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29일 유럽의 작은 입헌군주제 대공 도시국가 룩셈브르크를 찾았다.
세계에서 가장 잘 사는 나라 (개인소득 69,800달러) / 대공(앙리) 총리(융커) / 언어는 룩셈브르크어와 독일어 프랑스어 / 1867넌 네덜란드로부터 해방 독립 / 인구 4700만 / 국토면적 25,600평방킬로미터(세계 167위) / 우리 남북한 합친 9분의 1 정도. 수도 : 룩셈브르크
해발 300미터 고지대 나라로 벨기에 수도 브뤼셀에서 228키로미터 떨어진 나라다.
차로 2시간을 달려 가면 도로변에 유럽 연합 기장과 룩셈브르크라는 작은 표지판이 달랑 서 있다.
나라와 나라 사이를 지난다는 느낌이 전혀 없었다. 줄을 그어 놓은 것도 아니고 철조망을 친 것도 아니다. 풀과 풀이 엉켜 있고 꽃이 서로 얼굴을 비비고 춤추는 땅에 이 나라와 저 나라가 갈려 있는 것이다.
분단국 한국의 무시무시한 GMZ 경게를 생각하면 기가 차서 말을 못하겠다.
어디서 어디로 국경을 잡고 나라와 나라가 갈리고 세금을 받고 바칠까.
벨기에는 숲이 울창하고 이 나라는 고원에 있는 무한대의 넓은 벌판 나라이다. 차길이 들판을 이리저리 헤집고 다닐 뿐 나무도 없다. 어쩌다 마을이 있을 뿐 눈길이 닿는 모든 것이 밀밭과 누렇게 익은 유채밭, 그리고 목장이다.
상상을 못할 만큼 넓은 들판은 내가 가장 넓다고 생각하는 호남 평야나 평택 평야로는 비교할 수가 없다. 호남평야는 그 나라 평야의 한 부분도 못 된다. 구름이 동쪽 끝에서 일어나 둥둥 떠서 머리 위를 지나 서편 지퍙선으로 내랴간다.
이 넓은 땅에서 나는 농산물만 해도 한 사람이 1퍼센트오도 못 먹을 것 같다. 그런데다 땅속에는 철광석이 깔렸다 하니 세상에서 가장 부자 나라가 될 수밖에 없다. 농작물이 무한대로 풍부한 나라이니 부럽기만 하다. 집들도 모두 아름답게 가꾸어 놓아 아이들 인형놀이 하는 동네 같다
넓은 들판을 휘돌아 한 시간쯤 달리자 어느새 차가 높은 산 정상에 올라 있었다. 내려다보니 멀리 웅장한 고성이 보인다. 길을 몇 굽이 돌아 내려가자 비안덴(Vianden) 성이 나왔다.
아 성은 이 나라에서 유일하게 높은 산 정싱에 지어졌고 성 아래 골짜기에는 노틀담의 곱추. 레미제라불로 우리에게 알려진 빅토르 위고가 정적을 피하여 와 살았다는 그림 같은 마을이 있었다.
비안덴(Vianden) 성 아래서 바라본 위용
성을 등지고 시원한 바람을 쐬면서
전쟁 무기 창(성 안에 옛날 쓰던 것들을 전시해 놓았다 )
전쟁에 쓰여졌던 총들이 유리 진열장 안에 있다.
옛날 어느 화가가 성을 그려 놓은 성벽에 그려놓은 벽화
성벽에 그려 있는 그림 / 누구를 왜 그렸는지는 모른 채 왔다.
비안덴(Vianden) 성 창문(옛날에는 적을 향해 총울 쏘던 문)으로 내다본 마을. 저 아래 다리 있는 곳이 위고가 살았다는 곳
굉장히 높은 산 위에 지어 있는 비안덴(Vianden)성 건물 안에 우물이 있다. 지름이 2미터는 될 만큼 큰 돌우물
지금도 들여다보니 물이 고여 있었다. 산 위에 샘이 있다니 신기하기도 하다
마을 어느 집 출입문 앞에 무궁화꽃이 피어 나를 반겼다. 또 조국을 만난 반가음으로 찰칵
빅토르 위고가 프랑스 루이 3세를 피하여 멀물었던 마을 / 관광객을 태우고 다니는 두 칸짜리 버스.
