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게시판/소설

놈과 나

웃는곰 2018. 10. 2. 10:59

놈과 나 1 / 이상한 놈

 

놈은 황송아지 같은 성격이었다.

고집이 뿔 같고 무엇이든

제 맘에 안 들면

절대 용남하지 않고 들이받는

그래서 놈은 내 눈에 거슬렸다.

 

놈과 나는

스물네 살 군복을 입고서였다.

어디서 무엇을 하다 왔는지

놈도 나를 모르지만 나도 놈을 알 수 없었다.

다만 성격이 전혀 다른

불만을 안겨주는 그런 놈이라는 것밖에.

 

놈과 한 내무반에서

똑같은 모포를 덮고 나란히 자자니

저도 불만 나도 불만

부부가 이런 사이였다면 당장 이혼했으리라

 

엄한 군율 앞에 무슨 일이었는지 하다가

놈과 나는 의견이 달라 부딪쳤다.

놈과 나 2 / 한판 뜨자!

내가 동쪽으로 가자하면

놈은 서쪽으로 고집하고

내가 사이좋게 하자 하면

그 따위 소리 치우라고 고집

 

한두 번이 아니고

한 달 사이에 열 번도 더 부딪쳤다

내가 고개를 바짝 세우고

넌 뭘 하던 놈인데 매사가 이러냐?

네 놈은 뭘 하다 온 놈이냐

칼날 같은 대꾸.

 

내가 정색을 하고 전쟁선포

! 한판 뜨자!

놈도 눈을 부라리며

좋다! 한판 떠 주마

 

일과 끝나고 보자!

좋다, 어디서 뜰래?

헬리콥터 비행장에서!

좋다 거기서 보자!

놈과 나 3 / 좋다 덤벼라!

그 날 놈과 나는 단단히 차리고

H자가 그려 있는 헬리콥터 비행장으로 갔다.

가운데는 모래 바닥 둘레는 둥그런 잔디밭

한판 붙기에 좋은 결투장이었다

 

놈과 나는 마주서서 눈에 불을 켰다.

! 뜨자!

좋다! 덤벼라!

순식간에 둘이 엉겨 붙어 주먹질을 시작

발로 걷어차고 밀고

이단 옆차기로 들어오면 돌려차기로 막고

머리를 박고 멱살을 잡고 뒹굴었다

 

놈의 입술이 터져 피가 났다.

나도 입술이 터져 피가 났다

그래도 놈과 나는 치열하게 치고받았다.

모래바닥이 뒤집혀 잔디 위에 덮이고

얼마나 걸렸는지 주먹질을 하다가

지쳤다. 내가 먼저 휴전 제의.

! 쉬었다 뜨자!

놈과 나 4 / 넌 누구냐?

놈은 나를 놈이라고 부르고

나도 그 이름 대신 놈이라 불렀다

그때 부르던 네놈 내 놈은 늙지도 않고 50.

 

놈과 나는 잔디밭에 배를 쭉 깔고

마주 엎드려 바라보았다.

내가 손수건으로 놈의 입술을 닦아주었다

놈도 내 입술을 닦아주며 말했다

아프지?

?

 

놈의 눈에 사납던 빛이 걷히고 착한 빛이 돌았다.

나는 속으로 놈이 그렇게 나쁜 인간은 아닌 것 같다고 생각했다.

놈이 말했다.

때려서 미안하다.

나도 대답했다.

나만 맞았냐? 너도 많이 아프지?

 

우리가 머리를 맞대고 누운 머리 위로 아카시아 그늘이 내리고 머리 위로 구름이 흘러가며 내려다보고 있었다.

넌 누구냐? 똑같이 이구동성으로 물었다.

놈과 나 5 / 아픈 만큼 사랑하자

놈이 먼저 입을 열었다.

미안하다. 나는 자란 환경이 너희들과 좀 다르다. 6.25때 부모님을 잃고 고아원에서 자랐다. 거기서 학교도 다니고 나 같은 애들과 부딪치며 살다 보니 좀 날카롭고 사나운 데가 있다.

 

고아원서 살았다고?

나는 놀라서 일어나 무릎을 꿇고 사과했다.

정말 미안하다. 그런 줄도 모르고 너를 때리다니!

네놈이 나보다 더 많이 맞았다. 너무 때려서 미안하다.

아니야, 너 같은 친구를 때렸다는 게 마음 아프다.

 

넌 싸움 못 해 봤지?

?

주먹질이 서툴고 네가 때리는 건 간지럽더라. 하하하.

뭐라고?

나는 싸우면서 자랐기 때문에 네놈하고는 달라.

놈이 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했다.

우리 이제부터 좋은 친구로 지내자!

 

나는 놈의 손을 꼭 쥐고 감격해서 대답했다

그래, 우리 아픈 만큼 사랑하자.

놈과 나 6 / 코티 분 때문에

주먹질로 친해진 우리는 서로 형제처럼 지냈다.

나는 피엑스에서 물건을 팔고 놈은 훈련을 하면서 경비를 섰다.

피엑스에서는 무엇이든 먹을 것을 줄 수 있어서 주려고 해도 놈은 얼마나 강직하고 사리가 분명한지 무엇으로도 대접을 할 수가 없었다. 술이라도 한잔 주려 해도 거절.

어쩌면 그 점이 내 마음에 더 들었는지도 모른다.

 

어느 날 밤 10시였다. 부대에서 주먹이 세기로 유명한 중사가 술이 잔뜩 취해 피엑스로 들어와 프랑스제 코티 분을 내놓으라는 것이었다. 한 달에 10개가 나오지만 나오는 날로 팔려나가는 것이 그 화장품이었다. 피엑스에서는 9백 원인데 밖에서는 2400원이라고 했다. 그러기 때문에 대단한 인기 상품이었고 그것은 아무한테나 돌아가지도 않았다. 다 팔려서 없는 물건을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없어서 못 준다고 하자 중사는 화를 버럭 내며 실내의 탁자와 의자를 집어던지고 중앙의 난로에다 술통을 굴려 넘어뜨렸다. 순간 천장의 연통이 왈그랑쟁강 소리를 내며 떨어져 굴렀다. 중사는 더 열이 나서 나를 공격하려고 주먹을 쥐고 덤벼들었다.

바로 그 순간 친구 놈이 야간 경비를 나가다가 들어오며 물었다.

놈아, 왜 아직도 불을 안 끄고 있냐? 바쁘냐?

그 소리에 중사가 돌아서서 넌 뭐야 이 새끼야!’하고 소리치며 주먹을 휘두르며 놈한테 달려들었다.

놈과 나 7 / 나를 구해 준 고마운 놈

주먹왕 중사가 달려들자 놈은 노루보다 빠르게 달아났다. 그 뒤를 술에 잔뜩 취한 중사가 지그재그로 따라 달려 나갔다.

이크! 이때다. 살았다!

나는 잽싸게 실내 불을 끄고 문을 밖에서 잠그고 달아나 외등이 비치는 언덕에 숨어서 내려다보았다. 중사는 놈을 잡지 못하고 지그재그로 돌아와 피엑스 문을 흔들어대며 소리쳤다.

, 병장! 문 열어! 안 열면 넌 죽었어! , 열어 열어!

미친개처럼 버럭버럭 외치다가 비틀거리며 문 앞에다 오줌을 찍찍 싸대더니 별수 없다는 듯 지그재그 걸음으로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다음날 나는 나를 구해준 놈을 만나 고맙다고 말했다.

중사가 행패를 부려서 난감했었다. 누군가가 와서 도와주었으면 하고 바라고 있을 때 바로 네놈이 나타나서 나를 구해준 거다.

달아난 네놈이 중사한테 잡히면 어떡하나 걱정을 했는데 중사가 비틀거리며 혼자 돌아오는 것을 보고 마음을 놓았다. 고마웠다.

이렇게 놈의 덕으로 위기를 모면했고.

 

그리고 얼마가 지나서였다. 놈이 보자고 하여 귀를 기울였더니 하는 말.

놈과 나 8 / 맨발의 소년

사격장에 보초를 서는데 초등학교 4학년 아이가 맨발로 호미와 깡통을 들고 땅에 묻힌 실탄을 캐고 있었다. 그래서 아이한테 넌 왜 맨발이냐고 물었더니 아이 대답이 이랬다.

엄마는 나가서 없고요 아버지는 병이 나서 집에 누워서 나오지도 못해요. 그래서 내가 밥도 해야 하고 돈이 없어서 운동화도 살 수가 없어서 맨발로 살아요.

이런 대답을 듣고 아이가 불쌍해서 너한테 찾아왔다. 방법이 없을까?

그리고 놈이 설명했다.

2400원이면 운동화를 살 수 있다는데, 피엑스에서 맘만 먹으면 그런 것 하나쯤 사 줄 수 있지 않을까?

2400원이면 당시 병장 월급이 9백 원, 3개월간 안 쓰고 모아야 하는 액수였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말했다.

