손바닥이 내 얼굴에 번쩍 벼락을 쳤다. 얼마나 아프고 놀랐던지 나도 모르게 반동적으로 온힘을 다해 그의 뺨을 쳤다. 그 사람이 내 주먹을 맞고 옆으로 비틀하더니 돌아서며 내 뺨을 더 세게 갈겼다. 그렇게 시작된 우리는 마치 작동하는 로버트처럼 서로 양보 없이 일대일로 주먹을 날렸다.”
“허, 참 기가 막히는군! 그래 어떻게 끝이 났나?”
“방장이 그만! 할 때까지 때리고 맞고 나니 방장이 엄숙하게 ‘지금부터 너희들은 이름이 없다. 여기는 인격을 따지는 인간이 모인 곳이 아니다. 알았나?’ 했다. 나도 그 사람도 똑같이 ‘네!’ 하고 대답하자 나를 516하고 부르고 같이 들어온 사람은 625하고 불렀다. 그때부터 나는 516이고 그는 625가 되어 방장의 명에 따라야 했다.”
“죄가 이름을 빼앗아갔구나.”
“이름만 빼앗긴 것이 아니다. 내 자존심, 내 의지,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다 빼앗아가고 번호가 나를 끌고 다녔다.”
“감방은 어떻게 생겼더냐?”
“그게 궁금하냐?”
놈은 설명했다.
놈과 나 57 / 감방은 독재공산국
“방장은 두툼한 매트리스 위에 담요를 깔고 왕처럼 올라앉아 내려다보고 다른 죄수들은 그 아래 수그리고 앉아 있기도 하고 단정히 책상다리를 하고 있기도 했다. 나의 입실 동기 625는 얼굴이 빨갛게 된 채 나를 보고 미안하다는 눈을 보냈다. 나는 더 미안해서 고개를 숙여 보였다. 말로는 할 수 없는 무거운 분위기였다. 나도 처음 당한 곳이라 둘러보았다. 방장 쪽 벽에는 시렁이 있었는데 거기는 슈퍼처럼 과자 빵 등 가지가지 먹을거리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그래? 그게 다 뭐냐?”
“그건 죄수들이 면회하고 들어오면서 받아온 선물이었다. 누구든지 나갔다 올 때는 가족이나 친지들이 영치금을 넣기도 하고 물품을 들여오기도 하였는데 일단 감방까지 물품이 들어오면 그 모든 것은 방장이 접수한다.”
“개인 소유가 아니란 말인가?”
“개인은 인정하지 않는다. 방장의 명령이 법이다. 들여온 물품은 모두 방장의 명이 없으면 먹을 수도 없고 사용할 수도 없다. 진열해 놓은 먹을거리는 방장이 식사 시간 중간에 간식으로 배분해 준다. 완전한 공산국가 같은 곳이다.”
“공산국가, 그런 체제에서 살자면 숨이 박힐 거다. 불행이야.”
“불행이지. 나하고 625는 옷을 수의로 갈아입고 식기를 배급받았다. 방장이 우리한테 ‘이제부터 너희들은 이름이 없다. 오직 수의에 달린 번호가 이름이다. 알았나?’ 했다.”
놈과 나 58 / 죽음의 선배
방장이 자기소개를 했다.
“늙은 625, 파란 516. 들어라. 나는 세상이 벌벌 떨던 살인범 ✕✕✕다. 살아 있지만 죽은 몸이다. 살아 있는 송장 말이다. 사형수가 뭔지 알겠지? 나는 사형수다, 625, 넌 몇 살이냐?”
625가 대답했다.
“59세입니다.”
놈은 놀랐다. 아무리 감방이라도 저보다 10년 이상 형님 같은 윗사람한테 너라니! 무례하다고 생각했다.
감방장이 625한테 말했다.
“넌 내 말이 아니꼽지?”
“아닙니다.”
“아니긴 뭐가 아냐? 속으로는 비위가 상하면서 거짓말을 해?”
625는 더 겸손히 대답했다.
“아닙니다.”
“어떻게 생각하든 그건 네 자유다. 이 세상은 누가 먼저 태어났느냐에 따라 선후배가 정해지지만 죽는 데는 그와 반대다. 먼저 죽는 자가 선배란 말이다. 나는 이미 죽은 목숨, 꿈도 소망도 없다. 오늘 죽을지 내일 죽을지 모르지만 너보다는 먼저 갈 죽음의 선배다. 너희는 형기가 차면 나가서 사는 날까지 무엇인가 할 꿈이 있지만 나에게는 없다. 너와 나의 차이가 바로 그것이다. 안 그러냐?”
“…….”
놈과 나 59 / 위대한 왕
방장은 밑에 수그리고 앉은 죄수들을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이 세상에 나한테는 무서운 상대가 없다. 너희들이 몰려들어 나를 죽인다 해도 안 무섭고 내가 누구든 한 놈 때려죽여도 겁날 것이 없다. 나는 사형수가 누릴 수 있는 최대의 자유다 하하하.” 
방장이 웃어도 아무도 웃지 못하고 감방 공기는 영하로 내려갔다.
“어떠냐? 나한테 도덕 윤리가 무슨 의미가 있느냐.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놈이 있으면 말하라. 나는 세상에서 악마라고 불리지만 여기서는 너희한테 자비를 베풀 수 있는 위대한 왕이다. 어떤 왕도 내가 누릴 수 있는 권위와 자유는 누릴 수 없을 거다. 내 말에 복종하지 않는 자가 있다면 당장 죽여 버릴 것이다. 사형수한테 살인범보다 더한 죄명이 무엇이 더 있겠느냐. 안 그러냐? 하하핫, 516!”
516으로 이름이 바뀐 놈은 얼어서 입이 붙었다.
“…….”
“넌 무슨 짓을 하고 들어왔느냐 말이다!”
“부끄럽지만 다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이놈아. 여기 죄 안 짓도 들어온 놈이 누구냐? 내가 들어보겠다는데 무슨 잔소리. 이실직고하렷다.”
516은 그 동안 겪은 사실을 설명했다. 다 듣고 난 방장이 한 마디로 판결을 내렸다.
“너는 구류 6개월! 곧 출옥.”
6개월이 곧이라고?
놈과 나 60 / 방장의 판결
516은 놀랐다. 재판받는 것을 보지도 못한 방장이 판사가 내린 형량과 같은 판결을 했기 때문이다.
듣다가 놀란 625가 입을 열었다.
“방장님 저는…….”
방장이 물었다.
“625, 할 말이 있는가?”
“예, 말씀드리자면…….”
625는 자기는 죄가 없는데 누명을 써서 억울하게 들어왔다는 변명을 한 시간이나 늘어놓았다. 방장이 다 듣고 나서 물었다.
“너를 인정하는 증인이 있었나?”
“없었습니다.”
“더러운 놈. 네가 그렇게 양심적이었다면 왜 증인 하나가 없었느냐? 너는 네 죄를 알지 못하고 남한테 오히려 죄를 뒤집어씌우려다가 제대로 된 거다. 당장 때려죽여도 시원치 않을 놈. 네놈은 결심공판에서 1년이 더한 징역 2년이 떨어질 거다.”
625는 감형 판결이란 말이 듣고 싶어서 물었는데 그 반대가 되자 얼굴이 송장이 되었다. 방장이 바로 곁의 335한테 명했다.
“335, 간식으로 빵 두 개씩 배식! 625는 제외.”
그 소리에 625는 더 죽을상이 되었다. 그렇지만 한 마디도 하지 못하고 머리를 박고 눈물만 흘렸다. 방장이 가만있지 않았다.
“625! 간식하는 동안 지은 죄를 깊이 반성하라.”
놈과 나 61 / 사형수와 잡범의 차이
 빵을 나누어 주고 난 방장이 625한테 말했다.
“나쁜 놈일수록 남의 죄는 보면서 자기 죄를 보지 못한다. 범인이자기 죄를 알고 뉘우치며 판사 앞에 서면 판사는 마음을 들여다본다. 판사는 서류만 보는 것이 아니라 죄수가 숨기고 있는 진실한 얼굴을 보고 거울을 보듯 안다. 피의자가 반성하는 기색이 없고 자중하지 않으면 형량을 늘이기도 하지만 자세가 겸허하고 스스로 죄를 시인하고 반성하는 자에게는 감형을 선고하기도 한다.”
516은 속으로 ‘그런 걸 알면서 너는 왜 사형수가 되었냐?’ 하고 말하고 싶었지만 감히 입을 열 수가 없었다. 그런데 방장이 남의 속을 알기라도 한 듯 말했다.
“한 사람이 죄를 짓고 사형수가 되기까지는 인생 모두를 바친 것과 같다. 죄를 부인하고 법망에서 벗어나려고 올무에 걸린 노루처럼 온갖 머리를 다 쓰고 발버둥질 치다가 결국 사형수라는 판결을 받는다. 죄가 있어서 죄 값을 받는 것은 억울할 것도 없지만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사형수가 되는 사람을 보면 울화통이 터진다.”
335가 물었다.
“방장님이 판사도 아니면서 억울한 사형수를 어떻게 아십니까?”
“그 점이 사형수와 잡범의 차이다. 나는 재판 받는 사람 얼굴과 판사 얼굴만 보아도 판결이 어떻게 난다는 것을 안다.”
“아깝습니다. 방장님이 판사가 되셨어야 하는데 안 그렀습니까?”
놈과 나 62 / 사형수가 아무나 되나
“판사가 될 사람이 판사가 되지 못하면 사형수가 되는 법이다. 사형수는 대개 머리가 비상하다. 머리 나쁜 놈은 잡범이나 될 뿐 사형수도 못 되고 판사도 못 된다. 하하하……. 내 말이 틀렸냐? 777 영화 한편 돌려라.”
