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게시판/소설

오빠하고 결혼할래

웃는곰 2020. 2. 5. 17:44

오빠하고  결혼할래

1. 시냇물

 

칠십 세가 넘은 사람한테는 경험이고 추억이지만

어린이들한테는 칠십 세가 넘은 사람의 경험담은

옛날이야기가 됩니다.

 

승우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는 십 리가 넘는 산길을 꼬박꼬박 걸어 다녔습니다.

언덕을 넘고 작은 개울 징검다리를 건너 큰 고개를 넘으면 작은 고개, 그 고개를 넘어 비탈길을 가면 큰 냇물이 길을 가로막고 흘렀습니다.

 

냇가에 이르면 아이들은 모두 바지를 걷어 올리고 물을 점벙점벙 건너갔습니다. 부잣집 아이는 신발이 있어서 내를 건너면 발에 묻은 모래를 털고 신을 신지만 그렇지 못한 아이들은 모두가 맨발이라 내를 건너 곧장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였습니다.

일이학년 때는 오륙학년 형들이 업어서 건너 주고 삼사학년이 되면 혼자 다리를 걷어 올리고 건넜습니다.

 

승우도 오학년이 되자 어린 동생들을 업어 건너 주어야 했습니다.

승우는 언제나 오빠라고 부르며 따르는 1학년 수미를 업어 건너 주었습니다.

수미는 승우 외에 다른 애들한테는 업히려 하지 않았습니다. 다른 애들이 업어주려고 등을 돌려대면 아주 얄밉게 뿌리쳤습니다.

 

난 승우 오빠한테 업힐 거야.”

그리고 언제든지 승우가 와서 업어 줄 때까지 냇가에서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언제나 똑같은 말로

오빠 빨리 올 수 없어?”

하고 투정도 했습니다.

왜 나만 기다리니? 다른 아이들이 업어준다고 하지 않아?”

싫어!”

 

수미는 다른 사람의 등에는 절대 업히지 않았습니다. 승우는 아침마다 수미를 건너 주기 위하여 어떤 날은 아침을 굶고 학교 길에 나서기도 했습니다.

냇물은 일 년 내내 흐르고 아이들은 일 년 내내 그 냇물을 바지를 걷어 올리고 건넜습니다.

다른 동네는 외나무다리라도 놓고 건너다니는데 승우네 마을 사람들은 다리를 놓아주지 않았습니다.

 

냇물을 사이에 두고 이쪽 마을과 저쪽 마을이 서로 사는 구역이 다르다는 이유로 그쪽 사람이 많이 다니니 그쪽에서 서로 놓으라는 것입니다.

한번은 승우네 마을 사람들이 다리를 놓아주었는데 다른 동네 사람들이 큰 짐을 지고 건너다니다가 무너뜨렸습니다.

그리고 나서부터는 아무도 안 고치고 아예 다리를 놓지 않았습니다.

 

일학년 때 수미는 등에 업혀 물었습니다.

오빠, 나 무거워?”

아니.”

오빠, 우리 동네 길은 다리가 없어서 좋다 그지?”

좋기는

다리가 없으니까 오빠가 업어주잖아.”

너도 더 있으면 일학년 아이들 없어 건너 주어야 할 걸.”

그래도 난 오빠한테 업히는 게 즐거워. 난 날마다 일학년이었으면 좋겠어.”

난 빨리 육학년이 되었으면 좋겠다.”

?”

그냥.”

 

여름이 가고 겨울이 되었습니다.

물이 살짝 얼어서 밟고 건너기에는 얼음이 깨질 것 같고 맨다리로 건너기에는 너무 추었습니다. 그런데 수미는 얼음이 얼었다고 좋아하면서 그 위를 밟고 건너려다 얼음이 깨져 물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오빠!”

 

승우는 달려가 수미를 등에 업고 얼음물을 첨벙첨벙 걸어 건넜습니다. 등에 업힌 수미는 승우 등을 꼭 끌어안고 물었습니다.

오빠, 춥지?”

아니.”

거짓말.”

승우는 얼마나 발이 시린지 울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어린 승미한테는 아무렇지도 않은 체했습니다.

 

오빠 등은 참 따뜻해.”

……

오빠, 힘들어?”

아니.”

오빠는 힘센 말 같다. 호호호.”

승우는 눈물이 찔끔 나왔지만 참고 걸었습니다.

오빠, 나 내려 줘, 걸어갈게.”

아니야. 아니야.”

 

승우는 참고 또 참았습니다. 발바닥이 누구 발인지 알 수 없을 만큼 얼고 신발이 얼어서 발이 남의 발 같았습니다. 그래도 끙끙거리고 걷다가 미끄러졌습니다. 하마터면 수미를 업은 채 넘어질 뻔하기도 했지만 수미한테 약한 모습을 보여주기 싫어서 참고 참았습니다.

오빠, 미안해. 힘들지?”

아니.”

오빠, 낼은 안 그럴게. 알았지?”

 

알았어.”

오빠, 난 오빠가 좋다아.”

승우는 수미가 하는 말이 귀찮아졌습니다. 그래서 대답도 않고 걷기만 했습니다. 얼은 발이 빠져나가는 것처럼 시리고 힘이 빠졌습니다. 그러나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승우는 수미한테 보여주던 체면도 버린 채 털썩 주저앉아 울음보를 터뜨리고 말았습니다.

 

우와앙앙!”

승우 등에서 떨어진 승미는 깜짝 놀라 물었습니다.

오빠, 왜 그래?”

2. 호밀밭

발이 시려 승우는 엉엉 울었습니다. 수미가 승우 발을  감싸고 입김을 호호 불며 말했습니다.

오빠, 울지 마.”

……

발이 꽁꽁 얼었어. 내가 녹여 줄게 호오 호오 호오.”

승우는 부끄러웠습니다. 어린 수미한테 약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는데 발이 너무 시려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오빠, 일어나서 뛰어가자.”

?”

이럴 때는 뛰어가면 괜찮아.”

승우는 수미 손을 잡고 일어섰습니다. 수미가 칼날 바람 속을 달려가며 소리쳤습니다.

오빠아! 따라 와 봐!”

승우는 귀엽게 달려가는 수미를 보며 용기를 냈습니다. 발이 시리지만 힘을 내어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수미를 따라잡았습니다.

 

두 사람은 손을 잡고 씽씽 부는 겨울바람 속을 달려 학교로 갔습니다.

 

수미가 2학년이 되고 승우는 5학년이 되었습니다. 수미는 학교가 끝나도 운동장에서 승우를 기다렸습니다. 그러다가 승우가 교실에서 나오면 달려와 승우를 따라  나란히 걸었습니다.

냇물이 있는 곳에 이르면 승우는 날마다 같은 모습으로 무릎을 꿇고 등을 댑니다. 수미는 아주 당당히 등에 올라 헤헤거렸습니다.

빨리 일어나. 이랴이랴!”

음메에 음메에!”

 

승우는 즐거운 얼굴로 소 흉내를 내며 물을 건너 주었습니다.

늦은 봄날입니다. 하늘에는 종달새가 높이 떠서 찌찌빼빼 쫑알쫑알 노래를 하고 파란 하늘에는 그림처럼 구름 한 점이 동실동실 떠서 산동네에 그림자를 내리고 있었습니다.

내를 건너자 수미가 달려가며 소리쳤습니다.

오빠, 나 따라와 봐.”

 

수미가 달려가는 냇가에는 버드나무가 파랗게 늘어져 물그림자를 내리고 파란 보리밭 이랑으로는 봄바람이 개구쟁이처럼 장난질을 치며 수미를 따라 달려갔습니다.

바람이 불어가는 보리밭은 바다처럼 파랗게 파도가 일었습니다. 바람은 보리밭 머리 위를 쓰다듬고 보리 수염을 빗질하고 파도는 마치 허리를 잡고 웃는 누나 허리처럼 부드럽게 일렁이었습니다.

 

수미는 멀리 달려 키다리 호밀밭 속으로 숨었습니다. 승우는 그 뒤를 따르며 불렀습니다.

수미야아!”

어른보다 키가 큰 호밀밭 속으로 승우의 목소리가 빨려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수미는 어디 숨었는지 보이지 않았습니다. 승우는 수미를 찾아 그 속으로 들어가다가 발을 우뚝 멈추었습니다.

수미는 안 보이고 호밀이 산속같이 우거진 속에 낯선 청년과 동네 키다리 누나가 끌어안고 숨어 있었습니다

 

승우는 갑자기 가슴이 쿵 내려앉고 벌렁벌렁 뛰었습니다. 무엇을 훔치다 들킨 사람처럼 납작 엎드려 꿩처럼 살살 기어 호밀밭을 빠져나왔습니다.

그리고 길 쪽으로 달렸습니다. 그런데 어느새 달려왔는지 수미도 바로 뒤를 따라왔습니다.

수미는 얼굴이 빨갰습니다. 그리고 숨을 할딱거리며 물었습니다.

오빠, 뭐 봤어?”

?”

호밀밭에서 말야.”

 

아니.”

거짓말, 뭐 봤지?”

아무것도 안 보았는데.”

안 보았어?”

, 안 보았어.”

 

거짓말, 못 본 거 아니지?”

못 보았어.”

안 보았다고 했잖아?”

……

왜 말 못해?”

 

승우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부지런히 걸었습니다. 수미는 할딱거리며 따라왔습니다.

오빠, 천천히 가.”

그래도 못 들은 체하고 걸었습니다. 그리고 생각했습니다

.

키다리 누나가 왜 거기 있어? 그 아저씨는 누구야? 모르는 사람이었는데

수미는 달려와 승우의 책보(당시는 책가방이 없고 책을 보자기에 둘둘 말아 싸서 어깨에 메기도 하고 어리에 차기도 했음)를 잡았습니다.

 

그래도 빨리 갈 거야? 오빠도 봤지?”

아니.”

거짓말. 봤지?”

두 사람밖에 못 봤어.”

"호호호호, 오빠는 바보호호.“

 

3. 여우짓

호호호 오빠는 바보 호호호;”

수미는 재미있다는 듯이 웃어댔습니다.

거 봐. 안 보았다고?”

승우는 발을 멈추고 제법 심각한 얼굴로 다짐했습니다.

오늘 너도 나도 아무것도 못 본 거야. 알았지?”

?”

 

 

나도 몰라. 그렇게 하고 싶어.”

주영 언니가 왜 거기 숨이 있지?”

나도 몰라.”

우리도 보리밭에 들어가 숨바꼭질할까?”

안 돼.”

오빠, 따라와 봐.”

 

 

수미는 보리밭 사이 길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려 달아났습니다. 그러나 승우는 따라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수미가 찾을 수 없게 하려고 호밀밭 속으로 들어가 숨어서 지켜보았습니다.