피엑스 돈은 국가 재산이다. 그렇게 사용할 수는 없다. 내게 의견이 하나 있다. 부대 주변에는 사방에 빈병들이 널렸다. 그것을 주어모아서 팔자. 그렇게 하여 아이 신발을 우리 힘으로 사주자.

 

놈은 고개를 갸웃거리다 대답했다.

빈병이 얼마나 간다고 어느 천 년에 2400원을 만드냐?

양주병은 하나에 5, 맥주병은 3, 사이다 소주병은 1원씩이다 많이만 모으면 그런 돈은 만들 수 있다. 어떠냐?

놈과 나 9 / 빈병 모으기

좋다, 네 의견대로 해 보자.

우리는 뜻이 통했다. 그날부터 눈에 띄는 대로 빈병을 모아들이기 시작했다. 몇 달 동안 모은 병이 천 개가 넘었다. 비싼 양주병과 맥주병이 많아서 5400원이 모였다.

놈은 날마다 사격장에 나가서 그 아이를 기다렸다. 그리고 저녁 이면 나한테 와서 말했다.

아이가 오늘도 안 왔다. 어떻게 되었을까? 무슨 일이라도 있나?

나는 더 기다려 봐. 언젠가는 나타나겠지 하면서 많이 궁금했다.

놈은 아이가 안 오니까 더 불쌍한 생각이 든다.

그런 아이는 고아원이라도 가면 좋을 텐데……. 하고 나는 막연히 고아원으로 어쩌고 중얼거렸다.

그러자 놈은 고아원에서 살아 보았기 때문에 고아원에서 사는 어려움도 만만치 않다는 말을 몇 마디 했다. 그러나 무슨 말을 했는지 지금은 기억에 없다.

다만 나는 놈이 동병상련의 아픔을 느끼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어쩌면 그 아이의 고통이 바로 놈이 겪었을 과거의 아픔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그 아이 운동화라도 사주고 싶었지 않았을까.

여름이 가고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와도 아이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래도 놈은 사격장 경비를 자청해 나가서 아이를 기다렸다.

다시 봄이 왔고 돈은 주인을 잃고 쓸 곳을 찾아야 했다. 중대장이 나한테 그 돈을 어떻게 써야 좋겠느냐고 물었다.

놈과 나 10 / 너나 잘 가라

나는 부대에서 좋은 일에 써 달라고 했고 중대에서는 훈련받다 다쳐서 수도육군병원에 입원한 전우들의 위로금으로 사용되었다.

이런 저런 추억을 남기고 복무기간을 마치고 놈과 나는 제대복을 입고 배출대에서 마지막 3일을 함께 보내고 귀향 날을 맞았다.

나는 고향으로 갈 생각에 들뜬 채 놈한테 물었다.

이렇게 헤어지면 우리 언제 또 만날까?

놈은 약간 어두운 얼굴로 대답했다.

너나 잘 가라. 나는 나가지 못한다.

?

귀향지가 없어서 내보낼 수가 없단다.

귀향지? 집으로 가면 되잖아.

나 집 없다. 고아원에서 자라서 입대를 했는데 그 고아원이 없어져서 갈 곳이 없다.

나는 순간 가슴이 막혔다. 무슨 말을 해야 할는지도 생각나지 않았다. 지금 같았으면 우리 집으로 가자고 하면 될 일인데 스무 살이 넘었어도 그런 머리는 못 쓸 만큼 아둔했다.

놈은 나와 악수를 하고 부대 높은 언덕에 올라 나를 향해 손을 저었고 나는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제대병 대열에서 놈을 돌아보며 무거운 발길을 돌렸다. 언제 어디서 다시 만나자는 기약도 없이 놈과 나는 그렇게 이별을 하고 말았다.

놈이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궁금증은 내 마음을 떠나지 않았다.

놈과 나 11 / 찾았다

놈과 헤어진 지 7년이 지난 어느 날 우연히 한 부대에서 근무하고 절친하게 지내던 샌님을 만났다. 샌님은 내가 혼자 지어 부르는 그 친구 이름이다.

이 새님은 부대에서 대단한 인기가 있었다. 눈이 맑고 크고 시원하고 얼굴도 예쁘고 입술이 여자같이 생긴, 그래서 많은 선배들의 사랑을 받았지만 성격이 얼마나 까칠했던지 다른 사람하고는 말을 잘 않는 외톨이었다.

그런 샌님이 나한테는 허물 모르고 벽 없이 지냈다. 그도 피엑스 근무를 하다가 다른 부서로 가서 특수훈련을 많이 받았지만 언제나 조용하고 반듯한 인물이었다.

샌님과 만난 나는 누구보다 고집쟁이 놈 소식을 물었다. 그도 나보다 더 고집쟁이 놈을 더 보고 싶어 하였다. 고집쟁이 놈이 어디서 어떻게 사는지 알 길이 없는 샌님과 나는 고집쟁이 놈 이야기였다.

출판계에 있는 그와 나는 만나기가 쉬웠고 이야기는 출판에 관한 것이었고 남은 시간은 고집쟁이 놈 이야기였다. 고집쟁이 놈을 모두가 좋아한 것은 그 성격이 올곧고 불의를 용남하지 않는 깐깐함 때문이었다.

그런 반면 놈은 경우가 밝았고 사리판단이 빨랐다. 그렇게 놈을 찾고 있던 어느 날 샌님이 전화를 걸어왔다.

찾았다 찾았어.”

뭐라고? 뭘 찾았다는 거야?”

놈과 나 12 / 사랑한다는 말보다 진한 말

샌님이 기분 좋은 소리로 대답했다.

고집쟁이 찾았다.”

그래? 놈이 어디서 어떻게 지낸대?”

광화문.”

광화문 어디?”

내가 당장 네 사무실로 갈 테니 찾아보자.”

빨리 와라. 빨리.”

우리는 광화문 뒷골목에 있다는 맥주홀롤 찾아갔다. 맥주집이 백 평은 될 만큼 넓고 종업원이 여럿이었다. 한 종업원을 잡고 물었다.

여기 아무개라는 사람이 있나요?”

지배인 말입니까?”

지배인이라는 말에 약간 놀랐다. 놈이 지배인이라니!

그러나 잠시 후 지배인이라는 놈이 나타났다. 놈이다! 내가.

! 인마 너너?”

놈이 놀란 듯

웬일로 네놈들이 여기까지 왔냐?”

술 마시러 왔다. 지배인, 술 가져와라.”

놈놈 하면서 악수를 나누고 얼굴을 서로 들여다보았다. 7년씩이나 헤어졌다가 만난 인사가 욕지걸이다.

놈이라고 하든, 새끼라고 하든 무슨 소리를 해도 친근한 사이에 주고받는 말은 사랑한다는 말보다 진하다.

놈과 나 13 / 세상에 공짜가 어딨냐

종업원이 맥주와 땅콩 안주를 차려주어 우리는 둘러앉았다. 가장 궁금한 것 먼저 물었다.

너 어떻게 나왔니?”

말로 하면 길다. 술이나 먹고 가 놈들아.”

대접이 겨우 이거냐?”

술집에서 술보다 더 좋은 대접이 어디 있냐?”

허긴, 공짜 술일 테니 마셔 보자.”

세상에 공짜가 어딨냐?”

술값을 내라고?”

안 내면 못 간다.”

또 궁금한 걸 물었다.

지금 어디서 사냐?”

집도 없는데 어디서 살 것 같으냐?”

괜히 아픈 데를 건드린 것 같았다. 그런데 놈이 상상외로 쉽게 대답했다.

네 놈들이 알다시피 집 없는 난 여기서 먹고 잔다.”

불편한 건 없고?”

내가 그런 거 따질 처지냐? 낮엔 일하고 밤에는 저 안에 방이 있는데 거기서 자다가 괴로워서 홀에 나와 의자를 깔아놓고 잔다.”

무엇이 얼마나 괴로워서 방을 두고 의자에서 자냐?”

그게 궁금하냐?”

놈과 나 14 / 여자한테 시달려 봤냐

궁금하지, 방을 두고 왜?”

네놈들 여자한테 시달려 봤냐?”

그게 무슨 소리냐?”

난 여기서 완전히 중성이 됐다.”

중성?”

남자도 아니도 여자도 아닌 것 말이다.”

무슨 소리냐?”

이때 늘씬하고 예쁜 여자들이 나타나 우리 쪽에다 인사를 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궁금한 것이 또 생겼다.

, 저 아가씨들은 뭐냐?”

여기서 일하는 애들이다. 예쁘지?”

.”

여기 종사하는 미녀들이 열 명도 넘는데 다 쭉쭉 미인들이다.”

1970년대 초에는 많은 아가씨들이 가출을 하여 직장을 구하지 못하여 공장이나 술집으로 빠졌다. 얼굴이 예쁘면 다방에서 먼저 데려가고 다음에는 술집 그리고 다음은 다른 곳.

샌님이 한 마디.

저 애들 가운데 하나 잡아라.”