777은 바라만 보아도 몸서리가 나는 인물이다. 새까만 얼굴에 옹골차게 작고 모질게 생긴 몸매에 칼로 그어 찢어놓은 듯한  V자 눈은 언제나 교활하게 반짝거렸다. 죄인이 아닌 사람일 때는 법✕신문사 기자였다는데 보기보다는 유머러스한 인물이다.
“이번에는 무슨 영화를 돌릴까요?”
“꼴리는 대로.”
777은 간신이 내는 소리로 대답했다.
“예예, 마마 잃어버린 사랑의 계절을 한 편 돌리겠습니다요.”
방장이 왕처럼 내려다보며 명령했다.
“다들 눈 감고 자빠져! 777이 들려주는 영화 한편 감상하라.”
다들 그물에 걸려온 물고기처럼 주르르 누워 눈을 감았다. 777이 무성영화 변사처럼 목소리를 다양하게 구사하며 지껄여댔다.
516도 눈을 감고 누워 생각했다.
‘죄수가 우글거리는 이 감방은 마치 지렁이가 우글거리고 거머리가 서로 빨아대고, 구더기가 엉겨 붙고, 뱀이 둘둘 말려 비틀어대고, 쥐가 찍찍거리고 개구리가 우글거리는 쓰레기통, 우리 같다.’
이때 777이 무슨 소리를 했는지 와 하고 웃어대기 시작했다.
놈과 나 63 / 감방은 국비 낭비
모두가 영양가 없는 잡소리를 지껄이고 낄낄거린다. 그나마 아무 것도 하지 않을 때는 지옥 같고 하루가 지루하다.
책을 보는가 하면 누워서 천장만 멍하니 보는 사람, 집에 두고 온 어린 자식들을 생각하는지 눈물을 흘리는 사람…….
516은 죄수복을 갈아입고 바가지에 숟갈 하나를 받아드는 순간 이제는 사람이기를 포기해야 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면서도 죄수라는 이름으로 꼭 이래야 되는가를 생각했다.
‘한창 일해야 할 사람이 죄수가 되어 귀한 노동력을 국민이 낸 세금으로 허비해야 하는가? 빈둥거리며 국비를 낭비하는 감방이 없어질 수는 없을까. 초범이나 경범은 벌금을 물리고 풀어주면 일을 하여 벌금의 몇 배를 벌 수도 있으리라.’
간수가 철창 사이로 불렀다.
“815 면회!”
815는 사업을 하다가 부정이 적발되어 들어온 죄수다. 그가 철문을 나설 때 방장이 한 마디.
“815, 빵과 우유가 떨어졌다. 알겠지?”
“네.”
면회는 나가는 듯 돌아오는 경우가 많은데 815는 다른 사람보다 오래 있다가 돌아왔다. 방장이 물었다.
“준비했지?” 
“예, 그밖에도 히히히……, 이것도 가져왔습니다.”
놈과 나 64 / 담배의 독성
815는 품속에서 담배를 꺼냈다. 그리고 한 가치를 방장한테 바쳤다. 방장이 850번에게 말했다.
“밖에 누구 없나 봐라.”
850이 한쪽 벽을 들여다보며 대답했다.
“아무도 안 보입니다.”
방장 명령.
“불 붙여라.”
516은 어리둥절했다. 밖을 내다보지도 않고 한쪽 벽만 쳐다보고 아무도 안 보인다고 대답하는 것도 이상했지만 성냥도 라이터도 없는데 담배에 불을 붙이라니 그건 더 이상스러웠다.
850이 구석에서 무엇인가를 꺼냈다. 그것은 칫솔에다 유리조각을 박아 만든 이상한 물건이었다. 그리고 어디서 났는지 라이터돌을 가지고 유리조각에다 침구에서 뜯어낸 솜을 돌돌 말더니 거기다 라이터돌을 비볐다. 얼마 있지 않아 라이터돌에서 반짝 빛을 내더니 불이 붙어 연기가 났다. 방장이 들고 있던 담뱃불을 붙였다. 그리고 한 모금 쭉 빨아들이고 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그 냄새를 맡으려고 모두가 코를 벌름거렸다. 담배연기는 꼬리를 치면서 한쪽 벽에 난 창문을 향해 날아갔다. 그 순간 연기가 빨리 빠져나가라고 한 죄수가 신문지로 부채질을 했다. 한쪽에 앉아 코를 벌름거리는 1110번에게 방장이 담배를 넘겼다. 놈은 받아 들자마자 미친 듯 길게 쭈욱 빨아들이더니 갑자기 쿵 하고 나자빠졌다.
놈과 나 65 / 홍콩 갔구나
방장이 웃으며 말했다.
“흐흐흐, 놈이 홍콩 갔구나.”
516은 신기하여 그게 무슨 소린가 하고 벌렁 자빠져 있는 죄수를 걱정스럽게 들여다보았다. 방장이 말했다.
“516, 넌 왜 그렇게 이상한 눈으로 보는 거냐?”
“아닙니다.”
“너 같은 햇병아리한테는 신기하게 보이겠지. 그렇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한 거다. 넌 이제부터 내 직속이다.”
“네?”
“이 안에서 내 심부름은 다 네가 맡아서 하라는 말이다. 저 놈이 빨던 담배 집어다 850번한테 넘겨라.”
516은 담배를 안 피기 때문에 담배냄새가 싫었다. 그렇지만 방장의 명령을 거부할 수 없어서 담배를 집어다 850한테 주었다. 850은 담배를 물더니 눈을 스르르 감고 깊은 감회에 빠진 얼굴로 연기를 조심스럽게 쭈욱 빨아들였다. 그리고 입에 물고 있다가 코로 후우하고 불어냈다. 그것이 부러워 간절히 바라보던 727 죄수가 입을 헤벌리고 소처럼 웃었다.
그 입에다 516은 꽁초가 다 된 담배를 물려주었다. 담배를 받아 문 727은 입술에 담뱃불이 타들어가도 모르고 깊이 빨아들였다. 그 입술에 필터만 남았을 때 초점 잃은 눈을 희번득이더니 고개를 들다가 또 쿵하고 나뒹굴었다.
놈과 나 66 / 죄수의 발바닥
방장이 웃으며 말했다.
“흐흐흐, 놈도 홍콩 갔구나. 행복하겠다. 흐흐흐.”
516은 놀랐다. 담배가 그렇게 충격을 줄만큼 자극성이 강한 줄은 미처 몰랐던 것이다. 담배에 굶주린 죄수들은 담배연기만 맡아도 황홀한 눈빛이 되고 미칠 듯이 좋아하는 것을 보았다.
담배를 빨고 죽은 듯이 나자빠졌던 죄수들이 한참만에 일어났다. 516이 궁금하여 물었다.
“방장님, 밖에 누가 있고 없는 것을 어떻게 아나요?”
방장이 한쪽 벽을 가리켰다.
“저기를 봐라. 벽에 작은 유리조각이 붙어 있잖으냐. 그것으로 밖을 내다볼 수 있는 거다. 알았나?”
516은 또 이상해서 물었다.
“저런 건 누가 만들어 놓았습니까?”
“내가 만들었다.”
“유리조각은 어디서 났나요?”
“그것도 알고 싶으냐? 유리조각 하나를 구하기는 이만저만 힘든 것이 아니다. 죄수들이 재판 받으러 나갈 때 배급받은 밥 가운데 한 숟가락쯤을 손으로 으깨고 문질러서 끈끈이를 만들어 신발 바닥에 붙이고 나갔다가 담배꽁초든 유리조각이든 여기서 필요한 물건을 길바닥에서 만나면 밟아서 발에 묻히고 들어오는 거다.”
“아! 아이디어가 놀랍습니다. 라이터돌은 또 어떻게 들어오나요?”
놈과 나 67 / 하늘도 땅도 내 것이 아니다
“이 풋내기가 호기심이 많구나. 라이터돌은 죄수가 들어올 때 똥구멍에다 넣어가지고 온다. 알았냐?”
“네?!”
“왜 그렇게 놀라느냐? 그게 죄수들이 하는 자급자족법이다. 밥은 나라에서 꼬박꼬박 먹여주지만 하루 종일 자빠져서 세월 가기만 기다리는 죄수들한테 무슨 낙이 있느냐. 그래도 형기를 받아가지고 날짜 가는 것을 세는 놈들은 행복한 거다.”
“네?”
“이놈아, 나를 봐라. 나한테 낙이 무어냐? 오늘 죽을지 내일 죽을지 죽을 날이 날마다 지나가는데 하루하루 살아 있다는 것이 죽은 것과 무엇이 다르냐. 너같이 몇 달 웅크리고 있다가 나가면 날개라도 단 듯 뛰겠지만 나한테는 하늘도 내 것이 아니고 땅도 내 것이 아니다. 나는 세상을 포기하고 이름도 버리고 죽음과 바꾼 내 번호가 세상의 마지막 이름이다. 네가 사형수라고 생각해 봐라. 그래도 내 맘을 모를 거다.”
516은 생각에 잠겼다.
‘사람의 본성은 다 선하다. 죄인과 사람이 무엇이 다른가? 한 번의 실수가 죄인이 되고 사형수가 되지 않는가. 사형수라면 인생 막장에서 날마다 몸부림을 치고 눈을 까뒤집고 펄펄 뛸 것만 같은 선입견이 있었는데 이 사형수는 어떤가.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 아닌가. 이름이 번호로 바뀐 사형수라는 명칭이 다른 것뿐…….’
놈과 나 68 / 인간 본성은 선하다
방장이 물었다.
“516,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나?”