저만큼 멀리 달려가던 수미는 승우가 어디쯤 따라오는지 돌아보았습니다. 그러나 따라오기는커녕 어디 있는지 보이지도 않았습니다. 맥이 빠진 수미는 털썩 주저앉아 소리쳐 불렀습니다.

 

 

오빠아! 어디 있어어!”

수미의 목소리는 파란 바람에 실려 보리밭 멀리멀리 잦아들었습니다.

넓은 들판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언덕을 향해 파란 파도를 일으키며 올라와 나무숲을 흔들고 몸부림을 칩니다. 승우는 호밀밭에 숨은 채 가만히 지켜보았습니다.

수미는 일어나 궁둥이를 툭툭 털더니 학교 길로 돌아와 두리번거렸습니다. 승우를 찾을 수 없자 갑자기 아앙하고 울며 고갯길을 넘었습니다. 숨었던 승우는 그제야 호밀밭 속에서 기어 나와 수미가 넘은 고개로 올라 비탈길을 내려다보았습니다.

 

 

꼬불꼬불한 산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고 수미 혼자 징징거리며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승우가 큰 소리로 불렀습니다.

수미야아!”

수미는 힐끗 돌아보더니 골이 나서 앞으로 막 달아나기 시작했습니다. 승우는 바람보다 빨리 달려 수미 뒤를 바짝 쫓았습니다.

수미야 미안해!”

 

 

이때 수미가 앞으로 폭 고꾸라졌습니다. 승우는 놀라 수미를 잡아 일으켰습니다. 그러나 수미는 발목을 잡고 일어서지 못하고 비명을 질렀습니다.

아야! 아야, 만지지 마!”

왜 그래? 수미야.”

오빠 때문이야, 아야 아야.”

승우는 수미 발목을 두 손으로 조심스럽게 잡았습니다. 수미는 많이 아픈 듯 소리쳤습니다.

 

 

아야! 난 못 일어나 오빠.”

그럼 어떡해?”

오빠가 업어.”

여기서 집까지?”

그럼, 나 보고 걸어가라고?”

알았다. 업혀!”

 

 

수미는 등에 업혀서 고소한 웃음을 생끗 지으며 물었습니다.

무겁지이? 오빠아!”

아니.”

거짓말.”

너 같은 애들은 열도 업을 수 있어.”

정말?”

그래, 말 시키지 마.”

, 오빠한테 업히면 난 짱이야. 나 발 다 나을 때까지 업어주어야 한다. 알았지?”

……

 

 

발이 낫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런 말 하는 거 아니야.”

좋은 걸.”

승우는 산길을 땀을 흘리며 걸었습니다. 긴 고개를 다 올라가도록 등에 업힌 수미는 새처럼 조잘거렸습니다. 한참 후에 고개 위에 올랐습니다.

오빠 힘들었지?”

 

 

승우는 대답도 하지 않고 식식거리며 이마의 땀을 손등으로 씻었습니다. 수미가 개금발로 다가와 수건을 내밀었습니다.

땀 많이 났네? 내가 닦아줄까?”

싫어.”

오빠는 불쌍해.”

뭐가 불쌍하냐?”

또 나 업고 저 아래까지 가야 되는데 안 불쌍해?”

발이 그렇게 아프냐?”

 

 

. 빨리 업어 줘!”

알았다. 업혀.”

승우가 등을 돌리고 앉았습니다. 이때 수미가 등을 확 밀어 넘어뜨리고 비탈길을 구르듯 달아났습니다.

나 잡아 봐라. 오빠가 나를 놀렸지? 용용 죽겠지.”

저게?”

승우는 그제야 수미한테 속은 것을 알고 피식 웃었습니다.

 

4

승우가 6학년이고 수미가 3학년이 된 여름입니다.

장맛비가 쏟아져 학교에서 끝나고 돌아오는 길에 냇물이 엄청나게 불어나 있었습니다.

승우는 수미를 업고 건너려 했지만 물이 너무 깊어서 업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리를 바짝 걷어 올리고 시냇물로 들어가 보았습니다. 물은 허리를 감돌았습니다.

물이 너무 깊어서 널 업을 수가 없어. 넌 내 뒤를 따라와.”

하는 수 없이 수미도 한손으로 책보를 머리에 이고 한 손으로는 치마를 걷어 올리고 건너기 시작했습니다. 수미는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채 수줍게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오빠, 돌아보면 안 된다. 알았지?”

승우는 앞으로 조심조심 냇물 가운데로 걸어 들어갔습니다. 수미가 또 다짐하듯 말했습니다.

오빠, 돌아보면 안 된다! 알았지?”

알았어.” 

물이 점점 깊어지네.”

잘 따라 와 봐.”

승우는 수미가 왜 돌아보지 말라고 하는지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나라는 지금과 달리 육이오 전생 전에는 남자나 여자나 팬티가 없었습니다. 어른이든 아이든 남자는 홑바지, 여자는 홑치마만 입고 다녔기 때문에 수미도 드러난 배가 부끄러워 그러는 것이었습니다.

두 아이들은 가까스로 내를 건넜습니다. 옷은 걷어 올렸었지만 다 건넜을 때는 흠뻑 젖어 몸에 착 달라붙었습니다. 해는 아직 많이 남았는데 구름이 밀려오며 비를 뿌리기 시작했습니다. 승우는 수미 손을 잡고 비탈 밭에 비어 있는 원두막을 향해 달렸습니다.

젖은 옷을 입고 있으면서 비를 피해 달리는 것은 머리에 비 맞기가 싫어서이고 책보 젖는 게 더 걱정이 되어서였습니다.

둘이 원두막에 도착했을 때 비는 더욱 세차게 쏟아졌습니다. 승우는 사다리를 타고 위로 올라가 수미 손을 잡아 올렸습니다. 책보를 원두막 천장에 높이 달아매 놓고 바닥에 깔린 멍석위에 앉았습니다.

바람에 비가 들이쳐 한가운데로 붙어 앉았습니다. 그러나 바람이 칠 때마다 빗줄기가 두 사람을 훑고 지나갔습니다.

오빠, 춥다, 그지?”

그렇게 춥니?”

, 많이.”

수미는 참새처럼 움츠리고 승우 가슴을 파고들었습니다. 비에 젖은 수미 얼굴에 물 흐르는 머리 몇 가닥이 이마 위로 흘러 내렸습니다. 추워서 입술은 새파란데 눈빛만은 샛별처럼 반짝거렸습니다.

비에 젖은 눈빛은 밤하늘 멀리 보이던 별빛처럼 승우 가슴에 박혔습니다.

이렇게 예쁜 얼굴이 세상에 또 있을까?’

하얗고 귀여운 얼굴이 승우 가슴에서 떨고 있었습니다.

승우는 가만히 비가 치는 수미의 등을 감싸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비가 그치기를 기다렸습니다.

수미는 가슴에서 얼굴을 살짝 들고 말했습니다.

5. 소나기

 

 

 

 

오빠, 가슴이 따뜻하다. 안 춰?”

승우도 추었지만 안 그런 척했습니다.

아니.”

남자라 그렇지?”

그럼.”

춥지만 재미있다. 그렇지 오빠?”

몰라.”

오빠. 나 누구한테 시집가고 싶은지 알아?”

……

맞춰 봐.”

?”

나 오빠하고 결혼할래!”

그런 말 하는 거 아냐.”

? 오빠는 나 싫어?”

그런 말 하면 나쁜 사람이야, 쪼그만게.”

난 오빠가 업어줄 때가 가장 좋아. 날마다 냇물을 건너주는 오빠 때문에 학교 가기 싫은 날도 학교 간다.”

그러니?”

그리고 오빠, 나는 오빠가 다른 여자 애들 업고 건너는 걸 보면 샘이 나서 밥도 먹기 싫다

짜식--.”

 

오빠, 더 꽉 안아줄래?”

안 돼. 너는 여자야.”

그래도 난 좋은 걸.”

승우는 그 애의 말에 대답을 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중얼거렸습니다.

왜 비가 그치지 않지? 빨리 가야 하는데.”

난 비가 더 왔으면 좋겠어.”

더 오면 장마 져서 큰일 나.”

오빠 가슴 참 따뜻하다.”

수미는 더 파고들었습니다. 그 애가 그럴수록 승우는 가슴이 뛰고 무슨 말로 할 수 없는 이상한 느낌이 머리를 가득 채웠습니다.

이런 게 사랑이라는 건가?’

승우는 수미의 머리에서 나는 냄새가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속으로는 그 아이가 안겨드는 것이 좋았지만 겉으로는 거짓말을 했습니다.

너 이러는 거 아냐. 여자 애가……

여자니까 그렇지. 오빠는 남자고 나는 여자야.”

……

오빠, 나 춥다 더 꽉 안아 줄래?”

승우는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도 팔에서 힘을 빼며 말했습니다.

아니야, 조금 있으면 비 그칠 거야. 저기 봐라. 시꺼먼 구름 저쪽에 파란 하늘이 보이지 않아?”

무지개도 떴는데? 참 예쁘다 그지?”

비가 쏟아지는 저쪽 하늘에는 아름다운 무지개가 떠올랐습니다.

예쁘다.”

무지개가 예뻐? 내가 예뻐?”

둘 다……

거짓말 무지개가 더 예쁘다고 생각하는 거지?”

아니.”

그럼 더 안아 줘.”

 

그건 안 돼.”

승우는 팔을 풀고 일어섰습니다. 그 사이에 검은 비구름이 몰려가고 파란 하늘이 호수처럼 열리기 시작했습니다.

여름 소낙비는 참으로 짓궂습니다. 그렇게 퍼붓던 비가 거짓말처럼 그치고 구름 뒤에 숨었던 해가 파란 하늘에 얼굴을 내밀고 벙글벙글 웃으며 불화로 같은 빛을 뿌렸습니다.

수미도 일어섰습니다. 얇은 치마가 허리에 착 달라붙었습니다. 갑자기 쏟아지는 햇살이 옷 속까지 비추었습니다.

하얀 다리며 하얀 아랫배의 선이 이상한 느낌을 주며 햇빛에 야들야들 움직였습니다.

승우는 무심코 그 치마 속에 비치는 속살을 더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눈을 돌리며 속으로 말했습니다.

그러면 안 되는 거야.’

승우와 수민은 책보를 떼어 메고 사다리를 타고 내려왔습니다. 얼마 걷지 않아 젖은 옷은 마르고 기분도 가벼워졌습니다.

오빠, 비가 또 왔으면 좋겠다.”

이젠 안 와.”

오라고 해. 그러면 오빠하고 또 원두막 가게.”

……

대답은 안 했지만 승우도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남자는 여자처럼 함부로 말하면 안 된다는 것을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았어도 알고 있었습니다.

 

6. 북한남침

1950625일 새벽 멀리서 천둥 같은 소리가 쿵쿵하고 들려오기 시작했습니다.