싫다. 저 애들이 하나도 여자로 보이지 않는다. 저 애들도 나를 남자로 보지 않으니까.”

그게 중성이냐? 저렇게 예쁜 여자들이 여자로 안 보인다고?”

놈과 나 15 / 그런 황홀한 장면도?

놈이 맥주 컵을 기울이며 물었다.

네 놈들이 보기에 저 애들이 예쁜 여자로 보이냐?”

.”

네 놈들은 저 애들 틈에 끼어 보면 하루도 못 살고 달아날 거다.”

샌님이 호기심이 발동한 듯

미인들 틈에 끼어 살면 좋지. 그보다 더 해피한 일이 어디 있냐?”

놈들은 내가 어떻게 사는지 몰라서 하는 소리다. 저 애들이 내 방에서 홀딱 벗고 옷을 갈아입는가 하면 나체로 앉아서 화장도 하고 깔깔거린다. 내가 보든 말든 상관하지 않고.”

! 그런 황홀한 장면이?”

말도 말아. 저것들이 손님하고 술이 떡이 되도록 취하면 내가 책임을 져야 한다.”

책임??!”

샌님도 나도 엉뚱한 생각을 하며 놈한테 눈길을 모았다. 놈은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통행금지 시간이 되면 손님들은 다 돌아가고 나만 떡이 된 애하고 남는다. 어떻게 하겠니?”

샌님과 나는 더 엉큼한 상상을 하면서 웃었다. 놈은 우리를 비웃듯 한 마디 욕을 뱉었다.

속물들!”

? 속물이라고?”

놈과 나 16 / 밤에 업고 다니는 여자

네놈들 겉으로는 점잖은 척하면서 생각하는 건 다…….”

다 뭐냐?”

그놈이 그 놈이다. 내가 술에 떡이 된 애를 들쳐 업고 여관까지 가서 어떻게 되었겠냐?”

글쎄? 차마 상상을 말하자니 속물소리를 더 들을 것 같고……. 주저하자 놈이 간단히 말해 주었다.

술이 취해 몸을 가누지 못하는 것들을 여관까지 데려다 주고 나오면 거의가 똑같은 소리를 한다.”

무슨 소리?”

오빠, 나 안 취했어. 나하고 놀다 가면 안 될까? 그러면서 매달린다. 그럴 때 나는 칼같이 뿌리친다. 그 애들한테 잡히면 사람 꼴이 아니니까. 어떤 애들은 내 앞에서 홀딱 벗고 놀잔다. 그럴 때 나는 똑같은 대답을 했다.”

무슨 대답?”

난 그런 애들한테 솔직히 말했다. 나는 집도 없고 부모도 돌아갈 고향도 없는 신세다. 나한테 있는 것이라곤 자존심밖에 없다. 너희들이 하자는 대로 하면 내 자존심마저 무너지는 거다. 그러면 취한 애들은 똑같이 나도 돌아갈 집도 고향도 없어요. 하지만 나도 자존심은 있다고. 자존심 다 버리고 말하는데 나하고 놀면 안 될까, 오빠?’ 한다. 그런 애들을 나는 수시로 업고 다녀야 한다. 너라면 어떡하겠니?”

놈과 나 17 / 변강쇠라도 되는 줄 알고

샌님이 웃기는 소릴 했다.

그걸 질문이라고 하냐? 못된 놈.”

놈이 진지하게 말했다.

날마다는 아니지만 일주일에 한두 번은 애들을 업고 여관으로 가야 한다. 그러면 여관 주인은 내가 변강쇠라도 되는 줄 알고 능글맞게 웃으면서 조용한 방을 내준다. 속물들만 상대한 사람들이라 제 멋대로 생각하는 거지.”

내가 엉뚱한 말을 했다.

네놈의 성미는 내가 잘 알지만 아무리 그래도 여관까지 업고 가서 아무 일도 없었다면 누가 믿냐?”

이놈아, 그래서 내가 중성이라고 하지 않았냐?”

중성? 아무리 중성이라도…….”

네 놈은 몰라. 그런 애들 잘못 건드렸다가는 신세 조진다.”

신세 조저 봐야 혼자 몸뚱인데 뭘하고 생각하면서도 놈이 참 멋지다고 생각했다. 여자의 유혹은 꿀 같아서 그 달콤한 공격을 뿌리치기 어려운 것인데 놈이 그렇게 살아 왔다는 말은 믿을 수가 있었다. 그래도 나는 무슨 재미있는 이야기가 더 없을까 하고 물었다.

여자 애들 업고 다니다 오해 받은 일은 없었냐?”

오해하는 사람이 한둘인 줄 아냐? 그 이야기를 하자면 소설책이 나올 거다.”

넌 방이 따로 있다면서 왜 홀에서 의자를 깔고 자는 거냐?”

놈과 나 18 / 왕언니는 이상해

그 얘기해 줄까?”

말 못할 비밀이라도 있냐?”

있다. 언젠가 내가 혼자 자는데 누가 내 물건을 만지는 거다. 깜짝 놀라 눈을 떠 보니 왕언니가 잠옷 바람으로 나를 보면서 혼자 자지 말고 나하고 같이 자자. 어때?’ 하기에 이러시면 안 됩니다 하니까 내가 오늘 즐겁게 해줄게하는 거다. 기가 차서.”

그래서?”

나는 일어나 옷을 입었다. 그런데 왕언니가 매달리는 거야. ‘나는 네가 좋아하기에 누나, 동생 같은 사람한테 말이 돼요?’ 하니 누나가 동생하고 자자는데 왜 이래?’ 하고 나를 안 놓아주는데 어떻게 하겠냐?”

왕언니가 뭐냐?”

나보다 세 살 위로 이 집에 여자들 가운데 가장 고참이고 여자 애들을 관리하는 언니다.”

샌님도 나도 어이가 없어서 다음 놈의 말을 기다렸다.

그 날 밤에 내가 정중히 말했다. ‘누나, 오늘은 여기서 자. 난 나가서 잘게.’ 하니까 너 정말 이러기야?’ 하기에 난 다른 애들하고 달라.’ 했지. 왕언니가 뭐라고?’ 하면서 나를 노려보는 거라. 그래서 난 다 알고 있어!’ 했더니 뭘 안다는 거야?’하고 대들었다. 그렇게 하여 왕언니와 나는 사이가 뜸해졌고 나는 그 날부터 홀에서 의자 모아놓고 여기서 잔다.”

놈과 나 19 / 어우동을 아냐?

내가 물었다.

네가 뭘 다 안다는 거냐?”

그런 게 있어.”

샌님도 궁금한 듯 한마디.

그런 게 뭔데? 궁금하게 해 놓고.”

놈들아 그런 것까지 알려고 하지 마.”

내가 짚었다.

그 왕언니 어우동이지?”

어우동? 너 같은 놈도 어우동을 아냐? 그 왕언니는 스물아홉 살 인데 시집을 한 번 갔다 온 여자였다. 서방을 그렇게 바꾸고도 모자라 손님 중에 맘에 드는 사람 만나면 가만두지 않는 색마였다. 그 비밀을 여기서 일하는 사람들은 다 알고 있지만 아무도 그것을 모르는 줄 알고 겉으로는 얌전한 체하고 생글거리지만 밤에는 딴 여자가 되는 거다. 그런 여자 만나면 멍든다. 그런 걸 알면서 누나누나 하고 따르다가는 신세 조지는 거다. 놈들아 시원하냐?”

나는 놀랐다.

세상에 그런 여자도 있구나!”

그러니까 이런데서 뒹구는 거다. 그런데 신기한 일이 발생했다. 나한테 그렇게 당하고 태연하게 주인아줌마한테 뭐라고 했는지 아냐?”

너를 당장 내보내라고 했겠지?”

놈과 나 20 / 전화위복

놈이 설명했다.

난 이해가 안 갔다. 주인아줌마한테 나를 성실하고 믿음직스런 사람이라고 추켜세워 준 거다.”

왜 그랬을까?”

놈은 고개를 저었다.

나도 모른다. 내 상상을 뛰어 넘는 말을 했다는 것이.”

너를 유혹하려는 고단수 수작이 아니었을까?”

주인아줌마도 그 어우동이 어떤 여자라는 걸 알고 있었고 한편으로는 나를 의심의 눈으로 보고 있었던 거다. 밤중에 만취한 애들을 업고 여관으로 들락거린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 무슨 일이 있을 만하다고 오해하고 있었던 거다. 그런 터에 어우동이 엉뚱한 칭찬을 하는 소리에 아줌마가 다른 아이들한테 내 행동을 알아본 거다. 그런데 아이들마다 다 내 칭찬을 하였던 거다.”

나도 동감이 가는 소리였기에 한 마디.

그래, 바로 네 놈은 그 점이 좋아. 그래서 내가 좋아하고 있다.”

놈이 다음 이야기를 했다.