“아닙니다. 방장님을 만나보고 인간의 본성은 원래 선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런데 사람이 죄를 짓는 이유는 어디서 왜 생기는지 이해가 안 갑니다.”
한쪽 구석에 박혀 귀를 기울이던 815가 생뚱맞게 물었다.
“방장님 말씀을 들어보면 죄를 지을 분이 아닌 것 같은데 어쩌다 사형수가 되셨습니까?”
“이 사람아, 내가 가장 아파하고 후회하는 것이 그 이야기다. 더 생각하면 마음만 아프고 남이 들어본들 아무 의미도 없는 소리다. 내가 지은 죄를 말하면 선하게 살 사람한테 또 하나의 죄 짓는 법을 가르쳐 주는 골이라 말하기 싫다.”
방장이 516한테 물었다.
“넌 날마다 면회 오는 사람이 누구냐?”
“”집사람입니다. 집사람은 혼자 장사를 하기 때문에 통행금지 시간이 풀리면 4시에 와서 가장 먼저 면회신정을 합니다.“
“네가 부럽다. 나한테는 면회 오는 사람도 없다. 모두가 나를 버리고 나는 세상에 있어서는 안 될 죄인이기 때문이다. 516, 너는 무슨 장사를 하느냐?”
놈과 나 69 / 다시 한 번 살 기회를 준다면
“작은 횟집을 하고 있습니다.”
“회? 맛있지. 이제 나는 더 이상 맛볼 수 없는 음식이지. 516, 마누라가 좋은 사람 같다. 새벽마다 와서 면회를 하고 가다니! 맘씨가 그리 고우니 얼굴도 예쁘겠지?”
“얼굴보다는 마음이 고운 사람입니다.”
“나가거든 잘 해 줘라. 나한테도 세상을 다시 한 번 살 기회를 준다면 아내한테 그 동안 못한 사랑을 해주고 싶지만…….”
죄는 나쁘지만 인간 방장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법망에 걸리면 새가 그물에 걸려 사람한테 잡혀 죽듯이 그렇게 죽는 것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쳐놓은 법의 그물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
이런 저런 생각을 하는데 간수가 문에 대고 방장 번호를 불렀다.
“1116번 나와!”
방장이 굳은 얼굴로 일어섰다. 두꺼운 매트리스 위에 놓인 사물들과 책을 버려둔 채 나가면서 남은 죄수들을 향해 말했다.
“잘들 있다가 나가라. 이제 너희들과 마지막이다. 오늘 죽어도 죽는 것이고 내일 죽어도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살아 있는 나의 마지막 사람 모양새다. 나는 사람으로 죽는 것이 아니라 죄인으로 죽는 거다. 다시 보자는 말은 못한다. 잘들 있어라.”
방장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게 사라지고 방장이 사라진 자리에는 한 시간도 안 되어 엉뚱한 사형수가 나타나 높은 매트리스 위에 앉았다. 이 자는 어떤 인물일까? 모두가 눈이 둥그레졌다.
놈과 나 70 / 버리고 싶은 과거뿐   
감방에도 주인이 있어 옛 주인이 떠나자 새 주인이 왔다. 그 역시 사형수라 하였으니 어떤 인물이며 왜 사형수가 되었는지 궁금하지만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다.
새 방장이 말했다.
“나는 사형수다. 나보다 중벌 받은 자가 있으면 말하라.”
아무도 말을 못하고 허릴 숙였다.
“나는 대남간첩이었다. 너희 중 간첩이 있는가?”
역시 아무도 말을 못했다. 새 감방장이 또 입을 열었다.
“나는 보다시피 7726 사형수다. 고향은 포항. 포항 사람 있는가?”
7726은 우리 8명을 차례로 훑어보면서 다음 말을 이었다.
“남한에서 특수훈련 받은 자가 있는가?”
놈 516은 가슴이 뜨끔했다. 7725부대에서 특수훈련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나설 수도 없는 것. 입을 다물고 방장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방장은 보기보다 말이 많았다.
“나는 시간과 상관없는 죄수지만 너희는 시간이 지루한 물건들이다. 내가 사형수라니까 겁을 먹는 모양인데 너희나 나나 똑같다. 너희는 희망이 있지만 나에게는 희망이란 게 없다. 버리고 싶은 과거가 있을 뿐이다. 지루한데 내 이야기나 들어봐라.”
방장이 자기 기분대로 떠들어댔다.
“나는 포항에서 북한으로 넘어가 4년간 특수교육을 받고 남파된 간첩이었다. 특수교육이 어떤 것인지 말해 줄까?”
놈과 나 71 / 간첩교육
“특수교육의 중점은 김일성 숭배교육이다. 이 세상을 지배하는 주인은 오직 김일성뿐이다. 신은 없다. 신이 없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어버이 김일성과 김정일만이 인민을 먹이고 입히고 살려주는 지도자일 뿐 세상에서 신이 해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개새끼 김일성 어버이 만세, 하하하.”
미친놈, 갑자기 웃기는! 신이 있는지 없는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김일성이가 신 이상일 수는 없는 것 아닌가. 그런 김일성을 어버이 어쩌고 하다가 만세는 뭐고 하하하는 또 뭔가, 미친놈.
516은 무종교다. 그러나 사람을 신 이상으로 섬기는 것은 미친 짓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7726은 김일성이를 신 이상의 존재라고 하다가 개새끼라고 하지 않는가. 7726이 갑자기 말을 바꾸었다.
“개새끼 김일성은 지옥 갔을 거다. 똑같은 인간 탈을 쓴 놈이 저를 신 이상으로 받들게 하고 숫한 인민을 간첩으로 만들며 얼마나 악행을 저질렀는지 아무도 모르다. 내 말 들어라.”
사형수 7726은 516한테 물었다.
“너 쥐 잡아 먹어봤냐?”
듣기만 해도 끔찍한 소리.
“아니오.”
7726이 1129한태 물었다.
“너 뱀 잡아먹어 봤냐?”
1129도 입이 얼어붙었다.
놈과 나 72 / 간첩과 개구리
7726은 또 다른 118한테 물었다.
“너 빨가벗은 채 눈이 푹푹 빠지는 산속을 한 시간 이상 걸어 보았니?”
118도 멀거니 바라볼 뿐, 어이가 없다는 얼굴이었다. 7725가 또 물었다.
“누구 3일 동안 숲속에 숨어서 개구리 잡아먹어본 사람 있나?”
아무도 없었다.
“너희도 군대 갔다 왔겠지?”
516이 대답했다.
“네.”
“516. 오리발로 강을 걸어서 건너가는 훈련 받아 보았나?”
516은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었다. 오리발로 헤엄을 치는 것이 아니라 걸어서 강을 건너다니 말이 안 되는 소리 아닌가.
“남한 군대는 군대도 아니다. 잘 처먹고 살만 뒤룩뒤룩 쪄 가지고 제대로 뛰지도 못하는 것들이 큰소리는 잘 치지. 북한군하고 일대일로 붙으면 이길 놈 별로 없을 거다. 516 너는 낙하산 타 보았나?”
“네.”
“뭐야? 네가 낙하산을 타 보았다고?”
“네.”
“낙하산 타다가 나무에 걸려서 매달렸다가 떨어져 보았나?”
“그런 경험은 없었지만…….”
놈과 나 73 / 이상한 사형수
7726은 자기 이야기를 길게 늘어놓았다.
“나는 김일성 수령께 맹세를 하면서 4년 동안 간첩훈련을 받았다. 산속에서 일주일 동안 식량 하나 없이 채 산속으로 들어가 뱀도 잡아먹고 들쥐도 잡아먹고 내 오줌도 받아마시고 지렁이도 개구리도 썩은 동물을 파먹는 구더기, 무엇이나 닥치는 대로 잡아먹었다. 그런 것도 못 잡으면 나무껍데기도 까먹고 칡뿌리, 산도라지, 더덕, 머루 아무것이나다 먹고 배를 채웠다. 굶어 죽지 않으려면 그런 것들을 다 먹지 않으면 안 되는 고마운 식량이었다. 한겨울에 눈속에서 나체로 뒹굴기도 하고 여름에는 서해 바다에서 허리에 납덩어리를 두르고 오리발을 신고 물 위를 걷는 훈련도 했다. 물에 빠져 죽을 고비를 넘기고 오직 수령 동지를 위해 충성을 다했다. 그 덕분에 나는 수영도 잘하고 물에 빠지지 않고 발을 놀려 강이나 바다를 건널 수도 있다. 어떠냐? 516 나만큼 고생해 보았나?”
그런 군대생활을 해 본 적이 없는 죄수들은 7726의 말에 감탄할 뿐 입을 열지 못했다. 그렇게 하여 하루가 가고 저녁이 되었다.
그런데 7726은 이상한 행동을 했다.
세상 고생을 다 하고 사형수가 된 그가 잠자리에 들기 전에 엎드려 기도를 하는 것이었다. 사형수가 무슨 소망이 있어 기도를 하는가. 사형수에 어울리지 않는 기도를 하다니!
다음날 7726은 누가 시키지도 않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사람은 다 죽는다. 죽고 나면 어떻게 되는지 아는가?”
놈과 나 74 / 세상에서 가장 큰 죄
“내가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할 일은 사형당하는 일 하나뿐이다. 나는 죽음과 매우 가까이 있다. 세상에 나와서 한 일은 내가 태어난 조국을 망쳐 놓으려는 간첩질과 살인이었다. 이 세상에서 내 죄를 용서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사람한테 용서받기는 늦었다. 감방바닥에 굴러다니는 성경책을 읽다가 나는 매우 중요한 사실 하나를 발견하고 마지막으로 하나님한테라도 용서받기로 결심했다.”
7726은 매우 진지하게 둘러보며 다음 말을 이었다.
