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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나의 유럽여행기 24/이준열사기념관을 찾아(1)

웃는곰 2010. 8. 17. 17:17

 

 

여기까지 와서 이준 열사 기념관을 그냥 지나칠 수는 없었다.

딸 부부와 아이들은 이미 다녀간 곳이라 지나가고 말았으면 하는 눈치였으나 나에게는 특별한 관심이 있는 곳이라 가서 보아야 한다고 했다.

아이들이 또 가는 것을 피하고 싶어했던 이유는 가 보고 알았다.

시내 길도 복잡하지만 거기 관장님의 집요한 애국심의 정열을 감당하지 못해서였다. 우리가 가자 송창주 관장님이 아주 반갑게 맞았다.

송관장님은 한인교회 권사님이고 바깥 어른은 같은 교회 장로님이시다. 부부가 열사 기념관을 관리하며 30년이 넘게 봉사하고 한인교회도 창립 멤버로 크게 활동하는 분들이었다.

 송관장님이 기념관 방문객에게 얼마나 열심히 이준열사와 헤이그 사건 당시의 역사를 안내하고 설명하시는지 그 수고에 고개가 숙여졌다. 그린데 두 시간이나 되는 동안 의자도 없는 방에 서서 듣자니 다리가 아프고 저리고 고역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강의하시는 관장님은 조금도 피로한 기색 없이 70이 넘으신 분이 차근차근 애국하는 마음으로 아이들에게 역사와 민족정신에 대하여 얼마나 열정적으로 말씀하시는지 감동했다. 


 

 

태극기가 걸려 있는 이준 열사 기념관 

 

네덜란드(화란) 헤이그에 있는 이준 열사기념관을 방문하고 느낀 바가 많았다.

헤이그는 네덜란드의 행정 수도이고 정식 수도는 암스테르담이다. ‘헤이그(The Hague)’는 영어식 이름. 네덜란드어로는 보통 덴하흐(Den Haag)라고 하며, 정식 명칭은 ‘백작가의 사유지’라는 뜻의 스흐라벤하허('s-Gravenhage)이다.

위치는 네덜란드 서쪽 북해연안. 자위트홀란트주의 주도이기도 하다.

1868년 헤이그는 네덜란드의 백작 플로리스 4세가 사냥하는 곳을 건설하기 위해 지금의 Hofvijver 연못 쪽에 땅을 구입했을 때인 1230년경 시작했다. 1248년 네덜란드의 백작이자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될 것으로 예상한 윌리엄 2세가 사냥터를 궁전으로 넓힌 곳이다. 그러나 그는 궁전이 완성되기도 전인 1256년 죽고 말았다.

그리하여 미진했던 여러 부분을 그 아들 플로리스 5세가 마무리했다. 그 중 ‘기사의 홀’을 뜻하는 Ridderzaal은 가장 두드러진 건물로 그 건물은 지금도 군주가 행하는 연례 연설 등의 정치적 이벤트에 사용되고 있다.

 

 

기념관 간판

 

 

 

밑에서 본 기념과 건물

 

 

 

 

이준 열사 동상

 

1907년 헤이그에서 열린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대한제국 고종황제가 이준, 이상설, 이위종 등 특사를 파견해 을사조약의 부당함을 알리게 한 헤이그 특사사건은 한국인에게 잊을 수 없는 역사적 사건이다.

나는 열사의 기념관을 찾아보고 일제에 의해 우리가 얼마나 큰 피해를 입어 왔는지를 더욱 절실히 느꼈다.

 

 

 

이 먼 곳까지 와서 돌아가지 못하고 순직한 열사를 생각하며 방명록에 이름을 올렸다 

 

 

 

동상 앞에서 기념 사진을

 

우리 교과서에서 고쳐야 할 곳이 두 군데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싶다. 하나는 이준 열사가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장에 못 들어가게 되자 의분을 참지 못해 할복자살했다는 기록이 사망 이유가 확실하지 않다는 것으로 정정된 것과 한일 을사호보조약이라는 문구에 문제가 있다는 점이다.

열사 기념과 기록대로 한일을사보호조약이 아니라 을사늑약이라고 하는 말이 맞다. 얼마 전에 한일 학자 백 명이 공동으로 발표한 한일합방은 일제의 부당한 압력에 의한 것이었다는 성명이 뒷받침해 준다. 이준 열사기념관을 관리하는 분들은 이미 그것을 알고 을사늑조라는 문구를 쓰고 있었다.

일본이 한국을 늑탈하여 강제 조약문에 서명하게 한 것은 엄연한  늑탈, 늑약이다. 고종황제의 명을 받고 파송된 이준, 이상설, 이위종 삼인은 일본의 압제를 받으며 한국을 떠나 먼 길을 달려 헤이그에 이르게 된다.

 

 

 

이준 열사 소개글

 

 

 

우리가 어렸을 때 배운 교과서는 이준 열사가 할복자살했다고 되어 있었다. 그 기록은 전적으로 날조된 것이었다.

당시 국제 정세를 비추어 볼 때나 이준 열사 개인으로 볼 때 이준 열사가 자살할 분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는 일찍이 상동감리교회 청년부에서 봉사까지 하였고 후에 종로 4가에 있는 연동교회로 교적을 옮긴 독실한 기독교 신자다. 신심이 깊은 신자는 자살이 죄라는 것을 안다. 그러므로 자살했을 리가 없다.

 

 

 

 

 

 

 

이준 열사가 의문의 죽음을 맞은 침상과 의복

 

 

 

 

 

 

 

 

 

 

 

함경남도 북청의 생가 현재 모습

 

 

 

서양 에티켓의 안내 지도자 외손자 성훈(우) 성호(좌)

자기들 사진 올리는 것 아주 질색인데 나는 아이들이 사랑스러우니 어쩌겠나???

 

 

이 날 우리의 뒤를 이어 광주에서 온 한 젊은 가족을 만났다. 딸 둘을 데리고 유럽여행중 이준열사 기념관을 찾았단다. 인상이 좋았는데 학자풍이라 알고 싶은 게 많았으나  외손자들이 할아버지 프라이버시 어쩌고 하여 입을 봉하고 말았다. 

좌편 젊은 부부 / 우에서 네번째 관장님 

젊은 사람들이 역사의 현장을 찾았다는 게 내 보기엔 여간 고마운 일이 아니었다.

이렇게 만났으니 사진 한장 남기자 했더니 관장님께서도 나도 함께 합시다 하고 오셔서 더욱 기뻤다. 

 

 

출처 : 문화예술인신우회
글쓴이 : 웃는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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