어우동이 그렇게 내 칭찬을 했고 다른 애들도 좋게 말해 주자 주인아줌마는 나를 완전히 신임하게 되었다. 그래서 지배인 겸 경리까지 맡겼다.”

전화위복이로구나.”

전화위복? 그 후부터 주인아줌마와 나 사이엔 갈등이 생겼다.”

놈과 나 21 / 월급보다 좋은 거

무슨?”

우리 맥주홀을 상대로 납품을 해서 먹고사는 사람이 많았는데 할결같이 가난했다. 그래서 내가 납품업자들이 물품을 들여오는 대로 현금을 지불한 거다. 주인 입장에서는 한 달이라도 외상을 해야 수익이 생기는데 꼬박꼬박 현금을 내주자 그래서는 안 된다고 주인아줌마가 주의를 주었다. 그렇지만 나는 주인 말을 안 듣고 현금 직불을 하면서 대답했다. 우리는 이 정도로 수입도 있고 여유가 있지만 저 사람들은 하루살이 인생입니다. 어차피 줄 돈 먼저 주면 그 사람들을 돕는 거 아닙니까? 하고 말하자 주인아줌마는 내가 돈을 주면서 삥땅이라도 치는 게 아닌가 하여 두고 보자 하고 나를 경계의 눈으로 지켜보았던 것이다.”

나는 또 고개를 끄덕이며 한 마디 했다.

네 놈이라면 충분히 그랬을 거다. 너는 약자들을 그렇게 도울 수 있지. 다른 사람은 그렇게 못한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냐?”

그렇게 몇 달을 보내자 납품업자들이 내 마음을 알아준 것인지 납품 단가를 전보다 싸게 청구한 거다. 그렇게 하다 보니 외상으로 납품받을 때보다 수익이 올랐지. 결국 주인아줌마가 내 진심을 이해하고 하루는 나를 조용히 불렀다. 뭐라고 했는지 아냐?”

나는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아서 멍하니 바라보다가 대답했다.

잘했다고 월급을 올려주지 않았을까?”

월급보다 더 좋은 걸 받았다.”

놈과 나 22 / 누나

황금덩어리라도 받았냐?”

돈이 아니라 언약이었다. 나를 동생으로 삼고 싶으니 우리 의남매가 되자는 것이었다. 나 보고 당장 누나라고 부르라는데 내가 평생 외롭게 자란 놈이 누나 소리가 쉽게 나오냐. 그 날은 누나 소리를 못하고 홀로 나가서 경리장부를 정리했다.”

허긴 네 놈이 그렇게 누나 소리를 쉽게 할 인물이 아니지. 나도 아무한테나 누나라고 못한다. 그래서?”

마음은 안 그런데 차마 누나 소리가 나오지 않아 한 달을 보내다가 용기를 내어 누나하고 불러 보았다. 그리고 내 의지를 밝혔다.”

무슨?”

누나, 나 독립하고 싶어요, 했지. 그랬더니 무슨 돈으로 독립을 한다는 거냐고 물으며 정말 누나의 마음으로 나를 받아들였다. 그래서 나는 그 동안 모아놓은 돈이 조금 있으니 그것으로 장사를 해 보겠다고 했다.”

.”

누나가 무슨 장사를 하겠느냐고 묻기에 가게 앞에 화단을 빌려주시면 거기서 리어카로 간이 필수품 장사를 해 보고 싶다고 했다. 그랬더니 그렇게 하라고 하여 아는 사람한테 바퀴 둘이 달린 리어카를 샀다. 나는 리어카를 2층으로 꾸몄다. 아래는 통처럼 생긴 잠자리를 만들고 위에는 뚜껑을 열었다 접었다 하는 판매대를 만들어 비누 칫솔 휴지 손수건 등등 각종 소모품들을 사다 채웠다.’

놈과 나 23 / 별난 도둑놈

그렇게 하여 놈이 독립하여 노점 장사를 시작했고 나는 놈이 만들어 놓은 리어카 백화점이랄까 요새 유행하는 다이소라 할까 아무튼 놈의 고객이 되었었다. 우리 사무실에서 필요한 물건과 집에서 사용하는 자질구레한 것들을 놈의 백화점에서 사다가 썼다.

비록 노점이지만 없는 건 빼놓고 있을 건 다 있었다. 나는 놈이 독립한 것이 고맙고 대견하여 퇴근할 때마다 놈한테 가서 시시덕거리며 별별 소리를 지껄이다 돌아가곤 했다.

놈이 하는 소리가 그랬다. “여자 애들 틈에서 시달리는 것보다 좋다.” “남이야 뭐라든 나는 하루 종일 장사를 하다가 밤이 늦으면 이 리어카 속 호텔에서 잔다. 누나는 내 걱정을 하면서 가게에서 필요한 물건을 사주었고 잠은 방을 내줄 테니 거기서 자라고 했다. 참 고마운 말씀이었지만 거기서 자면 여자들이 괴롭혀서 가기 싫었다. 좁아도 리어카 호텔에서 자는 것이 천만번 편하다.”

어느 늦가을이었다. 놈이 하는 노상 백화점을 가보니 전에 안 보이던 쇠사슬로 리어카와 전봇대를 묶어 놓았다.

이게 뭐냐? 왜 죄 없는 백화점을 전봇대에다 묶어 놓았냐?”

놈이 웃으며 대답했다.

참 재미있는 일도 다 있다. 밤늦게 장사를 끝내고 판매 전시대 뚜껑까지 덮고 이 밑 호텔에 들어가 잠을 자는데 어떤 도둑놈이 나와 리어카를 통째 끌고 어디론가 가는 거였다.”

그래서?”

놈과 나 24 / 주인까지 훔쳐가는 도둑

나는 깜짝 놀라 내다보았다. 누군지 시커먼 놈이 털털거리는 리어카를 끌고 골목길을 돌아가는 거였다. 나는 단단히 차리고 덜덜거리는 리어카 문짝을 활짝 열어 제치며 어떤 놈이냐?’ 하고 소리를 쳤다. 그러자 도둑놈은 놀라 이어카를 팽개치고 달아났다.”

! 그럴 수가.”

다행히 도둑이 달아났으니 망정이지 싸우려고 덤빌까봐 바싹 긴장했었다. 그날 밤은 한잠도 못자고 뒹굴다가 다음날 리어카를 쇠사슬로 전봇대에다 저렇게 묶어 놓았다.”

너도 놀랐지만 그 도둑놈은 얼마나 놀랐을까 주인까지 훔쳐가던 도둑놈이 하하하. 그 안에 주인님이 주무시는 줄도 모르고.”

나는 그 후부터 출근길에 놈의 리어카 백화점을 확인하였다. 또 어떤 도둑놈이 끌어가지는 않았는지, 놈이 편히 잤는지 궁금해서였다. 그런데 놈은 얼마나 부지런한지 누구보다 먼저 백화점을 열어놓고 골목길 청소를 말끔히 해놓았다.

전에는 화단 골목길이 매우 지저분했었다. 구석구석 술꾼이 토해놓은 것, 크고 작은 용변을 봐 놓은 것, 여기저기 널린 깨진 병과 쓰레기, 정말 어지러웠었다. 당시에는 도로 청소부가 없어서 뒷골목은 어디나 쓰레기장 같았다.

그런데 놈이 노점상을 차린 뒤에는 골목길이 꽃길이 되었다. 나는 칭찬을 하면서 물었다.

골목길이 네 덕에 환하다. 뭐 재미있는 일은 또 없었니?”

놈과 나 25 / 어린 손님

있었다. 들어 볼래?”

들어보자.”

하루는 장사를 마치고 이 리어카호텔로 들어가 자려고 기어들다가 깜짝 놀랐다.”

뱀이라도 있었냐?”

뱀은 아니었고 무엇인가 뭉클하여 잡고 보니 사람이었다. 어느 틈에 그 속에 들어갔는지 놀랍기도 했다. 안에서 어린 소년이 기어 나왔다. 나오자마다 달아나는 거였지 날씨도 추운데 통행금지 시간이 지난 뒤라 그냥 두면 안 되겠다 싶어 달려가서 붙들었다. 아이는 내가 잡자 놀라서 벌벌 떨었다. 나는 겁먹지 말라고 달래며 데리고 와서 리어카 속에서 안고 잤다. 너도 알다시피 나는 어렸을 때 그 아이처럼 갈 길을 모르고 살았잖니?”

참 착한 일을 했구나.”

그 아이는 어디서 왔는지 부모가 있는지 물어도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더 보호해 주고 싶었는데 그 날 어디론지 인사도 없이 달아났다. 못 먹어서 삐쩍 녀석이 어디로 가서 어떻게 되었을까 지금도 생각하면 딱하고 불쌍한 생각이 든다.”

나는 좀 잔인한 말을 했다.

잘 갔지. 네 처지에 그런 애가 떠나지 않고 너한테 붙어 있었다면 어떡할 뻔했냐.”

네놈은 모른다. 그 아이가 오죽했으면 길바닥으로 나왔겠니.”