“성경에 가장 큰 죄는 살인죄나 간첩죄보다도 하나님을 믿지 않는 죄가 더 큰 죄라고 했다. 그리고 어떤 죄를 지었더라도 하나님 앞에 굴복하고 용서를 빈다면 하나님은 용서해 주신다고 쓰여 있다. 그래서 나는 사람한테 용서받기는 틀렸으니 하나님한테라도 용서를 받고 싶었다. 그래서 성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세 번이나 읽었다. 성경을 읽어본 사람이 있는가?”
그가 둘러보다가 516한테 못 박듯이 물었다.
“516, 성경 읽어보았나?”
“저는 무신론자라 성경을 만지지도 않았습니다.”
“네가 바로 김일성이다. 김일성이가 성경을 읽었어야 하는데 안 읽고 죽었다. 북한에서 백성들한테 지은 죄도 크지만 하나님을 믿지 않은 것이 더 큰 죄였다. 사형수로서 세상의 비웃음은 받지만 내가 회개하고 공산주의를 버리고 하나님을 믿기로 결심한 것은 감옥에서다. 감옥이 나한테는 구원의 문이다. 516, 내 말 믿겠는가?”
놈과 나 75 / 감옥이 구원의 문?
놈 516은 속으로 비웃었다.
‘좋아하시네. 감옥이 구원의 문? 미친 소리하고 자빠졌네.’
7726이 명령조로 말했다.
“나는 간첩으로 서울역 일대에서 활동하다가 같이 내려온 놈이 이촌동에서 잡혀 고백하는 바람에 잡혔다. 나를 잡아 심문하던 경찰관이 있었는데 그 자는 자기방어의 중요성을 모르고 있었다. 간첩을 잡았다는 성과에만 흥분하여 내가 다리에 차고 있던 칼을 빼들고 찌를 때 찍소리도 못하고 즉사했다. 그가 죽는 것을 본 다른 경찰관이 나를 제압했다. 나는 살인 간첩이다. 얼마나 무서운 놈인지 다들 알 거다. 오늘부터 내가 성경 한 줄을 읽고 오른쪽으로 넘기면 받아서 한 줄을 읽고 다음 사람한테 넘긴다. 알겠나?”
516이 항의했다.
“아무리 감방이라지만 하나님을 안 믿는 사람도 성경을 억지로 읽으라는 말입니까?”
7726이 단호히 대답했다.
“그렇다. 여기 김일성이가 있어도 읽혔을 것이다. 누구든 내 명령에 반항하면 그를 죽이고 나도 죽을 거다. 그래도 싫은가?”
너무 살벌한 억지 명령이었다. 하나님을 믿고 회개하여 옳은 사람이 되었다면서 그건 무슨 거짓말인가. 하나님을 억지로 믿으라는 말이 아닌가. 정말 억지로 하나님을 믿을 것인가. 모두들 불만스러웠지만 실장의 말에 대답을 못했다.
놈과 나 76 / 감방이 성경독서실
방장 명령에 따르지 않으면 죽이고 죽겠다는 위협!
놈 516은 생각했다.
‘사형수라면 가능한 소리다. 저 놈은 충분히 사람을 죽일 놈이다. 내가 하나님은 안 믿지만 저 놈의 말은 들어야 할 거다. 나는 고아원에서 힘들 때마다 하나님 도와주세요, 하고 빌었지만 한번도 하나님이 손을 내밀어 도와주지 않았다. 내가 빌 때 하나님이 도와주셨더라면 왜 하나님을 안 믿겠는가….’
7726이 성경을 펴들고 한 절을 읽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그리고 다음 815한테 넘겼다. 그는 성경을 처음 만져보는 것이고 처음 대하는 것이라 매우 더듬거리고 읽었다. 다음은 516이 읽었다. 무슨 소린지도 모르면서 글씨만 읽고 다음 사람한테 넘겼다.
그렇게 시작된 성경 읽기는 식사 시간 외에는 날마다 아침부터 잠들 때까지 성경을 읽어야 했다. 대개가 지겹다고 생각하면서도 반항을 못했다. 그런데 어떤 죄수는 굉장한 관심을 가지고 자기 차례가 되면 한 절만 읽는 것이 아니라 한 장을 읽기도 했다. 그렇게 읽을 때는 성경 이야기가 머리에 들어왔다. 무려 한 달 반 동안 성경 읽는 소리만 듣고 차례가 되면 읽어야 하고 지겨워 견딜 수가 없었다.
놈 516은 견디기 힘들어 면회 온 아내한테 부탁하여 다른 방으로 옮겨달라고 했다. 아내 덕으로 성경 독서실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다른 사형수가 있는 방으로 옮겼다. 그런데 이건?
놈과 나 77 / 천국을 피해 만난 지옥
성경 읽기가 싫어서 피해 왔더니 악마를 만났다. 새 감방에 들어서자마자 매트리스를 두 장이나 높이 쌓아 놓고 올라앉은 방장이 눈을 부릅뜨고 쏘아붙였다.
“516, 이 새끼, 잘 왔다. 신고!”
그리고 앞에 쭈그리고 앉은 죄수들한테 명령했다.
“전원 기립! 신고 받아 이 새끼들아.”
눈인사도 나누기 전인데 맨 앞에 333번이 달려들어 다짜고짜 516따귀를 때렸다. 그리고 얼굴을 들이댔다. 눈에서 번개가 날 정도로 맞고 얼얼한데 방장의 욕지거리가 귀를 때렸다.
“516! 너도 인사를 해, 이 새끼야!”
516이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려 하자 방장이 호랑이처럼 덤벼들어 따귀를 때리며 욕을 했다.
“이 새끼야! 신고를 따귀로 받았으면 따귀로 해 개새끼야! 333 얼굴에서 코피가 나게 쳐! 이 새끼야.”
“네.”
516은 얼굴을 때려달라고 대고 있는 333의 따귀를 힘껏 갈겼다. 그러자 이번에는 334번 죄수가 달려들어 516 신고! 하며 때렸다. 사정을 알아챈 516은 앞에 내민 얼굴을 더 세게 갈겼다. 그러자 세 번째로 337이 달려들어 따귀를 때리며 신고! 516은 서슴지 않고 그의 따귀를 갈겼다. 그렇게 하여 방장까지 8명한테 따귀를 맞고 여덟 번 때렸다. 얼굴이 얼얼한데 방장의 입에서는 개소리가 나왔다.
놈과 나 78 / 무덤에 휴가 온 개새끼들
“이 똥개 같은 놈들아, 내가 누구나?”
516은 입방하자마자 얼었다. 그런데 방장이 물었다.
“516, 이 개새끼, 몇 달이냐?”
“6개월입니다.”
“하하하, 개새끼 좋겠다. 이 새끼, 6개월만 있으면 나가서 마누라 하고 잘 거 아냐? 개새끼. 넌 이 감방이 내 무덤인 줄 몰랐지? 네 놈들은 다 내 무덤에 휴가를 온 개새끼들이다. 똥강아지 놈들.”
방장은 말끝마다 욕을 했다. 어디서 이런 인간이 태어났을까 하고 생각하는데 또 지랄이다.
“이 새끼들아, 네 놈들한테는 영치금을 넣어주는 놈이 하나도 없는 거냐? 빵도 먹고 싶고 우유도 한 통 먹고 싶은데 어느 놈이 들여오지 않을래? 개새끼들.”
516은 신고가 끝나면 영치금으로 빵과 우유를 구입하여 인사를 하려고 했는데 어느 놈이 영치금으로 어쩌고 하는 소리에 마음이 달라졌다. 빵을 사다 주느니 몽둥이로 뻥뻥 갈겨주고 싶었다.
방장은 매트리스에 벌렁 누워 334번이 새로 들어온 516을 바라보며 놀라지마 하고 보내는 눈빛을 알아채고 벼락같이 소리쳤다.
“개쌔끼 334! 너 무슨 눈깔로 516을 보는 거냐? 이 쌔끼 눈깔을 후벼 파서 죽여 버릴까 보다. 너 이 새끼 거기 꿇어!”
이런 지옥 같은 감옥이 있다니! 오 마이 갓!
334가 무릎 꿇은 등 위로 방장이 펄쩍 점프를 하여 깔아뭉갰다.
놈과 나 79 / 눈깔을 뺀다고?
334가 우욱! 하고 바닥에 널브러져 피를 토했다. 방장이 손가락을 516한테 꽂았다.
“516, 피 닦아!”
516은 휴지를 풀어 피를 닦으며 생각했다.
‘이런 무법천지가 어디 있나. 죄수끼리 이런 횡포를 당해도 보고만 있어야 하는가?’
사형수는 수갑을 차고 있어야 하는데 이 무법 사형수는 교묘하게 수갑을 풀고 지랄을 다하다가 간수가 오면 수갑을 차고 얌전한 척한다. 334가 자리에 쓰러진 채 일어나지 않자 방장이 명령했다.
“전원 취침!”
감방이 좁아서 여덟 명이 누울 때는 모로 누워야 한다. 516도 뼁끼통(화장실)에 등을 대고 모로 누웠다. 바로 곁에 누운 707이 발끝으로 발을 톡톡 쳤다. 그리고 귀를 잡아당기고 속삭였다.
“516, 오늘 12시까지 불침번 서야 해.”
“불침번이……?”
이때 방장이 높은 매트리스 위에서 씨불였다.
“영치금 한 푼 없는 새끼들. 오늘밤 배 고프면 어떤 놈이든 눈깔을 젓가락으로 찔러 죽일 거다. 개새끼들.”
707이 속삭였다.
“저놈은 밤마다 누구든 눈을 찔러 죽인다고 해서 불침번을 서야 한다. 알았지?”