심한 가뭄에 시달리는 농부들은 그 소리에 어딘가 멀리서 비가 오고 있나 보다고 생각하고 비가 올 것이라는 기대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소리는 하루 종일 들려오고 다음 날은 더 크게 들려왔습니다. 산골 동네에서는 그게 무슨 소리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 소리가 나고 삼 일째 되는 날 낯선 사람들이 보따리를 이고 메고 동네로 몰려들었습니다.

 

그제야 사람들은 북한에서 전쟁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전쟁이라는 말에 사람들은 놀라 일손을 놓고 여기저기 모여 웅성거렸습니다.

전쟁이 났다네.”

김일성이가 쳐들어왔다는 거야.”

서울 쪽에 사는 사람들이 이리로 피란을 오고 있는데 우리는 어디로 피란을 간단 말인가.”

포격 소리는 북쪽에서만 나는 게 아니었습니다. 사방에서 울려 퍼지고 사람들은 불안에 떨기 시작했습니다. 피난민이 동네 앞을 지나 어디론가 줄을 지어 가는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동네 사랑방을 빌려 보따리를 풀었습니다.

그리고 며칠 안 가서 학교에는 휴교령이 내렸습니다. 그뿐 아니라 승우 담임선생님도 수미 담임선생님도 군대에 나갔다는 소문이 들릴 뿐 학교문은 잠겼습니다.

동네에서 열일곱 살이 넘은 형들은 군인이 되어야 한다고 동네를 떠났습니다. 승우 아버지도 보급대로 끌려가고 집에는 어린 아이들과 엄마들만 남았습니다. 학교를 가지 못하게 되고 며칠 뒤입니다. 수미가 승우를 만나 울상이 되어 말했습니다.

오빠, 우리 집은 피란을 간다는데 오빠네는 어떻게 한 대?”

우리는 못 가.”

?”

아버지도 안 계시고 어린 동생들과 엄마는 갈 수가 없어.”

우리는 부산 작은아버지 댁으로 피난을 간다는데 난 어떡하지?”

……

난 피난 가는 거 싫어.”

어른들이 가신다고 하면 가야 해.”

난 오빠도 못 보잖아?”

피난 갔다가 돌아오면 보게 될 거야.”

난 몰라. 난 안 가고 싶은데

다음 날입니다. 동네 사람들은 보따리를 싸서 이고 지고 피난을 떠나기 시작했습니다. 집집마다 마당을 파고 그 속에다 쌀과 반찬, 옷 등을 묻고 그 위에 다른 짚단 등을 얹어 놓아 남이 모르게 해 놓고 집을 떠났습니다.

수미네도 재간에다 소중한 것들을 묻어 놓고 재를 덮은 다음 짐을 꾸리고 길을 떠났습니다. 수미는 가기 싫다고 하다가 어른들한테 꾸지람을 듣고 눈물을 흘리며 우마차에 올랐습니다

승우는 수미가 소달구지에 실린 짐 꾸러미 위에 타고 가며 눈물을 흘리는 수미를 한없이 바라보았습니다.

수미야 잘 가, 전쟁이 끝나면 돌아와……’ 

승우는 수미네가 멀리 보이지 않을 때까지 바라보고 서서 속으로 울었습니다.

마을에는 오십이 넘은 노인들과 여자들과 아이들만 남았습니다. 청년은 군대로 가고 젊은 아저씨들은 보급대로 가고 온 동네가 어지러운 가운데 팔에 붉은 띠를 두르고 머리에 빨간 띠를 맨 공산당이 들이닥쳤습니다.

그 가운데 모자를 쓰고 팔에 빨갛고 넓은 완장을 찬 사람이 온 동네를 휘젓고 다니면서 집집마다 뒤지는데 그 사람은 바로 동네에서 가장 천대받던 대장간 조씨였습니다.

그 사람을 보고 동네 아주머니가 물었습니다.

이봐, 조씨 어떻게 된 거야?”

어제까지만 해도 동네 사람이 조가야하고 부르면 네네 하던 그 사람이 눈을 부라리며 큰소리로 윽박질렀습니다.

뭐야? 조씨? 내가 날마다 조씨인 줄 알아? 건방지게 말 버릇이 그게 뭐야. 난 이제 너 같은 것들이 부르는 조씨가 아니란 말야. 세상이 바뀐 줄을 알아야지. 내가 이 마을 담당 대장이란 말야. 말 조심해.”

조씨는 아주 기세가 등등해 가지고 동네 사람을 깔보고 반말질을 했고 아주머니들은 놀라서 조씨가 나타나면 숨었습니다.

조씨는 마을 교회로 가서 청소하는 집사를 향해 소리쳤습니다.

, 오가야, 장로놈 어디 있냐?”

며칠 전만 해도 오집사님이라고 깍듯이 머리를 숙이고 굽실거리던 조씨가 갑자기 오가야 하고 반말하는 조씨를 본 오집사는 어이가 없어서 큰 소리로 꾸짖었습니다.

뭐야? 오가야라고?”

7. 인민재판

조씨가 기세등등하여 대답했습니다.

그래, 오가라고 했다. 어쩔래, 이 병신아.”

뭐어! 뭐라고?”

오집사는 노기가 가득한 눈으로 노려보며 절름거리는 다리를 끌고 달려들었습니다. 오집사는 소아마비를 앓고 장애인이 되어 남들 다 가는 군대도 못 가고 남아 있는 사람입니다. 그가 가장 싫어하는 말은 병신이라는 말입니다. 그는 병신이라는 말에 가슴이 터질 듯한 분노를 느꼈습니다.

조씨는 아주 당당하게 가슴을 펴고 명령을 했습니다.

병신 육갑떨지 말고 내 말 잘 들어!”

병신 육갑? 네 놈이 언제부터……

 

이때 조씨가 오집사 뺨을 때렸습니다.

무엇이 어때? 감히 나를 보고 네 놈이라고?”

뺨을 맞은 오집사가 들고 있던 빗자루를 높이 치켜들었습니다.

? 네 놈이 언제부터……

허허 이 병신이 세상 변한 것도 모르고 감히 동대장한테 대들어? 너 죽고 싶지 않으면 당장 무릎 꿇어!”

오집사는 성한 사람도 아니면서 조씨의 멱살을 잡으려고 달려들었습니다. 그러나 힘이 황소 같은 조씨가 발길질을 하여 오집사를 넘어뜨렸습니다.

아이구우우!”

넘어진 오집사를 조씨가 걷어차며 소리를 질렀습니다.

 

죽어, 이 병신아!”

조씨는 교회에서 떠나 동네를 한 바퀴 돌아보고 공산당 사무실로 쓰는 이장네 사랑방으로 갔습니다. 북한 인민군소위가 버티고 앉아 조씨에게 물었습니다.

오늘 밤 정신교육이 있다. 면 담당 중대장님이 나와서 교육을 하신다. 모일만한 장소가 있나? 동무.”

교회가 하나 있습니다. 동무.”

간나 새끼들 아직도 교회 다니는 놈이 있나?”

있었지만 다 달아나고 아무도 없습니다.”

오늘 밤 교육은 교회당에서 한다. 집집마다 알려서 저녁에 모이라고 해라.”

, 알겠습니다. 동무.”

 

 

조씨는 집집마다 다니며 저녁에 교회로 모이라고 알렸습니다. 교회를 안 다니는 사람들도 공산당의 명령이 무서워서 모두 교회로 모였습니다.

면 담당 중대장이 마을 사람들 앞에 나와서 눈을 반짝거리며 입을 열었습니다.

오늘 내가 하는 말 잘 듣기요. 교회에 다니면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앞으로 나오시오. 교회 다니는 사람은 앞으로 있을 야간 교육에 참석하지 않게 해주갔소.”

이때 오집사가 일어서서 앞으로 갔습니다. 면 담당 중대장이 더 큰 소리로 물었습니다.

더 없소? 이 사람만 야간 교육에서 빼겠소.”

 

저도 나갑니다.”

박송자 집사가 일어나 앞으로 나갔습니다. 중대장이 또 다그쳤습니다.

두 사람뿐이오? 이 두 사람만 교육에서 면제하겠소. 나올 사람은 빨리 나오라.”

동네에서 술주정뱅이로 알려진 주명수 할아버지가 싱끗 웃으며 나갔습니다. 중대장이 물었습니다.

 

당신, 정말 하나님 믿소?”

믿고 말굽쇼, 이 세상에 하나님밖에 어디 믿을 데가 있습니까?”

그 말이 사실이오?”

어느 안전이라고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마을 사람은 모두 오십여 명쯤 되었습니다. 모두가 주씨 노인의 하는 꼴을 보고 속으로 비웃고 있었지만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습니다. 공산당원이 사람들을 둘러보고 나서 말했습니다.

 

 

남은 사람들은 밤마다 교육을 받아야 하오. 매일 저녁은 다섯 시에 먹고 다섯 시 반까지 여기 모이시오. 남조선 인민은 정신교육을 잘 받아야 우리 수령님의 위대하신정치신념을 알게 된다 말이오, 아시겠소?”

아무도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때 한 노인이 일어나 나가며 말했습니다.

난 밤마다 나오기는 힘들어요. 이제부터 교회에 다닐 테니 나도 교인으로 끼어 주시오.”

중대장이 대답했습니다.

좋소. 소원대로 하오.”

동네 사람들 앞에 네 사람이 나란히 섰습니다. 중대장이 들고 있는 지휘봉으로 한 사람씩 쿡쿡 찌르며 말했습니다.

이 반동분자, 너희들은 인민재판에 부쳐 처벌하겠다. 동대장 조칠성 앞으로!”

 

조칠성은 우쭐하여 목에 힘을 주고 앞으로 나가 경례를 붙였습니다.

중대장님, 명령만 하십시오.”

이 예수꾼들은 세상에 살려둘 가치가 없다. 내일 아침 동네 사람들이 다 모인 자리에서 인민재판을 하여 처벌한다.”

그리고 네 사람은 별도로 묶고 다른 사람들에게 공산당 교육을 한다고 밤이 깊도록 붙잡아 놓았다. 그러나 아무도 꼼짝 못하고 하라는 대로 앉아 졸아가면서 강연을 들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동네 사람이 모인 가운데 오집사와 묶여 있는 사람들을 세워놓고 중대장이 재판을 했습니다.

 

이 간나새끼들은 반동분자다. 이런 반동은 죽여서 야간 교육장에 안 나오게 하겠다.”

이때 주영감이 큰소리로 말했습니다.

대장님, 저는 예수를 믿지 않습니다. 살려주십시오.”

뭐 이런 간나새끼 있나. 예수꾼보다 더 나쁜 간나새끼. 조동대장, 이 늙은이 허리를 분질러놓아라.”