놈과 나 26 / 여자 손님

놈은 자기가 살아온 과거를 생각하며 그 아이를 염려하고 있었다. 그 마음을 읽으면서 나는 엉뚱한 말을 했다.

뭐 또 재미있는 일은 없냐?”

넌 내가 겪는 일들이 재미있는지 모르지만 나는 이 리어카 장사를 하면서 마음 아픈 일들을 밤낮으로 보고 산다. 내가 겪은 이야기를 다하자면 끝이 없지만 딱 하나만 더 해 주마.”

좋아, 들어보자.”

넌 내가 하는 말을 믿어줄지 모르지만……. 통행금지 시간이 다 되어 가는데 바로 앞에 아가씨가 털썩 주저앉아 일어나지를 않았다. 늦가을이라 날씨도 추운데 그 모습이 너무 안돼 보이기에 다가가 아가씨를 일으켜 세웠다. 술 냄새가 났다. 열아홉쯤 보였다. ‘아가씨 집이 어디요?’ 했더니 없어요, 하는 거다. 길바닥에 그대로 버려둘 수도 없고 모르는 애를 여관으로 데리고 갈 수도 없어서 내 침실 리어카 호텔로 들여보냈다.”

그래서?”

그 애는 내가 하라는 대로 순순히 그 속으로 들어가서 말했다. 아저씨도 들어오라고…….”

나는 흥미 있는 눈으로 놈을 보았다. 놈은 내가 무슨 엉큼한 생각을 하고 있으리라 짐작이 된다는 듯 말했다.

엉큼한 놈 무슨 생각을 하는 거냐?”

아아, 아무것도.”

놈과 나 27 / 아저씨 들어와

사실 나는 궁금하기는 했지만 놈이 짐작하는 것과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놈은 정직하고 꼬장꼬장하고 불의와 타협할 줄 모르는 성깔머리라 어떤 일이 있어도 아무 일이 없으리라는 걸 믿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 놈이기 때문에 왕언니의 유혹도 물리치고 다른 여자 애들을 업고 다니면서도 무사하지 않았던가. 그래도 나는 짓궂게 물었다.

놈아, 아가씨가 예쁘던?”

호리호리한 것이 미운상은 아니었다. 희미한 가로등빛에 비친 얼굴이 좀 창백하고 측은한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여자애가 아저씨 들어와 하고 반말을 하는 거라. 나는 못 들은 척하고 밖에 서서 골목길을 바라보았다. 골목길에 한 사람이 비틀비틀 그림자를 가로등 아래 끌고 가다가 남의 집 담에다 오줌을 싸고 돌아서서 내 쪽으로 오고 있었다. 나는 리어카 뒤로 숨었다.”

겁났겠다.”

그런 사람 잘못 건드리면 위험하지. 술꾼은 누군가를 찾는 듯 중얼중얼 왔던 골목길을 되돌아갔다. 바람이 제법 차가웠다. 그 술꾼이 사라지고 나자 안에서 또 불렀다. ‘아저씨 들어와하는 거다. 나는 추워도 참고 괜찮다고 했다. 밤은 추위를 몰고 깊어 가는데 추위를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하는 수없이 그 애가 있는 속으로 들어가야 했다.”

놈과 나 28 / 아저씨 총각이야?

밤마다 그런 사람이 온 건 아니냐?”

그런 건 아니지만 밤중에 통행금지 시간에 쫓기던 사람을 많이 보았지만 다 도와줄 수는 없었다. 이게 여관이라도 되냐?”

여관보다 더 좋은 피난처지. 그 속으로 들어가서 어떻게 된 거냐?”

그거 참, 계집애가 버르장머리 없이 반말로 또 하는 소리가 아저씨 여기가 좁기는 하지만 둘이 자기에 딱 좋아.’ 하더니 기어들어간 내 품에 안기는 거다. 추운 겨울밤에 난로 없이 자던 나는 따듯하다고 느꼈다. 그렇지만 이런 리어카라도 있는 내가 고맙다고 생각하며 살아 왔는데 그 애를 안고 누우니 따듯해서 좋긴 하더라.”

좋기만 했니?”

놈아, 딴 생각은 하지 마. 여자 애는 여전히 반말로 아저씨 몇 살이야?’ 했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애는 또 물었다. ‘아저씨는 집이 없어?’ 그래서 여기가 내 집이다했더니 나도 여기서 같이 살면 안 돼?’ 그 다음부터는 묻는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무엇이 그리 궁금한지 별 걸 다 묻다가 아저씨 총각이야?’ 하며 얼굴을 만졌다. 나는 생각에 잠겼다. 어디서 무엇을 하다가 굴러다니는 애인지 모르는 이런 애하고 말을 섞었다가는 재미없는 것이다. 통행금지 시간만 지나면 내쫓으리라.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버르장머리 없는 애가 나를 괴롭혔다. 나는 손도 까딱 않고 입도 봉했다. 그리고 날이 새기만 기다렸다.”

놈과 나 29 / 짐승만도 못한 사람

그 애가 널 어떻게 괴롭혔냐?”

내가 여자들 괴롭힘을 한두 번 당한 것도 아니고 이미 중성이 된 상태인데 제 까짓게 무슨 짓을 한다고 내가 꿈쩍이나 할 줄 아냐? 나같이 집도 없이 길바닥에서 사는 놈이 여자한테 홀려서 할 짓 못할짓 다하면 인생은 끝나는 거다.”

놈의 말에 나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자신이 없었다. 놈은 내가 믿어온 그런 놈이니까. 나는 마음 정리를 하고 말했다.

너는 성인군자인지도 몰라. 너 같은 사람 이야기는 들어본 적도 만나본 적도 없으니까. 그래 통행금지가 해제되어 내쫓았냐?”

실망하지 마라. 그 애는 잠이 들어 깨워도 안 일어났다. 죽은 건 아닌가 하고 흔들어도 꿈쩍 않는 거였다. 할 수 없이 나는 노점을 열고 장사를 시작했다. 점심때가 되어 옆집 호빵가게에서 빵을 사다가 주려고 들여다보니 애가 없어졌다. 어느 틈에 나갔는지 인사도 없이 사라진 거다. 기가 막혔다. 내가 사람하고 잔 건가 짐승하고 잔 건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

그런 인간이었다면 조용히 사라진 편이 다행이다. 다시는 그런 인간한테 인정 베풀 것 없다.”

네 말이 맞아. 나도 모질게 살아야 할까봐.”

나는 놈이 그렇게 사는 것이 마음 아팠다. 그런데 내가 지방 출장을 다녀와 놈을 찾아갔을 때 리어카 백화점이 없어지고 놈도 보이지 않았다.

놈과 나 30 / 목소리

놈이 다른 데로 이사를 갔나?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닐까 하고 걱정스럽게 골목길을 바라보고 있을 때.

놈아, 뭘 보냐?”

놈의 목소리였다. 소리 나는 쪽을 보니 맥주 홀 추녀 밑에 낯선 구멍가게가 보였다. 건물 추녀 밑 벽을 허물고 옆으로 2미터쯤 되고 너비가 1미터쯤 되는 추녀가게가 만들어져 있고 거기서 놈이 목을 내밀고 나를 불렀다.

, 이게 어떻게 된 거냐?”

놈이 빙긋이 웃으며 대답했다.

맥주 홀 누님이 내 꼴이 불쌍하다면서 이 추녀를 허물고 이렇게 가게를 내주셨다.”

나는 그 말에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리어카에서 자고 있는 놈을 늘 걱정했는데 추녀 밑이라도 튼튼한 건물에 붙어살게 된 것이 얼마나 다행스럽고 고마운 일인가.

참 고마운 누님이구나.”

고맙지. 내가 리어카에서 장사하는 것을 늘 안쓰럽게 보시다가 이렇게 벽을 허물고 내 가게를 마련해 주셨다. 이 판매대 밑에는 널찍한 바닥도 있어서 편하고 좋다.”

참 잘 되었다. 잘 되었어.”

놈 옆에는 백만 원이 넘는 백색 공중전화기까지 놓여 있었다.

이 공중전화기도 네 것이냐?”

놈과 나 31 / 추녀백화점

그렇다 왜?”

, 전화 값이 금값인데 이걸 해 놓았어?”

그 동안 모은 돈을 몽땅 주고 샀다. 전화 한 통에 10원씩이지만 하루에 천 원이 넘게 들어오기도 한다.”

그렇게 많이?”

놈은 작은 추녀백화점에 더 많은 상품을 진열하고 신나게 장사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찾아갔더니 놈은 안 보이고 묘령의 아가씨가 점포 가운데서 목을 쏙 내밀고 내다보았다.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놈은 어디 가고 낯선 여자가?’

내가 물었다.

여기 주인이 바뀌었나요?”

아니요.”

아가씨는 누구시지요?”

주인아저씨가 일이 바빠서 제가 대신 보아주고 있어요.”

주인아저씨는 무슨 일로 그렇게 바쁘신가요?”