놈과 나 80 / 발끝으로 톡톡
세상에 이렇게 나쁜 놈이 있다니!
낮에는 미친 듯 몸부림을 치다가 눈을 부라리며 욕질을 한다.
젓가락으로 눈깔을 파서 죽일 놈, 뭐 같은 세상, 염병하네, 개새끼, 뭐 같은 놈, 제 누구 붙어먹을 놈, 똥강아지 같은놈들, 미친년 무엇 하듯, 그가 쏟아낸 욕은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온종일 욕하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아무도 항의를 못한다. 그가 녹음기 틀 듯 하는 말.
“이 방은 내 무덤이다. 무덤에 휴가 온 놈들. 어떤 놈 나하고 같이 죽고 싶으면 나를 죽여라. 나 죽일 놈 있으면 나와 봐. 병신 같은 놈들 겁나냐? 느덜은 날짜 가기를 세고 있지만 나한테는 날짜가 안 갔으면 좋겠다. 나는 막장 인생, 어느 놈이든 하나 죽여주고 빨리 죽고 싶다. 나한테 죽기 싫은 놈은 나를 죽여라.”
식사 시간이 지나면 온 종일 씨부리는 이 소리가 귀에 뱅뱅 돌고 밤이면 잠자리가 괴롭다. 놈이 해칠까 봐 한 사람씩 방장 모르게 불침번을 선다. 누운 채 몇 시간이든 방장이 젓가락을 들고 해코지를 하지 않나 누운 채 감시를 하는 것이었다.
앞사람이 발끝으로 톡톡 치면 다음 사람이 발끝으로 톡톡 쳐준다. ‘알았으니 이제 주무시오’ 하는 신호다. 낮에는 귀가 아프도록 욕을 먹고 밤에는 잠을 제대로 잘 수 없는 감옥 속의 감옥이었다. 
516은 그렇게 한 달을 보내고 견딜 수가 없어서 아내한테 다른 방으로 옮겨달라고 부탁했다.
놈과 나 81 / 착한 얼굴
돈이 좋은 건 감옥에서 더 실감나는 것.
아내의 덕으로 516은 욕지거리와 젓가락으로 눈깔을 뺀다는 소리를 귀가 닳도록 듣다가 다른 방으로 옮기게 되었다.
방을 새로 들어갈 때는 으레 신고식을 해야 한다. 이번에는 어떤 신고식이 기다리고 있을까 불안한 마음으로 새 방으로 들어서자 바닥에 죄수들과 둘러앉아 있던 방장이 일어서면서 맞았다.
“516, 어서 오시게.”
반말이 아닌 오시게라는 말에 귀를 의심했다. 잠시 망설이고 서 있으니 방장이 명령했다.
“전원 기립, 새 손님 환영!”
이게 무슨 소린가? 손님은 또 뭐고? 얼마나 호된 신고식을 하게 하려고 이러나? 불안한 의심이 앞을 가리는데 방장이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516은 얼떨결에 악수를 했다. 이어서 다른 죄수 여섯 명이 손을 내밀고 악수를 하면서 웃어주었다.
‘이 사람들이 왜 이러지? 웃으며 뺨친다는 말이 이런 거 아닌가?’
불안해하고 있는데 방장이 모두 앉히고 혼자 일어선 채 말했다.
“516, 불안해할 것 없네. 여기도 사람 사는 공간이야. 살다가 실수를 해서 죄인이 되어 들어오긴 했지만 죄수이기 전에 사람이 먼저 아닌가? 516, 안 그런가?”
“네!”
방장 얼굴을 살폈다. 감옥에서 처음 보는 착한 얼굴이었다.
놈과 나 82 / 감방에서 목욕을
방장이 사람다운 사람 얼굴이라는 마음이 들어오면서 불안한 생각이 사라졌다. 방장은 수갑을 차고 있어서 사형수임을 한눈에 알 수 있었는데 세상에서도 보지 못한 평온하고 착한 얼굴이었다.
이름도 없이 번호만 붙은 수인들, 516보다 모두가 위로 보이고 같은 또래가 하나 있었다. 방장이 물었다.
“516, 목욕 언제 했나?”
목욕? 꿈에도 생각 못한 질문이다. 대답을 못하자 방장이 말했다.
“516, 화장실에 가서 몸도 맘도 씻고 나오시게.”
이게 무슨 말씀인가? 목욕을 하라니! 목욕시키고 신고식을?
감방엔 하루 한번 양동이에 물이 반통쯤 들어온다. 그러면 그 물의 반은 먹고 반은 아꼈다가 죄수들이 돌아가며 목욕을 한다. 그런데 먼저 있던 방에서는 욕만 바가지로 먹고 목욕은 꿈도 못 꾸었다.
“516, 목욕하고 나와! 그게 신고식이야, 알겠나?”
“네.” 한 마디하고 뼁끼통 안으로 들어가 양동이물을 찔끔찔끔 발랐다. 물이 주는 그 촉감! 물의 고마움과 방장의 배려에 감사하며 오랜만에 씻고 나왔다. 개운하고 정신이 맑아졌다.
“516, 시원하신가?”
“네, 감사합니다.”
방장이 선반 위에 가지런히 놓인 물품을 가리키며 말했다.
“789, 빵과 우유 돌려. 516을 위하여!”
선반에는 다른 방에서 보지 못하던 물품들이 놀랄 만큼 즐비했다.
놈과 나 83 / 행복한 사형수
먼저 방의 7726 사형수는 면회 오는 사람도 없고 영치금도 넣어주는 사람이 없어서 날마다 신경질을 부리고 욕을 해댔다. 그리고 다른 죄수들이 아무것도 사들이지 않는다고 어떤 놈 영치금 받은 놈이 없느냐? 뭘 좀 사와라 이 새끼들아 하고 발광을 하지만 그런 놈한테는 사탕 하나도 바치고 싶지 않아서 모두가 영치금을 쓰지 않고 있었다. 516이 보기에 다들 그런 눈치였다.
그런데 새 방장은 전혀 다른 말을 했다.
“나는 형님이 넣어주는 영치금이 넉넉하오. 그대들의 영치금은 쓰지 말고 내 영치금을 같이 씁니다. 나는 어차피 죽어야 이 방을 나갈 몸이지만 그대들은 형기가 차면 나간다는 보장이 있지 않소? 살아서 나갈 수 있는 소망이 형기 끝에 기다리고 있단느 것! 그대들은 모두가 행복한 사람들이오. 나 같은 죄인이 아니니 부럽소. 그대들 가족이 넣어준 영치금은 아꼈다가 출옥하는 날 찾아가시오. 같은 죄수끼리 내가 베풀 수 있는 것은 이것뿐이오. 밖에 있는 나의 형님은 내가 배고프지 않게 지내다가 가라고 사랑의 영치금을 아끼지 않고 넣어주어 나는 부자 사형수로 정말 행복한 사형수요. 세상 사람들은 나를 증오하고 나 같은 건 빨리 사라지길 바라지만 우리 형님은 하루라도 더 살아 있기를 빌고 있소. 여기 내가 살아 있는 동안 무엇이든지 필요한 것이 있으면 나한테 부탁하시오. 내가 그대들의 죄를 용서할 힘은 없지만 먹는 건 뭐든지 해결할 수 있소.”
516은 감동하여 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
놈과 나 84 / 엉엉 우는 방장
“방장님 고맙습니다. 방장님 같은 분이 사형수라니 믿을 수가 없습니다. 오늘은 제 영치금으로 방장님이 잡숫고 싶은 것 사들이고 신고식을 하고 싶습니다.”
“고맙소, 516.”
이때 886번이 나섰다.
“516, 그런 소리 마. 우리도 아직 방장님한테 아무 것도 해드리지 못하고 있는데 선수를 치겠다고?”
그러면서 방장한테 말했다.
“방장님, 저도 방장님을 위해 영치금을 쓰고 싶습니다. 그동안은 방장님이 다 해 주셔서 아무것도 못하고 있었는데 새까만 516이 하는 말을 들으니 그냥 넘어갈 수가 없습니다.”
방장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러시오, 886. 그 다음에 516 신고를 받읍시다.”
베푼 사람한테는 보답이 가지만 베푸는 것 없이 욕이나 하고 행패를 부리면 미움밖에 돌아가는 것이 없다는 것을 느끼면서 516은 한 방에 갇힌 죄수들의 얼굴을 살폈다. 모두가 죄인 같지 않은 얼굴들이었다. 그 착한 얼굴로 무슨 죄를 지었기에 들어왔느냐고 묻고 싶었지만 물을 수도 없었다.
516이 들어온 지 보름쯤 지나서였다. 간수가 방장한테 작은 종이쪽지를 넣어주고 갔다. 그 쪽지를 받은 방장이 갑자기 땅을 치며 엉엉 울어댔다.
놈과 나 85 / 사랑의 유언
가끔 다른 방에서 죄수들끼리 치고받고 욕을 하는 소리도 들려왔지만 이 방은 착한 방장의 덕으로 평안했다.
바깥세상보다 더 살맛나는 사람의 세상이었다. 우두머리가 너그러우니 모두가 평안을 누리는 것이다. 그런데 착한 방장이 왜 엉엉 울어대는 것일까? 모두가 긴장하여 방장을 바라볼 뿐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다.
방장님이 왜 저리도 슬프게 우시는가. 안타깝기가 말할 수 없었다. 516이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는 998을 바라보았다. 그도 슬픈 얼굴이었다.
얼마 동안 울던 방장이 쪽지를 내보였다.
“나는 죄인 중에 죄수, 두 번 죽어도 부족한 놈이오. 내가 이 세상에 없었더라면 나 때문에 고생하고 피살당하는 사람들이 없었을 것…….”