빅토르 위고의 흉상과 그의 일생
비안덴 우르 강가에 세워진 빅토르 위고 흉상, 그가 머물렀던 인연으로 그 이름마저 빅토르 위고가 되어버린 호텔.
그는 이 아름다운 마을과 비안덴 성의 위용에 매료되어 이 성의 복원에 앞장섰다고 전해진다.
1802년 2월 26일 프랑스의 브장송에서 태어남. 아버지는 군인. 열 살 때 코르디에 기숙학교에 입학. 독서와 시 창작에 매료되어 그의 일기에 “나는 샤토브리앙이 아니면 아무것도 되지 않겠다”라고 기록. 불과 열한 살에 프랑스의 문호가 될 것을 스스로 다짐.
스무 살이 되던 1822년, 그의 첫 시집인 <<송가>>를 발간. 스물세 살에 프랑스 왕실로부터 작가로서의 공로를 인정받아 레지옹 도뇌르 기사 훈장을 수여받음, 이후 여러 잡지에 문학평론을 싣기도 하고 고전주의와 낭만주의 간의 문학 논쟁에 참여하기도 하여 낭만주의 문학 이념의 초석을 다짐. 2년 뒤 희곡 <크롬웰>의 서문 발표를 통해 고전주의 문학에 정면으로 대항하고 나서면서 낭만주의 작가들의 수령으로 우뚝 섬.
20세에 처녀시집 《오드와 잡영집(Odes et Poésies Diverses, 1822)》을 간행하고 그 해에 결혼. 이후 정력적으로 작품을 계속 발표. 시집 《오드와 발라드집(Odes et Ballades, 1826)》, 《동방시집(Les Orientales, 1829)》, 소설 《아이슬란드의 한(Han d'Islande, 1823)》, 《뷔그자르갈(Bug-Jargal, 1826)》, 《사형수 최후의 날(Le Dernier jour d'un condamné, 1829)》 등. 초기의 작품에는 왕당파적·가톨릭적인 색채가 농후하나 그 후 점차 자유주의 경향이 현저. 젊어서 야망에 불탄 그는 아카데미 프랑세즈를 지배하고 있던 의고전파와 대립하여 당시의 문단에 발흥하고 있던 낭만주의 운동에 참가하여 자택에 같은 경향의 젊은 작가와 화가를 모아 차차로 낭만파의 지도자가 되어감. 희곡 《크롬웰(Cromwell, 1827)》에 붙인 서문은 고전주의 이론에 대항한 낭만주의 연극이론의 선언서로서 유명하다. 7월 혁명의 해인 1830년에는 위고의 희극 《에르나니(Hernani, 1830)》의 초연에 즈음하여 낭만파와 고전파 간에 문학사상 유명한 '에르나니 논쟁'이 일어남. 이 논쟁에서 낭만주의는 고전주의를 압도하여 이후 1850년경까지 문단의 주류를 점유. 그 후에도 위고의 왕성한 활동은 계속되어 시집 《가을낙엽(Les Feuilles d'automne, 1831)》, 《황혼의 노래(Les Chants du crépuscule, 1835》, 《마음의 소리(Les Voix intérieures, 1837)》, 《빛과 그늘(Les Rayons et les ombres, 1840)》, 희곡으로 《마리용 들로름(Marion Delorme, 1831)》, 《루이 블라스(Ruy Blas, 1838)》 등이 이어 발표. 소설 《노트르담의 꼽추(Notre-Dame de Paris, 1831)》는 위고에게 소설가로서의 지위를 굳혀 줌. 1841년에는 대망의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이 되고 그 뒤 10여 년간 작품을 발표하지 않고 정치활동에 전념. 그 원인으로는 희곡 《성주(Les Burgraves, 1843)》가 낭만주의 풍조에 싫증난 관객에게 받아들여지지 않고 실패로 끝난 것과 가장 사랑하는 딸이 사고로 죽은 것을 들 수 있다. 그가 애지중지하던 열아홉 살의 맏딸 레오폴딘은 결혼한 지 몇 달 되지 않아 센 강 하류 빌키에에서 사위와 함께 보트 전복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이 불행한 사고로 그는 6개월이나 펜을 들지 못할 정도로 깊은 좌절과 혼란의 시기를 보내야 했다.