저도 몰라요.”

이때 놈이 자전거를 끌고 돌아왔고 놈이 나타나자 여자는 슬그머니 사라졌다. 궁금증이 나서 물었다.

, 저 아가씨는 누구냐?”

, 궁금하냐?”

.”

놈과 나 32 / 네 짝 삼아라

놈이 설명했다.

맥주홀 누님이 나를 도와줄 사람을 구해 주었다. 시골서 막 올라온 사람인데 얌전하고 참하여 누님이 잡아두고 집안일을 시키면서 내가 하는 일을 좀 도와주라고 하여 내가 자전거 배달을 할 때는 도와주기로 했다.”

점원을 둔 거냐?”

, 내가 무슨 점원까지 두겠니. 누님이 나를 위해 맥주홀에 필요한 것들을 나한테 납품하라고 맡겨주시고 이웃 식당과 맥주홀에 필요한 물품도 납품해 보라고 길을 열어주어서 가게보다 납품배달이 더 많아지고 수입도 짭짤하다. 내가 자리를 비울 때는 그 아가씨가 여기를 보아 주어서 편하게 지낸다.”

아가씨 인상도 좋고 얌전하게 생겼더라. 네 짝 삼아라.”

그런 말 마. 저 아가씨는 환경이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살다가 온 사람이다. 나 같은 것하고는 안 맞아.”

글쎄, 맞고 안 맞고는 운명이 결정해 주겠지.”

그렇게 몇 마디 나누고 여러 달이 지났다. 놈을 찾아갈 때마다 추녀백화점은 그녀가 지키고 있었고 놈은 납품하기 바빴다. 그리고 1년쯤 지났을까 어느 날 놈이 나를 불렀다.

왜 불렀냐?”

나 가게 하나 계약했다. 가 보자.”

가게를?”

놈과 나 33 / 감동

가게가 어떻게 생겼든지 놈이 가게 계약을 했다는 말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리어카와 뒹굴다 추녀백화점에서 새로운 발전을 하게 되었다니 감동적인 소식 아닌가.

놈을 따라 국제극장 뒷골목으로 몇 발자국 안 가서 허술한 건물이 나란히 있는 가운데 비딱한 한 건물이었다. 베니다 천장에 벽도 베니다로 가린 바람막이 집이었다. 바닥은 우툴두툴한 시멘트 바닥. 들어가서 이리저리 둘러봐도 볼품이 없는 집. 놈이 물었다.

어떠냐? 맘에 드냐?”

네 맘에 들어야지 내 맘에 드는 게 무슨 의미가 있냐?”

그래도 네가 좋다고 해야지.”

좋기로 말하면 진짜 좋았다. 놈이 이런 가게라도 얻고 새 사업을 하게 되었다는데 어찌 기뻐하지 않을까. 축하할 일이 아닌가.

아주 좋다. 이제 여기서 부자되거라.”

고맙다.”

무슨 장사를 할 생각이냐?”

며칠 있다가 와 봐.”

그 후 나도 바쁘게 살다 보니 한 일주일쯤 지나서 찾아가 보았다. 문 위에 커다란 글씨로 <부산회집>이라는 간판이 걸려 있었다.

나는 실망했다. 하필 내가 싫어하는 회집을 한다니! 놈이 물었다.

너도 회 좋아하지? 먹으러 와.”

……?”

놈과 나 34 / 개벽

왜 하필이면 놈이 내가 못 먹는 횟집을 차렸는지! 놈의 장사를 위해서는 회를 먹어야 하는데 회를 먹어본 적도 없지만 냄새만 맡아도 달아나는 나다. 그런데 무슨 수로 놈을 돕는단 말인가.

그렇지만 놈이 궁금하여 횟집을 찾아갔다가 놀랐다. 그 허술한 집이 말끔하게 변하여 바닥도 매끈하고 천장도 벽도 고급 벽지로 도배를 하여 신방 같았다. 안쪽에는 주방이 정갈하게 차려져 있고 4인용식탁이 다섯 개나 놓였다. 눈이 휘둥그레진 나를 보고 놈이 물었다.

어떠냐?”

이거 네 가게가 맞냐?”

웬 헛소리?”

여자가 성형 수술하고 화장한 것 같다. 너 무슨 돈으로 이렇게 아담하게 차렸냐?”

별 것 아니야. 이리 와 봐.”

놈이 나를 비릿한 냄새가 나는 주방으로 불렀다. 싫은 냄새를 참고 들어가 보니 60대쯤 영감(?)이 회를 뜨고 있었다. 영감이 보기도 이상한 기다란 장어를 껍데기를 쭉 벗기더니 하얀 살을 칼로 비스듬히 얇게 썰었다. 신기해서 회를 어떻게 만드나 지켜보았다.

장어 뼈를 바르고 하얀 살만 추려 미리 준비한 얼음 통에 넣고 젓가락으로 한참 동안 휘휘 저었다. 그리고 베 헝겊으로 꼭꼭 짜더니 물기를 쪽 빼고 정갈한 쟁반 한가운데다 그것을 풀어 놓았다.

놈과 나 35 / 아나고

조금 지나자 아나고는 마치 벚꽃 피듯 뽀얗고 동그랗게 피어올라 쟁반에 꽃송이처럼 볼록하게 퍼졌다. 신기한 구경거리였다.

이게 뭡니까?”

요리사 영감이 대답했다.

아나고회라는 것이오.”

아나고요?”

회를 못 먹는 사람도 이건 먹는다오. 한번 드셔 보겠소?”

저는 그런 거 못 먹습니다.”

그러니까 맛만 보라는 게요.”

놈도 나처럼 회를 모르는 육지 출신이라 호기심을 가지고 말했다.

나도 처음 보는 건데 한번 먹어보자.”

장어로 뜬 이름도 이상한 회를 눈을 딱 감고 먹어 보았다. 처음 먹어보는 것이라 이상했지만 비린내가 나지 않아 좋았다. 놈의 장사를 해주자면 이 정도는 참고 먹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후 며칠을 들여다보아도 손님이 없었다. 손님이 없어서 걱정하던 터에 H신문사 문화부 김기자가 찾아왔다. 나는 그를 데리고 놈의 가게로 곧장 갔다. 그리고 놈한테 큰소리를 쳤다.

나 오늘 손님으로 왔다. 잘 모셔라.”

네네, 특별히 모시겠습니다. 무엇으로 드릴까요?”

나는 당당히 대답했다.

아나고!”

놈과 나 36 / 하루 만에 또?

놈이 재미있게 웃으며 굽실거렸다.

네네, 아나고로 모시겠습니다.”

김기자가 나한테 물었다.

아나고를 좋아하십니까?”

나는 자신 있게 대답했다.

좋아요, 아주 맛있어요.”

나는 아나고는 별로인데…….”

그럼?”

병어나 방어회가 맛있지요.”

나는 그런 것들이 무엇인지도 몰랐다. 아는 것은 고작 아나고뿐.

오늘은 아나고로 합시다. 아주 맛있어요.”

맛도 멋도 모르면서 아나고를 먹자고 했다. 다른 것은 비린내가 나서 코도 대지 못한다. 그 날 나는 술을 들면서 김기자한테 이 가게가 만들어지기까지 내 친구 놈의 고생담을 길게 늘어놓았다. 내 이야기를 다 들은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진지하게 말했다.

그런 사람이라면 도와주어야지요. 난 아나고를 시시하게 생각해서 먹지 않았는데 오늘 먹어보니 그런대로 맛이 괜찮습니다.”

그렇지요? 다음에 또 오시면 아나고로 얼마든지 대접하지요.”

그렇게 먹고 헤어진 다음 날 오후 김기자 전화가 왔다.

오늘 저녁 아나고 먹으러 갑니다. 거기서 기다리세요.”

하루 만에 또? 이거 큰일 났네. 밤마다 사달라고 하면 어쩐담?

놈과 나 37 / 그 말씀이 좋아서

아나고는 한 접시에 6천원, 소주는 2병에 6백 원이다. 나는 돈을 준비해가지고 나갔다. 김기자가 함께 온 낯선 사람을 소개했다.

“K신문사 오기자, 인사하시오.”

감사합니다. 나는 이 횟집 친구입니다.”

그 사람은 익숙하게 내 인사말을 받아들였다.

잘 알고 있습니다. 김선생한테 선생님과 이 횟집 주인 이야기를 듣고 왔습니다. 두 분이 어떤 분들인가 알고 싶어서 왔습니다.”

감사합니다. 저기 하얀 모자 쓰고 있는 사람이 제 친구입니다. 못생기고 깐깐하고 고집스럽게 생기지 않았습니까.”

그렇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착하게 보입니다.”

그렇게 보아주시니 감사합니다.”

오기자는 키가 크고 호리호리한 몸매였지만 인상이 좋았다. 그가 웃으며 말했다.