종이쪽지에는 생각보다 많은 글씨가 적혀 있었다.
<네가 이 글을 받아보는 날 나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이 글은 내 장사를 치르고 7일이 지난 다음에 너한테 전해 주라고 부탁해 두었다. 네가 사형집행을 받지 않고 살아 있으면 내 마지막 소식을  알게 될 것이다. 너는 본시 심성이 양같이 착한 사람이라는 것을 나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오죽 했으면 너같이 착한 사람이 살인범이 되었을까 생각하면 가슴 아프다. 네 몫으로 영치금 천만 원을 보낸다. 살아 있을 동안 먹고 싶은 것 네 맘껏 먹기 바란다. 그리고…
놈과 나 86 / 하나님한테나 용서를 받아라
나는 부모님 묘아래 너하고 내가 성묘할 때 앉아서 햇볕 받던 잔디밭에 묻어달라고 했다. 네가 죽어서라도 내 곁에 묻힌다면 얼마나 좋겠느냐. 넌 살인범이라 죽으면 지옥 갈 것이라고 한 말이 잊히지 않는다. 네가 지옥까지 가는 것을 보고 싶지 않다. 성경에 어떤 죄인이라도 회개하면 하나님이 구원해 주신다고 하였다. 사람한테는 이미 용서받지 못할 죄인이지만 하나님한테는 용서를 빌 기회가 남았다. 너를 보고 싶지만 그냥 가서 미안하다.> 
이 유서를 한 방의 죄수들이 차례로 읽으며 886도 울었고 369도 울었고 516도 울었다. 감방이 초상집이었다. 우울한 하루가 지나고 저녁 식사가 끝났을 때 방장이 침통한 소리로 말했다.
“나는 인간에게 용서받지 못할 죄인이라 하나님한테도 용서받지 못하고 지옥 갈 것이라고 믿었소. 그래서 우리 방에 있는 성경책을 모조리 묶어서 베개로 삼았고 저렇게 처박아 두었소. 나 때문에 그대들은 성경을 읽고 싶어도 못 읽었을 것이오. 자, 다들 읽고 싶은 사람은 읽어 보시오. 나도 죽는 날까지 성경을 읽어 보겠소.”
방장은 성경을 읽다가 말했다.
“사람은 죽으면 땅에 묻힌다는 것을 눈으로 보아서 알지만 보이지 않는 영혼은 어디로 가는지 알 길이 없소. 몸은 땅에 묻혀 흙으로 돌아가고 영혼은 하늘로 돌아가는 것이 아닌가…….”
방장은 더 겸손해지더니 어느 날 아침 일찍이 목욕을 하고 옷을 정갈하게 갈아입었다.
놈과 나 87 / 다시는 죄수복을 안 입으리라
그 모습을 보면서 516은 사람은 죽기 전에 육감이 죽음을 알리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방장이 정갈하게 차리고 엄숙하고 침통한 얼굴로 죄수들을 둘러보고 있을 때 간수가 불렀다.
“1832번 면회!”
면회! 그 소리가 무슨 소린가. 516은 저승사자가 부르는 소리로 들렸다. 불길한 생각을 하던 한 방의 죄수들이 모두 숙연해졌다.
방장이 자리에서 일어나 납덩이같은 얼굴로 인사를 했다.
“모두들 세상에 나가서 행복하게 사시오.”
그는 등을 돌리고 눈물을 훔쳤다. 그 인사에 아무도 대답을 못했다. 모두가 울먹해서 눈물을 삼키는 것이었다. 철창문이 긴 쇳소리를 끌며 닫히고 남은 죄수들 위로 침묵이 무겁게 덮였다.
온전 내내 감방은 무덤 속처럼 고요하고 깊은 슬픔에 잠겼다. 방장이 마지막 걸어간 발소리는 복도 끝에서 영원으로 이어졌다.
남은 죄수 가운데 고참이 침묵을 깼다.
“참 좋은 분이 가셨습니다. 내가 대통령이라면 특사로 풀어드리고 싶지만……. 세상은 죄에 잔인할 만큼 엄격함을 새삼 느낍니다.”
나이가 가장 많은 988이 한 마디 했다.
“여기 죄 없이 온 사람이 누구겠소. 형기를 채우고 나가면 다시는 죄짓지 말고 삽시다.”
516은 사형장으로 가는 사형수를 보면서 이렇게 다짐했다.
‘내가 다시는 죄수복을 입지 않으리라.’
놈과 나 88 / 하늘아 내 하늘아
놈은 수인 번호 516을 떼어버리고 자유 몸이 되었다. 그리고 출옥하던 날의 감회를 이렇게 말했다.
“창문 새로 내다보이는 하늘을 날아가는 새를 보았을 때 자유가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른다. 그런 그 하늘이 출옥하는 문 앞에서 나를 품었다. 나는 하늘을 안고 소리치고 싶었다. 넓고 높은 하늘아 너는 내 것이고 나는 네 것이다. 고마운 자유 하늘아 고맙다!”
놈은 사랑스럽고 고마운 아내가 들고 나온 두부를 먹고 집으로 돌아왔다. 아내는 혼자 가게를 잘 하고 있었다. 손님들도 여전했다. 단골로 친숙한 손님이 물었다.
“주인장, 어디를 갔다 오셨소? 한 동안 안 보여서 궁금했는데.”
“인생 수행을 하고 왔습니다.”
“그래요? 잘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런가 전보다 얼굴이 수척해진 것도 같소.”
“수행을 하자면 잘 먹고 잘 자서는 안 됩니다. 굶어도 보고 못 볼 것도 보고 그러면서 마음을 닦는 것이지요.”
“하하하, 주인장은 장사만 잘하는 줄 알았더니 말씀도 잘하시오.”
“부끄럽습니다.”
그 날 그 손님한테는 술도 안주도 푸짐하게 거저 대접했다고 했다.
놈이 나왔다는 걸 내가 샌님한테 알렸고 샌님도 반가워하면서 하루는 셋이 한 자리에 모여 구치소의 고행담을 들었다.
놈과 나 89 / 엽총과 오발
착하고 성실한 놈의 아내는 우리를 한 형제라도 되는 것처럼 좋아하고 대접을 잘했다. 나는 궁금한 것을 못 참고 놈한테 물었다.
“마지막 사형장으로 가던 그 죄수 말이다. 그렇게 착한 사람이 무슨 죄를 지었기에 사형수가 된 것이냐?”
놈이 설명했다.
“그 사람이 비록 사형은 당했지만 그 형님과 그는 매우 의좋은 형제였던 것 같다. 형이 영치금을 넉넉히 넣어주어 그 사람은 감옥에 갇혀서도 넉넉한 마음으로 베풀고 살 수 있었다.”
“그런 건 알고……, 왜 무슨 죄를 지었다는 거냐?”
“그 사람은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고 형이 돈을 잘 버는 사람이라 집에 엽총을 두고 살았단다. 그런데 어느 날 동생이 형의 엽총을 들고 나가 산속에서 사냥을 하다가 멀리 보이는 새까만 것이 멧돼지로 보여서 조준사격을 했단다. 멧돼지인 줄 알고 가 보니 한 동네 어른이 총에 맞아 죽었더란다.”
샌님이 한 마디 했다.
“산에 갈 때는 흰색 옷이나 노란색 옷을 입으라고 하는 소리가 그냥 한 소리가 아니지…….”
놈이 말을 이었다.
“그 사람은 죽은 노인을 보고 놀라 도망을 쳤단다. 그러나 같은 마을 사람이 보고 그를 고발하여 도망쳤다가 사형수가 되었고 형은 자기 실수라고 생각하여 동생한테 그렇게 잘했다고 했다.”
놈과 나 90 / 놈도 나도 나이를 먹다 보니
내가 엉뚱한 말을 했다.
“아무리 의좋은 형제도 죄까지 대신 질 수는 없구나.”
놈이 말했다.
“같은 죄수라도 어떤 환경에서 자랐느냐가 중요한 것 같다. 날마다 욕을 해대던 사형수는 가난하게 아무렇게나 살다가 제 성미를 못 이기고 일가족 여섯 명을 죽이고 잡혀온 악질 범인이었다. 그런 인간과 한 감방에서 한 달이 넘도록 견디기는 정말 힘들었다.”
놈은 더 이상 그런 이야기는 하기 싫은 듯 다른 말을 했다.
“어느새 나도 너도 사십대가 되어 가고 있다. 돌아보면 모두가 고생길을 걸어온 가시밭길이었다. 너희들은 나하고 다르게 살았으니 나 같은 가시밭길을 걷지는 않았겠지.”
놈의 말을 듣고 내가 걸어온 길을 생각해 보았다. 놈보다는 고생을 덜 하고 자랐지만 내가 사회인이 되어 살면서 겪어야 했던 비밀은 놈도 샌님도 모른다. 나는 나대로 괴롭고 어려운 고비를 넘기면서 고생을 했다. 그래서 이런 이야기 한 토막을 말해 주고 싶었다.
“놈아, 언젠가 내가 너의 가게에서 외상으로 정종 한 병과 아나고회 두 접시를 먹은 기억 나냐?”
“나지, 외상이라고는 모르던 네가 손님을 데리고 와서 갑자기 외상을 먹기에 너도 주머니가 마르는 날이 있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랬냐? 외상 먹던 날 이야기 들어 볼래?”
“들어봐 주지.”
놈과 나 91 / 맨입으로 되나
좀 지루할 테지만 나는 잊을 수 없는 술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이 이야기는 내가 경험한 것을 적어 드림)
1970대 초 우리 출판사에서 <더 높은 언덕의 애화>라는 책을 출판했다. 그 책을 신문사에서 시행하는 이 주일의 베스트셀러 순위에 끼워 넣으려고 평소에 알고 지내는 기사담당한테 부탁을 했다.