조칠성이 몽둥이를 들고 나서서 주명수 노인 앞에 턱을 받쳐 들고 말했습니다.

이 주가야, 내가 너한테 얼마나 설움을 당했는지 동네 사람들은 다 안다. 지금이 어느 세상인데 이랬다저랬다 하는 거야, 누구를 놀리나, ?”

주노인은 기가 차서 입을 딱 벌리고, 오집사는 분노에 주먹을 부르르 떨었습니다. 이때 중대장이 명령했습니다.

 

죽어도 예수를 믿겠다는 자는 앞으로!”

오집사가 묶인 채 앞으로 나왔습니다.

8. 총소리

 

중대장이 눈을 부릅뜨고 남은 사람을 향해 말했습니다.

너희들은 저 간나새끼보다 더 악질이다. 이랬다저랬다 기회만 노리는 간나들!”

중대장은 동 담당 소위와 동대장 조씨에게 명했습니다.

이 간나들을 총살에 처한다. 조칠성 동대장, 이 간나들을 저 산속으로 끌고 가고 소대장은 즉시 총살하라.”

 

마을 사람들은 누구도 입을 열지 못하고 벌벌 떨었습니다. 조집사 어머니가 중대장 앞에 무릎을 꿇고 빌었습니다.

대장님. 우리 아들을 살려주세요. 무슨 죄가 있다고 이러십니까?”

예수 믿는 간나들은 다 반동분자다. 에미나도 예수 믿는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 죄라고 했습니다.”

뭐라고? 그럼 예수 안 믿는 저 사람들과 내가 죄인이란 말임매?”

그러합니다. 대장님.”

중대장은 송장 같은 얼굴이 되어 소리쳤습니다.

조칠성 동대장, 이 에미나도 끌고가라.”

 

!”

중대장이 마을 사람들을 위협하는 소리로 명령했습니다.

오늘 인민재판은 이것으로 끝내갔소. 다들 돌아가서 당과 수령님을 위하여 열심히 일하시오.”

오집사 어머니까지 오랏줄에 매인 채 칠성이가 끌고 가는 대로 산속으로 끌려갔습니다.

이웃끼리 날마다 웃고 이야기하며 순박하게 살던 평화스런 동네에 먹물 같은 공포가 내리눌렀습니다. 공산당 총 앞에 모두가 겁에 질려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습니다.

꽁꽁 묶인 채 총을 멘 소대장과 조칠성에게 끌려 산등성이를 넘어가는 사람들은 고개를 돌려 마을 사람들에게 눈인사를 했습니다.

 

입은 열지 못해도 그 눈빛은 모두들 평안히 살기 바라오.” 하는 마음을 담은 눈빛이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누구 하나 잘 가라는 인사도 살려달라는 애걸도 못하고 미어진 가슴을 쓰다듬을 뿐 모두가 벙어리가 되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흩어져 가고 얼마 안 있어 호랑이골 산속에서 총소리가 메아리치며 들려왔습니다.

빵 빵 빵 빠앙-’

그 소리가 무엇인지 아는 마을 아주머니들은 광목치마로 눈물을 닦으며 어린 자식들을 품에 안고 울 뿐 아무 말도 항의도 못했습니다.

하루아침에 세상이 바뀌어 동네에서 가장 천대받던 조칠성이가 빨간 완장을 두르고 온 동네 사람을 종 부리듯 해도 누구 하나 말 한 마디 함부로 못했습니다. 다만 황소처럼 날뛰는 조칠성이가 무서워서 사람들은 벌벌 떨 뿐이었습니다.

 

그러는 가운데도 밤이면 어디서 숨었다가 오는지 낯선 피난민들이 이집 저집으로 기어들었습니다. 조칠성이는 밤잠도 안 자고 마을로 숨어드는 피난민을 찾아내어 소대장한테 일러바쳤습니다.

승우네 집에도 밤중에 한 가족이 찾아들어 아주 작은 소리로 부르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주인님 계신가요?”

승우 어머니가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내다보았습니다.

누구시오?”

9 피란민

 

밖에 사람이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말했습니다.

피난민입니다. 신세 좀 지으면 안 되겠습니까?”

얼굴은 안 보여도 목소리가 유순했습니다. 어머니는 작은 소리로 말했습니다.

그러고 있지 말고 어서 안으로 드시지요.”

부부인 듯한 젊은 사람과 어린 여자 아이 하나가 들어섰습니다. 가물가물한 등잔불을 켜놓고 문을 광목치마로 가렸습니다.

 

전쟁이 나고 며칠 안 되어 사람들은 밤에 불을 켜면 문을 가리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밤에는 불빛이 밖으로 새어나가지 못하게 하라는 지시 때문이었습니다.

어머니가 물었습니다.

어디서들 오셨소?”

서울서 왔습니다.”

시장하실 텐데……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잠깐만 기다리시지요.”

 

어머니는 밖으로 나가 감자를 껍데기도 벗기지 않고 삶아가지고 들어왔습니다.

많이 시장할 텐데 이거라도 드시지요.”

딸인 듯한 여자 아이가 엄마 아빠를 돌아보며 먹어도 좋을까요 하는 눈빛을 보냈습니다. 아이 아빠가 고개를 끄덕이자 아이는 감자를 껍질도 벗기지 않고 먹었습니다. 승우 어머니가 물을 따라 주며 말했습니다.

급히 먹으면 체한다. 물마시고 먹어라.”

감사합니다. 아주머니.”

 

여자 아이의 엄마가 겸손하게 머리를 숙여 인사를 했습니다. 어머니는 여자 아이를 보고 작은 소리로 말했습니다.

예쁘고 살결이 곱기도 하다. 이런 예쁜 것이 배가 많이 고팠던가 보구나.”

아이 뒤를 이어 엄마 아빠도 감자를 먹었습니다. 어머니는 두 사람을 살펴보며 조심스럽게 말했습니다.

이 동네에서 남자는 머물 수가 없어요. 저들한테 들키면 잡혀갑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아이 엄마가 물었습니다.

 

아이 엄마와 아이는 우리 사랑방에 머물면서 우리 친정 조카라고 하시고 아기 아빠는 숨어야 합니다.”

잠시 무거운 침묵이 흘렀습니다. 아이 아빠가 구원을 청하는 눈으로 승우 엄마를 바라보았습니다.

아이 아빠는 오늘 밤 숨어야 합니다.”

그러면서 승우를 바라보았습니다.

얘야, 너 우리 뒷밭 무 구덩이 알지?”

.”

 

아저씨 모시고 그 무 구어덩이로 가거라.”

어머니는 아이 아빠에게 눈길을 돌리고 말했습니다.

지금 이 애를 따라 가요. 우리가 겨울이면 무를 저장하는 무구덩이가 있어요. 그 속에 들어가 숨어 계시면 밤마다 먹을 것을 보내드릴 테니 그리 아세요.”

이렇게 은혜를 베풀어주시니 감사합니다.”

승우는 엄마가 싸주는 보따리를 들고 아무도 모르게 아이 아빠를 그 무 구덩이로 안내했습니다.

구덩이는 한 사람이 머물 만큼 넓었습니다. 바닥에 가마떼기를 깔고 그 위에 요와 이불을 폈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아저씨 안녕히 주무세요. 아귀는 짚단으로 가려서 아무도 몰라요.”

고맙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정승우입니다.”

승우, 고맙다. 조심해 가거라.”

다음 날 아침 조씨가 전에 없던 총까지 메고 동네를 뒤지며 승우네 집까지 왔습니다. 낯선 아이를 보자 눈을 부릅뜨고 물었습니다.

이 아이는 누구요?”

10 없음

 

11. 거짓말

깜짝 놀란 여자 아이가 엄마 품속으로 파고들었습니다. 승우 어머니가 대답했습니다.

이 애는 내 조카고 이 사람은 친정 올케라오.”

조씨가 문초하듯 물었습니다.

언제 왔소?”

어제 저녁 무렵에 왔어요. 걸어서 오느라고 늦었다오.”

이 계집아이와 에미나이뿐이오?”

며칠 사이에 조씨는 북한에서 오기라도 한 듯 이북 사투리까지 흉내를 냈습니다.

 

그렇다오, 우리 친정 오빠는 인민군에 자원입대하면서  당분간 우리 집에 가 있으라고 했다오.”

그게 사실이오?”

조씨가 갑자기 아이 엄마한테 물었습니다. 당황한 아이엄마는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네에.”

오늘 밤 예배당에서 교육이 있소. 한 사람도 빠짐없이 나와야 하오, 아시것소?”

도두가 겸손히 대답했습니다.

, .”

집으로 돌아온 어머니는 아이 엄마에게 친정집에 대하여 설명해 주고 진짜 친정 오라버니 가족처럼 하라고 일렀습니다.

 

 

저녁때면 온 동네 사람들이 다 교회당으로 모였습니다. 만약 참석하지 않으면 반동분자로 인민재판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아무도 거역하지 못하고 교육에 참석했습니다.

교육은 김일성 찬양 노래와 김일성이 얼마나 위대한 지도자인가를 강조하고 그 앞에 모두 충성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같은 교육을 밤마다 귀가 닳도록 하여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지만 싫다고도 못하고 그들이 하라는 대로 만세도 부르고 노래도 불렀습니다.

교육이 끝나 돌아온 어머니는 승우한테 음식보따리를 싸주면서 무구덩이로 보냈습니다.

 

 

피난 온 지 보름쯤 되었을 때 아이 이름은 윤민자이고 아이 아빠는 윤성춘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민자 엄마가 말했습니다.

승우 어머님 고맙습니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전쟁이 빨리 끝나야 한 텐데 걱정이우. 변변치 못한 음식을 먹는데 무슨 은혜요. 서울서는 무슨 일을 하시었수?”

우리는 종로에서 인쇄소를 하다가 왔습니다. 갑자기 피난길에 짐을 챙겼는데 아이 아빠가 다른 것은 다 놔두고 백노지만 한 아름 지고 왔습니다.”

그러면서 온 보따리를 풀어 보여주며 말을 이었습니다.

 

피난을 가면 어디서든지 인쇄를 할 일이 있을 것이라면서 종이가 있어야 한다고 가지고 온 것이 겨우 이것이랍니다.”

보기 힘든 하얀 종이가 펼쳐지자 승우는 신기한 눈으로 들여다보았습니다.

엄마, 이 종이 학교에서 그림 그릴 때 쓰는 도화지잖아요.”

그래 도화지로구나. 종이가 커서 그림 그리기보다는 창호지 대신 찢어진 문을 발라도 좋겠다.”

그렇지 않아도 안방 건넌방 사랑방 문이 종이가 낡아서 너풀거렸습니다. 어머니가 종이를 쓰다듬으면서 물었습니다.

 

 

이 종이가 꽤 비싸지요?”