이 횟집 아나고가 그렇게 맛있다고 하여 오늘은 두 친구분도 볼겸 제가 한턱내겠다고 저 김선생을 졸라서 왔습니다. 오늘은 제가 냅니다. 마음껏 드십시오.”

아닙니다. 제 친구를 위해서 제가 내야지요.”

바로 선생님 그 말씀이 좋아서 제가 오늘은 꼭 내겠습니다.”

그렇게 하여 셋이 아나고회 두 접시에 소주 4병을 치우는 동안 김선생한테 들은 말이 사실인지 확인이라도 하듯 이것저것 물었다. 그렇게 첫 인사를 하고 헤어진 다음날 오후 그 오선생의 전화가 왔다.

놈과 나 38 / 내 장사처럼 기뻤다

인사를 나누고 하루 만에 또 만나자고 하니 오늘은 내가 꼭 대접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나갔다. 그런데 이번에는 오선생 혼자가 아닌 다른 사람 둘을 데리고 왔다. 나는 속으로 이크 이거 큰바가지 쓰게 됐구나 하고 생각하면서도 낯선 두 사람과 인사를 나누었다.

두 사람 다 D일보 문화부 기자였다. 오선생이 나와 인사를 시킨 다음 주방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하얀 모자 쓴 사람이 그 사람이고 이분은 저분의 친구.”

신기자라는 사람이 말했다.

두 분이 한 부대에서 근무하셨고요?”

나는 속으로 그걸 어떻게 알지? 하고 놀라면서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두 분이 정말 한판 뜨고 친해지셨다는데 정말입니까?”

그렇습니다. 하하하.”

낯선 두 기자와 오기자 그리고 나는 아나고를 3접시에 소주 5병을 치웠다. 나는 속으로 이게 얼마치야? 아나고값 만 팔천 원에 소주를 합하면 2만원? 허허 준비한 돈이 모자라는데……. 에라 모자라는 건 외상으로 하자.

넷이 앉아서 나눈 이야기는 놈의 이야기뿐이었다. 지금까지 놈이 지내온 이야기를 확인이라도 하듯 그들은 묻고 나는 대답하고. 그 동안 여러 손님이 왔다가 갔다. 나는 손님들이 들어올 때마다 내 주머니에 돈이라도 들어오는 듯 반갑고 기뻤다. 우리가 일어섰을 때.

놈과 나 39 / 꼬리에 꼬리를 물고

어디서 술을 마셨는지 얼굴이 벌건 김기자가 낯선 사람을 데리고 들어왔다. 김 기자가 오 기자를 보자마자 한 마디 던졌다.

배신자. 나 몰래 혼자 왔어?”

오 기자가 미안하다는 듯.

아니야, 저 신 기자가 이 횟집 주인 이야기를 듣더니 당장 가보자고 졸라서 왔어.”

김 기자, 신 기자한테 손을 내밀었다.

신선생 오랜만이오. 요새 재미가 어떻소?”

아주 좋습니다. 하하하.”

이렇게 하여 몇이 둘러앉았지만 아나고는 두 접시밖에 먹지 못했다. 나는 아나고 값 다섯 접시만 계산하고 있었는데 오 기자가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며 말했다.

여기까지 1차는 내가 내겠소. 2차는 누가 내실…….”

술들이 잔뜩 취한 채 비틀거리며 일어서면서 놈을 향해 인사했다.

주인장, 잘 먹고 갑니다. 꼭 부자 되시오.”

다른 사람이 또 한 마디를 남겼다.

주인장, 내일 친구 데리고 올 테니 기다리시오.”

모두가 놈의 이야기를 들은 터라 의미 있는 인사를 나누고 돌아갔다. 나는 아나고 값 생각을 하다가 돌연 해방! 그 기분 누가 알까. 그 뒤로 기자들이 그 놈 이야기를 하면서 횟집을 찾았고 문화부 교육계 사람들이 몰려 들어 가게는 날마다 손님들로 바글거렸다.

놈과 나 40 / 결혼을 한다고?

나는 놈의 횟집엘 가도 자리가 없어서 들어갈 수가 없었다. 놈은 혼자 서빙을 하다가 예쁜 여종업원도 두었고 탁자 다섯 개는 손님이 꽉꽉 차서 자리가 나기를 기다리는 손님들이 밖에 줄을 섰다.

이게 성업이라는 것이리라. 나는 밖에서 기웃거리다 흐뭇한 마음으로 돌아갔고 어떤 날은 나도 자리를 하나 차지하고 있다가도 손님이 밀려오면 양보하고 일어섰다. 손님이 날마다 미어터졌다. 그러던 어느 날 낮에 조용한 시간에 놈을 만나러 갔다.

놈은 좀체 웃지 않는데 그 날은 빙긋이 웃으며 수줍게 말했다.

……. 결혼하기로 했다.”

나는 깜짝 놀랐다.

뭐라고? 결혼? 네가 결혼을 한다고?”

그렇다 이놈아. 왜 그렇게 놀라냐? 나는 장가들지 말라는 법이라도 있냐?”

네놈이 장가를 든다고? 중성이라면서 장가를 들어?”

병신, 내가 중성이라니까 그것도 없는 줄 알았냐?”

누구하고 결혼하냐?”

여자하고 한다.”

어떤 여자냐고?”

그건 네가 알아서 뭘 하게? 궁금하거든 결혼식에 와 봐.”

결혼식? 날까지 잡았냐?”

그렇다. 55일 시민회관 별관에서 한다. 꼭 와.”

놈과 나 41 / 축하객

이건 쇼킹한 뉴스. 나는 당장에 샌님을 만나 놈의 소식을 전했다.

, 박가 놈이 결혼한단다.”

걔가 결혼을 한다고?”

그래. 좋은 소식 아니냐?”

그렇지.”

놈은 외로운 처지라 결혼식을 해도 축하객이 없을 것 같다.”

그렇겠지.”

놈 결혼식 날 우리라도 가서 축하해주고 박수를 크게 져주자.”

그래야지. 일가친척도 없는 친구니까.”

드디어 결혼식 날이 다가왔다. 놈도 나도 딴에는 축의금을 준비해 가지고 시민회관 별관으로 갔다. 아직 12시가 되려면 먼데 별관입구에 도착해 보니 웬 사람들이 문 앞까지 꽉 차 있었다.

웬 사람들이야? 앞 사람 결혼식이 아직 끝나지 않았나?”

내가 말하자 샌님도 두리번거리며 대답했다.

이상하다. 놈이 여기서 한다고 했다면서 잘못 안 거 아니냐?”

틀림없이 오늘 열두 시라고 했다. 그런데 무슨 일이지?”

걱정스러운 내가 사람들을 비집고 들어가 식장 안을 들여다보았다. 150석 식장 의자가 꽉 차고 사방에 서 있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식장 단상은 화려한데 너무 깊어서 신랑 신부 얼굴을 알아볼 수가 없었다. 내가 날짜를 잘못 안 것 같아 샌님한테 말했다.

놈과 나 42 / 도깨비에 홀렸나

, 오늘이 아닌가 보다.”

바보같이 날짜도 제대로 모르고…….”

우리는 돌아서려다가 접수대로 가서 물었다.

지금 결혼식 하는 신랑 이름이 뭡니까?”

그 사람이 탁자 밑을 가리키며 대답했다.

신랑 이름이 여기 있지 않습니까?”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보니 신랑 박가 놈의 이름이 적혀 있지 않은가! 외로운 놈이 어떻게 된 건가? 도깨비를 앞세우고 손님을 몰아온 것일까? 이건 상상도 할 수 없는 대성황이다. 웬 축하객이 어디서 이렇게 많이 몰려왔단 말인가.

샌님과 나는 코가 쑥 빠졌다. 박수라도 크게 쳐 주자고 왔는데 축하객들 틈에서 존재마저 확인할 수 없으니 말이다. 내가 아무리 박수를 쳐도 놈은 들을 수가 없을 것이다.

주례사가 끝나고 축하연은 부속실인지 어딘지 모를 곳에서 대단하게 벌어졌다. 놈은 멋진 예복을 입고 축하객들한테 인사하기 바쁘고 샌님과 내가 있는 쪽으로는 오지도 않았다.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본다고 했던가. 놈과 나는 축하객 축에도 못 들고 어물거리다가 점심만 먹고 패잔병처럼 돌아서며 내가 물었다.

웬 손님이 그렇게 많으냐?”

글쎄 말이야. 그게 다 누구들일까?”

마치 도깨비에 홀린 것 같다. 그렇지?”

놈과 나 43 / 누구하고 결혼했냐?

놈이 결혼식을 한 다음 며칠 간격을 두었다가 샌님과 나는 놈을 만났다. 샌님과 내가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축하한다.”

고맙다. 그런데 니네는 못 왔냐?”

내가 넌지시 대답했다.

안 갔다, 아니 못 갔어.”

놈은 섭섭한 얼굴로 받았다.

다들 바빠서 못 왔구나.”

내가 엉뚱한 소리.

바쁘기는 네가 더 바쁘더라.”