1848년 2월 혁명을 비롯한 주위 정세에 자극을 받아 위고는 인도주의적 경향을 더 한층 굳힘. 1851년에는 루이 나폴레옹(나폴레옹 3세)의 쿠데타에 반대하여 국외로 추방을 당하였다.
그는 벨기에를 거쳐 영국 해협의 저지 섬과 건지 섬을 전전, 거의 19년에 걸친 망명생활을 보냈다. 이 망명생활은 결실이 풍부한 시기가 되었다. 왜냐하면 잡다한 일에서 해방되어 창작에 전념한 때문이다. 시집 《징벌(Les Châtiments, 1853)》, 《명상시집(Les Contemplations, 1856)》, 《세기의 전설(La Légende des siècles, 1859)》(제1집), 소설 《레 미제라블(Les Misérables, 1862)》, 《바다의 노동자(Les Travailleurs de la Mer, 1866)》 등 위고에 있어서 걸작의 대부분이 이 시기에 나왔다. 1870년 보불 전쟁에 의한 나폴레옹 3세의 몰락과 함께 위고는 공화주의 옹호자로서 민중의 열렬한 환호 속에 파리로 돌아왔다. 그리하여 국민적 시인으로서 영예에 싸인 비교적 평온한 만년을 보낸다. 이 시기에 발표한 작품은 《두려운 해(L'Année terrible, 1872)》, 《세기의 전설》(제2집, 제3집), 소설 《93년(Quatrevingt-treize, 1874)》 등이 있다. 그의 죽음은 국장의 예를 받았고 또한 유작도 수없이 간행되었다.
빅토르 위고가 가장 힘들었던 시절 피신하여 살았다는 집 앞에 흉상이 세워져 있다
위고의 83년간에 걸친 일생은 19세기의 대부분을 차지하여 사회의 변천과 함께 그의 사상과 작품은 보수주의에서 자유주의 또한 공화주의로 크게 변화하고 있다. 그러나 일관해 흐르는 것은 인류가 한없이 진보할 낙관적 신뢰와 이상주의적 사회 건설의 불 같은 정열이다. 위고의 시는 시대의 낭랑한 메아리에 불과하다는 비판도 이렇게 너무나 낙관적인 이상주의적 태도에 대한 것이다. 이와 같이 정열적인 웅장함은 감상에 빠지기 쉬운 낭만파 시인에게는 볼 수 없는 것이며, 그것이야말로 그의 비길 데 없는 천성과 함께 위고를 낭만파 지도자로 만들었고 19세기에 있어서 가장 위대한 시인의 한 사람이 되게 하였다.
(내가 사진을 찍으려는 순간 비가 내렸다. 그리고 주차가 어려워 이 사진을 차에서 찍기 위해 동네 3바퀴를 돌았다. 사진이 선명하지 않아 안타깝지만 더 시도해보지 못하고 말았다.)
빅톨위고의 사진
넓은 광야 가장 높은 삼거리에 이 나무 한 그루가 유일한 어른이다.
그 아래를 그냥 지나기엔 미련이 남아 차를 세우고 한장 찍어 두었다
룩셈브르크 광야의 가장 높은 지대에서 내려다 본 들판 / 끝이 안 보이는 벌판이 모두 옷수수와 보리밬과 목장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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