저도 잘 모르겠어요. 필요하시면 몇 장 드릴게요.”

민자 엄마가 문짝 숫자대로 넉 장을 내놓았습니다. 그 날 승우네 문들은 새 옷을 갈아입고 환하게 웃었습니다.

그것을 본 이웃 사람들이 백노지를 사가기 시작했습니다. 백노지 두 장에 보리쌀 한 되씩을 주고 가져갔습니다.

승우는 휴학이라 낮에는 할 일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뒷산에 올라가 수미가 가족과 피난 간 고갯길을 바라보며 수미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피난 갔던 사람들은 다 돌아오는데 수미네는 왜 아직도 오지 않을까. 수미는 무얼 하고 있을까……

언제 왔는지 민자가 소리 없이 곁으로 다가와 말을 걸었습니다.

오빠,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고 있어?”

민자니?”

난 오빠를 만나는 순간부터 오래 전부터 알던 사이같이 느껴졌어.”

승우도 그랬습니다. 처음 본 민자의 눈빛이 가슴속으로 파고드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대답은 달랐습니다.

 

그러니? 난 안 그런데.”

내가 오빠 맘에 안 든다는 뜻이야?”

그런 건 아니고……

오빠 고마워.”

뭐가?”

밤마다 우리 아빠 음식 날라 주고……

그게 뭐가 고마우냐?”

고맙지. 오늘 밤부터는 내가 날라다 드릴까?”

 

안 돼, 위험해.”

그럼 오빠하고 같이 가면 안 될까. 나도 아빠가 보고 싶은데.”

그러다가 조씨한테 들키면 큰일 나.”

딱 한 번만 같이 가게 해 줘.”

승우는 민자의 맑은 눈빛과 하얀 피부가 좋았습니다. 그러나 수미를 생각하며 민자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마주하고 이야기하고 바라보는 민자는 날이 갈수록 예뻐 보였습니다.

말하는 것도 깜찍하고 걸어가는 모습도 예쁘고 웃을 때는 더 예뻐 보였습니다. 어머니도 그 모습을 보며 같은 말을 몇 번씩 하셨습니다.

참 예쁘기도 하다. 어쩌면 살결이 배꽃같이 고우냐. 웃을 때도 배꽃을 보는 것 같다. 난 어려서부터 배꽃을 좋아했는데 네가 꼭 배꽃 같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그럴 때마다 승우도 곁눈질로 민자를 흘깃거렸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민자가 수미보다 예쁘고 고왔습니다. 수미가 반달이라면 민자는 보름달같이 밝고 시원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12. 패잔병

승우는 밤마다 어머니가 싸주시는 음식을 들고 민자 아빠한테 갔습니다. 남들 눈을 피해 몰래 가서 무구덩이 뚜껑을 열고 음식을 들이밀어 넣고 재빨리 돌아왔습니다.

누가 보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밭 귀퉁이를 살금살금 내려오는데 가까이서 무슨 소리가 났습니다.

승우는 깜작 놀라 그 자리에 굳어버린 채 서 있었습니다. 누구냐고 물어볼 수도 없는데 킥킥거리며 숨을 죽이고 웃는 소리가 민자 목소리 같았습니다.

민자냐?”

, 나야.”

왜 여기까지 왔어?”

 

아빠가 너무 보고 싶어서.”

안 돼, 들키면 큰일 나.”

승우가 민자 손을 잡고 비탈길을 내려오는데 저쪽 모퉁이에서 발소리가 쿵쿵 들려왔습니다. 순간 승우는 민자를 꼭 끌어안고 납작 엎드렸습니다.

조씨가 소대장과 순찰을 돌면서 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종간나새끼가 이 근처를 밤마다 돌아다닌단 말이오.”

누가 말임메?”

아주 쥐새끼 같은 놈이오.”

승우는 가슴이 쿵하고 내려앉았습니다.

쥐새끼라고? 그 간나새끼가 몇 살임메?”

육십도 넘은 여우같은 늙은이가 밤마다 이쪽에서 저쪽으로 왔다갔다 하는데 그 이유를 모르겠단 말입네다.”

그 아바이 반동 아이오?”

반동은 아닙네다.”

 

그럼 됐소.”

두 사람이 저만큼 걸어갔을 때 승우는 숨을 크게 내쉬었습니다. 그리고 안고 있던 민자를 밀쳤습니다.

, 다시는 이런 짓 하지 마, 알았지?”

알았어. 그런데 오빠……

뭔데?”

오빠가 안고 있으니까 가슴이 두근거렸어.”

……

승우는 아무 대답도 않고 부지런히 걸었습니다. 조씨 때문에 놀라 두근거리는 가슴이 아직도 가라앉지 않았는데 민자는 엉뚱한 소리를 하고 있어서 미웠습니다.

집으로 돌아와서도 말없이 어머니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다녀왔습니다.”

 

수고했다. 별일은 없었지?”

오다가 들었는데요, 조씨가 뒷집 순배 할아버지를……

어머니가 말을 막았습니다.

순배 할아버지가 왜?”

밤에 어디를 왔다 갔다 한다면서 뒤를 밟고 있는 것 같아요.”

넌 아무것도 모르는 척해라. 알았지?”

무슨 일이 있나요?”

 

며칠 전에 끌려갔던 순배 아버지가 돌아왔는데 집 마루 밑을 파고 숨겼다가 조씨가 자꾸 조사를 다니기 때문에 저쪽 산 속에 있는 금정 구덩이에 숨겼다. 그리고 밤마다 음식을 날라다 주고 있어. 조씨한테 들키면 큰일 나는데.”

그런 것도 모르고 나는 조씨가 나를 보고 하는 말인 줄 알고 얼마나 놀았는지 몰라요.”

조심해야 한다. 만약 민자 아버지가 들키는 날이면……

알았어요.”

 

전쟁이 나고 두 달이 지났습니다. 땅속에 숨은 사람들은 밖으로 나오지도 못하고 어른들은 들에서 일을 하고 밤에는 교회당에서 교육을 받았습니다.

승우는 날마다 민자를 데리고 산으로 들로 냇가로 다니며 나무 열매도 따 먹고 가재도 잡으면서 재미있게 물놀이도 했습니다.

민자 엄마는 승우 어머니를 따라 다니면서 들일을 거들다가 얼굴이 새까맣게 탔습니다. 그러면서도 승우가 자기 딸을 동생처럼 데리고 다니는 것을 대견하게 생각하고 좋아했습니다.

한여름이 지나고 구월 어느 날입니다. 갑자기 인민군이 여기저기서 나타나더니 동네 앞을 지나 북쪽으로 줄을 이어 갔습니다. 모두가 지친 모습으로 총을 질질 끌며 동네 뒷산을 넘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수군거렸습니다.

저놈들은 패잔병이야. 공산군이 패하여 달아나는 거야.”

자유 세상이 다시 돌아오고 있어.”

미군이 인천 상육작전에서 성공을 했다는 거야.”

 

동네 사람을 들볶고 교육을 시킨다고 큰소리치던 소대장이 어디로 갔는지 사라졌습니다. 조씨가 소대장을 찾아 헤맸지만 소대장은 어디도 없었습니다.

그렇게 기세등등하던 조씨가 당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마을 사람들이 몽둥이를 들고 몰려들며 소리쳤습니다

빨갱이 조가 놈을 죽여라!”

조가를 죽여라!”

그 소리에 조씨는 혼비백산 하여 뒷산 속으로 인민군이 넘어가는 산길을 따라 달아났습니다.

인민군은 며칠을 두고 떼를 지어 북으로 달아나고 뒤를 이어 국군이 들어왔습니다. 그제야 마을 사람들은 먹장구름이 걷힌 하늘을 보듯 기뻐서 만세를 부르며 춤을 추었습니다.

마침내 땅 속에 숨었던 민자 아버지가 나오고 순배 아버지도 굴속에서 나와 가슴을 폈습니다.

 

잠깐 얼굴을 보고 무구덩이에서 여름을 난 민자 아빠는 승우 어머니한테 큰절을 올렸습니다.

아주머니, 이 은혜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승우한테도 정이 담긴 눈길로 말했습니다.

고맙다, 밤마다 음식을 나르느라고 수고 많았다. 내 너의 고마운 마음 잊지 않으마.”

학교도 개학을 하였고 아이들이 모두 학교에서 만났지만 안 보이는 아이도 있었습니다. 피난 가서 오지 않은 아이도 있고 전쟁에 죽은 아이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젊은 선생님들은 한 사람도 안 보였습니다. 모두 군인이 되었거나 전사했다고 했습니다.

민자도 승우네 학교에 편입하여 사학년이 되었습니다. 국군이 압록강까지 밀고 올라갔다가 중공군이 인해전술로 밀고 내려와 14후퇴를 하였습니다. 그렇게 밀리기도 하고 다시 밀고 올라가기도 하는 동안 겨울이 지나고 봄이 왔습니다.

승우는 우수한 성적으로 초등학교를 졸업하였지만 진학을 못하고 집안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시끄럽던 총소리 대포 소리도 멀리 북으로 올라갔고 마을 교회에서는 평화의 종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습니다.

민자 아버지는 서울로 돌아갈 준비를 했습니다. 그리고 승우 어머니께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주머니, 그 동안 신세를 너무 많이 졌습니다. 이 은혜를 갚을 길은 없고 승우를 제가 데리고 서울로 가서 중학도 보내고 제 자식처럼 돌보겠습니다.”

과분한 말씀입니다. 무얼 그렇게까지……

아닙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 있다면 승우를 훌륭한 사람이 되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서울로 보내주시면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뜻은 고맙지만……

13 쌍가락지

 

승우는 민자네 가족을 따라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서울은 엉망이었습니다. 도로도 집도 무너지고 흐트러지고 거지꼴을 한 사람들은 모두 우왕좌왕했습니다.

승우는 민자 아버지를 도와 무너진 인쇄소 벽을 고치고 방을 꾸미고 며칠 동안 정신이 없었습니다

 

민자는 다니던 학교에 들어가고 승우는 낮에 인쇄소 일을 돕다가 야간중학교에 가게 되었습니다. 전쟁이 끝난 뒤인 데다 다른 인쇄소들은 모두 불에 타서 없어졌는데 민자 네 인쇄소는 작업을 하게 되자 일이 밀려들었습니다. 민자 아버지는 얼마 안 있어서 부자가 되었습니다.

민자도 고등학생이 되었고 승우는 졸업을 했습니다. 그러는 동안 민자는 승우를 오빠라고 부르면서도 속으로는 자기 신랑감으로 생각하고 적극적으로 따랐습니다. 그 것을 안 윤성춘 사장이 둘 사이를 떼어놓으려고 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넌 이제 아이가 아니야. 다 큰 처녀애가 승우를 너무 가까이 하는 건 안 좋다.”