나야 날마다 바쁘지만.”

그렇게 바쁜 놈이 언제 결혼식까지 했냐?”

그렇게 됐다.”

내가 물었다.

누구하고 결혼했냐?”

넌 왜 자꾸 그런 것만 묻냐? 여자하고 했다.”

난 놈이 그 가게를 보아주던 아가씨와 했다는 말이 듣고 싶었던 거다. 내가 또 지껄였다.

너 도깨비하고 결혼한 건 아니냐?”

뭐라고?”

네 결혼식에 어디서 그렇게 많은 축하객을 모아들였느냐 말이다.”

놈과 나 44 / 음덕

놈이 눈치를 채고 말했다.

니들 왔었구나?”

샌님이 받았다.

누구 결혼식인데 안 가겠느냐?”

고맙다. 난 너희가 보이지 않아서 못 온 줄 알았다.”

내가 물었다.

웬 축하객이 그렇게 많으냐? 우리는 놀라서 도망쳤다.”

놈도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놀랐다. 너희들과 내 가까운 친구들만 알렸는데 웬 사람들이 와글와글 몰려들어 정신이 없었다.”

그게 다 누구들이었냐? 도깨비가 떼로 몰려왔냐?”

맥주홀 누님이 아는 사람들한테 연락을 했는데 내가 물건 대주는 가게 주인들이 서로 소문을 내고 몰려왔고 광화문 축구동호회 사람들까지 몰려와서 나도 내가 결혼식을 하고 있는 건지 뭔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내가 해설하듯 말했다.

네 놈이 쌓은 음덕이 바로 그런 거다. 너의 그 성실성과 정직성을 인정하는 사람들이 축하해 준 거다. 우리도 갔다가 네가 정신이 없는 것 같아서 조용히 빠져나왔다. 잘 살아라.”

고맙다.”

놈은 신방을 횟집 2층 다락방에 차렸다.

놈과 나 45 / 온통 횟집이 되다

부산횟집은 날로 손님이 몰려들어 광화문 뒷골목 부산횟집 앞에는 사람들이 긴 줄을 잇고 섰다. 낮이고 밤이고 손님이 몰려들자 그것을 본 옆집 구멍가게가 가게를 횟집으로 꾸몄다.

그런데 그 가게에는 한 달이 지나도 아무도 들어가지 않아 텅텅 비고 놈의 횟집 문 앞에만 줄을 서서 자리 나기를 기다렸다. 나도 놈의 가게를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렇게 두어 달 지나자 기다리다 지친 손님들이 옆집으로 들어가고 두 집에 손이 북적거리자 또 옆 다른 가게가 문을 닫고 횟집을 차렸다. 그리고 또 얼마 안 가서 그 옆집, 또 그 옆집이 횟집으로 바뀌어 골목길이 횟집골목이 되었다. 이 사실은 광화문 횟집 뒷골목을 아는 사람한테는 재미있는 뒷골목 추억담이 될 것이다.

그 많은 횟집 가운데 지식인층 손님이 가장 많은 곳은 놈의 횟집이고 거기는 고정손님으로 밤낮없이 바글거렸다.

가게는 놈의 신부와 점원 아가씨가 서빙을 하고 놈과 주방장 영감은 음식 만들기에 정신이 없었다. 1년쯤 지난 어느 날 점심시간에 가 보니 손님이 몇 있다가 가고 조용했다. 내가 물었다.

너 장사 잘 된다. 보기 좋아. 지금도 다락방 신혼이냐?”

아니야. 다락방은 심부름하는 애들 주고 우리는 저쪽 경기여고 옆에 무슨 장관이 살던 집이 전세로 나와서 거기서 산다.”

장관이 살던 집에? 허허 네가 장관이 된 거 아니냐? 그럼 부자 된 건데 또 무슨 좋은 일이 더 있냐?”

놈과 나 46 / 나 배 아프다 이놈아

용인에 밭과 논이 붙은 산 12,000평을 샀다.”

그리고 또?”

서소문에 작은 아파트도 하나 샀지.”

자랑 그만해라. 나 배 아프다 이놈아.”

넌 벌어놓은 것 없냐?”

만들어 놓은 건 책뿐이고 벌어놓은 것은…….”

놈은 어느새 부자가 되어 있었다. 적금도 100만 원짜리를 붓고 예쁜 아내한테 아들까지 얻었다. 손님은 온 종일 바글바글. 놈은 광화문 뒷골목의 유지가 되어 활동했다.

나와 친한 기자들은 놈의 집에 오면 나한테 연락을 했다. 자기가 와서 내 친구 장사시켜주고 있다고 알리는 거다. 그럴 때마다 나는 고맙다고 인사도 하고 때로는 내가 나가서 술을 사기도 했다. 문화부 기자들한테는 교수 작가 등 문화계 인사가 많이 따르고 술을 모두 좋아한다.

그 덕에 광화문 일대의 신문사 기자들을 많이 알게 되었고 신간이 나올 때마다 신문에 신간안내 기사를 쓰게 하여 우리 책이 종로 서적이나 출판회관에 나가면 맨 앞 진열장에 전시되어 책장사도 그런대로 되었다.

그런데 어느 날 놈이 경찰서인지 어딘지 잡혀갔다는 거다. 나는 샌님한테 연락했다.

, 박가 놈이 무슨 사고를 당한 것 같다. 가 보자.”

놈과 나 47 / 나는 서빙!

우리가 놈을 찾아간 곳은 법원이었다. 법정을 찾는데 한참 걸렸다. 우리가 들어서자 놈의 아내가 걱정스럽게 우리를 맞았다.

놈이 판사 앞에서 무슨 소린지 모를 소리를 주고받았다.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 놈은 닭장 같은 경찰차에 실려 어디론가 가 버렸다. 놈의 아내는 가게 일이 바쁘다고 급히 돌아가고 샌님과 나는 허망하여 한쪽 돌계단에 앉아 한동안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내가 물었다.

무슨 잘못을 해서 놈이 재판을 받을까?”

잘못할 놈이 아닌데…….”

그렇지? 세상에서 가장 정직하고 꼬장꼬장하고 원칙대로 살아온 놈인데 재판받을 만큼 죄를 짓다니 이해가 안 된다.”

어디로 갔는지 알 수도 없고 무슨 죄를 지은 것인지도 알 수 없으니……. 그렇다고 너나 내가 도와줄 힘도 없고 걱정이다.”

우리는 서로 무능하고 별 볼일 없는 사람이라는 것만 확인하고 법원 문을 나섰다. 다음 날 나는 궁금하여 놈의 가게로 가 보았다. 놈은 없지만 손님은 평소처럼 바글거렸다.

손님들을 비집고 들어가 놈의 아내한테 무슨 소식이라도 들을까 하여 다가가는데 한 테이블 손님이 컵을 달라기에 내가 얼른 가져다주었다. 그랬더니 다른 손님이 나를 향해 소주 한 병 추가했다.

나는 얼른 소주를 가져다주었다. 또 다른 손님이 무엇인가 가져다 달라고 하여 그것도 가져다주었다. 또 한 손님이 여기 회 한 접시 했다. 나는 그만 서빙이 되고 말았다.

놈과 나 48 / 여자한테 빼앗긴 마음

내가 왔다 갔다 하면서 손님 심부름을 하자 놈의 부인이 말했다.

이 분도 손님이세요. 이제 그만 시키세요.”

이 말에 손님 가운데 내 서비스를 받은 분이 일어서서 큰소리로 손님이신 줄 모르고 실례했습니다. 용서를.”하자 다른 사람들이 나를 주목했다. 그런데! 한쪽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어어! 심선생, 나 여기 있어요.”

돌아보니 김기자였다.

선생님이 와 계셨군요.”

이리 와 동석합시다.”

나는 얼결에 그 옆에 앉았다. 앉자마자 소주잔이 왔다. 나는 잔을 받아들고 맞은편 구석자리에 앉은 예쁜 여자를 발견했다. 그녀가 술잔을 들고 나한테 건배하자는 눈빛을 보냈다. 내가 웃으며 잔을 들어 보이자 그녀도 잔을 들었다 입술로 가져갔다.

술잔이 몇 번 오가는 사이 그녀가 잔을 들고 나한테 건배를 청했다. 나도 잔을 들고 답배를 했고, 그러는 사이에 우리는 술잔에 눈빛을 담고 묘한 감정에 빠졌다. 그쪽 젊은이들이(나도 젊었지만) 그녀가 잔을 들고 건배하는 눈길을 잡다가 내가 잔 받이를 한다는 걸 알아채고 한 녀석이 일어서니 다들 자리를 떴다. 그녀도 녀석들 뒤를 따라 나가다가 내 등을 쿡 찌르며 내 마음을 데리고 나갔다. 그 순간 묘한 감정에 나는 어지러웠다. 김기자가 갸웃거리며 물었다.

심선생, 오늘은 웬일로 술을 넙죽넙죽 잘 받으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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