“이 책을 베스트 5위라도 올려주시오.”
“맨입으로?”
“한 턱 내겠소.”
“좋소. 당장 오늘밤 한 턱 내시오.”
“그럽시다.”
이렇게 하여 약속을 하고 다방에서 차를 한 잔씩 하고 있을 때 K신문 s기자가 왔다. 그와 인사를 나누고 한턱 내기로 하고 사무실로 들어가 영업사원한테 수금한 돈을 달라고 하니 현금이 아니라 어음을 받아왔다는 것.
당장에 현금이 만원(지금으로는 10만원이 좀 넘는 액수)은 있어야 하는데 내가 가지고 있는 돈은 고작 천원.
그렇다고 손님을 모셔놓고 취소할 수도 없고 하는 수 없이 놈이 하는 회집으로 갔다. 당시는 회 한 접시가 3천원, 정종 한 병이 4천원. 회 2접시와 정종 한 병을 먹고 나서 하는 말.
“야, 요걸로 때울 거냐? 2차 가자.”
놈과 나 92 / 그래도 웃어야 하겠지
나는 놈한테 외상 만원을 달아놓고 기자 두 사람과 택시를 타고 그가 가자는 곳으로 갔다. 명동에 있는 대원장이라는 큰 맥주홀이었다. 택시비를 내고 나니 7백 원이 남았다. 맥주홀은 으리으리하고 컸다. 매우 비싼 집 같았다.
1층은 손님이 꽉 차서 2층 칸막이 특실로 안내를 받았다.
‘오! 이런 집은 술값이 얼마나 비쌀까?’
나는 그만 질려버렸다. 내가 한턱낸다고 했지만 이게 아닌데 하는 생각에 눈앞이 캄캄했다. 특실. 미모의 아가씨 셋이 웃음을 흘리며 들어와 우리 옆에 하나씩 끼어 앉았다.
아가씨들이 얼마나 예쁜 짓을 하면서 살살거리는지 남자들 혼이 빠질 정도였다. 내 옆에는 셋 가운데 나이가 가장 위로 보이는 아가씨가 앉았다. 눈웃음을 치며 나한테 찰싹 붙었지만 나는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다만 내가 지옥으로 왔나 보다 하는 생각밖에.
이어 기본으로 맥주 10병과 마른안주와 수박이 나왔다. 2월이라 수박이 나오지 않는 계절인데 이게 뭔가? 풍성한 한상이 요란했다.
나는 수박이 무서운 괴물처럼 보이고 이게 얼마치나 될까 계산하기에 바빳다. 아무래도 팔천 원은 넘을 것 같았다. 내가 가진 건 7백 원뿐인데!
이 술값과 안주 값과 아가씨들 팁은?
술을 별로 안 좋아하는 나는 맥주가 독약보다 썼다. 하지만 겉으로는 껄껄거리며 속은 대책 없는 낭떠러지로 떨어지고 있었다.
놈과 나 93 / 개망신을 달할 바엔
속 타는 나를 모르는 앞의 두 사람은 아가씨들을 끼고 시시덕거리며 술을 마셔댔다. 나는 옆에 앉아 아양 떠는 아가씨 손도 만지지 못한 채 고민에 빠졌다.
‘이 술값이 얼마며 아가씨들 팁도 천 원씩 3천 원은 줘야 할 텐데 주머니에는 팁도 안 되는 7백원! 이를 어쩐다? 악몽이 아닌가. 꿈이거든 깨자, 깨자,’
그러나 꿈은 아니었다. 적어도 최소한 9천 원은 있어야 하는데 7백 원 가지고 무슨 수가 있을까? 나는 개망신을 당하게 된 것이다. 술집 종업원은 깡패가 많다. 나는 주인한테 망신을 당하고 깡패들 손에 쥐어터질 신세가 되어 있었다.
이런 생각으로 꽁꽁 얼어 있는데 갑자기 이런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좋다, 어차피 돈이 없어 개망신을 당할 바에는 멋지게 실컷 마시고 놀다가 당하자. 술도 신나게 마시고 맞아도 실컷 맞아보는 거다. 먹자, 마시자, 신나게, 신나게. 그렇게 먹고 당하면 억울할 것도 없다. 기가 죽은 채 아무것도 못 먹고 당해서는 안 된다. 마시자, 마시자!’
이렇게 마음이 굳어지자 술잔을 높이 들고 브라보 했다. 앞에 두 사람은 더 신이 나서 브라보 브라보 외치며 술을 펑펑 마셔댔다. 나도 질세라 하하 웃으며 컵을 들고 말했다.
놈과 나 94 / 피하지 말고 과감히 도전을
“술이란 참 신기한 요물입니다.”
이 말에 덤으로 따라온 K신문 기자가 꼬리를 달았다.
“그렇지요, 술이란 참 신기한 물입니다. 술이 술술 목으로 넘어가면 입에서는 비밀이 술술 새는 것이 술이 아닙니까? 하하하.”
“맞습니다.”
이렇게 대답한 나는 마음을 다졌다.
‘이왕 당할 바엔 멋지게 당하는 거다. 빌빌거리고 주눅이 들어 찔끔거리다가는 더 못난 인간으로 망신을 당한다. 개망신을 당하지 말고 황소 망신을 당하자. 힘찬 소처럼 망신을 향해 힘차게 통쾌하게 웃고 떠들며 마시자!’
어려운 일을 당할 때는 눈앞의 어려움만 보고 괴로워할 것이 아니다. 피할 수 없는 상화일 때 최종적으로 돌아올 것이 무엇이냐 그 상황에 부딪칠 각오를 먼저 하고 과감히 가슴을 펼 때 길은 열리는 것이다. 이런 각오를 한 나는 마음이 편해지고 기분이 좋아졌다. 그래서 이런 말을 했다.  
“맞아요, 세상에서 술처럼 신기한 요물은 없습니다. 술이란 인생이 살아가는 데 받침목 역할을 합니다. 인생은 수레를 끌고 비탈길을 올라가는 형태라 정상에 오르기까지는 온갖 힘을 다해 끌어야 합니다. 그런데 두 사람이 같은 짐을 싣고 언덕길을 올라가는데 한 사람은 좀 무겁지만 받침목을 가지고 떠나고 다른 사람은 그 무거운 것을 왜 가지고 가느냐고 안 가지 출발합니다. 여기서 문제가…….” 
놈과 나 95 / 꼬부라진 감정을 푸는 명약 
나는 말을 이었다.
“비탈진 언덕길을 오르다가 받침목을 가지고 가는 사람은 그것으로 받쳐놓고 잠시 쉬었다가 오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무겁다고 받침목을 안 가지고 떠난 사람은 쉴 수가 없어 고생만 실컷 하다가 끝내 정상에 오르지 못하고 미끄러져 제자리로 내려오고 맙니다. 그렇듯 인생은 술이라는 액체를 통하여 감정도 풀고 사이 나쁜 친구끼리도 한잔 나누면서 화해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합니다. 그러나 술을 완전히 거부하는 사람은 한번 감정이 꼬부라지면 펴지 못하고 감정에 빠져 삐딱하게 살다가 갑니다. 안 그렇습니까, 여러분?”
이 말에 아가씨들이 호응했고 초면의 K기자가 화답했다.
“아주 멋진 말씀이오. 내가 이 사람 저 사람과 날마다 마셔대지만 이렇게 멋진 애주예찬을 들어보기는 처음이오. 자, 한잔 브라보!”
술판은 후끈한 화기가 돌았다. 그런 분위기 속에 나는 다음 말을 보탰다.
“이왕 술 이야기를 했으니 마저 해야겠습니다. 술이란 대단한 힘을 발휘합니다. 들어보시겠습니까?”
옆에 앉은 아가씨가 기대에 찬 눈빛을 보내며 재촉했다.
“선생님, 듣고 싶어요. 지금까지 손님들한테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애주 예찬, 감동이에요.”
나는 아가씨한테 눈길을 주고 말을 이었다.
“고마워요. 그럼 딱 한 마디만 더 하겠습니다.”
놈과 나 96 / 오! 마이 갓!
나는 계속했다.
“술이 어떤 힘을 발휘하는가 하면, 노소 연령을 초월합니다. 노인과 젊은이가 술을 마시게 되면 노인은 노인대로 젊은이는 젊은이대로 거리를 두지만 똑같이 술이 취하여 수평이 되면 나이 벽이 허물어지고 늙은이는 젊어지고 젊은이는 늙은이가 되어 서로 반말을 해도 허허거릴 정도로 어울립니다. 세상에 누가 그렇게 연령의 저울추를 수평으로 만들 수 있습니까. 그리고 친구끼리도 대학 나온 친구와 초등학교밖에 못 나온 친구 사이라도 처음에는 교만과 비굴이 가려 어색하게 굴다가도 술을 마셔서 술기운이 수평을 이루면 대학 졸업자는 초등학생이 되고 초등학생 친구는 대학 졸업생이 되어 똑같은 수평에서 시시덕거리며 어울립니다. 또 이런…….”
이때 초면의 K기자가 말을 가로막았다.
“스톱! 스톱! 내가 취재를 다니며 별별 사람 다 만나보았지만 당신 같은 사람 처음 만났소! 아주 멋져! 오늘 2차 술값은 내가 내겠소! 선생, 3차 한 번 더 갑시다!”
그는 지갑에서 국무총리가 그 날 기자들한테 처음 나온 5천 원짜리 화폐를 기념으로 몇 장씩 주었다면서 두 장을 꺼내어 옆 자리 아가씨한테 넘기며 말했다.