난 승우 오빠가 좋은 걸요.”

좋은 것하고 가까이 하는 건 달라.”

난 승우 오빠 아니면 다른 사람은 싫어요.”

 

 

세상모르는 소리 말아. 넌 우리 인쇄소를 먹여 살리는 삼정물산 사장님이 좋아하신다. 그분이 자기 며느릿감으로 관심을 가지고 계셔.”

싫어요.”

아빠 말을 들어야 해.”

나도 다 컸어요. 좋고 나쁜 것을 선택할 줄 안다구요.”

그러니까 조심하라는 거야. 너 대학을 마치면 바로 시집보낼 거야. 승우는 안 돼. 생각해 봐라 그 애가 고맙기는 하지만 뭘 볼 게 있냐. 야간 고등학교에 대학도 못 가고 이제 인쇄소 직공이나 해야 할 아이란 말이다.”

그래도 싫어요.”

 

그 날 민자는 자기 방에 들어가 이불을 뒤집어쓰고 울었습니다.

다음 날 민자는 굳은 결심을 하고 승호한테 말했습니다.

오빠, 난 오빠가 좋아. 오빠도 나 좋아하지?”

그런 건 왜 묻는 건데?”

난 오빠하고 결혼할 거야.”

뭐라고? 난 안 돼!”

왜 안 되는 건데? 내가 싫어?”

너하고 나는 사는 물이 달라. 넌 옛날의 민자가 아니야. 나도 옛날 승우가 아니고.”

그게 뭔데?”

그런 게 있어. 넌 어른들이 하시는 대로 따라야 해.”

승우는 민성춘 사장한테 이미 둘 사이에는 인연이 맺어질 수 없는 사이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민자를 달래는 것입니다. 그러나 민자는 달랐습니다.

 

 

민자가 대학생이 되고 승호는 인쇄소 과장이 되었습니다. 민자는 부모님이 보는 앞에서도 승우를 사랑한다는 몸짓을 해 보였습니다. 그래야 자기 뜻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뿐 아니라 승우한테도 적극적으로 사랑한다는 말을 하기도 하고 하루는 쌍가락지를 가지고 나타났습니다.

오빠, 난 오빠가 아니면 아무한테도 시집가지 않을 거야. . 이것 받아.”

그게 뭐냐?”

손 내밀어 봐.”

승우가 손을 내밀자 가느다랗고 반짝이는 가락지를 손에 끼워주며 말했습니다.

이제 오빠는 내가 묶었어. 나하고 똑같은 반지를 끼고 있다는 걸 잊으면 안 돼, 알았지?”

, 장난이 지나치면 안 돼.”

장난 아이야. 오빠는 이제 내 분신이야.”

넌 세상을 그렇게 모르냐?”

세상이 어떤 건데?”

세상은 네 생각과 다르다는 걸 알아야 해.”

 

 

어떻게 다르냐구?”

너하고 말해 뭘 하겠냐.”

오빠, 그 반지 빼면 안 돼, 알았지?”

민자는 반지 낀 예쁜 손을 내밀어 승우 손에 맞추어 보고 달아났습니다.

오빠, 이 세상 끝날 때까지 나를 잊으면 안 돼! 알았지?”

승우는 반지를 만져 보았습니다. 속으로는 민자가 좋았지만 좋아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민자 곁에서 떠나야 한다는 생각이었습니다.

다음 날 승우는 아무 대책도 없이 민자네 집을 나왔습니다. 알게 나오려면 복잡하고 민자가 놓아주지 않을 것 같아 몰래 길로 나섰습니다.

 

 

인쇄소에서 일만 하다가 밖으로 나오니 어디로 가야 할지 막막했습니다. 그래서 발길 닿는 대로 가다가 파고다 동원 긴 의자에 앉아 흘러가는 구름만 멍하니 바라보았습니다.

이때 예수전도대가 나타나 하나님을 믿으라고 사람들에게 전단지를 뿌리고 있었습니다. 그 중에 한 사람이 가까이 다가오더니 물었습니다.

젊은이 하나님을 아시오?”

 

14

14.  나중에

우리 고향에도 교회가 있습니다.”

교회에 다녀 보셨소? 어때요? 우리 전도대에 들어와 봉사해 보지 않으시겠소?”

봉사요?”

, 싫어요?”

봉사라면……

지금은 전쟁 중이라 모두가 가난하고 살기 힘들어요. 이럴 때는 사람보다 하나님을 믿는 길밖에 없어요.”

하나님을 믿어요?”

 

 

사람을 못 믿고 세상을 못 믿는 판이오. 누구를 믿겠소. 하나님밖에 믿을 대상이 더 있겠소.”

……

따로 하는 일이 없으면 우리를 따라 오시오. 외국 선교사님들이 하는 선교부에 가면 성경공부도 할 수 있고 도움도 받으며 봉사할 수 있어요.”

먹고 자는 문제는요?”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이 하라는 대로만 하면 됩니다.”

승우는 망설이다가 그들을 따라 선교부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신학을 하게 되고 목사가 되어 교단에서 파송하는 교회를 따라 부산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새로 부임한 부산교회는 가난한 사람들로 우글거렸습니다. 못 먹어서 비쩍 마른 사람, 병든 사람, 노숙자 등 전쟁이 남기고간 걸레 차림의 온갖 인간이 모두 교회에 모여 있었습니다. 공산군이 짓밟고 간 서울은 그렇다 치고 부산은 좀 나을 줄 알았는데 부산 역시 서울같이 가난의 그림자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승우는 설교 자료가 될 만한 책을 사기 위해 서점을 찾아갔습니다. 전쟁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한 중이라 서점에도 겨우 몇 권의 책이 있을 뿐 초라했습니다. 그래도 이런 서점이 있다는 것만도 여간 다행이 아니었습니다.

서점 안을 둘러보며 책을 찾고 있을 때 여자 주인인지 종업원인지 알 수 없는 아가씨가 다가와 물었습니다.

무슨 책을 찾으시나요?”

승우는 눈길을 서가에 던진 채 대답했습니다.

설교 자료가 될 만한 책이 없을까 해서 찾는 중이지요.”

 

 

이렇게 말하면서 고개를 돌려 상대를 바라보았습니다. 승우와 얼굴이 마주친 여자가 갑자기 놀라 입을 딱 벌렸습니다.

어마!!”

?”

승우도 상대를 보는 순간 눈에 불이 켜졌습니다.

아니, 너는?”

오빠, 나 알겠지?”

수미?”

 

 

맞아, 나 수미야. 오빠 어떻게 여길……

넌 어떻게 된 거야?”

반갑다 우리 저리로 가서 이야기해.”

무모님은?”

아버지는 도매서점에 책 사러 가시고 어머니는 집에 계셔. 오빠는 어떻게 여기까지 왔어?”

그렇게 되었지.”

오빠, 결혼했어?”

아니, ?”

난 오빠 기다리고 있었어.”

뭐라고?”

 

 

언젠가 오빠를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한 달 전에 고향에 가서 들었지. 오빠가 서울로 갔다는 말.”

넌 언제나 명랑해서 좋아.”

인생은 즐겁게 사는 것이 유익하잖아. 이왕이면 웃으며 하루는 보내는 것이 찡그리고 보내는 것보다 얼마나 좋아.”

네 말이 맞다.”

오빠, 지금은 어디 살고 있어?”

차차 알게 된다.”

우리 집에 갈까? 엄마도 만나보고.”

나중에.”

오빠, 어디서 어떻게 사는지 말해 줘.”

나중에.”

안 돼. 난 오빠 따라갈 거야.”

나중에.”

나중에, 나중에 그 말밖에 안 배웠어?”

너 이제 어른이 되었다.”

 

오빠도 아저씨가 되었는걸.”

승우는 설교의 이론과 실제라는 책을 골랐습니다.

이 책을 사고 싶다. 얼마지?”

그 책값 없어.”

얼만데?”

거저, 거저야.”

장난하지 말고.”

장난 아니야. 오빠한테 무엇은 아끼겠어.”

그럼 오늘 외상이다.”

이런 만남이 있고 두 사람의 관계는 옛날보다 더 성숙한 교제가 되었습니다. 수미는 승우가 교회 목사가 되었다는 것을 알고 안 다니던 교회도 나가고 어른들의 허락을 받고 결혼까지 하여 부부가 되었습니다

수미 아버지도 승우의 전도를 받아 교회 장로가 되고 온 집안이 기독교 가정이 되었습니다.

휴전이 되고 전쟁의 위협이 끝나고 몇 년이 지난 다음 수미 아버지는 서울에 큰 서점을 내었고 승우도 규모가 큰 교회 담임목사가 되어 서울로 왔습니다.

수미는 성실하게 사모 노릇을 해 주었고 수미 아버지는 장로로 목사 사위를 잘 돕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하여 수미는 오빠하고 결혼 할래 하던 말을 이루어 행복한 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초라한 차림의 청년이 승우를 찾아와 상담을 청했습니다.

목사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15

16. 산송장

 

허름한 차림의 성도가 허리를 꾸뻑했습니다.

목사님 심방하실 곳이 있어요.”

어디죠?” 

저기 철도다리 옆 천막집 있잖아요?”

.” 

거기 아주 불쌍한 사람이 있어요.”

거기라면 잘 아는 곳입니다거지들이 사는 천막촌으로

어쩌다 가면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어 코를 막아야만

지나갈 수 있는 빈촌입니다.

그건 동네도 아닙니다.

세상에는 없어야 할 동네가 거깁니다.

 

 

거기로 심방을 가자는 말입니다. 싫지만 거절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럽시다, 그런데 오늘은 약속이 있어서 안 되고 다음 주일에 갑시다.”

감사합니다, 목사님.”

그 성도는 허리를 있는 대로 숙여 인사하고 돌아갔습니다.

개척 교회 같았으면 그 시간에 당장 허겁지겁 달려갔을 테지만 지금은 그게 아닙니다.

다음 주일에 그곳으로 갈 생각을 하니 가기도 전에 손이 코로 갔습니다.

승우는 오만하다고 스스로를 꾸짖고 회개를 한다고 하면서도 진심으로 회개가 안 되었습니다말로만 하나님 죄송합니다, 하고 변명을 할 뿐.

일주일은 금방 지나고 약속한 주일이 왔습니다.

 

예배시간에 둘러보니 그 성도가 와서 한쪽 귀퉁이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가 오늘은 오지 않았으면 하고 은근히 바라고 있던 승우였습니다.

다른 훌륭한 목사님들이 내 속을 알면 당장에 목사직에서 옷을 벗으라고 꾸짖을 테지만 내 진심은 다른 목사님들같이 고고하지 못하니……

예배가 끝나자마자 그 성도가 다가오면서 환하게 웃었습다.

목사님 안녕하세요? 오늘 말씀에 은혜 많이 받았습니다.”

그러세요?” 

약속하셨잖아요? 오늘이에요.”

, 기억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성도는 좋아서 몇 번씩 허리를 숙여 보였다.

 

승우는 담담히 그 성도의 뒤를 따라 걸었습니다. 가기 싫은 빈촌, 생각도 하기 싫은 동네를 그 성도가 아내하는 대로 따라 갔습니다.

전동차가 가끔 천둥소리를 내고 지나가고 가물어 바짝 마른 길바닥에서는 흙먼지가 풀썩풀썩 일어나 하늘을 덮었습니다.

서울이 다 포장되어도 거기는 영원히 비포장도로로 그렇게 비참한 사람들 머리 위로 흙가루를 끼얹으리라.

가기 싫은 동네, 설명하기조차 싫은 너절한 천막집 몇을 지나 다 무너져가는 천막집 안으로 성도가 들어갔습니다.

기가 막혀 주변을 두리번거리자 안에서 불렀습니다.

목사님 들어오세요.”

 

승우 고삐에 끌려가듯 구부리고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부엌도 아니고 방도 아닌 낡은 다다미가 깔린 단칸방이었습니다.

알 수 없는 냄새가 코를 푹 찔러 구역질이 나는 것을 억지로 참고 성도가 가리키는 자리로 가 앉았습니다.

천막을 찢어 낸 작은 창으로 빛이 들어와 생각보다 어둡지는 않았습니다.

남자인지 여자인지 알 수 없는 환자 같은 사람이 바닥에 누워 있어서 그 사람을 들여다보았습니다.

허연 머리는 흐트러져 땅바닥에 깔려 있고 바싹 마른 해골 같은 얼굴이 햇빛을 받지 못해서인지 박속처럼 허옇습니다.

 

피라고는 한 방울도 흐르지 않는 듯 파리하고 백짓장 같은 얼굴, 벌린 입술 사이로 빠지다 남은 이빨이 빠끔히 내다보였습니다.

성도가 그를 향해 불렀습니다

할망, 눈 좀 떠 보셔어.”

누구여어?” 

목소리가 여자였습니다.

천득이가 왔어.”

. 알았어어. 또 누가 왔어어?”

우리 교회 목사님이 오셨어어.”

목사님이?” 

 

여자가 눈을 번쩍 떴습니다. 늙어서 주름이 지고 볼 것 없는 얼굴에 눈빛만은 불을 밝힌 듯 동굴처럼 움푹 들어간 속에서 환히 비쳐 나왔습니다.

하나님 믿고 싶다고 해서 목사님 모시고 왔어어.”

이렇게 추한 곳을 오시게 해서 안 되지이.”

여자가 입을 열 때마다 심한 악취가 났습니다. 그 냄새가 집안에 배어서 그렇게 역했던 것입니다.

승우는 숨쉬기가 거북스러워 입도 열 수가 없었습니다. 방안에는 아무것도 없고 구석에 요강인지 뭔지 하나가 있고 깔고 누운 요와 덮은 이불조가리가 전 재산인 것 같았습니다. 사과상자에 그릇이 서너 개, 냄비 하나. 사람이 사는 집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짐승 우리 같았습니다.

여자가 목사를 바라보았습니다.

 

 

두억시니 같은 몰골에 어울리지 않는 눈빛이 마음을 어지럽혔습니다.

어디 아프신 데는 없으십니까?”

아픈 데 투성이지요오. 그러나 말해 무엇하겠습니까아.”

귀신도 이렇게는 안 생겼으리라는 생각이 잠깐 스치고 여자 입에서 나는 냄새로 얼굴을 마주할 수가 없었습니다.

할망, 목사님한테 하고 싶은 말 있으면 해애.”

성도는 고개를 승우에게 돌렸습니다.

목사님, 이 할망이 보기에는 잘 보는 눈 같지만 아무것도 못 봅니다.”

눈이?” 

다 죽은 것 같은 몸에서 오직 살아 있는 것은 눈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것마저 눈 뜬 장님이라니!

아무것도 안 보이십니까?”

예에. 저는 송장입니다.”

승우는 무슨 말을 해야 할는지 잠시 말이 막혔습니다.

16. 금반지

 

승우는 안내해 온 성도에게 물었습니다.

이 할머니와 성도님은 어떤 사이십니까?”

아무 관계도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아셨지요?”

작년 가을이었습니다. 교회에 갔다가 오는데 이 할망이 길바닥에 누워 있지 않겠어요.”

그래서요?” 

 

그냥 지나가려고 몇 걸음 걸어가다가 갑자기 착한 이웃 바리새인이 생각났습니다. 목사님께서 설교하실 때 착한 사마라이인이 진정한 이웃이라고 하셨잖습니까.”

승우는 충격을 느꼈습니다. 눈은 사팔뜨기에 입은 약간 비뚤어졌어도 마음은 얼마나 반듯한 인물인가 놀랐습니다.

그래서요?” 

 

제가 할망을 모시고 이 집으로 왔지요. 이 집은 전에 살던 사람이 죽어 나간 뒤 줄곧 비어 있었거든요. 우리 집으로 갈까 생각했는데 우리 집도 모실만한 방이 없어서요.”

그래서 작년부터 성도님이 돌보셨군요?”

그렇습니다. 이 할망은 어디서 왔는지 주소도 모르고 이름도 모릅니다. 나이도 모르고요. 게다가 다리마저 쓰지 못합니다. 누가 여기다 버리고 간 것 같아요. 할망이 그런 것에 대하여는 입을 열지 않으니까 알 수가 없습니다.”

성도는 묻지 않는 말을 했습니다.

 

이름도 주소도 몰라서 동사무소에서 주는 영세민 구호미도 타지 못해요.”

그럼 어떻게 사셨지요?”

제가 우리 집에서 밥과 국을 해다 드렸습니다.”

이때 갑자기 심한 악취가 풍겼습니다.

목사님 잠깐만 나가셨다가 오세요. 할망이 똥을 쌌어요. 하루에 한 번씩 이 시간이면 꼭 부드득 합니다.”

 

성도는 신문지를 펴들고 노인의 이불을 들쳤습니다. 대변 냄새가 심하게 터졌습니다.

목사님 잠깐이면 됩니다. 나갔다 오세요.”

승우는 심한 갈등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악취를 이기지 못하여 밖으로 나왔습니다.

잠시 후 성도는 신문지를 둘둘 싸들고 나와 옆으로 흐르는 개천 물에다 집어던졌습니다. 그리고 잠시 문을 열어 공기를 바꾼 후 불렀습니다.

목사님 들어오세요.”

승우는 내키지 않았으나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생각했습니다.

강단에서 사랑을 외치는 내가 아닌가. 내가 누군가? , 나는 누구인가?’

일 년이나 이렇게 모셨습니까?”

 

. 그런데 무엇보다 이럴 때가 가장 힘들었습니다.”

그러셨겠습니다.” 

이 할망은요 정신은 말짱합니다. 가끔 마음에 내키면 어렸을 적 이야기도 들려주기는 하면서 고향이 어딘지 이름이 무엇인지 가족이 있는지 없는지는 가르쳐주지 않습니다.”

노인은 보이지 않는 눈을 감았습니다.

할머니, 이름이 어떻게 되십니까?”

노인은 고개를 저었습니다. 주소와 가족에 관해 물었으나 허사였습니다.

 

이때 성도가 몇 마디 아는 대로 말해 주었습니다.

이 할망은요 아주 부잣집 딸이었대요. 그런데 전쟁이 나서 산골로 피난을 갔다가 거기서 아주 멋진 총각을 만나서 사랑을 했답니다. 휴전이 되자 그 총각을 부모님이 서울로 데리고 와서 자기 집 인쇄공장에서 일을 시키다가 두 사람이 사랑하는 것을 안 아버지가 그 총각을 내보냈답니다. 그리고 자기는 아주 부잣집으로 시집을 갔지만 남편이 못된 사람이라 집을 나와 방황하면서 옛날 사랑했던 총각을 찾아 헤매다가 결국 거지가 되고 말았답니다. 저 반지 보이시지요? 저 반지가 바로 그 총각과 사랑의 정표로 끼고 있던 반지랍니다. 저 할망은 옛날 애인을 생각할 때는 얼굴이 밝아지고 말도 아주 힘 있게 합니다. 그렇게 사랑했는데 부모님 반대로 이루지 못한 가슴에 못이 박혔답니다.”

 

할망이 금반지가 반짝 빛나는 손을 저으며 막았습니다.

너 더 이상 입 열지 마. 그건 내 비밀이고 꿈이야. 괜한 소리 말라고.”

알았어, 할망. 그렇지만 내가 거짓말 하고 있는 것은 아니잖아?”

청년 성도는 그래도 한 마디는 더 했습니다.

저 할망 보기에는 백 살 노인 같지만 실제 나이는 오십이 조금 넘었습니다요.”

승우는 더 이상 말을 듣고 싶지 않았습니다.

 

전쟁에 피난 와서 알게 되고 그 덕으로 서울로 오게 된 내가 아닌가. 저 반지는……

17 빈민촌

승우는 잊었던 추억을 떠올리며 아득한 옛일을 회상하고 있는데 성도가 자기 소리를 했습니다.

목사님, 이 할망 올 겨울까지 그냥 여기다 두면 이젠 얼어 죽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을 모시고 왔습니다. 교회에서 도와드릴 수 없습니까?”

승우는 멈칫했습니다.

 

도와주어야지 저 불쌍한 사람을 버려둘 수는 없어, 그러나 교회에서? 내가 비록 목사이긴 해도 내 맘대로 할 수는 없다. 당회에 안건을 올려 동의를 받아야 한다. 그러나 입으로는 주여주여 용서하고 사랑합니다 하고 입이 닳도록 말하면서도 행동으로는 인색한 것이 우리가 아닌가. 나만해도 저 젊은 성도만 못한 것이다. 우리 집에는 햇볕 드는 빈방도 있고 먹을 것도 남아돈다. 그러나 그것마저 제공할 용기가 나지 않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까?’

 

승우는 마음에 내캐지 않지만 억지로 사랑이 넘치는 얼굴로 말했습니다.

성도님의 말씀을 고려해 보겠습니다.”

꼭 좀 도와주세요. 목사님께서 말씀만 하시면 잘 되지 않겠습니까?”

알겠습니다.” 

승우는 할망을 들여다보다가 덮개 밖으로 삐져나온 깡마른 손을 발견했습니다.

가느다랗고 앙상한 뼈가 막대기같이 처져 있었는데 그 손가락에 어울리지 않게 가느다란 금반지가 끼어 있었습니다. 금반지는 변색하지 않고 반짝거렸습니다.

저 금반지……!

 

승우는 또 금반지를 보며 생각에 잠겼습니다.