“우리 테이블 빨리 계산하고 오소.”
이게 무슨 벼락같은 구원의 소린가.
“오! 마이 갓!”
놈과 나 97 / 팁은 얼마나 주실 거예요?
그 순간 나는 큰 바위에 눌렸다가 바위를 누가 번쩍 들어주어 벌떡 일어나는 개구리 같은 해방감을 맛보았다.
99% 절망에서 100%의 해방이 주는 기쁨의 스파이크!
기적은 순간에 일어난다. 그러나 기적은 반드시 이유가 있을 때 일어난다. 만약 내가 주저주저하고 끝까지 고민만 했더라면 나는 개망신을 당했을 것이다. 과감한 심리적 혁신이 나를 구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 날 술값은 9800원이었다. 계산이 끝나자 3차 가자고 두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들은 아래층으로 내려가고 아가씨 셋이 나를 둘러쌌다. 그리고 아양을 떨면서 웃는 얼굴로 물었다.
“우리 팁은 얼마나 주실 거예요?”
‘이크! 팁?’
나는 솔직히 말했다.
“내 주머니에는 7백 원밖에 없어요. 우리가 3차를 가자면 택시를 타야 하니 4백원은 있어야 하고. 미안하지만 백 원씩만 드리면 안 될까요?”
한 아가씨가 다부지게 거부했다.
“백원이 뭐예요, 천원은 주셔야지요.”
“미안해요. 내 사정이 그렇습니다.”
이때 아래층에서 빨리 내려오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자 내 곁에 앉았던 아가씨가 말했다.
놈과 나 98 / 예쁜 여자의 예쁜 말
인상이 좋은 내 짝 여자가 예쁜 말을 했다.
“손님 사정이 그러시다는데 이해해 드리자. 나도 너희도 이 손님의 술 예찬은 어디서든 처음 듣지 않았니? 난 안 받아도 좋아.”
그러면서 내가 내민 3백 원을 받아들면서 말했다.
“다음에 오시면 불러주세요. 제가 알아서 할게요. 안녕히 가세요.”
고마운 아가씨 이름도 성도 모른 채 나는 마지막 걱정까지 다 털어버리고 1층으로 내려왔다. 1층에 내가 웃어른으로 모시는 H기자 선생이 기다렸다. 밖으로 나와 보니 K기자는 골목 끝으로 달려가며 소리쳤다.
“3차는 다음에 합시다. 나 취재하러 갈 시간이야! 안녕!”
그가 그렇게 떠나자 H선생이 비실비실 비틀비틀하면서 말했다.
“3차는 어디로 갈 거냐?”
“일단 택시를 타고 가 보면 압니다.”
“좋아, 3차는 끝내주는 곳으로 가야 한다. 알았지?”
“예,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곳으로 갑니다.”
“하하하, 선생, 오늘 참 재미있다.”
“감사합니다. 즐거우셨습니까?”
“그건 3차까지 가서 대답해 주우마아.”
H선생은 이미 고주망태가 되어 혀 꼬부라진 소리에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3차를 찾았다. 명동에서 택시를 탔다. H선생은 차에 오르자 머리를 내 어깨에 얹고 주절거렸다.
놈과 나 99 / 마누라한테 맞아 죽어도
“3차 가는 거다. 3차는 끝내주는 곳이지이.”
“그렇습니다. 정말 끝내주는 곳으로 갑니다.”
“좋아, 좋아 그래야지. 암 그래야 거기 턱걸이라도 시켜주지.”
여기서 말하는 턱걸이는 금주 베스5를 말한다. 나는 운전사한에 우측으로 좌측으로 직진 죄회전 몰아 H선생집이 있는 동네를 향해 달렸다. 꾸벅거리고 취해 중얼중얼하던 H선생, 차창밖을 내다보다가 물었다.
“어어, 길이 내가 아는 길 같다. 어디로가는 거냐 자샤!”
“세상에서 가장 좋은 곳으로 갑니다.”
“어어, 이 골목길이 우리 동네 같은데?”
“기다리세요. 멋진 아가씨가 기다리는 곳으로 갑니다.”
H선생, 정신이 드는 듯,
“야, 짜샤, 어디로 가는 거냐구우?”
“다 왔습니다. 내리시지요.”
밖을 보다가 H선생 한 마디,
“이런 사기꾼. 너 우리집까지 온 거 아냐?”
“세상에 우리집보다 좋은 곳이 어디 있습니까?”
“이런 사기꾼, 나 이렇게 들어가면 마누라한테 맞아죽어.”
“맞아죽어도 마누라한테 맞아죽는 사람이 가장 행복한 겁니다요.”
“이런 사기꾼. 너 오늘 다 무효야. 턱걸이고 목걸이고 없어!”
H선생은 대문 안으로 들어가고 택시는 4백 원을 받고 떠났다.

놈과 나 100 / 화려한 반응
그 주일 토요일 신문에는 우리 책이 베스트 5위 리스트에 올랐고 그 힘으로 종로서적, 서울서적, 양우당, 광화문서적(70년대의 이 유명한 서점들은 모두 사라지고 지금은 교보가 있을 뿐임) 등 종로통의 큰 서점 진열장에는 우리 책이 톱 자리에 진열되었고 책도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는 5대 일간지와 지방신문, 기독교 신문 등 모든 매체에 신간안내와 신간 평을 내게 만들었다. 그 덕에 맨 먼저 동양텔레비전에서 작가 인터뷰 청이 들어왔다. 작가한테 연락하여 방송 계획을 잡고 책 발행 보름 만에 작가가 아침 8시 텔레비전 방송에서 인터뷰 방송을 했다.
그 방송을 본 영화사에서 작품을 시나리오로 해 주면 영화로 만들겠다는 청이 오고, 이어서 문화방송국(지금은 없어짐)에서는 온전 7시 소설 낭송시간을 만들어 연속낭독을 하겠다고 허락해 달라는 요청이 왔다.
이어서 두 번째 주일 베스트 리스트에는 5위에서 4위로 랭크, 서점 반응도 좋아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또 다음 주 토요일에는 베스트 3위로 올랐다.
이 모든 건 내 작전에 의해 일어나는 현상이었는데 해가 뜨는 동녘에 구름이 끼듯 엉뚱한 일이 벌어졌다. 아침에 출근하자 작가 여사님이 들이닥쳐 시퍼런 얼굴로 말했다.
놈과 나 101 /
“심씨 나 좀 봅시다.”




놈과 나 70 / 






 
 


 
SGDT
놈과 나 34 /
나는 정말 먹기 싫었다. 그렇지만 놈을 위해 한번 먹어 보리라 생각하고 영감이 초고추장에 찍어 주는 대로 한 점을 눈 딱 감고 먹어보았다. 씹다 보니 생각보다 고소하고 비린내도 나지 않았다. 
“어떻소? 비리지도 않고 맛있지 않소?”
나는 솔직히 말했다.
“네. 정말 아무 냄새도 나지 않고 고소합니다.”
놈도 먹어보고 같은 말을 했다.
“보기보다 맛있다. 이거 다 먹자.”
영감이 웃으며 말했다.
“이 비싼 걸 그냥 다 먹으면 장사는 무엇으로 하시려나?”
내가 물었다.
“이런 거 한 접시에 얼마나 가나요?”
“6천원은 받아야지요.”
육천 원? 그렇게 비싸다고. 쌀이 한 가마니에 삼만 원인데 흔해빠진 장어 한 마리가 6천원? 이거 다섯 마리면 쌀 할 가마니가 아닌가. 나는 촌놈이라 무엇이든지 값을 따질 때는 쌀 한 가마니를 기준으로 셈하는 버릇이 있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고린도전서 13:4‭-‬5


사탕 아저씨

아저씨 아저씨 빨간 모자 아저씨
오늘은 무슨 선물 주실 거예요
오른쪽 주머니엔 새빨간 사탕
반대쪽 주머니엔 새파란 사탕
웃는 아이 만나면 빨간 사탕 주시고
우는 아이 만나면 파란 사탕 준대요
아저씨 아저씨 뾰죽 모자 아저씨
말 잘 듣는 내 동생 주고 싶어요
빨간 사탕 한 주먹 꺼내 주셔요
학교가 없는 나라

겨울눈이 아직도 가지 끝에 얹혔나
봄보다 앞질러 등 밝힌  목련

개나리는 꽃대 들고
산새 노래 지휘하고

핀셋으로 꼭 집으면
울 것 같은 냉이 꽃

살랑살랑 고개 젓는 노랑 민들레
아기 벌 날개 소리 붕붕붕 풍금 소리

애들아 학교 가자
냉이가 살래살래 민들레도 살래살래

개미가 갸웃갸웃
학교가 뭐예요?
푸른 오월

날아라 종달새야 푸른 하늘을
새들아 모여라 숲이 부른다
나무숲에 집을 짓고 가지마다 매달려
운동회를 해보자
힘겨루기 해보자
오월은 푸른 하늘 거칠 것이 없어라
구름보다 높이 올라 노래 부르자
마을마다 돌아가며 예쁜 꽃등 달아 놓자


* 경기 안성 출생
* 1975년 창작동화 <어린공주> 발표, 2003년 「아동문학세상」 동화로 등단
* 한국크리스천문학가협회 상임이사, 한국문인협회홍보위원, 한국아동문학회운영위원, 아동운학가
* 지은 동화 ; <문어선생님>, <대왕 람세스와 집시 >, <헌책방 할아버지>외 60권,
* 한국크리스천문학상, 국방부장관상, 아름다운 글 문학상, 글사랑문학상, 한국기독교출판문화상
* 현재 도서출판 한글 대표
simsazan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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