목사님 왜 그렇게 가만히 계셔요?”

, .”

승우 잠깐 꿈을 꾼 듯 옛 생각을 하다가 성도의 말에 현실로 돌아왔습니다. 송장 같은 손가락에 감겨 반짝거리는 금반지 빛이 가슴에 박혔습니다.

목사님, 이 할망 도와 줄 수 없을까요?”

생각해 보지요.”

세상 사람들은 참 인정이 없어요. 어려운 사람을 돌보아주어야 한다고 하면서도 남이 하기를 바랄 뿐 자기는 하려고 하지 않아요.”

승우는 그의 말에 더 할 말이 없었습니다. 갑자기 지금까지 심방을 하지 않아서 이 성도가 어디서 어떻게 사는 사람인지도 몰랐습니다.

 

성도님은 어디 사신다고 하셨지요?”

저는 이 동네에 살고 있습니다.”

그래요? 오늘은 성도님 댁도 심방하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아닙니다. 목사님 같으신 분은 오실 곳이 못 됩니다.”

성도는 정색을 하면서 사양했습니다. 그것으로 보아 얼마나 살림이 어려울까를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왜 그런 말씀을 하시지요?”

아닙니다. 저는 지금까지 아무도 저희 집에 오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이 오신다면 말도 안 됩니다.”

 

그렇지 않아요. 그간 너무 바쁘다 보니 한 번도 심방을 못했어요.”

아닙니다. 목사님은 오실 곳이 절대 못 됩니다.”

승우는 그의 사양하는 것을 물리치고 심방하겠다고 못을 박았습니다.

그러자 청년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정히 그러시다면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흉은 보시지 마세요. 목사님 같은 분들은 훌륭한 장로님이나 집사님 댁에나 심방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저 같은 사람이 사는 집도 오시겠다니 고맙습니다.”

승우는 잠시 자기반성을 했습니다.

 

이 얼마나 마음 아픈 말인가. 목사가 되어 그 동안 어떤 일을 했던가.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먼저 남을 대접하라는 성경말씀을 얼마나 많이 가르쳤던가. 나 스스로 대접 받기는 좋아하면서 남을 대접한 것이 얼마나 되는가? 심방한 것도 그렇다. 가난한 이웃을 찾아다닌 것이 아니라 부자만 찾아다니며 융숭한 대접만 받지 않았던가. 언제나 부자에게 가서 복을 빌어주고 가난하고 병들어 누운 성도는 돌아보지 않았던 내가 아닌가. 내 마음 바닥이 문제다. 선한 말은 많이 하지만 가슴 밑바닥엔 무엇이 있는가. 가난하고 병들어 누운 답답한 환자가 있는 집은 가고 싶지 않다는 거부감이 틀어잡고 있지 않았던가.’

 

승우는 누더기 같은 움막집을 나오며 누워 있는 노인의 얼굴에서 눈을 돌렸습니다. 청년 성도는 노파를 향해 내일 또 오겠다고 큰소리로 말했습니다.

성도는 약간 모로 걷는 습관이 있었고 입도 비뚤어지고. 모두가 한쪽으로 비틀린 몸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의 신앙은 깊어 보였습니다.

청년이 같은 동네라고 해서 바로 이웃인 줄 알았더니 두 정거장이나 멀리 떨어져 있었습니다.

철길을 따라 한참 가니 언덕에 판잣집들이 굴껍데기처럼 다닥다닥 붙어 있었습니다.

 

그가 자기 집이라고 가리키는 집은 대문도 없고 마당도 없었습니다.

판잣집을 줄달아 지어 놓고 아파트 복도의 문이 있는 것처럼 판자문이 줄줄이 붙어 있었습니다. 판자문을 열고 들어가니 거기가 부엌이고 방이었습니다.

그를 따라 컴컴한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목사님, 이래서 못 오시게 한 거예요. 우리 집은 하나님도 안 오실 거예요. 그래서 제가 하나님을 찾아다니지요.”

성도는 그렇게 말하고 히히하고 웃었다.

 

이 얼마나 진솔한 고백인가.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을 찾아다닌다는 그의 믿음이 진실한 믿음이 아닐까.

목사님, 저는 이래도 행복합니다. 동회에서 쌀과 돈을 주어서 사는 데는 지장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할망은 그것도 안 되는 걸요.”

가족은 어떻게 되십니까?”

아내와 아들이 있습니다.”

다들 어디 갔습니까?”

아내는 식당에 나가 허드렛일을 하고요, 아들은 교회에 갔습니다.“

우리 교회에 나옵니까?”

아니지요. 바로 옆에 있는 교회로 갑니다. 거기 목사님은 주일마다 예배를 마치면 학생들을 데리고 봉사를 갑니다. 우리보다 더 어려운 사람들을 도우러 가지요

승우는 또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 보다 더 가난한 곳이 더 있다니! 나는 왜 모르고 있었을까. 모르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외면하고 살았던 것이 진심이 아닌가.’

바로 이때 옆집에서 부부싸움이 났습니다. 언성이 높아지더니 우당탕 치고받는데 여자 넘어지는 소리와 함께 이쪽집 벽이 쿵하고 울렸습니다. 판자로 칸을 막고 사는 이웃들입니다. 어자가 넘어지는 소리가 나더니 이내 조용해졌습니다.

가만히 들으니 그들이 하는 소리도 들려왔습니다. 술에 취한 부부가 욕을 퍼부으며 서로 죽으라고 저주합니다.

목사님, 놀라셨지요? 이 동네는 원래 그래요. 먹고 할 일 없으면 싸우는 게 일이에요.”

저러다가 다치면 어쩌지요?”

다치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지요. 치고받으면 안 다칠 수 있나요. 서로 손해지요. 그래도 싸워요. 저는요 이렇게 살아도 부부 싸움은 하지 않는답니다. 제 아내는 제가 하는 말은 절대 순종하거든요.”

성도님은 어떻게 이웃 교회를 두고 우리 교회처럼 먼 곳으로 나오시지요?”

 

이유를 말하자면 창피하지요. 더군다나 목사님께 말할 수는 없습니다.”

이해해 드릴 테니 말씀해 보시지요.”

처음에는 동네 교회를 갔지요. 몇 년 다니다 보니 사람들 얼굴도 알게 되고 인사도 하게 되었는데요 주보에 헌금하는 사람 명단이 나오지 않아요? 거기에 제 이름을 올릴 수가 없었어요. 남들은 십일조도 몇 만원씩 내는데 저는 낼 수가 없었지요.”

그랬군요.” 

그래서 아무도 알아보는 사람이 없는 교회를 찾아간 것이 목사님 교회였습니다. 지금도 십일조나 감사헌금은 못해도 주일 헌금만은 정성껏 드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에 나가면 아무하고도 인사를 하지 않습니다. 얼굴이 알려지는 것이 싫어서입니다.”

 

승우는 그 진심을 알고 그를 잡고 하나님께 축복해 주실 것을 간구하는 기도를 드리고 집에서 나섰습니다.

자기도 그렇게 어려우면서 더 어려운 사람을 돕는 그 마음이 그리스도의 마음이 아닌가.

 

* 여기 나오는 배경과 사건들은 1950년대부터 1980년대의 한국의 실상으로 오늘날과는 많이 다르지만 그런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지엔피76불의 한국이 2만불의 한국으로 성장한 현재는 한국 역사를 새로 만들어 놓기도 했지만 세계적으로도 기적을 이룬 나라라는 호칭을 받기에 부담이 없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18 가슴에 묻은 사랑

 

승우는 성도가 말하는 할망 생각에 혼돈스러웠습니다.

나는 무엇인가? 저 가난한 성도보다 무엇이 낫단 말인가. 거룩은 꾸며도 속사람의 오만과 욕심은 무엇으로도 가릴 수 없는 것이 아닌가.’

이런 생각이 마음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다음 날 사무실에서 심방계획을 하고 있는데 그 성도가 노크를 하고 왔습니다.

안녕하세요 목사님?”

, 어서 와요. 무슨 일로 이렇게 나오셨나요?”

목사님 저는요, 어저께 목사님과 헤어진 뒤에 많은 반성을 했습니다.”

무슨 반성하실 일이 있었나요?”

괜히 우리 동네 교회 흉을 본 것 같아서요.”

그게 무슨 흉입니까.”

그렇게 생각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목사님.”

또 다른 용건은 없구요?”

승우는 할망에 관해 무슨 말이 나오려나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의외로 종이 한 장을 내밀었습니다.

목사님, 저는 그 교회에 나가면서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생각을 했으니 회개해야지요?”

그게 뭡니까?”

그가 내민 종이에는 이런 글이 씌어 있었습니다.

 

하나님 만나러 교회에 가서

하나님은 못 만나고 사람만 보고 왔네

사람이 무서워서 교회를 못 가겠네

 

사람은 떠들어대는데 하나님은 입을 다무시고

사람이 조용해야 하나님 말씀이 들릴 것 같은데

사람들 목소리에 하나님 목소리가 가리네

 

내 목소리가 하나님보다 큰 건 아닐까

 

청년 성도는 머리를 긁적이며 기울어진 턱을 올리며 말했습니다.

목사님 제가 문제지요?”

……

승우가 대답을 하지 않자 청년이 딴 소리를 했습니다.

목사님, 할망 도와주시는 방법이 없을까요?”

생각 중입니다.”

목사님, 그 할망 손가락에 끼어 있는 반지 보셨지요? 다 죽어가면서도 그 반지는 날마다 손으로 문질러서 반짝거립니다. 그 반지를 문지르면서 뭐라고 하는지 아세요?”

……

 그 할망 말은, 그 반지가 아니었으면 벌써 죽었을 거랍니다. 옛날에 사랑했던 사람을 이제는 만날 수도 없고 만나도 볼 수 없으니 만나나마나지만 그래도 반지를 만지면 행복하답니다. 히히히.”

……

목사님, 제가 쓴 글을 하나님이 보셔도 괜찮을까요?”

괜찮아요.”

그럼 됐습니다. 이 종이는 하나님 대신 목사님께 드리겠습니다.”

청년은 그 종이를 두고 일어섰습니다.

청년이 가고 난 다음 승우는 생각에 잠겼습니다. 그 할망의 이름은 윤민자……

그 후 승우는 교회 장로님들과 제직들에게 청년의 이야기와 불쌍한 사람을 돕자는 제안을 하여 동의를 받고 청년과 할망 윤민자를 교회 사찰집사가 기거하는 곳에 방 하나를 비우고 그리로 들였습니다.

그리고 청년은 사찰집사를 도와 교회 허드렛일을 하게 하고 할망이 된 윤민자를 돌보게 하였습니다.

 그렇게 하니 마음이 놓이기는 했지만 아름다웠던 옛날 추억과 가슴속에 숨은 아픔은 지워낼 수가 없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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